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편: 도금 시대, 설계도에 없던 권력
정치권력을 나눈 헌법은 거대 기업의 사적 지배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글의 목차
1. 새로운 전선
지난 편의 끝에서 이야기했다. 인종이라는 축이 남부의 높은 담장 안에 잠시 갇히고 나면, 아직 지켜지지 않은 그 약속은 전혀 새로운 전선에서 다시 터져 나올 것이라고. 1881년부터 1897년까지 이 체제가 겪은 일은 바로 그 새로운 전선의 개막이었다. 계급과 경제 권력을 둘러싼 전선이었다.
이 시기의 대통령사는 흔히 평범한 대통령들이 번갈아 등장하는 연속극처럼 그려진다. 가필드는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암살당하고, 정당의 이권 조직에서 나온 아서는 뜻밖에 개혁에 나선다. 클리블랜드의 두 임기 사이에는 벤저민 해리슨이 끼어 있다. 제대로 힘을 쓰는 대통령은 매킨리와 진보주의 시대에 가서야 등장하는 듯하다. 하지만 대통령 개인의 능력만 들여다보면 이 시기를 움직인 진짜 구조를 놓친다. 문제의 뿌리는 대통령의 나약함에 있지 않았다. 동시에 작용하던 두 가지 사정에 있었다. 하나는 연방 정치의 무게중심이 원래부터 의회, 그중에서도 위원회 중심으로 권한이 분산된 의회 체계 쪽에 기울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더 깊은 변화였다. 철도와 트러스트, 대기업과 월스트리트의 금융망이 빠르게 결집하면서 시장과 운임, 고용과 신용 조건을 좌우하는 새로운 권력의 중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글의 진짜 주제를 붙잡으려면 두 번째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체제는 애초에 정치 권력을 나누고 견제하려고 설계되었다. 삼권분립도 연방제도 모두 정치 권력이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독점되지 않게 하려는 장치였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권력, 곧 한곳에 집중된 사적 경제 권력에는 거의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기업 하나가 나라 전체 정유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철도망 하나가 수백만 농민의 운송비와 판로를 결정하며, 민간 금융 집단이 결정적인 순간에 국고를 떠받치는 시대가 왔다. 헌법의 원래 설계가 전혀 상정하지 않았던 지배력이 이미 이 체제 곁에서 조용히 자라난 것이다. 이 글이 따라가려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설계도에 없던 권력이 솟아올랐고, 이 체제는 그것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새 권력의 출현과 함께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노동자와 이민자, 농민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처음부터 짚어 두어야 할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앞선 여섯 편에서 잔여항은 주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라는 문제로 나타났다. 누가 시민으로 인정받으며 누가 투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이번에 노동자와 이민자, 농민이 떠안은 문제는 우선 자격보다 경제 관계에 속했다. 임금과 운임, 실업과 빚, 도시에서 사는 일과 일하는 일의 안전이 문제였다. 가장 깊은 곳의 그 잔여항에 전혀 새로운 축, 계급이라는 축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고 구성원 자격을 가르는 오래된 경계의 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 보게 되겠지만, 새로운 경제의 축이 떠오르는 바로 그때 그 오래된 축도 중국인 배척법이라는 새로운 법의 얼굴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 가필드 암살과 공무원제도 개혁
이 시기를 여는 첫 번째 큰 사건은 암살, 그리고 그 암살이 재촉한 개혁이었다. 1881년 7월 2일, 워싱턴의 기차역에서 출발을 준비하던 가필드에게 뒤에서 두 발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쏜 사람은 관직을 얻으려다 실패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남자였다. 가필드는 두 달 넘게 버티다가 9월 19일 숨졌다. 범인이 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해묵은 논쟁 하나를 단숨에 정치적 비상사태로 바꾸어 놓았다. 공직을 정당에 대한 충성의 보상으로 나눠 주어도 되는가.
1883년 1월 16일, 아서는 펜들턴 공무원제도 개혁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능력과 실적에 기초한 연방 공무원 임용제도를 도입했다. 적용 대상 직위는 공개 경쟁시험으로 사람을 뽑도록 했고, 정치적 이유로 해고하거나 강등하는 일을 금지했다. 공무원에게 정치 활동이나 정치자금 기부를 요구하는 일도 금지했으며, 법의 집행을 맡을 연방 공무원위원회를 설치했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개혁의 중요성은 분명했지만 출발점은 작았다. 처음 법을 시행할 때 적용된 직위는 연방 공직 13만 2천 개 가운데 약 10분의 1에 불과했다. 또 하나는 아서 자신의 극적인 역할이다. 그는 원래 공화당의 스톨워트파에 속해 정당의 이권 조직과 밀접하게 연결된 인물이었는데, 가필드 암살 이후 개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 연작의 흐름 속에서 보면 펜들턴법에는 한 겹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제5편에서 살펴보았듯, 잭슨은 엽관제를 일반화해 관직을 정당의 정치적 동원에 대한 보상으로 만들었다. 펜들턴법은 이 체제가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방향을 돌려, 엽관제를 실적제로 대체하고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행정기구를 세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당장 적용되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열린 길의 끝에는, 이 체제가 훗날 새로운 권력에 맞서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있었다. 제대로 성숙한 국가의 역량이었다.
