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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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편 · 총 26편

제22편 케네디와 존슨 — 포용과 확전의 역설

국내에서는 시민의 범위를 넓히고, 국외에서는 대통령의 전쟁을 넓힌 시대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포용과 확전의 역설

지난 편 말미에서 예고했듯, 아래로부터 일어난 그 운동은 마침내 절정에 이른다. 젊은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그의 뒤를 이은 노련한 입법가는 꼬박 한 세기 동안 억눌려 온 인종적 잔여항을 연방법이라는 틀 안에서 정면으로, 대대적으로 받아들인다. 케네디가 취임한 1961년부터 존슨이 퇴임한 1969년까지, 채 10년도 되지 않는 이 시기는 가장 깊은 곳에 밀려 있던 잔여항이 전례 없는 힘으로 미국이라는 구축물의 중심부로 다시 솟구쳐 오른 때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같은 대통령제 국가가 머나먼 전쟁 속으로 한 걸음씩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먼저 이 시기를 관통하는 구조적 판단부터 꺼내 놓자. 한 번도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보편주의의 약속이 미국 제도 안으로 가장 깊이, 그러면서도 가장 모순되게 들어온 순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한쪽에서는 오랫동안 정치공동체 바깥에 내몰려 있던 흑인들이 마침내 연방의 규칙을 다시 쓰게 했다. 다른 쪽에서는 바로 그 대통령제 국가가 베트남에서 행정권을 확대하며 대외 질서의 문제를 전쟁의 수렁으로 키워 갔다. 서로 무관하게 뻗어 나간 두 갈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안으로는 포용하고 밖으로는 질서를 강제로 수출하는 일이 같은 시기에 나란히 진행된 구조적 역설이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은 이것이다. 구축된 체제는 자신의 원칙을 저절로 실현하지 않는다. 독립선언서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적었다고 해서 그 평등이 알아서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본래 그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듭 요구해야 한다. 한 번도 지키지 않은 보편주의의 약속을, 체제 스스로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몰아붙여야 한다. 1960년대 민권운동은 그렇게 체제에 약속의 이행을 강제한 위대한 운동이었다. 이 글은 배제된 잔여항이 어떻게 체제로 하여금 규칙을 다시 쓰게 했는지, 그리고 왜 그 체제가 국내에서는 잔여항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국외에서는 군사적 개입을 확대할 수 있었는지를 따라간다.

2. 케네디의 순간

1960년 대선은 케네디 신화의 윤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승리 자체는 아슬아슬했다. 케네디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303표 대 219표로 닉슨을 꺾었으나, 전국 득표율 차이는 1퍼센트포인트도 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출발이 아니라 간신히 거둔 승리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야 케네디가 국내 정책에서 번번이 신중했던 이유, 의회의 표 계산에서는 보수적이었던 이유, 그러면서도 이미지 정치를 통해 자신의 행동 반경을 넓혀야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케네디 시대를 이상화한 ‘캐멀롯’의 이야기를 다시 살피려면 이미지와 실적부터 분리해야 한다. 캐멀롯이라는 이름은 주로 케네디가 암살된 뒤 재클린 케네디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그 시대를 기억하는 하나의 틀이었다. 이 신화를 재검토하는 역사 서술은 다른 면을 강조한다. 케네디는 민권 문제에서 오랫동안 조금씩만 전진하는 점진주의를 택했다. 그의 우선순위는 외교와 냉전의 위기 관리에 있었다. 1963년에 이르러서야 상황이 달라졌다. 풀뿌리 운동의 공개적인 압박, 버밍햄과 앨라배마대학교에서 벌어진 위기, 거기에 미국의 국제적 이미지가 입는 손상까지 더해지면서 더는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그제야 그는 포괄적인 민권 입법을 본궤도에 올렸다.

냉전 지도자로서 케네디의 권위도 연이은 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냉전의 두 초강대국이 직접 맞서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건으로 흔히 꼽힌다. 익숙한 서술 속에서 그것은 케네디가 침착함과 절제로 거둔 성공이었다. 그러나 기밀 해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재평가는 훨씬 조심스럽다. 많은 연구자는 위기가 핵전쟁으로 치닫지 않은 데에는 수많은 우연과 소통이 어긋난 와중에 겨우 따라 준 행운도 작용했다고 강조한다. 핵어뢰를 탑재한 잠수함이 그것을 발사할 뻔했던 일처럼, 사건이 끝난 뒤에야 실상이 더 뚜렷해진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능숙한 대응은 있었지만 안전한 위기는 아니었다. 결단은 있었지만 여유는 없었다. 한편 베트남에서 케네디는 전면전을 시작한 대통령은 아니었어도 미국의 개입을 분명히 확대했다. 취임 무렵 수백 명이던 미군 군사고문단은 그의 재임기에 늘어나 1963년 말에는 1만 6천 명을 넘어섰다.

