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루스벨트의 뉴딜(하) — 확장이 견제에 부딪힐 때
팽창이 견제와 마주칠 때
이 글의 목차
1. 확장이 견제에 부딪히다
지난 편 끝에서 예고했듯, 이 체제의 오랜 권력분립 구조는 뉴딜이 낳은 전례 없는 행정권의 팽창에 거세게 반격하게 된다.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을 번번이 가로막은 연방대법원을 뜯어고치려 한다. 1937년의 대법원 개편 위기는 뉴딜의 확장이 제도의 경계에 부딪혀 되밀리고, 끝내 물러서야 했던 과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이 위기가 언제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짚어두자. 루스벨트 개인의 정치적 위신도, 그를 떠받치는 민주당의 우위도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다. 1936년 대선에서 그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523표를 얻으며 압승했다. 내준 주는 메인과 버몬트, 단 두 곳뿐이었다. 제75대 의회가 들어섰을 때 민주당의 하원 의석은 334석, 공화당은 고작 88석이었다. 개편안을 정식으로 내놓을 무렵, 대통령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은 거의 모두 그의 손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그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이 이 싸움에서는 끝내 물러나야 했다.
위기의 중심에는 흔히 보는 대통령과 야당의 대립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었다. 대통령이 독립적인 견제기관의 작동 조건을 바꾸려 하자, 자기 당이 장악한 의회와 광범위한 여론의 압력, 당내에서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세력이 함께 길을 막아선 것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반대 진영에 공화당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원 법사위원장 섬너스, 상원에서 반대를 이끈 진보 성향의 민주당 의원 휠러 같은 당내 핵심 인사들도 가세했다. 상원 법사위원회는 신랄한 보고서에서 이 법안이 불필요하고 실효성도 없으며, 헌법 원칙에서 지극히 위험하게 벗어난다고 비판했다. 법원을 의회와 대통령의 의지 아래 종속시킬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 위기가 말해주는 가장 깊은 뜻은 여기에 있다. 이 체제의 견제는 종이에 적힌 죽은 규칙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힘이다. 대통령의 권세가 가장 높을 때에도, 심지어 대통령 자신의 당 안에서도 솟아올라, 선을 넘은 확장을 원래의 헌법 틀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을 수 있다.
2. 위기의 배경과 도화선
루스벨트가 개편안을 추진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대법원이 1935년과 1936년에 뉴딜의 핵심 입법을 잇달아 무너뜨렸다는 데 있었다. 지난 편에서 다룬 셰크터 사건에서 대법원은 국가산업부흥법이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광범위한 규제 권한을 넘겼으며, 문제의 거래도 이미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버틀러 사건에서는 농업조정법의 가공세와 보조금 제도가 헌법이 허용한 연방 권한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1937년 초에는 그다음 차례인 더 중요한 뉴딜 사업들, 특히 와그너법과 사회보장제도마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처지에 놓였다. 루스벨트에게 이는 몇몇 법률을 살리느냐 없애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뉴딜 전체가 헌법 심사의 문턱을 넘어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걸린 문제였다.
당시 대법원의 정치적 구도는 흔히 이렇게 설명됐다. 확고한 보수파 네 명, 이른바 ‘네 기수’가 진보파 세 명인 ‘삼총사’와 맞섰고, 그 사이에 선 휴스 대법원장과 오언 로버츠 대법관이 결정적인 표를 쥐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1937년 3월 9일 노변담화에서 이 문제를 아주 직설적으로 꺼냈다. 대법원이 더는 사법기관에 머물지 않고 ‘의회의 제3원’, 곧 ‘초입법기관’이 되었다고 몰아붙였다. 이제는 법원으로부터 헌법을 구하고, 법원 자신으로부터 법원을 구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이 충돌은 처음부터 누가 옳고 그른지만을 가리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이 체제 안에서 영역을 넓히는 행정부·입법부와 그 앞에 한계를 긋는 사법부가, 대체 누가 선을 넘었느냐를 놓고 정면으로 맞붙은 것이었다.
