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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 그랜트와 헤이스 ― 안으로 들인 뒤 다시 밀어내다

헌법에 적힌 투표권도 그것을 지킬 힘과 의지가 없으면 후퇴할 수 있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안으로 들인 뒤 다시 밀어내다

지난 글의 끝에서 말했듯이, 이제 막 받아들여진 그 약속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해체된다. 그랜트가 취임한 1869년부터 헤이스의 임기가 끝나는 1881년까지, 이 구조가 겪은 일은 바로 그 과정이었다. 가장 깊숙이 남아 있던 잔여를 한때 중심부로 받아들이고도, 그것이 다시 주변부로 밀려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이었다.

이 역사의 구조를 붙잡으려면 성공과 실패 가운데 하나를 고르기보다, 두 가지 일이 모두 실제로 일어났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하나는 수정헌법 제15조가 흑인 남성의 투표권을 헌법에 새겼다는 사실이다. 그 뒤 남부에서는 흑인의 대규모 정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흑인 유권자, 주의회 의원, 지방 공직자, 나아가 연방의회 의원까지, 처음으로 많은 흑인이 이 나라의 정치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하나는 그 포섭이 곧 조직적인 백인 폭력, 자치 회복을 내세운 주 차원의 이른바 ‘구원’, 연방 권한을 축소한 대법원 판결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위기 속에서 정치적 거래와 철군으로 버려졌다.

이 일을 시리즈 전체의 흐름 속에 놓으면 그 위치가 분명해진다. 앞선 세 편은 전쟁과 헌법이 가장 깊은 잔여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중심부로 끌어들인 과정을 다루었다. 이번 글에서 다룰 것은 그 반대 방향의 움직임이다. 이제 막 중심부에 들어온 잔여가 불과 십여 년 만에 여러 힘이 한데 작용한 끝에 다시 주변부로 밀려난 과정이다.

제8편부터 제10편까지를 이 글과 이어서 읽으면 하나의 완결된 포물선이 보인다. 링컨의 전쟁과 헌법에서 존슨 시대 의회의 반격에 이르기까지, 그 잔여는 한 단계씩 중심부로 밀어 올려진다. 수정헌법 제13조와 제14조를 거쳐 제15조라는 정점에 이른다. 이제는 투표권까지 주었다. 이것이 상승 구간이다. 반면 그랜트 재임 중 쿠 클럭스 클랜의 반격에서 시작해 1877년 철군에 이르는 동안, 그 잔여는 한 단계씩 다시 주변부로 밀려난다. 폭력과 판결과 거래가 그것을 출발했던 자리까지 되밀어낸다. 이것이 하강 구간이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짚어야 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밀어냈다고 해서 없앤 것은 아니다. 수정헌법 제15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헌법에 명문으로 남아 있었다. 평등의 약속은 집행 과정에서 속이 텅 비어 버렸을지언정, 잠재된 헌법적 의무로 여전히 존재했다. 따라서 이 글이 끝까지 따라가려는 것은 이 구조가 안고 있는 깊은 딜레마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그 빚을 인정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잔여에 대한 약속은 실제로 이루어지지도, 잔여 자체가 완전히 지워지지도 않은 채, 결판나지 않은 상태에 걸려 있게 되었다.

이 차이는 글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이자, 이 구조의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다. 재건이 후퇴할 때 이 구조가 한 일은 헌법에서 제15조를 삭제하는 것도, 건국의 토대가 된 문헌에서 평등의 약속을 지우는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집행의 차원에서 폭력과 무관심을 동원해, 종이 위의 약속이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일뿐이었다. 그 결과 대단히 특이한 상태가 생겨났다. 헌법상으로는 잔여가 이미 포섭되어 있었다. 글자로 분명히 쓰여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시 주변부로 밀려나,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 인정과 현실 사이에 거대한 틈이 벌어진 것이다.

2 그랜트라는 역설적인 인물

안으로 들였다가 다시 밀어내는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랜트라는 역설적인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 1868년 그가 당선된 데에는 무엇보다 남북전쟁 영웅으로서의 명망이 작용했다. 그다음으로는 남부의 흑인 유권자 거의 50만 명이 보낸 대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선거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주로 전쟁 영웅이라는 지위와 존슨의 재건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백악관에 들어갔다.