민권 문제에서 케네디의 진짜 전환점은 1963년 6월 11일, 앨라배마대학교 사태 뒤에 나온 대국민 연설이었다. 그날 밤 그는 민권이 무엇보다 도덕의 문제라고 선언하고, 의회에 공공시설의 인종분리를 다룰 것을 분명히 요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각성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풀뿌리 운동이 행정부 수반에게 의제의 우선순위를 바꾸도록 강제한 결과였다. 이 글의 관점에서 케네디는 그 기회의 창이 열리는 서막을 마련한 인물에 더 가깝다. 약속을 실제로 이행한 주역은 아니었다.

3. 민권운동이 솟아오르다

오늘날 역사학은 1960년대 민권운동을 몇몇 위인의 연설과 대통령의 서명으로만 설명하는 데 점점 더 비판적이다. 운동을 떠받친 토대부터 보는 편이 훨씬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1960년 학생들의 연좌농성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결성으로 곧장 이어졌다. 주로 흑인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이 조직은 평화적인 직접행동을 택했으며, 엘라 베이커의 영향 아래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로부터 조직적 독립성을 지켰다.

이 운동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네 갈래의 힘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흑인 교회망을 기반으로 도덕적 호소력이 강한 대규모 비폭력 시위를 조직하는 데 능했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더 젊었고 지역에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개별 군과 마을에 오래 머물며 유권자 등록과 교육, 조직화에 힘을 쏟는 쪽이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법정 소송, 입법 로비, 지도층 사이의 조율에서 여전히 강점을 갖고 있었다. 인종평등회의는 ‘자유승차’ 운동처럼 주 경계를 넘나드는 직접행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버밍햄은 이 흐름의 전환점이었다. 마틴 루서 킹이 그곳에서 실천한 비폭력은 선하게 행동하자는 도덕적 권고에 그치지 않았다. 분명한 전략이 있었다. 공개적이고 눈에 보이며 반복 가능한 비폭력 행동을 통해, 지역 권력이 더는 안에 가둬 둘 수 없는 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상대를 망신주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도와 대중이 악 자체를 똑바로 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버밍햄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그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존의 협상 통로가 모두 막혀 있다면, 건설적인 긴장을 만들어 협상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워싱턴 행진은 또 다른 방식으로 힘을 보여 주었다. 1963년 8월 28일 열린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는 약 25만 명이 모였다. 킹은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하며 독립선언서와 노예해방선언, 성경의 언어와 미국 헌정의 약속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것은 도덕적 선언이면서 동시에 미국이 발행한 부도수표에 대한 정치적 고발이었다. 이 시리즈의 맥락에서 보면, 그는 다시 그 자를 꺼내 든 셈이다. 건국 문서에 새겨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바로 그 자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그것으로 노예제를 재었고, 할런 대법관은 그것을 근거로 플레시 판결에 반대 의견을 썼다. 더블 V 운동은 네 가지 자유를 기준으로 인종 위계를 재었다. 이제 워싱턴에 모인 25만 명이 같은 약속을 들고, 자신의 이상을 배반한 미국을 다시 고발하고 있었다.

폭력의 반격도 빼놓을 수 없다. 포용이 한 번도 순탄한 전진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1963년 9월, 버밍햄의 16번가 침례교회에서 폭탄이 터져 흑인 소녀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64년 미시시피의 ‘자유의 여름’ 운동도 극도의 위험 속에서 진행됐다. 법 하나가 통과되면 사회가 곧바로 그 뒤를 따라오는 식의 이야기는 당시 남부의 정치 현실과 거리가 멀다. 연방 차원의 입법과 지역의 폭력은 동시에 존재했다.

4. 존슨과 규칙의 재작성

케네디의 암살은 역사의 흐름을 급격히 바꾸었다. 존슨은 에어포스 원 안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나라 전체가 충격과 애도에 잠긴 가운데, 그는 곧바로 그 도덕적·정치적 기회를 활용했다. 그대로 두었다면 훨씬 더 오래 지체됐을 의제들을 빠르게 밀어붙였다.

