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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편 · 총 26편

제20편: 전쟁 속의 루스벨트 — 하나의 전시 국가가 지닌 두 얼굴

한 전쟁국가의 두 얼굴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하나의 전시 국가가 지닌 두 얼굴

지난 글의 끝에서 말했듯, 정부조직개편법으로 한층 더 단단히 무장한 행정국가는 진주만의 포성이 울린 뒤 전례 없는 총동원에 나서게 된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진 1939년부터 루스벨트가 세상을 떠난 1945년까지, 이 6년의 핵심은 미국의 참전 자체에만 있지 않다. 미국이라는 제도적 구축물이 총력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에 걸쳐 전면적으로 투사되었다는 데 있다.

먼저 이 6년을 꿰뚫는 구조적 판단부터 내놓자. 한편으로 루스벨트는 ‘네 가지 자유’를 통해 전쟁의 목적을 보편주의의 정치 언어로 표현했다. 무기대여법과 대서양헌장, 국제연합 창설 준비를 차례로 거치며, 절반쯤 고립되어 있던 강대국 미국을 세계 질서의 설계자로 밀어 올렸다. 다른 한편으로 총력전은 연방 행정국가의 몸집도 전에 없이 키웠다. 전시 생산, 물가와 임금의 통제, 정보 수집과 선전, 조세와 징병, 이에 보조를 맞추는 금융이 맞물려 거대한 동원 기계를 이루었다. 이 글에서 가장 세심하게 가늠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방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다. 둘은 서로 따로 떨어진 빛과 그림자가 아니다. 루스벨트가 한쪽에서는 좋은 일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나쁜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전시 국가가 동시에 만들어 낸 두 얼굴이다.

이 판단을 연작 전체의 흐름 속에 놓으면 그 무게가 드러난다.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참전하면서도 국내에서는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인종적 위계를 유지했다. 그로써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을 처음으로 세계 규모까지 벌려 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루스벨트는 그 틈을 더 첨예하고도 깊은 곳까지 밀어 벌렸다. 네 가지 자유를 통해 미국의 가치를 세계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로 선포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같은 전시 국가는 일본 혈통의 사람 11만여 명을, 그중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는데도, 오직 혈통을 이유로 서해안에서 강제로 이주시켜 가두었다. 이 글이 보여 주려는 것은 이 두 일, 곧 바깥으로 뻗어 나간 보편주의와 안에서 자행된 가장 위험한 배제가 어떻게 서로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같은 전시 기계에서, 같은 동력으로, 동시에 돋아난 두 얼굴이었는가다.

2. 중립에서 개입으로

이 전시 국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고립에서 개입으로 넘어간 길을 살펴야 한다. 1930년대 미국의 출발점에는 강력한 고립주의 분위기가 있었다. 대공황과 제1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함께 미국 여론과 정책을 고립주의 쪽으로 밀었다. 의회는 1935년, 1936년, 1937년에 잇달아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무기 수출 금지, 대출 제한, 해운 제한 등으로 미국을 유럽과 아시아의 분쟁 바깥에 묶어 두려 했다. 그러나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루스벨트는 중립의 뜻을 조금씩 바꾸었다.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연합국을 제한적으로 지원한다는 쪽으로 옮겨 간 것이다. 중립법 개정으로 교전국도 현금을 내고 직접 운송해 가는 조건으로 물자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940년에는 구축함을 기지 사용권과 맞바꾸는 협정이 맺어졌고, 마침내 1941년 무기대여법에 이르렀다. 무기대여법의 정치적 기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국이 직접 싸울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했고 국민 다수도 여전히 참전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나치 독일을 무찌르는 데 결정적인 지원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전쟁 기간 전체를 통틀어 미국은 30여 개국과 무기대여 협정을 맺고 약 500억 달러를 지원했다.

