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퀸시 애덤스와 잭슨 — 포용과 추방이 동시에 일어나다
민주주의의 문이 넓어질 때 그 경계도 더 날카롭게 그어졌다
1825년부터 1837년까지를 재산 자격이 사라지고 더 많은 사람이 투표한 민주화의 진전으로만 쓰면 절반을 놓친다. 직접 혜택을 받은 쪽은 주로 백인 남성이었다. 같은 시기에 자유 흑인의 투표권은 여러 주에서 줄었고, 동남부 원주민은 조약과 법, 군사력에 의해 고향에서 밀려났다.
포용과 추방은 앞뒤로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다. ‘국민’의 범위를 더 많은 백인에게 넓히는 바로 그 정치가, 누가 그 국민이 아닌지를 인종적으로 더 분명히 했다. 이 이중 운동과 대통령권의 팽창을 함께 보아야 잭슨 시대의 구(構)가 남긴 여항(餘項)이 보인다.
1. 1824년, 합법성과 정당성이 갈라진 선거
1824년에는 잭슨, 존 퀸시 애덤스, 크로퍼드, 클레이 네 후보가 경쟁했다. 선거인단 261표 중 과반은 131표였지만 잭슨 99, 애덤스 84, 크로퍼드 41, 클레이 37로 아무도 넘지 못했다. 수정헌법 제12조에 따라 하원이 상위 세 후보 중 대통령을 골라야 했다.
당시 18개 주는 이미 유권자 투표로 선거인을 정했고 6개 주는 주의회가 정했다. 잭슨은 투표를 실시한 주에서 애덤스보다 많은 표를 얻었지만, 전국적으로 통일된 대중투표가 존재한 것처럼 “전국 득표 승자의 강탈”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제도의 전환기에 서로 다른 선출 방식이 공존했다.
1825년 2월 하원은 주 대표단별 한 표로 애덤스를 선택했다. 곧 애덤스가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자 잭슨 진영은 ‘부패한 거래’라고 공격했다. 법적으로 입증된 밀약은 없지만 이 서사는 정치적으로 강력했다. 애덤스 정부의 정당성을 처음부터 갉아먹고 1828년 재대결을 준비하는 동원 자원이 되었다.
2. 큰 계획과 약한 연합
존 퀸시 애덤스는 소극적인 대통령이 아니었다. 연방이 도로·운하·항만·교량을 지원하고 과학과 교육기관을 육성해야 한다는 국가적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의제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 의제를 의회와 유권자에게 전달할 정치 연합이 약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대중정치가 본격화되는 순간에 구식의 공직관을 지켰다. 상대가 취임 첫날부터 차기 선거를 준비하는데도 당 조직과 인사 보상을 적극적으로 쓰는 일을 꺼렸다. 높은 자격과 정책 능력이 선거 정당성의 결손을 스스로 메워 줄 것이라 믿었지만, 새 시대에는 조직화된 충성·신문·지역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1828년 잭슨은 선거인단 178 대 83으로 승리했고 대중투표에서도 약 64만 대 50만으로 앞섰다. 혼인과 결투, 인격을 겨냥한 공격이 난무한 더러운 선거였다. 대중의 참여 확대가 숙의의 품격을 자동으로 높이지는 않았다. 더 넓어진 정치시장은 더 강한 동원과 인신공격도 함께 만들었다.
집권 뒤 관직 교체는 ‘승자에게 전리품이 돌아간다’는 엽관제의 상징이 됐다. 잭슨이 모든 공직자를 몰아낸 것은 아니지만, 순환과 당에 대한 충성을 민주적 책임으로 정당화했다. 공직을 특권 엘리트에게서 연다는 논리가 전문성과 행정의 연속성을 약화할 수 있었다.
밴 뷰런이 조직한 정당체계는 개인 추종을 넘어 지역 갈등을 전국 경쟁 안에 묶으려 했다. 정당은 분열의 병만이 아니라, 각 주의 이해를 같은 선거 일정과 후보연합에 넣는 통합장치였다. 이후 이 장치가 노예제의 지역화를 견디지 못할 때 연방의 위기도 커진다.