3. 산업자본의 부상과 새로운 권력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깊은 변화는 산업자본주의의 조직 형태가 빠르게 성숙했다는 점이다. 철도가 그 전형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철도는 대체로 민간 소유였고 규제도 거의 받지 않았다. 철도가 들어간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독점이 형성되었다. 철도회사는 대형 고객에게 운임 일부를 돌려주거나 지역마다 요금을 달리 매기는 방식으로 가격을 정했다. 대량 화물을 모아 실을 수 없는 농민에게는 특히 불리한 구조였다. 1890년 무렵이면 미국의 철도망은 시장과 자본, 지역 정치를 단단히 꿰매어 하나로 묶어 놓고 있었다.
트러스트는 집중의 또 다른 형태였다. 트러스트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고전적인 사례가 스탠더드 오일이다. 1882년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설립되었고, 1880년대 후반 이 회사는 미국 정유업의 약 90~95퍼센트를 장악했다. 금융도 같은 시기에 집중되었다. 1890년대의 위기 속에서 모건은 더 이상 평범한 은행가가 아니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은행과 철도, 심지어 재무부까지 조율하고 안정시키는 민간 금융의 구심점이 되어 있었다. 1895년에는 클리블랜드 정부가 모건이 이끄는 민간 은행단과 협약을 맺어 금 보유고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한 나라의 재정 신용을 민간 금융 과두세력이 떠받쳐야 한다면, 실제로 누가 체제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이 되었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는 잠깐 멈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전체뿐 아니라 뒤이은 수십 년을 이해할 열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가 권력을 견제하는 모든 방법은 정치 권력을 겨냥해 설계되었다. 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쪼개 서로 견제하게 하고, 다시 연방과 주 사이에 나누어 놓았다. 이 정교한 설계가 풀려던 문제는 한 사람이나 한 기관이 공직을 발판으로 정치적 지배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 권력은 전혀 다른 길로 움직였다. 철도왕도 석유 트러스트도 금융 집단도 어느 공직에서 권력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삼권분립의 어떤 견제도 받지 않았다. 이들은 주의 경계를 넘나들었기에 연방제의 권력 분산으로도 쪼개지지 않았다. 이 체제의 정치라는 바둑판 밖에 경제라는 바둑판을 따로 펼쳐 놓은 셈이었다. 그 바둑판에서는 체제가 원래 마련해 둔 견제의 수가 하나같이 허공을 짚었다.
4. 노동자, 이민자, 농민: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
새 권력의 이면에는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산업자본주의가 팽창하면서 전국적으로 파업과 직장폐쇄, 노사 충돌이 훨씬 빈번해졌다. 1869년에 결성된 노동기사단은 전성기인 1886~1887년 회원 수가 거의 100만 명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의 연합체인 동시에 정치운동이었고, 뒤에 등장한 미국노동총연맹보다 포용적이어서 상당수의 흑인과 여성 노동자를 받아들였다. 노동 조건은 가혹했다. 1890년에는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아동 중 일하는 아이가 18퍼센트를 넘었다. 장시간 노동, 열악한 위생, 안전 규정의 부재, 낮은 임금이 당시 산업 현장의 흔한 풍경이었다.
이민자도 다른 한편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1890년은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민자 출신 지역의 구성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1890년부터 1919년까지 새로운 이민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사람은 1,800만 명이 넘었고, 그중 동유럽과 남유럽 출신이 60퍼센트를 넘었다. 도시의 산업이 새로운 노동력을 요구하는 바로 그때, 이민 배척을 내세우는 토착주의의 반발도 함께 커졌다.
