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편 시어도어 루스벨트: 새로운 몸이 자라나다
국가는 새로운 몸을 얻는다
이 글의 목차
1. 새로운 몸이 자라나다
제13편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구축 체계가 마침내, 서툴지만 진지하게 경제 권력을 다스릴 몸을 길러내기 시작한다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있던 그 몇 해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 몸이 어떻게 자라났는가에 있다.
이 시기의 구조를 짚으려면 먼저 하나의 인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루스벨트가 중요한 것은 혼자서 근대 국가를 발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때까지 쌓여온 제도적 압력을 한데 모아 연방의 행정적 행동으로 바꾸어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주의가 낳은 경제력 집중, 노사 갈등, 주정부 혼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주 경계를 넘나드는 기업, 소비자 보호 입법의 공백, 기존 법제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자원 약탈. 이런 압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루스벨트는 그 모두를 연방 행정부, 특히 대통령이 처리해야 할 일로 끌어들였다. 오늘날의 연구가 대체로 그를, 비교적 수동적인 집행자였던 대통령을 국가 정치의 중심으로 밀어 올린 인물로 평가하는 까닭이다. 아예 최초의 근대적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글을 관통하는 판단을 여기서 분명히 해두자. 규제국가의 등장과 대통령 권력의 확대는 나란히 뻗어나간 두 갈래의 흐름이 아니다. 하나의 제도적 대응이 드러난 두 모습이다. 의회가 위원회로 쪼개지고 권한이 분산되어 더디게 반응할 때,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움켜쥔 것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공익이 위협받으면 스스로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거점으로 자신을 빚어갔다. 따라서 이번 편에서 따라가려는 것은 이 구축 체계가 행정권을 넓혀가며 경제 권력을 다스릴 몸을 어떻게 길러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이 처음부터 어떤 양면성을 안고 있었는가이다.
몸을 길러낸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이 체계가 원래 갖추고 있던 견제와 균형, 삼권분립, 연방제는 정치 권력을 상대하기 위해 설계한 골격이었다. 그런데 경제 권력을 상대하려 하자 그 골격에 갖추어진 기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1887년에 설립된 주간통상위원회 같은 선행 기구가 이미 있었지만, 기업을 계속 조사하고 운임을 감독하며 식품을 검사하고 노사를 중재하는 일을 하나로 엮어 지속할 행정 능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이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 권력의 언어도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다. 루스벨트가 그 몇 해 동안 한 일은, 이 오래된 골격에 빠진 기관을 보태고 이미 있던 기관을 강화하여 서로 이어주는 일이었다. 규제 기구를 늘리고, 행정 능력을 키우고, 대통령이 먼저 나설 자격을 마련했다. 이렇게 자라난 몸은 그 뒤로도 계속 커지고 두터워져, 훗날 거대한 연방 행정국가에 이른다. 루스벨트의 이 몇 해는 그 몸이 처음 생겨난 때가 아니라, 기존의 규제 기반이 확대되고 통합되면서 한층 뚜렷한 몸의 형태를 갖춘 시기였다.
또 하나 미리 기억해둘 일이 있다. 루스벨트가 권좌에 오른 경로부터가 의미심장했다. 암살범에게 입은 총상으로 매킨리가 세상을 떠난 1901년 9월 14일, 루스벨트는 마흔두 살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다. 더구나 대통령으로 직접 선출된 것도 아니었다. 부통령 자리에 있다가 뜻밖에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부통령으로 밀려 올라간 것부터가, 당의 실력자들이 그를 뉴욕주지사 자리에서 치워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부통령직은 대체로 정치의 변두리로 여겨졌다. 주변으로 밀어내려던 사람이 오히려 중심을 차지한 셈이다. 이런 집권 경로는 대통령직 승계의 위기 속에서 이 체계의 권력 중심이 어떻게 갑자기 이동할 수 있었는지를 살피기에 특히 적합하다.
