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 미국 대통령 연작
착구주기율 · 미국 대통령 연작
05 / 26

제5편: 존 퀸시 애덤스와 잭슨 — 포용과 추방은 동시에 일어난다

민주주의의 문이 넓어질 때 그 경계도 더 날카롭게 그어졌다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앞선 글의 끝에서 던져 둔 판단을 이제 정면으로 펼쳐 볼 차례다. 1825년부터 1837년까지의 역사는 매끄러운 진보의 이야기로 풀어내기 쉽다. 재산 요건이 사라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선거권을 얻고, 미국은 한 걸음씩 더 민주적인 나라가 되어 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는 바로 그때 벌어지고 있던 나머지 절반이 빠져 있다. 백인 남성의 선거권이 크게 넓어지던 바로 그 시기에, 남동부의 여러 원주민 민족은 대규모로 고향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여러 주에서는 오히려 자유 흑인의 선거권이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졌다. 먼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중에 배제가 뒤따랐다는 식의 일직선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확대와 그 경계에서의 배제는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들의 손으로, 함께 이루어졌다.

이 시기를 연작 전체의 흐름 속에 놓으면 동시에 올라가는 세 개의 선이 보인다. 첫째는 포용이다. 더 많은 백인 남성이 유권자 공동체에 들어왔고, 후보와 정당은 이들을 직접 찾아가 지지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 정치 세력을 하나로 묶는 일은 더 이상 의원들끼리 모이는 소규모 회합에 주로 의존할 수 없었다. 둘째는 추방이다. 남동부의 여러 원주민 민족은 자신들의 땅에서 정치 공동체로 존속할 조건을 빼앗겼다. 조약과 강압, 기만과 폭력, 행정 집행을 결합한 힘이 이들을 미시시피강 너머로 밀어냈다. 셋째는 대통령 권력의 확대다. 잭슨은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며 의회와 은행, 일부 엘리트에 맞서는 한편, 거의 쓰이지 않던 거부권의 성격을 바꾸었다. 주로 합헌성 여부를 따지던 도구가 자주 휘두르는 무기, 정책 판단까지 담는 무기가 된 것이다.

이 동시성은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인 까닭이 있다. 정치 공동체는 자신의 경계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경계의 또 다른 이름은 배제다. 그러니 공동체가 더 많은 사람을 안으로 받아들이기로 할 때, 밖에 남겨 둘 사람이 누구인지도 더 뚜렷하게 정하게 된다. 한 겹 더 들어가 보면,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느끼는 평등은 바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과의 대비를 통해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백인 남성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평등,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더 이상 서열을 매기지 않는 평등은 상당 부분 더 단단해진 인종적 경계선을 배경으로 삼았다. 재산의 문턱은 허물었지만 피부색의 문턱은 더 높이 쌓았다. 다시 말해, 확대된 평등과 강화된 배제는 어쩌다 동시에 벌어진 두 사건이 아니다. 둘은 구조적으로 서로를 떠받쳤고, 앞의 것이 실현되려면 뒤의 것이 존재해야 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 글에서 포용과 추방을 나란히 놓인 두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행위가 지닌 양면으로 다루는 이유다.

1. 논란 속에서 탄생한 대통령

이 시대는 논란에 휩싸인 대통령 선거로 시작되었다. 1824년 대선은 낡은 규칙은 작동하지 않고 새 규칙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선거의 전형이었다. 주요 후보 네 사람, 앤드루 잭슨, 존 퀸시 애덤스, 윌리엄 크로퍼드, 헨리 클레이는 모두 분열 중인 하나의 정치적 전통에서 나왔다. 공식 선거인단 투표 결과는 잭슨 99표, 애덤스 84표, 크로퍼드 41표, 클레이 37표였다. 총 261표에서 과반은 131표였으므로 당선자는 없었다. 수정헌법 제12조에 따라 결정권은 하원으로 넘어갔고, 하원은 득표 상위 세 명 가운데 대통령을 골라야 했다.

