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연작으로 돌아가기
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미국 대통령 연작
제16편 · 총 26편

제16편: 태프트와 윌슨 — 진보의 탐조등

진보의 탐조등이 비춘 곳과 놓친 곳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탐조등이 훑고 간 시대

오랫동안 주변부에 놓여 있던 성별의 축은 윌슨의 재임 중 거대한 운동에 힘입어 헌법을 둘러싼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태프트가 취임한 1909년부터 윌슨이 물러난 1921년까지의 12년은 미국이라는 이 구축 체계의 역사에서 유난히 격렬한 전환기였다. 이번 편에서 사용할 탐조등의 비유가 이보다 생생하게 들어맞는 시기도 드물다.

먼저 이 12년의 구도를 펼쳐 보자. 길지 않은 기간에 연방정부는 중요한 재정·행정 수단을 새로 손에 넣었다. 의회와 각 주는 대표제와 조세제도를 다시 짜는 헌법 개정을 이뤄 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혀 새로운 언어로 세계를 향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런데 바로 그 전시 국가가 국내의 이견에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민주주의의 언어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창한 바로 그 대통령이 연방기관의 인종 분리를 되살렸고, 표현 행위를 문제 삼은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규모의 기소를 주도했다. 곁다리 모순이 아니다. 이 시대의 한복판에 놓인 역사적 사실이다.

이 탐조등의 비유로 보면 이 시대가 선명해진다. 이 구축 체계와 그 가장 깊은 잔여항의 관계는 이상을 향해 일정한 속도로 달려가는 열차가 아니었다. 어둠 속을 훑는 탐조등에 가까웠다. 이곳을 비추는 동안 다른 곳은 다시 어두워졌다. 1909년부터 1921년까지는 그 빛이 가장 격렬하게 움직인 시기였다. 계급이라는 경제적 축에서는 성큼성큼 나아갔다. 누진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연방준비제도, 연방거래위원회, 클레이턴법이 앞선 수십 년 동안 눌려 있던 이들의 요구를 하나씩 제도로 바꾸었다. 성별의 축에서도 역사적인 승리가 찾아왔다. 수정헌법 제19조가 성별을 이유로 투표권을 부정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헌법적 보장을 처음으로 전국에 확립하면서, 여성을 국가 차원의 정식 유권자로 편입했다. 하지만 계급과 성별을 비추던 바로 그 빛은 인종의 축을 더 깊은 그늘에 남겨 두었다. 윌슨 행정부는 수십 년 동안 인종 간 통합이 진행돼 온 연방 문관 조직을 다시 갈라놓았다.

2. 태프트와 진보주의의 분열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직접 고른 후계자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식은 곧 많은 진보주의자를 실망시켰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를 법과 법원을 더 중시한 인물, 루스벨트처럼 대통령을 광범위한 권한과 카리스마를 갖춘 국민의 수탁자로 내세우는 데는 더 소극적이었던 인물로 그린다. 정치적으로 이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태프트가 모든 분야에서 개혁에 덜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루스벨트의 임기응변에 능한 행정정치보다는 정식 법 절차와 소송을 통해 개혁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첫 균열은 페인–올드리치 관세법에서 생겼다. 태프트는 관세를 손보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결국 서명한 법은 세율을 소폭 낮추는 데 그쳤다. 그러고는 지금껏 통과된 관세법 가운데 최고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고율 관세를 독점권력과 정치부패의 원천으로 보던 진보주의자들에게 이는 태프트가 공화당 보수파에 굴복했다는 증거였다. 밸린저–핀쇼 사건은 결별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무장관 밸린저는 루스벨트가 민간 개발 대상에서 제외해 둔 공유지 일부를 다시 개방하려 했다. 산림청장이자 루스벨트의 동맹인 핀쇼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태프트는 핀쇼를 해임했다. 이 다툼은 자원 보전, 공유지에 대한 행정부의 수탁 관리, 루스벨트의 유산에 대한 충성심을 둘러싼 대리전으로 번졌다.

