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짐 크로: 모든 출구를 틀어막다
평등의 약속을 지우지 못한 체제는 법과 폭력과 기억으로 그 약속에 가는 길을 막았다
이 글의 목차
1. 법으로 폐쇄를 완성하다
지난 편의 끝에서 말했듯, 옛 질서는 폭력으로 끝내지 못한 폐쇄를 법으로 완성하려 했다. 연방군이 철수한 1877년 이후부터 20세기 초 몇 년에 이르기까지, 남부에서 이 구축물이 겪은 것은 그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폐쇄 시도였다. 이제 막 변두리로 다시 밀려난 잔여항을, 촘촘한 법률로 쌓아 올린 높은 담장 안에 완전히 가두려는 시도였다.
이 폐쇄를 이해하려면 먼저 지나치게 단순한 인상 하나를 걷어내야 한다. 짐 크로는 법률 하나도, 판결문 한 장도 아니었다. 백인 우월주의라는 낡은 관념이 그저 살아남은 것만도 아니었다. 재건이 실패한 뒤 주 헌법, 일반 법률, 행정 재량, 법원 판결, 노동 제도, 린치의 공포, 역사 서사가 함께 짜 낸 하나의 체제였다. 그 체제가 하려던 일은 흑인이 정치와 경제, 사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하나씩 틀어막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전환이 1865년에 곧바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야 그것은 체계로 굳어지고, 주 헌법에 자리 잡고, 일상이 되었다.
이 폐쇄를 떠받친 핵심 장치는 세 가지였고, 각각 막혀 버린 세 출구에 대응했다. 첫째는 정치의 출구였다. 1890년 미시시피주 헌법, 1898년 루이지애나주 헌법, 그리고 이를 본뜬 제도들은 인두세, 읽기 능력이나 이해력 시험, 유권자 등록에 대한 재량권, 조부 조항처럼 겉으로는 인종을 가리지 않는 장치들을 동원했다. 여기에 백인 전용 예비선거까지 더해져 흑인 유권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둘째는 경제의 출구였다. 흑인법과 부랑자법에서 죄수 임대제, 소작제, 작물 담보권과 채무노역에 이르기까지, 해방된 흑인이 다시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저항은 차츰 이런 조건으로 바뀌었다. 명목상 자유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땅과 고용주, 빚과 지역 사법기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셋째는 폭력으로 저항할 출구였다. 린치는 제도 밖에서 벌어지는 무질서가 아니었다. 체제가 돌아가는 방식의 일부였으며, 법적 차별과 경제적 속박, 정치적 권리 박탈을 실제로 관철하는 공포의 버팀목이었다.
세 출구를 한꺼번에 놓고 보아야 이 폐쇄가 품은 야심이 드러난다. 강요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결국 세 갈래 길이 있다. 정치로 규칙을 바꾸거나, 경제적 독립을 얻거나,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몸으로 저항해 속박을 끊는 길이다. 짐 크로가 하려던 일은 바로 이 세 길을 한 번에 모두 막는 것이었다. 선거권 박탈은 정치로 규칙을 바꿀 길을 막았다. 죄수 임대제와 채무노역은 경제적 독립으로 갈 길을 막았다. 곳곳에서 벌어진 린치는 저항으로 벗어날 길을 막고, 감히 시도하려는 누구에게나 경고를 보냈다. 출구 셋이 함께 봉쇄되자 사람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을 듯한 처지에 갇혔다.
여기서 곧바로 전국 차원의 문제도 짚어야 한다. 이것은 남부의 지방 악정만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연방 차원의 후퇴도 그만큼 결정적이었다. 1877년에는 타협의 정치가 연방의 보호를 약화했다. 1883년 민권 사건 판결은 1875년 민권법 가운데 공공시설 등에서의 평등한 대우와 그 구제수단을 정한 조항들을 무효로 했다.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은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논리에 힘을 실었고, 1903년 자일스 대 해리스 판결은 남부에 수정헌법 제15조의 준수를 강제하기를 사실상 거부했다. 다시 말해 남부 백인 민주당 세력의 이른바 ‘구원’은 행정부와 의회, 연방대법원이 전국적으로 물러서는 가운데서야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폐쇄 질서가 되었다.
2. 흩어진 관행이 법체계가 되기까지
짐 크로는 우선 흩어진 관행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법질서로 굳어지는 과정이었다. 전국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법전 한 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주법과 지방 법규, 계약과 업계 규칙, 암묵적인 합의가 조각조각 이어져 인종 분리의 질서를 만들었다. 1890년대에 이르자 이 조각보는 교통, 학교, 공원, 도서관, 공장, 병원, 대중오락, 결혼, 거주 공간까지 거의 모든 영역을 차츰 뒤덮었다.
