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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편 · 총 26편

제21편: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전시 체제를 상시 체제로 굳히다

끝나지 않는 위기는 전쟁 때 만들어진 국가를 평시의 기본형으로 바꾸었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전시 체제가 상시 체제가 되다

몇 시간 만에 전시 국가를 물려받은 후계자는 이후 이 구조를 열전에서 냉전으로 이끌었다. 전쟁 속에서 벼려진 국가안보국가를 반세기 동안 지속될 상시 체제로 굳히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1945년 루스벨트가 죽고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때부터 1961년 아이젠하워가 물러날 때까지, 이 16년의 가장 중요한 변화를 단지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시리즈가 따라온 긴 흐름, 곧 제도가 몸집을 불리면서 동시에 견제를 받아들이도록 강제되는 흐름 속에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먼저 이 시기를 구조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지부터 짚자.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핵심은 냉전이 전시의 행정권 확대, 군비 동원, 정보 조직, 그리고 외교와 군사에 관한 대통령의 재량권을 하나의 반영구적 구조로 굳혀 놓았다는 데 있다. 1947년 국가안보법은 국가안보회의와 중앙정보국, 군사와 행정을 통합적으로 조정하는 체계, 독립된 공군을 모두 제도화했다. 1950년의 NSC-68 문서는 봉쇄를 지역적이고 제한적인 구상에서 세계적이고 장기적인 전략 동원의 청사진으로 밀어 올렸다. 이 구조를 둘러싼 학계의 평가는 오랫동안 갈려 왔다. 한쪽은 소련의 압력과 핵 시대의 위험에 대응하려면 불가피했다고 본다. 다른 쪽은 이것이 미국의 헌정 질서 안에 장기적인 행정권 집중과 시민적 자유의 축소를 낳았으며, 예산을 둘러싼 정치에서도 전쟁 준비를 일상적인 전제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 판단을 시리즈 전체의 흐름으로 되돌려 놓으면 그 무게가 선명해진다. 지난 편에서 보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구조 안의 행정국가를 전례 없이 키웠다. 거대한 전시의 몸이 자라난 것이다. 이번 편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몸이 종전 뒤 크게 줄어들었으면서도 단순히 정상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사정이 달랐다. 제17편을 떠올려 보자. 미국은 종전 뒤 재빨리 ‘정상으로의 복귀’로 방향을 틀었고 전시 국가기구를 대폭 축소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은 대규모로 병력을 감축하고 전시 동원 기구를 줄이면서도, 냉전 속에서 군사·정보·전략 조정의 핵심 역량을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직했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 지속될 상시 체제가 굳어졌다.

앞선 몇 편에서 추적한 행정권 확대의 긴 역사에는, 매번 그 확대를 정당화해 줄 구체적인 위기가 필요했다. 전쟁이든 대공황이든 끝이 있는 위기였다. 그런데 냉전이 내놓은 것은 끝나지 않는 위기였다. 전쟁이 끝나면 줄어들어야 할 안보 권력이 오랫동안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을 얻은 셈이다. 이번 편에서 따라갈 것은 이 구조가 어떻게 전시를 상시로 바꾸었는지, 그리고 그 상시화가 구조 자체에 어떤 깊은 딜레마를 안겼는지다. 마지막에는 5성 장군 출신의 대통령이 퇴임 고별 연설에서 그 딜레마에 직접 이름을 붙인다. 군산복합체라는 이름을.

