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링컨 상편 — 지키기 위해 다시 쓰다
연방을 살리려는 전쟁은 어떻게 노예제와의 관계를 바꾸었는가
이 글의 목차
1. 전쟁으로 존속에 답하다
지난 편 끝에서 말했듯, 뷰캐넌의 그 겨울에 이르러 이 구축물은 헌법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갈등은 모든 우리를 뚫고 나왔고, 체제 자체의 논리로도 전쟁 말고는 더 내놓을 답이 없었다. 링컨이 취임한 1861년 3월부터 노예해방선언이 발효된 1863년 1월까지, 이 구축물은 처음으로 갈등을 품어 안는 대신 전쟁을 통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답해야 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위대한 한 사람의 의지가 어떻게 거센 흐름을 되돌렸는가 하는 이야기로 쓰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쓰면 정작 이 역사를 이루는 구조를 놓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링컨 개인의 의지 그 자체가 아니라, 나란히 뻗어 가면서 서로 얽히는 두 줄기다. 하나는 생사의 위기에 놓인 연방이 대통령의 주도 아래 전시 행정권을 어떻게 빠르게 확대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동안 되도록 제도의 변두리에 두고 지역의 제도로 취급해 온 노예제가 전쟁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한 걸음씩 연방의 핵심 의제로 들어왔는가 하는 것이다. 링컨은 이 시기 내내 연방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연방을 보전하려고 택한 수단은 거꾸로 연방과 노예제의 관계를 다시 써 나갔다. 이것이 이번 편의 진짜 주제다. 이 구축물을 지키려면 결국 이 구축물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 요구 속에는 깊은 역설이 숨어 있다. 애초에 이 구축물은 스스로를 빈틈없이 닫아 버리는 일도, 갈등을 없애 버리는 일도 추구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갈등마다 우리를 만들어 주고, 그 안에서 계속 공개적으로 전개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가장 깊숙한 잔여항이 모든 우리를 뚫고 나왔다. 품어 안는 방식은 더 나아갈 곳이 없었다. 남은 길은 하나, 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이 구축물은 본래 자신이 아니었던 모습으로 바뀌어야 했다. 동원하고, 징집하고, 봉쇄하고, 인신보호영장 제도를 정지시키는 전시 국가가 되어야 했다. 줄곧 변두리에 밀어놓고 정면으로 다룰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잔여항에도 손을 대야 했다. 이 전쟁은 이 구축물에 닥친 외부의 시험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다시 쓰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역사 서술의 선 하나는 먼저 분명히 해 두자. 이 시기를 ‘먼저 연방을 지키고, 그다음 노예제를 폐지했다’는 일직선의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링컨은 오랫동안 공개 발언에서 연방의 보전을 맨 앞에 내세웠다. 하지만 전쟁 자체가 실행 가능한 정책의 경계를 끊임없이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정책은 변두리의 수단에서 점차 전쟁 목표의 일부로 올라섰다.
2. 취임의 위기와 섬터 요새
1861년 3월 4일 링컨이 취임 선서를 했을 때, 연방의 위기는 더 이상 잠재적인 위험이 아니었다. 이미 현실로 벌어진 붕괴였다. 그가 정식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노예주 일곱 곳이 연방을 탈퇴해 몽고메리에 남부연합 정부를 세웠다. 따라서 그의 첫 취임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노예제가 이미 존재하는 주들에 간섭할 뜻이 없다고 선언하며 남부를 명확히 안심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한 주가 일방적으로 연방을 탈퇴하는 일이 합법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연설 말미의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라는 말은 추상적인 감상의 표현이 아니었다. 현존하는 노예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연방은 분열될 수 없다는 원칙 사이에서, 마지막 남은 헌정의 균형을 붙들려는 시도였다.
