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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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 피어스와 뷰캐넌: 봉합의 역습

문제를 끝내겠다는 결정이 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는가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봉합의 역습

지난 글 말미에서 예고했듯이, 피어스와 뷰캐넌의 이야기는 이렇게 구축된 질서가 내전 직전 마지막으로 봉합을 시도했다가 끝내 실패하는 이야기다. 피어스가 취임한 1853년부터 링컨이 취임한 1861년 3월 4일까지, 이 체제는 위태로나마 작동하던 타협의 질서에서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제도의 붕괴로 걸어 들어갔다.

이 시기의 구조를 꿰뚫는 핵심은 여기에 있다. 노예제라는 잔여항을 품어 두기 위해 동원해 온 장치들, 곧 정당의 중재와 영토를 둘러싼 타협, 주민 주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그저 차례차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잠재우려던 갈등을 더 거세게 만드는 일이 잦았다. 피어스와 뷰캐넌 시대가 지닌 진정한 구조적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타협은 덮어 둔 문제를 다시 열었고, 주민 주권은 그 문제를 무력 대결로 바꾸었으며, 드레드 스콧 판결은 위에서 단번에 끝장을 보려다가 도리어 정치적 폭발을 일으켰다.

여기서 미리 예방주사 하나는 맞고 가자. 역대 대통령 순위를 매기면 피어스와 뷰캐넌은 으레 맨 밑에 놓인다. 그렇다고 이 시기를 유례없이 재앙적이었던 두 인물의 이야기로만 풀어서는 곤란하다. 이때쯤 노예제는 연방의 팽창, 정당 간 경쟁, 헌법 이론과 너무 깊이 얽혀 있었다. 거의 어느 통치 노선을 택하든 연방을 받치는 기둥 하나를 살리려다 다른 기둥을 부숴 버릴 수 있는 지경이었다.

이 시기의 봉합 실패는 앞서 겪은 실패들과 구별해야 한다.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이 폭발을 뒤로 미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잔여항에 명확한 답을 내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 하나를 긋거나 모호함으로 얼버무렸을 뿐,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회피와 지연이었다. 회피로 문제를 풀 수는 없어도 시간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이 8년 동안의 시도는 성격이 달랐다. 주민 주권은 지역의 투표로 명확한 판정을 내리려 했고, 드레드 스콧 판결은 연방대법원의 자리에서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낼 헌법적 답을 주려 했다. 더는 피해 가려 하지 않고 정말로 매듭을 지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흡수할 수 없는 잔여항을 명확하게 종결하려 드는 순간, 양쪽 모두에게 패를 전부 내놓으라고 몰아붙이는 셈이 된다. 회피는 시간을 벌어 주지만, 명확한 답을 강요하면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

2. 캔자스·네브래스카법: 옛 경계선을 허물다

이 체제를 붕괴 쪽으로 돌려세운 입법상의 결정적 전환점은 1854년 5월 30일의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었다. 스티븐 더글러스가 주도하고 피어스가 서명한 이 법은 주민 주권 원칙에 따라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두 준주의 통치 체계를 정하고, 노예제 허용 여부는 정착민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미주리 타협이 고정해 두었던 옛 영토 경계선은 그렇게 다른 원칙으로 대체되었다.

문제를 다시 열어젖힌 이 조치가 정치적으로 그토록 폭발적이었던 까닭은, 미주리의 그 선이 애초부터 영토에 관한 규칙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들을 관리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의회가 그 선을 버리는 순간, 노예제의 확장은 더는 일정한 경계 안에 묶어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시험이었다. 이 체제 안에 모든 당사자가 함께 받아들이는 연방의 규칙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는가?

