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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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편 · 총 26편

제24편 카터와 레이건, 같은 구조 안의 두 가지 국가 구상

헌법의 골격은 그대로였지만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식은 뒤집혔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같은 구조 안의 두 가지 국가 구상

지난 글은 무너진 신뢰의 폐허 위에 도덕성과 솔직함을 다시 세우려는 대통령을 예고하며 끝났다. 그가 마주할 나라는 워터게이트와 베트남전쟁, 스태그플레이션에 기력이 다 빠져 있었다. 카터가 취임한 1977년부터 레이건이 퇴임한 1989년까지의 12년을 두고, 자유주의 대통령 하나가 실패하고 보수주의 대통령 하나가 승리했다고만 기억한다면 이야기가 너무 납작해진다.

먼저 이 시기를 구조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을지 밝혀 두자. 이 연재에서 1977년부터 1989년까지가 중요한 이유는, 동일한 헌법 구조가 기본 제도의 틀을 고치지 않고도 스스로를 의심하는 대통령 정치를 받아들였다가, 뒤이어 보수주의에 따른 재해석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카터는 워터게이트와 베트남전쟁 이후의 도덕적 불안, 제도의 한계, 에너지의 제약, 인권의 언어를 대통령직 안으로 가져오려 했다. 레이건 역시 권력분립과 견제의 틀을 뒤엎지는 않았다. 그는 그 틀 안에서 정부의 역할과 조세제도의 정당성, 노동조합과 시장의 관계, 냉전을 설명하는 도덕의 언어를 새롭게 규정했다. 두 대통령 사이의 단절은 오히려 미국의 제도가 국가기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근본적인 이견까지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근본적인 이견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은 이 연재 전체의 맥락에서 진지하게 짚어 둘 만하다. 이 구조가 지닌 대단히 중요한 회복력이 거기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닫아 완결하려는 구조라면 이런 이견을 허용할 수 없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유일하고 확정적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미국의 이 구조는 정반대다. 국가의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영원히 잠가 둘 최종 답안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골격을 제공한다. 권력분립과 견제, 정기적인 선거, 공개 토론이라는 절차다. 서로 다른 답들이 이 골격 안에서 번갈아 무대에 올라 경쟁하고 유권자의 판단을 받는다. 카터와 레이건의 답은 그토록 첨예하게 맞섰지만, 이 구조 안에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폭력으로 누르지 않고도 차례로 집권하고 평화롭게 권력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근본적인 가치의 충돌을 제도 안의 평화로운 경쟁으로 바꾸는 능력. 바로 여기에, 스스로를 닫아 완결하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얻을 수 있는 깊은 안정성이 있다.

2. 카터와 워터게이트 이후의 윤리 정치

카터가 전국 정치에 등장했을 때 가장 큰 자산은 우선 그가 외부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워싱턴 기성 정치권의 인사가 아니라 조지아주 주지사 출신이었다. 워터게이트 이후에는 워싱턴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 자본이 됐다. 최근의 카터 재임기 연구는 그가 정직하지만 어딘가 침울한 인상으로 백악관에 들어섰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그 모습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워싱턴 정치에 대한 대중의 실망에 정확히 호응했다. 그래서 역사 속 카터는 흔히 구식 자유주의와 새로운 보수주의적 합의 사이를 잇는 과도기의 대통령으로 자리매김된다.

카터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그가 남부의 침례교 신자였다는 사실이나 개인적으로 청렴했다는 점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핵심은 그가 대통령직에 다시 도덕적 책무를 부여했다는 데 있다. 워터게이트 이후 대통령은 국가 역량의 상징인 동시에 제도의 자기 규율, 정직과 절제를 대변해야 했다. 이 연재의 틀에서 보면 카터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선을 넘었던 일에 대한 구조의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닉슨은 행정권을 가장 위험한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는 지점까지 밀어붙였다. 워터게이트를 겪은 대중은 비대해지고 오만해진,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 권력을 깊이 경계하게 됐다. 카터의 등장은 바로 그 경계심의 산물이었다.

최근 역사학이 카터를 새롭게 평가하는 방식은 그의 개인적 정직함과 정치적 지도력의 부족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의 회고적 연구들은 카터가 국정을 운영하면서 연합을 구축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간명하게 전달하고, 의제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이 부족해 보일 때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훗날 그 중요성이 분명해진 여러 문제, 특히 인권과 에너지, 환경과 평화 중재에서는 당대의 정치적 분위기를 앞서는 통찰을 보이곤 했다. 카터의 결점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고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낡은 꼬리표 하나로 그의 임기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3. 인권 외교와 제도의 자기 제한

카터 외교를 가장 뚜렷하게 구별해 주는 특징은 인권을 미국 외교 언어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냉전을 간단히 포기한 것이 아니라 냉전의 조건 속에서 도덕적 기준으로 동맹과 적국을 다시 평가하려 한 것이다. 최근 연구는 그 양면성을 정확히 짚는다. 카터 행정부는 소련과 동유럽의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냈고, 한국 같은 동맹국이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일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 성적표는 엇갈린다. 인권을 위한 압박이 군비통제나 지역 안정, 대이란 정책과 부딪치면 물러서거나 타협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연재의 맥락에서 카터의 인권 외교는 건국 문헌에 적힌 보편주의가 다시 한번 국제무대에 투사된 사건이었다. 다만 이번에 그 깃발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나라는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를 막 겪고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마저 의심하던 미국이었다.