링컨은 섬터 요새에 대군을 보내 곧바로 증원하지 않았다. 대신 우선 식량만 보급하는 계획을 세우고, 요새 수비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미리 알렸다. 주지사에게 보낸 통지에서는 보급을 방해받지 않는 한 별도의 통지 없이 병력이나 무기, 탄약을 보내지 않되, 요새가 공격받는 경우는 예외로 삼았다. 지극히 정치적인 전략이었다. 먼저 무력을 쓰는 책임을 최대한 남부연합 쪽에 지우려는 것이었다. 뒤이어 남부연합은 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했고, 거절당하자 1861년 4월 12일 새벽 포문을 열었다. 약 34시간 뒤 수비대 지휘관은 항복했다. 남부가 먼저 쏘았다는 사실의 정치적 의미는 컸다. 링컨은 이를 발판 삼아 위기 전체를 분리 독립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에서 반란 진압을 위한 더 광범위한 북부의 동원으로 바꿀 수 있었다.
섬터 요새가 함락된 뒤인 4월 15일, 링컨은 각 주에 민병대 7만 5천 명을 내놓으라는 소집령을 발표했다. 그때까지 탈퇴하지 않았던 남부 북쪽의 주들은 이 순간 정세를 다시 판단했다.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가 잇따라 연방을 떠났다. 이 구축물이 써 온 포용의 언어는 여기서 완전히 강제의 논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3. 짧은 전쟁이라는 환상의 붕괴와 접경주의 제약
제1차 매너서스 전투는 반란을 단기간에 진압하리라는 환상을 깨뜨렸다. 1862년 가을 앤티텀에 이르면 전장의 현실은 한층 더 참혹해진다. 앤티텀의 총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흔히 인용되는 공식 집계로는 전투 중 발생한 인명피해가 2만 2,700여 명이고, 2만 3천 명 이상으로 잡는 집계도 있다. 어느 수치를 따르든 앤티텀은 미국 역사에서 하루 동안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전투로 널리 인정된다.
링컨의 초기 반노예제 정책을 실제로 묶어 놓은 것은 전장만이 아니었다. 접경 지대의 노예주들도 있었다.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가 연방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초기 정치적 계산 전반을 떠받친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링컨은 1862년 7월 12일 접경주 의원들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이들이 사태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힘은 같은 수의 다른 어떤 의원들보다도 크다고 직접 밝혔다. 이 말은 1861년과 1862년 사이 그의 반노예제 정책이 더 높은 우선순위에 복종해야 했음을 보여 준다. 접경주만큼은 절대로 남부연합으로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제약 자체가 전시에 드러난 가장 깊은 잔여항의 양면성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접경주는 연방에 남아 있는 노예주였다. 링컨이 그들을 붙잡으려면 이 전쟁이 노예제 자체를 겨냥한 전쟁처럼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보이는 순간 그들은 언제든 남부 편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전쟁에 떠밀려 이제는 다룰 수밖에 없어진 순간에도, 가장 깊은 그 잔여항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다룰 수 있는 방식까지 제한하고 있었다.
링컨이 초기에 전쟁의 목표는 노예제의 직접적인 폐지가 아니라 연방의 보전이라고 공개적으로 고수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1862년 8월 22일 언론인 호러스 그릴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싸움에서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자신의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일이며 노예제를 지키거나 없애는 일이 아니라고 썼다. 이 편지의 정치적 맥락은 대단히 중요하다. 편지는 공개된 여론의 장에 발표되었고, 접경주와 북부 보수파 지지자들을 계속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바로잡아 읽어야 할 대목이 있다. 이 편지를 링컨이 노예제 폐지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속마음의 고백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미 한 달 전인 7월 22일, 그는 내각에 해방선언의 초안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4. 전시 대통령 권력의 팽창
제도사에서 1861년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링컨이 의회 휴회 중 일련의 중대한 전시 조치를 먼저 취한 뒤 의회에 추인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4월 15일 민병대 7만 5천 명을 소집했고, 4월 19일에는 처음 반란에 나선 일곱 주의 항구를 봉쇄한다고 선언했다. 4월 27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군사 통로 일대에서 필요할 경우 인신보호영장 제도를 정지시킬 권한을 군에 주었다. 7월 4일 특별교서에서 링컨은 자신이 “국민의 요구와 공공의 필요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 조치들은 “엄밀히 합법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먼저 실행하고 나서 의회의 승인을 구한 것”이라고도 솔직히 말했다.
