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으로의 복귀
유예를 종결로 오인하다
1. ‘정상’이라는 말의 정치
제1차 세계대전과 전염병, 적색공포와 개혁에 지친 미국인에게 하딩의 ‘normalcy’는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끝없는 도덕적 동원과 국제적 책임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돌아갈 전쟁 전 세계는 이미 없었다. 미국은 세계의 채권국이 되었고 자동차·전기·광고·할부구매가 일상을 바꾸었다. 전시에 성장한 행정과 금융능력도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다.
정상으로의 복귀는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갈등이 끝났다는 느낌을 주는 폐쇄의 언어였다. 착구주기율에서 구가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믿는 순간, 가장 잘 보이지 않는 여항이 내부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1920년대 미국은 군사동맹을 피했지만 세계금융에서는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도스안과 영안은 독일 배상, 미국 대출과 연합국의 전쟁채무를 순환시켰다. 이 구조는 유럽을 잠시 안정시켰으나 미국 신용이 마르자 국제위기를 증폭하는 통로가 되었다.
2. 하딩, 유능한 장관과 부패한 측근
하딩은 별도의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법적으로 끝내고 워싱턴 해군회의를 열어 군축협정을 이끌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어도 제한된 다자협력은 가능했다. 1920년대 미국을 단순한 고립주의로 부르는 것이 부정확한 이유다.
그의 행정부에는 찰스 에번스 휴스와 허버트 후버 같은 유능한 인물도 있었지만, 개인적 측근 집단에서는 심각한 부패가 터졌다. 티포트돔 사건에서 해군의 석유비축지가 뇌물과 비밀계약 아래 민간에 임대되었다.
하딩은 스캔들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인 1923년 숨졌다. 대통령 개인이 직접 돈을 챙겼다고 볼 증거는 없지만, 인사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커진 행정국가에서 사적 충성은 국가능력을 부패의 통로로 바꿀 수 있다.
1921년 예산회계법은 대통령에게 통합 예산안을 제출하게 하고 예산국과 회계감사원을 만들었다. ‘작은 정부’를 말한 시대에 오히려 연방재정을 중앙에서 보고 조정하는 능력은 강화되었다. 절약도 행정조직 없이는 실행할 수 없었다.
3. 쿨리지와 불균등한 번영
쿨리지는 절약, 감세와 민간 주도의 성장을 상징했다. 자동차·라디오·가전과 주식시장은 빠르게 커졌고 많은 도시 가정은 전에 없던 소비생활을 경험했다. 번영을 모두 허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사적 현실을 왜곡한다.
하지만 농업은 전쟁 특수 뒤 이미 장기침체에 들어갔다. 농산물 가격 하락과 부채는 농촌을 짓눌렀고, 쿨리지는 연방의 가격지원을 확대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도시의 평균성장은 농촌의 공황을 통계 속에서 가렸다.
소득과 자산은 상층에 집중되었고 내구재 소비는 할부신용에 크게 기대었다. 신용은 미래 소득을 현재로 당겨 번영을 넓혔지만, 소득분배의 문제를 무한히 대신할 수는 없었다.
정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관세, 특허, 통화와 기업법, 교통망은 시장을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작은 정부’는 국가 부재가 아니라 어떤 일을 우선하고 어떤 위험을 개인에게 남길지에 대한 선택이었다.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은 최고세율을 낮추면 투자와 납세가 늘어난다고 보았다. 호황기에는 세입이 유지되고 국채도 줄었지만 혜택은 상층에 크게 돌아갔다. 재정의 정상화는 중립적 회계가 아니라 전쟁부담을 계층 사이에 다시 나누는 정치였다.
4. 이민 쿼터와 강제된 질서
1924년 이민법은 출신국별 쿼터를 두어 남·동유럽 이민을 크게 줄이고 아시아계 이민을 사실상 차단했다. 더 오래된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삼아 최근 이민 전의 인종적 구성을 보존하려 했다. 통계가 문화적 폐쇄의 기술이 되었다.
연방대법원은 오자와와 틴드 사건에서 일본인과 인도계 신청자가 귀화법상 ‘백인’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때로는 당시의 인종과학을, 때로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는 백인 개념을 사용했다. 기준은 흔들렸지만 배제의 결과는 일관되었다.
부활한 KKK는 남부만의 비밀폭력조직이 아니었다. 백인 개신교·토착주의·도덕통제를 내세워 여러 주에서 대중조직과 선거세력이 되었다. 동시에 할렘 르네상스와 대이동은 흑인 도시문화와 정치의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폐쇄는 침묵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동과 문화는 경계를 바꾸었고, 배제당한 사람들이 만든 음악·문학·신문과 교회는 다음 세대의 정치능력이 되었다.
1921년 털사에서는 백인 폭도가 번영하던 흑인 지구 그린우드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을 살해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피해 규모와 당국의 방조는 분명하다. 전국적 번영의 시작점에 흑인 자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않은 국가가 함께 있었다.