존슨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더 순수한 이념이 아니었다. 케네디를 훨씬 능가하는 입법의 기술이었다. 1964년 민권법안은 상원에서 오랜 의사진행 방해에 부딪혔다. 마침내 6월 10일, 토론을 종결하는 표결이 71 대 29로 통과됐다. 찬성표에는 공화당 의원 27명과 민주당 의원 44명이 함께 들어 있었다. 오늘날의 정당 구도를 그대로 들이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싸움의 근본적인 전선은 지금의 의미에서 민주당 대 공화당이 아니었다. 남부의 인종분리주의자들과 초당적인 민권 연합의 대결에 더 가까웠다. 제도사에서 1964년 민권법이 갖는 의미는 인종분리 반대를 개별 소송과 행정명령의 차원에서 전국에 적용되는 성문법의 체계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이 법은 공공장소에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학교와 그 밖의 공공시설에서 인종 통합을 추진했으며, 고용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1965년 투표권법은 짐 크로 시대에 참정권을 빼앗아 닫아 버렸던 문을 더 직접적으로 다시 열었다. 이 법은 적용 대상 지역에서 문해력 시험을 비롯한 차별적 시험과 장치의 사용을 중지시키고, 연방 유권자 등록 심사관과 사전승인 제도를 두었다. 그 입법을 감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폭발시킨 기폭제는 셀마였다. 1965년 3월 7일, 약 600명의 시위대가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서 앨라배마주 경찰과 지역 법 집행관들에게 폭력적으로 저지당했다. 존 루이스는 두개골이 골절됐다. 8일 뒤 존슨은 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승리하리라’고 말하며, 셀마를 미국 민주주의 전체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시험대로 끌어올렸다. 강조해야 할 점이 있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운동을 이끈 것이 아니다. 운동가들이 먼저 다리 위에서 피를 흘렸고, 그 피가 대통령을 전면적인 입법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자리로 밀어 올렸다.

존슨의 공은 이 운동을 시작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시작하지 않았다. 그의 공은 케네디에게 부족했던 입법 기술로, 운동이 비집어 연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그 성과를 오래 버틸 법으로 빠르게 주조했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운동이 체제에 창을 내도록 강제했다면, 존슨은 그 열린 창을 법으로 고정했다. 전자가 없었다면 의제를 강제로 끌어올릴 수 없었고, 후자가 없었다면 운동의 승리도 오래가는 규칙으로 정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 이번에는 왜 재건 시대보다 오래 버텼는가

투표권법 이후의 수치 변화는 규칙이 실제로 다시 쓰였다는 가장 단단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흑인을 중심으로 한 비백인 유권자 등록률은 앨라배마주에서 법 제정 전 19.3퍼센트에서 제정 후 51.6퍼센트로 뛰었다. 미시시피주에서는 6.7퍼센트에서 59.8퍼센트로 올라갔다. 통계표의 분류 명칭은 ‘비백인’이다. 이 시리즈에서 그 숫자들은 특히 중요하다. 제12편에서 살펴본, 짐 크로 체제가 투표권의 문을 닫아 버렸던 일이 1965년 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뒤집혔다는 직접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드시 답해야 할 질문이 나온다. 왜 이번 포용은 재건 시대보다 오래 버텼는가. 제11편을 떠올려 보자. 재건 시대에도 인종 평등을 향한 전진은 한때 상당히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후 쿠 클럭스 클랜의 폭력, 남부의 저항, 연방군의 철수에 밀려 한 단계씩 다시 주변부로 쫓겨났다. 그때는 지켜 내지 못한 것을 이번에는 왜 지킬 수 있었을까. 답의 핵심은 투표권법의 제도 설계에 있다. 재건 시대의 보호 역시 헌법과 연방법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실현 여부는 북부가 계속 힘을 쏟을 의향이 있는지, 연방이 집행을 계속할 뜻이 있는지에 달려 있었고, 그 의지가 약해지면 보장도 무력화될 수 있었다. 1965년 법은 개별 위반을 일일이 뒤쫓는 방식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 했다. 제5조의 사전승인을 통해 연방의 감독을 규칙이 바뀌기 전으로 앞당긴 것이다. 물론 이 법적 장치를 집행하고 유지하는 데도 정치적·사법적 뒷받침은 필요했다. 대단히 중요한 설계였다. 남부가 새로운 우회 수단을 고안한 뒤에야 연방이 소송을 하나씩 제기하며 뒤쫓는 대신, 차별의 역사가 있는 지역은 어떤 선거 규칙이든 바꾸기 전에 먼저 연방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연방의 감독은 수동적인 사후 추격에서 능동적인 사전 통제로 바뀌었다.

