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 · 고생물 · 23

황금못: 이 연재가 스스로 구축한 세 가지 틀

시대에 이름을 붙인 뒤에도 그 경계가 다 말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Han Qin · 읽는 데 약 36분 · 공개일

1 두 개의 못, 40미터의 간격

저장성 창싱현 시가지 밖에 석회암 비탈이 하나 있다. 비스듬히 드러난 암층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아래에서 위로 읽어 올라가면 2억 5천만여 년 전의 시간이 읽힌다. 메이산이라는 곳이다. 이 비탈에 못 두 개가 박혀 있다.

하나는 14편의 대멸종에 가까운 페름계–트라이아스계 경계를 정한다. 공식 경계점과 주요 멸종 층준은 가깝지만 같은 정의는 아니다. 2001년 국제 승인을 거쳐 메이산 단면이 이 경계의 세계 표준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아래에 있다. 페름계의 마지막 조인 창싱조의 밑바닥을 정하는 못으로, 2005년에 승인되었다. 연대표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 큰 것부터 대층, 계, 통, 조다.

조는 주요 단위 가운데 가장 작고, 하나의 조는 보통 수백만 년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조가 가장 작고 통이 조보다 크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두 못 사이의 암층 거리는 40여 미터다.

두 못은 무엇에 박혀 있을까.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코노돈트가 처음 나타나는 층에 박혀 있다. 코노돈트는 오래전에 멸종한 동물이 남긴 작은 이빨 모양 부품으로, 흔히 크기가 1밀리미터도 안 되어 현미경으로 보아야 한다. 페름계와 트라이아스계의 경계를 정하는 종은 힌데오두스 파르부스(Hindeodus parvus), 창싱조의 밑 경계를 정하는 종은 클라르키나 왕기(Clarkina wangi)다.

한 지질시대의 시작이 1밀리미터도 안 되는 이빨 하나에 정의되어 있다.

이런 것을 황금못이라고 한다. 10편에서 그 원리를 이야기했다. 연대표의 경계선은 숫자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장소로 정의된다. 세계 어딘가에 실제로 있는 암벽의 구체적인 한 지점이다. 수치 연대는 나중에 측정한다. 측정법이 좋아지면 숫자는 바뀌지만, 그 점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름의 유래도 잠깐 짚고 가자. 보통은 1869년 북아메리카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될 때 박은 기념용 황금 철도못에서 빌려온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누가 어느 글에서 처음 이 이름을 층서학으로 가져왔는지는 확실한 출처를 찾지 못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현장의 그 ‘황금’못은 실제로는 황동으로 만든 커다란 못이나 표지판인 곳이 적지 않다. 구리판 하나만 있는 곳도 있다. 이미 승인된 경계인데도 현장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도 많다. 국제층서위원회 스스로 밝히듯, 기념비를 세우거나 못을 박는 행사는 승인보다 1~3년 늦어질 수 있다.

14편에서도 같은 비탈이 등장했다. 그곳의 해양 탄산염층 사이에는 화산재가 촘촘히 끼어 있다. 화산재에는 연대를 직접 측정할 수 있는 광물이 들어 있다. 그래서 페름기 말 멸종 시점을 아주 좁은 시간 범위로 압축할 수 있었다. 같은 비탈이 연대를 재는 장소이자 정의를 내리는 장소다.

중국에는 황금못이 모두 열한 개 있다. 전부 남쪽에 있고, 저장·후난·광시·후베이·구이저우에 흩어져 있다. 메이산 한 곳에만 두 개다. 지금은 지질공원이 되어 비탈에 커다랗게 확대한 화석 모형들이 서 있다. 정작 진짜 표지는 현미경으로 보아야 보이는 이빨 하나다.

이제 이 글 전체를 관통할 구분 하나를 세워두려 한다. 뒤의 일곱 절에서도 계속 쓸 구분이다. 메이산의 저 비탈에서는 성격이 전혀 다른 세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 암층에 힌데오두스 파르부스가 있는가. 이것은 관찰이다. 누군가 시료를 현미경 아래 놓고 수를 센다. 셀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되풀이할 수 있다.

둘째, 이 코노돈트의 최초 출현을 세계의 다른 단면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가. 화산재 연대나 탄소 동위원소의 변화와 맞아떨어지는가. 이것은 방법에 관한 판단이다. 경험과 비교가 필요하고, 뒤집힐 수도 있다.

셋째, 자격을 갖춘 후보 층준이 여럿일 때 어느 것을 트라이아스계의 공식 출발점으로 선언할 것인가. 이것은 표준화 결정이다. 위원회가 투표로 정한다.

다시 말해보자. 내일 누군가 메이산 경계보다 5미터 아래에서도 힌데오두스 파르부스를 발견한다면 첫 번째는 달라지고, 두 번째는 다시 따져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까지 저절로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 트라이아스계의 출발점은 여전히 원래의 그 층이다.

가정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10편에서 보았듯 캄브리아계 밑 경계의 못은 원래 어떤 동물 굴 흔적이 가장 아래에서 나타나는 층준을 기준으로 정했다. 그런데 2001년, 못보다 3미터 남짓 아래와 4미터 남짓 아래에서 같은 굴 흔적이 다시 발견되었다. 못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세 가지는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연대표를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때는 세 번째를 가리킨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여전히 관찰과 검증이다. 이 글에서 앞으로 ‘구축된 틀’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세 번째 층위의 이야기다. 코노돈트가 가짜라는 뜻도, 어느 층을 어느 층 위에 놓을지 마음대로 정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뒤에서 거듭 쓸 이 연재의 세 낱말도 여기서 정리해두자. 사람이 서로 말하고 비교하기 위해 만들어낸 체계를 ‘구축된 틀’이라 한다. 그 틀에 담기지 않으면서 없앨 수도 없는 부분을 ‘잔여항’이라 한다. 그리고 틀을 구축하는 행위를 ‘깎아내기’라 한다. 황금못 하나는 이 ‘깎아내기’라는 말을 가장 문자 그대로 땅에 내려놓은 사례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어지는 시간에 칼금을 내야 할까.

세계의 지질학에는 서로 겹치지 않고 중간에 빈틈도 없으며 어디서나 함께 쓸 수 있는 좌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계선을 그저 ‘어떤 사건 부근’이라고만 적어두면, 지역마다 같은 이름에 서로 다른 출발점을 붙이게 된다. 두 사람이 ‘전기 트라이아스세’라고 말해도 같은 시간을 가리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 점을 밑 경계로 정하면 명명의 문제가 실행 가능한 대비의 문제로 바뀐다. 당신이 가진 지층을 이 점과 대조하라. 맞아떨어지면 경계 위에 있는 것이다.

어떤 지질학자는 일찍이 이 점을 분명히 말했다. 지질 시간 자체는 연속되어 있으므로 어디를 가르든 약속의 성분이 들어간다. 표준화의 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모두가 동의하고 나면 경계를 놓고 같은 다툼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메이산의 40여 미터 암층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투표로 정하지 않는다. 어느 층에 못을 박을지는 투표로 정한다.

2 102개의 자리와 물에 잠긴 못 하나

못을 승인하기 전에는 소위원회가 실무단을 꾸려 후보 단면과 신호를 비교하고 제안을 표결에 부친다. ICS의 GSSP 절차 설명은 투표권을 가진 위원의 60퍼센트를 넘는 지지를 요구한다. 위원이 20명이면 최소 13표이지 12표가 아니다. 그 뒤에도 승인 단계가 이어지므로 한 차례 표결이 절차의 전부는 아니다.

