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존슨과 재건 — 누가 이 공동체를 규정하는가
노예제 폐지 뒤 자유와 시민권의 내용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의회가 충돌했다
이 글의 목차
1. 잔여항은 핵심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속박당했다
지난 편 끝에서 이야기했듯, 링컨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약속을 이제 막 국가가 책임져야 할 핵심 과제로 되돌려놓았다. 그런데 그가 암살당하자, 국가 질서를 다시 쓰던 그 작업은 이를 적대시하는 후임자의 손에 넘어갔다.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이 구축된 질서가 겪은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야 자기 빚이라고 인정한 것을 갚아보기도 전에, 곧장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힘과 맞닥뜨린 것이다.
존슨 집권기의 구조적 의미를 보려면, 남부가 어떻게 복구되었는지를 일직선으로 따라가는 이야기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 이 시기의 핵심은 남부의 복구가 아니라, 노예제 폐지 이후 누가 이 나라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오랫동안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잔여항이 갑자기 헌법 차원에서 정면으로 답해야 할 핵심 문제가 된 것이다. 흑인법, 해방노예국, 민권법, 수정헌법 제14조, 1867년의 재건법, 그리고 1868년의 탄핵. 여섯 가지 별개의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구조적 충돌이 차례로 펼쳐진 과정이었다.
이 연작의 말로 풀면, 가장 깊숙한 잔여항이 핵심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속박당하는 과정이었다. 지난 편에서 이 질서는 전쟁과 헌법을 통해, 몇 세대나 미뤄온 약속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였고 노예라는 신분 자체를 폐지했다. 그러나 빚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는 일과 그 빚을 다 갚는 일은 다르다. 이번 편이 따라갈 것은 빚을 갚으려 첫발을 떼자마자 옛 질서가 어떻게 반격에 나서, 이제 막 중심으로 끌어올려진 잔여항을 다시 주변으로 짓눌러 밀어내려 했는가이다. 그 반격과 재반격이 결국 다툰 것은 하나였다. 이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것을 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2. 전시 연합이 밀어 올린 사람
이 충돌을 이해하려면 먼저 존슨이 어떤 위치에 서 있던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젊어서는 재봉사로 생계를 이었다. 1864년 링컨은 지지층의 균형을 맞추고 전쟁을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화당만의 후보가 아니라 “국민연합당”의 이름으로 재선에 도전하면서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골랐다. 당시 존슨은 전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쟁 지지파 민주당 인사 중 하나로 꼽혔다. 다시 말해,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공화당의 재건 구상과 애초부터 뜻이 맞아서가 아니었다. 전시 연합정치의 구도가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존슨의 정치가 복잡한 것은, 전쟁 중에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그 주된 이유가 흑인 평등이라는 이념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반대에는 대농장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노예를 소유하지 않은 백인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가 짙게 섞여 있었다. 그의 논리에서 노예제 폐지가 곧 흑인의 정치적 평등을 뜻하지는 않았다. 기존의 선거권은 본래 백인 남성의 몫이며, 흑인이 곧바로 선거정치에 들어오면 오히려 인종전쟁이 벌어진다고 보았다. 계급의 문제에서는 대농장 지배층에 맞서면서도 인종 간 동등한 권리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그의 정치관을 떠받치는 핵심 구조였다.
그의 인종관은 공식 문서에도 또렷이 드러난다. 민권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는 법안이 흑인을 편든다고 불평했다. 1867년 국정교서에서는 의회의 재건 정책이 나라의 절반을 “아프리카화”할 수 있는 위험이라고 비난했다. 오늘날 주류 역사학이 그에 대한 평가를 크게 낮춘 핵심 이유는 단지 그의 정치적 수완이 형편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노예제가 끝난 뒤에도, 흑인의 정치적 평등이 전후 질서의 당연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완강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연작의 틀로 돌아와 보면 존슨의 위치에는 구조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이 질서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가장 깊숙한 잔여항을 핵심으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총탄 한 발이라는 우연 때문에, 그 지도권이 정확히 반대의 충동을 체현한 사람에게 넘어갔다. 존슨이 대표한 것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자기 지배를 연장하려는 옛 백인 공화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는 홀로 떨어진 악인 하나가 아니었다. 실재하며 강력한 구조적 힘이 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 힘이 하려던 일은, 이제 막 중심으로 올라온 잔여항을 다시 원래 자리로 눌러놓는 것이었다.