가장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는 휘그당 연합의 붕괴와 1854년 공화당의 창당이었다. 초기 공화당은 노예제의 즉각 폐지를 주장하는 정당이 아니었다. 출발점에서 중심에 둔 것은 노예제가 준주로 뻗어 나가는 데 대한 반대였다. 1856년 공화당 강령은 미주리 타협 폐지에 반대하고 자유 준주로의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 당을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옛 휘그당원, 자유토지파, 네브래스카법에 반대한 민주당원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역사학자 기냅(Gienapp)의 영향력 있는 연구는 이 정당의 형성이 복잡하고 점진적인 과정이었음을 강조한다. 노예제 반대만이 아니라 민족·문화적 요인과 반이민 토착주의가 교차하며 가한 압력 역시 공화당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이를 이 연재의 틀 안에 다시 놓으면 구조적 의미가 또렷해진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 자체는 봉합의 시도였다. 주민 주권이라는 수단으로 준주의 노예제 문제를 연방 차원에서 털어 내고, 현지 정착민들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넘기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문제를 닫기는커녕 완전히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덤으로, 지난 글에서 다룬 가장 중요한 수용 장치까지 박살 냈다. 지역의 경계를 가로지르던 정당이었다.

3. 피 흘리는 캔자스: 현장에서 무너진 주민 주권

주민 주권은 캔자스에서 현장 시험을 치렀다. 성적은 참담했다.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 정착민들이 이 준주로 몰려들었고, 무장한 미주리인들이 선거에 개입하려고 거듭 경계를 넘었다. 현지 정치는 이내 선거를 통한 보통의 자치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1856년 연방 하원 조사위원회는 이 준주에서 치러진 모든 선거가 미주리에서 조직적으로 넘어온 세력의 침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준주 의회는 불법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한 준주 안에서 서로 맞서는 권력들이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노예제 찬성파가 정부를 세우자, 자유주 수립을 지지하는 정착민들은 토피카에서 별도의 헌법 제정 운동을 조직해 맞섰다. 주민 주권이 낳은 것은 다수의 명확한 판정이 아니었다. 서로 경쟁하며 상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주권들이었다. 뒤이어 폭력이 번졌고, 몇 년이나 이어진 그 싸움은 ‘접경 전쟁’ 또는 ‘피 흘리는 캔자스’라 불리게 되었다.

주민 주권이 실패한 까닭은 그 학설이 추상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우아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성립에 필요한 전제 자체가 없었다. 누구를 유권자로 인정할지에 대한 합의, 정당성을 갖춘 제도, 그리고 패배를 받아들이겠다는 공동의 의지. 캔자스에는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노예제라는 잔여항은 하필 양쪽 모두 패배를 감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진 쪽은 도무지 졌다고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상대의 승리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패배로 여기는 두 진영에게 투표를 맡겨 보라. 얻어지는 것은 판정 하나가 아니다. 서로를 부인하는 두 정부와 현장에서 벌어지는 내전이다.

4. 의사당의 지팡이: 숙의의 붕괴

현장에서 무너진 곳이 캔자스라면, 거의 같은 시기 의회에서는 숙의가 무너지고 있었다. 1856년 5월 22일, 프레스턴 브룩스 하원의원은 상원 본회의장에서 찰스 섬너 상원의원을 지팡이로 구타했다. 섬너는 「캔자스에 대한 범죄」라는 연설에서 캔자스의 투쟁을 노예 소유 세력이 벌이는 더 큰 공세의 증거로 제시했다. 브룩스의 보복은 의회 안의 폭력마저 전국적 위기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이 구조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지역 간 타협의 주 무대였던 기관 안에서, 숙의를 지탱하던 자제력 자체가 무너지는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다툼을 규칙이라는 우리에 가두어 갈등을 품어 왔다. 상원은 그 우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칸이었다. 섬너가 연설로 가한 공격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지만, 그 자체는 온전히 규칙 안의 일이었다. 그러나 브룩스가 지팡이로 응수한 것은 이미 말로 바뀌어 있던 갈등을 다시 노골적인 폭력으로 되돌린 행위였다. 그렇게 뒷걸음질한 대가는 토론 한 번에서 지느냐 이기느냐로 끝나지 않았다. 폭력을 숙의로 바꾸어 내는 장치 자체가 무너졌다.