통과하면 국제층서위원회로 올라가 집행 임원들과 각 소위원회 위원장이 한 차례 더 투표한다. 다시 통과해야 국제지질과학연맹 집행위원회에 제출된다. 그곳에서 승인해야 비로소 정식 국제 표준이 된다. 승인 뒤에는 공식 논문이 나오고, 현장의 표지는 다시 1~3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냉각기간도 있다. 새로운 단위나 황금못을 세운 뒤 10년 동안은 변경안을 내지 못한다.

후보 단면의 기술적 요건도 세세하다. 경계 부근에 뚜렷이 관찰할 수 있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 단면은 충분히 두꺼워야 하고, 퇴적은 되도록 연속적이어야 한다. 지각 변형과 변성의 영향을 적게 받아야 하며, 오랫동안 찾아가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보조 표지를 함께 갖추면 더 좋다. 오늘날 황금못을 찾는다는 것은 가장 극적인 사건을 찾는 일이 아니라 가장 믿을 만한 세계 공통 기준을 찾는 일이다. 둘은 같은 층에 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못은 모두 몇 개나 박아야 할까.

최근의 국제연대층서표에서 현생누대에는 조에 해당하는 자리 101개가 있다. 여기에 아직 정식 이름이 없는 후기 플라이스토세의 자리까지 더하면, 밑 경계를 정해야 할 자리가 모두 약 102개다. 이 102개 가운데 황금못이 있는 것은 약 81개다.

아직 스물한 자리가 비어 있다. 여기에 선캄브리아시대의 에디아카라계 밑 경계 못 하나를 더하면, 표에 승인되어 있는 황금못은 모두 약 82개다. 국제층서위원회가 이 등록표를 관리하기 시작한 때는 1977년이다. 계산하면 한 해 평균 두 개도 박지 못했다.

하나를 박는 데 얼마나 걸릴까. 기한도 없고 평균값도 없다. 백악기의 캄파니아조 경계 실무단은 2017년 여름에 재구성되었다. 당시에는 곧 끝낼 줄 알았지만, 승인은 2022년 10월에야 났다. 이 재출발부터만 세어도 5년이다.

같은 백악기의 베리아스조는 더 길다. 2020년 안은 백악기 소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새 실무단이 2021년 2월에 일을 시작해 2025년까지 온라인 회의를 약 스물다섯 차례 열었고, 2026년에도 후보 표지와 단면을 다시 평가하고 있다. 안이 부결된다는 것은 투표 한 번 더 하면 끝날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선캄브리아시대에는 다른 제도가 적용된다.

시생누대와 원생누대 대부분에는 널리 분포하고 풍부하면서 대륙을 넘어 정밀하게 대비할 수 있는 화석대가 오랫동안 부족했다. 그래서 국제 시간 척도는 이 방대한 구간을 수치 연대로 곧바로 나눈다. 25억 년 전을 어떤 경계로, 10억 년 전을 다른 경계로 정하는 식이다. 크고 반듯한 숫자를 쓴다. 이를 국제표준층서연령이라고 한다.

황금못과의 차이는 근본적이다. 국제표준층서연령은 ‘연령이 경계를 정의한다’. 그 숫자 자체가 경계다. 황금못은 ‘물질적인 점이 경계를 정의한다’. 단면 위의 한 점이 경계이고, 숫자는 그 점의 연대를 보정해 표시한 값일 뿐이다.

그래서 연대 측정법이 새로워지면 황금못의 수치 연대는 바뀔 수 있어도 경계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2026년 6월판 국제연대층서표에서도 아니수스조, 올레네크조, 우자핑조 등 몇몇 밑 경계의 수치 연대를 조정했다. 그러면서 이런 보정과 황금못의 정의는 별개의 일이라고 밝혔다.

정수 연대에 대한 비판은 간단명료하다.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관찰 가능한 지질 변화와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전반적인 방향은 순수한 숫자로 된 경계를 가능한 한 대비할 수 있는 암석 기록으로 바꾸는 쪽이다. 에디아카라계 밑 경계는 이미 자리 잡은 선례다. 크라이오제니아계 소위원회도 지금까지 ‘암석에 근거한 밑 경계 황금못을 세워 종전의 순수 연령 경계를 대체하는 일’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못이 움직일 수도 있을까. 그렇다. 광시 라이빈, 훙수이허 강변에 펑라이탄이라는 단면이 있다. 2004년 그곳이 로핑통 밑 경계의 세계 기준점으로 비준되었다. 로핑통은 페름계의 맨 위 구간이다. 나중에 하류 첸장에 다텅샤 수리시설이 들어섰고, 저수지에 차오른 물이 라이빈까지 밀려 올라왔다. 그 못은 이후 일 년 내내 물속에 잠겨 있다. ‘오랫동안 찾아가 반복해서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더는 충족할 수 없게 되었다.

국제 실무단은 원래 단면의 물가에서 새로운 지층 구간을 찾고, 류저우 외곽 펑산 단면에 표준 보조 단면도 세웠다. 2023년 7월 24일, 국제지질과학연맹이 이 이전을 승인했다. 국제 표준 하나가 저수지 하나에 잠겼다.

이것만의 일도 아니다. 실루리아기의 에어로니아조와 텔리치조 황금못 두 개는 2024년 통째로 새로운 기준 단면으로 옮겨졌다. 국제층서위원회는 이를 그해 연대층서표의 주요 갱신 사항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더 일찍에는 같은 단면 안에서 층준을 옮긴 일도 있었다. 실루리아계 밑 경계는 원래 표지로는 대비가 잘되지 않아 같은 단면의 다른 층으로 옮겨진 적이 있다.

옮기지 않은 채 훼손될 위험도 있다. 프랑스에 있는 세노마니아조의 황금못은 승인 후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현장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승인된 황금못도 정기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빙핵이나 시추공 안에 있는 ‘점’에는 영구 표지를 설치하기조차 어렵다. 제도에 물이 새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도 있다.

노두 하나가 훼손되었다고 전 세계의 연대 체계까지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대비를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최초의 정의, 공식 기재, 보조 단면, 여러 생물학적·화학적 표지, 그리고 뒤따르는 보정망이다. 황금못의 그 점은 이름을 최종적으로 붙들어두는 닻이다. 사용자 모두가 직접 찾아가 한 번씩 만져야 하는 곳이 아니다.

반대쪽도 사실이다. 너무 자주 바꾸면 이름이 흔들린다. 그래서 찬성 60퍼센트라는 문턱과 10년의 냉각기간은 관료주의가 아니다. ‘바꿀 수 있어야 한다’와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사이에서 고른 자리다.

3 열여덟 표

지금까지 이 제도의 성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일은 2024년에 있었다.

인류세 실무단은 2023년 10월 31일에 정식으로 안을 제출했다. 인류세를 신설하고, 이에 해당하는 조도 제안했다. 밑 경계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크로퍼드호의 연층 퇴적물 가운데 1952년에 해당하는 층을 정했다. 세계적으로 대비할 핵심 신호는 플루토늄 동위원소의 급증이었다.

플루토늄은 자연계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원소다. 20세기 중엽의 핵실험이 이를 지구 전역에 뿌렸고, 그 결과 세계 각지의 퇴적물에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 연층 퇴적물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마다 한 층씩 쌓여 층층이 셀 수 있는 호수 바닥 퇴적물이다.