국내의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 우선’을 내건 여론은 참전 위험, 행정부의 팽창, 영국 지원을 모두 루스벨트가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가는 통로로 보았다. 여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구조적 지점이 있다. 고립주의를 단순한 도덕적 선악의 문제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이 구축물 안에 실제로 존재해 온 미국의 한 전통으로 읽어야 한다. 해외 분쟁에 휘말리는 것, 상비군이 커지는 것, 행정 권력이 집중되는 것, 한 차례의 대전이 공화국의 성격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전통이다. 이 줄기는 연작의 첫머리에 등장한 워싱턴과 정확히 이어진다. 그는 고별사에서 유럽의 오랜 정치적 얽힘에 말려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고립주의자들의 우려는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다. 이 전쟁은 대통령을 중심에 둔 거대한 전쟁국가를 이 구축물의 심장부에 들여놓았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1941년 8월의 대서양헌장은 그 전환의 중요한 고비였다. 루스벨트와 처칠의 회담 뒤 발표된 공동성명인 이 문서를 제도사의 관점에서 읽으면, 1941년은 바로 미국이 국내의 가치를 표현하던 언어를 국제 질서의 언어로 확장한 해였다.

3. 네 가지 자유와 진주만

1941년 1월 6일 연두교서에 등장한 네 가지 자유는 이 글에서 반드시 붙잡아야 할 핵심 텍스트다. 루스벨트는 우리가 안전하게 만들고자 애쓰는 미래에, 인간의 네 가지 기본 자유 위에 세워진 세계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을 예배할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그것도 세계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 누려야 할 자유였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장식이 아니었다. 미국의 전쟁 준비와 영국 지원, 전후 질서 구상을 하나의 보편주의 언어 안에 모두 담아낸 것이었다.

이 대목이 이 연작에서 특히 중요한 까닭은, 건국기의 자연권 언어로 그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와 세계대전을 거치며 자유의 배치를 새로 짰다. 앞의 두 가지, 언론과 종교는 익숙한 시민적 자유다. 뒤의 두 가지,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안전과 물질적 삶을 이 구축물이 내세우는 가치 안으로 끌어들인다. 네 가지 자유의 뒤쪽 두 항목은 그 자체로 뉴딜의 언어다. 뉴딜이 경제적 잔여항을 떠맡으면서 약속했던 안전을 루스벨트는 이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로 다듬어 전 세계에 선포했다. 이렇게 보면 네 가지 자유는 내정과 외교가 하나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국내에서 자라나 사회적 위험을 감당하게 된 뉴딜 국가가 자신의 가치와 자기 이해를 처음으로 세계 질서의 언어로 펼쳐 보인 것이다.

진주만은 루스벨트가 그때까지 걸어온 점진적 노선을 단숨에 공개적인 전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1941년 12월 8일 의회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첫 문장을 손수 고쳐 ‘치욕으로 영원히 기억될 날’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같은 대목에서 미국이 느닷없이, 계획된 공격을 받았다고 말했고, 끝에서는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연설 뒤 상원은 만장일치로 선전포고를 지지했고, 하원에서는 지넷 랭킨 한 사람만 반대했다. 루스벨트는 1941년 초에 네 가지 자유로 미국의 대외 목표를 보편화했다. 연말 진주만 공격 뒤에는 ‘치욕의 날’ 연설로 전쟁의 정당성을 배신적인 기습을 당한 뒤의 자위와 복수에 단단히 고정했다.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지만 어조는 다르다. 앞의 것은 세계 질서의 언어이고, 뒤의 것은 전쟁 동원의 언어다. 이 두 어조는 곧 국내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배제하는 현실과 한층 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된다.

4. 총력전과 행정국가의 팽창

전시 행정권의 팽창은 막연한 말보다 구체적인 기관과 수단을 따라가는 편이 잘 드러난다. 전쟁생산위원회는 1942년 1월 16일 행정명령으로 설치되어 연방의 전시 조달과 생산 사업을 총괄 지휘했다. 전쟁 중반에 이르면 그 위에는 전시동원국이, 아래에는 전쟁인력위원회와 물가관리국, 전쟁식량청 등 전문 기관들이 촘촘히 들어서 거대한 연방 동원망을 이루었다. 이 팽창은 미국 경제를 직접 바꾸었다. 1939년 불변가격 기준 국민총생산은 1939년 886억 달러에서 1944년 1,350억 달러로 늘었다. 전쟁 관련 생산은 1943년 국민총생산의 40퍼센트에 이르렀으며, 1944년 실업률은 민간 경제활동인구의 1.2퍼센트까지 떨어져 미국 경제사상 최저 수준에 가까워졌다. ‘정상으로의 복귀’가 미루어 놓고, 뉴딜이 완화했으되 끝내 치유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마침내 끝낸 것은 전쟁의 총동원이었다.