3. 개편안의 설계와 명분
1937년 2월 5일, 루스벨트는 의회에 사법부 개편안을 제출했다. 핵심 장치는 이랬다. 연방법관이 만 70세에 이르고 재직 기간이 10년 이상인데, 이 두 조건을 충족한 뒤에도 6개월 안에 사임하거나 퇴직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법관 한 명을 추가로 임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방식으로 대법관 수는 아홉 명에서 최대 열다섯 명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아홉 명이라는 정원은 헌법이 아니라 법률이 정한 것이므로, 증원 자체가 곧 위헌인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가 대중 앞에 내세운 명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법의 효율과 밀린 사건이었다. 법원 인력을 보강해 사건을 더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법철학의 쇄신이었다. 그는 이 계획을 사법부의 ‘동맥경화’를 막는 처방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겉으로 내건 이유와 실제 정치적 목적 사이의 거리는 당시에도 널리 간파됐다. 오늘날 연구가 정리하는 동기는 명료하다. 대법원 내부의 이념적 균형을 바꾸어, 뉴딜 법률을 더는 뒤집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휴스 대법원장의 반격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휴스는 상원 법사위원회에 보낸 서한에서 대법원이 맡은 업무를 제때 처리하고 있으며, 루스벨트가 말하는 심각한 사건 적체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법관을 늘린다고 효율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심리에 참석하고, 협의하고, 토론하고, 설득을 거쳐 판단을 내려야 할 사람이 더 많아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 반격은 루스벨트가 국민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내밀 수 있었던 실무상의 명분을 허물었다. 논쟁은 다시 권력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둘러싼 정면충돌이라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 연작의 틀에서 보면, 개편안이 이 체제의 신경을 건드린 대목은 분명하다. 기관의 설계를 바꾸는 방식으로, 독립적인 견제기관이 판결하는 방향을 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루스벨트의 수가 통했다면 대단히 위험한 선례가 남았을 것이다. 의회 다수를 확보한 대통령이라면 누구든 대법원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대법관을 더 임명해, 법원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도장이나 찍는 기관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이 선례의 위험성 때문에 원래 뉴딜을 지지하던 사람들까지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걱정한 것은 당장 몇몇 뉴딜 법률이 살아남느냐가 아니었다. 이 한 수로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권력분립 구조가 영구히 망가지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었다.
4. 반발과 법안의 죽음
반발은 빠르게, 여러 방향에서 터져 나왔다. 하원에서는 섬너스가 사실상 법안의 진로를 막아 백악관이 주된 전장을 상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게 했다. 상원의 반대 진영 역시 보수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화당 의원들 외에 진보 성향의 민주당 의원 휠러가 있었다. 오늘날 연구는 상원에서 법안을 좌절시키는 싸움을 이끈 인물이 바로 이 진보파 민주당 의원이었다고 명시하기까지 한다. 이 사실은 강조할 가치가 있다. 그래야 1937년을 오늘날식 양당 대결로 납작하게 읽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 루스벨트를 가로막은 것은 한 덩어리로 뭉친 야당이 아니었다. 당파를 넘어 권력분립의 훼손을 함께 걱정한 사람들이었고, 그 안에는 정책 면에서 뉴딜을 지지한 진보파도 있었다.
이 대목은 거듭 짚어야 한다. 견제란 늘 보수파가 개혁을 방해할 때 쓰는 도구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장 확실하게 깨뜨리기 때문이다. 1937년의 사실은 정반대였다. 루스벨트를 막아선 사람 가운데는 누구보다 확고한 뉴딜 지지자도 있었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경제정책에는 찬성했지만, 대법원을 바꾸려는 수단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권력분립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는 개별 정책에 대한 찬반과 별개일 수 있다는 뜻이다. 뉴딜 법률이 살아남기를 바라면서도, 그 대가로 사법부 독립을 허무는 일만큼은 거부할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을 따로 저울질할 수 있는 이 능력이야말로 이 체제에서 견제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 중 하나다.