크로퍼드호 바닥의 물은 일 년 내내 표층수와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라앉은 얇은 층들이 해마다 겹겹이 쌓여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제안에는 일본 벳푸만, 중국 지린성의 쓰하이룽완 마르호, 폴란드의 한 이탄지 등 여러 보조 단면도 포함되었다.

왜 하필 1952년인가. 그해에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있었다. 이 실무단은 2009년부터 작업했다. 내부에서는 이미 2019년에 투표했고, 서른세 표 가운데 스물아홉 표가 20세기 중엽을 밑 경계로 삼아 공식화하는 데 찬성했다. 그러나 첫 수소폭탄 실험의 해를 기념해서만은 아니다. 퇴적물에 남은 대비 가능한 플루토늄 변화가 중요했다. 달력의 사건과 코어 속 실제 표지를 곧바로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2024년, 제4기 층서 소위원회의 투표 결과는 이랬다. 반대 열두 표, 찬성 네 표, 기권 두 표. 필요한 60퍼센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제층서위원회 집행기구는 이어서 이 부결을 확인했고, 공식 성명은 인류세를 정식 단위로 국제연대층서표에 넣지 않는다고 확정했다. 비공식 용어로는 그대로 계속 쓸 수 있다.

절차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소위원회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투표의 개시와 시행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과학 뉴스는 이를 절차상 적절성을 둘러싼 분쟁으로 보도했다. 위원들의 임기, 누가 표결을 시작할 권한을 갖는지, 제안이 충분히 다루어졌는지도 쟁점이었다.

결국 상급 기구는 결과를 뒤집지 않고 투표가 유효하다고 확인했다. 정확히 쓰면 이렇다. 소위원회 지도부가 투표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고, 상급 기구는 그 결과가 성립한다고 판정했다. 양쪽의 층서학적 근거는 모두 만만치 않았다.

찬성 쪽은 말했다. 20세기 중엽은 세계의 퇴적 기록에 동시성이 매우 높고 오래 보존되며 여러 지표로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신호를 남겼다. 방사성 핵종, 특히 플루토늄이 제공하는 표지는 많은 전통적 생물 사건보다 전 지구적으로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면에 가깝다.

‘인간의 영향은 훨씬 일찍 시작되었다’는 반론에는 이렇게 답했다. 연대층서 단위의 밑 경계가 그 단위의 이름이 가리키는 현상의 가장 이른 원인과 일치해야 할 이유는 원래 없다. 다른 황금못도 마찬가지다. 해야 할 일은 가장 잘 대비할 수 있는 기준 층준을 고르는 것이다. 인과 과정은 오래 이어질 수 있지만, 경계선은 여전히 동시적인 한 점에 정의할 수 있다.

반대 쪽도 20세기 중엽에 전 지구적 신호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주 짧은 최근 퇴적 구간을 전통적인 ‘세’와 같은 등급의 공식 단위로 올려놓는다고 해서 층서 대비가 더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향’이 시작되는 시점은 기록마다 크게 다르다. 오히려 여러 시기에 걸친 사건으로 보아야 이 차이를 담아낼 수 있다. 1952년에 고정해버리면 통상 인류세에 속한다고 여기는 더 이른 영향들이 대거 단위 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니 신호가 있느냐를 다툰 것이 아니다. 이 신호가 국제 등급 체계에서 공식적인 자리 하나를 차지할 자격이 있느냐를 다툰 것이다.

그 자리는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다. 통과했다면 세계의 층서학자들은 20세기 중엽 이후의 퇴적물을 쓸 때 이 이름과 밑 경계에 맞추어 연대를 표시해야 했다. 통과하지 못했으니, 누구나 쓰지만 표에는 없는 낱말로 남는다.

이 일을 첫 절의 두 못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분명하다. 메이산의 두 못에서는 어느 층에 박을지를 다투었다. 이번 인류세에서는 표에 이 칸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다투었다.

첫 절에서 세운 구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플루토늄의 급증이 있는가는 관찰이다. 그 신호로 세계적인 대비가 가능한가는 방법 판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세’여야 하는지, 사건이어야 하는지, 비공식적인 말로 남아야 하는지는 데이터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열여덟 표가 정했고, 그 가운데 열두 표는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과학은 사회적 구성물이다’라는 뭉뚱그린 말보다 훨씬 정확하다. 연대층서표는 증거의 제약을 받되, 집단적인 표준화 결정을 필요로 하는 제도다. 증거는 수많은 안을 가로막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안을 막아낸다고 답 하나가 유일하게 남지는 않는다. 남은 한 걸음은 사람이 내딛는다. 그것도 규정된 표수에 따라 내딛는다.

4 나무 한 그루, 표 한 장

두 번째로 구축된 틀은 생명의 나무다. 오늘날 이 나무의 모습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차례로 포개진 결과다.

첫 번째는 1735년에 나온 린네의 『자연의 체계』다. 초판은 놀랄 만큼 얇아 겨우 십여 쪽이었다. 그는 자연의 사물들을 중첩된 등급으로 조직했다. 계 안에 강이, 강 안에 목이, 목 안에 속이, 속 안에 종이 들어간다. 문과 과는 나중에 추가되어 오늘날 익숙한 ‘문·강·목·과·속·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체계의 처음 임무는 공통 조상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식별하고 이름 붙이고 배열하는 것이었다. 식물학에서 린네 자신도 둘을 구별했다. 하나는 동정하기 편한 체계였고, 다른 하나는 원하지만 아직 만들지 못한 ‘자연의 체계’였다. 훗날 그가 정해진 몇 가지 등급만을 고집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새로운 역사 연구는 그 설명이 부정확하다고 본다. 린네는 이 등급들을 정보를 정리하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200여 년 뒤의 일이다. 1950년 헤니히가 독일어로 하나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했고, 1966년 영어판이 그 주장을 영어권에 퍼뜨렸다. 핵심 변화는 분류가 공통 조상의 관계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적인 자연 분류군은 한 조상과 그 후손 전부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포함한다. 이를 단일계통군이라 한다. 생김새가 닮았느냐, 누가 ‘한 단계 더 높아 보이느냐’에 따라 묶는 것이 아니다.

이 규칙의 결과로 가장 자주 드는 예가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물고기’는 자격을 갖춘 분류군이 아니다. 모든 물고기의 마지막 공통 조상과 그 후손 전부를 넣으려면, 뭍의 네 발 달린 동물들도 들어가야 한다. ‘물고기’라는 이름이 더는 자연 분류군을 가리키지 않게 하든가, 네발동물까지 함께 담든가 해야 한다.

17편의 그 문장은 같은 규칙의 다른 면이다. 새는 공룡의 먼 친척이 아니라 공룡 안에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파충강’도 자격을 잃는다. 새를 넣든가, 자연 분류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든가 해야 한다. 이런 불편은 분류학자가 괜히 말썽을 부려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 전에 정한 이름들에 하나의 규칙을 적용하면 반드시 생기는 마찰이다.

1965년에는 세 번째가 더해졌다. 단백질과 핵산의 서열은 진화사를 담은 문서라는 주장이 정식으로 제기되었다. 달라진 것은 ‘나무’라는 기하학적 틀이 아니었다. 어떤 증거로 나무를 만들 수 있는지, 또 어떻게 나무를 추정할지가 달라졌다. 이 세 가지가 포개지자 문제가 드러났다.