조세국가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연방 개인소득세 과세 대상 신고 건수는 1939년 약 400만 건에서 1945년 약 4,300만 건으로 늘었다. 연방 세수는 1941년만 해도 87억 달러였으나 1945년에는 약 450억 달러에 달했다. 국내총생산에서 연방 세수가 차지하는 비중도 약 8퍼센트에서 20퍼센트 이상으로 높아졌다. 한편 전쟁정보국은 국내외에서 전쟁의 진행 상황과 전쟁 정책, 전쟁 목적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임무를 맡아 사실상 연방정부 공식 선전의 중추가 되었다. 1942년 6월 13일 설립된 전략정보국은 전년에 설치된 정보조정관실(COI)을 이어받아 중앙집중식 정보 활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 두 갈래는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훗날 등장하는 국가안보국가의 전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를 연작의 틀 안에 놓으면, 지금까지 따라온 행정권 확대의 긴 흐름이 여기서 정점에 이른다. 잭슨의 민의에 기댄 권한 부여에서 링컨의 전시 비상권한을 거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수탁자 이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행정국가까지. 총력전은 그렇게 만들어진 행정의 몸을 유례없이 불려 놓았다. 다만 역사학이 이 팽창을 평가하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제도사 연구는 전시 국가를 연방의 역량이 도약한 결정적 고비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시민적 자유의 역사를 연구하는 쪽은 원래 견제를 받아야 할 행정권이 어떻게 전쟁을 만나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시장과 사회, 개인의 권리 영역에 더 쉽게 파고들었는지를 강조한다. 두 관점 모두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동원과 느슨해진 견제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 일이다.

5.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이 글의 핵심 사례는 단연 일본계 미국인의 강제 수용이다. 본격적으로 살피기에 앞서 어떤 말을 쓸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당시 정부가 사용한 ‘대피’, ‘이동’, ‘재정착’ 같은 말은 의도적으로 어감을 누그러뜨린 완곡어법이다. 사건의 강제성과 부당함을 가리기 때문에, 오늘날 공공역사 분야에서는 ‘강제 이주’, ‘대규모 추방’, ‘구금’처럼 더 정확한 말로 바꿔 써야 한다고 본다.

사실관계와 작동 방식은 이렇다. 행정명령 제9066호는 1942년 2월 19일에 서명되었다. 주의할 점은 그 문구가 일본계 미국인을 직접 지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부 장관과 군에 군사구역을 지정하고 그 안에서 누구든,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실제 집행은 서해안에서 곧바로 일본 혈통의 주민 전체를 몰아내는 조치가 되었다. 드윗 장군은 이 명령을 근거로 일본계 미국인 11만여 명의 강제 이주를 조직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뿐 아니라 이민 1세대인 그들의 부모도 포함되었다. 수치로 다시 말하면 서해안에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은 11만여 명이었고, 그중 약 3분의 2는 미국 시민이었다. 갇혀 지낸 환경 역시 ‘이주 센터’라는 말로 덮어서는 안 된다. 그 시설에서는 네댓 가족이 타르 종이를 두른 허름한 막사 한 동을 함께 쓰기도 했다. 주위에는 철조망과 감시탑, 무장 경비병이 있었고 임금은 대체로 한 달에 많아야 19달러였다. 많은 가족이 갑작스러운 이주 과정에서 집과 농장, 가게, 설비, 예금을 잃었다.

군사적 필요성을 따질 때는 당시 법원이 정부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와, 나중의 공식 조사와 학계가 그것을 어떻게 부정했는지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 1982년 정부 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결론을 명확히 내렸다. 이 강제 수용은 군사적 필요성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며, 역사적 원인은 인종적 편견과 전쟁 히스테리, 정치 지도력의 실패에 있었다. 오늘날 정부와 주류 역사학도 이 결론을 받아들인다. 나아가 일본계 미국인이 이처럼 대규모의 집단 구금을 뒷받침할 만큼 간첩 활동이나 파괴 공작을 벌였다는 문헌 증거는 없다고 설명한다.