3. 대통령 재건: 규정권부터 움켜쥐다
링컨이 암살되었을 때 제38대 의회의 회기는 이미 끝났고, 제39대 의회는 1865년 12월이 되어야 개회할 예정이었다. 이 몇 달간의 제도적 공백을 틈타 존슨은 이른바 대통령 재건을 거의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1865년 5월 29일, 그는 반란에 가담한 사람 대부분을 사면하고, 노예와 이미 몰수 절차가 시작된 재산을 제외한 재산권을 회복해주는 사면 포고령을 내리는 한편, 임시 주지사들을 임명해 충성스러운 유권자들을 소집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고 주정부를 복구하도록 권한을 주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내린 명령을 보면, 1861년 이전 그 주의 유권자 자격을 갖추고 충성 서약을 한 사람만이 새 정치질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사실상 갓 자유를 얻은 흑인들을 재건의 정치에서 배제하는 조치였다.
이 방안의 구조적 핵심은 관대함 자체에 있지 않았다. “전후 정치 공동체를 규정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대통령과 남부 백인 엘리트의 손에 넘겼다는 데 있었다. 헌법에 따라 선출되고 의원의 자격을 심사해 받아들일 권한과 개헌 권한을 가진 의회가 결정하도록 하지 않은 것이다. 의회의 공화당원들이 분노한 것은 그가 옛 남부연합 인사들을 너그럽게 사면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부의 새 정부들이 흑인의 권리를 거의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한 의회 대표권부터 되찾으려 했고, 심지어 옛 남부연합의 엘리트 상당수를 국가 정치의 중심으로 돌려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39대 의회는 개회하자마자 남부 각 주의 대표들이 의석을 차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재건합동위원회를 설치했다. 존슨이 먼저 움켜쥔 그 규정권을 도로 거둬들인 것이다. 이 일은 구축된 질서의 규칙에도 사전에 다 메워놓지 못한 틈이 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기가 닥치면, 누군가는 그 틈을 이용해 더 큰 대표성을 지닌 기관이 행사해야 할 권한을 먼저 차지할 수 있다.
4. 흑인법: 자유를 옛 제도 안으로 다시 짓누르다
대통령 재건이 낳은 가장 직접적이고 폭발적인 결과 중 하나는 흑인법이었다. 미시시피주의 법은 한편으로 흑인이 소송을 제기하고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와 읍 밖에서 토지를 빌리는 일을 금지했다. 자유 신분인 모든 흑인에게 합법적인 거주지나 일자리와 이를 입증할 문서를 갖추도록 했고, 한 달을 넘는 노동계약은 반드시 서면으로 작성하게 했다. 노동자가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일을 그만두면 그해 이미 벌어놓은 임금까지 몰수당했으며, 관리들이 그를 체포해 원래 고용주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더 가혹한 것은 도제와 부랑자에 관한 조항이었다. 법원은 부양받지 못하는 흑인 미성년자를 강제로 도제로 삼을 수 있었고, 그들을 맡길 때는 과거의 주인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합법적인 일자리가 없는 성인은 부랑자로 판정해 벌금을 물리고 가둘 수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법도 그만큼 노골적이었다. 노동계약을 맺은 유색인을 대놓고 “하인”이라 부르고 고용주는 “주인”이라 불렀다. 농장 노동시간은 일출부터 일몰까지였으며, 판사는 이른바 불복종, 게으름, 불손함을 이유로 하인에게 체벌이나 벌금을 가한 뒤 즉시 일터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흑인이 수공업자나 기술자, 가게 주인으로 독립해 생계를 꾸리려면 지방 판사에게 유효기간 1년짜리 허가증을 신청하고 매년 거액의 수수료를 내야 했다.
이 연작의 틀에서 이 일이 지니는 뜻은 깊다. 지난 편에서 말했듯 수정헌법 제13조는 노예라는 신분 자체를 없앴다. 그것은 이 질서가 가장 깊숙한 잔여항을 정면에서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흑인법은 노예제 폐지가 그 잔여항을 말끔히 해소하고 문제를 닫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드러냈다. 옛 질서는 더 이상 사람을 재산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되자 수법을 바꾸었다. 노동계약으로, 부랑죄로, 직업 허가증으로 자유를 다시 짓눌러, 자유라 할 것이 거의 없는 상태로 축소했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이치가 바로 이것이다. 잔여항은 양면성을 지니기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 한 가지 형태를 없애면, 곧 다른 형태로 다시 고개를 내민다.
