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 · 고생물 · 22

마이오세의 유인원: 한 번의 방산, 그리고 한 번의 가지치기

구세계에 퍼졌던 유인원. 사라진 것은 계통일까, 기록일까, 둘 다일까?

Han Qin · 읽는 데 약 35분 · 공개일

1 스페인에서 윈난까지

지금으로부터 약 1,200만~900만 년 전, 오늘날의 지명을 따라 스페인에서 동쪽으로 윈난까지 걸어간다고 해 보자. 그 길목 곳곳에 유인원이 살았다. 바르셀로나 부근에도, 헝가리 북부에도,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 부근에도 있었다. 파키스탄 북부의 옛 물길을 따라 난 숲에도 있었고, 줄곧 동쪽으로 가 윈난에 이르러도 있었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프리카로 들어가면 케냐에도 있었다.

당시 유인원의 분포는 북쪽으로 독일 남부와 헝가리 북부까지 뻗어 있었다. 북위 약 48도, 지금의 뮌헨이나 빈과 비슷한 위도다.

오늘날의 지도는 다르다. 여기서는 인간 이외의 유인원에 초점을 맞춘다. 동남아시아의 긴팔원숭이, 보르네오와 수마트라의 오랑우탄, 적도 아프리카의 고릴라와 침팬지다. 주로 숲에 의존하지만 산지림이나 숲과 초원이 섞인 곳에도 살므로 모두 열대우림에 몰려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도 유인원이다. 다만 이 글은 인간 계통의 전개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마이오세의 대부분 기간 동안 구대륙에는 원숭이보다 유인원이 더 많았다. 지금은 정반대다. 원숭이의 종수가 유인원의 몇 배나 된다. 이는 특히 초기·중기 마이오세의 알려진 화석에 나타난 분류군의 풍부함이지, 당시 개체 수를 센 결과가 아니다.

1,000만 년 전 유럽은 지구에서 유인원 화석이 가장 빽빽하게 나오는 곳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는 야생 유인원이 단 한 마리도 없다. 이 글은 그 두 시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먼저 두 가지 말을 짚고 가자. 유인원과 원숭이는 어떻게 구별할까. 가장 간단한 기준은 꼬리다. 유인원에게는 꼬리가 없고 원숭이에게는 있다. 중국어에서도 긴팔원숭이의 이름에는 유인원을 뜻하는 ‘猿’이, 마카크원숭이의 이름에는 원숭이를 뜻하는 ‘猴’가 들어간다. 일상적으로 쓰는 이름이 이 경우에는 유인원과 원숭이를 정확히 가르고 있다.

하지만 꼬리가 화석으로 남는 일은 드물다. 실제 화석을 구별할 때는 이빨을 더 많이 쓴다. 유인원의 아래 어금니에는 다섯 개의 교두, 곧 씹는 면의 봉우리가 있고, 그 사이의 홈이 ‘Y’자로 갈라진다. 원숭이의 어금니에는 가로로 뻗은 능선이 두 줄 있다. 그래서 아래 어금니 하나만 찾아도 유인원인지 원숭이인지 가려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두 가로 능선은 구세계원숭이의 전형적인 어금니를 가리킨다. 이빨 하나로 모든 원숭이와 유인원을 틀림없이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속’이다. 사자와 호랑이와 표범은 서로 다른 세 종이지만 모두 같은 속에 속한다. 속은 종보다 한 단계 위에서 가까운 종 여럿을 묶는 단위다. 이 글에서 거듭 나올 ‘몇 속, 몇 종’은 바로 이 두 단위를 가리킨다.

시간의 눈금도 먼저 놓아 두자. 마이오세는 지질시대의 한 구간으로, 약 2,300만 년 전부터 약 530만 년 전까지 거의 1,800만 년에 걸쳐 있다. 보통 전기, 중기, 후기의 세 구간으로 나눈다.

마이오세가 시작될 무렵에는 공룡이 멸종한 지도 이미 4,300만 년이 지난 뒤였다. 1,800만 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마이오세가 끝나고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500여만 년이다. 마이오세 자체는 그 시간의 세 배가 넘는다.

마이오세에 유인원이 겪은 일을 우선 네 문장으로 스케치해 보자. 뒤의 절에서 하나씩 확대해 볼 것이다.

약 2,0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유인원이 있었다. 약 1,600만 년 전에는 유라시아로 들어갔다. 약 1,200만~1,000만 년 전에는 스페인에서 윈난까지 곳곳에 살았다. 그러다 약 1,000만 년 전부터 지역마다 차례로 분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약 600만 년 전이면 유라시아에서 유인원 화석이 나오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는데, 가장 늦게까지 남은 몇 곳은 윈난에 있었다. 여기서는 일부 마이오세 화석 계통을 따라간다. 유라시아의 모든 유인원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랑우탄과 긴팔원숭이의 이후 역사만 보아도 그렇게 읽을 수는 없다.

2023년, 확실한 마이오세 유인원을 하나하나 헤아린 연구가 있었다. 모두 35속 56종이었다. 사자와 호랑이와 표범을 다 합쳐도 한 속인데, 여기서는 서른다섯 속이다. 다른 것과 견주어 보자. 오늘날 전 세계의 고양잇과 동물은 집고양이부터 호랑이까지 모두 합쳐도 십여 속이다.

이 명단은 지금도 바뀌고 있다. 2023년 이후 독일과 튀르키예, 이집트에서 각각 새로운 속이 하나씩 이름을 얻었고, 어떤 속 하나는 통째로 명단 밖으로 옮겨졌다. 이 이름들이 어떻게 들어왔다가 어떻게 나갔는지는 5절에서 살펴본다.

왜 하필 이 시기를 따로 들여다볼까. 이 시리즈에서 ‘먼저 번성한 뒤 크게 줄어드는’ 과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14편의 페름기 말과 18편의 백악기 말에는 지질학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수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마이오세의 유인원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충돌도 없었고, 한 시기에 집중된 거대한 화산 분출도 없었다. 유인원의 분포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지역마다 차례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지금과 충분히 가까운 시기이고, 몇몇 지역의 기록은 충분히 촘촘하다. 한 지역씩 어떻게 분포가 오그라들었는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촘촘하다.

20편에서는 공룡 이후 포유류의 방산을 살피면서, ‘비어 버린 자리’가 뒤이어 채워졌는지 물었다. 마이오세 유인원은 그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훨씬 나중에 펼쳐진 작은 한 장이다. 다만 이 장에는 뒷부분이 더 있다. 방산 뒤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지치기가 한 차례 더 이어진다.

‘가지치기’는 원래 정원사가 쓰는 말이다. 나무에 가지가 무성히 자라고, 잘려 나간 가지들은 땅바닥에 떨어진다. 몇 해만 지나도 그것들이 원래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글에서 하려는 일은 땅에 떨어진 가지를 하나씩 다시 주워 모으는 것이다. 원래 어디에 붙어 있었고, 어떻게 잘려 나갔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 글은 시간을 따라간다. 맨 처음 나타난 무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떻게 널리 퍼졌는지, 가장 번성했을 때는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살았는지를 살핀다. 그런 다음 가지치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잘려 나간 것들은 어떤 메울 수 없는 빈자리를 남겼을까.

2 맨 처음의 무리

빅토리아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호수다. 그 동쪽, 케냐 쪽 물가에 섬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루싱가, 다른 하나는 음팡가노다.