인신보호영장을 둘러싼 논란은 이 시기 대통령 권력의 팽창을 보여 주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링컨이 1861년 4월 27일 처음 허용한 것은 필라델피아와 워싱턴을 잇는 선상에서 필요할 때 이 보장 장치를 정지시키는 것뿐이었다. 뒤이어 벌어진 메리먼 사건은 연방대법원 전원이 내린 정식 판결이 아니었다. 토니 대법원장이 순회법원 판사의 자격으로 맡은 사건이었다. 토니의 핵심 주장은 분명했다. 대통령은 인신보호영장 제도를 일방적으로 정지시킬 수 없으며, 그 권한은 의회에만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군은 군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일반 민간인을 군사범으로 취급해 장기간 구금할 권한이 없었다. 토니는 대통령이 이 보장 장치를 정지시킬 수 있다면 미국 대통령이 손에 쥔 권력은 영국의 왕권보다도 더 자의적이고 절대적일 것이라고까지 썼다.
더 중요한 것은 링컨이 토니의 의견을 받고도 정책을 거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7월 4일 교서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헌법은 분명 반란이나 침입이 있을 때 이 보장 장치를 정지하는 것을 허용한다. 다만 어느 권력 기관이 그 권한을 행사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구축물은 예외 상태에서의 권한이 어디에 속하는지 미리 깔끔하게 정해 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체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후에 의회의 추인과 정상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선점해 행사한 그 예외적 권한을 견제와 균형의 틀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전시 권한 확대를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은 지금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초기의 고전적인 논의는 링컨을 흔히 ‘헌정적 독재’의 범주에 넣었다. 이후에는 그 표현을 수정하려는 연구가 더 많아졌다. 링컨이 선거를 폐지하지도, 의회를 없애지도 않았으며 계속 입법부의 승인을 구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를 진정한 의미의 독재체제와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번 편에서 가장 유익한 일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여러 해석을 나란히 놓아 보는 것이다. 불가피한 헌정적 모험, 위험한 권한 침범의 선례, 그리고 형식은 보존한 채 실질적인 권력을 늘려 가는 위기 운영이라는 세 가지 시선을 말이다.
여기서 이 시리즈가 줄곧 따라온 흐름을 다시 이어 보자. 워싱턴은 선례에 기대었고, 제퍼슨은 기정사실이 끌어당기는 힘에 기대었다. 잭슨은 민의가 직접 부여한 권한을 내세웠으며, 포크는 국경 충돌 하나를 이용해 전쟁을 시작했다. 링컨에 이르러 행정권의 팽창은 전시의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이 구축물에서는 특히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링컨의 권한 확대는 격렬했지만 끝까지 제도적 형식 안에 머물렀다.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고, 의회는 여느 때처럼 열려 추인했으며, 법원도 계속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스스로를 닫아 버리려는 충동은 전쟁 속에서 커졌지만, 그 충동이 곧 이 구축물 자체가 되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독재체제와 갈라지는 결정적인 경계선이 있다.
5. 전시 금제품에서 몰수법으로
대통령 권한의 팽창이 이 시기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라면, 다른 한 줄기는 노예제가 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지역의 제도에서 연방 전쟁 정책의 중심으로 옮겨 왔는가 하는 것이다. 첫 틈을 낸 것은 추상적인 도덕 선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전시 금제품’이었다.
1861년 5월, 버지니아의 먼로 요새에 있던 버틀러 장군은 연방군 방어선 안으로 도망쳐 온 노예들을 남부의 주인에게 돌려보내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들을 몰수할 수 있는 ‘전시 금제품’이라고 불렀다. 이 조치는 연방으로 하여금 골치 아픈 문제에 손을 대게 했다. 노예는 재산인 동시에 노동력이었고, 스스로 행동에 나설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이 구축물은 전쟁의 실제 필요 속에서 줄곧 변두리에 놓아두었던 것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버틀러의 ‘전시 금제품’이라는 표현 자체도 곱씹을 만하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법률과 군사의 기술적인 분류였다. 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적이 전쟁에 사용하는 재산이니 몰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여전히 인간을 재산으로 보는 바로 그 논리가 낡은 틀을 제도 차원에서 처음 흔들어 놓았다. 일단 몰수한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묻기 시작하면 한 가지 사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제 발로 이쪽에 넘어오고, 일하고,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뒤이어 나온 두 차례의 몰수법은 이 변화를 조금씩 제도로 만들었다. 제1차 몰수법은 1861년 8월 6일 법률이 되었다. 반란을 지원하는 데 동원되었다가 도망친 노예들에 대해 남부연합의 주인들이 주장하던 권리를 소멸시켰다. 1862년 7월 17일 발효된 제2차 몰수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란자의 노예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 대통령이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만큼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고용할 권한도 부여했다.
