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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편 · 총 26편

제18편 루스벨트의 뉴딜 (상) — 폐허 위에서 자신을 다시 쓰다

폐허 위에서 자신을 다시 쓰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폐허 위에서 자신을 다시 쓰다

지난 글의 끝에서 예고했듯, ‘정상으로의 복귀’가 실패한 뒤 이 구축 체계가 내놓을 답은 진보주의 시대보다 훨씬 철저하고 멀리까지 뻗어가는 대확장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한 대통령이 후버가 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 연방정부를 경제적 재난에 맞서는 최우선의 보증인으로, 처음으로 명실상부하게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루스벨트가 취임한 1933년부터 뉴딜이 연방대법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1937년까지, 이 다섯 해는 이 구축 체계가 남북전쟁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자신을 뜯어고친 시간이었다.

그 개조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부터 구체적으로 짚자. 1932년 대통령 선거는 무엇보다 위기를 다스릴 능력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루스벨트는 일반 유권자 득표율 57.4%, 선거인단 472표로, 39.6%와 59표에 그친 후버를 꺾었다. 민주당은 의회에서도 의석을 크게 늘렸다. 한 개인의 승리를 넘어, 뒤이은 연방 차원의 제도 재편을 입법으로 뒷받침할 보기 드문 여지가 열린 셈이었다. 1936년에는 루스벨트가 선거인단 523 대 8로 랜던을 압도했다. 뉴딜은 정치적으로 이미 위기 때의 응급 대책을 넘어 다수파 연합의 토대가 되어 있었다.

루스벨트 취임 당시 위기가 얼마나 깊었는지는 수사의 배경으로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사실로 그려야 한다. 이 은행 위기에서 약 4천 개 은행이 결국 영영 문을 닫게 된다. 현대 연구가 제시하는 당시 실업자는 약 1,400만 명, 전체 노동력의 4분의 1에 달했다. 1933년 3월이면 거의 모든 은행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해 3월 4일의 첫 취임사가 중요한 까닭은 단지 유명한 연설이어서가 아니다. 루스벨트가 위기를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에서 제도와 심리의 문제로 다시 규정하는 방식이 그 안에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말했다. 곧이어 교환 수단의 동결, 마른 잎처럼 흩어져 쓰러지는 산업체, 판로를 찾지 못하는 농민, 흔적 없이 사라진 저축을 하나하나 들며 공포와 신용의 동결, 경제의 정지를 하나로 이어 붙였다. 눈여겨볼 대목은 같은 연설에서 의회가 행동하지 못한다면 이 비상사태와 전쟁을 벌일 더 광범위한 행정권을 요구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이후 행정권이 어디로 뻗어나갈지 알리는 분명한 신호였다.

이 출발을 우리의 분석 틀 안에 놓으면, 링컨 시대의 위기 속에서 제도를 다시 썼던 일과 뚜렷한 구조적 대칭이 보인다. 두 번 모두 제도의 정당성 자체를 흔들 만큼 큰 국가적 위기였다. 두 번 모두 폐쇄적 완결을 향하지 않고 제도 자체를 바꾸는 쪽으로 갔다. 이 구축 체계는 가장 깊었던 두 위기에서 모두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과 반대되는 선택을 했다. 선거를 없애지 않았고, 경쟁하는 정치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모든 권력을 하나로 모은 독재로 변신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거의 무너뜨릴 뻔한 잔여항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의 제도를 다시 썼다.

2. 백일 뉴딜과 은행 구제

흔히 말하는 ‘백일 뉴딜’은 후대 사람들이 문학적으로 부풀린 비유가 아니다. 당시 미국 정치의 작동 속도가 실제로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1933년 3월 9일 시작된 특별회기는 그야말로 입법의 열풍을 몰고 왔다. 긴급은행법은 하원에서 고작 38분의 토론을 거친 뒤 통과됐다. 법안 전문을 보지도 못한 의원이 많았다. 이 입법 열풍의 백 번째 날로 꼽히는 날이 1933년 6월 16일이다.

