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프트와 윌슨
진보의 탐조등이 비춘 곳과 놓친 곳
1. 탐조등의 시대
진보주의 시대의 기자와 개혁가는 도시 빈곤, 식품위생, 아동노동, 독점과 부패를 공개했다. 보이지 않던 문제를 보이게 만드는 일이 개혁의 첫 단계였다. 국가가 무엇을 측정하고 조사하느냐가 곧 무엇을 책임질 것인지 결정했다.
하지만 탐조등은 언제나 선택적으로 움직인다. 기업의 권력을 날카롭게 비춘 사람들이 인종분리나 식민통치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었고, 민주화를 외친 정부가 전쟁 중 반대 의견을 범죄로 만들 수 있었다.
태프트와 윌슨의 시대를 일직선의 진보로 읽으면 이 선택성을 놓친다. 구는 새로운 제도를 얻었지만, 그 제도가 누구의 자유를 확장하고 누구를 통제하는지는 목적과 권력관계에 달려 있었다.
2. 태프트가 제기한 다른 진보주의
태프트 정부는 루스벨트보다 많은 반독점 소송을 냈고, 스탠더드오일과 아메리칸토바코의 해체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는 개혁을 개인의 결단보다 법률과 법원의 형태로 굳히려 했다.
그러나 페인-올드리치 관세와 밸린저-핀쇼 논쟁은 개혁파의 신뢰를 잃게 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진보주의를 배반했다고 보았고, 태프트는 전임자가 법보다 자신의 공공이익 판단을 앞세운다고 생각했다.
1912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갈라졌다. 루스벨트의 진보당, 태프트의 공화당, 윌슨의 민주당, 유진 뎁스의 사회당은 서로 다른 국가상을 제시했다. 진보주의는 하나의 닫힌 이념이 아니라 헌법과 행정의 방향을 놓고 경쟁하는 여러 프로젝트였다.
1912년 윌슨은 대중투표 약 42퍼센트로 승리했고 루스벨트가 2위, 태프트가 3위였다. 선거인단에서는 압승이었지만 유권자의 과반이 다른 후보를 택했다. 제도적 승리의 크기와 사회적 합의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진보개혁의 출발부터 드러났다.
3. 헌법을 직접 고치는 개혁
제16차 수정헌법은 연방소득세의 토대를 확실히 해 국가에 더 탄력적인 재원을 주었다. 제17차 수정헌법은 상원의원을 주의회가 아니라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게 했다. 대의제의 구조와 국가의 재정능력이 동시에 달라졌다.
뒤이어 금주를 정한 제18차 수정헌법과 성별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금지한 제19차 수정헌법이 들어왔다. 하나는 정치 참여를 넓혔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문제를 전국적 금지로 닫으려 했다. 수정헌법이라는 같은 도구가 개방과 폐쇄에 모두 쓰였다.
연방준비제도도 중앙과 지역 준비은행을 결합한 절충으로 만들어졌다. 월가의 지배와 중앙정부의 지배를 동시에 경계한 결과였다. 당시의 타협은 훗날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강력한 기관으로 성장했다.
클레이턴법은 노동을 상품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노조활동에 대한 반독점법 적용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법원의 해석은 초기 기대보다 좁았고 노동자는 다시 조직과 파업을 통해 권리를 넓혀야 했다. 선언된 예외와 실제 면책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개별 소송보다 지속적인 조사와 중지명령을 사용하는 기관이었다. 의회가 모든 불공정행위를 미리 열거하지 않고 전문기관에 판단을 맡긴 것은 유연성을 주었지만,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가 경쟁의 기준을 만든다는 새 정당성 문제도 낳았다.
4. 윌슨의 뉴 프리덤과 인종적 후퇴
윌슨은 연방준비법, 연방거래위원회법, 클레이턴 반독점법을 통해 금융과 경쟁을 관리할 새로운 장치를 만들었다. 복잡한 시장을 전국적으로 감독하는 행정능력은 크게 늘었다.
동시에 그의 행정부는 연방기관의 인종분리를 강화했다. 흑인 공무원은 칸막이 뒤로 밀리고 강등되거나 일자리를 잃었다. 현대적 행정국가가 만들어지는 바로 그 과정에서 인종주의적 분류도 더 세밀한 인사행정으로 들어왔다.
백악관에서 영화 「국가의 탄생」이 상영된 사실은 분명하지만, 윌슨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극찬의 정확성은 논란이 있다. 과장된 인용을 피하더라도 이 영화가 백악관의 권위를 얻고 KKK를 영웅화했다는 정치적 효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능력은 방향을 내장하지 않는다. 기업의 차별을 조사할 수 있는 서류와 조직은 공무원을 인종별로 나누는 데도 쓰일 수 있다. 진보를 제도의 크기와 동일시하면 가장 중요한 질문,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가를 놓친다.
윌슨 시기 남부의 인종질서는 북부 도시로도 새로운 갈등을 옮겼다. 대이동으로 흑인 노동자가 늘자 1917년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대규모 인종폭력이 벌어졌고, 1919년 ‘붉은 여름’에는 여러 도시에서 백인 폭도가 흑인 공동체를 공격했다. 연방의 개혁능력은 이 폭력 앞에서 매우 제한적이었다.
5. 여성참정권의 승리와 남은 균열
여성참정권은 수십 년 동안 주별 선거, 청원, 로비, 거리시위와 시민불복종을 통해 만들어졌다. 온건한 전국미국여성참정권협회와 백악관 앞 시위를 벌인 전국여성당은 방법을 놓고 충돌했지만, 서로 다른 압력이 함께 정치공간을 넓혔다.