이 선거가 제도사에서 중요한 까닭은 대통령 선출이 하원의 결선 투표로 넘어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 방식 자체가 빠르게 바뀌는 길목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1824년에는 이미 18개 주가 유권자 투표로 대통령 선거인을 정했고, 주의회가 선거인을 지명하는 곳은 6개 주만 남아 있었다. 유권자 투표를 실시한 18개 주에서 잭슨은 약 15만 3천 표, 애덤스는 약 11만 4천 표를 얻었다. 다만 여기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1824년에는 전국을 통틀어 표준화된 방식으로 일반 유권자의 표를 집계하는 체계가 없었다. 따라서 훗날의 의미를 그대로 가져와 “전국 유권자 투표에서는 이겼지만 대통령직은 잃었다”고 설명하려면 그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1825년 2월 9일, 하원은 주별 대표단에 한 표씩을 주어 투표했다. 첫 투표에서 애덤스가 13개 주 대표단의 지지를 얻었고 잭슨은 7개, 크로퍼드는 4개를 얻어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곧이어 애덤스는 헨리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클레이 자신은 상위 세 명에 들지 못해 하원이 선택할 수 있는 후보에서 빠졌지만, 하원의장으로서 그 투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 인사는 즉각 “추악한 거래”라는 비난에 불을 붙였다. 잭슨 진영은 분노하며 클레이를 “서부의 유다”라고 불렀고, 거래 한 건에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여겼다. 오늘날의 역사학에서는 법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밀실 거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대체로 본다. 그러나 “추악한 거래”라는 이야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825년부터 1828년까지 잭슨파가 지지자를 계속 동원하고 정당을 재편하는 데 쓰인 핵심 자원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존 퀸시 애덤스는 출발부터 정당성의 적자를 짊어졌다. 현대 연구가 내리는 평가는 간명하다. 경력과 자격은 흠잡기 어려웠지만, 정치가 이제 막 정말 중요해지기 시작한 시대에 정작 정치에는 서툰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실패의 주된 원인은 좁은 안목이 아니었다. 1824년 선거가 이미 그의 입지를 약화시킨 데다, 다른 사람들이 익혀 가던 새로운 정당 투쟁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그를 과도기의 대통령으로 보는 것은 대체로 현재의 연구와 부합한다. 그가 제시한 것은 국가의 역할을 강하게 내세우고, 기반 시설과 지식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제도 환경은 대중 정치, 후보 개인 중심의 정치, 조직화된 정당 간 투쟁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2. 과도기의 대통령과 1828년의 재편

애덤스의 구상은 사실 조금도 보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원대했다. 그는 사회적 여건을 개선할 사업과 기관에 연방정부가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도로와 운하, 항구와 다리를 건설하고 과학과 교육을 지원하려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던 대통령이 아니라, 하려는 일은 컸으나 이를 뒷받침할 정치 연합이 약했던 대통령이다. 계획이 없어서 좌절한 것이 아니다. 그 계획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만큼 강한 정치 조직이 없었다. 더구나 잭슨 진영은 취임 첫날부터 그를 1828년에 몰아내야 할 임시 자리 차지꾼으로 취급했다.

이 글의 구조에서 보면 애덤스의 처지가 흥미롭다. 그가 대표한 것은 낡은 정치 방식이었다. 학식과 경력, 엘리트 사이의 협상에 의지하는 명사층의 국가주의였다. 그가 부딪힌 것은 막 모습을 갖추던 새로운 세계였다. 정당 조직과 대중 동원, 후보 개인의 호소력으로 움직이는 세계다. 능력이 모자라서 패한 것이 아니다. 새 규칙으로 싸울 마음도 없었고, 그런 싸움에 능하지도 않았다. 이 구축 체계의 규칙이 다시 쓰이고 있었고, 애덤스는 바로 그 변화가 뒤에 남겨 놓은 사람이었다.