법안은 결국 의회 절차를 거치는 동안 정치적으로 버틸 힘을 소진하며 죽었다. 1937년 6월, 상원 법사위원회는 강경한 반대 보고서와 함께 법안을 통과시키지 말 것을 권고했다. 7월 22일에는 상원이 70 대 20으로, 이미 내용이 크게 약해진 수정안을 다시 위원회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증원 부분에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린 셈이었다. 대다수 연구는 이를 루스벨트 두 번째 임기의 가장 심각한 정치적 패배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불과 몇 달 전 압도적인 승리로 재선한 대통령은 그렇게 권력의 꼭대기에서 이 체제의 오래된 견제의 벽에 부딪혔다.
5. 대법원의 방향 전환
이 위기에는 유명하면서도 복잡한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이른바 ‘때맞춘 전환이 아홉 명을 살렸다’는 이야기다. 대법원 개편 논쟁이 한창일 때 대법원은 두 건의 중요한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1937년 3월 29일의 웨스트코스트 호텔 대 패리시 판결은 워싱턴주의 최저임금법을 인정했다. 사실상 이전의 계약 자유 법리를 경직되게 적용하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어 4월 12일, 전국노동관계위원회 대 존스 앤드 로플린 철강회사 판결에서는 와그너법을 유지했다.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도 주 사이의 통상과 밀접하고 실질적인 관계가 있다면 의회가 규제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은 이 ‘때맞춘 전환’의 시점과 동기를 둘러싼 통설을 크게 고쳐놓았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미 설 자리를 잃은 극적인 이야기에 다시 빠지게 된다. 연구에 따르면 패리시 사건에 관한 대법관들의 평의 표결은 이미 1936년 12월 19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결과는 4 대 4였고, 병가 중이던 스톤 대법관이 돌아온 뒤 다섯 번째 찬성표가 채워졌다. 반면 루스벨트가 개편 계획을 발표한 것은 1937년 2월 5일이었다. 요컨대 로버츠는 개편안이 나오기 전에 이미 법률을 합헌으로 인정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판결문은 그 뒤인 3월 29일에 발표되었다.
로버츠가 왜 방향을 바꾸었는지도 한 가지 설명으로 단정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세 갈래 해석을 나란히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외부 요인 중심의 해석은 정치적 압력과 1936년 대선 이후의 여론 환경을 강조한다. 수정주의적 해석의 한 흐름은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이 판결들이 상당 부분 로버츠의 기존 법리와 사건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는 논리로 설명될 수 있으며, 대법관 증원의 위협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본다. 그 중간에 놓인 계량 연구도 있다. 이 연구는 1936년 회기 로버츠의 표결 양상에 뚜렷한 전환점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패리시 판결이 2월 5일의 개편안에 직접 떠밀려 나온 것이라는 순진한 이야기는 명확히 반박한다. 이 세 층위를 함께 보는 편이 ‘법원이 굴복했다’는 한마디보다 역사적 사실에 훨씬 가깝다.
이 전환을 연작의 분석 틀로 돌아가 살펴보면, 위기의 결말은 단순한 승패보다 훨씬 흥미로워진다. 행정부가 법원을 장악했다면 견제는 무너졌을 것이다. 반대로 법원이 한결같이 뉴딜을 가로막았다면 확장은 꼼짝 못 했을 것이다. 이 체제는 어느 쪽으로도 헌법적 충돌을 풀지 않았다. 법원이 스스로 법리를 바꾸어, 이미 자라난 행정·규제 국가를 수용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체제의 어느 한 부분을 짓눌러 문제를 끝낸 것이 아니라, 그중 한 부분인 사법부가 헌법 해석을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을 지키면서도 확장이 들어설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 체제다운 전형적인 해결 방식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압도하며 충돌이 끝난 것이 아니라, 서로 조정한 끝에 미묘한 새 균형에 도달하면서 일단락됐다.