2. 트루먼, 원자폭탄, 그리고 냉전으로의 전환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과정부터가 한 사람을 제도가 갑자기 역사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 장면이었다. 루스벨트가 세상을 떠난 1945년 4월 12일, 트루먼은 부통령이 된 지 겨우 82일째였다. 그 짧은 기간에 원자폭탄 계획이나 소련과의 관계에 관해 체계적인 보고를 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원자폭탄이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듣지 못했다. 대통령직을 이어받고 나서야 느닷없이 그 문제들과 마주해야 했고, 육군장관 스팀슨이 그 거대한 계획의 전모를 정식으로 설명한 것은 4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최고 기밀을 거의 알지 못하던 사람이 불과 몇 주 사이에 인류 최초의 핵무기와 세계적 냉전을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로 밀려 올라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결정을 살피려면 먼저 정부의 공식 설명과 역사학의 논쟁을 구별해야 한다. 트루먼은 1945년 8월 6일 성명에서 원자폭탄의 목적을 전쟁의 조속한 종결이라고 설명했다. 태평양전쟁을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끝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틀에 놓은 것이다. 오늘날의 연구 역시 1945년 여름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사용 여부를 오래 논쟁하기보다는, 전쟁을 더 빨리 끝내고 재래식 전투의 사상자를 줄일 수단으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다른 고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관리들은 핵 독점이 전후 소련과의 관계에서 가져올 비군사적 이익도 실제로 계산했다. 역사학의 논쟁은 몇 가지 입장을 나란히 제시하는 편이 좋으며, 여기서 대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전통주의자들은 일본의 군사·정치 체제가 여전히 완강했으므로, 본토 상륙과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하려면 원자폭탄이 필요했다고 강조한다. 수정주의자들은 일본이 이미 붕괴 직전이었으며,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에는 소련에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본다. 더 최근의 중간적 해석은 두 진영 모두 과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이미 무조건 항복할 준비를 끝낸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까지 위압하려는 의도가 동기 중 하나였을 가능성은 크다. 다만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소련의 참전, 일본 내부의 정치적 위기, 천황의 결정이 서로 겹쳐 작용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더 신중한 서술이다.

원자폭탄 사용 결정을 이 시리즈가 따라온 행정권의 긴 역사에 놓아 보면, 그것은 이제껏 없었던 문턱을 넘는 사건이다. 앞선 편들은 링컨의 전시 비상권한에서 루스벨트의 총력전 동원까지 대통령 권력이 조금씩 커지는 과정을 좇았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그 권력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극한으로 밀어 올렸다. 한 사람이 내린 명령 하나가 불과 몇 초 만에 도시 전체를 지워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행정권의 규모만 더 커진 것이 아니다. 행정권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의 성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원자폭탄에서 냉전으로 넘어가는 전환은 단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여러 고비가 이어졌다. 케넌의 ‘긴 전문’과 1947년의 ‘X 논문’은 봉쇄를 정책으로 옮길 수 있는 해석의 틀로 만들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 연설은 그 틀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 뒤에는 구체적인 제도와 동맹이 뒤따랐다. 1948년 마셜 플랜이 경제협력법의 형태로 통과되었고, 의회가 승인한 자금은 최종적으로 120억 달러를 넘었다. 서유럽을 재건하는 경제 계획인 동시에 미국의 대외 경제 원조를 장기적인 외교 수단으로 만드는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같은 해 6월 베를린 위기가 터지자 미국과 영국은 공수 작전을 시작해 230만 톤이 넘는 물자를 실어 날랐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결성되었다. 미국이 서반구 밖에서 가입한 최초의 평시 군사동맹이었다. 냉전 발발의 책임을 다룰 때도 누군가 한 사람이 냉전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로 줄이기보다 세 학파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편이 좋다. 전통주의는 소련의 동유럽 팽창에 무게를 싣는다. 수정주의는 미국의 문호 개방을 앞세운 경제적·전략적 팽창을 더 강조한다. 탈수정주의는 안보 딜레마와 오판, 그리고 양쪽 모두 자신의 안보 요구를 최대한으로 밀어붙이는 상호작용에 더 주목한다.

3. 국가안보국가의 제도적 토대

1947년 국가안보법은 이번 편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적 고비다. 이 법은 외교·군사 기구를 대대적으로 재편하도록 했고, 외교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매우 유용한 새로운 기구들을 한꺼번에 만들어 냈다. 구체적으로 국가안보회의를 신설하고 중앙정보국을 확립했으며, 육군과 해군의 조직 체계를 재편하고 국방부로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공군도 별도의 군종으로 독립시켰다.