다만 익숙한 태프트 이야기에 현대 역사학이 가한 중요한 수정이 하나 있다. 그는 반독점 정책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임 중 제기한 반독점 소송은 루스벨트 때보다 많았다. 정확한 수치는 자료와 집계 방식에 따라 다르다. 태프트 시절 트러스트 기소가 99건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반독점법 위반으로 75건 넘게 기소했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 태프트가 4년 동안 제기한 사건이 루스벨트의 7년 반 동안보다 많았다는 점만 강조하는 서술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기본 판단은 흔들리지 않는다. 태프트의 반독점 실적은 수량상 상당했다. 그런데도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적 충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 실적이 더 보수적인 관세 입장, 그리고 행정권의 확장에 더 소극적인 개혁관과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태프트 개인의 성패보다 더 깊은 문제가 숨어 있다. 제도 설계의 바깥에서 자라난 경제권력을 다스리려 한다는 목표는 같았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심판을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태프트는 연방정부가 사건마다 소송을 내고 법원이 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관리하는 국가와 소송하는 국가 사이의 이 대립은 단순한 스타일 차이가 아니었다. 이 구축 체계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야 하는가를 둘러싼 근본적인 분기였다. 1912년의 대분열은 겉으로는 두 사람의 원한이었고 공화당의 내분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이 체계가 새로 자라난 자기 몸의 미래 형태를 고르고 있었다.

3. 네 갈래 대선과 진보주의의 헌법적 차원

1912년 대선은 단순한 정당 대결로 읽기보다 서로 경쟁하는 여러 개혁 구상을 공개적으로 펼쳐 보인 무대로 읽는 편이 낫다. 공식 개표 결과부터 네 갈래 승부였음을 보여 준다. 윌슨은 일반투표 약 629만 표와 선거인단 435표, 루스벨트는 약 412만 표와 선거인단 88표, 태프트는 약 349만 표와 선거인단 8표를 얻었다. 사회당의 유진 뎁스는 일반투표 약 90만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 표는 없었다. 윌슨이 선거인단에서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공화당이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하나의 이념적 재편만으로 설명할 결과는 아니었다.

루스벨트의 ‘신국가주의’와 윌슨의 ‘신자유’는 모두 진보주의의 기치였지만 같은 구상은 아니었다. 윌슨의 1912년 공약에는 기업의 선거자금 기부 제한, 관세 인하, 반독점법 강화, 은행·통화 개혁, 연방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대통령 단임제가 들어 있었다. 또 루스벨트와 달리 윌슨은 처음에는 거대 기업결합을 상시 감독하기보다 독점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뎁스의 출마가 중요한 까닭은 득표수에만 있지 않다. ‘진보’라는 정치가 개혁의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지는 못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좌파에서 출마한 뎁스는 부의 집중, 군국주의, 정당 과두지배에 대한 비판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계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모습을 갖출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훗날 그가 전시에 투옥되는 사건은 이 점을 더욱 아프게 드러낸다.

이 시기에 이뤄진 헌법 개정의 성과는 컸다. 수정헌법 제16조는 소득의 출처와 관계없이, 각 주에 세액을 배분하지 않고도 의회가 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게 했다. 1909년 의회를 통과해 1913년 비준되었다. 수정헌법 제17조는 상원의원을 뽑는 권한을 주의회에서 국민의 직접선거로 옮겼다. 1912년 의회를 통과하고 1913년 비준되었다. 구조적으로 보면 전자는 연방의 재정 역량을 넓혔고, 후자는 상원의원의 공식 선출 과정에서 주의회를 빼냄으로써 주정부와 전국 입법부의 관계를 바꾸었다. 소득세가 없었다면 훗날 연방국가의 재정·행정적 성장은 훨씬 좁은 헌법적 토대 위에 서 있었을 것이다. 상원의원 직선제가 없었다면 중앙정부의 대표 구조는 주의 입법 기구라는 필터를 훨씬 더 강하게 거쳐야 했을 것이다.