2. 청지기 이론과 헌법 논쟁
루스벨트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장 또렷하게 정리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청지기여야 하며, 헌법이나 법률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한 국가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명시적인 권한 부여의 근거를 찾지 못하면 대통령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견해를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문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고 국가에 참으로 필요한 일이라면, 대통령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 생각을 또 다른 대통령관과 뚜렷이 대립시켰다. 자신의 입장은 잭슨과 링컨의 계보에 놓고, 뷰캐넌과 훗날 태프트의 입장은 협소한 법률주의적 대통령관으로 분류했다. 후자 가운데 특히 태프트는 대통령의 행동에 헌법이나 법률에 따른 권한 부여가 필요하다고 보되, 거기에서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묵시적 권한도 인정했다. 전자는 명시적으로 금지되지 않았고 국가에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행동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루스벨트는 단순히 강한 대통령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과 국민, 대통령과 의회 사이의 관계 자체를 새로 규정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무엇보다 국민에게 책임지는 사람이지, 우선적으로 의회의 수동적인 대리인이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의 관점에서 보면, 이 청지기 이론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 양면성이 이번 편의 핵심이다. 한편으로 이 이론은 주 경계를 넘나드는 자본, 전국적인 노사 위기, 공중보건의 위험 앞에서 연방이 행동할 근거를 제공했다. 이런 해석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숱한 결정적 순간에 의회의 느린 대응만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이런 비판도 있었다. 행정권의 범위를 명시적으로 부여된 권한이 아니라 명시적인 금지만으로 정한다면, 대통령 권력의 경계는 법문보다 정치적 판단에 더 크게 좌우된다. 이는 장차 훨씬 위험한 권력 확장으로 이어질 문을 열어놓기 쉽다.
이 연재의 흐름 속에 청지기 이론을 놓아보면 그 위치는 한층 선명해진다. 앞선 글들에서 행정권이 뻗어온 긴 흐름을 따라갔다. 워싱턴은 선례에, 제퍼슨은 기정사실에, 잭슨은 민의의 직접적인 위임에, 링컨은 전시 비상대권에 기대었다. 루스벨트에 이르러 행정권은 마침내 명확하고 체계적인 헌법적 언어를 얻었다. 청지기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이전까지 흩어져 있던 권한 확대의 실천을, 대통령은 마땅히 먼저 행동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주장으로 응축했다. 양면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 구축 체계가 경제적 잔여항을 흡수하고 통치 능력을 길러내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인 동시에, 강력한 선례를 남기는 권한 확대의 논증이다. 눈앞의 잔여항에 대응하려고 행정권을 넓힐 때마다 이 체계는 훗날 모든 제약을 벗어던질지도 모를 행정권을 위해 미리 길을 닦고 있었다. 청지기 이론은 당장의 통치 능력 부족을 메웠지만, 먼 훗날의 위험까지 함께 심어놓았다.
3. 공정한 거래와 규제국가의 등장
루스벨트의 공정한 거래, 곧 스퀘어 딜은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자는 구호가 아니었다. 중재와 규제를 위한 개념이었다. 국가는 자본 편에도 노동 편에도 자동으로 서지 않고, 그보다 높은 차원의 공익을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이번 편의 주제에 비추어 보면, 루스벨트가 진정으로 확립한 것은 대기업을 해체한다는 행동보다 국가에는 대기업을 감독할 권한이 있다는 원칙이었다.
반독점 정책에서 루스벨트의 가장 중요한 조치는 1902년 노던 시큐리티스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었다. 1904년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러 주에 걸쳐 운행하며 서로 경쟁하던 두 철도를 소유하고 지배하기 위해 설립된 이 지주회사가 경쟁을 사실상 없앴으며, 주 사이의 통상을 불법적으로 제한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던 시큐리티스 사건의 의미는 모든 대기업을 해체했다는 데 있지 않다. 연방정부가 셔먼법을 적용해 여러 주에 걸친 자본 집중에 개입할 수 있다는 선례를, 누구나 볼 수 있게 열어놓았다는 데 있다.