제도사의 눈으로 보면 중요한 것은 기관 이름이 아니다. 전시에 임시로 이루어지던 조정을 대통령 주위에 상설된 국가안보 의사결정 기계로 바꿔 놓았다는 데 이 법의 의미가 있다. 1950년의 NSC-68 문서는 그 구조에 더 강한 전략적 이념을 부여했다. 문서는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고립주의로 돌아가거나, 곧바로 전쟁을 벌이거나, 기존 정책과 외교적 노력을 유지하거나, 자유세계의 정치·경제·군사 역량을 급속히 키우는 길이었다. 마지막 선택지가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세계적 봉쇄 전략을 지탱하는 골격이 되었다. 이 논리 아래서 오랫동안 막대한 규모로 계속되는 군사·산업·과학 연구의 제도화된 동원이 정당화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특히 중요하게 보아야 할 판단이 있다. 국가안보국가는 대외적으로 더 강경한 국가가 되었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연방정부 내부의 권력 중심이 다시 배열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따라온 긴 흐름과 정확히 이어진다. 뉴딜과 제2차 세계대전이 이미 연방정부의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고, 냉전은 그 역량을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제도에 고정했다. 뉴딜은 이미 오래 지속될 행정기관들을 남겼다. 여기서 새로운 점은 행정국가가 처음으로 지속적인 형태를 얻었다는 데 있지 않다. 전시의 안보 권력이 열전이 끝났다고 해체할 생각이 없는 구조로 재편되었다는 데 있다. 국가안보는 이렇게 일련의 반영구적 행정 역량을 헌정 질서의 중심에 고정했다.

‘반영구적’이라는 말은 거듭 강조할 만하다. 이 시기에 안보 권력이 취한 새로운 형태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시리즈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잭슨의 권력 확대는 자신에게 쏠린 민의를, 링컨의 확대는 내전의 비상사태를, 루스벨트의 확대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팽창은 모두 구체적인 위기를 통해 정당성을 얻었다. 뉴딜의 여러 제도가 남아 있더라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면 비상 동원도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가안보국가의 성립은 안보 영역에서 그 기대를 유난히 실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냉전은 언젠가 끝날 전쟁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될 수도 있는 장기적 대치로 구상되었기 때문이다.

4. 한국전쟁과 대통령의 전쟁 권한

한국전쟁은 전후 대통령의 전쟁 권한 확대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선례 가운데 하나다. 1950년 북한이 남침한 뒤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시작한 것은 ‘경찰 행동’이었다. 이름만 빼면 모든 면에서 전쟁인 경찰 행동. 트루먼은 의회에 정식 선전포고를 요청하지 않고, 이 작전을 유엔이 이끄는 경찰 행동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이 전쟁에는 두 겹의 의미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이 유럽의 봉쇄에서 아시아의 열전으로 옮겨 가는 결정적 전환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행정부가 군 통수권과 국제기구의 승인에 기대어 정식 선전포고 없이 대규모 전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례를 세웠다. 이후 베트남, 레바논, 그레나다, 나아가 더 최근의 전쟁 수행 승인에 관한 논쟁도 거의 모두 그 출발점인 한국전쟁을 돌아보게 된다. 지지자들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와 갑작스러운 침략에 대응해야 하는 긴급성을 강조하더라도, 비판자들은 이를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한 중대한 이정표로 본다. 잭슨 대법관은 한 번 정당화된 월권이 법 속에 장전된 무기처럼 남아 후대가 꺼내 쓰기를 기다리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 바로 그런 장전된 무기였다.

그런데 바로 그 전쟁이 반대 방향의 선례도 남겼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이 구조 안에서 문민이 군대를 통제한 고전적인 장면이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 정부와 유엔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극동 사령관을 교체한다고 밝혔다. 제도적으로 중요한 것은, 극도로 인기가 없고 정치적 대가가 엄청난 상황에서도 트루먼이 군대에 대한 문민의 최종 통제권을 고수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을 함께 놓아야 냉전 대통령의 양면을 볼 수 있다. 같은 트루먼이 한편으로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력을 쓰는 선례를 확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 한복판에서 군대가 선출된 문민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공화정의 원칙을 다시 확인했다.