분기 관계가 충분히 구분된 나무는 계속 아래로 갈라질 수 있다. 몇 층으로 갈라지든 상관없다. 그런데 ‘문·강·목·과·속·종’에는 고작 여섯일곱 층밖에 없다.

이 충돌은 어느 분류군이 일으킨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나무의 모양과 등급 목록의 모양은 서로 동등하지 않다. 자매 관계인 두 계통은 나무 위에서 나란한 두 갈래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나중에 수천 종이 갈라져 나오고, 다른 쪽에는 세 종만 남았다고 하자. 나무로 보면 같은 급이지만, 표에 넣으려면 누군가 어느 쪽을 강으로, 어느 쪽을 과로 삼을지 정해야 한다. 그래서 단일계통성을 엄격히 관철하려 할 때는 흔히 세 가지 길만 남는다. 전통적인 분류군의 범위를 바꾸거나, 중간 등급을 대거 늘리거나, 아예 일부 등급을 버리는 것이다.

1990년부터 두 학자가 그 세 번째 길을 제안했다. 이름을 어떤 계통에 직접 정의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갑과 을의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 및 그 후손 전부’라고 정하고, 그것이 무슨 등급이어야 하는지는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나중에 정식 계통발생 명명 규약으로 만들어져 실제로 등록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규약은 기존의 동물 명명 규약, 식물 명명 규약과 나란히 운영된다. 제도화되었고 등록도 가능하며 영향도 뚜렷하다. 다만 전통적인 규약만큼 보편적인 관할권을 얻지는 못했다.

반대 의견은 다섯 갈래로 나뉘며, 하나같이 구체적이다. 나무에 관한 가설이 바뀌면 마디를 기준으로 정의한 이름의 범위가 이리저리 뛸 수 있다. 등급을 없애면 ‘강·목·과’처럼 오랜 세월 쌓인, 빠르게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잃는다.

수백 년 묵은 이름들을 모두 새 정의로 옮기는 일 자체가 또 한 차례의 불안정을 만든다. 화석의 나무 위 자리가 불안정하면 정의가 의지하는 몇몇 참조점도 따라 움직인다. 두 규약이 공존하면 소통 비용이 늘어난다.

찬성 쪽은 답한다. 전통적인 체계도 나무가 바뀌면 이름을 바꾸며, 등급들 사이에는 원래 통일된 생물학적 척도가 없다. 그러니 쟁점은 ‘안정이냐 불안정이냐’가 아니다. 이름이 차지하는 등급의 자리를 안정시켜야 하는가, 이름이 가리키는 계통을 안정시켜야 하는가가 쟁점이다.

이름의 경계를 바꾼 낱말 묶음도 있다. 1979년, 왕관군·줄기군·전체군이라는 용어들이 정립되었다. 왕관군은 오늘날 살아 있는 구성원들의 마지막 공통 조상과 그 후손 전부다.

줄기군은 그 조상보다 먼저 갈라져 나갔고 오늘날 후손을 하나도 남기지 못한 가까운 친척들이다. 둘을 합치면 전체군이다. 20편에서는 부채에 비유했다. 부채 손잡이 위쪽이 왕관군이고, 손잡이 아래쪽에서 끊어진 갈래들이 줄기군이다. 단, 다른 어떤 현생 집단보다 해당 왕관군에 더 가까워야 줄기군에 속한다. 먼저 갈라진 모든 멸종 가지가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분류는 한 이름이 왕관군만 뜻하는지, 더 이른 줄기 친척까지 포함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왕관군은 현생 구성원의 마지막 공통 조상과 그 모든 후손으로 이루어지므로 멸종한 구성원도 포함한다. 엄밀한 정의가 전통적 구성원을 제외할 수는 있지만, 왕관군이 곧 ‘오늘 살아 있는 것들만’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언어가 바꾸는 것은 꼬리표의 수가 아니라 이름의 경계가 뜻하는 바다. 해결하지 못한 것도 분명히 적어야 한다. 줄기군 자체는 특정 왕관군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측계통적 집합이다. 화석의 나무 위 자리가 움직이면 줄기군이라는 신분도 따라 바뀐다. 나무는 끝없이 아래로 갈라질 수 있지만, 표에는 여섯일곱 층의 칸밖에 없다. 나무를 표에 넣으려면 어딘가는 억지로 밀어 넣어야 한다.

5 나무로는 부족할 때

더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 어떤 역사는 애초에 나무 한 그루가 아니다.

2편에서 보았듯 생명의 나무 뿌리는 유전자의 수평 이동으로 뒤엉켜 나무 모양으로 그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이 일은 뿌리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잡종화, 재조합, 계통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전자의 이동은 오직 두 갈래로만 나뉘는 분기로는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계통발생 네트워크가 발전했다. 종이에 그리면 나무와의 차이는 한눈에 보인다. 나무의 선들은 갈라질 뿐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네트워크에서는 갈라진 두 선이 연결선 하나로 다시 이어질 수 있다. 그 연결선이 그리는 것은 잡종화이거나, 유전자 한 조각이 한 갈래에서 다른 갈래로 옮겨간 일이다.

‘숲’도 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 하나는 유전자마다 서로 다른 나무가 나온다는 뜻이다. 연구자는 처음부터 한 그루가 아니라 나무 한 묶음과 마주한다.

곰의 유전체 연구가 바로 그 예다. 유전체를 구간마다 나누어 나무를 만들면 한 그루가 아니라 한 묶음이 나온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조상 집단 안에 원래 여러 버전의 유전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갈라설 때 어느 갈래에 어떤 버전이 나뉘어 갔는지에는 우연이 끼어 있다. 다른 하나는 갈라선 뒤에도 잡종화가 일어나 유전자가 다시 건너갔다는 점이다.

둘이 합쳐지면 수많은 유전자 자리들이 저마다 다른 나무를 지지할 수 있다. 다른 용법은 더 형식적이다. 서로 겹치지 않는 나무 여러 그루에 연결선을 보태어 계통 사이의 그물 같은 관계를 나타낸다.

‘숲’이 표현하는 것은 그림체가 아니라 역사 자체의 이질성이다. ‘고리’도 있다. 2004년에는 진핵생물의 ‘생명의 고리’가 제안되었다. 두 조상 유전체가 한 계통으로 합류한 관계를 고리로 나타낸 것이다. 5편에서 다룬 그 합류는 나무로 그릴 수 없다. 나무는 갈라질 줄만 알지 합쳐질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정한 깊은 계통 관계를 위한 모형이지, 모든 생명을 고리로 그려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나중에는 그 데이터와 추론법을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보편적인 생명의 나무 한 그루를 포기해야 할까. 아주 분명한 답이 있다. 서로 다른 유전자와 과정과 층위가 애초에 하나의 공통된 나무형 역사를 갖지 않는다면, ‘나무 한 그루’를 지키겠다고 모든 패턴을 같은 위상구조에 억지로 넣지 말아야 한다. 질문이 다르면 타당한 표현도 다를 수 있다.

나무가 잃은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보편성이지 유효성이 아니다. 수직 유전이 중심인 수많은 국소적 문제에서 나무는 여전히 효율적이고 검증할 수 있는 모형이다. 다만 쓰기 전에 물어야 한다. 이 문제의 역사는 나무 모양인가.