여기서는 이 일의 구조적 의미를 분명히 봐야 한다. 가장 깊은 잔여항이 중심부로 들어온 첫 계기는 도덕적 변화가 아니라 전쟁의 도구적 논리였다. 연방이 노예들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우선 그들이 남부연합의 노동력이자 전쟁 수행 능력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 노동력을 빼앗으면 적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 구축물이 줄곧 피해 온 잔여항에 손을 댄 것은 갑자기 도덕적으로 각성해서가 아니었다. 전쟁이 손을 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손대기 시작한 이상, 일은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6. 노예해방선언이라는 전시 조치
예비 노예해방선언은 앤티텀 전투가 끝난 지 꼭 닷새 뒤인 1862년 9월 22일 발표되었다. 여기서 세 가지 핵심을 함께 짚어야 한다. 첫째, 링컨은 여전히 전쟁의 공식 목표를 헌법에 따른 관계를 실질적으로 회복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둘째, 1863년 1월 1일까지도 반란 중인 주들이 연방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 안의 노예들은 그때부터 영원히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셋째, 그러면서도 접경주에서 보상을 전제로 해방하는 방안과 해외 식민지로 이주·정착시키는 방안을 여전히 문구에 남겨 두었다.
최종 노예해방선언은 1863년 1월 1일 발효되었다. 법적 성격은 더없이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링컨은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상기 반란을 진압하기에 적절하고 필요한 전시 조치로서” 이 명령을 내렸다. 다시 말해 법과 헌법의 차원에서 이 선언은 무엇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반 민사법의 차원에서 전국의 노예제를 없애는 법령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적용 범위가 정밀하게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언은 아칸소, 텍사스, 미시시피 등의 반란 지역을 명시적으로 포함했다. 그러나 루이지애나의 몇몇 패리시(행정구)와 뉴올리언스, 훗날 웨스트버지니아의 일부가 된 48개 카운티, 그리고 이미 연방의 통제 아래 들어온 버지니아의 몇몇 카운티와 도시는 분명히 제외했다. 따라서 이 선언은 접경 노예주들의 노예들을 해방하지 않았다. 이미 연방이 통제하고 있었고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된 남부 지역의 노예들을 즉시 해방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는 말이 효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거듭 이야기한 양면성을 바로 여기서도 함께 붙들어야 한다. 이 선언은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 변화는 보통 세 가지 효과가 겹쳐 나타난 결과로 설명된다. 남부연합의 노동력 기반을 약화시켰고, 연방군의 작전과 모집 논리를 바꾸었으며, 유럽, 특히 영국의 여론에서 ‘이것은 노예제를 둘러싼 전쟁’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그 결과 남부연합을 정식 국가로 승인할 여지는 한층 더 좁아졌다.
노예해방선언이 법적으로 우선 전시 조치였다는 것은 그 효력도 전쟁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전쟁이 끝나 이 권한의 근거가 사라지면, 그것이 가져온 자유도 흔들리는 것 아닐까? 전시의 임시방편이 평화가 찾아온 뒤에도 계속 버틸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이 구축물이 다음으로 맞닥뜨려야 할 질문이었다. 그 답은 수정헌법 제13조에 가서야 주어지게 된다.
7. 해방된 이들이 해방하는 이들이 되다
가장 깊은 잔여항이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나타난 가장 눈에 띄는 제도적 결과 가운데 하나가 흑인의 입대였다. 노예해방선언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미국의 군 복무에 받아들이겠다고 명시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7만 9천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연방 육군에서 복무했다. 해군에서 복무한 약 1만 9천 명까지 합하면 19만 8천 명에 가깝다.