다만 루스벨트의 실제 반독점 입장과 대중의 기억은 구분해야 한다. 1905년 그는 자신이 결코 기업을 적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고, 자신의 입장을 좋은 트러스트와 나쁜 트러스트의 구별로 설명했다. 루스벨트가 반대한 것은 규모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공익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훼손하거나 부당한 수단으로 덩치를 키운 거대함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그의 명성 자체가 역사학계의 논쟁거리다. 비교적 전통적인 평가는 루스벨트 재임 중 제기된 반트러스트 소송이 통상 44건으로 집계되며, 이는 대부분의 전임자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실제로 연방의 반독점 정책을 다시 가동했다는 것이다. 반면 수정주의적 해석은 그가 대기업을 두루 해체하자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더 중시한 것은 국가가 대기업을 감독할 권한이 있다는 원칙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해야 이 구축 체계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감독의 원칙은 경제라는 체스판도 자기 관할이라고 이 체계가 이전보다 더 분명하고 힘 있게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판 위의 큰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먹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판 곁에 앉아 심판을 볼 권한만큼은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트러스트와 나쁜 트러스트를 나눈 것도 이런 심판의 자세를 보여준다. 크냐 작으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함이 자신이 정한 공익에 복종하느냐를 묻는다.
규제국가라는 관점에서 루스벨트의 진정한 핵심은 어느 한 소송이 아니라, 연방의 상설 규제 수단을 행정 체계 안에 심어놓았다는 데 있다. 1903년 설립된 상무노동부와 그 산하 기업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어 1906년 헵번법은 주간통상위원회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고, 철도 운임과 재무를 감독하는 연방의 권력도 눈에 띄게 확대했다. 이 연재의 틀로 돌아와 보면, 바로 이것이 구축 체계의 새로운 몸이 자라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거기서 생겨난 것은 전례 없는 자기 이해였다. 국가는 더 이상 정치 권력을 배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공익을 대표하여 경제 권력을 감독하는 중재자가 되기 시작했다.
4. 탄광 파업과 노사 조정
1902년의 무연탄 광산 대파업은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다. 5월 12일 약 14만 7천 명의 광부가 파업에 들어갔다.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면서 겨울철 난방 위기가 다가왔고, 여론의 압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이 사건은 앞서 제13편에서 다룬 풀먼 파업과 나란히 놓아볼 때 가장 선명해진다. 풀먼에서는 연방이 우편 업무와 주 사이의 통상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파업을 진압하며 사실상 자본 편에 섰다. 반면 1902년의 루스벨트는 무엇보다 공익을 노사 양측 위에 분명히 올려놓았다.
그는 노동자 편을 드는 친노동 지도자가 아니었다. 연방이 정한 중재 절차에 양측이 들어오도록 압박하려 했다. 모건의 개입을 거치면서 사용자 측도 중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최종 결과는 노동자의 전면적인 승리가 아니라 연방 주도의 타협이었다. 위원회는 대부분의 광부에게 10퍼센트의 임금 인상을 인정했고, 하루 노동시간을 열 시간에서 아홉 시간으로 줄였다. 그러나 사용자 측은 광부들의 노동조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위기를 제도사의 흐름에 놓아보면, 진정한 의미는 장기적으로 노사 분쟁에서 연방정부가 맡을 새로운 역할을 정립했다는 데 있다.
루스벨트는 1906년 이런 분쟁의 공적 논리를 한층 더 분명하게 정리했다. 거대 기업과 거대 노동조합이 함께 존재하는 시대에, 사용자든 노동자든 분쟁 상대 가운데 힘이 더 센 쪽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많은 분쟁은 국가를 대표하는 편견 없는 기구가 조사하고 조정해야 한다. 공중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하다. 1902년의 경험을 하나의 제도적 원칙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제 계약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회의 제3자인 공중을 노사 분쟁 처리의 틀 안에 공식적으로 써넣었다.
이 연재의 틀에서 보면, 이는 이 구축 체계가 노동자라는 잔여항을 흡수하기 시작했다는 뚜렷한 신호다. 앞서 제13편에서 보았듯, 경제 권력에 짓눌린 노동자라는 잔여항은 풀먼에서 질서 유지라는 명분 아래 연방의 진압을 당했다. 이제도 내세우는 것은 질서 유지였다. 그러나 이 체계는 더 이상 질서를 사용자 측의 승리와 단순히 동일시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요구, 시민들의 난방, 산업의 운영, 연방의 중재를 새로운 틀 안에 함께 담으려 했다. 노동자의 승리는 아니었다. 노조는 공식적인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주로 파업과 폭력으로 자신을 드러내던 잔여항이, 이 체계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한층 분명한 제도적 발언 통로를 얻었다.
