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리와 미국-스페인 전쟁
제국은 어떻게 헌법의 문제가 되었나
1. 같은 여항이 안과 밖에서 모습을 바꾸다
19세기 말 미국 정치에는 두 전선이 동시에 열렸다. 국내에서는 농민과 노동자가 철도·은행·대기업의 권력을 누가 통제할 것인지 물었다. 국외에서는 새로 미국의 지배 아래 들어온 섬 주민들이, 대표권 없는 공화국의 통치를 왜 받아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둘은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핵심 질문은 닮아 있다. 규칙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그 규칙을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는가. 헌법이 공권력의 남용을 경계하도록 짜였더라도, 기업 권력과 해외 통치는 기존의 시민권 범주 바깥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착구주기율의 언어로 말하면, 대륙 안의 구(構)가 산업과 영토 팽창으로 몸집을 키우자 자신이 흡수하지 못한 여항(餘項)도 함께 커졌다. 매킨리 시대는 국내의 저항을 정당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해외에서는 새로운 피지배자를 만들어 낸 시기였다.
2. 1896년, 통화 논쟁이 국가의 방향을 묻다
1893년 공황 뒤 농촌의 부채와 디플레이션은 심각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황금 십자가’ 연설에서 금본위제가 채권자에게 유리하고 채무자인 농민과 노동자를 짓누른다고 공격했다. 은의 자유주조는 단순한 화폐 기술이 아니라 누가 불황의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였다.
매킨리는 금본위, 보호관세, 산업 성장의 연합을 내세웠다. 마크 해나가 조직한 선거운동은 기업 자금과 전문적인 홍보를 결합했고, 브라이언은 전국을 돌며 대중연설로 맞섰다. 매킨리의 승리는 이후 한 세대 동안 공화당 우위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인민당은 브라이언을 지지하며 민주당과 합쳤지만 독립 조직으로서는 약해졌다. 그들의 철도 규제와 민주화 요구 가운데 일부는 훗날 진보주의 개혁으로 흡수되었다. 요구가 큰 정당에 들어가 전국화되는 것과, 그 요구를 만든 조직이 계속 힘을 갖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3. 쿠바의 전쟁에서 미국의 전쟁으로
쿠바 독립전쟁과 스페인의 재집중 정책은 막대한 민간인 고통을 낳았다. 미국 신문은 이를 선정적으로 다루기도 했지만, 위기의 인도주의적 실체까지 허구였던 것은 아니다. 쿠바 망명자와 상업 이해, 카리브해 전략, 스페인에 대한 분노가 함께 미국 여론을 움직였다.
1898년 2월 아바나항에서 전함 메인호가 폭발해 266명이 숨졌다. 폭발 원인은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지만 당시 많은 보도는 곧바로 스페인을 비난했다. 불확실한 사건이 이미 쌓여 있던 전쟁의 이유들을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묶었다.
매킨리는 처음에는 외교적 해결을 찾았으나 4월 의회에 개입 권한을 요청했다. 의회는 텔러 수정조항을 붙여 미국이 쿠바를 합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은 정복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약속 아래 정당화되었다. 바로 그 약속이 전쟁 뒤 미국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4. 짧은 전쟁이 낳은 긴 제국
미국-스페인 전쟁 자체는 몇 달 만에 끝났다. 미 해군은 마닐라만과 산티아고에서 승리했고, 전투보다 질병으로 죽은 미군이 더 많았다. 군사적 승리는 빠르고 분명해 보였지만, 전후의 정치적 질문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파리조약으로 스페인은 쿠바 지배를 포기하고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미국에 넘겼으며, 미국은 2천만 달러를 지급하고 필리핀을 인수했다. 하와이도 같은 해 별도의 공동결의로 합병되었다. 반식민 전쟁을 시작한 공화국이 한순간에 대양의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쿠바는 형식상 독립했지만 플랫 수정조항은 미국의 개입권과 관타나모 기지의 토대를 남겼다. 해방은 실제였고 주권은 제한되었다. 두 판단 가운데 하나만 택하면 전후 질서의 이중성을 놓치게 된다.
푸에르토리코에서는 1900년 포레이커법이 민정정부를 만들었지만 총독과 핵심 관료는 워싱턴이 정했고 섬 주민의 연방 대표권은 제한적이었다. 미국은 군정을 끝내면서도 동등한 자치로 곧장 넘어가지 않았다. 식민통치는 군복을 벗고 행정법과 관세의 형태로 굳어졌다.
하와이 합병에도 별도의 역사가 있었다. 1893년 미국계 사업가들이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을 전복할 때 미 해병대가 개입했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합병을 거부했다. 1898년 전쟁의 전략적 필요가 커지자 의회는 조약에 필요한 3분의 2가 아니라 공동결의로 합병을 밀어붙였다.
5. 필리핀-미국 전쟁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끈 필리핀 혁명세력은 스페인과 싸웠고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필리핀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자 1899년 양측은 전쟁에 들어갔다. 해방의 동맹이라고 믿었던 관계가 새로운 식민전쟁으로 바뀐 것이다.
