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 미학의 갈래 · 06 / 13 · 생물의 아름다움
계속 바뀌는데도, 흩어지지 않는다
현미경 속 작은 막대는 어떻게 살아 있는 것으로 남을까. 조용한 모습이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
현미경 영상을 확대하자 화면에 작은 막대 하나가 나타난다. 표정도 없고 카메라를 향해 무엇을 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고 느끼기 쉽다.
학명이 Schizosaccharomyces pombe인 분열효모다. 시간을 압축한 영상에서는 끝부분이 길어지다가, 분열 단계에서 가운데 칸막이가 생기고, 마침내 두 세포로 갈라진다.
영상을 중간에 멈추면 막대 하나일 뿐이다. 시간을 다시 이어야 그 막대가 놓인 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님을 본다. 주변 물질을 받아들여 대사하고 자라며 경계를 유지하면서 살아 있는 세포로 계속 남는다.
모양을 지키는 것은 안에서 아무 일도 없어서가 아니다.
조용하다고 한가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물건을 보존하는 다른 방법에 익숙하다. 잘 두고 덜 만지고 망가지기 쉬운 조건을 피한다. 내년에 꺼냈을 때 올해와 비슷하면 좋다.
세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교환을 멈췄다고 마침내 원래 모습을 지켜 준 것이 아니다. 사는 데 필요한 활동이 멈추면 모양이 잠시 남아 있더라도 이미 같은 일이 아니다.
나무도 그렇다. 창가에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줄곧 서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잎과 가지, 뿌리는 서로 다른 때에 자라고 바뀌며 물질은 흡수되고 변환되고 운반된다. 모든 부분이 같은 시계에 따라 교체되는 것도, 어느 날 온몸의 재료가 한꺼번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속도의 활동이 함께 나무의 삶을 이어 준다.
그러면 여전히 같은 생물이라는 말이 간단하지 않게 된다.
원래 재료를 봉해 놓는 것만이 보존은 아니다. 어떤 것은 계속 바뀌어야 같은 것으로 남는다. 우리가 보는 고요함은 여러 활동이 흩어지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다.
생명은 참 강인하다는 말로만 들으면 한 가지를 놓친다. 강인함은 대항하고 이기고 어려움을 버티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재난이 먼저 있을 필요도 없다. 알맞은 환경에서 세포 하나가 평범하게 살아도 이미 이 일을 하고 있다.
가운데에 선이 생겼다
영상은 이어진다. 칸막이가 생기고 분리가 끝나자 한 세포가 둘이 된다.
누가 밖에서 칼로 둘로 자른 뒤 각각 조립해 준 것이 아니다. 성장과 내부 재료의 분배, 경계를 세우는 일이 세포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새로 나뉜 둘도 손봐 줄 사람을 기다리는 조각이 아니다. 계속 자라 다음 주기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원래 개체 하나가 각각 온전히 두 번 산 것도 아니다. 이어지는 것은 생명 활동의 한 양식이지, 바뀌지 않는 이름 하나에 자리만 둘 생긴 것이 아니다.
안으로 보면 재료가 드나들면서 자신을 유지한다. 그 뒤를 보면 새 세포가 다시 그런 활동을 시작한다. 재료가 바뀌는데도 원래 활동은 어떻게 흩어지지 않는가. 같은 질문이 두 번 나타난다.
모든 생물이 번식해야만 살아 있다고 볼 자격이 있다는 요구는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관찰할 수 있는 생명의 관계를 몰래 개체의 점수표로 바꾸게 된다. 지금은 이 영상을 따라 유지와 이어짐이 여기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볼 뿐이다.
영원을 추구한다거나 후손을 위해 스스로 희생할 뜻이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영상으로 그런 동기를 알 수는 없다. 자라고 나뉘고 다시 자라는 것만 보아도 볼 것은 충분하다.
‘자기 자신’은 안에 든 작은 사람이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 같은 존재를 떠올리기 쉽다.
