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링컨(하) — 닫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을 다시 쓰다
전쟁 중에도 선거를 치른 공화국은 평등을 헌법의 핵심으로 옮겼다
이 글의 목차
1. 닫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을 지키다
지난 글의 끝에서 말했듯, 링컨은 전쟁 조치보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이 구축 체계와 그 가장 깊은 잔여항의 관계를 다시 쓰려 했다. 1863년의 게티즈버그와 빅스버그에서 1865년의 애퍼매턱스와 링컨 암살에 이르기까지, 이 체계가 최대의 생존 위기 속에서 해낸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방식은 이 시리즈의 모든 논지 가운데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장면을 이룬다.
그 장면의 구조를 제대로 보려면, 먼저 이 체계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짚어야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고 해서 경쟁하는 정치를 없애거나, 선거를 중단하거나, 하나의 권력 중심으로 갈등을 닫아 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과 징병, 폭동과 당파 싸움, 선거가 몰고 오는 불확실성을 고스란히 견디면서, 아직 제도로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던 평등과 노예제 폐지를 새로운 핵심의 자리로 밀어 올렸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이 구축 체계가 자신을 다시 쓴 가장 강력한 본보기를 만들어 낸다. 첫째, 게티즈버그 연설은 국가의 출발점을 노예제와의 타협을 품고 있던 1787년 헌법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선언한 1776년 독립선언서로 되돌려 써 놓았다. 둘째, 수정헌법 제13조는 노예 해방을 전시의 행정 조치에서 국가의 근본법에 새겨진 헌법상의 상시 규범으로 바꾸었다. 셋째, 1864년 대통령 선거는 내전이 가장 격렬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조차 경쟁 선거가 폐지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핵심적인 판단으로 돌아가 보면 이 장면의 무게가 분명해진다. 이 구축 체계는 닫힐 수 없고, 그 가장 깊은 잔여항은 흡수될 수 없다. 이 글이 보여 주려는 것은, 바로 가장 닫혀야 할 순간에, 선거를 없애고 권력을 집중시킬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던 생사의 고비에, 이 체계가 도리어 닫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시에 한껏 커진 닫힘의 충동이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쟁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자신의 열림을 지켰고, 동시에 몇 세대나 미뤄 온 약속을 무력으로 일부 실현했다.
다만 여기에는 곧바로 중요한 단서를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승전가로 흘러 버린다. 이번에 다시 쓴 질서는 완전하지도 않았고, 저절로 안정될 수도 없었다. 링컨의 재건 구상과 의회 급진파 사이에는 이미 이견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링컨은 1865년 4월 14일 피격되어 15일 숨졌다. 헌법과 국가의 자기 이해를 다시 쓰는 데까지는 겨우 나아갔지만, 이를 남부의 지역 질서와 흑인의 시민 자격, 연방과 주의 관계에 구현하는 일은 여전히 격렬한 다툼 속에 미정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그때, 이 작업을 이끌던 대통령을 잃은 것이다. 다시 쓰기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지, 완성이 아니었다.