파나마 운하 조약은 카터 외교 가운데 제도의 자기 제한이라는 뜻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례 중 하나다. 최근 연구가 토리호스·카터 조약을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약의 핵심은 미국이 운하 지대를 옛 방식으로 지배하는 일이 정치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더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약을 통해 파나마가 마침내 운하 통제권을 갖도록 한 데 있었다. 카터는 서명 당시 미국의 대외관계는 무력보다 공정함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말로 이를 설명했다. 이 연재에서 보자면 이 구조가 드물게 스스로 영향권을 줄인 순간이었다. 제국식 지배가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력을 동원하는 대신 조약을 맺어 권력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카터 시대의 주요 외교 성과 중에서도 이견의 여지가 가장 적다. 1978년 9월에 열린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담은 아랍·이스라엘 분쟁사와 미국 외교사 모두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카터는 2주에 걸친 강도 높은 중재에 직접 뛰어들었고, 그 결과 두 개의 기본 합의가 나왔다. 하나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으로 곧바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문제를 다룰 방안을 담았다. 한편 미소 관계에서는 카터와 브레즈네프가 1979년 6월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 SALT II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카터는 1980년 1월 상원에 협정 심의를 미뤄 달라고 요청했고, 끝내 비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스태그플레이션과 에너지 그리고 신뢰의 위기

카터가 마주한 국내 경제의 배경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높은 물가상승률과 높은 실업률이 함께 나타났다. 공식 역사 통계를 보면 미국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979년 11.3%에서 1980년 13.5%로 뛰었고, 같은 기간 연평균 실업률 역시 5.9%에서 7.2%로 올라갔다. 이 조합이 구조적으로 중요한 까닭은 전후 케인스주의의 상식, 곧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서 하나를 양보하면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직관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의 틀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은 뉴딜이 만든 경제 개입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재정과 통화 수단으로 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이 여기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에너지 문제를 다루는 카터의 방식도 그의 전반적인 정치 스타일과 꼭 닮아 있었다. 그는 에너지 위기를 잠깐의 공급 충격으로만 보려 하지 않았다. 미국인의 생활 방식과 소비문화, 국가안보가 한데 얽힌 문제로 규정했다. 훗날 ‘무기력 연설’로 불린 것은 사실 1979년 7월 15일의 ‘신뢰의 위기’ 연설이다. 정작 카터는 ‘무기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 연설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침식되면서 미국 사회와 정치의 바탕마저 무너질 위험에 놓였다는 경고다. 이 연재에서 그 연설은 드문 대통령의 순간으로 남는다. 국민에게 한계를 잊으라고 고무하는 대신, 한계를 똑바로 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정치적 고통을 극한으로 몰아간 것은 볼커식 긴축이었다. 1979년 10월 연방준비제도는 새로운 인플레이션 억제 조치를 도입했다. 뒤이은 고금리 정책은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렸지만, 그 대가는 1981~1982년의 심각한 경기침체였다. 실업률은 한때 11%에 육박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1970년대의 대인플레이션을 꺾은 공로를 카터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도, 레이건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도 없다. 결정적인 긴축은 두 행정부에 걸쳐 이루어졌다.

5. 이란 인질 사태와 1980년의 전환

카터 임기 말의 정치는 이란 인질 사태에 완전히 압도됐다. 1979년 11월 4일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 외교관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사태는 꼬박 444일 동안 이어졌고, 인질들이 풀려난 것은 1981년 1월 20일이었다. 이 연재에서 그 사건은 워터게이트 이후의 또 다른 흐름과 맞닿는다. 워터게이트는 권력이 어디까지 부패할 수 있는지를 대중에게 보여 주었다. 이란 인질 사태는 권력이 어디까지 무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두 사건이 잇따르면서 기묘한 이중의 환멸이 생겨났다.