1856년 대선은 똑같은 붕괴를 정당 정치의 성적표에 새겼다. 뷰캐넌은 선거인단 174표를 얻어 승리했고, 공화당의 프리몬트는 114표를 얻었다. 필모어는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21.6퍼센트를 차지하고도 선거인단은 8표에 그쳤다. 갓 창당한 공화당은 단숨에 북부의 주요 세력이 되었고, 옛 휘그당이 설 자리는 보잘것없을 만큼 쪼그라들었다. 민주당에 뷰캐넌이 특히 쓸모 있었던 이유는 주영 공사로 부임해 국내에 없었던 덕분에,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의 오점을 묻히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5. 드레드 스콧: 위에서 강행한 봉합

이 글의 핵심 주제를 1857년 3월 6일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만큼 정확히 보여 주는 사건은 없다. 연방대법원은 단 하나의 판결로 준주 내 노예제의 헌법적 지위를 한꺼번에 확정하려 했지만, 결과는 갈등의 확대였다. 토니가 대변한 다수의견은 노예로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자유인이든 여전히 노예 상태이든 헌법에서 말하는 ‘시민’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연방 시민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의회에는 연방 준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없으므로 미주리 타협의 그 영토적 제한은 무효이며, 노예에 대한 재산권은 헌법에서 ‘명백하고 분명하게 인정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시민의 자격을 두고 토니는 여기서 대상이 된 사람들이 헌법의 ‘시민’이라는 말에 포함되지 않으며, 애초부터 포함할 의도도 없었다고 썼다. 이로써 이 연재를 가장 깊은 곳에서 관통하는 문제가 눈을 찌를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체제의 가장 깊은 잔여항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나라의 토대를 놓은 문서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써 놓고, 현실에서는 흑인과 여성과 원주민을 배제한 그 간극이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이 배제를 헌법 해석에 직접 새겨 넣었다. 그 대상이 된 사람들은 헌법이 말하는 ‘국민’과 ‘시민’에 애당초 속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포함할 의도도 없었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시민의 자격에서 배제하는 문제를 말할 때, 가장 쉽게 빠뜨리는 한 측면도 여기서 짚어야 한다. 여성에게 시민이라는 신분 자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투표 등 정치적 권리에서의 배제는 시민의 신분과 구별해야 한다. 누가 정치에 참여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다툼에서 양쪽이 암묵적으로 공유한 것은, 정치적 의사결정은 남성의 몫이라는 전제였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인종이라는 축에서 배제를 가장 적나라한 데까지 밀어붙여 전국을 폭발시켰다. 반면 성별이라는 축에서는 정치적 권리에서의 배제가 너무도 당연시되어, 이를 새삼 확인할 판결조차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잔여항의 양면이다. 이미 1848년 세네카폴스 여성권리대회는 그 사실을 꿰뚫어 지적했다. 대회의 선언문은 독립선언문을 직접 고쳐 쓰며, 모든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에서 뷰캐넌의 행보는 결정적이었다. 판결 발표를 이틀 앞둔 1857년 3월 4일 취임사에서 그는 준주의 노예제 문제가 연방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으며, 곧 ‘신속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사법부가 내릴 종국의 답을 공개적으로 예고한 것이다.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뷰캐넌은 판결 전에 대법관들과 접촉했으며 그 목적 중 하나는 더 폭넓은 판결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더 깊은 아이러니는 토니와 뷰캐넌 모두 애초에 이 문제를 정치에서 떼어 놓으려 했다는 데 있다. 뷰캐넌은 연방대법원이 문제를 끝내 주기를 바랐고, 토니 역시 노예제를 민주정치라는 어수선한 경기장 밖으로 옮겨 놓으려 했다. 그러나 판결 뒤에는 오히려 타협이 더 어려워졌다. 공화당원들은 이를 정당한 최종 해결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857년 이후 링컨의 부상도 드레드 스콧 판결에 대한 정치적 반발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사법부의 궤적에서도 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제3편의 마버리 사건은 위헌심사를 확립한 이정표로서 행정부 역시 법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보여 주었다. 다만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명령을 이행하게 만든 사건은 아니었다. 제5편의 우스터 사건에서 잭슨은 처음에는 조지아주에 판결을 따르도록 강제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이겨도 집행의 뒷받침이 없으면 가장 힘없는 이들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드레드 스콧에 이르러서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연방대법원이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권위를 동원해 가장 깊은 잔여항에 관 뚜껑을 덮듯 최종 판정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 잔여항을 봉합하기는커녕 중재자로서 자신의 권위마저 함께 불태워 버렸다. 한쪽 편을 드는 순간, 다른 쪽의 눈에는 더 이상 중재자가 아니라 적수가 된 것이다.