2. 전쟁의 전환점과 국내에서 치른 대가
1863년 7월의 게티즈버그와 빅스버그는 흔히 나란히 전쟁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났을 때 전장에 남은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는 5만 1천 명을 넘었다. 미국 전쟁사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참혹한 인명 손실을 낳은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거의 같은 시기인 7월 4일에는 빅스버그가 북부 연방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연방은 미시시피강을 장악했고, 남부 연합은 사실상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전세가 돌아섰다고 해서 사회에 걸린 압력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1863년 징병법은 스무 살에서 마흔다섯 살까지의 남성을 연방의 징병 체계에 편입시키면서,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람에게는 300달러의 대체 납부금을 내거나 자신을 대신해 복무할 사람을 고용해 징집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는 곧 계급적·인종적 원한이 집중되는 지점이 되었다. 결국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전장을 피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뉴욕 징병 폭동에서는 이 긴장이 도시 한복판의 노골적인 내전으로 터져 나왔다. 폭동은 1863년 7월 중순에 일어났다. 처음에는 징병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곧 흑인을 겨냥한 인종 폭력으로 변했다. 유색인 고아원 한 곳이 불탔고, 가장 잔혹한 폭력은 주로 흑인 남성들에게 쏟아졌다. 공식 발표된 사망자 수는 119명이며, 과거의 높은 추정치 중에는 1,200명이라는 숫자도 있지만 확정된 수치는 아니다. 이 사건이 구조적으로 말해 주는 것은 후방이 불안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핵심은 이 구축 체계가 전쟁의 압력 때문에 이런 갈등을 없애 버리려 하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런 갈등이 극도로 파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했다. 이 체계는 갈등을 닫아 봉합하지 않았다. 그 갈등을 안은 채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3. 게티즈버그 연설 — 국가의 출발점을 다시 쓰다
링컨은 1863년 11월 19일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자필 원고는 다섯 부로, 표현과 구두점이 조금씩 다르다. 보통 표준 텍스트로 쓰이는 것은 링컨이 직접 서명하고 제목과 날짜까지 적은 유일한 원고다.
이 연설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의미는 국가의 출발점을 1787년에서 1776년으로 더 거슬러 올려 놓았다는 데 있다. 첫머리의 “87년 전”을 1863년에서 거꾸로 세어 보면, 그 끝에 있는 것은 1787년 제헌회의가 아니라 1776년 독립선언서다. 연설은 이 나라를 “자유 속에서 잉태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신념에 헌신하는 나라”로 규정하며, 이 전쟁을 “그런 나라가 오래 존속할 수 있는지를 가리는 시련”으로 규정한다. 그중에서도 정확히 인용해야 할 표현은 “87년 전”, “자유의 새로운 탄생”,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다.
역사학에서는 이 연설을 두고 강력한 해석 하나가 제시되어 왔다.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국가의 진정한 토대를 이루는 문서를, 노예제와의 타협을 담은 헌법에서 평등을 중심에 둔 독립선언서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다만 신중하게 선을 그을 대목도 있다. 역사학자 포너가 강조하듯, 링컨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독립선언서의 자연권 원칙을 노예제에 반대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게티즈버그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 나라를 만들어 낸 순간이 아니라, 더 긴 논증의 흐름 속에서 가장 응축된 표현을 완성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한 겹 더 깊은 문제를 짚어야 한다. 링컨이 다시 가리킨 독립선언서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말은, 쓰인 그날부터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었다. 1776년의 그 문서는 만인의 평등을 선언하는 동시에 노예와 여성, 원주민을 배제했다. 그러므로 게티즈버그에서 나라의 토대를 다시 놓는 일은, 한때 존재했다가 나중에 잃어버린 순수한 평등으로 돌아가자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평등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링컨이 쓴 말은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었다. 게티즈버그에서 가장 깊은 잔여항은 국가가 자신을 이해하는 자리의 한가운데로 다시 옮겨졌다. 그런데 그렇게 옮기는 방식 자체가, 그 약속은 이전에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일이 아니다. 오래된 빚을 다시 자기 몫으로 떠안는 일이다.
4. 전시의 대통령 선거 — 닫히지 않음의 극단적 표현
게티즈버그가 이번 다시 쓰기의 첫 번째 중심축이라면, 1864년 대통령 선거는 두 번째 중심축이다. 더구나 그것은 이 구축 체계의 닫히지 않음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경우였다. 나라가 전쟁으로 찢겨 있었고, 일부 주는 아예 참여하지도 않았다. 선거를 미룰 이유는 충분했다. 그래도 미루지 않았다.