1828년 대선은 1824년의 울분을 제도적 재편으로 바꾸어 놓았다. 잭슨은 선거인단 178표와 일반 유권자 약 64만 표를 얻었고, 애덤스는 선거인단 83표와 일반 유권자 약 50만 표를 얻었다. 이 선거는 미국 초기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진흙탕 선거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잭슨의 결혼, 결투 전력, 난폭한 성격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특히 아내 레이철을 향한 공격은 잔혹했다. 전남편과의 이혼 절차가 언제 마무리되었는지를 물고 늘어지며 그녀를 중혼자이자 간통한 여성으로 몰아갔다. 훗날 잭슨은 아내의 죽음을 1828년 선거에서 그녀에게 쏟아진 공격과 연결 지었다.

승리한 뒤 잭슨은 곧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수성가형이라고 할 첫 대통령이었고, 서부 출신의 첫 대통령이었다. 취임하자마자 대통령을 행정의 최고 관리자가 아니라 국민의 대변자로 빠르게 바꾸어 놓았다. 국민에게서 직접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주장을 앞세워 의회와 협력할 수도, 맞설 수도 있는 자리로 만든 것이다. 1829년 취임식에는 수많은 지지자가 수도로 몰려들었다. 보수적인 비판자들은 그 광경을 무질서의 도가니라고 묘사했지만, 지지자들은 정부가 국민에게 문을 활짝 연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3. 백인 남성 민주주의의 확대와 인종적 경계

선거 참여만 놓고 보면 잭슨 시대는 분명 미국 민주주의가 확대된 중요한 시기였다. 1812년 전쟁 이후 각 주는 헌법 개정과 입법을 통해 전통적인 선거권의 재산 요건을 차츰 없앴다. 더 많은 주 공직과 대통령 선거인을 유권자의 투표로 뽑기 시작했다. 재산이 없어도 투표할 권리는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이 시대의 중요한 정치적 요구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의 확대에는 반드시 정확한 단서를 달아야 한다. 직접적인 수혜자는 주로 백인 남성이었다. 최근 수십 년간 기존 해석을 수정해 온 역사학은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백인 유권자가 늘어난 것과 흑인 유권자가 권리를 빼앗긴 것은 유권자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한 과정의 양면이었다. 남북전쟁 직전 30년 동안 백인 남성의 투표권은 전반적으로 넓어졌지만, 동시에 인종에 따른 선거 자격도 법률과 주 헌법에 더욱 명시적으로 들어갔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40년 무렵에는 미국의 그리 크지 않은 자유 흑인 집단 가운데 약 93퍼센트가 선거 자격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펜실베이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등은 1830년대에 자유 흑인의 투표권을 한층 더 제한했다. 이 자료들은 중요하다. 잭슨식 민주주의를 곧바로 민주적 진보와 동일시하는, 지나치게 매끄러운 옛 이야기를 바로잡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잭슨 시대는 백인 남성의 대중 정치를 전진시키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경계를 인종에 따라 긋는 경향을 강화했다.

유권자층의 확대는 정치를 조직하는 방식 자체도 바꾸었다. 1824년 선거는 의회 안의 정당 의원 모임이 후보를 정하던 낡은 방식이 대중 정치 앞에서 힘을 잃었음을 이미 드러냈다. 1828년에 이르면 잭슨과 밴 뷰런을 중심으로 구축된 전국적 동원망이 애덤스 진영보다 새로운 환경에 훨씬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정당은 의회 안의 느슨한 연합에 머물지 않고 본격적인 유권자 동원 기구가 되기 시작했다. 규율은 더 강해지고 지역 신문망은 더 넓어졌으며, 인사와 선전, 상징을 통해 유권자를 하나로 묶는 능력도 커졌다.