6. 링컨, 더글러스, 브라운: 좁아지는 헌법의 공간

1858년 링컨과 더글러스의 토론은 드레드 스콧 판결 이후의 위기를 전국적 논쟁으로 끌어냈다. 링컨은 「분열된 집」 연설에서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의 연이은 결정들이 노예제를 더욱 전면적으로 헌법의 보장 아래 두는 방향으로 나라를 밀어가고 있다고 논증했다. 프리포트에서 그는 더글러스에게 물었다. 준주가 주로 승격되기 전에도 정착민들이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배제할 수 있는가? 더글러스의 답은 드레드 스콧 판결 뒤에도 주민 주권을 살려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그의 처지만 더 곤란해졌다. 남부 민주당원들은 준주의 노예제를 연방이 명확히 보호해 주기를 갈수록 더 강하게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9년 존 브라운이 하퍼스페리를 습격하면서 위기는 정치의 언어를 넘어 반란에 대한 공포로 번졌다. 브라운과 추종자 21명은 더 광범위한 노예 봉기에 불을 붙이려 연방 무기고를 점거했다. 습격 작전은 약 36시간 만에 좌절되었고, 브라운은 붙잡혀 재판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반응은 지역을 따라 날카롭게 갈렸다. 남부의 많은 백인은 브라운을 보며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악몽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북부의 많은 노예제 폐지론자는 갈수록 그를 순교자로 받들었다.

이 갈림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서 드러난 것은 단순한 정책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폭력 자체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의 양립 불가능성이었다. 한 사람이 순교자인지 테러리스트인지조차 함께 판단할 수 없다면,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그래도 공유하던 틀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 대립은 규칙을 둘러싼 이견을 넘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도덕 세계의 대치가 되었다. 제도 차원의 갈등이 여기서 문명 차원의 갈등으로 바뀌었다.

7. 1860년 대선: 전국 정당 체계의 해체

1860년 대선은 전국 정당 체계가 마침내 해체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후보 진영은 넷이었다. 공화당의 링컨, 민주당의 더글러스, 남부 민주당의 존 브레킨리지, 그리고 입헌연방당의 존 벨. 링컨은 일반 유권자 투표의 39.8퍼센트를 얻어 선거인단 180표를 확보했다.

여기서 가장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은 민주당 자체의 분열이다. 한때 남북을 가로지르던 이 전국 정당마저 끝내 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둘로 갈라졌다. 북부는 더글러스를 지명하고 남부는 따로 브레킨리지를 내세웠다. 제6편에서 따라온 흐름은 여기서 끝에 닿는다. 윌모트 단서가 지역을 아우르는 정당의 해체를 시작했다면, 1860년에는 그 과정이 완결되었다. 진정한 전국 정당은 더 이상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라가 지리적 경계선을 따라 끝까지 쪼개지는 것을 막던 마지막 방어선, 곧 지역의 선을 가로지르는 정당 소속감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 체제가 다툼을 품어 두는 데 쓰던 기계는 이제 산산이 해체되었다.