5. 소비자 보호, 철도 규제, 자원 보전
1906년의 순수식품의약품법과 육류검사법은 산업사회가 떠넘긴 외부 비용이 연방의 규제 책임으로 바뀌는 과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루스벨트 시대의 사례다. 육류 가공업의 참혹한 실상을 그린 업턴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은 두 법안의 통과를 밀어준 마지막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1879년 이래 의회에는 관련 법안이 거의 백 건이나 제출되었는데도, 루스벨트가 법률에 서명한 것은 1906년 6월 30일에 이르러서였다. 대중의 관심을 실제 행정과 입법의 행동으로 바꾼 것은 대통령의 적극적인 개입이었다. 루스벨트는 1906년 두 명의 조사위원을 임명해 독립적인 조사를 진행하게 했고, 그 보고서를 의회에 보냈다.
철도 규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헵번법의 의미는 철도 문제를 다루는 법 하나가 생겼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주간통상위원회에 더 강한 운임 규제권과 심사권을 부여함으로써, 핵심 기반시설의 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에 연방이 깊숙이 개입한다는 뜻이었다. 제도사적으로 이는 반독점 소송, 소비자 보호 입법과 한 몸을 이룬다. 셋 모두 그동안 주정부와 법원, 개인이 제기한 소송을 통해 산발적으로 처리하던 문제를 연방이 지속적으로 감독하는 대상으로 바꾸고 있었다.
자원 보전에서도 루스벨트는 행정권을 확대하여 또 다른 잔여항을 흡수했다. 공식 통계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가 재임 중 보호한 공유지는 약 2억 3천만 에이커였다. 통상 제시되는 내역에는 국유림 150곳, 국가기념물 18곳, 국립공원 5곳, 연방 조류보호구역 51곳, 야생조수 보호구역 4곳이 포함된다. 1905년 루스벨트는 산림보호구역의 관할을 농무부에 새로 설치된 산림청으로 옮겼다. 1906년의 유물보존법은 대통령이 포고로 국가기념물을 지정할 재량권도 부여했다. 이 보전 구상은 대통령의 포고 권한과 행정조직의 재편에 크게 의존했다. 따라서 보전운동은 환경사의 사건인 동시에 행정국가의 역사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이 모두가 그려내는 것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이 구축 체계는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외부 비용을 하나씩, 연방이 계속 규제해야 할 대상으로 바꾸고 있었다.
6. 큰 몽둥이와 운하, 제국의 행정권
대외정책은 루스벨트가 대통령의 주도권을 가장 멀리까지 밀어붙인 영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구호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손에는 큰 몽둥이를 들라는 것이었다. 맥락을 온전히 놓고 보면, 이는 단순히 무력을 과시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절제된 말 뒤에는 그것을 받쳐줄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파나마 운하 역시 전략적 사업인 동시에 행정권 확대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콜롬비아 의회가 관련 조약을 거부하자 루스벨트는 파나마에 미 해군 함정을 보냈고, 1903년 11월 3일 파나마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지지했다. 갓 독립한 파나마는 곧 미국과 조약을 맺어 너비 10마일의 운하 지대를 미국에 내주었다. 훗날 루스벨트가 자신은 운하 지대를 차지하고 의회에는 토론을 맡겼다고 한, 자주 인용되는 말도 정확한 맥락 속에 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행정부가 스스로에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는 강한 자의식이 드러난다. 절차를 둘러싼 논란이 끝나기 전에 먼저 사업부터 진행했던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 방식을 변호한 말에 더 가깝다.
같은 논리는 루스벨트 보충선언에도 나타난다. 1904년 연례교서에서 루스벨트는 서반구의 어느 나라가 상습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지르거나, 무능 때문에 문명사회의 질서가 느슨해지게 만든다면 미국은 국제경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럽의 재식민화에 비교적 수동적으로 반대하던 입장에서, 서반구의 질서와 채무 이행, 미국의 이익을 위해 최후의 수단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개입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이 지점에서 역사학계의 평가는 뚜렷하게 갈린다. 우호적인 해석은 지정학적 논리를 강조한다. 비판적인 해석은 루스벨트 보충선언이 먼로주의를 방어 원칙에서 라틴아메리카 문제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의 근거로 바꾸었다고 본다. 두 해석은 함께 놓고 보는 것이 좋다.