4. 추방의 제도화와 원주민 이주

민주주의가 포용하는 쪽을 넓혀 가던 바로 그때, 추방하는 쪽도 제도화되고 있었다. 1830년의 인디언 이주법은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엄중하게 다루어야 할 법률 가운데 하나다. 정식 명칭은 각 주와 준주에 거주하는 인디언들과 토지를 교환하고 이들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법률이라는 뜻이었다. 대통령에게 강 서쪽의 구역을 지정하여 동부 부족들의 땅과 교환할 권한을 주었다. 법문은 “교환과 이주를 선택하는 부족” 같은 표현을 거듭 써서 겉으로는 선택의 언어를 남겨 두었다. 이주와 정착, 1년간의 생계 지원을 제공할 권한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법 제정 뒤 실제로 이주가 추진된 방식은 조약과 강압, 뇌물과 위협이었으며, 기존 조약과 사법 판결을 어기는 일도 적지 않았다. 법률 속 선택의 언어가 현실의 강제성을 없애 주지는 않았다.

이 법안은 의회에서 아슬아슬하게 통과되었다. 상원에서는 28 대 19, 하원에서는 102 대 97이었다. 잭슨은 1830년 5월 28일 서명해 법으로 확정했다. 이처럼 근소한 표 차이는 당시에도 이것이 논란 없는 합의 정책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선교사들의 연대망, 제러마이아 에바츠를 비롯한 반대자들, 그리고 프렐링하이슨과 헨리 클레이, 데이비 크로켓 같은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주의 규모는 하나의 숫자로 억지로 합치기보다 집계 범위를 나누어 말하는 편이 낫다. 잭슨 재임 기간만 보면 정부는 70건에 가까운 이주 조약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동부 원주민 약 5만 명이 인디언 준주로 옮겨졌다. 1830년부터 1850년까지 이주 시대 전체를 보면 조약과 기만, 협박과 폭력으로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이주를 강요받은 사람은 약 10만 명이었다. 흔히 다섯 부족이라 부르는 집단은 체로키, 크리크, 촉토, 치카소, 세미놀이다. 체로키의 경우 약 1만 6천 명이 이주당했고 사망자는 약 2천 명에서 4천 명 사이라고 말하는 것이 비교적 신중한 표현이다. 일부 기관과 체로키의 전통적 기억에서 널리 쓰는 집계로는 약 4천 명이라고 하며, 체로키 자체의 일부 집계는 그보다 높다.

어느 집계 기준을 따르든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무겁다. 이것은 법률이라는 외피로 감싼 국가적 추방 사업이었다. 한 민족이 대대로 살아온 땅을 강제로 떠나야 했고, 이동 도중 수천 명이 죽어 갔으며, 이미 맺어 놓은 숱한 조약이 깨졌다. 이 모든 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민주주의를 넓혔다고 자부하던 바로 그 시대에, 바로 그 사람들의 주도로 벌어졌다.

사법의 흐름을 따라가면 이 사건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1832년 마셜 연방대법원장은 우스터 대 조지아 사건에서 대법원을 대표해 판결했다. 체로키는 독립된 정치 공동체이며 조지아주의 법은 체로키 영토에 적용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주가 체로키라는 정치 공동체 위에 일방적으로 자신의 관할권을 덮어씌울 수는 없었다. 명백한 법정 승리였다. 하지만 조지아주는 판결 이행을 거부했고, 주지사는 공개적으로 맞섰다. 잭슨은 처음에는 조지아주가 판결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일을 앞선 글들과 나란히 놓아 보면 이 구축 체계의 불안한 한계가 드러난다. 제3편에서 살펴본 마버리 사건은 위헌법률심사의 중요한 선례를 확립했다. 다만 행정부에 임명장 교부를 강제한 판결은 아니었다. 헌법이 권력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드러낸 것이므로, 행정부에 명령을 실제로 집행하게 한 성공 사례와는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체로키의 경우에는 똑같이 대법원이 원주민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어도 결과가 달랐다. 대통령이 처음에는 조지아주가 판결에 따르도록 강제하지 않고 대다수 백인 유권자마저 추방을 지지하자 법정에서 얻은 승리는 아무 효력도 내지 못했다. 이는 이 구축 체계의 견제와 균형이 각 권력 기관이 서로를 진지하게 견제하고 또 서로 협력할 때에만 작동한다는 뜻이다. 행정부가 사법 판단의 실효성을 뒷받침하지 않고, 입법부가 개입하려 하지 않으며, 민의마저 배제당한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서 압박한다면 종이 위의 승소는 정치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 이 구축 체계는 투쟁을 규칙이라는 우리에 가둘 수 있었지만, 그 안의 규칙이 언제나 가장 약한 이들의 편에 서리라는 보장은 하지 못했다. 이미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견제와 균형의 고장은 흔히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5. 국민의 대표가 된 대통령