숲에 사는 동물은 원래 화석이 되기 어렵다. 사체가 축축한 숲 바닥에 떨어지면 산성 기운이 있는 흙 속에서 뼈가 금세 썩어 버린다. 강물이나 호수의 진흙, 화산재 같은 것에 재빨리 묻혀야 한다. 루싱가는 마침 그런 곳이었다. 약 2,000만~1,700만 년 전, 근처 화산이 뿜어낸 물질과 호숫가 퇴적물이 수많은 뼈를 빠르게 덮어 보존했다.

덕분에 두 섬에는 엄청난 양의 초기 유인원 화석이 남았다. 두개골과 이빨은 물론 몸통과 팔다리뼈도 많았다. 얼마나 많을까. 2025년에도 그 속의 송곳니와 턱뼈, 두개골을 하나씩 다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다.

1940년대 말, 루싱가에서 거의 온전한 유인원 두개골 하나가 나왔다. 이빨 몇 개와 턱뼈 한 토막이 아니라 마이오세 유인원의 얼굴 전체를 사람이 처음으로 똑똑히 볼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이 화석들 가운데 가장 많은 무리는 에켐보다. 오랫동안 더 유명한 다른 속의 이름 아래 묶여 있었다. 그 옛 이름은 프로콘술이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로콘술은 거의 ‘마이오세 초기 유인원’의 대명사였다. 2015년, 속을 가르는 특징을 재검토한 연구에서 루싱가 자료의 대부분을 떼어 내 에켐보라는 새 속을 세웠다. 옛 이름이 가리키는 범위는 단번에 크게 좁아졌다.

에켐보에게는 꼬리가 없었다. 그 점은 오늘날의 유인원과 같다. 하지만 꼬리를 빼면 몸의 나머지 부분은 지금의 유인원과 아주 달랐다. 허리는 길고 유연했으며 가슴우리는 좁고 앞뒤로 깊었다. 어깨와 손목, 손에도 매달리기에 맞춘 특별한 변형이 없었다.

이 뼈들을 맞춰 놓으면 나뭇가지 위를 걷는 동물이 나온다. 네 팔다리를 모두 가지에 얹고, 손바닥을 나무껍질에 댄 채 한 발씩 앞으로 옮긴다. 몸통은 대체로 수평이다. 지금도 많은 원숭이가 이렇게 걷는다.

초기 유인원에게는 꼬리가 없었지만, 나무에 매달려 살지는 않았다. 꼬리가 없는 것과 나뭇가지 아래 매달려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이동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오늘날 ‘유인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바로 그 모습부터 떠올리기 때문이다. 긴 팔, 곧추선 몸, 나뭇가지 아래 매달린 자세. 하지만 이 특징들은 ‘꼬리가 없음’과 함께 등장하지 않았다. 뒤에서 보겠지만 저마다 따로 나타났고, 등장 순서와 조합도 유인원마다 달랐다.

여기서 가장 유용한 지표 하나가 허리의 길이다. 원숭이의 허리뼈는 보통 여섯이나 일곱 마디인데, 오늘날 대형 유인원은 서너 마디뿐이다. 허리가 짧으면 몸통이 단단히 잡혀, 몸을 세워 기어오르거나 매달리기 좋다. 허리가 길면 몸통을 굽혔다 펼 수 있다. 달릴 때 용수철처럼 휘었다 펴지므로 나뭇가지 위를 네 발로 달리기에 알맞다.

그러니 2,000만 년 전 루싱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무에 매달려 이리저리 건너다니는 유인원 무리를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굵은 가지 위를 빠르게 걷는 동물들이 보일 것이다. 멀리서는 원숭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꼬리가 하나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약 1,500만 년 전 케냐 북부의 나촐라에는 거의 온전한 골격 하나가 남았다. 다 자란 수컷이었고, 일본 조사대가 발굴했다. 이 유인원은 나중에 나콜라피테쿠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거의 온전한 골격이 얼마나 귀할까. 마이오세 유인원 삼십여 속 가운데 이런 골격을 맞출 수 있는 속은 손에 꼽는다.

나콜라피테쿠스의 허리뼈는 대략 여섯 마디였다. 허리가 길었고, 많은 관절이 여전히 나뭇가지 위를 네 발로 걷기에 알맞았다. 그런데 어깨와 팔꿈치, 손에는 움켜쥐는 힘과 앞다리의 움직임을 뚜렷하게 강화하는 변형이 있었다. 긴 허리에, 더 잘 붙잡는 두 손이 붙어 있었다.

나콜라피테쿠스는 만들다 만 동물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조합이었다. 지금 살아 있는 동물 가운데는 그 조합에 들어맞는 것이 없다. 오늘날의 동물만 참고한다면 누구도 이런 몸을 머릿속에서 설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나콜라피테쿠스보다 200만 년쯤 앞선 시기에도 케냐 북부에는 다른 유인원들이 있었다. 투르카나호 서쪽 기슭에서 나온 한 종류는 두개골이 꽤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종류는 머리와 얼굴 부분이 상당히 잘 남아 있고, 치아의 법랑질이 아주 두껍다. 법랑질이 얇은 초기 유인원들과는 먹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다.

마이오세 초기 아프리카에는 이런 유인원이 적어도 십여 속, 18~21종 있었다. 대부분 동아프리카에 살았고, 북쪽으로는 이집트에도 있었다. 우간다의 모로토에서는 약 2,000만 년 전의 허리뼈 하나가 나왔는데, 아주 이른 시기에 이미 ‘몸을 세웠다’는 신호로 읽히기도 했다. 같은 시대의 긴 허리를 가진 유인원보다는 몸을 세우는 유인원의 허리뼈를 더 닮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맨 처음의 유인원 무리에서 이미 한 차례 ‘몸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던 셈이다.

이것은 진정한 방산이었다. 수백만 년 사이에 같은 대륙에서 몸집도, 먹는 방식도, 몸의 구조도 다른 유인원들이 여럿 나타났다.

20편에서는 부채에 빗댄 적이 있다. 부챗살이 모인 밑동은 공통의 출발점이고, 살이 하나씩 펼쳐지며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 간다. 마이오세 초기 아프리카에서 유인원의 부채도 그렇게 펼쳐졌다. 그것도 아주 넓게.

그런데 이들은 거의 모두 아프리카에 있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난 것이다.

3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약 1,700만~1,500만 년 전, 지구는 마이오세 전체에서 가장 따뜻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지역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습했다. 따뜻하고 습하다는 것은 숲이 더 북쪽으로, 대륙 더 안쪽으로 자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유인원은 숲에 사는 동물이다.

그 무렵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는 지금의 아라비아반도와 튀르키예 일대에서 이어져 있었다. 아라비아반도가 놓인 지각 덩어리가 줄곧 북쪽으로 움직이다가, 그보다 얼마 전에 유라시아와 맞닿은 것이다. 원래 양쪽을 갈라놓고 있던 옛 바다는 이곳에서 끊겼다.

그렇게 육로가 하나 열렸다. 이 길을 건넌 것은 유인원만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포유류가 이 무렵 유라시아로 들어갔다. 유인원도 바로 이때 아프리카를 떠났다.

