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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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밴 뷰런에서 필모어까지 — 절차적 회피의 종말

영토가 움직일 때마다 노예제의 균열도 다시 열렸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1. 절차적 회피의 종말

지난 글 끝에서 말했듯, 미주리에서 처음 그어진 지리적 균열은 병합과 팽창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더 깊이 패여 갈 터였다. 밴 뷰런이 취임한 1837년부터 필모어가 퇴임한 1853년까지, 이 16년의 역사는 절차적 수단으로 아직 비켜 갈 수 있던 틈이 거의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단층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의 구조적 의미는 이렇게 말할 때 가장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전까지 가장 깊은 잔여항인 노예제는 절차적으로 회피하는 방식으로나마 한동안 수용될 수 있었다. 위도선 하나로, 타협 한 차례로, 모호한 문구로 노예제를 일정한 지리적 범위 안에 가두어 두면 전국 정치의 나머지 부분은 평소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16년 동안에는 전국적 규모의 중요한 문제가 거의 모두 같은 물음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은행도, 정당의 조합도, 영토 팽창도, 대외 전쟁도, 새 주의 편입도, 연방법 집행도, 심지어 대통령직 승계도 마찬가지였다. 노예제는 확장될 수 있는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이 연결 고리는 서로 무관한 사건들을 후대 사람들이 억지로 꿰어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한 고리씩 몸소 겪어 나간 순서가 바로 이러했다.

흔히 빠지기 쉬운 서술을 피하려면 여기서 먼저 한 가지 판단을 세워 두어야 한다. 이 역사를 무력한 대통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사이에 가끔 정력적인 팽창주의자 하나가 끼어드는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그들을 옭아맨 제약은 개인의 능력에만 있지 않았다. 갈라진 정당, 상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흥정, 결론 나지 않은 영토의 앞날, 더는 예전의 지리적 경계 안에 얌전히 머물려 하지 않는 노예제 분쟁. 제약은 구조에 있었다. 달리 말해, 이 정치적 구축물이 가장 깊은 잔여항을 수용해 온 낡은 방법들이 하나씩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그전까지 이 구축물이 노예제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공간적 격리 덕분이었다. 노예제를 남부에 가두고, 지리적 경계선 하나로 노예제와 자유의 영역을 갈라 놓는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전제가 있었다. 국경이 더는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축물에는 끊임없이 바깥으로 팽창하게 하는 인력이 작용했고, 팽창은 멈출 수가 없었다. 새로 얻은 땅은 하나같이 따져 물었다. 이곳은 남부인가, 북부인가? 그러면 선을 다시 그어야 했다. 이 16년은 바로 그 내적 모순이 전면적으로 터져 나온 시기였다.

2. 공황, 그리고 무너진 대통령

밴 뷰런의 취임은 미국이 1837년 공황에 빠져든 때와 맞물렸다. 국내외의 여러 압력이 겹치면서 불황이 닥쳤다. 잭슨의 제2합중국은행 해체, 이른바 ‘애완은행’의 활용, 토지 투기의 팽창, 토지 대금을 금·은화로 내도록 한 정화지급령, 영국의 금융 긴축, 미국 은행들의 대출금 회수가 한꺼번에 작용했다.

밴 뷰런이 내놓은 제도적 대응의 핵심은 독립 국고였다. 1840년 마침내 독립국고법이 통과되면서 연방 자금은 상업은행에 맡기는 대신 재무부가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휘그당은 1841년 이 법을 폐지했지만, 1846년 포크 재임기에 독립 국고는 더 오래 지속될 형태로 다시 세워졌다. 금·은화에 기반한 잭슨식 입헌주의가 남긴 제도적 유산 가운데 독립 국고만큼 오래간 것도 드물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금융의 중추를 재건하지 않겠다는 선택이기도 했다. 금융 구조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았다.