이 나무에는 수를 세는 단위 체계도 딸려 있다. 그 단위 역시 사람이 만들었다. 첫 절의 세 층위는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이 단위를 정했다고 해서 그 단위로 세어낸 것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몇 문단도 이 구분에 따라 읽으면 된다.

서로 다른 종 개념과 구획 기준은 같은 생물학적 연속체를 서로 다른 수의 종으로 나눌 수 있다. 속에서는 더 뚜렷하다. 속의 범위는 연구 전통이나 분류군에 따라 서로 동등하지 않다. 하나의 속이 어느 정도의 차이까지 포함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통일된 이론은 없다. 22편의 서른다섯 속이 바로 그 예다. 어떤 속은 다른 속에 합쳐졌고, 어떤 속은 통째로 유인원 목록에서 빠졌으며, 어떤 속은 새로 분리되어 나왔다.

통계 단위를 구축했다고 해서 통계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실제 분류를 어떻게 했는지 분명히 밝히고, 속 수준과 종 수준을 바꾸었을 때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비교하며, 이름의 개정과 실제 다양성 변화를 따로 계산해야 한다. 속 수준의 데이터로 종 수준의 추세를 대신할 수 있는지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판정한다.

현생누대의 다양성 곡선도 이렇게 한 단계씩 다시 만들어졌다. 가장 이른 판은 해양 무척추동물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왔다. 모양은 이랬다. 전기 고생대에 빠르게 증가하고, 중생대에서 신생대에 걸쳐 다시 팽창한다. 그 사이에 몇 차례 대멸종의 골짜기가 끼어 있다.

2001년부터 원래의 분류군 수가 표본 채집의 강도와 뚜렷하게 맞물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표본추출을 표준화하자 곡선의 여러 봉우리와 골짜기, 장기적인 기울기가 달라졌다. 뒤이어 공간적으로 고르지 못한 표본추출을 다룬 연구에서는 전 지구적 곡선의 일부 고생대 봉우리, 특히 페름기의 봉우리가 크게 낮아졌다. 어느 시기에 더 많은 지역에서 표본을 채집했다는 것과, 그 시기의 세계에 정말 더 많은 분류군이 있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렇다고 보정이 현생누대를 평평한 선 하나로 눌러버리지는 않았다. 대멸종에 따른 하락과 그 뒤의 회복, 중생대에서 신생대에 걸친 광범위한 팽창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가장 신중한 결론은 양쪽 모두를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줄곧 단조롭게 증가했다’는 말은 너무 강하고, ‘보정하고 나면 장기적인 증가는 전혀 없다’는 말도 너무 강하다.

곡선 밑에는 또 한 층이 있다. 오늘날 이런 곡선은 공개 고생물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그려진다. 데이터베이스의 기록 하나하나는 어떤 논문에서 왔고, 누군가가 입력했다.

따라서 데이터베이스 곡선 하나에는 네 가지가 함께 들어 있다. 원래의 지질 기록, 발표의 역사, 분류의 수정, 데이터베이스 자체의 규칙이다. 출처를 공개하고 문헌을 추적할 수 있게 하며 여러 사람이 재검토하는 것은 바로 개인의 주관성을 층층이 눌러 줄이기 위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이 나무는 표본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표본이 누구 손에 있는지는 몹시 불균등하다.

수많은 모식표본과 핵심 비교 표본이 식민지 시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대형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비교 자료와 역사 문헌도 그곳에 집중되었다. 그러니 오늘날 불법 채집이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연구자가 어떤 논문의 근거가 된 표본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여행 경비, 비자, 연구비, 소장품의 공개 정도에 달려 있다. 개인 소장품이 팔리거나 사라지거나 접근을 금지당하면 이 사슬은 끊긴다.

고생물학에서 재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은 ‘공룡을 한 마리 다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표본을 다시 꺼내 한 번 더 볼 수 있느냐는 뜻이다.

6 한 줄의 행렬

세 번째로 구축된 틀은 ‘생명의 역사’라는 이야기 방식 자체다. 1965년 미국의 한 대중 자연과학 총서에서 『초기 인류』가 나왔다. 책임 편집자는 클라크 하월이었다.

책에는 여러 쪽에 걸쳐 펼쳐지는 접지 그림이 하나 있었다. 루돌프 잘링거가 그린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길」이다. 열다섯 형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늘어서 있고, 마지막은 현대인이다.

열다섯 가운데 처음 다섯은 플리오피테쿠스, 프로콘술, 드리오피테쿠스, 오레오피테쿠스, 라마피테쿠스다.

모두 마이오세의 동물이고, 그중 넷은 바로 앞의 22편에서 다루었다. 프로콘술은 2015년에 분할되었다. 루싱가섬 자료 대부분이 새 속으로 떨어져 나가고, 옛 속명이 가리키는 범위는 아주 좁아졌다. 드리오피테쿠스의 속 경계는 여러 번 넓어졌다 좁아졌다. 한때 여러 지역의 자료를 담았지만, 지금은 유럽의 작은 무리만 가리킨다.

오레오피테쿠스는 이탈리아의 섬에서 극도로 특수화된 갈래다. 계통수에서의 자리는 전혀 다른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다. 라마피테쿠스는 1982년에 통째로 시바피테쿠스에 합쳐져 속명 자체가 사라졌다.

맨 앞의 플리오피테쿠스는 플리오피테쿠스류라는 커다란 갈래에 이름을 준 속이다. 오늘날의 분류에서 이 갈래는 유인원과 원숭이가 갈라지기보다도 먼저 분기했다. 22편에서 2024년에 유인원 목록 밖으로 옮겨진 속을 다루었는데, 옮겨간 곳이 바로 이 갈래다. 행렬의 첫 주자는 유인원이 아니다. 원래 그림에는 나중에 잘려나간 것 두 가지가 더 있었다.

하나는 위쪽의 색깔 시간 막대다. 각 분류군이 존재한 시대와 지속 시간을 표시했다. 막대 자체가 행렬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여러 갈래가 한때 함께 살아 있었다. 하나가 퇴장해야 다음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설명문이다. 거기에는 꽤 분명히 적혀 있었다. 오레오피테쿠스는 ‘곁가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파란트로푸스는 ‘진화의 막다른 길이다’.

라마피테쿠스 아래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지금 일부 전문가는 이것을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직계 조상으로 본다. 17년 뒤 그 속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훗날 널리 퍼진 판에서는 시간 막대도 사라지고 글도 사라졌다. 열다섯 형상은 대여섯으로 잘려나가고, 허리를 굽힌 몸에서 곧게 선 몸으로, 작은 키에서 큰 키로 이어지는 행렬만 남았다. 원작의 ‘이것은 곁가지다’, ‘이것은 막다른 길이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남지 않았다.

그 행렬은 이후 광고와 만화, 온갖 포스터에서 거듭 모방되며 원래 설명에서 점점 멀어졌다. 이 시각적 관습을 대놓고 잘못된 진화 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개인의 부주의만으로 생긴 일이 아니다. 하나의 시각 문법이 글을 눌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문법의 효과는 측정할 수 있다.

2008년, 중학교·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생물 교과서 서른한 권의 진화 그림을 분석한 연구가 있었다. 후속 논문은 그 표본에 대해 이런 수치를 보고했다. 뚜렷한 선형 요소가 있는 그림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약 67퍼센트, 대학 비생물학 전공자용 입문 교과서의 약 50퍼센트, 대학 생물학 전공자용 입문 교과서의 약 83퍼센트에 실려 있었다. 즉 드문 현상이 아니라 대다수 교과서에 하나씩은 있는 그림이었다. 특히 두 가지 예에 집중되었다. 인간과 말이다.