잭슨 시대의 또 다른 핵심은 대통령 권력이 처음으로 체계적이고 강도 높게 재정의되었다는 점이다. 견제받도록 설계된 자리가 왜 거듭 팽창하는가. 이 연작을 관통하는 그 질문이 처음으로 하나의 정점에 이르는 시기다.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지표는 거부권을 사용한 횟수다. 잭슨은 재임 중 모두 12번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이전 대통령들을 전부 합쳐도 10번뿐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는 한 번도 쓰지 않았고, 먼로는 1번, 매디슨은 7번, 워싱턴은 2번 썼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횟수보다 성격에 있었다. 잭슨 이전의 거부권은 대체로 합헌성에 대한 이의 제기에 근거했다. 대통령이 하는 말은 “내가 보기에 이 법은 위헌이다”였다. 반면 잭슨은 1832년 합중국은행의 인가 연장 법안을 거부하면서 정치적·경제적·도덕적 이유와 헌법적 이유를 함께 내세웠다. 이제 대통령은 위헌이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이 법은 불공정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국민에게 해를 끼치고 특권을 편들기 때문에, 의회가 통과시켰어도 거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거부권이 헌법적 도구에서 정책적 도구로 바뀌는 역사적 전환이었다.

1832년 7월 10일의 은행 법안 거부권 교서는 이 전환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문서다. 잭슨은 먼저 이 국책은행이 여러 면에서 정부에 편의를 주고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곧바로 은행의 일부 권한과 특권이 헌법을 위반하고 각 주의 권리를 무너뜨리고 국민의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고 단언했다. 나아가 그는 이 은행을 시장을 독점하고 정부의 편애를 누리도록 인가받은 독점체로 묘사했다. 인가를 연장하면 기존 주주들에게 다시 수백만 달러를 선물하게 되는데, 그 주주 가운데 상당수는 외국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은행이 대변하는 것은 보통 국민이 아니라 가장 부유한 계층의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이 논증은 순수한 법률 기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섰다. 대통령을 곧바로 국민의 편에서 특권과 맞서는 자리에 세웠다.

이렇게 잭슨은 대통령의 새로운 언어와 실천을 만들어 냈다. 대통령은 의회가 합헌적인 법안을 보내 주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전국의 국민을 직접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정책의 방향 자체를 판단했다. 그는 대통령을 행정의 최고 관리자에서 국민의 대변자로 바꾸었고, 입법부의 우위를 존중하며 오랫동안 스스로를 억제해 온 행정부의 태도를 뒤집었다.

이 새로운 연료는 선례나 중력보다 훨씬 거셌고, 다루기도 더 어려웠다. 선례를 통해 권한이 커질 때 늘어나는 것은 관행이다. 기정사실을 통해 커질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은 현실의 무게다. 둘 다 아직 제도 안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국민의 직접적인 위임을 내세우면 대통령은 다른 권력 기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정당성을 얻는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의회는 저마다의 선거구에서 따로 뽑힌 의원들의 모임이지만 나는 온 국민이 함께 뽑았으니, 나와 의회 가운데 국민 전체의 의지를 더 잘 대표하는 쪽은 나라고. 이 논리가 성립하는 순간 대통령은 입법부 위에 올라설 수 있는 말의 지렛대를 갖게 된다. 잭슨 시대에 처음 놓인 그 받침점은, 일단 놓이고 나자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6. 은행 전쟁과 연방법 무효화 위기