그 이중의 환멸은 이 구조의 정치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기대가 거의 양립할 수 없는 모순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워터게이트의 교훈은 대통령을 엄격히 제약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인질 사태 같은 곤경은 세계를 상대로 미국의 위세를 떨칠 수 있는 강력한 대통령을 갈망하게 했다. 카터는 바로 그 모순의 한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는 분명 절제할 줄 알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 절제 때문에 인질 사태 앞에서는 더없이 무력해 보였다. 1980년 4월의 인질 구출 실패는 이 무력한 이미지를 더욱 굳혔다. ‘독수리 발톱’이라는 암호명의 구출 작전은 장비 고장으로 중단됐고, 철수 과정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수송기와 충돌해 미군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질들은 결국 레이건이 취임 선서를 한 바로 그날인 1981년 1월 20일에 풀려났다. 다만 취임일 석방이 지닌 상징성과, 협상의 대부분을 카터 팀이 마무리했다는 사실은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6. 레이건과 국가 역할의 재정의

레이건의 이념을 가장 유명하게 표현한 말은 1981년 취임 연설에 나온다. “지금의 위기에서 정부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 아닙니다.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 문장의 무게는 수사에만 있지 않다. 뉴딜 이후 이어져 온 연방정부의 팽창이 어디까지 정당한지를 새로 규정했다는 데 있다. 정부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달라졌다. 시장 실패를 바로잡는 존재라는 자리에서, 지체와 낭비, 지대 추구, 도덕적 의존성을 낳는 근원이라는 자리로 옮겨 갔다. 실제 정책에 아무리 많은 절충이 뒤따랐더라도, 이 말은 이후 수십 년간 미국 정치의 문법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쓸 때는 말로 내세운 작은 정부와 재정상 정부 규모를 구별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글과 연재 전체의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이어 준다. 공식 예산 통계를 보면 연방 재정적자는 레이건의 첫 온전한 예산연도 이후 급격히 불어났다. 1983회계연도에는 국내총생산의 5.9%에 달했고, 1989회계연도에도 2.7%였다. 정부 내부 계정 보유분을 제외한 연방부채의 GDP 대비 비율은 1981년 1분기 약 24.8%에서 아버지 부시 취임 이후인 1989년 4분기 약 39.1%로 높아졌다. 그저 레이건이 정부를 줄였다고 말해 버리면 이 시대에서 가장 분석할 가치가 있는 긴장이 사라진다. 그가 더 성공적으로 줄인 것은 정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던 이야기였다. 재정과 군사와 복지를 담당하는 거대한 기계로서 정부의 실제 몸집을 줄이는 데서는 그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레이거노믹스가 실제로 전개된 과정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1981년 경제회복세법은 오랜 기간을 통틀어 가장 큰 감세 법안으로 불렸지만, 1982년 조세형평·재정책임법은 감세를 되돌리는 중요한 조정이었다. 1986년 세제개혁의 초점은 단순 감세에서 광범위한 과세 기반 정비로 옮겨 갔다. 결과만 보면 물가상승률은 1980년 13.5%에서 1983년 3.2%로 낮아졌다. 실질 GDP의 연간 성장률은 1982년 -2%에서 1983년 4.3%로 반등했고, 1984년에는 7.3%에 이르렀다. 지지자들은 이 수치를 들어 레이건이 성장과 자신감을 되살렸다고 강조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이 우선 볼커식 통화 긴축이었으며, 공급중시학파의 조세정책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회복은 막대한 재정적자, 노조 조직력의 약화, 더 뚜렷해진 분배 격차를 동반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구 간 소득 불평등은 1980년 이후 눈에 띄게 커졌다. 1980년대는 모두가 같은 비율로 함께 부유해진 시대가 아니었다.

노사관계에서는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이 정치적 상징성 면에서 세제개혁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레이건은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파업 중인 항공관제사들과 정면충돌했고, 업무 복귀를 거부한 관제사들을 공개적으로 해고했다. 이들은 연방 공무원의 파업을 금지하는 규정의 적용을 받았으므로, 와그너법이 주로 보호하는 민간 부문 노동자들과는 법적 틀이 달랐다. 이 연재의 맥락에서 보면 각별한 의미를 지닌 전환이다. 앞서 13편과 15편, 18편에서는 노동자라는 잔여항이 조금씩 제도 안으로 포섭되어 온 긴 궤적을 따라갔다. 그런데 항공관제사 파업은 그 포섭의 흐름이 레이건 시대에 뚜렷하게 역전됐음을 알렸다. 한때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내밀었던 연방정부의 손이 공공연히 거두어진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포섭의 가역성이다. 이미 이루어진 포섭이라도 그 일부는 다시 뒤집힐 수 있다.