윌슨은 점진적으로 연방 수정헌법 지지로 이동했고, 1920년 제19차 수정헌법이 비준되었다. 그러나 성별 장벽을 없앤 것이 모든 여성에게 실제 투표를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남부의 흑인 여성은 여전히 인두세·문해시험·폭력에 막혔다. 원주민 여성의 시민권과 아시아계 이민여성의 귀화도 별개의 장벽에 묶여 있었다. 한 축의 포용은 다른 경계를 자동으로 없애지 않았다.
6.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반대를 억누르는 국가
윌슨은 1916년 미국을 전쟁에서 지켰다는 이미지로 재선했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과 치머만 전보 뒤 1917년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그는 세계를 ‘민주주의가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간첩법과 선동법이 징병 방해와 정부 비판을 처벌하는 도구가 되었다. 사회주의자 유진 뎁스는 반전연설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우편행정은 비판적 출판물의 배송을 막아 형사재판 밖에서도 발언을 제한했다.
연방대법원은 솅크와 뎁스 사건 등에서 전시의 광범위한 처벌을 인정했다. 실제 전쟁 위협이 있었지만, 정부는 위험한 방해와 불편한 의견의 경계를 넓게 잡았다. 대외적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운 구가 내부의 여항을 침묵시키려 했다.
선발징병법은 거대한 시민군을 만들었고, 공공정보위원회는 포스터·영화·연설로 전쟁의 의미를 조직했다. 선전은 사실 전달과 국민 동원을 섞었으며 독일계 문화에 대한 의심을 키우기도 했다. 민주국가도 총력전에서 감정과 정보를 중앙에서 관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1918년 독감 대유행 동안 전쟁 검열과 사기 유지의 논리는 정확한 위험소통을 어렵게 했다. 도시마다 집회금지와 대응은 달랐고 피해도 달랐다. 전시구가 적의 위협을 중심으로 정보를 조직하면 질병 같은 다른 위험을 주변화할 수 있다.
7. 베르사유와 상원의 헌법적 거부
윌슨은 파리강화회의에 직접 참여해 국제연맹을 전후질서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민족자결과 집단안보의 언어는 강력했지만 식민지와 인종 문제에 일관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헌법은 조약 비준에 상원의 3분의 2 동의를 요구한다. 헨리 캐벗 로지는 국제연맹 규약, 특히 집단안보 의무에 유보를 붙이려 했다. 윌슨은 충분한 타협을 거부했고 전국 순회연설 중 뇌졸중을 겪었다.
상원은 여러 형태의 조약안을 부결했다. 이를 고립주의의 어리석음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의 국제적 비전과 상원의 공동결정권이 충돌한 헌법 문제였고, 윌슨은 최종 협상 전에 국내 비준연합을 만들지 못했다.
그의 건강 악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국민과 의회는 알지 못했다. 영부인 이디스 윌슨과 소수 측근이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정보와 결정을 걸렀다. 국가가 커졌지만 대통령의 직무불능을 다룰 명확한 절차는 여전히 약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은 유럽의 일부 민족에게 적용되었지만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에는 일관되지 않았다. 파리회의의 일본 인종평등 제안도 최종 규약에 들어가지 못했다. 보편적 언어가 강대국과 인종질서의 경계에서 선택적으로 멈춘 것이다.
8. 금주와 적색공포
금주는 절제운동, 종교적 도덕, 여성운동과 토착주의가 결합한 결과였다. 술로 인한 가정폭력과 빈곤이라는 실제 문제를 다루려 했지만, 전국적 금지는 밀수와 조직범죄, 선택적 단속을 낳았다.
전쟁 뒤 폭탄사건과 러시아혁명, 대규모 파업은 적색공포를 키웠다. 팔머 급습에서는 적법절차가 빈약한 체포와 추방이 이루어졌다. 전쟁을 위해 만든 보안기구가 평화가 온 뒤 새로운 내부의 적을 찾았다.
폐쇄를 목적으로 한 제도는 목표를 없애기보다 형태를 바꾸기도 한다. 금지는 음주를 지하경제로 밀어 넣었고, 급습은 급진주의를 소멸시키기보다 국가의 정당성에 새 의문을 남겼다.
팔머 급습을 지휘한 법무부 안에는 훗날 FBI를 이끌 J. 에드거 후버의 급진주의 정보부서가 있었다. 일시적 공포 속에서 만든 명부와 감시기술은 공포가 가라앉은 뒤에도 조직에 남았다. 위기대응의 자료구조가 상시적 국가능력으로 굳는 전형적인 경로였다.
9. 결론: 진보의 능력은 목적을 보증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중앙은행, 경쟁 규제와 여성참정권을 남겼다. 미국의 구는 산업사회와 대중민주주의를 다룰 훨씬 강한 도구를 얻었다.
그러나 윌슨의 인종분리와 전시 억압은 진보주의를 자동적 도덕향상으로 읽을 수 없게 한다. 같은 탐조등은 기업의 어둠을 밝히고, 비판자에게는 눈부신 심문등이 될 수 있었다.
전쟁과 개혁에 지친 유권자는 하딩의 ‘정상으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쟁 전의 세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번영과 신용, 이민 제한과 인종적 폐쇄 아래에서 새로운 여항이 쌓이고 있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