6. 경기침체와 당내 숙청, 대통령 권력의 한계
대법원 개편의 실패가 먼저 루스벨트에게서 헌법 질서를 바꿀 주도권을 빼앗았다면, 뒤이은 1937~1938년의 경기침체는 경제정책에 대한 자신감마저 꺾었다. 오늘날 연구는 이 침체를 1937년 5월부터 1938년 6월까지로 잡고, 20세기 최악의 경기침체 세 차례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대표적인 지표만 보아도 실질 국내총생산이 약 10% 줄었고, 실업률은 20%에 닿았으며, 산업생산은 32% 감소했다. 원인을 설명하는 경제사 연구도 이제 재정 긴축 하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통화와 재정의 수축이 겹쳤다는 것이다. 지급준비율 인상, 재무부가 1936년부터 시행한 금 유입 불태화 정책, 1937년 발효된 사회보장 급여세가 함께 총수요를 눌렀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너무 일찍 거두어들였다는 점은 훗날 고위 당국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남았다. 1938년에 이르러 루스벨트는 적자지출 확대 쪽으로 뚜렷하게 기울고 있었다.
1938년의 당내 숙청 시도는 대통령이 자기 당을 통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음을 다시 보여주었다. 루스벨트는 6월 24일 노변담화에서 민주당 예비선거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을 공개했다. 뉴딜에 반대하는 보수파 민주당 의원들을 당의 중심에서 밀어내려는 시도였다. 오늘날 연구가 정리한 결과는 이렇다. 그는 타이딩스를 비롯한 보수파 민주당 의원 열 명을 겨냥했지만, 실제로 패배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대다수는 대통령에 대한 적대감을 더 키운 채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 일이 중요한 까닭은 대통령의 처신이 예의에 어긋났기 때문이 아니다. 선거에서 아무리 압도적인 위임을 받았다 해도 정당을 행정명령이 그대로 뻗어 나가는 통로처럼 다룰 수는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938년 중간선거가 끝나자 그 한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민주당의 하원 의석은 제75대 의회의 334석에서 제76대 의회의 262석으로 줄었다. 오늘날 연구는 대법원 개편 시도와 그 뒤를 이은 보수파 민주당 의원 숙청이 모두 이 선거의 의석 손실에 기여했다고 명시한다. 대법원 개편의 실패는 보수연합의 형성과도 맞물렸다. 남부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이 손을 잡는 계기를 보탠 것이다. 연작의 틀에서 보면, 이는 지난 편에 남겨둔 복선이 현실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뉴딜 연합 내부의 가장 깊은 모순, 곧 남부 민주당 의원들의 표에 의존한다는 문제가 여기서부터 뉴딜의 전진을 가로막는 실제 보수 세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7. 행정국가의 확장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행정국가의 확장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사법부의 견제를 차단하지 못한 루스벨트는 방향을 돌려, 대통령을 둘러싼 행정 역량을 제도화하는 데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7년 브라운로 위원회의 유명한 결론은 ‘대통령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39년의 정부조직개편법은 법률상 제한과 의회의 심사를 전제로 대통령에게 행정조직 개편안을 제출할 권한을 주었다. 같은 해 4월 25일 의회에 제출되어 7월 1일 발효한 제1호 조직개편안은 대통령 행정실을 만들고, 예산국을 비롯한 관리 부서들을 대통령의 직접 통제 아래로 옮겼다. 루스벨트는 의회에 보낸 설명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대통령 한 사람이 주요 기관 서른~마흔 곳을 일일이 직접 관리할 수는 없으며, 유일한 길은 조직개편이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행정 책임을 다하려면 그에 필요한 조직과 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법원 개편은 실패했지만, 대통령제를 둘러싼 행정 장치는 더욱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이 역설을 연작의 분석 틀에 놓아보면, 이 체제의 견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견제는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켜지고 꺼지는 단순한 스위치가 아니다. 법원을 장악하려는 시도처럼 어떤 방향의 행정권 확장에는 강력하게 제동을 걸면서도, 의회의 수권 아래 대통령이 자기 행정기구를 재편하는 일처럼 다른 방향의 확장에는 내부의 권력 집중을 억제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이 체제는 가장 중요한 금지선을 지켜냈다. 행정부가 독립적인 견제기관을 손아귀에 넣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거대한 행정국가가 수권 범위 안에서 스스로 조직을 바꾸어, 더 집중되고 더 제도화된 대통령의 행정기구를 세우는 움직임에는 같은 강도의 제동을 걸지 않았다. 그것은 이 체제의 힘이 미치지 못한 영역이었다.