유라시아에 처음 들어온 무리의 화석은 중부 유럽과 튀르키예에서 나온다. 약 1,600만 년 전쯤의 것으로, 대부분 이빨과 턱뼈이며 그리포피테쿠스라는 유인원에 속한다. 아라비아반도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유인원이 하나 나왔다. 위턱과 이빨 몇 개뿐이지만, 나온 장소 자체가 사정을 말해 준다. 바로 이 통로 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수백만 년 동안 유인원은 유라시아 전역으로 상당히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약 1,600만~1,200만 년 전 사이에 중부 유럽, 튀르키예, 서유럽, 남아시아, 중국 서남부, 그리고 더 남쪽인 태국 북부에서 차례로 유인원의 기록이 나타난다.

일부 유인원이 유라시아로 갔다고 아프리카가 텅 빈 것은 아니었다. 약 1,500만~1,300만 년 전에도 케냐의 포트 터넌과 마보코 일대에는 법랑질이 아주 두꺼운 유인원이 여러 종류 있었고, 남쪽 나미비아에서도 한 종류가 나왔다. 마이오세 중기의 아프리카에는 여전히 유인원이 적지 않았다.

마이오세 전체를 합치면 유라시아의 유인원 속수는 아프리카에 뒤지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약 13~16속, 유럽에만 12~15속이 있었고, 여기에 서아시아와 남아시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더해진다. 일반적인 인상과는 사뭇 다르다. 유인원이라면 사람들은 으레 아프리카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마이오세 후반에는 유라시아 자체가 유인원의 주요 무대였다.

남아시아 쪽에서는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의 시왈리크 구릉지대가 약 1,270만~850만 년 전 지층에 많은 유인원 이빨과 턱뼈를 남겼다. 아주 중요한 얼굴 화석도 몇 점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얼굴 전체가 거의 보존되어 있다. 가장 많이 나오는 유인원은 시바피테쿠스다. 이곳에서 400만 년 넘게 이어졌고, 여러 지층 단위와 수많은 지점에 걸쳐 분포한다.

유럽 쪽에서 사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은 바르셀로나 북서쪽에 있다. 칸 마타라는 쓰레기 매립장이다. 매립장을 만들려면 넓은 면적의 땅을 파헤쳐야 하는데, 그렇게 파다가 화석 산지가 줄줄이 드러났다.

지층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고 연대도 아주 세밀하게 구분된다. 같은 분지에서 수십만 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고생물학에서는 사치나 다름없는 조건이다.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수십만 년 동안 벌어진 일을 한 층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한 지점에서는 약 1,200만 년 전의 유인원이 나왔다. 한 개체의 뼈가 80점 넘게 남았다. 얼굴, 손목, 손, 골반, 척추, 갈비뼈. 한 화석에 얼굴과 몸통과 손이 함께 보존되는 일은 마이오세 유인원에서 극히 드물다.

같은 분지에서는 그 전후로 여러 다른 유인원도 나왔다. 약 1,190만 년 전의 한 종류는 얼굴이 아주 짧고 법랑질이 두꺼웠다. 약 1,000만 년 전에는 또 다른 종류가 나타났다. 유럽에 유인원이 많았던 것은 어느 한 속이 유난히 오래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서로 이웃한 시기에 속들이 하나씩 교대했기 때문이다.

뼈에서 유인원의 움직임을 읽어 내려면 몇 군데 중요한 관절을 보아야 한다. 어깨뼈가 등에 붙어 있는지 몸통 양옆에 붙어 있는지에 따라 팔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있는지가 갈린다.

손목의 새끼손가락 쪽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는 손목을 얼마나 돌릴 수 있는지 결정한다. 손가락뼈의 굽은 정도는 나뭇가지를 오래 걸어 잡을 수 있는지 결정한다. 허리뼈의 개수는 몸통이 용수철인지 기둥인지 결정한다.

칸 마타의 그 유인원으로 돌아가자. 이름은 피에롤라피테쿠스다. 그 뼈들은 꽤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저 몸통을 보자. 가슴우리는 좁고 깊지 않고, 넓고 앞뒤로 납작하다. 어깨뼈는 몸통 양옆에서 등으로 옮겨 갔다. 덕분에 팔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있었다. 빗장뼈는 비교적 길고, 손목의 새끼손가락 쪽 관절도 바뀌어 더 넓게 돌아갔다. 허리는 짧고 뻣뻣해졌다. 몸을 세워 위로 기어오를 수 있는 동물이었다.

이번에는 손을 보자. 손가락은 비교적 짧고 별로 굽어 있지 않다. 온몸의 무게를 나뭇가지에 건 채 번갈아 붙잡으며 건너가는 손은 아니었다.

몸은 세웠지만, 손은 매달리는 손이 아니었다. 유인원의 몸을 떠올리면 우리는 흔히 한 벌의 특징을 함께 그린다. 곧추선 몸통, 길고 굽은 손가락, 넓게 돌아가는 어깨와 손목. 언뜻 보면 한꺼번에 묶음으로 얻은 특징 같다. 피에롤라피테쿠스는 그 묶음을 풀어 버렸다. 이 특징들은 따로따로 나타날 수 있었고, 순서도 일정하지 않았으며, 조합도 하나뿐이 아니었다.

몸통을 세우는 자세는 유인원 역사에서 여러 번 진화했을 수 있다. 계통수는 친연관계의 가계도이며, 많은 복원에서 몸통이 곧은 마이오세 유인원이 서로 다른 가지에 놓인다. 다만 기원의 횟수는 화석의 위치와 조상 형질의 복원에 달려 있다. 어떤 계통수에서도 반드시 두 번 이상이어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더 흩어지게 배치하면 서너 번까지도 된다. 5절에서는 더 극단적인 예를 보게 된다. 아예 유인원이 아닌 동물도 유인원 같은 팔꿈치와 손목을 독자적으로 갖추었다.

서로 다른 계통 여럿이 같은 일을 저마다 한 번씩 해낸 것이다. 곧추선 몸통과 매달리는 손은 함께 오지 않았고, 단 한 번만 오지도 않았다.

4 같은 숲에 살던 두 유인원

약 1,160만 년 전, 독일 남부의 함머슈미데라는 곳에 있던 한 숲에는 적어도 두 종류의 유인원이 살았다. 함머슈미데는 지금 점토를 캐는 구덩이다. 칸 마타에서처럼, 흙을 파내던 곳에서 이 유인원들도 나왔다.

큰 쪽은 다누비우스다. 여러 개체가 발견되었고, 팔꿈치와 손목, 손, 엉덩관절, 무릎, 발, 척추가 남아 있다. 몸무게는 십몇 킬로그램에서 삼십몇 킬로그램 사이로 추정된다. 작은 쪽은 부로니우스로, 2024년에야 이름이 붙었다. 자료는 이빨 몇 개와 무릎뼈 한 점뿐이다. 추정 몸무게는 약 10킬로그램으로 작은 개 한 마리 정도다.

둘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이빨에 있다. 다누비우스의 법랑질은 부로니우스의 약 두 배 두께다.

법랑질의 두께는 이빨이 얼마나 많은 마모를 견딜 수 있는지 말해 준다. 두꺼우면 단단한 것을 먹을 수 있고, 오래 갈아 씹어도 버티며, 먹이에 모래 알갱이가 섞여 있어도 견딘다.

얇은 법랑질은 잎을 베어 낼 수 있는 날카로운 교두와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고, 부드러운 먹이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것은 식단표가 아니다. 이빨이 무엇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려 줄 뿐이다.