은행 위기의 수습은 뉴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첫 수이자, 가장 성공한 첫 수였다. 1933년 3월 6일 루스벨트는 전국 은행의 임시 휴업을 공식 선포했다. 3월 9일에는 긴급은행법이 신속히 통과돼 이 휴업을 사후 승인하고, 재무부에 은행 자산을 심사하고 자본을 공급하며 어느 은행의 영업을 재개할지 결정할 권한을 부여했다. 현대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루스벨트가 3월 12일 첫 ‘노변담화’에서 내놓은 놀랍도록 쉬운 설명이다. 은행은 왜 쓰러지는가, 왜 모든 은행이 한꺼번에 다시 문을 열 수 없는가, 왜 영업을 재개한 은행에 돈을 맡기는 편이 매트리스 밑에 숨겨두는 것보다 안전한가. 그는 이 문제들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했다. 복잡한 금융 조치를 보통 예금자도 이해할 수 있는 절차로 바꿔놓은 것이 그 담화의 정치적 효과였다. 첫 노변담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문을 다시 연 은행에 돈을 돌려놓으라고 직접 권했다. 매트리스 밑보다 그곳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3월 13일 은행들이 다시 문을 열자 예금자들은 인출 쇄도를 이어가는 대신 돈을 다시 맡기려고 줄을 섰다. 그렇게 은행 위기는 막을 내렸다.

통상 글래스 스티걸법이라고 부르는 1933년 은행법은 이 응급 안정 조치를 한층 더 제도화했다. 1933년 6월 16일 서명된 이 법의 핵심적인 결과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연방예금보험공사 설립, 일부 고위험 영업의 제한이었다. 예금보험은 1934년 1월부터 시행됐으며, 최초 보장 한도는 예금자 한 사람당 2,500달러였다. 예금보험과 다른 은행 개혁이 함께 안정 회복을 도왔고, 1933년 4천 건을 넘었던 은행 파산은 1934년 61건으로 줄었다.

행정권의 긴 발전 과정에서 놓치기 쉽지만 더없이 중요한 새로운 차원이 여기 있다. 앞선 글들에서 대통령 권력의 확장은 주로 명령을 내리는 능력, 전시 비상권, 규제 권한의 위임, 행정 조직의 확대로 나타났다. 루스벨트가 여기에 보탠 것은 설득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신문을 거치지 않고, 의회를 거치지 않고, 그 모든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수백만 가정의 거실에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여보냈다. 돈을 빼려고 몰려든 예금자들을 이번에는 돈을 맡기려고 줄 서게 만드는 대통령. 그의 손에는 라디오를 통한 설득의 힘이 이전에 없던 규모로 모여 있었다. 물론 이 힘에도 두 얼굴이 있다. 1933년처럼 공포를 가라앉히고 신뢰를 되살리는 데 쓰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제도적 매개를 우회해 여론을 직접 조종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3. 알파벳 기관과 행정국가

‘알파벳 기관’이라는 장난스러운 별명으로 불린 신설 기관들을 그저 언론이 붙인 우스갯소리로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뉴딜의 추상적인 약속을 실제로 작동하는 국가 역량으로 바꾸는 구체적인 기관, 곧 몸의 장기들이었다. 이들을 뭉뚱그려 ‘큰 정부’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보다, 각각 무슨 일을 맡았고 언제 생겼는지 가려보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농업조정청(AAA)은 1933년 5월의 농업조정법에 따라 설립됐다. 과잉 생산을 억제하고 경작을 줄이는 대신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고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이 장치는 실제로 많은 농장주의 소득을 높였다. 그러나 반드시 적어두어야 할 배제도 낳았다. 남부에서 감산은 흔히 소작농과 수확을 나눠 갖는 분익소작농을 땅에서 몰아낸다는 뜻이었다. 농장 수입은 늘었지만 소작농과 분익소작농은 생계 수단을 잃었다. 국가부흥청(NRA)은 1933년 6월의 국가산업부흥법에서 나왔다. 산업별 공정경쟁 규약을 감독하고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업계 간 협의와 준조합주의적 성격을 띤 이 매우 실험적인 통치 방안을 뒷받침하던 산업 규약에 관한 권한 위임은 1935년 셰크터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받았다. 민간자원보존단(CCC)은 1933년 3월 의회가 창설했다. 9년 동안 약 300만 명의 청년 남성을 고용해 산림 관리, 홍수 방지, 토양 보전, 공유지 조성에 투입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VA)는 1933년 5월의 관련 법률로 탄생했다. 뱃길을 개선하고 홍수를 다스리며 테네시강 유역의 농업과 공업 개발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뉴딜 가운데 국가가 직접 개발의 주체로 나서는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례 중 하나로 자주 꼽힌다.