농민을 짓누른 것은 주로 세 가지 장치였다. 철도 운임, 부채의 압박, 그리고 통화 긴축이었다. 다만 통화 긴축을 이야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현대 경제사 연구가 지적하듯 19세기 후반의 물가 하락을 모두 나쁜 디플레이션으로 볼 수는 없다. 생산성 향상과 공급 확대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농민과 채무자들이 금본위제 아래의 통화 긴축에 격렬하게 반대한 까닭을 경제학에 대한 오해로 돌릴 수는 없다. 갚아야 할 빚, 농산물 가격, 신용 여건을 통해 그 긴축은 실제로 이들에게 더 무거운 부담을 지웠다. 그레인지에서 농민동맹을 거쳐 1892년의 인민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에는 농민 정치가 조직되는 과정이 뚜렷이 보인다. 1892년 인민당의 강령은 이미 은의 자유 주조, 누진소득세, 철도에 대한 정부의 통제 또는 소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경제적 곤경을 제도적 요구로 옮겨 놓는 이 과정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고 농민이 동맹과 정당을 조직한 것은, 새로 떠오른 경제의 축을 표현할 정치의 언어를 찾는 일이었다. 노동기사단의 동원과 인민당의 강령은 새로운 경제 권력에 짓눌린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공장과 들판에서 끌어내어 이 체제의 정치 절차 안으로 가져가려 한 시도였다.
5. 노사 충돌과 연방의 개입
이 시기의 노사 충돌은 같은 질문을 거듭 수면 위로 밀어 올렸다. 경제적 갈등이 격해지면 이 체제는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가. 돌아온 답은 대개 복지국가식 조정이 아니라 법원과 군대, 경찰을 동원한 질서 유지였다. 그 상징적인 폭발점이 헤이마켓 사건이다. 1886년 5월 4일, 시카고에서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경찰이 집회를 해산시키던 중 폭탄이 터졌고 뒤이어 총격전이 벌어져 경찰관 일곱 명과 여러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무정부주의자 여덟 명이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증거는 그들 중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1893년에 이르러서야 일리노이 주지사 올트겔드가 살아남은 이들을 사면하고 재판 절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892년 홈스테드 파업은 자본과 사적 무력, 주정부 권력의 관계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7월 6일, 회사가 고용한 핑커턴 탐정 약 300명이 공장 부지를 점거하려다 노동자들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핑커턴 측에서 적어도 세 명, 노동자 측에서 일곱 명이 숨졌다. 이어 펜실베이니아주는 주방위군 8,500명을 보내 현장에 주둔시켰다. 공장은 대체인력을 투입해 생산을 재개했고, 철강노조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894년 풀먼 파업은 연방정부를 노사 대립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철도 경영자 협회가 의도적으로 풀먼 객차를 우편 열차에 연결했기 때문에 파업은 연방 우편과 주간 통상을 방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다. 이를 근거로 연방법원은 금지명령을 내렸고, 클리블랜드 정부는 일리노이 주지사를 제쳐 놓은 채 수천 명의 연방군과 연방 보안관을 투입했다. 군대와 노동자의 충돌로 약 30명이 사망했다. 이후 연방대법원은 연방정부가 주간 통상과 우편에 관한 권한에 근거해 주 사이의 교통과 우편 운송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민사상 금지명령을 파업 억제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는 길도 열어 주었다.
이 연작의 틀에서 특히 짚어야 할 대목이다. 파업을 우편과 주간 통상, 공공질서를 방해하는 행위로 다시 규정하는 순간, 국가가 개입해 지키는 질서는 정확히 자본이 필요로 하는 질서가 된다. 공장이 돌아가고 철도가 운행되고 대체인력이 공장에 들어갈 수 있는 질서다. 국가는 노동자의 요구가 정당한지 묻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물었다. 질서가 깨졌는가. 당시의 조건에서 질서를 깨뜨리는 쪽은 언제나 일을 멈추고 저항하는 노동자였고, 그런 처지를 만들어 낸 자본은 아니었다. 정치적 충돌을 다룰 때는 여러 세력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을 줄 알았던 이 체제가, 경제적 충돌 앞에서는 중립적인 자리에 서는 법조차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6. 초기 규제와 제도의 엇박자
주간통상법과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보통 연방국가가 경제 권력의 집중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려 한 최초의 시도로 꼽힌다. 1887년 주간통상법은 주간통상위원회를 설치했고, 철도는 연방의 상시 규제를 받는 첫 산업이 되었다. 법은 운임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정했다. 특정 화주에게만 특별 할인이나 환급을 제공하는 행위, 비슷한 조건에서 같은 노선을 같은 방향으로 운송할 때 단거리 운임을 그 구간을 포함한 장거리 운임보다 높게 받는 행위, 철도 노선 간 담합을 금지했다. 다만 실제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철도회사에 연차보고서를 내도록 하고, 눈에 띄는 일부 운임 환급 관행을 억제한 것이 가장 뚜렷한 성과였다.