그러니 같은 시기 같은 숲에 살았던 이 두 유인원은 아마 서로 다른 것을 먹었을 것이다. 이토록 이빨이 다른 유인원 둘이 한 숲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숲의 먹거리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다는 뜻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그곳에서 둘 중 하나만 발굴되었다면, 우리는 그 숲의 유인원에게는 한 가지 먹는 방식만 있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법랑질이 얇은 이빨 몇 개를 더 찾아내자 숲 전체의 모습이 달라졌다.

이빨의 모양은 더 자세한 이야기도 해 준다. 잎은 만만한 먹이가 아니다. 섬유질은 많고 영양분은 적어서 잘게 잘라야 소화하기 쉽다. 높게 솟아 한 줄로 이어진 절단 능선은 작은 칼날이 늘어선 것 같아서, 질긴 잎을 자르기에 꼭 알맞다.

낮고 둥근 교두에 넓고 오목한 씹는 면이 붙으면 열매를 먹기에 좋다. 크고 법랑질이 두꺼운 어금니는 딱딱한 껍데기를 부수기에 알맞다. 이빨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면 그 동물이 평생 무엇을 먹도록 준비되어 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이빨 표면에는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아주 미세한 긁힌 자국도 남아 있다. 유인원이 죽기 며칠 전부터 몇 주 전까지 실제로 무엇을 씹었는지 기록한 흔적이다. 단단한 씨앗이나 견과는 작은 패임을 남기기 쉽고, 질긴 잎은 길고 가느다란 긁힘을 남기기 쉽다.

흥미롭게도 이 두 증거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이빨의 모양은 무엇을 먹도록 준비되어 있었는지 말하고, 긁힌 자국은 마지막 몇 주 동안 실제로 무엇을 먹었는지 말한다. 유럽의 마이오세 유인원 이빨에 난 자국을 보면, 부드러운 열매 위주로 먹은 것부터 잎 위주, 씨앗과 단단한 먹이 위주까지 갖가지 식생활이 드러난다.

법랑질 속 화학 성분으로는 동물이 먹은 식물의 큰 부류도 구별할 수 있다. 나무와 대부분의 풀이 속하는 부류인지, 아니면 나중에 열대의 탁 트인 땅으로 널리 퍼진, 더위와 가뭄에 더 강한 풀의 부류인지 알아낼 수 있다. 조사된 마이오세 유인원은 거의 모두 앞의 부류를 먹었다.

비슷한 시기, 그리 멀지 않은 서쪽에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었다. 스페인의 칸 요바테레스와 칸 페우에서는 약 1,000만 년 전 히스파노피테쿠스라는 유인원이 나왔다. 두개골도 있고 부분 골격도 있다. 칸 페우의 개체는 다 자란 암컷으로 몸무게가 약 22~25킬로그램이었다.

손가락은 길고 굽어 있었고, 손은 힘껏 움켜쥘 수 있었다. 어깨와 팔꿈치, 손목은 넓게 돌아갔으며 몸통도 곧추서 있었다. 나뭇가지 아래 매달리는 데는 자주 거론되는 이점이 있다. 몸이 좀 무거워도 가느다란 가지 끝까지 나아가 가장 바깥쪽에 달린 열매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는 가지 위에는 안정되게 서기 어렵지만, 아래 매달리면 무게를 여러 가지에 나누어 실을 수 있다.

2012년의 한 연구는 이 유인원의 부분 골격을 분석한 뒤, 당시 알려진 것 가운데 매달리기 적응이 확실한 가장 이른 유인원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런데 그 손에는 나뭇가지 위를 짚고 걷는 특징도 남아 있었다. 이 유인원조차 두 가지 재주를 다 갖고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헝가리 북부의 루다바니아가 나온다. 같은 시기의 이곳에서는 유인원 두개골 여러 점과 몸통, 골반, 팔다리뼈가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유인원과는 아주 가까운 관계다. 한때 같은 속으로 묶였을 만큼 가깝지만, 근년에는 다시 나누는 분석이 더 많아졌다.

더 동쪽,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일대에는 법랑질이 대단히 두껍고 턱이 억센 대형 유인원이 있었다. 몸무게는 수십 킬로그램으로 추정되며, 더 단단하고 계절에 따라 더 크게 달라지는 먹이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땅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판단은 주로 이빨과 몸집, 화석이 나온 환경에 근거한다.

발목뼈 한 점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2025년, 칸 마타의 목말뼈 한 점을 다시 기술한 연구가 나왔다. 이 뼈가 보여 주는 나무 위 움직임은 오늘날 어느 유인원의 방식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전성기 유럽 유인원은 손과 몸통만 지금의 동물에 꼭 맞는 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발목조차 그렇다.

전성기의 유인원들을 한자리에 놓아 보면 얼마나 폭넓게 갈라져 나갔는지 드러난다. 몸집은 약 10킬로그램부터 수십 킬로그램까지이고, 큰 것은 70~80킬로그램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먹이는 부드러운 열매에서 잎, 씨앗과 단단한 먹이까지 걸쳐 있다. 나뭇가지 위를 네 발로 걷는 것도, 가지 아래 매달려 이동하는 것도, 두 가지를 다 하는 것도 있었다. 어쩌면 자주 땅으로 내려오는 것도 있었다. 한 종류의 유인원에 변형이 몇 가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같은 시기에 나란히 존재했다.

5 이 숫자 가운데 얼마를 분류학이 만들었을까

가장 오래된 이름부터 이야기하자. 마이오세 유인원 가운데 맨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은 드리오피테쿠스로, 1856년 프랑스 남부 생고댕에서 발견되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때 여러 지역의 자료가 이 속 이름 아래 들어왔다가, 나중에는 범위가 조금씩 좁아졌다. 그 경계는 몇 차례나 넓어졌다 좁아졌다 했다.

오늘날 이 이름은 유럽의 작은 무리만을 가리킨다. 다만 이빨은 교과서에 이름 하나를 남겼다. 1절에서 말한, 교두 다섯 개 사이로 ‘Y’자 홈이 난 아래 어금니를 ‘드리오피테쿠스형’이라고 부른다.

이번에는 이름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보자.

한때 교과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라마피테쿠스라는 속이 있었다. 턱뼈와 이빨을 바탕으로 세워진 속이었다. 오랫동안 독립된 속으로 여겨져 거의 반세기 동안 책 속에 머물렀다.

그러다 시왈리크 산지에서 더 온전한 시바피테쿠스 얼굴 화석이 나왔다. 1982년, 둘을 한데 놓고 체계적으로 비교한 연구가 같은 속의 형태적 변이 범위 안에 들어간다는 결론을 내렸다. 먼저 붙인 이름을 따르는 명명 규칙에 따라, 라마피테쿠스라는 이름은 시바피테쿠스에 통합되었다.

처음에 서로 다른 두 형태로 보였던 차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수컷과 암컷의 차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속 하나가 사라졌지만, 뼈는 단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더 큰 재배치도 있다. 2015년 플리오바테스는 팔꿈치와 손목 등의 특징 때문에 초기 유인원으로 해석되었다. 2024년 두개골·치아 분석은 플리오피테쿠스류 배치를 지지했고, 저자들은 협비류 줄기군이라는 해석과 관절의 수렴진화를 택했다. 그러나 머리뼈 이외의 골격 형질까지 넣으면 계통수가 달라졌다. 모든 해부학적 증거가 만장일치로 내린 판결은 아니었다.

