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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편 · 총 26편

제23편 닉슨과 포드: 제왕적 대통령제의 정점과 반격

워터게이트에서 작동한 것은 자동 안전장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관과 사람의 연쇄였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제왕적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다

지난 편 끝에서 이렇게 예고했다. 질서를 되찾고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한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낸 행정권의 충동, 견제받지 않고 팽창하려는 그 충동을 국내로 가져와 새로운 정점까지 밀어붙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이 제도적 구조에 깃든 오래된 견제와 균형의 가장 직접적이고 철저한 반격일 것이다. 1969년 닉슨의 취임부터 1977년 포드의 퇴임까지, 이 8년은 오랫동안 뻗어 온 행정권의 상승선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꼭대기에서 어떻게 가장 깊은 위기와 맞닥뜨렸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다.

먼저 이 시기를 구조적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지부터 밝혀 두자. 대통령 권력의 팽창, 이에 맞서는 견제의 반작용, 그리고 제도의 자기 교정이라는 긴 흐름 속에 이 편을 놓는다면, 가장 무리 없는 설명은 이렇다. 닉슨이 느닷없이 별종 대통령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는 20세기 들어 줄곧 몸집을 불려 온 현대 대통령제, 특히 전쟁과 외교, 기밀과 정보 활동, 예산 집행에서 행정부가 행사해 온 주도권을 유난히 날카롭고 유난히 개인화된 극점으로 몰고 갔다. 1973년 한 역사학자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개념을 내놓았을 때도 초점은 원래 전쟁과 외교 권한의 지속적인 팽창에 있었다. 이후의 연구 역시 닉슨을 냉전이라는 조건 아래 이 추세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한편 워터게이트는 어느 한 영웅의 승리가 아니었다. 언론, 의회, 사법부, 특별검사, 행정부 내부의 법치 규범, 그리고 공화당 자신의 정치적 셈법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이루어진 분산형 교정이었다.

여기서 가장 쉽게 생겨나는 오해 하나를 먼저 걷어 내야 한다. 사람들은 닉슨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예외, 어쩌다 썩어 버린 사과 한 알로 보기 쉽다. 인품이 좀 더 반듯한 대통령으로 바꾸기만 하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도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연작이 거듭 추적해 온 행정권의 긴 궤적은 바로 그런 개별 사례 중심의 독해를 부정한다. 닉슨의 월권은 그의 개인적 도덕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제도 전반의 흐름이 켜켜이 쌓여 정점에서 터져 나온 사건이기도 했다. 구조적 설명이 그의 개인적 책임을 덜어 주는 것은 아니다. 앞선 여러 편에서 보았듯, 거대한 행정권은 실제로 닥친 위기를 한 번씩 먹어 가며 조금씩 몸집을 키웠다. 먹이를 줄 때마다 그 일은 너무나 필요하고 너무나 정당해 보였다. 닉슨에 이르러, 그렇게 한 세기 넘게 길러 온 거대한 몸은 마침내 제 잠재력을 모조리, 가장 어두운 잠재력까지도 풀어놓을 의지가 있는 주인을 만났다. 그러므로 워터게이트가 진정으로 드러낸 것은 닉슨 한 사람이 얼마나 나빴느냐만이 아니다. 이 제도적 구조가 행정권의 팽창을 얼마나 위험한 지경까지 허용했느냐는 것이다.

2. 당선, 침묵하는 다수, 그리고 남부 전략

닉슨의 1968년 승리부터가 제도 안의 긴장들이 새롭게 응집한 결과였다. 공식 선거인단 집계에 따르면 닉슨은 301표, 험프리는 191표, 월리스는 46표를 얻었다. 그러나 전국 득표율에서는 닉슨이 43.42% 대 42.72%로 험프리를 근소하게 앞섰을 뿐이며, 월리스도 약 13.53%를 가져갔다. 압도적인 국민적 합의로 집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베트남전, 도시의 소요, 민권운동에 따른 정치 지형의 재편, 남부의 이탈로 민주당이 갈라진 상황에서, 그는 질서와 안정, 목소리를 외면당한 이들의 대변을 내세워 제도상 다수를 확보했다.