전시 금제품에서 몰수법으로, 다시 노예해방선언과 흑인의 입대로 이어지면서, 원래 재산이라는 이름으로 처리되던 노예들은 연방의 전쟁 수행 능력의 일부로 국가의 중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편입은 더 나아가 훗날 시민 자격을 요구하는 주장과도 맞물렸다. 해방된 이들이 해방하는 이들이 되었고, 흑인 병사들의 참전은 시민의 지위와 정치적 권리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크게 강화했다. 이 시리즈의 가장 깊은 줄기가 처음으로 방향을 뒤집은 순간이다. 앞선 모든 편에서 그 잔여항은 배제되고, 다시 눌리고, 변두리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제 정치공동체 밖으로 밀려났던 이들이 무기를 들고 연방을 위해 싸움으로써, 그 공동체의 중심을 향해 한 걸음씩 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를 매끈한 상승 곡선으로 그려서도 안 된다. 흑인 병사들은 군 안에서 오랫동안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백인 병사보다 급료가 적었고,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그들만이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위험이 기다렸다. 가장 깊은 잔여항은 중심부로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늘 따라다니던 불평등을 짊어지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 말은, 이 흑인 병사들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때조차 그들에게 온전히 이행되지 않았다.
8. 맺으며
1861년부터 1863년까지의 역사를 이 시리즈의 흐름 속에 다시 놓고 보면,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이번 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판단이다. 지키기 위해 다시 쓴다는 것.
이 구축물은 처음으로 갈등을 품는 대신 전쟁을 통해 자신의 존속 가능성에 답했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은 서로 얽히는 두 줄기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시 행정권의 팽창이었다. 이 시리즈에서 끊임없이 커져 온 행정권의 긴 흐름이 전시의 정점까지 밀려 올라갔다. 그렇지만 이 구축물이 그 팽창을 다루는 방식은 모든 견제와 균형을 폐지하는 비상체제로 귀결되지 않았다. 선거는 정상적으로 치러졌고, 의회는 평소처럼 추인했으며, 법원은 여전히 반대했다. 이견을 누르고 체제를 닫아 버리려는 충동은 전쟁 때문에 커졌지만, 끝까지 제도적 형식 안에 묶여 있었다.
다른 한 줄기는 가장 깊은 잔여항이 어떻게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밀려 들어왔는가 하는 것이다. 전시 금제품이라는 재산의 논리에서 두 차례의 몰수법으로, 전시 조치로서의 노예해방선언으로, 마지막에는 흑인의 입대로 이어졌다. 이 구축물이 여러 세대에 걸쳐 피해 온 노예제는 처음으로 전쟁에 떠밀려 연방의 한복판에 놓였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다시 쓰기가 처음부터 도덕적 각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출발점은 전쟁의 도구적 논리였다. 줄곧 외면하던 것에 손을 대도록 등을 떠민 것은 전쟁이었다.
링컨 자신을 평가할 때에도, 노예해방선언을 평가할 때에도 양면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 링컨은 마지못해 나선 해방자였을까, 아니면 확고한 반노예제론자였을까? 역사학에는 적어도 서로 뒤섞어서는 안 될 세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그의 주저함과 보수성을 강조한다. 또 하나는 그가 신중했을 뿐 마지못해 나선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마지막 하나는 그와 공화당 인사들이 처음부터 노예제를 제한하는 일을 연방을 구하는 일의 일부로 여겼다고 강조한다. 이 셋 가운데 하나를 고르기보다, 나란히 놓아 보는 편이 좋다.
다음에 펼쳐질 이야기는 이 전쟁이 어떻게 끝으로 향했는지, 그리고 이 구축물이 전시 조치보다 더 철저한 방식으로 자신과 가장 깊은 잔여항의 관계를 다시 쓰려 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자유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말이 게티즈버그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하나의 헌법 개정은 해방을 전시의 임시방편에서 영구적인 헌법의 원칙으로 바꾸려 할 것이다. 그리고 한 발의 총탄이, 이 모든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때, 여기까지 이끌고 온 그 사람을 맞힐 것이다. 그것이 링컨 이야기의 뒷부분이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