7. 냉전 말기의 강경 노선과 선회

레이건은 집권 초기 소련을 상대로 매우 거친 언어를 썼다. 1983년 3월의 한 연설에서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핵 동결 논쟁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흐려서는 안 된다고 미국인들에게 경고했다. 같은 달에는 전략방위구상을 발표했다. 기술적 해법으로 상호확증파괴에 기초한 핵 균형의 논리를 돌파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강경하게 나가 소련을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만 쓰면 1980년대 후반의 진짜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된다. 1986년 레이캬비크 회담은 당장의 합의를 낳지는 못했지만 대규모 핵 감축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자리였다. 양측은 그 대화를 발판으로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을 성사시켰다. 이 조약은 사거리 500~5,500km의 지상발사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관련 발사대를 폐기하도록 했다. 핵탄두인지 재래식 탄두인지는 가리지 않았다. 수량만 제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핵을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의 한 범주 전체를 없앴다는 점에서 냉전기 군비통제의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냉전 종식에서 레이건이 한 역할을 쓸 때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레이건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한 사람의 영웅 서사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여러 힘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레이건의 군비 확장과 도덕적 공세, 뒤이은 협상 쪽으로의 선회는 모두 중요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 의지, 소련 내부의 경제 문제와 민족 문제, 동유럽의 정치적 변화 역시 결정적이었다.

8. 이란·콘트라 사건과 계속되는 행정권의 일탈

이란·콘트라 사건은 이 연재가 워터게이트부터 따라온 줄기, 곧 행정권이 선을 넘고 견제 장치가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 이어서 쓸 때 가장 잘 이해된다.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이란에 무기를 파는 일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안전보장회의 직원들과 그 주변 조직망은 그 수익의 일부를 니카라과의 반정부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데 돌렸다. 이는 그 무장세력에 대한 원조를 제한한 의회의 조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조사 결과는 제도에 관해 중요한 것을 드러냈다. 타워 위원회와 의회의 합동 조사는 레이건이 자금 전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것이 백악관 고위층의 면책을 뜻하지는 않았다. 조사는 심각한 기만과 위법 행위를 드러냈고, 국가안전보장회의 체계의 운영, 통제에서 벗어난 절차, 혼란스러운 기록 관리, 책임의 연결 고리를 강하게 비판했다. 의회 보고서 역시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았다. 레이건은 1987년 3월 대국민 연설에서 자신이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승인했다고 인정했다. 다만 반군 쪽으로 자금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했다. 그러면서 무기와 인질을 맞바꾼 적이 없다는 자신의 앞선 설명이 더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어느 진영에 서 있든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있다. 워터게이트를 겪은 미국이 그 뒤로 행정권의 일탈에 면역력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란·콘트라 사건이 다시 입증했다는 것이다. 이 연재의 틀에서 보면 이는 지난 글이 열어 둔 결말을 정확히 확인해 준다. 워터게이트 이후의 일련의 개혁이 한동안 대통령 권력을 눌러 놓기는 했지만, 그 억제는 영구적이지 않았다. 과도하게 팽창했던 행정권이 국가안보라는 영역에서 다시 고개를 내민 것이다.

9. 맺음말

카터와 레이건의 12년을 이 연재 안에 다시 놓아 보면,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동일한 헌법 구조가 자기 틀을 고쳐 쓰지 않고도 이토록 다른 두 국가 구상을 어떻게 품어냈는가 하는 점이다.

국가의 역할을 둘러싼 근본적인 이견은 실재했다. 카터는 절제하고, 도덕을 중시하며, 한계를 직시하는 정치를 대통령직으로 가져오려 했다. 무한 성장의 신화를 의심했고, 미국의 제국적 지배를 자발적으로 줄였으며, 인권을 외교의 깃발로 내걸었다. 레이건은 자신감과 낙관, 시장 친화적인 전망으로 국가를 새롭게 상상하게 하려 했다. 정부 자체를 문제로 다시 정의하면서, 루스벨트 이래 차츰 자리 잡은 복지국가에 관한 정치적 상식을 끝냈다. 두 구상 사이의 거리는 엄청났다. 이 구조가 떠받치는 거대한 국가기구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거의 정반대의 두 답이었다.

하지만 이 연재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토록 큰 이견이 끝내 같은 골격 안에서 다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레이건은 권력분립과 견제의 틀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가 주로 바꾼 것은 담론과 정치적 연합, 정책의 우선순위였지 헌법 구조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바꿔 놓은 국가의 재정적 몸집은 실제로 줄어들지도 않았다. 적자는 불어났고 국가부채는 쌓였다. 그가 정말로 끝낸 것은 일정한 재정 규모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상식이었다. 여기에는 이 연재의 깊은 판단 하나가 다시 확인된다. 이 구조에서 국가의 역할을 정하는 방식은 한 번 닫히면 끝나는 확정안이 아니다. 언제든 다시 논쟁에 부치고 다시 열어 볼 수 있다. 이제 곧 냉전의 마지막을 목격할 시대가 무대에 오른다. 조지 H. W. 부시와 클린턴의 이야기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