‘침묵하는 다수’는 덩그러니 떨어진 수사 한 구절이 아니었다. 1969년 11월 3일 베트남전 연설에 장착된 정치적 동원 장치였다. 닉슨은 연설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동포들에게 자신의 베트남전 노선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백악관은 이 연설로 반전운동의 기세를 상쇄하려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연설을 중심으로 치밀한 조직과 동원에 나섰다. 이는 저절로 솟아난 민심의 표출만은 아니었다. 백악관이 적극적으로 민심을 빚고 증폭한 뒤, 자신이 그 민심을 대변한다고 주장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이 연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실마리와 맞닿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제 국민에게 자기 정책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는 다수를 직접 규정하고 만들어 내며, 그 다수를 대표한다고 선언한다. 마치 자신의 의지가 바로 침묵하는 진짜 미국의 의지인 것처럼.

남부 전략은 같은 정치적 재편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다만 역사 서술에서는 한층 세밀하게 다루어야 한다. 고전적인 설명에 따르면 닉슨은 민권 혁명에 불만을 품은 남부 백인들을 의식적으로 끌어들였고, 공화당을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의 주된 정치적 귀착지로 차츰 바꾸어 놓았다. 반면 이 설명을 수정하는 연구들은 학교의 인종 분리 철폐 같은 사안에서 닉슨이 언제나 낡은 인종적 입장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가장 무리 없는 설명은 이렇다. 닉슨은 분명 남부 백인들이 장기적으로 공화당으로 옮겨 가는 흐름을 가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룻밤 새 끝난 전면적 재편도 아니었고, 교외화, 치안 문제, 연방법원의 명령, 전국적인 백인들의 반발과 떼어 놓고 따로 설명할 수 있는 과정도 아니었다.

3. 베트남전의 수습과 확대

베트남전은 닉슨의 통치에 가장 큰 제약을 가한 조건이었다. 그가 취임할 때 베트남에는 미군 55만 명이 있었다. 이른바 ‘베트남화’를 거쳐, 1972년에는 주둔 미군을 6만 9천 명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병력 감소는 실제였다. 미군 사망자 수도 1968년 1만 6,899명에서 줄곧 내려가 1973년에는 68명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화는 애초부터 단순한 철수 정책이 아니었다. 전쟁의 확대를 동반하는 전략이었다. 닉슨은 취임 초부터 캄보디아 안의 북베트남 기지를 대상으로 ‘메뉴’라는 암호명의 비밀 폭격을 명령했다. 1970년 4월 30일에는 캄보디아 작전에 관한 대국민 연설에서 국경을 넘는 공격을 발표했다. 1971년에는 남베트남 지상군과 미국의 항공 지원을 중심으로 라오스 작전을 벌였다. 공식 설명은 대체로 보급로를 끊고 철수에 필요한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비판적인 연구는 이 일들이 보여 주는 다른 면을 강조한다. 베트남화란 전쟁의 일방적인 축소가 아니라, 미국의 지상전 개입은 줄이면서 공중 화력과 국경을 넘는 작전, 비밀 작전을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1970년의 캄보디아 작전은 순식간에 국내 위기를 터뜨렸다. 1970년 5월 4일,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학생 4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

이와 이어지는 사건이 펜타곤 문서다. 1971년 유출된 것은 베트남전 의사결정 과정을 담은 기밀 역사서였고, 그 주요 내용은 닉슨 본인이 아니라 트루먼부터 존슨까지의 시기를 다루었다. 그럼에도 닉슨 행정부는 뉴욕 타임스의 연재를 막으려 했다. 결과는 ‘뉴욕 타임스사 대 미국’ 사건에서 나온 연방대법원의 제동이었다. 법원은 그런 식의 보도 사전 제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기밀 유출에 대한 바로 그 공포 속에서 백악관이 제도 밖의 누설 차단과 비밀 공작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훗날 ‘배관공들’로 불리게 된 비밀 조직도 이때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펜타곤 문서 사건은 언론의 자유가 행정권에 거둔 승리인 동시에, 행정권이 한층 더 선을 넘게 만든 방아쇠였다. 이 양면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어질 비극 전체를 미리 보여 주기 때문이다. 누설과 정적에 대한 닉슨 행정부의 병적인 공포는 그들을 법의 경계 밖으로 한 걸음씩 밀어내고, 끝내 워터게이트로 몰아갈 것이었다.