오래 버티는 포용과 쉽게 무너지는 포용의 중요한 차이는 여기에 있다. 잔여항의 권리를 제도의 톱니바퀴에 단단히 걸어 둘수록 그때그때의 정치적 풍향에 대한 의존을 줄일 수 있다. 다만 그 톱니바퀴를 계속 돌릴 뒷받침까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6. 위대한 사회와 경계의 재작성

민권법과 투표권법이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자격을 다시 썼다면, ‘위대한 사회’는 연방국가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를 다시 썼다. 존슨이 1964년에 한 위대한 사회 연설 자체는 비전의 제시에 가까웠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뒤이어 쌓인 입법이었다. 그중 가장 오래 남은 제도적 유산으로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꼽을 수 있다. 두 제도는 1965년 사회보장법의 서로 다른 두 편으로 입법되면서 거의 모든 65세 이상 노인과 일부 저소득층에게 의료보장의 범위를 넓혔다. 이후 복지국가의 적정 규모를 놓고 어떤 논쟁이 벌어졌든, 두 제도는 지금도 미국 사회정책의 골격을 이룬다.

경계를 다시 쓴다는 점에서는 1965년 이민·국적법도 맨 앞자리에 놓인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제정된 이 법은 출신 국가에 따라 이민을 제한해 온 오랜 제도를 폐지했다. 제17편에서 보았듯, 1924년 이민법은 애초에 북유럽과 서유럽 출신에게 특혜를 주고 다른 지역 출신을 막기 위해 설계됐다. 1965년 법은 그때부터 이어져 온 출신국별 할당 원칙을 근본에서부터 해체했다. 장기적인 영향은 매우 컸다. 1960년 미국의 외국 태생 인구 가운데 약 75퍼센트는 유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1980년에는 그 비율이 39퍼센트로 떨어졌고,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출생자를 합하면 절반을 넘었다.

이 두 가지 변화를 시리즈의 맥락에 놓으면, 미국이라는 구축물의 가장 깊은 잔여항이 지닌 서로 다른 두 얼굴이 드러난다. 민권 입법은 내부의 구성원 자격과 평등한 지위를 다시 썼다. 이민법은 외부에서 공동체로 들어오는 합법적인 길을 다시 썼다. 많은 역사학자가 1964년과 1965년을 뉴딜 이후 연방국가를 가장 강력하게 재구성한 시기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7. 베트남에서의 확전

그러나 이 글의 역설은 베트남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국내에서 대대적인 포용이 진행되는 바로 그때, 대통령의 전쟁 권한도 다시 한 번 커졌다. 1964년 8월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통과시켜 존슨에게 베트남에서 군사행동을 벌일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 의미는 베트남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대 대통령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였기 때문이다. 먼저 위기라는 말로 포괄적인 권한을 받아 낸다. 그러고 나면 행정부가 자신의 확전 논리에 따라 그 권한을 사용한다. 통킹만 사건 자체도 투명하지 않았다. 훗날 기밀 해제된 연구는 8월 4일의 이른바 두 번째 공격에 관한 공식 설명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고 명시했다. 두 번째 공격이 실제로 있었다는 공식 입장을 지키기 위해 정보가 선택적으로 이용됐던 것이다.

확전은 곧 빠르게 진행됐다. 1965년은 군사고문단을 보내던 전쟁이 지상전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었다. 그해 3월 미 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했고, 연말에는 베트남 주둔 미군이 18만 5천 명에 육박했다. 1968년에는 약 53만 6천 명으로 늘었다. 그 한 해에만 미군 사망자가 1만 6,899명에 달했다. 확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 역사학계에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 층위로 나누어 보는 편이 낫다. 첫째, 권한을 얻어 낸 과정과 확전의 속도, 대중에게 내놓은 낙관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존슨 본인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둘째, 참모진과 군은 투입 비용을 늘리고 개입의 약속을 끊임없이 쌓아 올렸다. 셋째, 이미 케네디 시절에 이루어진 약속과 냉전의 봉쇄 논리가 있었다. 남베트남을 잃는 데 따른 막대한 정치적 대가를 의식하며 신뢰를 지키려는 정치 논리도 있었다. 이것들이 확전의 구조적 배경을 이루었다.