5. 매카시즘과 제도의 자기 교정

매카시즘을 쓰면서 매카시라는 미치광이 한 사람이 소동을 벌였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더 신중한 틀은 그것을 제2차 적색 공포의 제도적 배경 안에 되돌려 놓는 것이다. 매카시의 유명한 연설보다 훨씬 앞선 1938년, 하원 비미활동위원회가 이미 만들어졌고 이른바 공산주의자의 침투를 줄곧 조사해 왔다. 트루먼 자신도 1947년 행정명령 제9835호에 서명해 연방 공무원의 충성심을 심사하는 체계를 수립했다. 매카시즘은 허공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국가안보국가와 냉전의 공포가 이미 형성된 환경에서 한층 격화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지점에서는 서술의 균형도 지켜야 한다. 베노나 프로젝트의 기밀 해제 이후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소련 간첩의 위협이 전부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연방수사국은 베노나를 통해 소련의 간첩 활동에 연루된 108명을 확인했고, 그중 64명은 이전까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맨해튼 계획과 국무부, 재무부 같은 핵심 부문에도 소련 정보망이 실제로 침투해 있었다. 그러나 간첩망의 실재가 확인되었다고 해서 매카시의 수법, 그가 제기한 혐의의 신빙성, 그 제도가 낳은 결과를 둘러싼 문제까지 덮어 줄 수는 없다.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육군·매카시 청문회에서는 그가 증인을 괴롭히고 절차와 예의를 무시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1954년 12월 2일 상원은 67 대 22로 그를 견책했다. 상원 위원회에 대한 모욕적 행태와 조사 방해, 상원 규범 훼손이 그 이유였다.

이 시리즈의 틀 안에서 매카시즘은 냉전의 압력에 밀려 다시 돌아온 폐쇄의 충동이다. 제8편에서는 링컨이 내전 중 인신보호영장의 효력을 중지했고, 제16편에서는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 중 방첩법으로 반전 인사들을 기소했으며, 제20편에서는 전시 국가가 혈통만을 근거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가두었다. 이제 냉전의 공포가 다시 한 번 의심스러운 사람과 이견을 안보의 이름으로 눌러 없애려는 충동을 불러냈다.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 지식인들의 침묵, 사회 전반의 위축 효과를 모두 매카시 한 사람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의회의 위원회들과 연방의 충성심 심사 절차, 고용주와 언론의 연결망, 대중의 공포가 서로 맞물려 돌아간 결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이 구조의 다른 면도 써야 한다. 결국 그 과잉을 바로잡았다는 면이다. 이런 폐쇄의 충동을 가장 정직하게 쓰려면, 제도의 최종적인 자기 교정과 그 교정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입힌 실제 피해를 함께 보여 주어야 한다. 상원이 마침내 매카시를 견책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경력이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의 침묵이 굳어져 있었다. 아무리 뒤늦게 잘못을 바로잡아도 그 피해까지 되돌릴 수는 없다.

여기에는 기억해 둘 만한 이 구조의 법칙이 숨어 있다. 그 개방성, 경쟁하는 정치, 자유로운 여론, 독립된 사법부는 실제로 자기 잘못을 바로잡을 능력을 부여한다. 선을 넘은 매카시도 결국 그 장치들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교정 장치가 없는 폐쇄 체제보다 더 큰 회복력을 지닌 까닭이다. 하지만 그 교정에는 대가가 따르고 시간도 걸린다. 선을 넘는 순간 즉시 끊어지는 자동 퓨즈가 아니다. 여론과 청문회, 거듭되는 표결을 통해서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린 과정이다.

6. 배제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

냉전과 매카시즘의 그림자 밖으로 눈을 돌리면,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보인다. 오랫동안 배제된 잔여항인 흑인들이 연방 행정권을 통해 조금씩 다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트루먼 시대는 그 편입 과정의 초기 국면으로 써야 한다. 1946년 트루먼은 대통령 민권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위원회는 1947년 보고서 『이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하여』에서 린치와 인두세에 반대하고, 상설 공정고용실천위원회를 설치하며, 법무부의 민권 업무를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1948년 2월 트루먼은 의회에 그 권고들을 실행하라고 요구했다. 남부 상원의원들은 곧바로 필리버스터로 가로막겠다고 위협했다. 그 결과 트루먼은 오히려 행정적 수단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행정명령 제9981호가 바로 그 수단의 산물이다. 군대의 모든 구성원이 인종과 피부색, 종교, 출신 민족에 관계없이 동등한 대우와 기회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대통령의 정책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가능한 한 빨리 시행하도록 요구했다. 군 내부에서는 상당한 저항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중에 인종 통합이 크게 진전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제도적 의미가 있다. 첫째, 의회 입법이 막힌 상황에서 행정명령이 인종 평등을 직접 진전시켰다. 둘째, 국가안보국가의 핵심 조직인 군대가 일찍부터 인종 분리의 해체를 추진하는 중요한 현장이 되었다. 셋째,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배제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사회적 합의가 먼저 생기고 제도가 뒤따르는 순서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제도가 먼저 그 문을 조금 밀어 열었다.