잭슨주의가 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닌지 분명히 보려면, 은행 전쟁과 연방법 무효화 위기를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은행 전쟁은 잭슨의 권력 확대가 가장 잘 알려진 영역 가운데 하나다. 제2합중국은행의 인가 만료는 원래 1836년이었다. 그러나 헨리 클레이와 은행 총재 니컬러스 비들은 1832년에 미리 인가 연장을 추진하려 했다. 은행 문제를 대선 쟁점으로 만들어 잭슨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려는 계산이었다. 서명하면 은행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의 분노를 사고, 거부하면 재계와 온건파의 분노를 사게 만드는 것이다. 잭슨은 거부를 택했고, 이를 특권과 부패를 때리는 조치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재선 뒤 싸움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연방정부의 예금이 국책은행에서 여러 주 은행으로 옮겨졌다. 당시 정치권은 이 은행들을 “애완 은행”이라고 불렀다. 1833년 말까지 예금 대부분이 빠져나갔고 은행은 빠르게 위축되었다. 비들은 신용 공급을 줄이고 대출금 상환을 독촉하여 경제적 불만을 일으킨 뒤, 이를 이용해 잭슨의 양보를 끌어내려 했다. 예금을 빼낸 조치는 1834년 상원의 공식 견책으로도 이어졌다. 반대자들은 잭슨이 재무부와 국고에 대해 대통령에게 속하지 않는 권한을 제멋대로 행사했다고 보았다.

은행 전쟁의 결과를 두고는 오랫동안 두 가지 해석이 확고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둘을 함께 놓고 보는 편이 좋다. 첫째는 반특권적 민중주의의 해석이다. 잭슨은 반관영 성격과 사적 특권을 함께 지니고 정계와 재계의 인맥에 깊이 얽혀 있던 기관을 공격하여, 다수의 백인 유권자를 위해 금융 귀족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도의 안정성에 초점을 맞춘 금융사적 해석이다. 제2합중국은행은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현대 중앙은행의 기능을 일부 수행하고 있었다. 이 은행이 무너진 뒤 미국의 금융 제도는 주 은행에 더 의존하고 더 잘게 쪼개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거듭된 금융 불안과 은행 공황도 이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 독자를 대신해 미리 판결을 내려 줄 필요는 없다.

은행 전쟁이 엘리트의 특권에 맞서는 잭슨의 얼굴을 보여 준다면, 연방법 무효화 위기는 강력한 연방을 지지하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바로 이 얼굴이야말로 이 시대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요약할 수 없음을 가장 잘 일깨워 준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28년과 1832년의 관세를 문제 삼으며, 각 주에는 자기 주 안에서 이 관세들을 무효로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잭슨은 1832년 12월 10일 무효화 문제에 관한 포고문을 발표하여, 주가 일방적으로 연방법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이론의 토대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포고문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조례가 헌법을 뒤엎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미국은 머지않아 하나의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잭슨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온건하게 이견을 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주의 연방법 무효화 권한은 물론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까지 명백히 부정했다. 위기는 결국 두 조치를 병행하면서 누그러졌다. 한쪽에는 1833년 강제 집행법이 있었다. 관세법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육군과 해군, 민병대를 동원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는 법이었다. 다른 쪽에는 헨리 클레이가 추진한 타협 관세가 있었다. 관세율을 단계적으로 낮추는 조치였다. 은행 문제로 반대자들에게 “앤드루 왕”이라는 욕을 먹던 바로 그 대통령이 관세 위기에서는 연방의 무력으로 국가의 통일을 지켰다.