존슨과 참모들은 남베트남의 패배가 냉전 전체에 더 큰 연쇄 반응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존슨 자신은 1965년 이후에 물러설 경우 국내 입법마저 좌초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베트남과 위대한 사회 사이에서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회를 지키려면 먼저 베트남을 떠안아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너무도 무거운 오판이었다. 그는 국내의 위대한 사회를 위해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갔고, 그 전쟁은 끝내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8. 1968년의 균열

전쟁은 결국 국내의 정치 연합을 되받아쳤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 안에서 개입 지속에 반대하는 시위가 뚜렷이 거세졌다. 3월 31일 존슨은 북베트남 폭격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대선에서 당의 후보 지명을 추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거의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국내와 국외 양쪽에서 유례없이 팽창했던 대통령 권력이 마침내 전쟁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한계를 그어야 했다.

국내 사정도 민권 입법 이후 안정적인 통합기로 접어든 것은 아니었다. 1965년 와츠 소요는 엿새 동안 계속됐다. 34명이 사망하고 1천 명 이상이 다쳤으며, 4천 명 가까이 체포됐다. 1967년에 이르러 도시의 소요는 존슨으로 하여금 커너 위원회를 설치하게 했다. 위원회는 미국이 두 사회, 곧 서로 분리되고 불평등한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유명한 진단을 내렸다. 이 사실은 1964년과 1965년을 말끔한 승리의 역사로 그려서는 안 된다고 일깨운다. 규칙은 실제로 다시 쓰였다. 그러나 새로운 규칙이 빈곤과 경찰을 둘러싼 갈등, 도시의 인종적 분리, 평등이 무엇을 뜻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거대한 견해차까지 저절로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민권운동 내부에서도 갈래가 나뉘었다. 1966년에는 ‘블랙 파워’가 운동의 핵심 어휘로 들어왔다. 흑인의 자기결정과 자립, 실질적인 권력의 몫을 강조하며 추상적인 통합주의에 더는 만족하지 않았다. 킹도 뒤로 갈수록 경제적 정의, 북부 도시의 문제, 반전의 입장으로 논의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그리고 1968년의 충격이 줄줄이 이어졌다. 마틴 루서 킹의 암살,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장 안팎의 혼란. 이 시기는 도무지 말끔히 정리할 수 없는 모습으로 끝났다.

9. 맺음말

케네디와 존슨의 채 10년도 안 되는 시기를 이 시리즈 안에 놓고 볼 때,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한 그 역설이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가 같은 시기에 역사상 가장 깊은 국내의 포용을 이루었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대외적 확전에 나섰다.

국내의 포용은 실재했고 그 영향도 깊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억눌려 있던 인종적 잔여항이 마침내 체제로 하여금 자신의 규칙을 다시 쓰게 했다. 이 재작성이 재건 시대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던 핵심 이유는 포용을 법의 기계 안에 박아 넣은 집행 가능한 규칙으로 한층 더 구체화해, 그때그때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의존을 줄였기 때문이다. 특히 투표권법의 사전승인 장치는 연방의 감독을 규칙 변경 이전으로 앞당겼다.

하지만 이 포용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따라붙었고, 그 한계는 두 겹이었다. 첫째는 이미 익숙한 사실이다. 흡수는 그 자체로 새로운 배제를 만들어 낸다. 법적으로 평등한 자격이 인정되자 실질적·경제적 불평등은 오히려 더 눈에 거슬리게 드러났다. 와츠의 불길, ‘분리되고 불평등하다’는 커너 위원회의 진단, 블랙 파워의 부상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켰다. 규칙의 재작성은 실제로 이루어졌지만, 인종적 잔여항을 매듭지어 닫아 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문제를 새롭고 더 깊은 층위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둘째 한계는 역설의 반대편, 베트남에서 왔다. 전쟁의 부담과 도시의 소요가 함께 존슨을 무너뜨렸다. 재건 시대 이후 가장 위대한 민권 입법가이자 그 전쟁의 확전을 주도한 대통령이었던 그는 끝내 3월 31일 재선 도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해야 했다. 그 뒤 잇따른 암살은 이 시기의 붕괴를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다음에 등장할 대통령은 질서를 되찾고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한 사람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낸, 견제받지 않고 팽창하려는 행정권의 충동을 국내로 가져와 새로운 정점까지 밀어 올린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기다리는 것은 머나먼 전쟁이 아니다. 이 체제의 오래된 견제와 균형이 가장 직접적이고도 철저한 반격에 나설 것이다. 닉슨의 이야기다. 길게 이어져 온 행정권의 궤적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꼭대기에서 어떻게 가장 깊은 위기와 충돌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