그러나 정치인 밴 뷰런은 이 불황에 철저히 무너졌다. 1840년에 이르자 은행은 문을 닫고 예금자는 돈을 잃고 농민은 파산했다. 위기는 의회 내 민주당의 힘을 산산이 부쉈다. 1840년 대선이 유명해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휘그당은 해리슨과 타일러를 후보로 내세우고 통나무집과 사과주를 앞세웠다. 해리슨은 서민의 영웅으로, 밴 뷰런은 귀족 행세를 하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그려졌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꼭 바로잡아야 할 대목이 있다. 이 이미지들은 실제 출신 배경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해리슨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오히려 밴 뷰런이 비교적 한미한 주막집 아들이었다.

3. 타일러 선례: 정당 없는 대통령

1841년 4월 해리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대통령직 승계를 처음으로 실질적인 시험대에 올린 헌법적 난제를 낳았다. 헌법 제2조는 대통령 사망 시 승계 조항의 ‘그것’이 대통령이라는 직위 자체인지, 아니면 그 권한과 직무만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타일러는 더 좁은 쪽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불러야 한다고 고집했고,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호칭을 거부했다. 의회도 뒤이어 그를 대통령으로 지칭하면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른바 ‘타일러 선례’는 헌법의 뜻이 원래부터 명백해서 저절로 효력을 발휘한 결과가 아니었다. 타일러의 주장, 의회의 묵인, 이후 같은 방식이 거듭 반복된 일이 합쳐져 이루어진 제도적 정착이었다. 수정헌법 제25조는 훗날에야 이 해석을 헌법 조문에 명시했다. 앞서 살펴본 대통령의 연임 제한과 마찬가지로 승계 규칙도 선례가 먼저였고 조문이 나중이었다.

하지만 헌법 문제에서 거둔 타일러의 성공이 국정을 운영할 만한 정당 기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본래 민주당원이었던 그는 지역과 계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휘그당의 부통령 후보로 낙점되었다. 취임 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헌과 주의 권리를 이유로 휘그당의 은행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휘그당은 그를 정식으로 제명했다. 타일러의 처지에는 두 얼굴이 있었다. 그는 일관된 국정 의제를 세울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입증했다. 정당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도 거부권으로 의회 다수파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잭슨이 대폭 확장해 놓은 거부권은 이제 대통령에게 정당이 없어도 여전히 쓸 수 있는 무기가 되어 있었다.

4. 명백한 운명과 팽창의 인력

텍사스 병합은 포크가 취임하기도 전에 영토와 노예제의 문제를 다시 열어젖혔다. 타일러는 1844년 병합 협상을 재개했으나 상원에서 3분의 2의 찬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자 퇴임을 얼마 앞두고 방식을 합동결의로 바꾸었다. 이 방식에는 상·하원 각각의 단순 과반만 필요했다. 대통령 당선인 포크의 지지를 받은 텍사스는 1845년 12월 노예주로 연방에 들어왔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편집인 존 오설리번은 1845년 텍사스 병합을 주장하는 글에서 미국이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가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명백한 운명이라고 썼다. 이 수사는 섭리를 말하는 언어, 인구 증가에 대한 자신감, 유럽에 맞선다는 의식, 이주하고 정착함으로써 정치적 권리를 얻는다는 이론을 한데 녹여 냈다. 동시에 멕시코의 주권과 원주민들의 정치체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최근의 연구와 공공역사는 정복, 인종적 위계, 원주민에 대한 수탈, 그리고 멕시코인과 원주민족을 정치적 행위자의 자리에서 지워 버린 일을 더 강조한다. 변경사 연구가 지적하는 문제도 있다. 워싱턴과 멕시코시티 사이에서만 전개되는 국가 대 국가의 서사는 멕시코 북부의 광대한 땅을 지배하던 코만치, 아파치, 나바호 같은 강력한 원주민 세력들이 들어설 개념적 자리를 너무 좁게 남겨 놓는다는 것이다.