공공사업청(PWA)과 공공사업진흥청(WPA)은 모두 공공사업과 고용을 다뤘지만 같은 기관으로 뒤섞어서는 안 된다. 국가산업부흥법으로 설립된 공공사업청은 대규모 자본집약적 기반시설에 집중했다. 육중하고 오래가는 시설을 건설해 민간 부문의 고용을 늘리려는 구상이었다. 반면 공공사업진흥청은 1935년 루스벨트의 행정명령으로 만들어져 일자리를 통한 구호를 주도했다. 이 기관이 최종적으로 고용한 인원은 약 850만 명이었다.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는 데 그치지 않고 교사, 작가, 배우, 예술가 같은 사무직과 문화 노동자도 받아들였다. 증권거래위원회(SEC)는 1934년 증권거래법으로 탄생해 증권시장과 거래소, 증권업자를 폭넓게 감독할 권한을 얻었다. 연방긴급구호청(FERA)이 1935년 말까지 지급한 금액은 총 31억 달러를 넘었다.

대통령 권력의 흐름에서 보면 이 기관들이 드러내는 새로움은 단지 대통령의 말이 곧 결정이 된다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이 새로운 연방 집행 기구, 예산 배분 통로, 전문가 중심의 행정,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의 위험과 시장의 질서, 시민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현대 연구는 뉴딜 시기에 벼려진 이 행정국가를 이후 현대 대통령제의 핵심 토대로 본다. 이 변화의 무게와 그 이면의 불안을 함께 짚어야 한다. 뉴딜이 만들어낸 행정국가라는 몸은 이 구축 체계가 경제적 잔여항을 받아내는 데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앞선 글들에서 거듭 경고했던 위험도 여기서 한층 커졌다. 이토록 거대하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행정의 몸은 한번 자라나면 좀처럼 거둬들일 수 없다. 그 몸에 쌓이는 권력 역시 이 구축 체계가 처음 권력분립을 설계할 때 상상했던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4. 제2차 뉴딜과 노동자를 품은 국가

1933년의 첫 뉴딜이 금융 안정, 농업과 공업의 응급 대응, 공공사업과 구호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면, 1935년을 전후한 두 번째 뉴딜은 지속적인 사회보장, 노동권, 소득 분배 쪽으로 한결 뚜렷이 방향을 틀었다. 현대 연구는 1차와 2차 뉴딜을 나누는 구분이 유용하기는 해도 그 경계가 딱 잘라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특히 강조한다. 국가가 갑자기 다른 국가로 바뀌었다기보다 무게중심이 옮겨갔다고 보아야 한다.

그 전환의 한가운데 사회보장법이 있다. 1935년 8월 14일 서명된 이 법은 노인에게 지속적인 소득을 제공하는 장치를 마련했고, 실업보험과 몇몇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포함했다. 미국 제도사에서 이 법의 중요성을 단순히 복지 지출이 늘었다는 두루뭉술한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연방정부가 전국적인 사회보험의 형태로 노령, 실업, 빈곤의 위험 일부를 처음으로 장기적이고 제도적으로 떠맡았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이것만으로 온전한 복지국가가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 복지국가의 기초를 받치는 가장 이른 기둥 가운데 하나가 세워진 것은 분명했다.

와그너법, 곧 전국노동관계법은 노동자를 제도의 보호 안으로 받아들인 또 하나의 큰 기둥이었다. 1935년의 이 법은 전국노동관계위원회라는 새로운 독립 기구를 만들었다. 법의 적용 대상인 노동자가 노조를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보호했으며, 사용자에게 노동자 다수가 뽑은 대표와 단체교섭을 하도록 요구했다. 제도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와그너법이 사회 안에 노조가 존재해도 좋다고 허용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방국가가 노동자의 단결권을 확인하고 실제로 보장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에 노동운동도 크게 고조됐고,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이어진 제너럴모터스의 플린트 연좌파업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 됐다.