냉전 속에서 흑인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전략의 필요이기도 해졌다. 민권의 진전과 국가안보국가는 서로 무관한 두 흐름이 아니었다. 때로는 서로를 밀어 주고 서로의 힘을 빌렸다. 전시의 ‘더블 V’ 운동에서 이미 예행연습을 거친 질문,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말하는 나라가 자기 내부의 인종적 억압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질문이 냉전 속에서는 이 구조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전략적 문제가 되었다.

7. 브라운 판결, 리틀록, 그리고 연방의 강제력

아이젠하워 시대로 오면 민권 진전의 중요한 고비는 사법부와 연방정부의 집행에서 나온다.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의 핵심은 단순히 플레시 판결을 뒤집었다는 데 있지 않다. 대법원은 인종에 따라 분리된 공립학교가 소수 인종의 동등한 교육 기회를 박탈한다고 명시했다. 공교육 분야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원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이 판결의 핵심이었다.

이 시리즈에서 브라운 판결이 차지하는 자리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제12편을 떠올려 보자. 인종 분리에 합헌의 도장을 찍어 준 것이 바로 플레시 판결이었다. 당시 할런 대법관이 우리 헌법은 피부색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쓴 반대의견은 이 구조의 사법적 기억 속에 묻혀, 싹틀 때를 기다리는 씨앗처럼 남았다. 수십 년 뒤 그 씨앗이 마침내 브라운 판결에서 싹을 틔웠다. 짐 크로의 높은 벽 안에 반세기 넘게 눌려 있던 잔여항, 플레시 판결이 저버린 평등의 약속을 대법원이 드디어 다시 집어 든 것이다.

그러나 브라운 판결 뒤의 역사는 곧바로 보여 주었다. 연방 권력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진보가 아니었다. 주 권한을 내세운 저항과 지역의 폭력, 법원 명령에 대한 방해를 만날 때면 강제 집행을 통해서야 힘겹게 전진하곤 했다. 1957년 9월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주 방위군을 동원해 흑인 학생 9명의 입학을 막았다. 소요가 격화되자 아이젠하워는 행정명령 제10730호로 아칸소 주 방위군을 연방 통제 아래 두고, 제101공수사단을 리틀록에 보내 연방법원의 명령을 집행하게 했다. 이 장면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파업을 진압하고 보너스 군대를 내쫓는 데 군대를 동원했던 연방의 강제력이 이제는 몇 명의 흑인 학생을 학교 문 안으로 호위하는 데 쓰였다. 같은 도구인 연방 군대가 재건 시대 이후 다시, 인종 평등을 강제로 실현하는 방향으로 대규모로 투입된 것이다.

한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은 위에서 내려오는 사법·행정의 진전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회운동을 연결했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그 뒤 약 13개월 동안 이어진 보이콧을 통해 마틴 루서 킹이 빠르게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 배제된 이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제 백악관이나 법원이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데만 의존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 솟는 운동의 에너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8. 아이젠하워의 중도 노선과 보이지 않는 권력

아이젠하워는 오랫동안 대중의 머릿속에서 골프나 치는 대통령, 혹은 소극적인 대통령이라는 납작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현대 역사학이 그 이미지를 고쳐 쓴 중요한 해석이 이른바 ‘숨은 손의 대통령제’다. 후대의 학자들이 문서 기록에서 찾아낸 것은 꾸벅꾸벅 조는 의전용 지도자가 아니었다. 막후에서 꾸준히 의제를 장악하고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면서, 공개적인 모습에서는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대통령이었다. 매카시를 다룰 때 택한 간접적인 접근이 바로 그 숨은 손 방식의 전형이다. 국내 정책에서도 아이젠하워는 뉴딜을 해체하려 하지 않았다. 온건한 보수의 중도 노선을 택했다.