포크는 영국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려 했지만, 한층 강경한 위협은 멕시코를 향했다. 1846년 오리건 조약은 결국 구호로 외치던 북위 54도 40분이 아니라 북위 49도선을 경계로 삼았다. 팽창의 인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유의 영토 확대와 멕시코인·원주민에 대한 정복 및 수탈은 하나의 팽창 행위가 지닌 두 얼굴이었다. 그리고 바깥으로 한 번 뻗어 나갈 때마다 노예제라는 잔여항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5. 멕시코 전쟁과 중심으로 돌아온 노예제

병합 뒤 포크는 누에세스강과 리오그란데강 사이의 영유권 분쟁 지역에 군대를 보냈다. 또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사들이는 협상을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협상 임무가 실패로 끝나고 유혈 충돌이 벌어지자, 그는 피가 흘렀다는 소식으로 의회의 전쟁 지지를 끌어내려 했다. 이 점만큼은 분명히 써 두어야 한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영유권을 다투던 땅이었다. 미국 영토라는 데 아무 이견도 없는 땅이 아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지점 결의안’은 휘그당의 헌법적 논점을 이례적일 만큼 정확하게 짚었다. 그는 포크에게 미국 시민의 피가 흘렀다는 바로 그 지점을 특정하고, 그곳이 스페인이나 멕시코의 영토였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링컨이 겨눈 것은 정치적으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포크의 공식, ‘미국의 피가 미국 땅에 흘렀다’는 주장이었다. 행정부가 영유권 분쟁 중인 변경에 군대를 들여보낸 뒤 그로 인해 벌어진 충돌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 변경이 곧바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자국 영토가 될 수는 없다.

워싱턴이 선례에 기대고, 제퍼슨이 기정사실의 인력에 기대고, 포크가 국경 충돌을 이용해 전쟁을 시작하기까지, 외교와 전쟁에서 대통령이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조금씩 넓어져 왔다. 이번에 포크는 특히 멀리 나아갔다.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개전의 조건을 거의 제 손으로 만들어 냈다고 할 만했다. 링컨의 지점 결의안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수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행정부의 전쟁 권한을 둘러싼 이 잔여항은 당시에 해결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훗날의 전쟁들에서도 거듭 되살아날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었다. 멕시코는 약 52만 5,000제곱마일의 땅을 할양했다. 텍사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까지 포기한 것을 합치면, 그전까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던 지역의 약 55%를 잃은 셈이었다.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뉴멕시코, 애리조나, 콜로라도 등 여러 주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괄하는 땅이었다. 그리고 이 영토는 곧바로 노예제 문제를 전국 정치의 한복판으로 밀어 올렸다.

6. 윌모트 단서 조항: 낡은 정당 체제는 더 담아낼 수 없었다

전쟁의 정치를 지역의 정치로 돌려놓은 결정적 축은 윌모트 단서 조항이었다. 1846년 8월 데이비드 윌모트는 전쟁 예산 법안에 간단한 제한 조항 하나를 덧붙이자고 제안했다. 멕시코에서 얻는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자는 것이었다. 이 조항은 끝내 법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바로 그 실패에 있었다.