말의 행렬도 한번 보자. 교과서는 말 화석을 흔히 작은 것부터 큰 것으로 한 줄에 세운다. 발가락은 많았다가 적어지고, 몸집은 개만 한 크기에서 오늘날의 크기로 자란다.

하지만 이 역사의 실제 모양은 한 줄이 아니라 덤불이다. 수많은 계통이 동시에 존재했다. 커진 것도 있고 작아진 것도 있었다. 세 발가락을 아주 늦게까지 간직한 것도 있었으며, 대부분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한 줄에 세워진 몇몇은 그 덤불에서 골라낸 것이다.

2011년 실험은 더 직접적이었다. 대학생 108명이 세 가지 유형의 그림을 읽었다. 하나는 교과서에서 흔히 보는 선형 그림, 하나는 계단 모양으로 그린 가지 그림, 하나는 나무 모양으로 그린 가지 그림이었다.

뒤의 둘은 위상구조가 완전히 같고 그리는 방식만 달랐다. 선형 교과서 그림은 ‘한 종이 다음 종으로 변했다’고 읽게 할 가능성이 유의하게 높았고, 나무 모양 그림은 그 가능성이 가장 낮았다. 연구진은 생물학 배경지식이 더 탄탄한 학생도 완전히 면역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확인했다.

다시 말해 방향감은 비평가의 직감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을 읽을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면 나무로 그리기만 하면 안전할까. 아니다.

나무의 각 마디에서는 왼쪽과 오른쪽 가지를 얼마든지 돌려도 위상구조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페이지 위쪽이나 오른쪽 끝에는 ‘더 나중’이라거나 ‘어떤 목표에 더 가깝다’는 뜻이 없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모든 끝가지는 같은 길이의 시간을 지나왔다. 어느 가지를 맨 오른쪽 위에 그려도 위상구조상 틀리지 않지만, 눈에는 순위처럼 보인다.

‘곁가지’라는 말도 위험하다. 나무의 위상구조에서 보면 공통 조상에게서 갈라진 두 현생 자매 계통 사이에 타고난 본줄기와 곁줄기는 없다.

‘큰 줄기는 줄곧 이곳으로 이어지고, 나머지는 중간에서 비켜 나갔다’는 그림은 흔히 지면 배치의 선택일 뿐이다. 특정 왕관군을 명시적으로 논할 때만 ‘줄기’는 앞 절에서 본 엄격한 뜻을 갖는다. 시간 비율에서도 같은 문제가 생긴다.

지구 역사를 1년으로 압축하면 비율이 전혀 일그러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1년 안의 위치가 전체 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직접 대응한다. 이 척도에서 캄브리아기는 11월 18일 무렵 시작하고, 공룡은 12월 26일에 멸종한다. 마이오세의 끝, 곧 22편이 이른 곳은 대략 12월 31일 오후다.

문제는 주의가 쏠리는 방식이다. 수십억 년이 앞쪽 몇 달에 욱여넣어지고, 익숙한 최근 사건들은 12월의 마지막 며칠, 심지어 마지막 몇 초에 몰린다. 하루로 압축하면 더 심하다. 초 단위 차이는 아예 체감하기 어렵다. 독자는 ‘인간적 시간은 자정 직전 1초밖에 안 된다’는 말은 기억하면서, 그 이전 각 단계 사이의 엄청난 간격은 잊을 수 있다.

시간을 복도 하나나 줄 한 가닥, 교정의 길 한 구간에 펼쳐놓으면 몸으로 걸으며 비율 감각을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길을 어떻게 나누고, 어디에 이정표를 세우고, 어디에서 멈춰 오래 설명할지가 다시 주의를 배분한다. 1미터당 시간이 같다고 해서 1미터당 이야기의 무게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비유가 가장 덜 왜곡할까. 그런 결론을 내릴 만한 대규모 비교 연구는 찾지 못했다.

7 상전이 칸을 세 번 고치다

생명사를 한 줄로 세우는 데는 더 학술적인 방식도 있다. 중대한 전환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1965년의 그림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1995년, 두 생물학자가 훨씬 진지한 틀을 제시했다. ‘진화의 중대한 전환’이다. 보통 여덟 항목으로 든다. 분자 복제자에서 구획 안의 분자 집단으로.

독립적인 복제자에서 염색체로. 리보핵산이 유전자와 효소를 겸하던 체계에서 디옥시리보핵산과 단백질이 일을 나누는 체계로. 원핵에서 진핵으로. 무성 클론에서 유성 집단으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홀로 사는 개체에서 번식하지 않는 계급이 있는 사회로. 마지막 항목은 영장류 사회에서 언어가 있는 사회로의 전환이다.

이 틀은 여러 규모에 걸친 질문 하나를 풀려 했다. 생명의 역사에서는 원래 따로 복제하고 각자 경쟁하던 단위들이 더 큰 단위의 구성 요소가 되는 변화가 되풀이되며, 동시에 새로운 유전 방식과 정보 전달 방식이 나타난다. 같은 언어로 염색체, 세포, 진핵, 다세포, 사회성, 언어를 연결하려 한 것이다.

훗날 이 틀이 가장 많이 비판받은 지점도 바로 여기였다. 잡다한 것을 한데 넣은 자루라는 것이다. 더 높은 층위의 부분과 전체 관계를 만드는 일, 번식 방식을 바꾸는 일, 새로운 정보 부호화 체계를 세우는 일, 세포 내 공생이 일어나는 일은 자명하게 같은 종류의 현상이 아니다. 철학 분야의 종설들은 바로 이 점을 이 틀의 주요 개념적 문제로 꼽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2011년 무렵 이 틀을 다시 평가하는 논문집이 나왔다. 한편 다른 연구자들은 관심을 더 단일한 문제로 좁혔다. 원래 각자 번식하고 각자 선택을 받던 단위들이 어떻게 더 높은 층위에서 선택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개체를 이루는가.

이 길은 원래 목록보다 좁지만 판정 기준은 훨씬 통일되어 있다. 2026년에도 이런 전환이 되돌릴 수 있는 것인지,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 실험실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여전히 논의한다. 이미 결론 난 역사적 틀이 아니라 지금도 돌아가는 연구 계획이다.

2015년에는 원래 저자 가운데 한 명이 직접 고쳐 쓰기 시작했다. 그는 20년 전의 이론을 재구축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모든 후보를 하나의 기준에 억지로 넣는 대신, 개체성의 전환과 유전·정보 체계의 혁신을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두 차원으로 다루었다.

그 결과 성은 지위가 내려갔다. 무성 클론에서 유성 집단으로의 변화는 더는 ‘새로운 상위 개체의 형성’과 같은 의미의 중대한 전환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동시에 색소체의 세포 내 공생 기원이 새로 들어왔다.

선구적인 목록 하나가 20년 뒤 자기 저자의 손으로 한 항목을 잃고 한 항목을 얻었다. 판정 기준까지 바뀌었다.