중국어 이름에는 여전히 ‘유인원’이 들어가지만 분류상의 위치는 통째로 옮겨질 수 있다. 두 속을 하나로 합치는 것보다 큰 변화이며, 앞서 말한 독립적 반복의 진지한 후보가 된다. 문제는 이름표만이 아니다. 어떤 유사성이 친연관계이고 어떤 것이 수렴인지는 골격의 여러 부분을 함께 비교해야 한다.

반대 방향의 변화도 있다. 튀르키예의 약 870만 년 전 화석 한 무리는 원래 그리스의 대형 유인원 속에 들어 있었다. 2023년에 머리와 얼굴 부분의 새 자료가 나오자, 이를 근거로 따로 떼어 내 아나돌루비우스라는 새 속을 세웠다. 전에 없던 동물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료가 속과 속 사이의 경계를 바꾼 것이다.

속이 아니라 종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많은 유인원은 암수 차이가 크고, 수컷의 송곳니는 암컷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루싱가의 에켐보는 예전에 작은 종 하나와 큰 종 하나, 두 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2025년에 많은 표본을 다시 분류해 보니, 두 종의 몸집 범위가 크게 겹쳤다. 예전의 ‘작은 종과 큰 종’ 구분은 상당 부분 수컷과 암컷의 송곳니 크기 차이를 두 종 사이의 차이로 읽은 것이었다. 두 종은 그대로 남았지만, 수많은 표본의 소속이 달라졌다.

이 이야기들 뒤에는 같은 사정이 있다. 마이오세 유인원은 절반이 넘는 속이 주로 이빨과 턱뼈, 얼굴의 조각들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제법 온전한 두개골이나 큰 얼굴 부분이 있는 것은 대략 9~12속이다. 서로 연결되는 부분 골격이 있어 몸통과 팔다리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은 6~8속뿐이다.

이빨의 비중이 이토록 큰 까닭은 법랑질이 척추동물 몸에서 가장 단단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뼈는 썩고 부서지고 물에 떠내려가 흩어져도 이빨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이오세 유인원은 무엇보다 이빨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물론 이빨로도 속과 종을 구분할 수 있다. 교두의 개수, 치아 머리 부분의 비율, 법랑질의 두께, 뿌리의 모양에는 모두 정보가 들어 있다. 다만 같은 종 안에서도 수컷과 암컷, 늙은 개체와 어린 개체의 이빨은 제법 다를 수 있다.

윈난의 루펑에서는 유인원 이빨 수천 개가 나왔다. 이 정도면 표본이 충분할 법하다. 그런데 이 이빨들이 몇 종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한 종의 암수를 나타내는지를 놓고 수십 년째 구분이 바뀌고 있다. ‘이빨 크기가 흩어진 정도로 종수를 센다’는 방법을 따로 모의실험한 연구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몸무게 추정치 가운데도 이빨 크기로 계산한 것이 많다. 근년에는 유인원의 속귀를 비교하는 연구도 나왔다. 귀 깊숙이 있는 몇 가닥 관의 모양은 이빨이나 뼈와는 별개인 또 하나의 증거다. 이미 아주 가까운 몇몇 속을 구분하는 데 쓰이고 있다.

2023년 목록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독일의 부로니우스, 튀르키예의 아나돌루비우스, 그리고 2026년 약 1800만 년 전 이집트 지층에서 보고된 마스리피테쿠스가 더해졌다. 플리오바테스의 위치도 논의 중이다. 분류 선택에 따라 36~37속, 57~58종쯤 셀 수 있지만, 이는 변화하는 장부의 예시이지 공식 갱신된 세계 총목록은 아니다.

이제 가장 자연스러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마이오세의 유인원은 지금보다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살아 있는 유인원은 긴팔원숭이가 약 4속 20여 종, 오랑우탄이 1속 3종, 고릴라가 1속 2종, 침팬지가 1속 2종이다. 모두 합치면 7속, 약 27종이다. 35~37속을 7속과 견주면 다섯 배가 넘는다. 56~58종을 약 27종과 견주면 두 배를 조금 웃돌 뿐이다.

두 배수가 이토록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긴팔원숭이를 20여 종으로 나누면서 현생 유인원의 종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분자와 분모 자체에 있다. 마이오세 쪽 숫자는 거의 1,800만 년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난 유인원을 모두 합친 것이고, 오늘날 쪽 숫자는 바로 지금 살아 있는 유인원을 센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느 학교의 18년 치 전체 졸업생 명부를 올해 재학생 명부와 견주는 셈이다. 졸업생 명부에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던 적은 없다.

따라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다. 마이오세 전체에 걸쳐 누적으로 나타난 유인원은 속 수준에서 오늘날보다 훨씬 다양하게 갈라졌다. 이 주장은 단단하다. 어느 한 시점에 함께 살았던 유인원이 지금보다 얼마나 많았는지를 따지면, 그 차이는 훨씬 작아지고 근거도 약해진다. 지금의 화석과 연대 정밀도로는 ‘다섯 배’나 ‘열 배’ 같은 말을 떠받칠 수 없다.

이 글에서 앞으로 나오는 속수와 종수는 모두 누적된 수다. 마이오세의 유인원이 ‘지금의 다섯 배’라는 말은 거의 1,800만 년의 전체 명단을 오늘 하루의 출석부와 견준 것이다.

이 기준으로 마이오세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각각 세면 전기는 약 10~13속, 중기는 약 15~18속, 후기는 약 18~22속이다. 한 속이 두 구간에 걸쳐 있으면 양쪽에서 한 번씩 센다. 따라서 이 숫자들은 모양을 보는 데는 쓸 수 있지만 더해서는 안 된다. 모양은 줄곧 위로 올라가고, 후기에 가장 많다. 그런데 바로 그 후기가 가지치기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6 가지치기

약 1,470만~1,380만 년 전, 지구는 전 세계에 걸친 큰 냉각을 겪었다. 심해 퇴적물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에 남극 빙상이 눈에 띄게 커졌고, 해류의 흐름도 재편되었다.

마이오세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기는 그렇게 끝났다. 그 뒤의 기후가 줄곧 직선으로 추워진 것은 아니다. 한층 차가워진 바탕 위에서 지구 궤도의 주기에 따라 오르내렸다.

가장 곧바로 떠오르는 추론은 이렇다. 날씨가 추워지고, 숲이 줄고, 숲에 기대어 사는 유인원도 줄었다. 이 추론은 고리마다 근거가 있다. 이 유인원들은 대개 나무 위에 사는 동물이었다. 이동 방식도, 손도, 몸통도 나뭇가지에 맞춰져 있어 숲을 떠나 살 수 없었다.

나중에 유인원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진 것도 유인원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유럽의 다른 많은 숲 동물도 줄어들었다. 더 뒤에 남아시아에서 초지가 넓어진 시기도 그곳 유인원이 퇴장하는 시기와 앞뒤로 이어진다. 이 설명은 식성과도, 다른 동물과도, 뒤이어 나타난 식생과도 맞아떨어진다. 아무렇게나 내놓은 말이 아니다.