법의 역사에서 이 체제에 상징적인 봉인을 찍은 것은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었다. 1896년 연방대법원은 루이지애나주가 철도회사에 평등하지만 분리된 객차를 제공하도록 요구한 것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다수의견은 한발 더 나아갔다. 강제된 분리가 흑인에게 열등함의 낙인을 찍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그것은 법 자체에 그런 뜻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라 유색인종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제도가 가한 모욕의 책임을 거꾸로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궤변이었다. 반면 할런 대법관은 반대의견에 훗날 널리 알려질 말을 남겼다. “우리 헌법은 색맹이다.” 그는 인종을 기준으로 한 이런 자의적 분리를 노예적 예속의 징표라고 불렀다.
사법의 긴 흐름 속에 이 판결을 놓으면 그 의미는 한층 깊어진다. 법원은 마침내 이 방향 전환의 마지막 단계까지 밟았다. 드레드 스콧 판결 때처럼 흑인은 시민이 아니라고 대놓고 부정하는 대신, 이제는 흑인의 시민 신분을 인정하면서도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공식으로 인종 분리 전체에 합헌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바로 그 판결 안에 할런의 반대의견도 남았다. “우리 헌법은 색맹이다.” 당시로서는 철저히 소수의견이었던 이 말은 하나의 씨앗처럼 이 구축물의 사법적 기억 속에 묻혔다. 수십 년 뒤, 아직은 아득한 어느 날 다시 싹틀 때를 기다리면서.
3. 정치의 출구를 닫다
정치에서 이 폐쇄의 핵심은 겉으로 중립적인 투표 조건을 인종에 따라 골라 적용하는 도구로 바꾸어, 실제 운용에서 수정헌법 제15조의 보장을 무력화하는 데 있었다. 제15조가 금지한 것은 인종을 이유로 투표권을 빼앗는 일이었지, 투표에 붙는 모든 문턱은 아니었다. 남부의 주들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인종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오로지 흑인을 겨냥하는 장치들을 두루 갖추고, 흑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투표소 밖으로 밀어냈다.
그 효과는 숫자로 볼 때 가장 섬뜩하다. 미시시피주는 본보기가 된 주였다. 1867년 이곳의 흑인 등록 유권자는 60,167명이었고, 1868년에는 86,973명으로 늘어 백인 등록 유권자보다 많아졌다. 그러나 1890년 주 헌법이 들어선 뒤, 1892년에 남은 흑인 등록 유권자는 8,615명뿐이었다. 더 자주 인용되는 것은 루이지애나주의 수치다. 1896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록 유권자가 130,334명이었다. 1898년 새 주 헌법이 미시시피식 장치들을 도입하자, 1900년에는 5,320명만 남았고 1904년에는 고작 1,342명으로 줄었다.
연방대법원도 이 폐쇄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윌리엄스 대 미시시피 사건에서 법원은 1890년 미시시피주 헌법의 인두세와 선거권 박탈 조항, 읽기 능력 시험을 그대로 인정했다. 1903년 자일스 대 해리스 사건에서는 더 멀리 나아가, 남부의 주들에 수정헌법 제15조를 지키도록 강제하기를 사실상 거부했다. 제도적으로 이것은 흑인이 연방법원에 권리의 강제 집행을 구할 출구마저 갈수록 막힌다는 뜻이었다. 정치의 출구는 그렇게 투표소에서 연방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닫혔다.
인두세나 읽기 능력 시험, 조부 조항처럼 형식상 중립적인 문턱들은 어느 한 곳에서도 감히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겠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인두세도, 읽기 능력 시험도, 조부 조항도 인종을 언급하지 않았다. 수정헌법 제15조는 인종을 이유로 투표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헌법에 분명히 적어 놓았다. 이 장치들은 바로 그 문장을 비켜 가면서, 그 문장이 금지한 일을 이루었다. 헌법에서 흑인의 선거권은 여전히 떳떳하게 보호받았다. 현실에서 흑인의 표는 깨끗이 쓸려 나갔다. 인정과 현실 사이의 골은 여기서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4. 경제의 출구를 닫다
선거권 박탈이 정치의 출구를 봉쇄했다면, 흑인법과 부랑자법, 죄수 임대제와 소작제, 채무노역은 먹고살 길과 옮겨 갈 길을 봉쇄했다. 1865년 미시시피주 흑인법의 문구에 이미 그 의도가 뚜렷했다. 흑인이 합법적인 거처나 직업,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갖추지 못하면 부랑자로 취급될 수 있었다. 고용주를 떠나면 임금을 몰수당했다. 경범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5일 안에 벌금과 비용을 내지 못하면, 보안관은 벌금을 대신 내겠다는 백인에게 그 사람을 임대할 수 있었다.