4. 외교적 돌파와 국내 정책의 역설

닉슨이라는 인물의 가장 선명한 역설은 한편으로는 헌정 질서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무리수를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정학과 강대국 관계에서 실질적이고 중대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그의 헌정 파괴와 똑같은 무게로 서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단순한 악역으로 줄여 놓아 실상을 왜곡하게 된다. 미중 관계에서 닉슨은 1972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고, 양국이 발표한 상하이 공동성명은 이후 관계 정상화의 방향을 잡았다. 소련과의 데탕트도 마찬가지다.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상의 합의 가운데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은 양국의 요격미사일 배치를 각각 200기, 기지 두 곳으로 제한했다. 이 일련의 합의는 냉전기에 처음으로 두 초강대국의 전략핵무기 경쟁을 공식적인 제한의 틀 안에 넣었다.

이 연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돌파구가 모두 고도로 집중된 대통령 외교와 비밀 협상 체제에 뚜렷이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닉슨이 외교에서 이런 돌파를 이루게 해 준 것은 바로 그 고도로 개인화되고 고도로 집중된 행정 방식이었다. 통상적인 관료 조직과 공개 심의를 우회하고, 대통령과 소수 측근이 비밀리에 판을 움직이는 방식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되새기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고도로 집중된 행정권이 언제나 나쁜 열매만 맺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분산되고 견제받는 권력이 해내지 못하는 큰일을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권력 행사 방식을 국내에, 정적을 상대하는 일에 적용했을 때, 그것은 워터게이트로 향했다.

닉슨이 뉴딜을 뒤집으려는 보수주의 혁명가였다고 쓰는 것 역시 실상을 왜곡한다. 그의 국내 치적을 개관하는 공식 기록은 국내 정책이 정부의 손길이 미치는 범위를 넓혔다고 명시한다. 구체적으로 환경보호청은 1970년 7월의 조직 개편 계획에서 나왔고, 산업안전보건청은 1970년 말 서명된 법률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 청정대기법 개정도 대기오염을 다루는 연방정부의 역할을 크게 강화했다. 아울러 닉슨은 1971년 8월 전국적인 임금과 물가의 90일 동결을 발표했다. 제도의 역사에서 보면, 이 모든 일은 그가 연방국가를 그저 축소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방향으로 재배치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5. 워터게이트와 분산형 교정

워터게이트의 기본 사실은 매우 정확하게 서술해야 한다. 1972년 6월 17일 새벽, 침입자 다섯 명이 워터게이트 건물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잠입했다. 경비원은 새벽 2시가 다 되어 경찰에 신고했다. 뒤이은 수사는 이들과 대통령 재선위원회의 연결을 분명히 밝혀냈다. 문제는 침입 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그 뒤의 은폐가 문제였다. 백악관은 수사를 방해하고 자금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려 했으며,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빌려 연방수사국의 수사 방향에 개입하려 했다.

여기서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교정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위원회와 검찰, 언론은 나란히 움직였다. 상원은 1973년 2월 대통령 선거운동 특별위원회를 설치했고, 5월 17일 공개 청문회를 시작했다. 5월 25일에는 콕스가 특별검사로 취임 선서를 했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의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끊임없이 단서를 추적했다. 훗날 신원이 밝혀진 ‘딥 스로트’는 연방수사국 부국장 펠트였다. 이 대목에서 기자들이 대통령을 쓰러뜨렸다는 통속적인 서술은 피하는 편이 좋다. 공식 연표 자체가 보여 주듯, 상원 청문회와 특별검사, 뒤이은 사법 절차가 없었다면 언론의 폭로만으로 제도적 제재를 끝까지 관철할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먼저 그 녹음 장치에서 왔다. 1973년 7월 16일, 버터필드는 상원 위원회에서 백악관 녹음 시스템의 존재를 밝혔다. 1973년 10월 19일, 닉슨은 이른바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콕스는 이를 거부했다. 이튿날인 10월 20일, 대통령은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슨은 거부하고 사임했다. 차관 러클스하우스도 사임했고, 결국 보크가 명령을 집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까닭은 그 극적인 장면 때문만이 아니다. 법무부 내부의 직업적 규범과 헌법적 규범이 대통령의 명령에 맞서는 모습이 이토록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국 대 닉슨’ 사건은 사법적 견제의 핵심 고리였다. 연방대법원은 1974년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대통령이 막연하게 내세우는 특권은 형사재판에서 구체적으로 입증된 증거의 필요성 앞에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은 더 일반적인 헌법 원칙을 단단히 못 박았다. 대통령은 일반적인 비밀 유지의 필요만을 근거로 형사사건의 증거 제출 명령을 절대적으로 차단할 행정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 대통령은 형사사법 위에 따로 군림하는 독립된 주권자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시 우리의 틀 안에 놓으면, 이 연작에서 추적해 온 오래된 견제와 균형이 가장 철저한 반격을 가한 장면이 된다. 앞서 제19편에서 말했듯, 이 제도적 구조의 견제와 균형은 종이에 적힌 죽은 규칙이 아니다. 의회와 여론, 법원, 심지어 대통령 자신의 당 안에서까지 동시에 솟구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다. 워터게이트는 그 힘이 이때까지 벌인 가장 장대한 총동원이었다. 상원의 공개 청문회는 온 나라가 사건을 지켜보게 했다. 특별검사는 정치적 혐의를 법정에서 판단할 수 있는 형사 증거의 쟁점으로 바꾸었다. 연방대법원은 대통령이 사법 위에 설 수 없다고 판결했다. 하원 법사위원회는 이를 공식 탄핵 절차로 이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속한 당의 지지마저 흔들렸다. 제도의 힘은 어느 한 영웅이 아니라, 그 힘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는 데 있다.