틈은 시간에 있다. 이 전 지구적 냉각 이후에도 유럽의 유인원은 400만~500만 년을 더 번성했다.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유인원이 가장 많았던 때는 바로 약 1,250만~1,000만 년 전이다. 큰 냉각 이전이 아니라 이후다.

그러니 ‘추워지자 유인원이 사라졌다’는 설명은 연대와 맞지 않는다. 냉각은 배경이지 스위치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큰 가뭄이 든 뒤에도 오래된 가게 하나가 여러 해 더 장사하다가 어느 해 문을 닫았다고 해 보자. 가뭄은 당연히 관계가 있다. 하지만 문을 닫은 바로 그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따로 찾아야 한다.

그 무렵 대륙 자체도 움직이고 있었다. 티베트고원이 솟아오르고 아시아의 계절풍은 강해졌다. 중부 유럽에서 카스피해까지 이어지던 내해가 줄어들고 동부 지중해도 변하면서, 유럽과 서아시아의 수분 공급과 육로가 달라졌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열곡 지대가 높아져 양옆에 비그늘을 만들었다. 이 변화들은 저마다 자기 지역의 기후를 바꾸었고, 일어난 시기도 달랐다.

본격적인 가지치기는 훨씬 뒤에 왔다. 약 975만 년 전, 서유럽의 포유류 다양성이 아주 짧은 기간에 뚜렷하게 떨어졌다. 멸종률이 올라가고 동물상 전체가 한 차례 재편되었다. 고척추동물학자들은 이 시기를 발레시안 위기라고 부른다. ‘발레시안’이라는 이름은 바로 바르셀로나 부근의 그 분지에서 왔다.

유럽 유인원의 대부분은 이 재편을 전후해 사라졌다. 히스파노피테쿠스가 속해 있던 숲 동물상도 이 무렵 뚜렷하게 달라졌다. 약 950만 년 전이 되면 서유럽의 중심 지역에서는 유인원을 거의 볼 수 없게 된다.

서유럽에서 이 일을 이렇게 정확히 짚을 수 있는 것은 지층 연대가 세밀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암석은 퇴적될 때 당시 지구 자기장의 방향을 기록한다. 지구 자기장의 남북은 역사상 여러 차례 뒤바뀌었고, 한 번의 뒤집힘마다 전 세계에서 서로 대조할 수 있는 시간 눈금이 하나씩 생긴다.

바르셀로나 부근의 그 분지도 이렇게 층마다 대조해 연대를 맞췄다. 덕분에 서유럽에서 한 차례 유인원이 사라진 일을 975만~950만 년 전이라는 20여만 년의 창 안에 놓을 수 있다.

여기에 뜻밖의 대목이 하나 있다.

쥐류와 땃쥐류는 종류마다 좋아하는 습도가 다르다. 그래서 어느 지층에서 어떤 작은 동물이 나왔는지 보면 당시의 습한 정도를 대략 읽어 낼 수 있다. 이 방법으로 바르셀로나 부근 분지의 소형 포유류를 이용해 당시 연간 강수량을 거꾸로 추정한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발레시안 위기 전후의 강수량에는 동물상이 뒤바뀐 것만큼 급격한 추락이 나타나지 않았다.

동물상은 한 차례 바뀌었지만, 그곳에 한 해 동안 내리는 비는 함께 뚝 줄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숲의 축소’라고 하면 지도에서 숲이 크게 한 덩어리 지워지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더 흔하고 검증하기도 쉬운 변화는 따로 있다. 가지와 잎이 이어져 넓게 덮고 있던 수관이 줄어든다. 숲이 조각조각 나뉘고 그 사이에 트인 땅이 끼어든다. 한 해 안에서 건기와 우기의 차이가 커진다.

마이오세 후기 유럽의 이런 변화 속에서는 계절 간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변화들 하나하나가 갖는 무게는 유인원마다 전혀 달랐다.

잘 익은 부드러운 열매에 기대어 살고, 이어진 수관을 떠날 수도 없는 유인원에게 가장 두려운 변화는 계절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열매는 철을 따라 맺힌다. 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숲에서는 일 년 내내 늘 어떤 나무 몇 종류가 열매를 맺고 있다.

계절이 뚜렷해지면 많은 나무가 같은 시기에 몰아서 열매를 맺고, 나머지 달에는 먹이가 끊기는 고비가 찾아온다. 연간 강수량은 그대로여도 비가 내리는 달이 달라지면 열매가 맺히는 달도 달라진다. 그러면 일 년 중 먹을 것이 가장 부족한 때가 더 길어지고 더 견디기 어려워질 수 있다.

유인원은 연평균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한 달 한 달을 살아간다. 부드러운 열매에 기대어 사는 유인원에게 중요한 것은 한 해의 평균이 아니라 그해 가장 버티기 힘든 한 달이다.

이것은 ‘연간 강수량은 그대로인데 유인원은 떠났다’는 상황에 가능한 설명 하나를 제시한다. 지금으로서는 이빨이 알려 주는 식성과 환경 변화의 시점을 맞춰 얻은 설명이다. 그 분지에서 직접 측정해 확인한 것은 아직 아니다.

이 생각을 따라가면, 법랑질이 두껍고 씹는 힘이 좋아 열매가 모자라는 계절을 단단한 먹이로 버틸 수 있는 유인원은 이런 변화에 덜 민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법랑질 두꺼운 대형 유인원들은 서유럽의 유인원보다 거의 100만 년 늦게 사라졌다. 미리 예측한 결과가 아니라 나중에 대조해 맞아떨어진 사실이다. 그들 역시 끝내 남지는 못했다.

한 가지 더 기억해 두자. 유럽은 가장 먼저 가지치기를 당한 지역이면서 기록이 가장 촘촘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 두 사실이 겹친다는 점은 마지막 절에서 다시 쓰게 된다.

7 한 지역씩 꺼지는 불

약 950만 년 전 서유럽에서 유인원이 거의 사라진 뒤에도, 다른 지역에서 가지치기가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지역별로 확실한 마지막 기록을 시간순으로 놓으면 이렇다.

중부 유럽, 헝가리 북부의 루다바니아는 약 950만 년 전으로 서유럽과 비슷하다.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에서는 그리스의 법랑질 두꺼운 대형 유인원이 약 870만 년 전쯤까지 이어졌고, 튀르키예의 아나돌루비우스도 약 870만 년 전이다. 남아시아에서는 시왈리크의 시바피테쿠스 마지막 기록이 약 850만 년 전이다.

동남아시아의 태국과 미얀마에서는 유인원이 대략 700만 년 전까지 이어진다. 이빨과 턱뼈만 남겼지만, 이들은 마이오세 유인원의 분포를 태국 북동부 코랏까지 넓혀 놓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윈난의 루펑과 위안머우가 확실한 유인원 기록을 약 700만~600여만 년 전까지 이어 준다.

가지치기는 한 칼에 끝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윈난까지 300만~400만 년에 걸쳐,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 지역씩 불이 꺼졌다.

각 지역에서 불이 꺼진 시기는 대체로 그 지역 자체의 변화와 맞물렸다. 서유럽에서는 발레시안 위기와 겹쳤다. 남아시아에서는 계절풍이 강해지고 강의 물길이 바뀌며 초지가 퍼지기 시작하던 때와 겹쳤다.

중국 서남부의 숲은 줄곧 습기를 유지하며 가장 오래 버텼다. 앞 절에서 본 대륙의 변화들이 저마다 제 지역을 바꾸었으므로, 지역마다 시간표도 달랐다.