재건이 끝난 뒤, 노동의 문제를 형벌의 문제로 바꾸는 이 논리는 죄수 임대제와 채무노역으로 이어졌다. 수정헌법 제13조는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범죄에 대한 처벌에는 예외를 남겼다. 남부는 바로 그 예외를 이용해 강제노동을 다시 조직했다. 주정부는 죄수들을 철도회사와 광산, 대농장에 빌려주었다. 죄수들은 임금을 거의 받지 못했고, 노동 환경은 비인간적이며 위험했으며 종종 목숨까지 앗아 갔다. 오늘날의 연구는 죄수 임대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이름만 달라진 노예제’라고 요약한다.
채무노역은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했다. 한 가지는 피고인이 벌금과 소송비용을 낼 수 없을 때 지역 상인이나 고용주가 대신 내 주고, 이후 무급으로 일해 빚을 갚도록 강요하는 방식이었다. 더 흔했던 것은 소작제, 가게 외상, 농장의 신용 거래가 맞물려 사람을 끝없는 빚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도망치려 들면 쇠사슬과 감시인, 사냥개와 사법 절차가 다시 제자리로 끌어올 수 있었다. 지주는 땅과 가축, 종자를 제공하고 소작인은 연말에 수확물을 나누었다. 문제는 식량과 약품, 옷과 종자를 모두 미리 외상으로 사야 한다는 데 있었다. 결산을 해 보면 소작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주에게 여전히 빚을 진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또다시 다음 해 계약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경제적 폐쇄와 옛 노예제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짚고 넘어갈 만하다. 옛 노예제는 사람을 대놓고 재산으로 규정했다. 자유가 없다는 사실이 맨눈에 보이는, 벌거벗은 속박이었다. 짐 크로의 경제적 폐쇄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정헌법 제13조가 노예제를 폐지했으니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대신 더 은밀한 방법을 택했다. 당신이 자유인임을 인정한다. 명목상으로는 떠날 수 있다. 그러고는 당신이 갈 수 있는 길을 모조리 막는다. 땅은 남의 것이고, 빚은 갚을 수 없으며, 계약을 깨뜨릴 대가는 감당할 수 없다. 옛 노예제가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을 강요했다면, 짐 크로의 경제체제는 그 ‘견딜 수 없음’을 ‘벗어날 수 없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5. 폭력으로 저항할 출구를 닫다: 체제의 일부가 된 린치
이 체제에서 린치는 주변부가 아니라 핵심이었다. 앞서 본 법적 차별과 경제적 속박을 실제로 집행하게 해 주는 공포의 버팀목이었다. 린치에 관한 수치는 집계 기준을 나누어 밝혀야 한다. 터스키기의 전통적 통계에 따르면 1882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에서 기록된 린치 희생자는 모두 4,743명이었고, 그중 3,446명이 흑인이었다. 정점은 1890년대에 집중되었다. 1892년에는 230명이 희생되었으며, 이 중 흑인은 161명이었다. 평등사법구상(EJI)의 보고서 『Lynching in America』 제3판은 1877년부터 1950년까지 남부 12개 주에서 인종 테러로서의 린치에 살해된 흑인 4,084명을 확인했다. 이전까지 가장 포괄적이었던 통계보다도 적어도 800명이 더 많았다.