6. 제도의 성공과 그 우연성

1974년 8월 공개된 결정적 증거, 이른바 ‘스모킹 건’ 녹음테이프는 닉슨의 마지막 정치적 방어선을 한층 더 무너뜨렸다. 1972년 6월 23일 녹음된 이 테이프에는 닉슨이 중앙정보국으로 하여금 연방수사국에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워터게이트 수사를 축소하라고 요구하게 하는 데 동의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연방대법원이 녹음테이프 제출을 강제한 뒤에는 원래 확고한 지지자였던 이들마저 탄핵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하원 법사위원회는 앞서 7월 말 수사 방해, 권력 남용, 의회의 소환장 거부라는 세 가지 탄핵 조항을 통과시킨 상태였다. 8월 8일 밤, 닉슨은 텔레비전 연설로 사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꼭 짚어야 할 논쟁이 하나 있다. 워터게이트가 보여 주는 것은 제도가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몇 가지 결정적인 우연이 맞아떨어지면 제도가 여전히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인가. 제도의 성공을 강조하는 쪽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언론, 상원, 특별검사, 연방대법원, 법무부 내부의 규범, 하원 법사위원회,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당내 지지의 이탈이 동시에 작동했다는 점이다. 운이 따라 준 측면을 강조하는 쪽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버터필드가 녹음 시스템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6월 23일의 그 결정적 녹음테이프가 없었다면, 닉슨 본인이 은폐에 가담했다는 연결고리를 입증하기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자료가 보여 주는 바에 충실하려면 양자택일할 일이 아니다. 제도는 분명 성공했다. 다만 그 성공에는 뚜렷한 우연성과 취약성이 드러나 있었다.

이 제도적 구조의 교정 능력은 회복력과 우연이 기묘하게 섞인 것이다. 분산된 구조 덕분에 단 한 사람의 영웅에게 기대는 어느 체제보다도 완전히 뚫어 버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성공은 자동 기계가 필연적으로 뱉어 내는 결과가 결코 아니다. 때맞춰 찾아온 우연들,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일으켜 나선 사람들에게 늘 기대야 한다. 이것이 입증한 것은 이 구조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이 구조를 지키려는 이들에게,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만은 아닌 기회를 준다는 사실이다.

7. 포드, 사면, 그리고 워터게이트 이후의 반작용

포드의 특수성은 수정헌법 제25조 제2항에 따라 지명되고 의회의 인준을 받은 첫 부통령이었으며, 뒤이어 닉슨의 사임으로 같은 조 제1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했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될 때 의회의 인준을 다시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포드는 워터게이트 위기가 제도적으로 낳은 산물인 동시에, 이 제도적 구조가 정상 작동을 되찾는 일을 담아낼 그릇이었다.

1974년 9월 8일의 사면은 포드 재임 중 가장 논란이 컸던 결정이었다. 그는 성명에서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전임 대통령을 기소하면 나라가 막 되찾은 평온이 다시 깨질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닉슨에게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사면을 부여했다. 그 범위는 닉슨이 재임 중 저질렀거나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연방 범죄를 포괄했다. 지지자들은 이를 나라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정치적·도덕적 결단으로 이해했다. 비판자들은 최고 권력자의 위법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원칙을 약화했다고 보았다. 성명의 문구에서는 양쪽 해석 모두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가장 좋은 서술은 책임 추궁을 해칠 가능성과, 더 큰 손상을 막고 국정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을 나란히 놓는 것이다. 역사적 공과를 단순하게 단정할 일이 아니다.