아프리카의 문제는 후기 마이오세 비인간 유인원의 기록이 희박하다는 데 있다. 아래 사례가 이후 인류 계통까지 포함한 모든 유인원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뜻은 아니다. 케냐의 나칼리는 약 990만 년 전으로 아래턱 한 점과 이빨 십여 개다. 케냐의 삼부루는 약 960만 년 전으로 이빨 몇 개가 붙은 위턱 한 점이다. 에티오피아의 초로라는 약 800만 년 전으로 거의 전부 이빨이다.

세 곳을 다 합쳐도 온전한 유인원 한 마리를 맞출 수 없다. 그 뒤로는 유인원 화석이 거의 없는 긴 공백이 이어진다.

이 시간표에는 대륙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 예외가 하나 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사르데냐섬에 이르는 일대에는 당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섬들에는 오레오피테쿠스라는 유인원이 살았다. 가장 유명한 골격은 거의 온전하며, 토스카나 바치넬로의 갈탄 광산에서 나왔다. 이 밖에도 잘 보존된 두개골과 뼈가 적지 않아, 마이오세 전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인원 가운데 하나다.

뇌는 상대적으로 작고 이빨은 독특했다. 손과 발, 몸통도 대륙의 유인원과 달랐다. 이빨에 난 긴 절단 능선은 잎을 꽤 많이 먹었다고 말해 준다. 섬에서 사는 일은 대륙과 다르다. 땅은 좁고 사방은 바다이며 오가는 동물도 적다.

유인원의 한 계통이 이런 곳에 수백만 년 갇혀 있으면,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쉽다. 오레오피테쿠스가 그랬다. 대륙에는 없는 길을 걸었고, 특수화의 정도가 워낙 커서 계통수에서도 전혀 다른 여러 자리에 놓여 왔다.

섬의 유인원은 서유럽 대륙의 여러 계통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오레오피테쿠스의 기록은 약 830만~670만 년 전이며, 일찍 사라진 일부 지역 계통보다 거의 200만 년 더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유인원이 사라졌다거나 유럽 각 지역의 마지막 출현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동쪽의 다른 끝에는 윈난이 있다. 루펑분지에서는 유인원 이빨 수천 개와 두개골 여러 점이 나왔다. 루펑피테쿠스라는 유인원으로, 마이오세 전체에서 자료가 가장 풍부한 유인원 중 하나다.

2025년의 새로운 분석에 따르면 루펑피테쿠스의 식생활은 상당히 유연했고, 한 가지 먹이만 고집하지 않았다. 가까운 위안머우에서는 몸집이 더 작은 유인원도 나왔다. 남은 것은 주로 이빨과 턱뼈다.

당시 중국 서남부에는 여전히 습하고 숲이 많은 환경이 남아 있었다. 서유럽의 유인원이 사라지고 약 300만 년이 지난 뒤에도 윈난의 숲에는 유인원이 있었다.

남아시아의 이야기는 풀과 이어진다. 파키스탄 북부의 옛 토양에 남은 화학 기록은 약 800만~700만 년 전, 더위와 가뭄에 더 강한 한 부류의 풀이 그곳에서 빠르게 퍼졌음을 보여 준다.

시바피테쿠스의 마지막 기록은 약 850만 년 전으로, 그 급속한 확산보다 조금 이르다. 다만 그때는 이미 계절풍이 강해지고 강의 물길이 바뀌었으며 초지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풀이 그곳에 퍼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건조해졌다’는 한 가지 사정만 있지 않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 우기와 건기의 배분, 들불, 풀을 먹는 동물들이 모두 나무와 풀 가운데 누가 우세한지를 바꾸고 있었다.

유인원의 퇴장과 함께 보아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유인원이 한 지역씩 가지치기를 당하던 바로 그 시기에 원숭이는 가지를 뻗고 있었다. 마이오세 전기와 중기에 확실히 확인되는 원숭이는 유인원보다 훨씬 적었다. 대부분 북아프리카에서 동아프리카까지 살던 초기 원숭이 한 부류였다. 그런데 마이오세 후기에는 오늘날 익숙한 두 큰 부류, 곧 잎을 주로 먹는 콜로부스원숭이 부류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는 마카크원숭이 부류가 잇따라 나타났고, 뒤이어 널리 퍼졌다.

원숭이 어금니의 가로 능선 두 줄은 칼날 두 줄과 같아서 잎을 자르는 데 능하다. 1절에서 말한 대비, 곧 마이오세에는 유인원이 많고 원숭이가 적었지만 지금은 원숭이가 많고 유인원이 적다는 역전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

같은 큰 배경 속에서도 원숭이는 유인원과 나란히 가지치기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가지를 냈다. 그렇다면 ‘환경이 나빠져서 나무에 사는 영장류가 모두 함께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원숭이가 유인원을 밀어낸 것일까. 원숭이의 어금니, 더 빠른 번식, 잎과 조금 더 트인 환경에 대한 적응은 계절이 뚜렷해질 때 모두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원숭이와 유인원은 여러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고, 지역별로 유인원이 사라진 시기도 원숭이의 확산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경쟁은 지금도 가능한 설명 중 하나일 뿐, 주된 원인으로 입증되지는 않았다.

8 잔여항은 두 번의 가지치기가 어긋난 자리에 있다

먼저 무엇이 잘려 나갔는지 헤아려 보자.

삼십여 개의 이름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짝을 찾을 수 없는 몸들이 사라졌다. 나콜라피테쿠스처럼 긴 허리에 잘 붙잡는 두 손을 갖춘 몸, 피에롤라피테쿠스처럼 몸통은 세웠지만 매달리는 손은 갖추지 않은 몸, 같은 숲에 살면서 법랑질 두께가 두 배나 차이 났던 두 유인원, 섬에서 잎을 먹고 살던 뇌가 작은 유인원.

손의 비율은 분명한 예다. 마이오세의 몇몇 유인원은 손가락 길이가 중간 정도이고 엄지가 상대적으로 길었다. 그런데 지금 살아 있는 유인원에게는 이 비율이 없다. 마이오세 유인원의 손은 오늘날 유인원 몇 종류의 손을 작게 줄여 놓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곧바로 질문 하나가 따라온다. 잘려 나간 것들과 오래 버틴 것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모든 생존 계통을 하나로 설명할 공통 능력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루싱가의 에켐보는 표본을 하나하나 다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남겼지만 일찌감치 사라졌다. 시바피테쿠스는 남아시아에서 400만 년 넘게 이어지고 널리 분포했지만 850만 년 전을 넘기지 못했다. 법랑질이 두꺼운 것도 얇은 것도 사라졌다. 반면 섬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특수화된 계통은 오히려 아주 늦게까지 버텼다. 먹는 방식이 유연했던 루펑피테쿠스는 그보다 더 오래 버텼지만 마이오세를 넘기지는 못했다.

식성을 연구한 사람도 있고 숲의 변화를 연구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이오세 유인원 전체의 몸집, 식성, 분포 범위, 서식 환경을 한데 놓고 누가 마이오세 말까지 버텼는지 예측한 분석은 아직 없다. 어느 한 특징만으로 누가 더 오래 버틸지 예측할 수 있다고 입증된 바는 없다. 이 말은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해석 하나를 막는다. 오래 버틴 것도 있고 일찌감치 사라진 것도 있다면, 오래 버틴 쪽에는 뭔가 남다른 점이 있지 않았을까. 마이오세 유인원에서는 아직 그 ‘뭔가’를 찾지 못했다.