잭슨주의를 하나의 이념적 좌표축에 집어넣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안에서 한결같이 이어지는 것은 작은 정부도, 주의 권리도 아니다. 대통령을 나라의 방향과 실행력을 결정하는 중심으로 만드는 일이다. 은행 문제에서는 반특권의 언어를, 무효화 위기에서는 강한 연방의 언어를 끌어다 썼다. 서로 반대로 보이는 두 언어는 같은 일에 복무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국가 전체의 중심축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7. 제2정당 체제와 앤드루 왕

잭슨의 정치가 제도에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은 새로운 정당 체제였다. 그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오늘날 민주당의 전신으로 결집했고, 반대자들은 1830년대 중반부터 차츰 휘그당으로 모였다. 잭슨은 8년 동안 자신을 중심으로 얼기설기 모여 있던 연합을 녹여, 규율을 갖춘 전국적 정당 기구로 주조했다. 동시에 논란으로 가득했던 그의 행동은 반대편에도 조직된 야당을 만들어 내도록 압박했다.

휘그당의 탄생은 단순한 정책 차이 이상의 것이었다. 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대한 구조적 반발이었다. 은행 전쟁, 예금 인출, 거부권의 일상화, 행정부 인사권의 당파적 통제, 여기에 잭슨 개인의 강렬한 정치 스타일이 겹쳤다. 반대자들은 갈수록 그를 국민의 이름으로 헌법의 제약을 뚫고 나가는 “앤드루 왕”으로 그리게 되었다. 휘그당이 문제 삼은 것은 특정 정책 하나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의회를 중심으로 한 헌정 질서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이 연작의 틀로 돌아오면, 휘그당의 등장은 이 구축 체계에서 익숙한 리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사건이다. 앞선 글들에서 행정권이 크게 팽창할 때마다 반대 방향의 힘이 생겨났다. 제퍼슨의 팽창은 마셜의 법원에 부딪혔다. 잭슨이 대통령을 전례 없는 높이로 밀어 올리자, 이번에는 대통령을 제약하겠다는 야당이 곧바로 생겨났다. 휘그당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잭슨식 팽창에 대한 구축 체계의 자기 교정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교정의 힘이 어느 한 권력 기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새로 조직된 정당에서 나왔다. 이 정당은 선거라는 전장에서 잭슨이 높여 놓은 대통령 권력을 다시 어느 정도 끌어내리려 했다.

8. 맺음말

존 퀸시 애덤스와 잭슨의 12년을 이 연작의 흐름으로 되돌려 놓을 때,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판단이다. 포용과 추방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 시기에 구축 체계는 한편으로 더 많은 백인 남성을 정치 공동체 안에 들이고, 정당 간 다툼을 담아낼 기구를 유례없이 정교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동부의 원주민 민족들을 강제 추방하고 여러 주에서 자유 흑인을 유권자 대열 밖으로 밀어냈다. 민주주의의 확대 자체가 양면적이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행위가 다른 누군가를 더욱 철저하게 배제했다. 이것이 잭슨 시대에 그 가장 깊은 잔여항이 취한 모습이다. 민주주의가 먼저 있고 배제가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경계 자체를 배제로 그은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 권력은 건국 이래 또 한 번 크게 팽창했다. 이번 팽창에는 새로운 연료가 쓰였다. 민의의 직접적인 위임이었다. 잭슨은 거부권을 합헌성 판단의 도구에서 정책의 무기로, 대통령을 행정 관리자에서 국민의 대변자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 운용을 어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은행 문제에서는 특권에 맞섰고 무효화 위기에서는 강한 연방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되는 두 언어는 같은 목표를 향했다. 대통령을 국가의 중심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펼쳐질 것은 이제 막 모습을 갖춘 제2정당 체제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대다. 심각한 경제 공황이 곧바로 잭슨이 남긴 금융 유산을 시험하게 된다. 그리고 미주리에서 처음 그어졌고 새 영토가 생길 때마다 다시 정치 문제가 된 그 지리적 균열은, 병합과 팽창을 따라 조금씩 더 깊이 새겨질 것이다. 밴 뷰런부터 남북전쟁 전야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