당시 링컨 자신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다. 1864년 8월 23일, 그는 그 유명한 ‘블라인드 메모’를 썼다. “재선 실패의 높은 가능성에 관한 메모”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문서다. 그 핵심 판단은 현 정부가 재선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링컨은 선거일부터 취임일까지의 기간에 당선자와 협력해, 가능한 한 연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사실을 뜻한다. 평화 협상을 주장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자신이 패할 것이라 예감하면서도, 이 대통령은 선거를 중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두 층위를 엄격히 나누어야 한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채택한 정강은 적대 행위를 즉시 중단하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후보로 지명된 매클렐런은 지명을 수락하면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연방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사실상 정강의 평화 협상 노선을 거부했다. 전황은 선거 판세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여름의 높은 사상자 수와 전선의 교착 때문에 민주당은 한때 링컨이 패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모빌만과 애틀랜타, 피터즈버그에서 전황이 연방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대중의 전망도 달라졌다.
연방의 병사들도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었다. 1864년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부재자 투표와 군영 투표를 대규모로 논의하고 시행한 해였다. 전체 군인 투표를 포괄하지 않는 한 부분 집계에서는 4만 247표 가운데 3만 503표가 링컨에게 갔다. 75.8퍼센트였다. 최종적으로 링컨은 선거인단 표 212표를 얻었고, 매클렐런은 21표에 그쳤다. 전국 일반 유권자 득표율은 대략 55퍼센트 대 45퍼센트였다.
이 선거를 다시 이 시리즈의 틀에 놓아 보면 그 뜻이 더욱 또렷해진다. 내전의 가장 깊은 한복판, 닫힘의 압력이 가장 거셌던 순간에 이 구축 체계에는 자신을 닫을 이유도 구실도 어느 때보다 많았다. 선거를 없애고 권력을 모으고, 반대의 목소리를 적과 내통하는 행위로 몰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쟁을 견디면서 경쟁 선거를 예정대로 치렀고, 평화 협상을 주장하는 야당이 공개적으로 선거에 나서도록 했다. 전시 상황에서 극한까지 증폭된 닫힘의 충동은 여기서도 다시 이 체계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것이 체계를 조직하는 원리가 되지는 못했다.
5. 수정헌법 제13조 — 전시 조치에서 헌법의 핵심으로
수정헌법 제13조가 이 글의 중심에 놓이는 까닭은 단지 노예제를 폐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전시의 행정권에서 헌법의 핵심 규범으로, 하나의 도약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보았듯, 노예해방선언은 반란 상태에 있는 남부 연합 지역에만 적용되었다. 노예제를 유지하면서도 연방에 남은 경계주들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연방이 통제하는 남부의 일부 지역에도 적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법적으로는 우선 전쟁 조치였기에, 그 효력은 전쟁과 한데 묶여 있었다. 링컨은 전쟁이 끝난 뒤 법리상 노예제 폐지가 뒤집히지 않도록 보장하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상원은 1864년 4월 8일 찬성 38표, 반대 6표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하원에서는 3분의 2라는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 뒤 링컨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 개정안을 1864년 공화당 정강에 넣을 것을 요구했고, 1865년 1월 임기 말의 ‘레임덕 회기’에 다시 표결하도록 이끌었다. 마침내 하원은 1865년 1월 31일 찬성 119표, 반대 56표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링컨은 2월 1일 각 주에 개정안을 회부하는 양원 공동결의안에 상징적으로 서명했다. 의회 통과만으로 발효된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수의 주가 비준을 마쳐 헌법상의 요건을 충족한 날은 같은 해 12월 6일이었다.