다시 이 연재의 틀로 돌아가자. 지난 편에서는 제국의 탄생이 대통령 권력을 되살렸다고 했다. 루스벨트는 바로 그 제국과 함께 되살아난 행정권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인물이었다.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토론한다는 청지기 이론의 논리는 대외정책에서 가장 거침없이 펼쳐졌다. 대외 사안에서는 국내의 견제 장치가 훨씬 약하게 작동했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의회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사실상 기정사실을 만들어놓을 수 있었다. 이는 더 먼 장래의 위험도 예고한다. 대외 사안에서 비교적 제약 없이 팽창한 행정권은 훗날 제왕적 대통령제의 가장 위험한 온상이 된다.
7. 인종의 경계와 흡수의 한계
루스벨트의 규제와 보전, 반독점만 쓰고 인종 문제를 빼놓으면, 이 시기는 제도가 사회적 잔여항을 두루 흡수하기 시작한 일직선의 진보 이야기로 잘못 그려진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901년 10월 16일 루스벨트는 부커 워싱턴을 백악관 만찬에 초대했다. 이튿날 참석자 명단이 공개되자 만찬은 전국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남부의 여론은 거세게 비난했고, 비난은 남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충격을 준 까닭은 국가의 상징인 백악관의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전국에 퍼져 있던 인종주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루스벨트가 인종 문제에서 꾸준히 평등을 밀고 나간 인물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1906년 브라운즈빌 사건에서 백인 주민들은 한 총격 사건의 책임을 인근에 주둔한 흑인 보병부대에 돌렸다. 병사들은 모두 무죄를 주장했고 백인 장교들도 많은 병사가 당시 막사 안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도 루스벨트는 군사재판조차 열지 않은 채 제25보병연대의 세 중대 소속 병사 167명을 명예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역시키라고 명령했다. 후대에는 이 처분을 루스벨트 재임 중 가장 심각한 잘못 가운데 하나로 보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1970년대에 재조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의회와 군이 그 결론을 바로잡았다.
이 대비는 이 연재의 아주 중요한 판단 하나를 밝혀준다. 진보주의 시대는 분명 산업자본주의, 소비자 안전, 공공자원, 일부 노사 분쟁에서 생겨난 문제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종적 평등에서 그 흡수는 극히 제한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 주목할 점은 진보주의자들 내부에서도 질서를 인종적 평등보다 앞세우는 일이 흔했다는 것이다. 일부 연구는 많은 진보주의자가 인종분리를 지지한 바로 그 이유가, 다른 방식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 사회 갈등을 억누르려는 데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 연재의 틀 안에서 이 사실은 구축 체계가 잔여항을 흡수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그 흡수는 결코 고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 축마다 따로 이루어지며 위계가 있다. 이 체계가 계급이라는 경제적 축을 따라 서툴게 규제의 몸을 길러내고 노동자라는 잔여항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 인종이라는 축에서는 전진하기는커녕 후퇴하고 있었다. 흑인들을 짐 크로 질서 아래 더욱 단단히 짓눌렀다. 따라서 진보주의 시대의 이른바 진보는 극도로 불균형한 진보였다. 한 축에서는 앞으로 가고, 다른 축에서는 뒤로 갔다. 이는 다시 한번 보여준다. 잔여항은 통째로 봉합될 수 없으며, 고르게 흡수될 수도 없다. 이 체계는 언제나 어느 한 축을 처리하는 동안 다른 축을 방치하거나, 그 축의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든다.
8. 태프트의 승계와 1912년으로 가는 길
루스벨트가 1908년 태프트를 후계자로 지지한 사실만 보아도, 자신이 추구한 대통령의 확장적 지도력을 공화당 기성 세력과의 영구적인 결별로 삼을 생각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04년 선거에서 이긴 뒤 1908년에는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나중에 후회했지만 여전히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1909년 이후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졌다. 태프트는 대통령직을 더 협소한 법률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고, 인사와 반트러스트, 보전 문제를 두고 루스벨트와 충돌했다. 1912년을 앞두고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자신의 대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태프트와 지지자들은 루스벨트의 신국가주의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다음 편에서 다룰 1912년 대분열로 이어지는 배경이다. 그 핵심에는 대통령직과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이해가 있다. 청지기 이론에 따른 적극적 확장과, 협소한 법률주의에 따른 자제가 처음으로 정면충돌하게 된 것이다.