전쟁은 정규전에서 게릴라전으로 변했고, 미군은 강제수용·마을 파괴·가혹한 심문을 사용했다. 필리핀군 역시 포로와 협력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민간인 사망의 정확한 수치는 논쟁적이지만, 전투와 기근·질병으로 희생이 매우 컸다는 점은 분명하다.
매킨리는 미국이 필리핀인을 ‘문명화하고 교육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지배를 이익이 아니라 피지배자를 위한 책임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스스로 정치공동체를 조직한 사람들이 저항할수록, 제국은 그 저항을 자치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읽었다.
1902년 상원 필리핀위원회의 청문회에서는 물고문과 마을 소각 같은 미군의 행위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잔혹행위가 훗날에야 발견된 비밀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민주적 공론장이 정보를 얻고도 전쟁의 기본방향을 바꾸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불편한 문제다.
필리핀에서의 전투 종료 시점을 1902년으로 잡는 공식 서술 뒤에도 모로 지역 등에서는 무장충돌이 계속되었다. 제국은 하나의 종전선언으로 닫히지 않았다. 지역마다 다른 통치와 저항을 ‘평정’이라는 한 단어로 묶으면 장기적 폭력의 시간을 지워 버리게 된다.
6. 반제국주의라는 넓고 불편한 연합
반제국주의연맹에는 마크 트웨인, 앤드루 카네기, 노동운동가, 헌법학자와 함께 비백인 주민의 편입을 두려워한 인종주의자도 있었다. 모두 제국에 반대했지만 그 이유는 같지 않았다. 한쪽은 동의 없는 통치가 독립선언을 배반한다고 보았고, 다른 쪽은 새로운 주민을 미국 사회에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이 불편한 결합은 여항이 정치세력으로 나타나는 방식에 관해 중요한 점을 보여 준다. 어떤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같은 미래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연합은 하나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지만, 그 뒤의 공동체 경계를 놓고 다시 갈라질 수 있다.
매킨리는 1900년 재선에 성공했고 제국 획득은 철회되지 않았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논쟁은 미국의 대외지배가 헌법과 건국 원칙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언어를 남겼다. 구는 여항을 이기더라도 그 질문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흑인 지식인과 언론도 제국 문제를 두고 갈렸다. 어떤 이는 해외의 유색민 지배가 국내 백인우월주의를 강화한다고 보았고, 일부 병사는 군복무가 시민권을 증명할 기회라고 여겼다. 국내의 인종 여항은 제국 바깥으로 투사되었다가 다시 미국 안의 평등 논쟁으로 돌아왔다.
7. 헌법은 국기를 따라가는가
1901년부터 이어진 도서판례는 편입된 영토와 미편입 영토를 구분했다. 후자의 경우 헌법이 모든 조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전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형성되었다. 미국 주권 아래 있으면서도 주가 되는 통상적 경로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않는 공간이 생겼다.
이 판례군은 하나의 깔끔한 다수의견으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며, 사건마다 재판관의 결합과 논리가 달랐다. 그러나 전체 효과는 의회가 섬 지역을 유연하게 통치할 수 있는 예외지대를 제공한 것이었다. 당시의 인종·문명 위계도 그 판단에 깊이 스며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1917년 미국 시민권을 받았지만 섬에 거주하는 동안 대통령 선거권과 동등한 의회 대표권을 갖지 못한다. 소속은 시민과 외국인 사이의 단계로 관리되었다. 제국의 헌법 문제는 1901년에 끝난 역사적 잔재가 아니라 지금도 남아 있는 구조다.
1922년 발자크 판결은 미국 시민권을 받은 푸에르토리코 주민에게도 배심재판권이 자동으로 전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시민권과 완전한 헌법 적용이 분리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도서판례가 만든 중간지대는 전쟁 직후의 임시방편을 장기적 신분으로 바꾸었다.
8. 결론: 해방의 언어가 지배의 문법을 만날 때
1898년 전쟁은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무너뜨렸고, 동시에 미국의 해외제국을 낳았다. 인도주의·전략·상업·인종적 위계가 한 전쟁에 겹쳐 있었으므로 이를 순수한 해방이나 순수한 음모 가운데 하나로 정리할 수 없다.
새 영토의 모호한 지위는 당장의 선택을 미루는 데 유용했다. 독립, 주 승격, 영구적 속령 가운데 하나를 즉시 고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예는 종결이 아니었다. 대표 없는 지배라는 여항이 미국 헌정 안에 자리를 잡았다.
매킨리의 피살 뒤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새 국가를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국내에서 기업 권력을 중재하고 행정기구를 키우는 한편, 국외에서는 카리브해를 관리하는 힘을 확대했다. 국가는 산업사회를 붙잡기 위해 새로운 몸을 얻었고, 그 몸은 제국의 팔이기도 했다.
1900년 대선에서도 제국은 핵심 쟁점이었다. 브라이언은 필리핀 병합을 공격했지만 매킨리는 번영과 승리, 안정의 후보로 재선되었다. 유권자의 승인은 제국정책에 정치적 힘을 주었으나, 통치받는 필리핀인과 푸에르토리코인이 그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대표성의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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