여기서 잠시 멈춰 이 흐름이 지나온 궤적 전체를 돌아볼 만하다. 제13편의 풀먼에서는 노동자의 요구 앞에 연방군과 법원의 금지명령이 버티고 있었다. 순전한 탄압이었다. 제15편의 탄광 파업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동자에게 협상 테이블의 한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개별 사건에 대한 임시 중재였고, 노조는 아직 공식 인정을 받지 못했다. 와그너법은 그 인정을 개별 사례에서 법의 적용 대상자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보장으로, 대통령의 일시적인 주선에서 상설 기구의 제도적 보장으로 바꿨다. 탄압에서 중재로, 중재에서 제도적 인정으로 이어지는 이 궤적은 하나의 잔여항이 이 구축 체계에 조금씩 흡수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경기 회복 수치도 뉴딜의 효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 경제가 바닥을 쳤던 1933년 약 24.9%이던 실업률은 1937년 약 14.3%로 내려갔다. 가장 깊은 위기는 지났지만 경제가 완전히 나으려면 아직 멀었다.

5. 포섭 속의 배제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하나는 이것이다. 뉴딜의 거대한 포섭에는 처음부터 명백한 배제가 따라붙었으며, 그 배제는 제도 안에 박혀 있었다. 이 점을 뉴딜의 성과와 똑같은 무게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보라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된다.

사회보장법이 가장 뚜렷한 예다. 법의 원문은 농업 노동과 개인 가정에서 제공하는 가사 서비스를 초기 기여형 노령보험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현대 연구는 1935년 법에 따라 미국 노동자의 약 절반이 이 보험의 적용 대상 밖에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 가운데 농업 및 가사 노동자가 큰 몫을 차지했고, 이 직종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비중이 높았다. 왜 이런 배제가 생겼는지를 두고 역사학계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층위를 나눠 써야 한다. 하나는 명확한 사실이다. 농업 노동자와 가사 노동자가 제외됐다는 점에는 다툼이 없다. 다른 하나는 해석상의 논쟁이다. 일부 학자는 1935년의 설계에 인종적 편견과 남부에 대한 타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고 본다. 반면 일부 공식 연구는 당시 입법자들이 공개적으로 내세운 주된 이유가 임금 신고, 조세 징수, 행정 관리의 어려움이었다고 강조한다. 가장 신중한 서술은 어느 한쪽의 결론을 대신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두 층위를 모두 드러내고, 최초의 입법 이유에 행정상의 논리가 실제로 들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뚜렷한 인종적 불평등을 낳았다고 분명히 적는 것이다.

포섭 속의 배제는 사회보장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앞에서 보았듯 농업조정청의 경작 축소는 수많은 소작농과 분익소작농을 땅에서 몰아냈고, 그들 가운데 남부의 흑인이 특히 많았다. 주거지에 붉은 선을 그어 대출을 제한하는 ‘레드라이닝’의 기원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모든 것을 뉴딜이 레드라이닝을 발명했다는 한마디로 줄이면 지나친 단순화가 된다.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1930년대의 연방 주택 사업과 대출 관행은 훗날 레드라이닝 체계와 인종에 따라 갈리는 주택금융의 경계가 자리 잡는 제도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 대목을 우리의 분석 틀로 되돌려보면 이 연재의 한층 깊은 판단이 드러난다. 여기서 뉴딜이 보여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태다. 포섭하는 일 자체가 배제를 만들어낸다. 이 구축 체계가 노인과 노동자, 실업자를 새로 세운 보장 체계 안으로 받아들일 때, 적용 범위를 정하는 선 하나하나는 동시에 배제의 선이 되었다. 그 바깥으로 밀려난 농업과 가사 노동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인구 비중에 비해 많이 종사했고, 배제의 타격도 흑인 노동자에게 특히 심하게 돌아갔다. 처음에는 완전한 포섭이 있었고 거기에 몇몇 누락이 따라붙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는 바로 그 행위가 새로운 배제를 낳았다는 뜻이다. 잔여항을 남김없이 거둬들여 체계를 완결할 수 없다는 말에는 이처럼 또 하나의, 더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안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마다 그 수용의 경계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밖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밀려나는 이들은 다른 축에서도 이미 배제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6. 연합과 반대자들 그리고 인종 정치