재건에 관한 그랜트의 입장을 의회의 노선을 수동적으로 집행한 것이라고만 써서는 곤란하다. 집권한 그는 남북전쟁에서 거둔 승리의 성과를 지키려 했고, 이제 막 자유를 얻은 사람들을 보호하려 했다.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옛 남부연합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는 일을 막으려 했다. 현대의 연구가 분명히 지적하듯, 그는 쿠 클럭스 클랜과 백인들의 폭력이 남북전쟁으로 내려진 판결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우려했다. 신체와 재산의 안전, 그리고 종교적·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권리의 보장을 평화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으로 여겼다.

여기에 진정한 역설이 있다. 그랜트에게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정당 정치나 의회 운영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 훗날 그 자신도 사전에 아무런 정치적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통령사와 재건사는 점점 더 다른 면을 강조한다. 흑인의 시민권을 보호하고, 수정헌법 제15조를 추진하고, 집행법을 지지하고, 연방군과 법무부를 동원해 쿠 클럭스 클랜을 단속한 일에서 그는 분명 진지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전통적인 ‘부패한 대통령’ 이야기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노력이었다. 그랜트의 약점 때문에 그가 재건의 방어선에서 실제로 맡았던 역할까지 가려져서는 안 된다.

그랜트 행정부의 추문을 볼 때도 같은 구별이 필요하다. 버지니아대학교 밀러 센터의 그랜트 소개는 그랜트 본인이 조사 대상이 된 적은 없었고, 개인의 정직성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이런 추문에서 사익을 얻지도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다. 다만 사람을 보는 눈이 어두웠고 옛 친구들에게 지나치게 의리를 지켰기에, 그의 행정부는 끊임없이 추문에 발목을 잡혔다. 그랜트를 이 시리즈의 분석 틀에 다시 놓아 보자. 그는 이 구조가 이제 막 포섭한 잔여를 보호하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실제로 사용한 시점을 대표한다. 앞선 글들에서 행정권의 확대는 대개 전쟁과 팽창을 위한 것이었고, 위기 속에서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랜트에 이르러 행정권은 처음으로 새로운 방향에 대규모로 투입된다. 연방의 입법과 군대와 법원을 동원해, 이제 막 헌법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보호하는 방향이었다.

3 수정헌법 제15조와 포섭의 헌법적 정점

수정헌법 제15조는 이 시기 포섭이 헌법 차원에서 도달한 정점이다. 본문은 미국 시민의 투표권을 인종, 피부색, 또는 과거 노예였다는 신분을 이유로 부인하거나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제2항은 의회가 적절한 입법으로 이 조항을 집행할 권한도 부여한다. 당시의 맥락에서 이것이 실질적으로 부여한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의 투표권이었다. 그랜트 자신도 제15조를 재건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1870년 그는 이를 건국 이래 이루어진 어떤 동종의 조치보다 더 중대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수정헌법 제15조와 그에 앞선 재건 입법이 함께 작용하면서, 남부 정치는 한때 제도 자체가 실제로 다시 쓰이는 변화를 겪었다. 재건기에는 공화당이 남부의 여러 주정부를 장악했고, 흑인 의원들이 주의회에 진출했다. 1877년까지 남부에서 지방·주·연방 공직을 맡은 흑인 남성은 약 2천 명에 이르렀다. 연방의회에서도 전례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하이럼 레블스는 1870년 2월 최초의 흑인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조지프 레이니가 주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흑인 하원의원이 되었다. 1870년부터 1901년까지 모두 22명의 흑인이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오늘날 역사학이 재건기 주정부의 업적을 논할 때 대개 맨 먼저 강조하는 것은 교육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예로 들면, 1868년부터 1876년 사이에 취학자 수가 약 3만 명에서 12만 3천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 포섭의 정점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첫째, 이 조항은 실제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는 않았다. 여성의 선거권이 연방 차원에서 명시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수정헌법 제19조에 이르러서다. 둘째, 제15조가 금지한 것은 인종과 피부색, 과거 노예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권리 박탈이지, 투표에 부과되는 모든 문턱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훗날 남부 각 주는 문해력 시험, 조부 조항, 투표세처럼 겉으로는 중립적인 제도를 통해 조문의 규정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 틈은 후대에 비로소 발견된 허점이 아니다. 애초부터 이 포섭에 내재한 양면성이다. 수정헌법 제15조는 인종을 이유로 투표권을 빼앗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당시의 집행만으로는 인종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흑인을 겨냥하는 문턱이 차별적으로 운용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문해력 시험은 인종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투표세도, 조부 조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같이 정확하게 흑인을 투표소 밖에 가로막아 세웠다. 이것은 그 잔여가 진정으로 흡수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해도, 현실에 그것을 배제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은 언제든 조문을 비켜 가면서 배제라는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찾아낸다.