1890년 시행된 셔먼법은 연방 차원의 첫 반트러스트법이었다. 트러스트 형태든 다른 형태든 계약이나 결합, 공모가 주간 통상을 제한한다면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문제는 처음부터 트러스트나 독점 같은 핵심 개념을 정의하지 않은 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부가 적용 범위까지 좁혔다는 점이다. 1895년 미국 대 나이트 사건에서 법원은 제조와 상업을 구분했다. 설탕 제조업의 생산 독점을 주간 통상 그 자체와 같게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 결과 연방의 반트러스트법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셔먼법의 초기 효과를 볼 때는 두 사실을 함께 놓아야 한다. 상징적 중요성은 대단했다. 연방이 처음으로 트러스트와 독점을 전국적 입법의 대상으로 명시한 것이다. 반면 초기의 실제 효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심지어 노동조합을 겨냥하는 데 자주 쓰였다. 1890년대 법원은 셔먼법의 통상 제한 조항을 노동자의 단결과 불매·취급 거부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1894년 데브스 사건에서 드러난 금지명령의 정치는 이 경향을 널리 알렸다. 말하자면 국가가 경제력 집중에 맞서 처음 만든 도구가 저절로 자본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 도구는 노동자를 겨냥하는 데도 쓰였다.
이 대목을 연작의 중심 흐름에 놓고 보면, 헌법이 실패했다고 곧바로 단정하기보다는 제도와 현실이 맞물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체제는 정치적 충돌을 담아내도록 설계되었다. 누가 권력을 잡고 누가 누구를 견제할지 다루는 방법은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설계도에 없던 경제 권력이 솟아오르자, 정치적 충돌에 맞추어 정교하게 만든 그 도구들이 당장은 별 쓸모가 없었다. 경제 권력을 실제로 통치의 범위 안에 넣으려면 이 체제는 새로운 통치 능력을 길러 내야 했다. 전문적인 규제기관,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행정 역량, 트러스트와 금융이 움직이는 속내를 꿰뚫어 볼 전문지식이었다. 1890년대에는 그 기반이 아직 산발적이고 취약했으며, 충분한 체계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7. 중국인 배척법, 경계 잔여항의 새로운 모습
계급이라는 새로운 경제의 축 말고도 이 시기에 따로 다루어야 할 흐름이 있다.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이다. 이 법이 겨냥한 것은 노사 간 분배가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경계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민을 제한한 최초의 주요 연방법인 이 법은 중국인 노동자의 미국 이민을 10년 동안 중단시켰다. 기준일 이전부터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중국인은 계속 머물 수 있었지만, 출국 후 재입국하려면 증명 절차를 거쳐야 했다. 미국 법원이 중국인의 귀화를 허가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후 1892년 기어리법으로 배척 조치가 10년 더 연장되었고, 1902년 다시 갱신된 뒤 1904년에는 기한 없이 지속되도록 바뀌었다.
오늘날 학계에서 이 법의 역사적 위치는 상당히 분명하다. 보통의 이민 관리 세칙이 아니었다. 민족 집단과 직업 범주를 핵심 기준으로 삼아 특정 이민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제한, 최초의 광범위한 연방 입법이었다. 이를 이 연작의 중심 흐름에 놓아 보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앞선 여러 편에서 오래된 경계의 잔여항은 주로 노예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흑인을 이 정치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느냐가 문제였다. 이제 이전 단계의 경계 잔여항이었던 노예제는 끝났지만, 정치 공동체의 경계에서 사람을 배제하는 장치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장치는 대상을 바꾸고 법의 얼굴을 바꾸어 중국인 배척법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는 가장 깊은 곳의 잔여항이 이 시기에 두 축을 따라 동시에 펼쳐졌음을 보여 준다. 한쪽에는 새로 떠오른 경제의 축이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새로운 경제 권력에 짓눌렸다. 다른 쪽에는 오래된 경계의 축이 있었다. 중국인은 새로운 법에 의해 정치 공동체 밖으로 밀려났다. 두 축은 번갈아 고개를 든다. 하나를 누르면 다른 하나가 솟아오른다. 심지어 같은 축에서도 한곳을 눌러 놓으면 다른 곳에서 얼굴을 바꾸어 다시 나타난다. 잔여항은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난다. 그것은 너무 깊고 너무 많은 면을 지녀서, 어느 한 축이나 한 지점에 가한 한 번의 조치로는 결코 완전히 매듭지을 수 없다.