3. 백인 남성 민주주의의 성장
1812년 전쟁 뒤 여러 주가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대통령 선거인과 주 공직을 유권자가 직접 결정하게 했다. 정당은 의회 엘리트의 느슨한 모임에서 지역 신문·집회·인사체계를 갖춘 전국적 동원 기계로 바뀌었다. 잭슨은 자신을 각 선거구가 아니라 전국 국민에게 직접 위임받은 대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보통선거’라는 말에는 백인 남성이라는 한정이 붙어야 한다. 백인의 재산 장벽이 낮아지는 동안 펜실베이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등에서는 자유 흑인의 투표권이 더 제한되었다. 한 연구의 집계로는 1840년 무렵 소수의 자유 흑인 가운데 약 93퍼센트가 선거권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주주의는 미완성이라기보다 경계를 새로 그린 민주주의였다. 일부의 신분 문턱을 낮추는 정책과 다른 집단을 인종으로 밀어내는 정책이 함께 정치공동체를 재구성했다. 포용의 크기만 세면 민주주의가 누구의 배제를 바탕으로 성장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4. 원주민 이주법과 선택의 외피
1830년 원주민 이주법은 대통령이 미시시피강 서쪽 땅과 동부 부족의 땅을 교환하도록 권한을 주었다. 법문은 ‘교환과 이주를 선택한’ 부족이라는 자발성의 언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실제 집행은 압박, 기만적 조약, 뇌물과 위협, 기존 약속의 위반, 끝내 군사적 강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법안은 상원 28 대 19, 하원 102 대 97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했다. 당시에도 합의된 정책이 아니었다. 잭슨 재임 중 약 70건의 이주 조약이 체결되고 거의 5만 명이 서부로 이동했으며, 1830~1850년 전체로 보면 강제와 기만 속에 옮겨진 규모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체로키의 경우 약 1만 6천 명이 이동했고 사망자는 흔히 2천~4천 명, 체로키의 기억에서는 그 이상으로도 말한다. 정확한 한 숫자보다 강제이주의 조건과 추정 범위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법의 언어가 선택을 남겼다는 사실은 사람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권력관계가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5. 판결만으로는 보호되지 않은 공동체
1832년 우스터 대 조지아에서 대법원은 체로키가 독자적인 정치공동체이며 조지아 법을 그 영토에 일방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원주민 측의 중요한 사법적 승리였다. 그러나 조지아는 판결을 거부했고 잭슨 행정부도 연방 권력으로 집행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사법심사의 현실적 한계를 보여 준다. 법원이 권리를 선언해도 행정부가 집행하지 않고 의회와 다수 유권자가 방관하면 종이 위의 승리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 견제는 분지들이 서로의 판단을 인정하고 작동시킬 때만 실제 보호가 된다.
미국의 구는 정치 갈등을 규칙 안에 둘 수 있었지만, 공동체 밖으로 분류된 사람에게 규칙이 공평하게 작동한다고 보장하지 못했다. 원주민의 주권은 연방과 주의 권력투쟁 속에서 수단화되었다. 여항은 의견의 차이뿐 아니라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의 삶으로 남았다.
6.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가
잭슨은 재임 중 12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이전의 모든 대통령을 합쳐 10차례였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유의 변화다. 과거에는 주로 위헌 여부를 문제 삼았다면, 잭슨은 정책이 불공정하고 현명하지 않으며 특권층을 편든다는 판단까지 거부의 근거로 삼았다.
1832년 제2합중국은행 갱신 법안에 대한 거부교서는 대통령을 평범한 국민 대 금융특권의 대표로 세웠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이라도 자신이 전국 국민에게 직접 위임받았으니 정책의 정의를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대통령은 법 집행 책임자에서 경쟁하는 정책 입법자로 이동했다.
이 정당성은 강력하지만 위험하다. 의원도 각자의 유권자에게 선출되었는데 대통령이 혼자 ‘전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분지의 정당성을 낮출 수 있다. 잭슨이 세운 국민대표 대통령의 문법은 이후 진보적 개혁에도 권위주의적 돌파에도 쓰일 수 있는 양면적 자원이 되었다.
7. 은행전쟁과 무효화 위기의 두 얼굴
잭슨은 은행 갱신을 거부한 뒤 연방 예금을 주 은행들로 옮겼다. 니컬러스 비들은 신용을 줄여 경제적 고통으로 대통령을 굴복시키려 했고, 상원은 1834년 재무 권한을 침해했다며 잭슨을 견책했다. 반특권 민주주의였다는 평가와 금융 안정장치를 파괴했다는 평가는 함께 검토해야 한다.
반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관세를 주 안에서 무효라고 선언하자 잭슨은 단호한 연방주의자가 되었다. 1832년 포고에서 단독 무효화가 헌법을 뒤엎고 국가를 해체한다고 반박했다. 1833년 무력법안으로 집행 권한을 확보하는 동시에 클레이의 타협관세로 세율을 낮춰 출구를 열었다.
은행에서는 주권과 반엘리트의 언어를, 무효화에서는 강한 연방의 언어를 썼다. 일관된 것은 작은 정부 이념보다 대통령을 국가 방향의 중심에 둔 태도였다. 정책 언어는 달라도 권력의 축이 백악관 쪽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8. 포용이 만든 반작용
잭슨의 지지망은 현대 민주당의 뿌리가 되었고, 반대자들은 1830년대 중반 휘그당으로 결집했다. ‘앤드루 왕’이라는 풍자는 단순한 인신공격이 아니라 대통령이 의회 중심 질서를 삼킨다는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행정의 확장은 그것을 제한하려는 전국적 반대 정당을 낳았다.
이 시기의 착(鑿)은 민주주의가 낡은 재산 질서를 열었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 들어온 백인 유권자는 정당정치를 재구성했고, 동시에 원주민과 흑인을 밀어낸 경계는 훗날 더 큰 갈등의 조건이 되었다. 하나의 변화가 누구에게는 진입이고 누구에게는 퇴거였다.
착구주기율은 이를 필연적 단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주법의 근소한 표결, 공개 반대, 집행되지 않은 대법원 판결은 다른 선택이 현실에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잭슨 시대의 교훈은 민주주의가 저절로 포용적이 된다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장이 언제나 그 경계를 누구에게 그었는지 물어야 한다는 데 있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