이 사건을 연작의 틀로 되돌려 놓으면, 전시의 폐쇄 충동이 국내에서 도달한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보인다. 링컨이 남북전쟁 중 인신보호영장의 효력을 정지시킨 일,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 중 간첩법으로 수천 명의 반전 인사를 기소한 일은 모두 전쟁의 압박 아래 반대 의견과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눌러 없애려는 폐쇄 충동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일본계 강제 수용은 그보다 더 멀리 갔다. 억압의 대상이 더는 구체적인 행동이나 발언이 아니라 한 집단 전체의 혈통 자체였기 때문이다. 개인별 심리도, 구체적인 증거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의 혈통만으로 그와 가족을 통째로 몰아내고 가두었다. 이 구축물이 전쟁 중 오로지 혈통으로 적과 아군을 가르는 배제의 논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6. 고레마쓰 사건과 엔도 사건

이 강제 수용을 사법부가 처리한 과정은 이 구축물의 사법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1944년 12월 18일, 연방대법원은 ‘고레마쓰 대 미국’ 사건에서 6 대 3으로 배제 명령을 위반한 고레마쓰의 유죄판결을 유지했다. 블랙 대법관은 다수의견에서 특정 인종 집단의 시민적 권리를 제한하는 모든 법률은 즉각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충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신속히 가려낼 수 없다는 군과 의회의 판단을 법원이 부정할 수는 없다며, 집단 전체를 배제하는 명령을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고레마쓰 판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노골적인 인종주의 원칙을 새로 발명했다는 데 있지 않다. 엄격히 심사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행정부와 군의 판단을 거의 제약 없이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입으로는 의심한다고 말하면서 손으로는 통과시켜 준 것이다.

후대에 더 큰 영향을 남긴 것은 반대의견들이었다. 머피 대법관은 이런 배제가 ‘인종주의의 추악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질적 근거가 전혀 없는 군사적 필요성의 주장으로 개인의 헌법상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잭슨 대법관은 더 먼 미래를 향해 경고했다. 법원이 이런 명령을 합리화해 주면, 그것은 법 안에 ‘장전된 무기’처럼 남아 앞으로 어떤 권력자든 꺼내 쓸 수 있는 선례가 된다는 것이다. 잭슨의 이 경고가 이 연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구축물에 되풀이되는 위험을 정확히 짚기 때문이다. 행정부의 비상권한이 사법부의 보증을 받아 제도화되는 순간, 그것은 오랫동안 잠복하는 선례가 되어 다음 권력이 꺼내 쓸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같은 날 내려진 엔도 사건의 판결은 다른 길을 갔다. 법원은 정부 자신도 충성스럽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인정한 미국 시민을 전시이주국이 계속 구금할 권한은 없다고 판단했다. 서해안 배제 명령의 철회는 판결 전날인 1944년 12월 17일에 이미 발표되어 있었고, 1945년 1월 2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강제 수용 체제는 끝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고레마쓰 판결과 엔도 판결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법부의 입장이 가지런히 통일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 같은 법원이 비상사태 속에서 군의 판단을 존중할 범위와 시민을 가두어 둘 수 있는 한계를 불안정하게 다루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전후의 바로잡기는 세 층위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사법적 회복이다. 1983년, 고레마쓰의 유죄판결은 원판결의 오류를 바로잡는 특별 절차를 통해 취소되었다. 정부가 원래 재판에서 군사적 필요성에 관한 증거를 숨기거나 오도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둘째는 정치와 입법 차원이다. 1988년 시민자유법은 이 부당한 일을 공식 인정하고 생존자에게 사과했으며, 요건을 충족하는 생존자 한 사람당 2만 달러를 보상하도록 했다. 레이건은 서명하면서 이 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명예라고 말했다. 셋째는 헌법적 기억의 층위다. 2018년 ‘트럼프 대 하와이’ 사건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은 고레마쓰 판결이 선고 당일부터 심각하게 잘못되었으며, 헌법 아래의 법질서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썼다. 여기서도 법률의 약속과 실제 집행을 구분해야 한다. 1998년까지 해당 보상 사업은 8만 1,974명에게 16억 달러가 넘는 돈을 지급했다. 이 숫자가 일깨우는 것은, 국가가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국가가 그 피해를 원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7. 제442연대와 더블 V