5. 해방노예국: 노예에서 시민으로 가는 길에 처음 개입하다
이처럼 자유가 다시 쪼그라드는 상황에서 연방정부가 손에 쥔 주된 시정 수단은 해방노예국이었다. 1865년 3월 3일 이 기관을 만들 때 의회는 식량과 의복 및 의료 지원, 학교 설립, 노동계약 감독, 몰수되거나 버려진 토지의 관리를 맡겼다. 해방노예국은 구호 활동을 하는 동시에 학교를 마련하고 계약을 감독하며 토지 문제를 처리했다. 흑인들이 학교를 세우고,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흩어진 가족을 찾도록 도왔으며 법률 지원과 의료 지원도 제공했다.
그러나 해방노예국은 처음부터 두 가지 제약을 받았다. 하나는 자원과 집행력의 한계였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의 적대감이었다. 존슨은 1866년 2월 해방노예국의 존속을 연장하는 첫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의회가 고쳐서 다시 보내자 7월에 또 거부했다. 다만 이번에는 상하 양원이 거부권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1866년 법이 발효되면서 이 기관의 활동은 2년 더 연장되었다.
그러므로 해방노예국은 노예에서 시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연방정부가 처음으로 대규모 개입에 나선 장치인 동시에, 그 역량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교육과 구호, 혼인의 법적 인정과 법률 지원을 실제로 진전시켰지만,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도 못했고 토지 재분배를 완수하지도 못했다. 이 연작의 틀에서 보면 해방노예국은 이 질서가 잔여항을 그저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빚을 실제로 갚으려 한 첫 시도였다. 흑인이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가 빚을 갚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잔여항을 인정하는 데는 헌법 문서 한 장이면 되지만, 실제로 그 빚을 갚으려면 국가 역량이 필요했다. 당시 이 질서는 그것을 갖추기까지 아직 한참 멀어 있었다.
6. 민권법과 수정헌법 제14조: 평등을 헌법의 핵심에 새기다
규정권을 되찾으려는 의회의 노력은 먼저 입법으로 나타났다. 1866년 민권법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외국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과세 대상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을 제외하면 모두 미국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또 이 시민들은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계약 체결, 소송 제기, 증언, 재산의 상속·구매·임차·보유·양도에서 백인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며, 신체와 재산 역시 법에 따라 동등하게 보호받는다고 규정했다. 존슨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 이유를 밝힌 문서에서 흑인에게 특혜를 준다고 불평했다. 상원은 1866년 4월 6일 33 대 15로 거부권을 뒤집었고, 하원도 4월 9일 122 대 41로 뒤따랐다. 이는 전후 의회와 대통령의 대립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하지만 의회는 일반 법률만으로는 이 성과를 단단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 개헌으로 방향을 돌렸다. 수정헌법 제14조는 항별로 나눠 보아야 한다. 제1항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하고 미국의 관할에 속하는 사람의 시민권을 확립했다. 아울러 각 주가 미국 시민의 특권이나 면책권을 박탈하는 일을 금지하고, 적법절차 없이 누구의 생명·자유·재산도 빼앗지 못하게 했으며, 주정부에 동등한 법의 보호를 요구했다. 제2항은 전체 인구를 기준으로 하원의 의석 배분을 다시 계산하되, 어느 주가 성인 남성 시민의 선거권을 부정하면, 반란 가담이나 그 밖의 범죄를 이유로 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에 비례해 의석수를 줄이도록 했다. 이는 흑인 남성 전체의 선거권을 아직 직접 보장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3항은 특정 공직에 있으면서 헌법 수호를 서약하고도 나중에 반란에 가담하거나 적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공직을 맡지 못하게 했다. 다만 의회 양원이 각각 3분의 2로 찬성하면 그 제한을 해제할 수 있었다. 제4항은 연방정부의 공적 채무가 유효함을 확인하는 동시에 남부연합의 채무와 노예 해방에 따른 손실 보상 청구는 인정하지 않았다.