4 재건기 주정부와 부패 서술의 재검토

‘부패한 재건 정부’라는 널리 퍼진 이야기는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수정 자체가 이 글의 구조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현대 역사학이 고치는 것은 부패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패를 재건의 본질 전부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역사가 포너가 지적하듯, 뒤보이스는 재건 정부와 흑인 정치인에 대한 왜곡, 특히 재건기의 부패를 부풀리는 주장을 일찍이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부패가 있었다 해도 대개 백인 상인과 관리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것을 이른바 흑인 유권자의 무능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 문제가 글의 구조에 속하는 이유는 부패라는 이야기 자체가 잔여를 다시 주변부로 밀어내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재건을 민주주의의 조잡한 흉내로 묘사하던 초기 서술은 ‘북부에서 온 뜨내기’, ‘타락한 백인’, ‘무능한 흑인’이라는 틀로 재건 전체를 그려 냈다. 실제로 존재했던 재정과 행정의 문제를 인종 문제로 바꾸고, 과장하고, 한쪽 면으로만 몰아갔다. 그 목적은 흑인에게 애초부터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없다고 입증함으로써, 이제 막 얻은 권리를 박탈할 명분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더구나 그랜트가 살던 도금 시대 전체에는 기업의 뇌물, 철도 투기, 세금 사기, 정파 간 이권 나눠 먹기가 만연했다. 그런데 남부의 재건기 주정부에만 부패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동시대 북부 정치에는 같은 잣대를 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 기준이다.

이 점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훗날 재건을 무너뜨릴 때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들을 몰아내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명분 뒤에는 흑인을 다시 정치 밖으로 쫓아내려는 목적이 있었다. 잔여를 주변부로 밀어내는 데에는 노골적인 폭력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정당하게 보이게 하고, 나아가 잘못을 바로잡는 일로까지 보이게 하는 설명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부패, 무능, 타락은 바로 그런 설명이었다. 누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누가 더 청렴하고 누가 더 유능한가라는 기술적인 문제로 슬쩍 바꿔 놓은 것이다.

5 백인들의 폭력적 반격과 연방의 법적 대응

이 글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남부 백인들의 반격을 소요나 사회질서의 붕괴가 아니라 정치적 폭력으로 서술하는 일이다. 쿠 클럭스 클랜과 그와 유사한 조직들의 목적은 흑인 개개인을 겁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구타와 강간과 살인, 학교와 교회에 대한 방화, 투표와 배심원 참여의 억압을 통해 흑인의 시민권과 공화당 주정부를 함께 무너뜨리려 했다. 통제력을 잃은 군중이 아니었다. 조직과 정치적 목표를 갖춘 테러 운동이었다.

대표적인 몇 차례 학살은 시기와 대상, 사망자 수를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멤피스 학살은 1866년 5월에 일어났다. 백인 주민과 법 집행자들이 흑인 공동체를 공격했으며, 현대 연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46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뉴올리언스 학살은 1866년 7월에 일어났다. 약 두 시간 만에 헌법회의를 지지하던 흑인 34명이 목숨을 잃었고, 119명이 다쳤다. 셰리든 장군은 이를 명백한 대학살로 규정했다. 그랜트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사례 가운데 하나는 1873년 4월 13일의 콜팩스 학살이다. 적어도 62명이 사망했고, 높은 추산으로는 약 150명에 이른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이 폭력에 맞서 그랜트와 의회가 내놓은 대응은 1870년부터 1871년 사이에 제정한 일련의 집행법이었다. 첫 번째 법은 집단이 폭력, 뇌물, 위협, 협박 등의 수단으로 흑인의 투표를 방해하는 것을 금지했다. 1871년 4월의 세 번째 법, 훗날 흔히 쿠 클럭스 클랜법이라 부르게 된 법은 대통령에게 필요할 경우 무력을 사용하고 인신보호영장의 효력을 정지할 권한을 주었다. 그랜트는 서명만 하고 끝내지 않았다. 1871년 10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아홉 카운티에 비상상태를 선포하고 인신보호영장의 효력을 정지했으며, 군대와 연방 관리들을 보내 용의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그해 말까지 군이 구금한 사람은 600명을 넘었다. 이때의 기소는 실제로 이 조직에 큰 타격을 주었고, 1872년 선거가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지켜 냈다.