2022년에는 철학 종설이 아예 이렇게 지적했다. 30년 동안 ‘중대한 전환’이라는 말은 이미 여러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기준을 적지 않으면 ‘중대하다’는 말은 ‘연구자가 보기에 특별히 중요하다’는 말로 쉽게 퇴행한다. 그래서 지금은 매번 분명히 하는 편이 낫다. 새로운 개체 층위를 말하는가, 새로운 유전 체계를 말하는가, 새로운 협력 구조인가, 아니면 거시적인 생태적 영향인가.

이 문제는 이 연재와 직접 관련이 있다. 이 연재에도 그런 목록이 있기 때문이다.

10편은 ‘상전이’를 선택 단위가 바뀌는 순간으로 정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세 질문으로 나누었다. 원래 독립적으로 복제하던 단위가 독립적인 번식 능력을 잃었는가. 적합도를 하나로 떠맡는 새로운 번식 실체가 나타났는가. 하위 단위 사이의 갈등이 어떤 기제로 체계적으로 낮아졌는가. 셋 다 성립해야 층위가 바뀌었다고 부른다.

이 세 질문은 1995년 목록의 일부만 다룬다. 누가 번식하고 누가 적합도를 떠맡는가라는 개체의 층위만을 다룰 뿐, 정보 체계라는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6편의 유성생식은 고전적 목록에서는 한 항목이지만, 이 연재의 기준에서는 아니다. 그 편에서는 ‘보강’이라고 썼다. 두 목록은 맞바꾸어 쓸 수 없다. 이 어긋남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준을 세우고 나자, 거꾸로 이 연재 자체의 목차를 세 번 고치게 되었다.

12편. 개요의 상전이 칸에는 원래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 질문을 하나씩 대어보니 육지 진출에는 하나도 성립하지 않았다. 물고기가 얕은 물로 들어가고, 식물이 뭍에 오르고, 절지동물이 공기로 숨 쉬기 시작할 때 새로운 상위 층위의 번식 개체가 조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 칸은 세 줄로 바뀌었다. 선택 단위의 변화, 없음. 생태계 피드백과 지표 상태의 변화, 있음, 그것도 매우 강함. 환경으로 내보낸 산물을 이후 생태적 지위의 바탕 재료로 바꾸는 일, 직접적인 물질 증거가 있음.

16편. 개요에는 역시 ‘있음’이라고 되어 있었다. 세 질문을 대어보니 ‘진사회성’ 전체에 하나의 예나 아니오로 답할 수 없었다. 어떤 계통에서는 일개체가 발달하는 동안 기능성 난소가 아예 생기지 않는다. 집단이 번식 개체를 잃어도 되돌아갈 수 없다.

어떤 계통은 행동과 내분비 수준에서 억제될 뿐이어서 주 번식 개체가 죽으면 다른 구성원이 알을 낳는다. 그 칸은 ‘일부 계통에서는 완성되었고, 다른 일부에서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짐’으로 바뀌었다.

21편은 ‘역방향’의 자리를 남겼다. 세 질문으로 다섯 후보를 검토한 결과 셋은 제외되고 둘은 부분 통과했다.

더 이른 지점에도 하나 숨어 있었다. 개요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다. 당시 ‘층위가 바뀐다’는 말에는 두 용법이 있었다. 하나는 선택 단위가 바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 층위의 잔여항이 다음 층위의 건축 재료가 된다’는 것이었다. 산소는 남세균의 폐기물이었지만, 훗날 행성 전체의 화학적 환경을 다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1995년 목록이 비판받았던 그 뒤섞기다. 10편에서 정의를 좁힌 일은 2015년의 개정과 같은 동작이다. 규모가 훨씬 작을 뿐이다. 이런 목록에는 더 막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더 높은 층위의 전체를 형성한’ 변화만 적고, 단순화와 해체, 실패한 연합, 오랫동안 상위 층위로 올라가지 않은 계통을 적지 않으면, 목록은 시각적으로 절로 한 방향을 향한다. 이 연재는 일부러 상전이가 일어나지 않는 다섯 편을 두어 이를 막으려 했다. 여기에 21편 전체가 뺄셈을 다루고, 8편은 다세포성이 스무 번 넘게 독립적으로 생겨났지만 대부분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후손을 남긴 전환만 목록에 오른다’는 식의 사후 판단을 정량적으로 검증한 핵심 논문은 찾지 못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중대하다’는 평가가 흔히 뒤돌아본 뒤에 붙는다는 점이다.

틀이 자기 기준에 따라 고쳐질 수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과학에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 오늘날 남은 흔적에서 출발해, 과거의 공통 원인에 관한 여러 가설을 비교한다. 그런 다음 경쟁하는 설명을 배제할 핵심 흔적 하나를 찾아간다. 화산재층, 동위원소 이상, 충격 광물, 뼈의 병변, 분자 서열은 모두 흔적이다.

과거의 사건을 재연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사건에 관한 가설을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원인 하나는 암석의 성질, 생물, 화학, 자성 등 여러 기록에 동시에 결과를 남긴다. 그리고 자신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결과를 남기므로, 나중에도 새로운 검증 단서가 나타날 수 있다.

8 잔여항은 연장선 위에 있다

이제 시선을 이 연재 자체로 돌리자. 이 글은 23편이며 마지막 편이다.

연재는 스물세 편이고, 뼈대는 시간순으로 짜였다. 첫 편은 생명의 경계를 다루었고, 마지막 편은 지금 이 글이다. 앞의 스물두 편을 한 줄로 늘어놓는 일 자체가 네 가지 동작을 했다. 어느 편에도 적혀 있지 않은 네 가지다.

첫째, 사건을 고른다. 30억여 년 동안 벌어진 일 가운데 스물두 가지가 골라져 편목이 되었다. 왜 색깔을 다룬 편은 있고 후각을 다룬 편은 없는가. 이 선택은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둘째, 시간의 몫을 배분한다. 앞의 아홉 편은 생명의 시작부터 캄브리아기 이전까지 30억여 년을 다룬다. 뒤의 열 편은 캄브리아기부터 마이오세까지 5억여 년을 다룬다. 시간 칸을 차지하지 않는 편도 셋이다. 둘은 방법을 다루고,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일어나는 방향을 다룬다.

평균하면 앞쪽 한 편이 뒤쪽 일곱 편에 해당하는 시간을 감당한다. 지구 역사를 1년으로 압축하는 방식에는 누구나 알아보는 문제가 있다. 최근의 일이 12월 마지막 며칠에 몰린다는 것이다. 이 연재의 목차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 조금 덜할 뿐이다.

셋째, 어떤 일들을 하나의 인과 사슬로 연결할지 정한다. 대산소화와 진핵세포 사이에 선이 있는가. 이 연재는 선 하나를 그었다. 그러나 그 선은 선택한 것이지, 증거 속에 저절로 자라나 있던 것이 아니다.

넷째,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어떤 일이 중요했는지 정한다.

이 네 동작은 진화사 서술을 연구한 한 학자가 1992년에 짚어낸 것이다. 그 학자가 남긴 말 가운데 이 연재에 더 중요한 문장도 있다. 역사적 재구성은 흩어진 증거를 선후 관계와 조상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가 증거를 대신해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만들어내어서는 안 된다.

이야기 자체가 목적론인 것은 아니다. 과학의 여러 분야는 서사로 전개 과정을 조직한다. 서사에는 시간과 인과만 있고 목적도 주인공도 종착점도 없을 수 있다. 마지막에 누가 이기지 않아도 ‘역사’는 성립한다.