린치의 이런 테러적 성격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드러낸 사람이 아이다 B. 웰스였다. 웰스는 린치를 단순한 지방 치안 사건에서 정치적인 인종 테러로 새롭게 규정했다. 1892년 멤피스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흑인 남성 세 명이 린치로 살해되자, 웰스는 신문을 통해 거세게 그 실상을 폭로했다. 뒤이어 전국적인 린치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작업이 중요했던 이유는 린치가 혐의를 받는 어느 개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흑인 공동체 전체에 본보기를 보이는 일이었다. 선을 넘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선을 넘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바로 여기에 폐쇄에 관한 깊은 역설이 숨어 있다. 그 잔여항이 정말로 완전히 봉쇄되었다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렇게 지속적이고 빈번한 테러가 필요할 리 없다. 진정으로 끝난 일이라면 해마다 린치를 벌이며 거듭 겁을 줄 필요가 없다. 잔여항이 실제로 소멸하지 않았기에, 변두리로 밀려난 흑인이 여전히 그곳에 있고, 여전히 선을 넘으려 하고, 여전히 저항하기에, 이 폐쇄 질서는 지속적인 린치로 그들을 번번이 다시 짓눌러야 했다. 린치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잔여항을 끝내 봉쇄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것이 입증하는 것은 억압의 성공이 아니라, 억압은 결코 단 한 번으로 영원히 끝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질서가 문제를 정말로 해결했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따로 유지할 필요도 없어진다. 짐 크로는 정반대였다. 남부 전역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린치가 있어야만 자신이 주장하는 그 ‘당연한’ 인종 질서를 지킬 수 있었다. 지키는 데 폭력이 더 필요할수록, 그 질서는 사실 조금도 당연하지 않고 조금도 단단하지 않다는 것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린치는 이 질서가 강하다는 표시가 아니라 허약하다는 표시였다. 지켜서는 안 되고 지켜 낼 수도 없는 상태를, 끊임없이 공포를 만들어 낸 끝에야 간신히 붙들어 두고 있다는 표시였다.
6. ‘잃어버린 대의’와 기념비: 폐쇄를 지키는 문화
공포로 움직이는 이 질서에는 문화적 정당화도 필요했다. 그것을 제공한 것이 이른바 ‘잃어버린 대의’라는 서사였다. 이를 전문적으로 추진한 한 단체가 1894년에 설립되었다. 정관에는 후대에게 이른바 영광스러운 전쟁 역사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 주고, 남부연합 측의 ‘진실한 기록’을 보존하겠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회원 수가 거의 1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남부에서는 인종 분리와 선거권 박탈, 린치가 빠른 속도로 굳어지고 있었다. ‘잃어버린 대의’는 옛 남부를 향수의 대상으로 만들고 흑인의 능동적인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짐 크로를 문화적으로 떠받쳤다.
남부연합 기념비가 물결처럼 세워진 일도 같은 문제를 보여 준다. 이 기념비들은 1890년대부터 1920년대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짐 크로 법률이 틀을 갖추고, 흑인의 정치 참여가 억눌리며, 린치가 정점에 이르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가장 신중하게 말하자면, 기념비가 짐 크로를 떠받친 유일한 기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짐 크로 시대에 세워지고, 그 시대의 눈으로 읽히며, 의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인종 질서를 문화적으로 방어하는 데 분명히 한몫했다.
이 문화적 방어를 이 시리즈의 틀에 놓고 보면, 지난 편에서 다룬 부패 서사의 연장선임을 알 수 있다. 폐쇄는 결코 법과 폭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야기도 필요하다. 그 질서를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심지어 고귀하게까지 보이게 할 이야기 말이다. ‘잃어버린 대의’가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문화적 방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린치와 마찬가지로 폐쇄가 얼마나 불안한지 드러낸다. 정말로 자명하고 당연한 질서라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념하고, 의례를 치르며 보강할 필요가 없다. 자기의 정당성을 그토록 힘주어 논증해야 하는 질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정당성이 한 번도 확고히 세워진 적이 없음을 드러낸다.
7. 연방의 후퇴와 배제된 이들의 조직 능력
연방의 후퇴는 전국적 차원의 포기였다고 써야 한다. 재건이 끝난 뒤 연방대법원은 민권 사건 판결에서 주정부의 행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논리로, 연방이 사적 차별에 개입할 여지를 대부분 잘라 냈다. 자일스 사건 등의 판결에서는 수정헌법 제15조가 오랫동안 있으나 마나 한 조항이 되도록 했다. 다시 말해 남부의 이 폐쇄를 연방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연방은 제도적으로 점점 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 대목은 이번 편에서 유난히 무겁다. 이번에 잔여항을 봉쇄한 것은 남부의 옛 질서만이 아니었다. 이 구축물 자신의 연방대법원과 의회, 행정부도 함께했다. 이들은 거듭 물러서면서 자기 손으로 폐쇄가 들어설 자리를 내주었다. 한때 수정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를 통해 그 잔여항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던 구축물이, 이제는 자신의 사법과 입법, 행정을 통해 그 잔여항을 다시 밀어내는 데 차례차례 길을 터 준 것이다. 구축물과 잔여항의 관계는 결코 한 방향으로만,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는 잔여항을 중심부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그 구축물이, 다음 시대에는 똑같은 기관들을 써서 잔여항을 변두리로 눌러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폐쇄는 흑인의 요구를 없애지 못했다. 제도는 공식적인 공동체로 들어가는 문을 닫았지만, 배제된 이들이 스스로 조직할 능력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재건기에 자리를 잡은 흑인 가정과 독립 교회, 학교와 지역 공동체는 재건이 끝난 뒤에도 짐 크로가 그어 놓은 경계 밖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삶을 이어 갔다. 독립적인 흑인 교회는 지역 생활과 정치,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흑인 학교도 재건 이후 계속해서 공동체의 힘으로 세워지고 유지되었다.