워터게이트 이후 제도의 반작용은 사람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1973년 전쟁권한결의는 닉슨의 거부권 행사를 의회가 뒤집으면서 성립했다. 핵심 장치는 대통령이 미군을 적대행위에 투입할 경우 48시간 안에 의회에 보고하고, 해당 보고를 제출한 날 또는 법정 제출 기한부터 원칙적으로 60일 안에 병력 사용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회의 선전포고, 특별 승인 또는 기한 연장이 있으면 예외였으며, 안전한 철수에 군사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는 법에 따라 최대 30일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1974년 정보자유법 개정 역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뒤에 다시 가결되었으며, 사법심사와 정보 공개 의무를 강화했다. 여기에 1974년 의회예산·지출보류통제법까지 더해졌다. 행정권은 전쟁, 정보, 예산이라는 세 전선에서 모두 제도적 제약에 부딪혔다. 상원의 한 위원회는 워터게이트 이후의 이 반작용을 정보기관 중심 국가의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이 위원회는 중앙정보국, 연방수사국, 국세청, 국가안보국의 갖가지 권력 남용을 조사하고 폭로했다. 연방수사국의 대정보 프로그램(COINTELPRO)과 그때까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일부 비밀 감시 사업이 포함되었다. 불법 우편물 개봉, 국내 정치적 반대자 감시, 심지어 외국 지도자 암살 계획까지 조사 대상에 올랐다.

8. 맺음말

닉슨과 포드의 8년을 이 연작의 흐름 속에 다시 놓을 때,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오래된 견제와 균형이 어떻게 행정권의 오랜 팽창이 절정에 이른 순간 가장 철저한 반격을 가했는지, 그리고 왜 그 반격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는지다.

닉슨의 의미는 그가 별종이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별종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는 한 세기 넘게 올라온 행정권의 긴 상승선 꼭대기에 서서, 이미 형태를 갖춘 현대 대통령제를 가장 위험한 모습이 드러나는 지경까지 밀어붙였다. 그의 역설은 실제였다. 똑같이 고도로 집중되고 개인화된 행정 방식이 한편으로는 분산된 권력이 해내지 못할 중국 방문과 데탕트 같은 큰일을 이루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적에 대한 병적인 감시와 수사를 가로막는 조직적인 은폐로 그를 몰아갔다. 외교적 성과로 헌정 파괴를 상쇄할 수 있다고 보거나, 헌정 파괴를 이유로 외교적 성과를 모조리 지워 버리는 것은 모두 지나치게 단순하다. 실상을 가장 덜 왜곡하는 서술은 양쪽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두 얼굴은 같은 사람, 국가의 역량을 철저히 도구로 만들어 버린 같은 대통령 정치에 속해 있었다.

워터게이트는 이 제도적 구조 안에 살아 있는 견제의 힘이 벌인 가장 장대한 총동원이었다. 어느 한 영웅의 승리가 아니었다. 언론, 상원의 청문회, 특별검사, 연방대법원, 법무부 내부의 규범, 하원의 탄핵 절차, 당내 지지의 붕괴가 동시에 제자리를 차지한 결과였다. 제도의 힘은 분산에 있다. 하지만 이번 교정은 이 구조가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의 참모습도 정확히 드러냈다. 성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운이 따라 준 덕분에 성공했다. 우연히 존재했던 그 녹음 시스템이 없었다면, 결정적인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당파 대신 헌법을 택하지 않았다면, 결말은 달랐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워터게이트가 남긴 것은 제도가 반드시 이긴다는 낙관이 아니다. 더 냉철한 인식이다. 이 구조에는 자기 교정의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그 잠재력이 실현되는 일은 결코 운명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가능성이지 보장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토록 비대해진 행정권이 진정으로 봉쇄된 것도 아니었다. 워터게이트 이후 행정권을 제한한 일련의 개혁은 실제로 한동안 대통령 권력을 눌러 놓았다. 그러나 그 거대한 권력 덩어리는 견제에 눌렸을 뿐 사라지지는 않았다. 몸을 낮추고 숨어들어 다음번에 다시 팽창할 기회를 기다렸을 뿐이다. 이제 등장할 인물은 신뢰가 무너진 이 폐허 위에서 도덕과 솔직함을 다시 세우려 한 대통령,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라에 자신감을 되돌려 준 대통령이다. 카터와 레이건의 이야기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