일본계 미국인의 군 복무는 이 역사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역설 가운데 하나다. 1943년 2월 1일 제442연대가 창설되었다. 미국 본토의 수용소에서 자원한 병사들도 이 부대에 들어왔으며, 하와이의 제100대대는 뒤이어 1944년에 합류했다. 부대 규모와 복무 기간을 감안하면 이 연대는 훗날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가 되었다. 모두 약 1만 4,000명이 거쳐 갔고, 명예훈장 21개와 퍼플하트 훈장 9,486개를 받았다. 이 병사들을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면, 그들은 두 전쟁을 치렀다. 하나는 독일과의 전쟁, 다른 하나는 미국 안의 편견과의 전쟁이었다. 이 역설은 연작 깊숙이 흐르는 한 줄기와 맞닿는다. 제8편에서는 흑인 병사들이 아직 자신들에게 평등을 주지 않은 연방을 위해 싸웠다. 이제 미국 본토 출신의 많은 일본계 병사는 자기 가족을 가두어 놓은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흑인 미국인의 전시 경험은 대외적 보편주의와 대내적 배제 사이의 또 다른 긴장을 드러낸다. ‘더블 V’란 바깥에서는 파시즘에 승리하고 안에서는 시민적 평등을 쟁취하자는 뜻이다. 전쟁 지원과 사회 진보의 요구를 전례 없이 결합하려 했던 흑인 공동체의 노력을 압축한 구호다. 전쟁은 미국 안의 인종적 위계를 저절로 없애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위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하자, 흑인 시민들은 바로 그 말을 들고 국가를 향해 되물었다. 이 흐름에서 제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랜돌프가 워싱턴 행진을 예고하며 압박한 일이었다. 1941년 국방산업의 인종차별을 두고 랜돌프를 비롯한 흑인 지도자들은 대통령에게 차별을 끝내는 명령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흑인 10만 명을 워싱턴에 모아 시위하겠다고까지 했다. 마침내 루스벨트는 6월 25일 행정명령 제8802호에 서명했다. 국방산업과 정부 고용에서 인종, 신조, 피부색, 민족적 출신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 진정을 접수할 공정고용관행위원회를 만들었다. 다만 많은 역사학자는 이 위원회의 힘이 약했으며, 특히 남부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다고 본다.

이 잣대가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연작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하나를 뒷받침한다. 왜 이 구축물은 가장 깊은 잔여항을 봉합해 닫을 수 없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 하나는 자신의 토대를 이루는 문헌에 보편주의의 약속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한 번 쓰이고 선포되고 나면 더는 선포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공의 도구, 배제당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들어 올릴 수 있는 잣대가 된다. 루스벨트가 네 가지 자유를 내세운 것은 원래 대외 전쟁에 사람들을 동원하고 미국의 대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잣대를 누가 사용할지까지 통제하지는 못했다. 통제할 수도 없었다. 그가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전 세계에 약속하자마자, 국내의 흑인들은 똑같은 말을 들고 왜 자신들은 여전히 인종분리의 공포와 결핍 속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8. 임기, 얄타, 그리고 세계 질서

루스벨트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임기는 그 자체로 제도사적 사건이다. 워싱턴이 시작한 두 임기의 전통은 루스벨트가 1940년과 1944년에 세 번째, 네 번째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깨졌다. 그가 1940년 선례를 깨기로 한 결정은 유럽 전쟁의 발발과 프랑스의 함락에 직접 닿아 있었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전시 지도력의 연속성을 강조했고, 반대자들은 대통령직이 장기화되어 끝내 종신직으로 굳어질까 걱정했다. 1940년대 미국에 전통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전통은 위기 속에서 깨졌고, 그 뒤 다시 제도로 굳어졌다. 1947년 의회가 발의하고 1951년 효력이 발생한 수정헌법 제22조는 대통령 당선을 원칙적으로 두 번까지 허용하되, 다른 사람의 임기를 이어받아 2년 넘게 재임한 사람은 한 번만 당선될 수 있도록 정했다. 한 번 깨고 다시 세우는 이 과정 자체가 이 구축물이 전통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 준다. 극단적인 위기에서는 관행을 넘을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성문 규칙을 세워 그 예외가 일상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전후 질서를 둘러싼 외교적 고비 가운데 얄타만큼 역사학의 논쟁이 치열한 곳도 드물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격파하려면 아직도 오랜 고전을 치러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중대한 전략적 이익으로 여겼고, 소련이 만주와 사할린 남부, 쿠릴열도에서 일정한 권익을 얻는 데 동의했다. 이를 두고 후대에는 몇 가지 대표적인 서사가 생겼다. 정통적인 냉전 서사는 흔히 얄타를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지나치게 양보한 사건으로 그린다. 수정주의 해석은 1945년의 힘의 현실을 강조한다. 붉은 군대가 이미 동유럽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양보가 단순히 순진함의 산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 최근의 탈수정주의는 냉전의 기원을 여러 당사자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얄타와 국제연합 창설 준비가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50개국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헌장을 완성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윌슨이 국제연맹을 추진하다 겪었던 실패를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양당의 지지를 구했고, 루스벨트가 사망한 뒤 트루먼 재임 중인 1945년 7월 28일, 상원은 89 대 2로 헌장의 비준에 동의했다. 루스벨트는 분명 윌슨에게서 배웠다. 윌슨처럼 고고하게 홀로 나아가다 실패하는 전철을 밟지 않고, 양당과 상원을 전후 질서의 설계 안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9. 맺음말