이 대목을 분석 틀 안에 다시 놓으면 그 의미는 각별하다. 이 구조가 자신의 강제력을 실제로 동원해 이제 막 중심부에 들어온 잔여를 보호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한동안은 효과도 있었다. 그랜트의 집행법은 쿠 클럭스 클랜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꺾어 놓았고, 1872년 선거를 비교적 공정하게 치를 수 있게 했다. 이는 그 약속이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하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이 구조가 자신의 힘을 계속 써서 약속을 보호할 의지만 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다. 재건의 실패는 흑인을 포섭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그 보호가 끝내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6 사법적 보호의 약화와 경제위기 그리고 의지의 쇠퇴

그렇다면 한때 효과를 거두었던 보호가 왜 지속되지 못했을까. 답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힘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지 말고, 그 힘들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인과의 고리는 대법원의 후퇴다. 콜팩스 학살에서 직접 비롯된 ‘미국 대 크룩섕크’ 사건에서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와 평등보호가 주의 행위에만 적용되며, 사인이 저지르는 폭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콜팩스 사건의 살인과 공모는 주 법률과 주 법원이 처리할 문제로 되돌려졌다. 이는 곧 흑인 피해자들을 보호할 의사가 없는 남부 법원과 지방 치안체계에 다시 맡긴다는 뜻이었다. 이 구조가 헌법을 다시 써서 열어 놓았던 문을, 바로 그 구조의 법원이 소리 없이 조금씩 닫아 간 것이다. 도축장 사건에서 크룩섕크 사건에 이르기까지, 새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쓸 수 있었던 연방의 무기는 차츰 날이 무뎌졌다.

두 번째 인과의 고리는 경제위기다. 1873년 공황은 철도 투기, 해외 자본의 이탈, 은행 예금의 대량 인출, 기업 파산과 맞물려 있었다. 이 위기는 5년 넘게 이어졌고, 당대 사람들은 이를 장기불황이라 불렀다. 공황과 그 뒤의 불황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더 관심을 쏟게 했다. 북부에서 재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식었다. 공화당원들은 남부에 대한 강력한 개입을 계속하다가는 북부의 표까지 잃는 것 아닌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인과의 고리는 북부의 정치적 의지가 약해졌다는 데 있다. 그 배후에는 끈질기고 광범위한 인종주의가 있었다. 북부 사회는 흑인의 평등을 위해 정치적·군사적 비용을 계속 치를 의지를 점차 잃었다. 더 깊은 곳에는 미국인 다수가 사실상 흑인의 시민적·정치적 평등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포너가 지적했듯, 해방된 노예들의 토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그들 대부분은 옛 주인에게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시민권은 경제적 독립이 받쳐 주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속 빈 권리가 되기 쉽다.

바로 이 힘들이 합쳐지면서 이른바 ‘구원’이 진전될 수 있었다. 백인 민주당원들은 자치 회복을 내세워 주마다 재건 정권을 꺾거나 전복하고, 백인우월주의를 복원하며, 흑인 시민권의 성과를 허물었다. 이 힘들이 함께 작용해 끝내 무너뜨린 것은 이 구조의 국가 역량이었다. 남부의 모든 카운티에서 흑인을 린치로부터 지속적으로 보호하고 안전하게 투표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면, 상주하는 군대가 있어야 했다. 기소할 의지가 있는 검사와 매수되지 않는 법원이 있어야 했다. 그 모든 비용을 감당할 북부의 정치적 의지도 끊이지 않아야 했다. 경제위기가 북부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법원이 연방의 법적 무기를 무디게 하고, 유권자들이 계속되는 개입에 지쳐 가자, 이 모든 것을 떠받칠 역량은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7 1876년 대통령 선거와 1877년 타협

1876년 대통령 선거는 재건의 정치적 방어선이 전국 차원에서 공개적인 협상의 대상이 된 마지막 순간이었다. 민주당의 틸던은 일반 유권자 득표수에서 앞섰고, 이의가 제기되지 않은 선거인단 표만으로도 승리에 가까이 가 있었다. 그러나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결과가 분명하지 않아 확실한 승자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루이지애나에는 심지어 서로 맞서는 두 정부가 각각 들어섰다.

의회는 결국 특별 선거위원회를 두어 이 위기를 처리했다. 위원회가 분쟁 대상인 표를 모두 헤이스에게 주면서, 그는 185 대 184로 대통령이 되었다. 반대자들은 그를 ‘사기꾼 헤이스’라고 조롱했다. 흔히 말하는 ‘1877년 타협’은 오늘날 서술할 때 문서로 체결된 협정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합의였다고 분명히 하는 편이 좋다. 그 비공식적 합의가 낳은 정치적 결과는 헤이스 행정부가 이른바 지방 자치로 방향을 돌린 것이었다. 남아 있던 재건 정부를 지키던 연방군을 주정부 청사에서 병영으로 물리고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들을 달래면서, 흑인들이 참여하고 지지하던 남부의 공화당 정권을 지키기 위해 연방의 무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던 정책을 중단했다.