수정헌법 제14조의 역사적 의미는 적어도 세 겹이다. 첫째, 흑인은 연방의 시민이 될 수 없다는 드레드 스콧 판결의 핵심 판단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제7편에서 보았듯 대법원은 그 판결을 통해 흑인 배제를 헌법 해석 안에 새겨 넣으려 했다. 그런데 이제 이 질서는 방향을 돌려 헌법 수정조항 하나로 그 판결을 완전히 뒤엎었다. 둘째, 동등한 시민권을 정치적 논쟁의 차원에서 헌법의 핵심으로 옮겨놓았다. 셋째, 이 조항은 훗날 현대 미국 헌법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조문 중 하나가 되었다. 평등보호와 적법절차에 관한 현대 판례의 역사는 거의 모두 이 조항을 거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짚되 그 의미를 정확히 가늠해야 한다. 수정헌법 제14조가 선거권의 경계를 다시 그을 때, 제2항의 문구는 “남성”이라는 단어를 헌법에 처음으로 명시했다. 다시 말해, 이 질서가 인종이라는 축을 따라 누가 투표할 수 있는지를 격렬하게 다투는 바로 그 순간, 성별이라는 축에서 이루어지던 배제는 흔들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근본법에 더 뚜렷이 새겨졌다. 이 두 축은 아직 지켜지지 않은 하나의 약속이 지닌 서로 다른 면이다.
7. 중간선거에서 급진 재건으로: 의회가 규정권을 되찾다
1866년은 재건의 주도권이 대통령에서 의회로 넘어간 결정적인 해였다. 존슨은 수정헌법 제14조와 의회의 방안을 막으려고 북부에서 이른바 순회 유세에 나섰다. 여러 주를 돌며 연설하고, 옛 남부연합 주들에 대한 자신의 관대한 정책을 옹호하는 한편 의회 안의 정적들을 공격하고 수정헌법 제14조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 순회는 크게 실패했다. 클리블랜드에서는 연설 중 공개적으로 언쟁까지 벌여 자신의 정치적 신뢰를 한층 더 깎아먹었다.
1866년 선거 결과는 대통령 재건을 사실상 끝냈다. 공화당은 상하 양원에서 존슨의 거부권을 어렵지 않게 뒤집을 만큼 압도적인 다수를 확보했다. 이것은 흔히 보는 중간선거의 판세 변화가 아니었다. “재건을 규정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국민이 권한을 다시 부여한 일이었다. 이 질서가 대통령의 도를 넘은 행보를 바로잡는 데 쓴 것은 어느 한 권력기관의 일방적인 힘이 아니었다. 그 안에 줄곧 열려 있던 장치, 곧 선거였다.
이런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의회는 1867년 일련의 재건법을 통과시켰다. 첫 번째 법은 테네시를 제외한 옛 남부연합 주들에 합법적인 주정부가 없다고 선언하고, 그 지역을 다섯 군정구로 나누어 미군의 통제 아래 두었다. 각 주가 의회 대표권을 회복하려면 인종, 피부색, 과거의 신분에 관계없이 21세 이상 남성 시민들이 제헌회의 대의원을 선출해야 했다. 주 헌법은 이들의 선거권을 보장해야 했고, 주 의회는 수정헌법 제14조를 비준해야 했다. 1867년의 재건 입법은 흑인을 단순한 사회적 노동력의 문제에서 재건의 정당성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 분명히 끌어올렸다.
8. 탄핵: 공동체의 구성원을 두고 두 권력이 뿌리부터 갈라질 때
존슨 탄핵은 대통령의 권력과 의회의 견제가 극한으로 부딪친 사례다. 1867년 3월,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고 공직임기법을 통과시켜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 없이 고위 행정부 관리를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했다. 1867년 8월 의회가 휴회 중일 때 존슨은 전쟁장관 스탠턴에게 사임을 요구했고, 거부당하자 그를 직무정지시켰다. 1868년 1월 상원이 이 조치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스탠턴은 복직했다. 그러자 존슨은 2월 21일 다시 스탠턴의 해임을 명령했다. 이 조치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월 24일 하원은 126 대 47로 존슨 탄핵을 의결했고, 이어 11개 탄핵소추 조항이 마련되었다. 상원 재판은 1868년 3월 5일 시작되었다. 그중 핵심적인 세 조항의 표결은 모두 35 대 19에 머물렀다. 유죄 판정에 필요한 3분의 2에서 꼭 한 표가 모자랐다.