4. 윌슨의 국가 구축과 인종의 후퇴

초기 윌슨 행정부의 국내 정책은 과거의 진보주의 역사학이 그에게 그토록 후한 평가를 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다. 1913년 연방준비법은 국가의 중앙은행 체계인 연방준비제도를 만들었다. 1914년 연방거래위원회법은 연방거래위원회를 세웠다. 같은 해의 클레이턴법은 끼워팔기, 기업 합병, 이사 겸임 같은 구체적 관행을 겨냥하여 기존 반독점법을 보완했다. 이 조치들이 합쳐지면서 중앙정부의 행정·규제 역량은 한층 깊어졌다.

그러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낸다면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이미 낡은 서술이다. 윌슨을 둘러싼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재평가는 바로 인종 문제에서 이뤄졌다. 1912년 선거 당시 많은 흑인 유권자와 지도자는 공정한 대우를 약속한 그가 적어도 연방정부의 노골적인 차별에서는 자신들을 지켜 주리라 기대했다. 불과 몇 달 뒤 각 부처는 연방정부의 일터를 다시 인종별로 나누기 시작했다. 여러 학자의 성과를 종합한 현대 연구에 따르면, 이 문제는 1913년 4월 11일 각료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우정장관 벌리슨이 분리를 강하게 주장했고, 이어 재무장관 맥아두와 벌리슨은 윌슨의 반대 없이 각자의 부처에서 인종 분리를 시행했다. 칸막이로 나눈 근무 공간, 따로 쓰는 식당과 화장실, 강등, 흑인 직원을 대민 업무에서 빼내는 인사 조치가 뒤따랐다. 1914년부터는 문관직 지원서에 사진을 붙이게 하여 채용 단계에서 인종을 가려내기도 쉬워졌다.

책임 소재에 대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수정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윌슨을 변호해 온 설명은 벌리슨과 맥아두 같은 부하들이 제멋대로 인종 분리를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서 기록은 이 변호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윌슨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고 이를 승인했으며, 빌라드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정책을 옹호했다. 심지어 분리가 흑인 직원에게 이롭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1913년 이전의 연방정부에는 서로 다른 인종의 직원들이 함께 일하는 중요한 공간들이 있었다. 윌슨 아래에서 대통령직은 새로운 연방 차원의 짐 크로 체제에 적극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했다.

영화 《국가의 탄생》을 둘러싼 일화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워낙 유명하지만 잘못 전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확실한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이 영화는 1915년 2월 18일 백악관에서 상영되었다. 둘째, 영화가 마치 ‘번개로 역사를 쓴 것 같다’는 윌슨의 말로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 실제로 대통령이 그대로 입에 올린 찬사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온당한 역사적 결론은 윌슨이 그 유명한 말을 틀림없이 했다고 단정하는 데 있지 않다. 진위가 불분명한 그 인용을 제쳐 놓아도, 상영 자체를 그의 전반적인 인종 정책 속에 놓고 보면 여전히 곱씹을 대목이 매우 많다는 데 있다.

이 절을 우리의 분석 틀 속에 되돌려 놓으면 그 의미는 더욱 무거워진다. 같은 윌슨 행정부가 계급의 축에서는 연방준비제도와 반독점 입법으로 경제를 다스릴 몸을 계속 키워 갔다. 그런데 인종의 축에서는 이미 통합돼 있던 연방 문관 조직을 다시 분리하며 스스로 뒷걸음쳤다. 윌슨의 인종주의는 본바탕이 진보적인 대통령에게 우연히 붙어 있는 낯부끄러운 배경이 아니었다. 이 행정부 통치의 핵심을 이루는 일부였다.