바로 이 닫힌 공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둘러싼 깊은 이견이 나타났다. 부커 T. 워싱턴과 듀보이스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가리는 이야기보다, 폐쇄된 체제 안에서 행동할 여지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두 전략으로 읽는 편이 낫다. 워싱턴은 1895년 애틀랜타 연설에서 “지금 있는 곳에 양동이를 내려라”라고 주장했다. 산업교육과 재산 축적, 남부 백인과 함께 일하는 관계를 앞세운 것이다. 반면 듀보이스는 1903년 저서에서 워싱턴의 방침이 정치권력과 시민적 권리, 흑인 청년의 고등교육을 너무 많이 양보했다고 비판했다.
이 이견 자체가 보여 주는 것이 있다. 변두리로 밀려난 잔여항은 잠잠해지기는커녕 담장 안에서 힘을 모으고, 논쟁하고, 다음번에 어떻게 다시 터져 나올지 궁리하고 있었다. 워싱턴과 듀보이스가 다툰 것은 평등을 쟁취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었다. 출구가 틀어막힌 이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더 효과적인가였다. 점진적으로 자립을 꾀하든, 당장 권리를 요구하든, 두 입장이 공유한 전제는 평등을 향한 요구가 애초에 꺼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8. 맺음말
짐 크로의 역사를 이 시리즈의 흐름에 되돌려 놓을 때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 구축물의 역사에서 가장 체계적인 폐쇄 시도였던 짐 크로는, 동시에 그 잔여항을 끝내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또렷하게 입증했다.
폐쇄의 체계성은 전례가 없었다. 형식상 인종을 가리지 않는 일련의 장치로 미시시피의 흑인 등록 유권자 8만여 명을 8천여 명으로, 루이지애나의 13만 명을 1천여 명으로 줄이며 정치의 출구를 봉쇄했다. 죄수 임대제와 채무노역으로 자유인을 다시 땅과 빚, 지역 사법기관에 묶어 경제의 출구를 봉쇄했다. 지속적인 린치로 법과 경제의 높은 담장을 실제로 지탱하며 폭력으로 저항할 출구도 봉쇄했다. 여기에 플레시 판결의 헌법적 승인과 ‘잃어버린 대의’의 문화적 방어가 있었다. 행정부에서 연방대법원까지 전면적으로 물러선 연방도 길을 터 주었다.
그런데 바로 이 가장 체계적인 폐쇄가 폐쇄의 불가능성을 가장 분명히 드러냈다. 이유는 셋이다. 첫째, 이 폐쇄는 지워 없애는 대신 속을 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수정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 가운데 어느 하나도 헌법에서 삭제되지 않았다. 평등의 약속은 나라의 근본법에 남았고, “우리 헌법은 색맹이다”라는 할런 대법관의 반대의견은 사법적 기억 속에 남았다. 둘 다 잠재된 힘으로 살아 있었다. 둘째, 이 폐쇄를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테러가 필요했다. 해마다 반복된 린치는 잔여항이 실제로 소멸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정말로 끝난 일이라면 공포로 거듭 지킬 필요가 없다. 셋째, 폐쇄를 보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서사도 필요했다. ‘잃어버린 대의’를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야 했던 것은 그 질서의 정당성이 한 번도 확고히 세워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더해, 담장 안에 갇힌 흑인들은 교회와 학교, 공동체, 워싱턴과 듀보이스의 논쟁 같은 것들을 통해 조직하고 행동할 능력을 끝까지 간직했다.
그러므로 짐 크로가 실제로 이루어 낸 것은 오랜 지속이지, 완전한 폐쇄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쌓은 담장이 삼엄할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인 테러와 서사가 더 필요할수록, 가두려던 것이 단 한 번도 완전히 갇힌 적이 없다는 사실만 거꾸로 더 선명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반숙명론으로 돌아온다. 이 폐쇄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정치적 선택과 사법 판결, 폭력 행위가 수없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허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높은 담장은 오래 서 있을 것이다. 몇 세대의 생애가 지나갈 만큼 오래. 그러나 결국 사람이 세운 것이다. 사람이 세운 것이라면, 사람이 다시 허물 수도 있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