루스벨트의 전시 6년을 이 연작 안에 다시 놓았을 때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한 판단이다. 보편주의의 대외적 투사와 가장 위험한 대내적 배제는 하나의 전시 국가가 동시에 낳은 두 얼굴이었다.

두 얼굴은 모두 실재했다. 어느 쪽도 말뿐인 수사가 아니었다. 바깥을 향한 얼굴은 실재했다. 루스벨트는 네 가지 자유로 이 구축물의 가치를 세계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로 선언했다. 대서양헌장과 국제연합 창설 준비를 추진하며, 절반쯤 고립된 강대국 미국을 세계 질서의 설계자로 바꾸었다. 윌슨에게서 교훈을 얻어 양당의 지지를 구한 것은, 후임자가 이 세계 질서 구상을 계속 추진하고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던 전철을 피할 토대를 마련했다. 안쪽을 향한 얼굴도 똑같이 실재했다. 같은 전시 국가가 행정권을 전례 없는 규모로 키웠다. 이렇게 견제가 느슨해진 행정권이 맺은 가장 쓰라린 열매는 일본계 미국인의 강제 수용이었다. 혈통 하나만으로 11만여 명을 통째로 가둔 그 국가행위는 순수한 배제의 논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두 얼굴은 따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공과가 아니다. 같은 전시 기계에서 같은 동력으로 돋아난 두 얼굴이다.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스스로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네 가지 자유와 같은 보편주의 언어를 필요로 했다. 동시에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한 집단 전체를 적으로 취급하는 배제를 용인했다.

이것은 다시 이 연작의 가장 깊은 틈으로 돌아온다. 토대를 놓은 문헌에 적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과 이 구축물이 실제로 행한 배제 사이의 틈. 건국 이래 닫히지 않았던 그 틈이 루스벨트의 전시에 유례없는 폭으로 벌어졌다. 한쪽 끝에는 네 가지 자유처럼 전 세계에 권리를 약속하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하는 보편주의가 있었다. 다른 쪽 끝에는 일본계 강제 수용처럼 혈통만으로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가장 노골적인 배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이 틈을 양쪽에서 벌린 두 손이 한 몸의 손이었다는 사실이다. 보편주의를 전 세계로 투사한 전시 국가가 바로 국내에서 집단 구금을 실행한 그 전시 국가였다.

그러나 이 틈은 이 구축물이 끝내 닫히기를 거부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잭슨의 ‘장전된 무기’라는 경고, 머피가 ‘추악한 심연’이라 부르며 내놓은 반대의견, 엔도 판결이 무한정한 구금 앞에 세운 제동, 제442연대가 피로 얻은 명예, 더블 V 운동이 보편주의를 들고 던진 반문, 수십 년 뒤 국가가 강제 수용에 대해 내놓은 공식 사과와 보상까지. 모두 배제당한 잔여항과 배반당한 이상이 가장 어두운 때에도 진정으로 꺼진 적은 없다는 증거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조지아주에서 뇌출혈로 사망했고, 같은 날 트루먼이 백악관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전쟁 중이었고, 유례없이 오래 재임한 대통령이 임기 중 세상을 떠난 순간이었지만 권력 이양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났다. 이 점은 이 연작에서 매우 중요하다. 뉴딜과 전쟁 속에서 대통령직이 전에 없이 비대해졌는데도, 이 구축물의 오래된 승계 장치는 여전히 평소처럼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 구축물의 가장 깊은 힘은 어느 한 강력한 지도자에게 있지 않다. 그중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죽은 뒤에도 권력이 평온하게 넘어가도록 하는, 어느 개인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구조에 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