5. 성별의 축, 여성 참정권의 승리와 그 균열

이 시기 인종의 축이 후퇴했다면, 성별의 축에서는 역사적인 전진이 이뤄졌다. 수정헌법 제19조는 1919년 6월 4일 의회를 통과했고, 1920년 8월 18일 테네시주의 비준을 거쳐 8월 26일 국무장관의 공식 인증을 받았다. 성별을 이유로 투표권을 부정하거나 제한하지 못하게 한 조항이었다. 그동안 배제돼 온 집단을 정식 유권자로 끌어들이는 이정표였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균열을 덧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승리를 지나치게 말끔한 진보의 이야기로 꾸미게 된다. 운동 내부는 하나가 아니었고, 그 긴장의 중심에는 인종이 있었다. 현대 연구들이 거듭 강조하듯, 흑인 여성은 조직적인 참정권 운동 안에서도 곧잘 차별받았다. 이들은 투표권을 더 넓은 흑인 민권 투쟁과 연결했다. 따라서 아이다 웰스바넷을 비롯한 흑인 참정권 운동가들은 이야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그 긴장의 한가운데 놓여야 한다. 수정헌법 제19조의 명료한 문구는 법적으로 한 가지 배제, 곧 성별을 이유로 한 배제를 해소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특히 남부에서 많은 흑인 여성이 투표용지에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막던 인종차별 관행까지 저절로 없애 주지는 않았다.

이 균열이야말로 이번 편을 떠받치는 핵심 가운데 하나다. 구축 체계가 어떤 잔여항을 실제로, 그것도 이정표라 할 만큼 크게 받아들인다 해도 완전한 봉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성별의 축이 인종의 축과 얽히는 순간, 성별의 이름으로 얻은 승리에는 인종의 차원에서 다시 틈이 벌어진다. 한 잔여항이 편입되는 바로 그때, 또 다른 잔여항이, 혹은 같은 잔여항의 다른 축이 그 안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흑인 여성은 성별과 인종, 두 축의 교차점에 동시에 서 있다. 이 체계가 성별의 축을 따라 여성에게 투표권을 내주어도, 인종의 축에서 작동하는 배제는 그 여성을 다시 문밖으로 밀어낸다. 잔여항이 여러 축을 가질 뿐 아니라 그 축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가장 깊이 드러난다.

6. 참전과 전시 탄압, 민주적 보편주의의 역설

윌슨은 1916년 ‘그는 우리를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지켜 냈다’는 구호로 대표되는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의회에 참전을 요청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분명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 재개와 치머만 전보였다. 그 전보에서 베를린은 멕시코에 미국을 상대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1917년 4월 2일 전쟁 교서에서 윌슨은 시대를 규정할 보편주의의 문장을 내놓았다. 세계를 민주주의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외를 향한 이 민주적 해방의 언어는 국내의 탄압과 나란히 존재했다. 1917년 방첩법이 범죄로 규정한 행위에는 군대 안에서 명령 불복종, 불충, 반란, 의무 수행 거부를 일으키거나 일으키려는 시도, 모병이나 입대를 방해하는 행위가 포함되었다. 1918년 선동법은 그 범위를 크게 늘렸다. 미국 정부, 헌법, 군대, 국기, 군복에 관한 불충·모독·비방·욕설에 해당하는 발언까지 범죄가 되었다. 윌슨 행정부는 이 도구들을 대대적으로 사용했다. 현대 연구의 요약은 단도직입적이다. 행정부는 방첩법과 선동법으로 수천 명의 반전 활동가를 기소했다. 한 전문 연구는 방첩법에 따른 기소가 약 2천 건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징병 방해와 관련됐다는 대략적인 규모도 제시한다.