또 하나는 드러내놓아야 한다. 이 연재는 첫머리에서 처음으로 깎아내는 자의 자리를 인간에게서 떼어내겠다고 했다. 자연선택은 형태 공간을 가른다. 목적도 편견도 없다. 그런데도 구축된 틀은 닫히지 않는다.

그 말은 첫 번째 층위에서는 성립한다. 하지만 두 번째 층위에서 깎아내는 자는 처음부터 바뀐 적이 없다. 분류하는 사람, 투표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리고 이 스물세 편을 배열한 사람이다. 의도가 없는 깎아내는 자가 구축한 틀을, 의도가 있는 깎아내는 자들이 서술한다.

이 연재는 그런 독법에 저항하려 했다. 다섯 편에 더 높은 수준의 개체성으로의 전환이 없다는 것이지, 아무 사건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세포성은 여러 번 생겼지만 모두 복잡한 분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뺄셈만 다룬 글도 한 편 온전히 두었다.

20편의 끝에는 자리를 기다리는 누구도 없었다. 22편은 잘려나간 압도적 다수를 다루었다. 그런데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22편은 마이오세 유인원에서 멈추고 이후 인간 계통을 펼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순으로 놓인 점들은 독자가 선으로 잇고 마지막 점 너머까지 연장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짐작이 아니다. 6절의 실험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한다. 한 줄로 늘어선 형상은 ‘하나가 다음 것으로 변했다’는 독해를 유도한다. 스물두 편을 시간순으로 늘어놓는 것도 같은 동작이다. 규모가 훨씬 크고 그림 대신 글을 썼을 뿐이다.

6절의 행렬 그림은 그 연장선을 실제로 그렸을 때의 모습이다. 맨 앞 다섯 형상은 22편에서 거의 다 다루었다.

이 연재가 멈춘 곳은 공교롭게도 그 그림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형상 사이에 놓인다. 뒤의 열 형상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독자는 머릿속에서 나머지 행렬을 채울 수 있다.

잔여항은 증거 속에도, 자 속에도, 모형 속에도 없다. 연장선 위에 있다. 따라서 열여섯 번째다. 잔여항은 연장선 위에 있다.

이것은 12편의 ‘잔여항은 순서 속에 있다’와 구별해두어야 한다. 그 편에서는 기록이 보여주는 선후 관계가 사건이 일어난 순서와 같지 않다고 했다. 발자국과 뼈는 서로 다른 환경을 향해 입을 벌린 두 체이기 때문이다.

이번 것은 기록과 관계가 없다. 순서가 완전히 정확하더라도 한 줄로 늘어놓는 행위 자체가 독자에게 방향을 준다. 독자는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더 간다. 앞의 것은 배열해낸 순서에서 어긋나고, 뒤의 것은 배열이 끝난 뒤 내딛는 한 걸음에서 어긋난다.

1년으로 압축한 척도에서 이 연재의 본문은 12월 31일 오후에 멈춘다. 남은 몇 시간에는 단 한 글자도 없다.

이것 역시 이 연재의 법칙이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 모습이다. 구축된 틀은 닫히지 않는다. 스물세 편으로 30억여 년을 다 늘어놓을 수도 없고, 저 연장선을 막을 수도 없다.

잔여항은 없앨 수 없다. 22편에서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고 그 한 걸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종이 위에 있던 것을 독자의 머릿속으로 옮겼을 뿐이다. 열여섯 종류의 잔여항을 펼쳐놓으면 크게 네 갈래로 묶을 수 있다.

증거와 기록에 있는 것들. 증거 바깥에, 체 속에, 순서 속에, 두 종류의 가지치기가 어긋나는 곳에 있는 잔여항이다. 자와 좌표에 있는 것들. 좌표축에, 칸의 모양에, 존재하지 않는 자에, 단위 없는 양에, 점유에 따라 움직이는 좌표계에 있는 잔여항이다.

설명과 모형에 있는 것들. 설명 자체에, 서로 환원할 수 없는 두 가지 서술에,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드는 행위에, 독립성에, 영가설에 있는 잔여항이다. 역사와 이야기 방식에 있는 것들. 반사실에, 연장선에 있는 잔여항이다.

다음에 어떤 결론을 읽으면 이 네 갈래를 따라 물어볼 수 있다. 잔여항은 어느 갈래에 놓이는가.

하지만 이 지도 자체도 구축된 틀이다. 열여섯을 네 갈래로 묶는 것은 또 한 번의 선택이다. 묶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고 갈래 수도 달라질 수 있다. 묶고 나면 묶기 어려운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 보이게 된다.

구축된 틀을 이야기하는 글도 그 자체로 구축된 틀이다. 겸손을 떠는 말이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이 글은 세 가지를 골라 ‘이 연재가 스스로 구축한 틀’이라고 불렀고, 다른 것들은 고르지 않았다. ‘종’이라는 단위도, ‘멸종’이라는 낱말도, 이 연재가 줄곧 써온 비유들도 고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 못에 돌아가자.

시간을 함께 서술하기 위해 사람은 암석의 기준점을 고른다. 지층의 위아래 순서는 원래 있었다. 못은 바다 건너에서도 대비할 수 있는 공통의 연대 언어를 준다. 여기서는 연재의 비유가 거의 문자 그대로가 된다. 망치 하나, 황동못 하나, 암벽 하나.

못 양쪽의 지층이 이름을 잃는 것은 아니다. 각각 경계 양편의 연대 단위에 속한다. 이름이 다 담지 못하는 것은 그 수십 센티미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과 바로 그 점을 고른 모든 이유다. 경계는 공통 주소를 주지만, 그 주소의 역사를 대신 다 읽어 주지는 않는다.

이 연재도 못 두 개를 박았다. 하나는 첫 편에서 어디서 시작할지를 정했다. 하나는 22편에서 어디까지 갈지를 정했다. 두 못 사이는 이 편들이고, 두 못 밖은 잔여항이다.

다음 못은 22편이 멈춘 곳에 박힐 것이다. 지금 그 자리는 비어 있다. 102개 칸 가운데 남은 스물한 자리와 똑같이 비어 있다.

이 연재는 줄곧 사다리 바깥에 서서 썼다. 6절에서 행렬을 해체할 때도 행렬 밖에 있었다. 다음 연재는 고인류를 쓴다. 다룰 대상이 바로 저 연장선 위에 있으므로 바깥에 설 수 없다.

첫 작업은 6절에서 한 일과 같다. 행렬을 해체하고, 각 형상을 하나씩 살펴 그것 자체가 무엇인지 본다. 몇 번째에 서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 이 연재는 이미 도구를 넘겨주었다.

관찰, 방법 판단, 표준화 결정. 이 세 층위는 끝까지 구별해야 한다. 잔여항이 생기는 곳은 열여섯 종류다. 왕관군과 줄기군은 경계를 그리는 언어다. 가장 꼭 가져가야 할 것도 하나 있다. 형상들을 한 줄로 늘어놓기만 하면, 독자가 그 줄을 대신 앞으로 늘여놓는다.

문단을 하나 더 쓴다고 연장선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옮겨 갈 뿐이다. 다음 연재가 멈추는 곳에서도 다른 선이 이어 쓰기를 부를 것이다. 또 하나의 점을 고르되, 양옆의 이름 붙은 지층은 그 이름보다 훨씬 많은 것을 품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펜을 놓는다. 암석은 남고 나무는 계속 갈라진다. 지금은 우리가 쓴 자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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