뉴딜 연합이 중요한 까닭은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내부가 극히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연구가 훗날 수십 년 동안 민주당을 떠받친 ‘뉴딜 연합’이라고 부르는 이 연합에는 도시 노동자, 노동조합, 이민자와 그 후손, 지식인, 가톨릭 및 유대인 유권자의 상당수,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 그리고 1930년대에 민주당 쪽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한 북부의 아프리카계 유권자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흑인 유권자의 이동은 연합 재편에서 특히 주목할 변화였다. 다만 흑인 전체가 갑자기 일제히 돌아섰다는 매끈한 이야기로 만들면 안 된다. 더 정확히는 구호와 일자리, 자신들도 다가갈 수 있는 연방정부에 힘입어 북부의 흑인 유권자가 뚜렷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동은 남부의 흑인이 여전히 선거권을 빼앗긴 현실과 나란히 존재했다.

동시에 뉴딜은 상당 부분 남부의 인종 질서에 도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말로는 린치에 반대했고 인두세를 혐오했으며 흑인 지도자들도 만났다. 하지만 린치 금지 입법을 우선 과제로 삼기는 거부했다. 1934년 추진된 코스티건 와그너 린치 금지 법안은 남부 민주당원들의 거센 저지에 부딪혔다. 이를 적는 목적은 오늘의 도덕 언어로 루스벨트에게 손쉽게 판결을 내리려는 데 있지 않다. 뉴딜이 성립할 수 있었던 정치적 조건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것이다. 뉴딜에는 남부 민주당 의원들의 표가 필요했다. 그 말은 뉴딜의 포섭 능력이 줄곧 그 인종적 위계질서에 묶여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뉴딜을 향한 비판은 오른쪽과 왼쪽에서 각각 날아왔다. 그 사실 자체가 뉴딜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우파의 비판자들은 연방 권력을 지나치게 키우고 재산권을 침해하며 국가주의로 나아간다고 공격했다. 1934년 결성된 미국자유연맹이 대표적이었다. 좌파와 포퓰리즘 진영의 비판은 정반대로 뉴딜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휴이 롱은 ‘우리의 부를 나누자’, ‘모든 사람을 왕으로’라는 구호로 루스벨트를 공격했다. 코글린 신부는 라디오를 통해 더 급진적인 통화 정책과 금융 엘리트에 맞서는 노선을 요구했다. 타운센드는 60세 이상 시민에게 매달 200달러의 연금을 지급하고 2% 거래세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런 더 급진적인 노후 보장 요구 앞에서 뉴딜은 타운센드의 구상을 통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일부를 훨씬 제한적인 사회보장으로 만들어 자신의 제도 속에 편입했다. 압력에 응답하면서도 그 급진성을 누그러뜨린 것이다. 이것은 이 구축 체계가 잔여항을 흡수할 때 쓰는 대단히 효과적이고도 흔한 전략이다. 유한한 충족으로 무한한 요구를 누그러뜨리는 것.