이 불균형은 연작 전체를 통틀어서도 기억해둘 만하다. 같은 견제 장치라도 확장의 형태에 따라 방어력은 천지 차이다. 대법원 개편처럼 특정 견제기관을 노골적으로 겨냥하는 공격에는 이 체제가 대단히 강한 면역반응을 보인다. 공격의 의도가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견제기관을 직접 건드리지 않은 채 수권을 바탕으로 행정부 자신을 더 크고 더 중앙집중적으로 만드는 확장, 이를테면 행정기구의 재편에는 같은 항체가 작동하기 어렵다. 그리고 바로 이런 조용한 내부 집중이야말로, 길게 보면 요란한 권력 탈취 한 번보다 이 체제의 권력 지형을 더 깊이 바꾸어놓을 수 있다.
8. 맺음말
1937년을 전후한 이 시기를 연작 전체 속에 놓고 볼 때,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글을 관통하는 판단이다. 확장은 견제에 부딪혔다. 그러고도 견제의 틈새를 타고 계속 자라났다.
1937년의 대법원 개편 위기를 낡은 제도의 잔재가 루스벨트를 패배시킨 사건 정도로 읽어서는 안 된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이 체제의 견제 구조를 바꾸려 했을 때, 의회와 당내의 독자성, 대중의 논쟁, 법원 자신의 방향 전환이 함께 그를 기존 헌법의 틀 안으로 되돌려놓은 사건이었다. 이 위기는 이 체제의 견제가 살아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견제는 약한 대통령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523표를 얻고 막 대승을 거둔 대통령 앞에서도, 바로 그 대통령의 당 안에서, 당파를 가로질러 권력분립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법부를 장악하려던 시도를 기어이 밀어냈다.
다만 이 견제의 승리는 한계가 있었고, 방향에 따라 고르지도 않았다. 이것이 이 글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나머지 절반이다. 체제는 가장 중요한 금지선을 지켜, 행정부가 대법관 증원으로 독립적인 견제기관을 무너뜨리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의 수권을 받은 거대한 행정국가가 스스로를 재편해 더 집중되고 더 제도화된 대통령의 행정기구를 세우는 일에는 같은 강도의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대법원 개편은 좌절됐고 대통령 행정실은 세워졌다. 행정국가는 움츠러들기는커녕 장비를 더 잘 갖추었다. 견제는 무엇이든 막아내는 벽이 아니라, 촘촘한 곳과 성긴 곳이 함께 있는 그물이다. 사법부 독립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 같은 월권은 단단히 붙잡지만, 행정기구 자체의 팽창 같은 확장은 그 틈으로 빠져나간다.
이것은 다시 이 체제에 내재한 영원한 긴장으로 이어진다. 행정권의 확장은 체제가 잇달아 생겨나는 잔여항을 떠안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이면서, 언제든 견제를 벗어나려 위협하는 위험한 힘이기도 하다. 이 체제에는 앞의 기능만 남기고 뒤의 위험을 떼어낼 방법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확장과 견제가 되풀이해서 잡아당기는 가운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경계선을 긋고 또 다시 긋는 것뿐이다. 1937년에는 사법부 독립이라는 구간의 경계를 지켜냈지만, 1939년에 이르면 행정조직이라는 구간에서는 경계가 한참 앞으로 밀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체제에서 확장과 견제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최종 승리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서로의 모습을 바꾸어가며 영원히 계속되는 힘겨루기다. 그리고 이제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막 장비를 더 갖춘 행정국가 앞에, 그 힘을 쏟아부을 사상 최대의 무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