유진 뎁스는 이 탄압의 가장 유명한 개인적 희생자가 되었다. 1918년 6월 16일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반전 연설을 한 뒤 개정 방첩법에 따라 기소되었고, 유죄판결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연방대법원은 ‘뎁스 대 미국’ 사건에서 그 판결을 유지했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지도자 한 명이 처벌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1912년 거의 100만 표를 얻은 유력 대선 후보가, 윌슨 행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법에 따라 전시의 발언을 이유로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셴크 대 미국’ 사건은 여기에 고전적인 법리를 제공했다. 홈스 대법관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입을 막고 체계를 닫아 거는 데 쓰인 대표적인 전시 선례였다. 그러나 1969년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전시의 표현 제한을 폭넓게 용인했던 셴크 판결에서 멀어졌다. 어떤 주장을 처벌하려면 임박한 불법행위를 선동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하고, 실제로 그런 행위를 일으킬 가능성도 높아야 한다는 더 높은 문턱을 세웠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역설은 추상적이지 않다. 단단하고 구체적이다. 윌슨은 국외의 민주적 자치를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국내에서는 표현을 제한하고 반전의 목소리를 처벌하며 연방의 인종 위계질서를 유지했다. 민주주의를 내건 해방의 언어, 국내의 이견을 틀어막는 폐쇄, 인종적 억압이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 윌슨 개인의 위선만으로 끝낼 이야기가 아니다. 건국 이래 한 번도 아물지 않은 이 구축 체계의 틈이, 보편주의의 언어를 온 세계에 던진 그 순간 극한까지 벌어져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7. 규약을 둘러싼 싸움과 상원의 헌법적 거부권

윌슨은 1918년 1월 8일 의회에 ‘14개조’를 제시했다. 당장의 전쟁 목표와 전후 질서의 청사진을 한데 묶은 구상이었다. 마지막 조항은 국제연맹으로 이어졌다. 국제연맹을 둘러싼 싸움은 헌법이 대통령의 외교적 포부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미국 현대사의 가장 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상원 자체의 역사 기록도 윌슨이 상원의원들을 파리 대표단에서 배제하고, 충분히 협의하기 전에 결과를 발표했으며, 유보조항을 놓고 진지하게 절충하기를 거부하여 그들과 멀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1918년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이 된 뒤 헨리 캐벗 로지는 당 지도부의 지위와 외교위원장직을 활용해 유보조항을 밀어붙였다. 특히 의회의 전쟁 통제권과 국가주권을 훼손할 수 있어 보이는 의무 조항들이 표적이었다.

국제연맹 가입 실패의 책임은 이 시대를 다루는 역사학 논쟁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한쪽 설명은 윌슨에게 무거운 책임을 묻는다. 로지 개인을 깔본 태도, 핵심 상원의원들을 파리 대표단에 넣지 않은 결정, 유보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고집, 나빠져 가던 건강을 지적한다. 다른 설명은 공화당의 당파적 입장, 국제연맹 규약 제10조를 둘러싼 헌법적 우려, 유럽에 구속력 있는 약속을 하는 데 대한 미국 사회의 더 넓은 거부감에 무게를 둔다. 균형 잡힌 독해라면 개인적 반목도, 정당의 권력 구도도, 헌법적 우려도 모두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거기에 1919년 10월 윌슨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타협의 여지는 더 좁아졌다. 상원은 1919년 11월 19일 조약을 부결했고 1920년 3월 다시 부결했다. 미국은 끝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 대목을 우리의 분석 틀에 놓으면 지난 편과 정확한 대조를 이룬다. 지난 편의 루스벨트는 파나마에서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승인을 구하는 행정부의 주도권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대외 문제에서는 국내의 견제가 유달리 희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대통령은 자기 포부를 국외로 뻗쳤다. 그러나 윌슨은 그 희박한 견제 가운데서도 가장 단단하게 남아 있던 고리, 곧 조약 비준에 동의할 권한을 가진 상원에 부딪혔다. 줄곧 팽창해 온 행정권이 이 체계의 헌법적 길목에서 목이 걸려 멈춰 선 것이다. 수십 년간 행정권이 크게 불어났어도 권력분립이 완전히 무력해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결정적인 몇몇 지점에서는 대통령을 눌러 멈추게 할 힘이 남아 있었다.