이 제안이 나온 순간부터 영토를 얻는 일은 더 이상 노예제 확장 문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전국 정당들도 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찢어지기 시작했다. 북부 민주당원과 북부 휘그당원은 이 조항을 지지하기 위해 손을 잡고 남부의 저항에 맞설 수 있었다. 이 조항은 기존 정당 체제에서 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맺어진 연합이 노예제라는 의제를 더는 안정적으로 흡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이 글의 틀에서 이 사건의 무게는 대단히 크다. 이 구축물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교차하는 정파적 갈등이었다. 견해에 따라 사람들을 여러 집단으로 나누되, 그 분할선들이 서로 교차하고 특정한 땅의 경계와 겹치지는 않는 갈등이었다. 반면 지리적 경계선을 따라 나라를 두 동강 내는 갈등은 수용할 수 없었다. 윌모트 단서 조항이 드러낸 것은, 이 구축물이 원래 갈등을 수용하는 데 쓰던 기계, 곧 지역을 가로질러 조직된 정당에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노예제 확장 문제가 같은 당의 북부인과 남부인을 갈라놓고 정당 자체를 그 지리적 경계선을 따라 찢기 시작하자, 갈등을 받아 내던 통로마저 지리적 구획과 포개지기 시작했다. 지난 글에서 우려했던 가장 위험한 상황이 처음으로 전국 정당 차원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7. 1850년 타협: 모호함으로 시간 벌기

곧 캘리포니아가 영토 문제를 당장 눈앞의 위기로 몰아갔다. 1848년 1월 금이 발견되자 이주민이 밀려들었고, 캘리포니아는 빠르게 주가 되는 길로 들어섰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자유주 헌법을 마련해 연방에 가입하려 했다. 이는 미주리 때부터 유지되어 온 상원 내 자유주와 노예주의 균형을 위협했다.

1850년 타협은 하나의 법률이 아니라 다섯 법률로 이루어졌다.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가입했고, 유타와 뉴멕시코에는 준주 정부가 들어섰으며, 텍사스의 경계가 확정되었다. 워싱턴 D.C.에서는 노예 매매가 폐지되었고, 의회는 한층 가혹한 도망노예법도 통과시켰다. 타협을 통한 수습에 먼저 나선 것은 클레이였다. 하지만 상원이 일괄 법안을 부결하자 스티븐 더글러스가 이를 분리해 각 법안을 하나씩 통과시켰다. 재커리 테일러는 생전에 이 방안에 반대했다. 뒤를 이어 취임한 필모어는 지지로 돌아서서 이 법률들에 서명했다.

여기서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분명히 바로잡아 두어야 할 대목이 있다. 뉴멕시코와 유타에 관한 타협의 문구는 의도적으로 모호했다. 두 준주를 설치하면서 연방 차원에서 노예제를 명시적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두지 않았다. 대신 문제를 뒤로 미루고, 노예제의 앞날을 이후 준주와 주의 정치에 맡겼다. 원칙에 따라 결론을 내기보다는 모호하게 남겨 두어 시간을 버는 것. 이것이 이 타협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1850년 타협은 흡수할 수 없는 잔여항을 닫아 버리려다 실패한 가장 선명한 사례였다. 미주리에서는 분명한 지리적 선을 그었고, 1850년에는 의도적인 모호함을 택했다. 하나는 명확함을, 다른 하나는 모호함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두 방법은 정반대로 보인다. 그러나 운명은 같았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잔여항을 명료한 선 하나로 누르든, 일부러 뭉뚱그린 모호함으로 누르든, 끝내 눌러 둘 수 없었다.

8. 도망노예법: 노예제의 강제 집행 기구를 전국으로

타협에서 가장 폭발적인 부분은 1850년 도망노예법이었다. 이 법은 노예 반환을 청구하는 쪽의 선서 증언만으로 법 집행관이 도망자로 지목된 사람을 체포하도록 했다. 심리를 맡은 위원에게 지급하는 보수도 달랐다. 청구인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면 10달러,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5달러뿐이었다. 체포를 방해하거나 도망자를 숨겨 주는 사람은 누구든 최고 1,000달러의 벌금과 최대 6개월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도망자로 지목된 사람에게서는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빼앗았고, 자신을 위해 증언하는 것도 금지했다.