이 합의의 성격을 놓고 역사학계에서는 줄곧 의견이 갈렸다. 두 해석을 나란히 놓는 편이 좋다. 첫 번째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가깝다. 헤이스가 집권했을 때 남부에서 극소수 연방군의 지원으로 버티던 주는 두 곳만 남아 있었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계속 주둔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거부했고, 북부 여론도 이미 지쳐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군사적 재건을 이어 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를 흑인에 대한 배신으로 보는 해석이다. 완전한 형태의 밀약이 있었든 없었든, 철군과 적극적인 법 집행 중단이 낳은 결과는 현실이었다. 흑인 유권자들은 다시 주 차원의 폭력과 지방 사법기관의 무관심, 체계적인 권리 박탈 앞에 노출되었다. 훗날 짐 크로 체제가 들어설 길도 그렇게 열렸다.

여기에는 더 깊은 역설이 있다. 앞선 두 편에서 이 구조의 개방성, 곧 계속 유지되었던 선거제도는 스스로를 바로잡는 도구였다. 링컨은 그것으로 남북전쟁 중 정당성을 유지했고, 의회는 1866년 중간선거를 통해 존슨에게서 정치공동체를 규정할 권한을 되찾았다. 그런데 1877년에 이르자 똑같은 구조의 개방성, 똑같은 선거가 그 약속을 저버리는 수단으로 변했다. 같은 제도가 어떤 순간에는 잔여를 지키는 힘이 되고, 다른 순간에는 그것을 버리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 이 구조의 개방성 자체가 저절로 잔여의 편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개방성은 무대를 제공할 뿐이다. 그 무대에서 끝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표와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약속을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8 맺음말

그랜트에서 헤이스에 이르는 12년을 이 시리즈의 흐름 속에 다시 놓았을 때,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판단이다. 안으로 들인 뒤, 다시 밀어냈다.

두 가지 모두 실제로 일어났다. 어느 쪽도 수사가 아니다. 포섭은 실제였다. 수정헌법 제15조는 흑인 남성의 투표권을 헌법에 새겼고, 남부에서는 흑인의 대규모 정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그랜트 행정부 역시 연방의 입법과 군대와 법원을 실제로 동원해 그 포섭을 지켰으며, 한때는 효과를 거두었다. 다시 밀어낸 것 또한 실제였다. 1877년을 전후해 백인들의 폭력, 연방 권한을 좁힌 사법부의 판결, 경제위기, 북부의 의지 쇠퇴, 그리고 정치적 거래가 한데 합쳐져 이 사람들을 다시 정치공동체의 주변부로 밀어냈다.

이 모든 일의 가장 깊은 의미는 결국 완전히 닫힐 수 없는 이 구조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밀어냈다고 해서 없앤 것은 아니다. 수정헌법 제15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그 조항과 평등의 약속은 잠재된 헌법적 의무로 여전히 국가의 근본법에 남아 있었다. 낡은 질서는 폭력과 거래를 통해 이 잔여의 권리를 집행의 차원에서 속 빈 것으로 만들었지만, 헌법에서 완전히 지울 능력은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조가 성공적으로 닫힌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닫힐 수 없다는 본성이 드러난 또 다른 모습이다. 새로운 질서는 잔여에게 진정한 평등을 실현해 주지 못했고, 낡은 질서도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잔여는 주변부로 밀려나고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유예된 상태에 머물렀다. 그것은 헌법의 문장들 속에 수십 년 동안 조용히 잠복해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누군가 다시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을 기다리며.

재건의 후퇴는 운명이 아니었다. 그랜트의 집행법이 잠시나마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 구조가 자신의 힘을 계속 써서 보호할 의지만 있다면 그 포섭을 지킬 수 있음을 입증한다. 끝내 다시 밀려난 까닭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여러 요인이 한데 겹쳤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후퇴, 경제위기, 의지의 쇠퇴, 그리고 끝내 메워지지 않은 인정과 상환 사이의 간극이 그것이다. 이 후퇴를 어느 한 사람의 배신이나 역사의 필연으로 돌리면, 그 참모습을 놓치게 된다. 그것은 여러 손이 함께 해낸 해체였고, 반드시 그렇게 될 필요는 없었던 해체였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