링컨의 정치적 수완을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성이 높은 사실과 확실성이 낮은 소문을 구분해야 한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실제로 이 개정안을 적극 추진했고, 선거 공약에 포함했으며, 1865년 초에는 직접 압력을 가하고 표를 끌어모았다는 점이다. 반면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를 거래했는지, 어떤 이익을 약속했는지는 확실성이 낮다. 사료와 후대의 서술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을 다시 우리의 틀에 놓으면 그 구조적 무게가 얼마나 큰지 드러난다. 지난 글에서 말했듯, 이 구축 체계는 전쟁 조치로 자신과 가장 깊은 잔여항 사이의 낡은 관계를 찢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형식이었다. 수정헌법 제13조가 한 일은, 그 찢어진 자리가 도로 붙지 못하도록 못을 박는 것이었다. 전쟁에 매인 임시방편을, 전쟁이 끝나도 흔들리지 않을 헌법의 핵심 규범으로 바꾸었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이 구축 체계가 잔여항의 압력 아래 자신의 헌법적 핵심을 정면으로 다시 쓰는 순간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선을 지켜야 한다. 수정헌법 제13조가 다룬 것은 가장 깊은 잔여항의 한 축, 곧 노예제였다. 그것은 이 구축 체계가 헌법을 다시 쓰기 시작한 지점이지, 마침표를 찍은 지점이 아니다. 노예라는 신분 자체는 없앴지만, 범죄로 적법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은 노예제와 강제노역의 금지에서 예외로 남겼다. 그리고 전쟁 후 흑인이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는지, 투표할 수 있는지, 남부의 지역 질서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해결과 거리가 멀었다. 한편 링컨의 ‘10퍼센트 계획’과 급진 공화당원들 사이의 이견도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다시 쓰기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얼마나 깊이 나아갈 것인지, 누가 주도할 것인지를 둘러싼 균열은 이미 내부에서 벌어져 있었다.
6. 두 번째 취임 연설 — 심판을 품은 화해
두 번째 취임 연설은 링컨이 나라를 다시 쓰는 논리를 담은 세 번째 핵심 텍스트다. 이 연설은 승리를 결산하며 개선가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을 노예제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직접 해석한다. 노예제라는 “특수하고도 강력한 이해관계”가 전쟁의 원인임을 분명히 지목하고,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노예가 250년 동안 대가 없이 노동하여 쌓은 모든 부가 소진될 때까지, 채찍이 뽑아낸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칼이 흘리는 피로 갚아질 때까지.”
링컨이 가장 유명한 화해의 말을 꺼낸 것은 노예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이토록 분명하게 지목하고 난 뒤였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며, 이 나라의 상처를 싸매자.” 이 말의 무게는 바로 그것이 놓인 자리에 있다. 책임을 지워 버리는 말도, 전쟁을 옳고 그름 없는 비극으로 돌리는 말도 아니다. 노예제를 전쟁을 낳은 죄로 먼저 분명하게 지목한 다음에야 제시한, 심판의 뜻을 품은 화해였다.
이것은 이 구축 체계의 자기 이해가 다시 쓰였다는 또 하나의 징표다. 이 체계는 그 잔여항을 몇 세대나 미뤄 둔 끝에 반드시 치러야 했던 대가가 바로 이 전쟁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워싱턴부터 뷰캐넌에 이르기까지, 가장 깊은 잔여항을 대하는 이 체계의 방식은 거의 언제나 회피였다. 두 번째 취임 연설에서는 처음으로 이 체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대변자가, 몇 세대에 걸쳐 외면해 온 그 잔여항을 이 참화의 근원이라고 공개적으로 지목했다.
7. 애퍼매턱스, 죽음의 대가, 그리고 한 발의 총알
1865년 4월 9일, 리는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 마을의 매클레인 저택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그랜트가 내건 조건은 비교적 관대했다. 장교들은 군도와 개인 소유의 말을 지닐 수 있었고, 병사들은 가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랜트는 굶주린 남부 연합군에 2만 5천 명분의 식량을 보내는 데에도 동의했다. 이 관대한 장면은 온건한 재건을 지향했던 링컨의 입장과 서로 호응한다. 다만 기억해야 한다. 이 항복이 끝낸 것은 주력 군대의 싸움이었지, 재건을 둘러싼 논쟁이 아니었다.