루스벨트와 진보주의를 둘러싸고 현대 역사학이 내놓은 해석은 대체로 몇 갈래로 나뉜다. 이들은 함께 놓고 볼 필요가 있다. 단일한 노선으로만 서술해서는 곤란하다. 초기 자유주의 서술은 진보주의를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로 자본주의를 교정하려는 노력으로 보았다. 뒤이은 수정주의 전통은 그 속에 담긴 중산층의 지위 불안을 더 강조했다. 1970년대 이후 사회통제 학파는 다시 진보주의를 전문직 계층과 개혁가들이 노동자, 이민자, 빈민, 도시 질서를 관리하려던 기획으로 이해했다. 이 논쟁들을 루스벨트에게 되돌려보면, 보다 신중한 평가에 이를 수 있다. 그는 신화 속에서처럼 거대 자본을 전면적으로 무너뜨린 영웅도 아니고, 그저 홍보만 했다고 깎아내릴 수 있는 인물도 아니다. 인종적 평등이라는 의미에서 일관된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몇몇 결정적인 영역에서 연방의 규제와 대통령의 적극적 지도력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그 흡수에는 한계와 위계가 있었고, 인종적 종속과 해외 팽창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강화하는 일이 흔히 동반되었다.
9. 맺음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이 몇 해를 이 연재의 흐름 속에 놓고 볼 때,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한 판단이다. 이 구축 체계는 경제 권력을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몸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몸은 행정권에서부터 자라났다.
앞선 글들이 남긴 난제, 곧 이 체계가 설계 단계에서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경제 권력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이 몇 해 동안 처음으로 제법 갖추어진 답을 얻었다. 정치적 충돌에 맞추어 만든 옛 도구로는 대응하지 않았고, 대응할 수도 없었다. 대신 기존의 기반을 넓히고 통합하여 한층 체계적인 통치 능력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상설 규제 기구, 지속적인 행정 능력, 공익을 대표해 경제 권력을 감독한다는 자기 이해였다. 반독점 소송, 노사 사이의 연방 중재, 식품과 의약품 규제, 철도 운임 심사, 자원 보전. 얼핏 따로 떨어진 행동들 같지만, 사실은 같은 움직임의 서로 다른 면이다. 모두 이 체계가 산업사회의 모순을 하나씩 연방의 지속적인 통치 대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행정권의 확대에, 대통령이 먼저 행동해도 된다고 청지기 이론이 마련해준 언어에 크게 의존했다. 규제국가의 등장과 대통령 권력의 확대는 바로 하나의 대응이 지닌 두 얼굴이다.
그러나 이 대응에는 처음부터 함께 붙들고 보아야 할 두 겹의 한계가 있었다. 첫째는 양면성이다. 청지기 이론은 경제적 잔여항을 흡수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인 동시에, 강력한 선례를 남기는 권한 확대의 논증이었다. 이 체계가 눈앞의 잔여항에 맞서려 넓힌 행정권은 훗날 제약을 벗어던질지도 모를 행정권을 위해 미리 길을 닦기도 했다. 당장의 통치 능력 부족을 메우면서 먼 훗날의 위험을 심어놓은 것이다. 이 흐름은 뒤의 글들에서 거듭 돌아올 것이다. 둘째는 불균등성이다. 이 체계가 잔여항을 흡수하는 일은 결코 전체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 축마다 따로 이루어지며 위계가 있다. 계급이라는 축을 따라 규제의 몸을 길러내던 바로 그때, 인종이라는 축에서는 뒤로 물러서며 흑인들을 인종관계의 최하단에 짓눌렀다. 따라서 진보주의 시대의 진보는 한 축에서는 전진하고 다른 축에서는 후퇴하는, 극도로 불균형한 진보였다.
우리는 다시 이 연재의 핵심 판단으로 돌아온다. 가장 깊은 잔여항은 통째로 봉합될 수 없고, 고르게 흡수될 수도 없다. 이 구축 체계는 한 축에서 새로운 통치 능력을 성큼성큼 키워내면서도, 동시에 다른 축에서는 오래된 배제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진보는 언제나 부분적인 진보다. 빛이 비친 축 바깥에는 늘 또 하나의 축이 아직 그림자 속에 잠겨, 저마다 자신에게 닿을 빛 한 줄기를 기다리고 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