8. 화폐 논쟁과 농민 정치
화폐를 둘러싼 논쟁은 농업의 곤경과 지역 정치, 대통령의 선택을 단단히 엮어 놓았다. 두 번째 임기에 들어선 클리블랜드는 해리슨이 서명했던 셔먼 은매입법의 폐지를 경제위기 대응의 핵심 조치로 삼았다. 그는 1890년의 이 법이 금의 유출을 악화시켰다고 보았다. 1895년에는 재무부의 금 보유고가 약 4,200만 달러까지 떨어졌다. 결국 신뢰를 회복하려면 모건이 이끄는 금융 집단의 도움에 기대야 했다.
1893년 공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숫자로 이야기할 때는 추정치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밝혀 두어야 한다. 대표적인 두 통계 계열은 모두 매우 깊은 불황을 보여 준다. 다만 1894년의 실업률을 한쪽은 약 12.3퍼센트로 추산하고, 다른 쪽은 무려 18.4퍼센트로 잡는다. 여기서는 클리블랜드 개인의 입장도 중요하다. 제한정부에 대한 그의 신념은 추상적인 이념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7년 텍사스 종자 구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는 정부가 국민을 부양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이런 개인의 고통을 공공자금으로 구제할 헌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임기에도 그는 통화 문제에서 금본위제를 고수했다. 그 결과 서부와 남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잃었고, 농민과 채무자들이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가는 속도도 빨라졌다.
이 연작의 틀로 돌아오면, 클리블랜드의 제한정부론은 이 체제가 자신을 이해하던 오래된 방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정부의 책무는 제한되어 있으며 사회경제적 고통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이해였다. 그것이 맞닥뜨린 것은 전혀 새로운 현실이었다. 철도와 트러스트, 통화 긴축이 함께 만들어 낸 대규모의 경제적 고통이었다. 인민당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는 철도와 빚, 통화 긴축에 짓눌리던 농민들의 흩어진 이해관계와 불만을 하나의 제도적 언어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는 두 차례의 임기를 연속하지 않고 지낸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 두 임기에 걸쳐 드러난 그의 입장은, 오래된 제한정부 관념과 새롭게 요구되는 경제 통치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균열 위에 서 있었다.
9. 맺으며
도금 시대의 이 십수 년을 연작의 흐름에 다시 놓아 보면,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글을 관통한 판단이다. 설계도에 없던 권력이 솟아올랐다.
이 체제는 원래 정치 권력을 나누고 견제하려고 설계되었다. 누가 권력을 잡는지, 누가 누구를 견제하는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장치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집중된 사적 경제 권력에는 거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십수 년 동안 철도와 트러스트, 금융의 집중은 시장과 운임, 고용과 신용을 좌우하는 지배력을 만들어 냈다. 헌법의 최초 설계가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권력이었다. 그와 함께 가장 깊은 잔여항의 새로운 축, 계급이라는 경제의 축이 떠올랐다. 이제 문제는 누가 시민으로 인정받느냐보다 임금과 운임, 빚과 노동 안전이라는 경제 관계 속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직 지켜지지 않은 똑같은 약속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이 새로운 권력 앞에서 체제가 보인 반응을 가장 정확히 표현하면, 제도와 현실이 서로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체제가 가장 능숙하게 쓰던 도구는 모두 정치적 충돌을 다루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경제 권력에 대응하려고 처음 내놓은 주간통상법과 셔먼법은 규칙이 모호하고 집행기관도 미숙했다. 곧 사법부에 의해 적용 범위가 좁아졌으며, 심지어 거꾸로 노조를 탄압하는 데 쓰였다. 노사 갈등이 격화되었을 때 이 체제는 분명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지명령과 군대, 경찰이라는 개입 방식은 중간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질서와 자본의 편에 서서 질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국가가 경제력 집중에 맞서 처음 만든 무기는, 정작 처음에는 노동자를 향했다.
그동안 오래된 경계의 잔여항도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인 배척법이 그것을 보여 준다. 이전 단계의 경계 잔여항이었던 노예제가 끝난 뒤에도, 특정 집단을 정치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장치는 새로운 법의 얼굴을 쓰고 다시 나타난다. 가장 깊은 곳의 그 잔여항은 한곳에서 눌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곳에서 잠잠해지는 법이 없다.
이 시기에는 흔히 도금, 부패, 나약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가 간단히 붙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재배분되는 전환점이었다. 펜들턴법은 현대적 행정기구를 세우기 시작했고, 주간통상법과 셔먼법은 경제력 집중을 입법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모두 작고 미숙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출발점들이 가리킨 곳은 정확히, 이 체제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