8. 뷰캐넌이 맞은 탈퇴의 겨울: 헌법의 막다른 골목

링컨이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60년 12월 20일 탈퇴를 선언하며 연방을 떠난 첫 주가 되었다. 나흘 뒤 발표한 선언문은 노예제를 두고 조금도 말을 흐리지 않았다. 노예제를 두지 않은 주들이 노예제에 갈수록 적대적으로 변한다고 비난하고, 도망 노예를 돌려보내는 것과 같은 헌법상의 의무를 북부가 어겼다고 질책했으며, 링컨의 당선을 곧 닥쳐올 반남부 정책과 연결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지도자들은 노예제가 자신들의 탈퇴를 결정한 핵심이라고 제 입으로 온 세계에 선언한 것이다. 1861년 2월에 이르러서는 여섯 주의 대표들이 남부연합 임시헌법을 통과시킨 상태였다.

탈퇴 위기에서 뷰캐넌이 취한 입장은, 헌법 질서가 그 범주로는 더 이상 현실의 사건을 담아내지 못할 때 어떻게 마비되는지를 보여 준다. 1860년 12월 네 번째 연례 교서에서 그는 대통령 선거 한 번의 결과만으로 혁명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의회에는 한 주를 강제로 연방에 복귀시킬 권한이 없다고 논증했다. 의회가 주를 강제로 굴복시킬 권한을 갖고 있는가? 거듭 숙고한 끝에 그가 내놓은 답은 ‘아니오’였다. 탈퇴는 불법이고 강제력은 쓸 수 없다. 이 두 명제의 결합은 뷰캐넌의 마지막 겨울에 행정부가 빠진 무력함을 정확히 짚어 낸다.

그러므로 뷰캐넌의 이른바 나약함을 단순히 겁이 많았다는 말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의 선택들이 위기를 악화시켰음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는 그 연쇄의 맨 끝에 서 있었다. 타협의 공식은 남김없이 소진되었고, 정당의 중재는 무너졌으며, 연방대법원도 중재자의 자격을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헌법의 논리는 안정적인 해결책도, 설득력 있는 강제력 행사 이론도 내놓지 못했다. 이 체제가 다다른 헌법의 막다른 골목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체제 자신의 논리로는 전쟁 말고 자신을 하나로 붙들어 둘 방도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9. 맺음말

피어스와 뷰캐넌의 8년을 이 연재 전체에 다시 놓아 보면,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글을 관통한 하나의 판단이다. 봉합의 역습.

앞선 글들에서 살펴본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은 봉합에 실패했지만, 적어도 폭발을 뒤로 미루는 일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8년 동안 그 잔여항을 품어 두려던 시도는 매번 폭발을 늦추는 대신 앞당겼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주민 주권으로 문제를 다시 열었다가 지역의 경계를 가로지르던 정당을 부숴 버렸다. 피 흘리는 캔자스는 주민 주권이 조직된 파벌들과 맞닥뜨리자마자, 서로 경쟁하는 주권들과 현장의 내전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영원히 문제를 닫아 버리려다가 반대파를 더욱 급진화시키고 대법원 자신의 권위를 불태웠다. 1860년 대선은 더 이상 전국적 중재를 해낼 수 없는 정당 체계를 드러냈다.

이 연이은 실패의 가장 깊은 까닭은 거듭 마주친 바로 그 이치에 있다. 노예제라는 잔여항은 명확하게 긍정할 수도, 명확하게 부정할 수도 없으므로 이 체제가 진정으로 흡수할 수 없다. 딱 잘라 답을 주려 들수록 폭발은 더 거세진다. 동시에 존 브라운의 운명은 그보다 더 깊은 붕괴도 드러냈다. 이때의 미국인들은 노예제에 맞서 폭력을 행사한 한 사람이 순교자인지 테러리스트인지조차 공통의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니면서도 함께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던 틀 자체가 해체되었고, 제도의 갈등은 문명의 갈등으로 바뀌었다.

이제 등장할 시대에 이 체제는 처음으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갈등을 품어 두는 방식이 아니라 전쟁으로 답해야 한다. 가장 깊은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연방을 지키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이 마침내 더 많은 사람에게 현실이 되도록 하려면, 이 체제는 건국 이래 유례없는 강제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이 링컨의 이야기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