유죄 판정이 나오지 않은 이 결과의 헌법적 의미를 두고, 역사학계에는 오랫동안 두 해석이 나란히 존재해왔다.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이 재판은 의회가 단순한 정책 불일치만으로 대통령을 내쫓는 도구로 탄핵을 사용하는 것을 막았다. 일부 상원의원이 결정적 순간에 당론에서 이탈한 것은 대통령직과 권력분립의 제도적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이를 대통령직의 보호로만 보면 재건의 현실이 가려진다고 지적한다. 피고석에 앉은 사람은 추상적인 대통령이 아니라, 흑인의 시민권을 끊임없이 가로막고 의회의 재건을 훼손하며 남부 백인의 반동적 질서에 시간을 벌어주던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해석은 독자를 대신해 어느 하나를 고르기보다 나란히 놓고 보는 편이 좋다.
그러나 이 연작의 틀에서 이번 탄핵이 비추는 것은 더 깊은 문제다. 무엇을 확립했고, 무엇을 확립하지 않았는가. 이 사건은 전후 재건을 방해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하지 않았다. 공직임기법 자체의 헌법적 정당성이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다는 점을 확립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확인된 것은, 정치적 충돌이 극점에 이르러도 상원은 여전히 헌법의 “중대한 범죄 및 비행”이라는 탄핵 기준을 순수한 정책 불일치와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다른 사실도 드러났다. 대통령과 의회가 “도대체 누가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갈라지면, 헌법의 문구만으로는 저절로 평화로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제도가 버틸 수 있는 한계 가까이까지 밀려간다.
9. 맺음말
존슨과 재건의 이 몇 해를 연작 전체 속에 다시 놓고 볼 때,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이 글을 관통하는 판단이다. 가장 깊숙한 잔여항은 핵심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반대 방향의 속박을 받았다.
지난 편에서 이 질서는 전쟁과 헌법을 통해 몇 세대나 미뤄온 약속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이번 편이 보여주는 것은 그 직후 첫걸음부터 누가 이 공동체를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한쪽에는 존슨과 그가 대표하는 옛 백인 질서가 있었다. 대통령 재건과 흑인법으로 이제 막 중심에 올라온 잔여항을 다시 주변으로 짓눌러 밀어내려 했다. 다른 쪽에는 의회가 있었다. 남부 의원 수용 거부, 거부권 뒤집기, 민권법, 수정헌법 제14조, 1867년의 재건법을 통해 한 걸음씩 흑인의 동등한 시민권을 재건의 필수 조건으로 새겨 넣었다. 흑인법은 노예제 폐지가 잔여항을 해소하여 문제를 닫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잔여항은 그저 얼굴을 바꾸어 다시 솟아났다. 의회의 반격은 이 질서가 대통령의 도를 넘은 행보를 바로잡는 방식이 여전히 늘 쓰던 방식임을 보여주었다. 선거의 공개적인 심판과 다시 작동하는 견제를 통해, 한쪽이 빼앗아간 규정권을 되찾는 것이다.
이 연작의 언어로 정확히 말하면, 이 몇 해에는 책임의 인정과 속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질서는 잔여항을 핵심에 더 깊이 새겨 넣으면서도, 그것을 기를 쓰고 뒤로 끌어당기는 옛 질서의 힘을 함께 받았다. 두 방향의 힘이 동시에 작용했고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닫힐 수 없음의 또 다른 모습이다. 옛 질서는 잔여항을 다시 주변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새 질서도 그 잔여항에 담긴 약속을 완전한 평등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느 쪽도 매듭지을 수 없는 교착 속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교착은 한 차례의 탄핵, 거듭되는 거부권 행사와 그 거부권을 뒤집는 의결이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공개적으로 전개되었다.
다음에 펼쳐질 것은 이 쟁탈전이 워싱턴의 권력 중심부를 벗어나 남부의 땅으로 다시 번져가는 이야기다. 전쟁 영웅 한 사람이 백악관에 들어가, 연방의 무력으로 이제 막 선거권을 얻은 흑인들을 지키고 테러로 재기를 노리는 폭력 조직들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경제공황, 논란에 휩싸인 대선, 서서히 소진되는 북부의 의지가 한데 맞물리면서 재건은 한 차례의 정치적 거래로 조용히 막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그랜트에서 헤이스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며, 질서를 다시 쓰던 시도가 어떻게 뒤로 밀려나기 시작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