냉전 전략에서는 흔히 ‘뉴 룩’이라 부르는 국가안보 정책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대를 쓰려면 중앙정보국의 비밀 공작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오늘날의 연구에서도 1953년 이란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공개적으로 인정된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일기에서 미국이 모사데그 정부의 전복과 샤의 복위에 힘을 보탰다고 언급했다. 1954년 과테말라에 관한 공식 회고에서도 일련의 비밀 공작 계획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이 자료들은 국가안보국가의 또 다른 팽창을 보여 주기에 적합하다. 대통령의 정규 외교·군사 권한만 확대된 것이 아니었다. 비밀 공작과 비밀 예산, 민주적 책임 추궁 사이의 회색지대도 넓어졌다.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은 중앙정보국에 다른 나라 정부를 전복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 공개적인 의회 토론이나 국민에 대한 설명 없이, 통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책임 추궁을 우회하며 그 일이 진행될 수 있다. 일부 의회 소위원회에 비밀 감독 통로가 있기는 했지만, 공개 토론과 충분한 심사를 대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국가안보국가는 행정권을 더 크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일부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야말로 이 구조의 견제와 균형이 가장 붙들기 어려운 권력이다. 전혀 보이지 않는 일을 견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9. 고별 연설과 닫히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

아이젠하워의 1961년 고별 연설은 이번 편, 나아가 국가안보국가 탄생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대목으로 삼을 만하다. 그는 미국이 이제 거대한 상설 군수산업을 만들어 냈으며, 대규모 군사기구와 막대한 군수산업의 결합은 미국의 경험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유명한 경고를 내놓았다. 정부의 의사결정에서 군산복합체가 부당한 영향력을 얻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적절하게 집중된 권력이 파국적으로 커질 위험은 실제로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말이다. 깨어 있고 식견을 갖춘 시민들만이 그 거대한 산업·군사 기계를 자유로운 사회의 평화적 목표와 제대로 연결되도록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 몇 마디는 이 시리즈가 다루는 구조의 주제를 거의 그대로 압축한다. 국가안보국가는 밖에서 들이닥친 우연한 사고도, 하늘에서 떨어진 무엇도 아니다. 이 구조가 스스로 진화하면서 만들어 낸 새로운 권력 덩어리다. 5성 장군 출신으로 그 전쟁 기계를 직접 지휘했던 대통령이 물러나는 자리에서 그 기계의 위험을 경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권력 덩어리의 무게를 알 수 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다룰 자격이 있는 주인조차 이제 그 힘이 거꾸로 이 구조의 자유로운 핵심을 갉아먹지는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할 만큼 커진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내놓은 처방은 이 시리즈의 핵심 판단 안에서 특히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깨어 있고 식견을 갖춘 시민들. 이 말의 깊은 뜻은 새로운 법 하나나 기관 하나를 만들어 그 권력 덩어리를 단번에 영원히 가둘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시리즈의 말로 풀자면, 제도가 스스로 진화해 만들어 낸 권력 덩어리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이 구조를 닫아 버리고 어떤 영구불변의 규칙에 관리를 맡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가 계속 닫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늘 눈을 뜨고, 늘 질문하고, 결코 경계를 남에게 넘겨주지 않는 열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의 16년을 이 시리즈에 되돌려 놓을 때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구조가 어떻게 전시를 상시로 굳혔는지다. 전후 대규모 동원 해제를 거친 이 구조는 냉전과 핵 시대의 압력에 직면하면서 안보 분야의 핵심 역량을 대통령 중심의 반영구적 국가안보국가로 재편했다. 매카시즘은 안보가 모든 것에 앞서는 그 분위기 속에서 폐쇄의 충동이 또 한 번 선을 넘은 사건이었다. 결국 교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실질적인 피해를 남겼다. 동시에 오랫동안 배제된 인종적 잔여항도 바로 이 냉전 시대에 행정명령과 사법 판결, 냉전의 전략적 필요, 그리고 막 일어나고 있던 사회운동의 힘을 빌려 다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대에 이 구조는 안보의 이름으로 닫힘에 가까워졌고, 민권의 방향으로는 다시 열렸다. 그 끝에 얻은 지혜는 아이젠하워의 소박한 경고에 응축되어 있다. 스스로 만들어 낸 거대한 권력 덩어리 앞에서 이 구조를 지켜 낼 유일한 힘은 끝내 닫히지 않는 경계심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펼쳐질 것은 아래로부터 일어난 그 운동이 절정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젊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암살되고, 그 뒤를 이은 노련한 입법가는 꼬박 한 세기 동안 억눌려 온 인종적 잔여항을 연방법을 통해 정면에서, 대규모로 받아들이게 된다. 케네디와 존슨의 이야기다. 가장 깊은 그 잔여항이 1960년대에 전례 없는 힘으로 다시 이 구조의 중심에 밀려 올라오는 이야기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