7. 확장이 견제의 문턱에 이르다

이쯤에서 다음 글의 가장 중요한 복선을 놓아두어야 한다. 뉴딜의 전례 없는 확장이 내내 거침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5년부터 1937년 사이, 헌법과 제도에 비추어 뉴딜이 정당한가 하는 물음에 사법적·정치적 저항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1935년 셰크터 사건은 국가부흥청의 산업 규약을 뒷받침하던 권한 위임에 위헌 결정을 내렸고, 1936년 버틀러 사건은 초기 농업조정법의 가공세와 보조금 체계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두 판결은 광범위한 권한 위임을 바탕으로 경제를 계획하려던 뉴딜의 실험이 이 구축 체계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연방주의 및 권력분립 구조와 충돌했음을 보여준다. 현대 역사학에서 뉴딜을 해석하는 흐름은 적어도 세 갈래를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어느 하나도 굳이 입증할 필요 없는 정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첫째는 경험과 실험에 기대는 통치 기획으로 보는 시각이다. 일단 해보자는 루스벨트의 실용적 태도를 강조한다. 둘째는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구한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다. 은행 안정에서 뒤이은 금융 규제까지를 시장 붕괴와 극단적 정치의 부상, 더 급진적인 재분배를 막기 위한 제도 개량으로 읽는다. 셋째는 사회적 시민권의 지속적인 확대에 무게를 둔다. 특히 사회보장법과 와그너법 이후 미국이라는 국가가 노인과 조직 노동자에게 안정적이고 전국적인 연방의 보호를 처음으로 제공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모두 우리의 분석 틀 안에 놓으면,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견제와 균형이 확장에 자리를 내준 시기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확장이 그 한계에 다가가 다음 차례 견제의 반작용을 촉발한 시기였다. 이 구축 체계가 거대한 경제적 잔여항을 받아내며 길러낸 행정의 몸은 이제 자기 자신의 다른 부분, 오래된 권력분립과 사법심사 구조가 경계심을 품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구축 체계 안의 견제 장치가 그 확장에 강력하게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8. 맺음말

뉴딜의 첫 다섯 해를 이 연재 전체에 놓고 볼 때 가장 깊이 새겨둘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이 판단이다. 이 구축 체계는 대붕괴의 폐허 위에서 자신을 다시 씀으로써 거대한 잔여항을 받아냈다. 그리고 바로 그 받아내는 행위 안에서 새로운 배제를 만들어냈다.

이번에 자신을 다시 쓴 규모는 전례가 없었다. ‘정상으로의 복귀’가 십 년 동안 미뤄두었다가 대공황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경제적 잔여항 앞에서, 이 구축 체계는 후버처럼 자발적 협력, 지방 중심, 제한된 연방정부라는 낡은 전제에 갇혀 있지 않았다. 아예 그 경계를 넘어 거대한 새 몸을 길러냈다. 은행 구제는 금융을 안정시켰다. 알파벳 기관들은 금융, 농업, 공업, 구호, 지역 개발에 연방국가의 손을 한꺼번에 뻗었다. 사회보장법과 와그너법은 노령과 실업의 위험, 노동자의 단결권을 처음으로 제도의 책임 안에 받아들였다. 잔여항을 감당하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남북전쟁 이래 이 구축 체계의 가장 큰 자기 개조였다. 그 과정에서 벼려진 행정국가는 이후 현대 대통령제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 거대한 포섭에는 처음부터 배제가 내장돼 있었다. 이 글에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나머지 절반이 그것이다. 초기 기여형 노령보험의 적용 범위를 긋는 선은 농업 및 가사 노동자를 동시에 밖으로 밀어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인구 비중에 비해 많이 종사하던 직종들이었기에 그 배제의 타격은 흑인 노동자에게 특히 컸다. 농업조정청의 경작 축소는 남부 소작농을 땅에서 내몰았고, 연방 주택 사업은 훗날 인종에 따라 갈리는 대출의 경계가 형성될 제도적 토대를 깔았다. 여기서 잔여항을 모두 거둬들여 체계를 완결할 수 없다는 말의 더 근본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포섭 자체가 배제를 만든다. 이 구축 체계가 누군가를 안으로 들이려 할 때마다 그 경계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밖에 둔다. 그렇게 밀려나는 이들은 인종이라는 축에서 이미 배제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뉴딜이라는 강렬한 빛은 계급의 축을 밝히면서 인종의 축은 어둠에 남겨두었다. 심지어 그 빛이 비춘 계급의 축 자체에도 인종의 경계를 따라 틈이 갈라졌다.

이 전례 없는 확장은 이 구축 체계 내부의 견제 장치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선에도 바짝 다가가 있었다. 셰크터 사건과 버틀러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에 펼쳐질 것은 오래된 권력분립 구조가 이 미증유의 행정 팽창에 어떻게 거세게 반격하는가 하는 이야기다. 압도적인 차이로 막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번번이 가로막는 연방대법원을 뜯어고치려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뉴딜 시대의 가장 심각한 헌정 위기를 불러오며, 이 구축 체계 안에서 확장과 견제 사이에 영원히 존재하는 긴장을 가장 날카로운 모습으로 드러내게 된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