남북전쟁의 전체 사망자 수는 여러 수치를 나란히 적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추정의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통용된 수치는 약 62만 명이었다. 2011년에는 인구조사 표본에 근거한 연구가 사망자 총수를 약 75만 명으로 상향 추정했고, 2024년에는 더 완전한 인구조사 기록을 활용한 연구가 약 69만 8천 명이라는 새 추정치를 내놓았다. 가장 신중한 서술은 어느 하나를 유일하게 옳은 숫자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는 62만 명이 자주 인용되며, 더 최근의 추정치는 약 70만 명에서 75만 명 사이라고 쓰되, 모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얻은 추정치임을 밝혀야 한다. 어느 기준을 택하든 이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가를 치른 전쟁이었다. 그 대가는 바로 이 구축 체계가 자신의 가장 깊은 잔여항 때문에 끝내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링컨이 암살당한 시점은 이 글에서 그 사건이 갖는 구조적 무게를 거의 결정한다. 1865년 4월 14일 밤,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부스가 쏜 권총탄에 머리를 맞았다. 그는 다시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4월 15일 새벽 길 건너편의 한 집에서 숨졌다. 같은 날 오전,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리의 군대가 항복한 지 불과 엿새 만에, 암살로 대통령이 바뀐 것이다. 링컨이 죽지 않았다면 재건은 어디로 향했을까. 역사학계에는 합의된 답이 없다. 더구나 이 질문은 본질적으로 반사실적 추론, 즉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추측이므로 반드시 그렇게 명시해야 한다. 한 발의 총알이 이 가장 결정적인 질문을 영원히 답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 놓았다.
8. 맺으며
1863년부터 1865년까지의 역사를 이 시리즈의 흐름 속에 다시 놓을 때,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이 판단이다. 이 구축 체계는 닫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을 다시 썼다.
앞선 여덟 편에서 거듭 말했듯, 이 구축 체계는 닫힐 수 없으며 그 가장 깊은 잔여항은 흡수될 수 없다. 이 글이 보여 주는 것은 최대의 생존 위기 앞에서, 본래라면 자신을 닫을 이유가 가장 충분했던 순간에, 이 체계가 정반대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선거를 없애지 않았고, 권력을 하나의 중심에 영구히 집중시키지도 않았으며, 전시에 극한까지 커진 닫힘의 충동이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예정대로 치러진 1864년 대통령 선거는 그 닫히지 않음의 가장 극단적인 증거다. 질 것이라 예감한 대통령이 내전을 견디면서 권력을 유권자에게 돌려주어 판단하게 했다. 동시에 이 체계는 닫히지 않는 데서 오는 모든 대가, 징병에 대한 원한과 도시의 폭동, 참혹한 인명 피해를 감당하면서, 몇 세대나 미뤄 온 약속을 처음으로 자신의 핵심에 정면으로 새겨 넣었다.
이 시리즈의 언어로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서 이 구축 체계가 한 일은 그 잔여항을 닫아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잔여항은 양면성을 지니기에 흡수될 수 없고, 따라서 닫힘은 불가능하다. 이 체계가 한 일은 닫을 수 없음을 인정한 위에서 그 잔여항을 담아 두는 모든 조건을 근본적으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잔여항은 변두리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고, 지역 고유의 제도로 취급되었으며, 타협으로 그은 선들에 가까스로 눌려 있었다. 이제 그것은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려졌고, 국가의 출발점과 근본법 안에 새겨졌다. 잔여항은 여전히 그 잔여항이다.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 구축 체계와 잔여항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번 다시 쓰기는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었다.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다룬 것은 가장 깊은 잔여항의 한 축, 곧 노예라는 신분 자체뿐이었다. 흑인의 온전한 시민권과 여성의 정치적 지위, 그 밖의 무수한 배제에는 아직 손도 제대로 대지 못했다. 게다가 이 작업은 도중에 자신을 이끌던 대통령마저 잃었다. 한 발의 총알은 앞으로 이 모든 일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던져 버렸다.
다음에 펼쳐질 이야기는, 이번 다시 쓰기가 그것을 적대하는 후계자의 손에서 어떻게 곧바로 쟁탈의 대상이 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흑인의 시민 자격은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에 새겨질 것이고, 남부의 낡은 질서는 또 다른 수단을 동원해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존슨과 재건의 이야기다. 이 구축 체계가 막 앞으로 큰 걸음을 내디딘 뒤, 다시 어떻게 뒤로 끌려가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