8. 전후의 여파와 적색공포

전후의 국내 분위기는 이윽고 이른바 제1차 적색공포로 굳어졌다. 일련의 폭탄 테러 공포와 급진주의에 대한 공포 속에서 ‘파머 급습’이 벌어졌다. 법무장관 파머가 지휘했고 젊은 에드거 후버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현대 연구는 믿을 만한 공식 기준 수치를 제시한다. 1920년 1월 전국적인 급습에서 약 3천 명이 체포되었다. 가장 신중하게 말하더라도, 그해 1월의 급습들만으로도 규모가 방대했고 법적으로 수많은 권한 남용을 동반했다. 전후 급진적 이견을 국내 안보의 비상사태로 취급하는 더 큰 흐름은 이때 정점에 닿았다.

적색공포는 전시의 탄압과 곧바로 이어져 있었다. 1919년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었다. 전시 비상상태 속에서 자라난 관행, 법적 수단, 기소의 전제, 정치적 수사 위에 세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전후의 이 공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라기보다 윌슨식 전쟁국가의 사후 생애였다. 전시에 벼려 낸 탄압 도구와 사고방식은 전쟁이 끝나도 얼마간 더 살아간다. 새로운 이름 아래 계속 작동하다가, 한참 뒤에야 서서히 다시 제약을 받는다. 닫아 걸려는 충동은 체계 안으로 흡수되지만, 언제나 긴 꼬리를 끌고 간다.

9. 맺음말

태프트와 윌슨의 12년을 이 연작 전체 속에 되돌려 놓았을 때 가장 기억할 것은 탐조등이다. 같은 시대에 그 빛은 그토록 격렬하게 움직였고, 그 때문에 비춘 것과 가린 것이 똑같이 또렷해졌다.

이 12년 동안 구축 체계의 재정·규제·헌법적 역량은 실제로 크게 넓어졌다. 누진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연방준비제도, 연방거래위원회, 클레이턴법은 수십 년간 압박받던 계급의 잔여항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1896년에 남겨진 미완의 목록이 현실이 되었다. 수정헌법 제19조는 성별에 따른 투표권의 박탈과 제한을 금지하는 전국적 헌법 보장을 처음 확립했다. 70여 년에 걸친 투쟁으로 요구해 온 여성 참정권을 전국적인 헌법 보장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두 축에서 탐조등이 성큼 앞으로 나아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전진에는 처음부터 지울 수 없는 그늘이 붙어 있었다. 같은 윌슨이 연방준비제도와 반독점 정책으로 계급의 잔여항을 받아들이는 동안, 수십 년간 통합돼 온 연방 문관 조직을 다시 분리하고 인종의 축을 스스로 뒤로 돌렸다. 성별의 축에서 얻은 승리에도 인종은 균열을 냈다. 수정헌법 제19조는 법적으로 성별에 따른 배제를 없앴지만, 많은 흑인 여성을 여전히 투표권 밖에 묶어 두던 인종차별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한 잔여항이 편입되는 순간, 다른 축의 배제가 그 안에서 다시 드러났다. 가장 깊은 잔여항은 전체에 걸쳐 고르게 봉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또 한 겹 입증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 날카로운 역설은 이 구축 체계의 가장 깊은 틈을 끝까지 벌려 놓았다. 윌슨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미국을 세계대전에 참전시켰고, 자결과 민주주의의 언어를 온 세계로 내보냈다. 바로 그때 국내에서는 전쟁에 반대한 수천 명을 기소하고 그중 많은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다. 거의 100만 표를 얻었던 대선 후보를 투옥했으며 연방의 인종 위계질서를 유지했다. 민주주의를 내건 해방의 언어와 국내의 이견을 닫아 거는 행위가 그렇게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 윌슨 개인의 위선만으로 끝낼 이야기가 아니다. 건국 이래 아물지 않은 이 구축 체계의 틈이, 보편주의의 언어를 온 세계에 던진 그 순간 극한까지 벌어져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한편 국제연맹 가입 실패는 또 하나를 일깨운다. 이 수십 년 동안 행정권이 전례 없이 팽창했어도, 이 체계의 권력분립에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대통령을 눌러 멈추게 할 힘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