바로 이 법이 이 글에서 진정한 구조적 전환점을 이룬다. 헌법의 도망노예 조항과 1793년 법에도 주 경계를 넘는 추적과 반환 제도는 이미 있었다. 1850년 법은 이를 맡는 연방의 강제 집행 기구를 대폭 강화하고 전국에 더 깊이 침투시켰다. 그전까지 많은 북부인은 노예제를 남부에서 벌어지는,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노예제는 자기 동네에서 연방의 힘으로 강제 집행되는 일이 되었다. 이 구축물이 노예제라는 잔여항을 수용하던 옛 방식의 핵심은 그것을 특정 지역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도망노예법은 바로 그 공간적 격리 방식을 무너뜨렸다. 가장 깊은 잔여항은 기존의 심리적 울타리를 더욱 거세게 뚫고 나와, 전국적인 강제 집행을 피부에 와닿는 현실로 만들었다.

도망노예법은 북부의 평범한 사람 한 명 한 명에게도 그 잔여항을 두고 개인적인 선택을 내리도록 강요했다. 그전의 공간적 격리는 법의 공백이 아니라, 많은 북부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덕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느끼던 상태였다. 도망노예법은 그 거리를 없앴다. 협조하든, 방관하든, 저항하든, 어느 쪽을 택해도 이미 그 일에 얽혀 있었다. 가장 깊은 잔여항이 자신을 가두어 둔 지리적 범위를 벗어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멀리서 지켜볼 수 있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눈앞에 들이닥쳐 입장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일이 된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은 1851년부터 1852년까지 먼저 연재되었고, 1852년 단행본으로 나와 첫해에만 약 30만 부가 팔렸다. 그 규모와 반향에는 이견이 없다. 소설은 대중적인 반노예제 열풍을 일으켰고, 공적 논의를 격화하는 동시에 지역 간 양극화도 심화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쓰인 계기는 도망노예법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그 법이 일으킨 도덕적 충격을 수백만 사람이 함께 겪는 독서 경험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9. 맺음말

밴 뷰런에서 필모어까지의 이 16년을 연작 전체의 흐름 속에 다시 놓아 보면,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전환이다. 가장 깊은 잔여항인 노예제가 절차적 회피라는 그릇을 벗어났다.

팽창의 인력은 그 잔여항을 거듭 되살렸다. 텍사스에서 멕시코 할양지까지, 새로 얻는 땅마다 곧바로 그것을 다시 한복판으로 밀어 올렸다. 갈등을 수용하던 정당이라는 기계는 지리적 경계선을 따라 갈라지기 시작했다. 윌모트 단서 조항은 기존 정당이 지역을 가로질러 맺어 온 연합이 더 이상 그 잔여항을 담아낼 수 없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1850년 도망노예법은 그것을 남부에 격리해 두던 공간적 방식을 무너뜨리고, 노예제의 강제 집행 기구를 북부의 모든 공동체 안으로 뻗어 넣었다.

그 사이 이루어진 여러 타협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길은, 흡수할 수 없는 잔여항을 닫아 버리려다가 번번이 실패한 시도로 보는 것이다. 미주리는 위도선 하나를, 1850년은 모호한 법률들을 동원했지만 방법은 같았다. 공간과 절차를 배치해, 서로 다른 두 면이 한 몸을 이룬 것을 잠시 눌러 두려 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단기적으로는 열기를 식혔다. 그러나 중기적으로는 도덕과 헌법을 건 판돈을 더 높였다. 그 잔여항은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를 때마다 그저 뒤로 밀려날 뿐이었고, 동시에 되밀고 올라오는 힘은 더 커졌다.

이제 이어지는 시대에는 이 구축물의 수용 능력이 완전히 작동을 멈춘다. 주민 자결로 영토 문제를 풀려는 새 법 하나가 캔자스를 유혈의 전장으로 바꿀 것이다. 노예제 문제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려는 대법원의 판결은 이 구축물을 파열 직전까지 밀어붙일 것이다. 그것은 피어스와 뷰캐넌의 이야기다. 그리고 남북전쟁을 앞두고 이 구축물이 마지막으로, 헛되이 자신을 닫아 보려 한 이야기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