마치 세포 안에 더 작은 주인이 있어 다음 할 일을 알고 단추를 눌러 기계를 돌리는 것 같다. 생명을 설명하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리자를 붙이는 셈이다.
그 관리자는 필요 없다. 대사와 성장, 조절과 분열이 바로 우리가 연구하는 활동이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안다고 생명을 쫓아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세포가 다음에 어떻게 바뀔지 아직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고 자유나 주체성이 증명되었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측정이 덜 세밀하거나 모형이 부족하거나 빠진 조건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것처럼 보이는 두 세포에 차이가 나타나도 차이 자체만으로 이런 문제를 결론 낼 수는 없다.
원논문은 여기서 더 강한 해석을 제시한다. 생물이 유지하고 전하는 것에는 외부 조건만으로 손실 없이 끝까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완전히 대신 써 줄 수 없는 그 부분을 생물의 아름다움 중심에 둔다.
이는 이 글이 내세우는 철학적 주장이지 현미경에 찍힌 또 다른 기관이 아니다. 그 방향으로 볼 수 있지만 계속 질문받게 해야 한다. 과학이 이미 입증했다는 말 속에 숨기면 에세이는 자기 것이 아닌 권위를 빌리게 된다.
따라서 세포가 자신을 유지함을 알아보는 것과, 외부 설명으로 영원히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입증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앞의 일은 생각할 구체적인 자리를 주지만 뒤의 결론까지 저절로 건네지는 않는다.
예쁜 모습만이 입구는 아니다
쉽게 좋아하게 되는 생물도 있다. 부드러운 털이나 사람에게 뻗는 잎, 호기심 있어 보이는 작은 동물을 보면 마음이 금세 움직인다.
분열효모에게는 그런 이점이 없다. 이름을 가리면 영상이 단조로울 수도 있다. 실은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입장권으로 보충할 필요도 없다.
생물학자는 이것으로 세포주기를 연구할 수 있고, 생산자는 어떤 미생물이 얼마의 생산량을 낼지 물을 수 있다. 모두 나름의 무게가 있다. 다만 이 글은 조금 다른 데 머문다.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 먼저 묻기보다, 어떻게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로 계속 남는지를 본다.
기제를 아는 것은 도움이 된다. 몇 장면만 보아서는 직접 보이지 않아 실험과 오랜 연구를 해야 구별할 수 있는 활동도 많다. 아름다움을 위해 화면이 보여 주지 않은 것을 본 척할 필요는 없다. 무엇을 영상에서 알았고 무엇을 연구에서 알았는지 분명히 하면 보는 일의 근거도 더 단단해진다.
그러다 지식이 늘지는 않았는데 어떤 순간이 오기도 한다. 분열한다는 사실도 관련 용어도 이미 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험에 답하려 서두르거나 생산량을 계산하지 않고 경계가 어떻게 세워지는지 보고 있었다.
아직 나뉘지 않은 것과 막 나뉜 것 모두 머물러 볼 만하다. 앞의 것은 미정이라 더 고급스럽지 않고 뒤의 것도 완성되어 지루한 것이 아니다. 생명 활동이 이 한 걸음을 마치고 새로 생긴 두 세포가 각자 계속할 수 있게 된 안정에도 볼 것이 있다.
특별히 감동하지 않아도 된다. 영상을 다 보고 화면을 닫아 다른 일을 해도 된다. 작은 막대 하나 앞에서 애써 경외심을 만들 필요는 없다.
다만 다음에 아무것도 안 하고 거기 있다는 말을 할 때 잠시 멈출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줄곧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아직 있는 것은 세계가 잊고 내버려 두어서가 아니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생물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썼다. 분열효모의 성장과 분열은 Genetics의 종설을 참고했다. 영상 묘사는 일반적인 관찰 장면이며 특정 녹화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관찰할 수 있는 자기 유지와 분열, 외부 설명으로 생명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원논문의 철학적 주장을 본문에서 분명히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