이제 이 글에서 잔여항 목록에 더할 것을 보자. 이 글의 유인원은 두 번 지워졌다.

첫 번째는 실제로 지워진 것이다. 멸종이다. 지역을 따라 진행되어 서유럽이 가장 이른 약 950만 년 전, 동아시아가 가장 늦은 약 600만 년 전이었고, 섬은 다른 길을 갔다. 이 순서는 여기서 비교한 지역과 화석 계통에 한정되며, 모든 유인원이 유라시아에서 사라진 경로가 아니다.

두 번째는 기록에서 지워진 것이다. 이쪽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어디에 알맞은 퇴적물이 있는가, 어디를 사람이 찾아가 파는가, 어디의 지층을 몇만 년 단위까지 잘게 나눌 수 있는가.

서유럽의 기록은 세계에서도 손꼽히게 촘촘하다. 바르셀로나 부근 분지의 지층은 극히 세밀하게 나뉘어 있다. 반면 마이오세 후기 아프리카를 집계한 앞선 한 종설에 따르면, 약 1,100만~500만 년 전 사이 대륙 전체에서 유인원이 확실히 나온 곳은 일곱 군데 정도였다. 또 전체 속의 절반 이상은 이빨과 턱뼈만 남겼다.

이 두 지우기는 서로 맞지 않는다. 우리가 불이 꺼지는 것을 가장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곳은, 공교롭게도 유인원이 가장 먼저 사라진 곳이다.

기록이 가장 촘촘한 서유럽은 유인원이 맨 먼저 사라진 지역이다. 반면 아프리카의 그 600만 년은 거의 캄캄하다. 그곳의 마이오세 후기 유인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의 기록으로는 거의 말할 수 없다. 18편에서 썼던 도구가 여기에도 들어맞는다. 기록이 성길수록 마지막 화석은 실제로 사라진 날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 600만 년 동안 일곱 지점이라면, 거의 써먹기 어려울 만큼 성긴 기록이다.

그림 하나를 떠올려도 좋다. 가로축은 시간이고 지역마다 선을 하나씩 긋는다. 선의 길이는 유인원이 그곳에서 실제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나타낸다. 선의 굵기는 그곳의 기록이 얼마나 촘촘한지를 나타낸다.

서유럽의 선은 길지 않지만 가장 굵다. 아프리카의 선은 가장 먼저 시작하지만, 뒷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다. 윈난의 선은 가장 늦게 끝난다.

이 두 지우기가 겹치면 실제보다 더 가파른 곡선이 생길 수 있다. 기록이 촘촘한 지역에서 유인원 수가 떨어지는데, 기록이 성긴 지역들로는 전 세계의 수를 메울 수 없다. 지역별 속수를 모두 더하면 갑자기 곤두박질하는 선이 나온다.

전부 착시는 아니다. 서유럽처럼 기록이 촘촘하면서 연속적인 곳은 약 975만~950만 년 전 여러 속이 한 차례 줄어든 일을 그 자체의 기록으로 보여 준다. 이 부분은 단단하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얼마나 줄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특히 아프리카의 공백은 가장 불확실하다.

두 번째 지우기는 다른 곳에도 손을 댄다. 절반이 넘는 속에 이빨만 남았기 때문에, 잘려 나간 대부분의 유인원에 대해 우리가 가장 많이 아는 것은 어떻게 씹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걸었는지, 나뭇가지를 어떻게 끌어안았는지, 뇌가 얼마나 컸는지 몇 마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6~8속뿐이다.

더 철저히 지워진 것은 어떤 화석 산지에도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한 유인원들이다. 600만 년 동안 아프리카에 남은 지점은 일곱 곳뿐이다. 한 번도 알맞은 곳에 묻히지 못한 유인원은 어떤 명단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분류학이 명단에서 지운 것이 아니라 애초에 등록된 적이 없다.

11편에서 말했듯 화석 기록은 체이지 목록이 아니다. 이 글에는 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멸종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이다. 둘 다 지우지만 같은 무리를 지우지는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침 두 체를 모두 통과해 내려온 일부다.

그러므로 열다섯 번째 유형은 이렇다. 잔여항은 두 번의 가지치기가 어긋난 자리에 있다.

이것은 11편의 ‘잔여항은 체 안에 있다’와 따로 적어 두어야 한다. 그때는 체가 하나였고 잔여항은 그 체가 놓친 것이었다. 이번에는 둘이다. 잔여항은 어느 한 체 안에 있지 않고, 두 체의 구멍이 서로 어긋난 자리에 있다.

12편과도 구별해야 한다. 그 글에도 발자국이라는 체와 뼈라는 체, 두 개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기록의 체였고, 어긋남의 결과는 앞뒤 순서가 잘못 놓이는 것이었다. 이번 두 체 중 하나는 멸종 자체다. 측정하려는 바로 그 일이 스스로 지우고 있다. 어긋남이 바꾸는 것은 순서가 아니라 하락의 모양과 폭이다.

이것은 이 시리즈에서 말하는 이중으로 구축된 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첫 번째 층은 멸종으로, 진화가 스스로 한 가지치기다. 두 번째 층은 기록과 분류로, 고생물학이 하는 가지치기다. ‘삼십여 속’이라는 숫자조차 합쳐지고, 나뉘고, 밖으로 옮겨진다. 두 층은 저마다 지우고 저마다 잔여항을 남긴다. 그 두 몫의 잔여항은 겹치지 않는다.

진화의 층에서 지워진 것은 몸 전체이며, 먹고 움직이는 방식 전체다. 고생물학의 층에서 지워진 것은 알맞은 곳에 묻히지 않은 개체, 발굴되지 않은 지점, 합쳐져 버린 이름이다. 앞쪽 명단에 들어 있는 것들을 우리는 뒤쪽 명단의 틈새를 통해 아주 조금만 볼 수 있다.

이 잔여항에는 아주 실용적인 쓸모가 있다. 앞으로 ‘시간에 따른 마이오세 유인원 다양성’ 곡선을 보게 되면 먼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선의 모양 가운데 얼마는 유인원이 스스로 걸어간 자취이고, 얼마는 두 체의 구멍이 결정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의 관례에 따라 층위가 바뀌었는지 판정해 보자. 10편에서 세운 기준은 이렇다. 번식을 맡는 단위가 다른 층위로 옮겨 가야만 층위 전환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세포 무리가 하나로 통합되어 번식하는 다세포 개체가 되는 경우다. 이 글에서는 층위가 바뀌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번식을 맡은 것은 유인원 한 마리 한 마리였고, 방산과 가지치기는 모두 같은 층위 안에서 일어났다.

끝으로 첫머리의 지도로 돌아가자. 1,000만 년 전 스페인에서 윈난까지 이어진 숲에는 많은 종류의 유인원이 있었다. 대부분은 이빨만 남겼고, 몇 종류는 온전한 골격을 남겼으며, 어떤 것들은 어쩌면 이빨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지운 것은 하나의 체이고, 우리에게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체다. 두 체의 구멍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다음에는 살아남은 가지에서 눈을 돌려, 그 역사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직접 그은 선을 살펴보자.

관련 연구와 사실 확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