스코프스 재판은 진화론 교육을 둘러싼 문화갈등을 전국적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도시와 농촌, 과학과 종교가 완전히 둘로 갈린 것은 아니지만 언론은 그렇게 묘사했다. 경제적 정상뿐 아니라 문화적 정상의 정의도 경쟁하고 있었다.
5. 번영에서 붕괴로
주가는 기업의 실제 수익보다 빠르게 오르고 신용매수는 손실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1929년의 주가폭락만으로 대공황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은행실패, 디플레이션, 국제부채와 수요붕괴가 서로를 밀어 내렸다.
미국 은행제도는 지역적으로 잘게 나뉜 수많은 소형은행에 의존했고 전국적 예금보험이 없었다. 한 지역의 충격이 예금인출 사태로 번지기 쉬웠다. 개인의 탐욕뿐 아니라 신용구조 자체가 취약했다.
연방준비제도는 1928~1929년 투기를 누르려고 긴축했고, 은행이 무너지는 동안 통화량 급감을 충분히 막지 못했다.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도 위기의 성격을 잘못 읽으면 여항을 증폭시킬 수 있다.
1929년 10월의 폭락은 공황의 강렬한 상징이지만 모든 원인의 출발점은 아니다. 농촌침체와 국제금융 불균형, 취약한 은행망은 이미 존재했다. 한 날짜에 서사를 집중하면 구가 오랫동안 축적한 여항을 갑작스러운 시장공포 하나로 축소하게 된다.
6. 다시 평가해야 할 후버
후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니었다. 기업과 지방정부의 자발적 협력을 조직하고 공공사업을 늘렸으며, 재건금융공사를 만들어 은행과 철도 등에 신용을 공급했다. 후대 뉴딜이 이어받은 도구도 있었다.
그는 연방주택대출은행 제도를 세우고 긴급구제·건설법에도 서명했다. 이런 조치들은 연방이 금융위기에 개입할 수 있는 범위를 이전보다 넓혔다. 다만 자금이 기관을 거쳐야 한다는 원칙과 균형재정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실업가정이 체감할 직접지원으로 전환되는 속도는 너무 느렸다.
문제는 규모와 방향이었다. 기관에 자금을 주면 신용과 고용이 아래로 흘러갈 것이라 기대했지만, 직접적인 연방 실업구제는 꺼렸다. 개인의 자립심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는 수백만 명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수요붕괴로 일자리를 잃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스무트-홀리 관세는 세계무역 갈등을 악화시켰지만 대공황의 단독 원인은 아니다. 금본위 유지와 1932년 증세도 재정 압력 속의 결정이었으나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경기를 더 누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후버의 비극은 도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믿던 협력적 국가의 크기와 위기의 크기가 맞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존 구가 처리할 수 있는 충격의 범위를 넘었을 때, 더 많은 같은 처방은 안정이 아니라 무능의 이미지가 되었다.
후버는 임금유지와 공공사업을 기업·주정부에 촉구했지만, 연방체제에서 명령할 수 있는 범위와 실제 재정능력 사이에 간극이 컸다. 자발적 협력은 참여자 모두가 위기를 견딜 여력이 있을 때 작동한다. 수입이 동시에 무너질 때 권고는 집단행동의 문제를 풀지 못했다.
7. 보너스 군대가 남긴 장면
1932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들은 나중에 지급될 보너스 증서의 조기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에 모였다. 이는 전혀 새로운 특혜가 아니라 이미 약속된 급여를 대공황의 긴급상황에서 앞당겨 달라는 요구였다.
법안이 의회에서 실패한 뒤 경찰과 군이 야영지를 해산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후버가 의도한 범위를 넘어서 진압을 밀어붙였고, 기병과 최루가스·불타는 천막의 영상은 국가가 참전군인을 공격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정부는 은행과 철도에 신용을 제공하면서 당장 굶주린 사람에게는 무력으로 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법률과 지휘의 세부를 넘어 이 이미지가 후버의 정당성을 무너뜨렸다. 위기에서 국가는 무엇을 먼저 보호하는가라는 질문이 선명해졌다.
8. 결론: 번영이 가린 여항
1920년대의 기술혁신과 소비확대는 진짜였다. 동시에 농업침체, 불균등한 소득, 인종적 국경과 불안정한 신용도 진짜였다. 한쪽을 다른 쪽의 거짓으로 만들면 왜 위기가 그렇게 깊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딩과 쿨리지는 개혁의 주기를 끝냈다고 선언했지만 국가는 기업과 국경, 국제금융을 계속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정상은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특정 이해와 위험배분을 일상으로 굳힌 구였다.
1932년 유권자는 완성된 대안을 보고 루스벨트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 설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실험할 권한을 주었다. 뉴딜은 폐허 위에서 국가를 다시 쓰되, 새로운 포용 안에 또 다른 배제를 남기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교훈은 호황을 의심하라는 단순한 경구가 아니다. 호황의 평균치 밖에 놓인 사람과 지역을 제도가 계속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다. 보이지 않던 여항은 붕괴가 시작된 뒤에야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