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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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매디슨과 먼로 — 외부의 생존 시험과 최초의 지리적 균열

수도를 잃고도 살아남은 제도는 왜 지도 위에 더 위험한 선을 그었는가

Han Qin (秦汉) · 2026
이 글의 목차

앞선 세 편에서 따라간 것은 모두 이 제도적 구축체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파 간 다툼이 어떻게 잔여항으로 인정받았는지, 모든 것을 닫아 완결하려는 충동이 어떻게 내부에서 생겨났다가 다시 흡수되었는지, 행정권이 어떻게 견제와 균형에 거듭 제동이 걸렸는지를 살펴보았다. 또 권력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든 말든 작용하는 이 구축체의 중력이, 그 힘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마저 어떻게 팽창 쪽으로 끌어당겼는지도 보았다. 이 압력들은 모두 안에서 나왔다. 매디슨과 먼로가 집권한 16년 동안, 이 구축체는 처음으로 바깥에서 오는 압력과 마주한다. 물리적으로 자신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압력이었다. 외국 군대가 수도에 쳐들어와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관저를 검게 탄 껍데기로 만들어 놓게 된다.

이 시기를 가장 탄탄하게 읽는 방법은 세 층이 서로 포개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가장 바깥층은 1812년 전쟁이다. 이 구축체가 처음 겪은 외부의 생존 시험이었다. 질문은 단순하고도 잔혹하다. 젊은 제도가 군사적 참패를 겪고, 심지어 수도가 불탄 뒤에도 곧바로 와해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운데층은 전후의 국가주의적 전환이다. 외부에서 일격을 맞은 구축체는 은행, 관세, 도로, 판례를 동원해 서둘러 더 단단한 외피를 덧댄다. 가장 안쪽에는 그 외피와 겉으로 드러난 통합 아래 잠복해 있던 가장 깊은 잔여항이 있다. 그것이 처음으로 뚜렷한 지리적 형태를 띠며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 바로 미주리 위기다.

이 세 층을 함께 놓으면 구조에 관한 한 가지 확실한 판단을 끌어낼 수 있다. 이 구축체는 1812년 전쟁에서 한 번의 군사적 재난만으로 곧장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먼로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남은 경험을 대외 원칙의 선언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구축체가 온전히 흡수할 수 없는 잔여항인 노예제도 역시 처음으로 선명한 지역적 형상을 드러냈다. 그래서 1814년의 수도 방화, 1823년의 먼로 독트린,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은 서로 무관한 세 가지 주제가 아니라 한 편의 글 안에 담긴 세 장면으로 써야 한다.

1. 전쟁은 어떻게 제도의 절차를 통해 들어왔는가

이 전쟁을 제대로 쓰려면 먼저 전쟁이 어떤 경로로 구축체 안에 들어왔는지 봐야 한다. 어느 실력자가 한마디로 결단해서 시작한 전쟁이 아니었다. 헌법이 정한 절차를 밟아 정치의 장으로 들어왔으며, 그 첫걸음부터 지역적 분열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1812년 6월 1일, 매디슨은 의회에 전쟁 교서를 보내 개전의 공식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영국 해군은 오랫동안 미국 국기를 단 선박의 권리를 침해해 왔다. 공해에서 배를 세우고 사람을 붙잡아 수병으로 강제 징집했다. 영국의 봉쇄와 관련 법령은 중립국인 미국의 무역을 해쳤고, 영국 함선은 미국 연안과 항구를 괴롭혔다. 매디슨은 북서부 변경에서 원주민과의 전쟁이 다시 터진 원인도 영국 상인과 주둔군, 관리들의 영향에 있다고 명시했다. 다시 말해 공식적인 개전 사유의 핵심은 해상 주권, 중립국의 무역권, 변경의 안전이었다. 영토 정복을 전쟁 목적으로 공개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뒤이어 하원은 79 대 49, 상원은 19 대 13으로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가결했다. 이처럼 갈린 표 자체가 두 가지를 말해 준다. 전쟁은 제도의 절차를 통해 정치의 장으로 들어왔으며, 동시에 처음부터 분열을 안고 있었다. 반대표가 상당했고, 그 분포도 대체로 지역을 따라 나뉘었다.

그렇다고 공식 사유만 적으면 역사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게 된다. 의회의 주전파, 특히 헨리 클레이와 존 칼훈 세대는 실제로 더욱 강경한 전쟁 노선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해상 권리 침해에 대응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캐나다 문제를 북미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할 수단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분을 정확히 해야 한다. 캐나다 병합은 매디슨의 교서에 명시된 공식 전쟁 목표가 아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주전파가 공개적으로, 혹은 반쯤 드러내 놓고 기대한 전쟁의 이득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의미심장한 세부가 하나 더 있다. 영국은 1812년 6월 16일 미국 무역을 해치던 법령의 적용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공식적인 철회 명령은 6월 23일에 뒤따랐다. 하지만 16일의 발표 소식이 미국에 닿기도 전에 미국은 6월 18일 선전포고를 했다. 이 전쟁에는 당시 통신의 시차가 빚어내는 전형적인 엇갈림이 새겨져 있다. 상대가 핵심 분쟁의 원인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도, 소식의 지연 속에서 전쟁은 이미 헌법적 절차의 궤도에 올라타고 있었다.

2. 수도는 불탔지만 제도는 살아남았다

전쟁 초반의 경과는 이 젊은 공화국에 동원 능력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거의 그대로 입증했다. 1812년 디트로이트 방면에서 어퍼캐나다로 진격한 작전은 실패했다. 헐은 싸움다운 싸움도 거의 치르지 않은 채 8월 16일 디트로이트를 내주었고, 같은 해 10월 13일 퀸스턴 고지 전투에서도 미군은 패배했다. 뉴잉글랜드 민병대의 비협조는 연방의 동원 능력이 주 차원의 협력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는지를 한층 선명하게 드러냈다.

여기서는 자칫 뒤섞기 쉬운 두 가지를 갈라 보아야 한다. 이 전쟁이 시험한 것은 둘이었다. 하나는 연방의 전쟁 수행 기구, 곧 병력을 동원하고 배치하며 보급하는 행정 능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 구축체 자체, 곧 그 헌정 질서가 타격을 받고도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전쟁은 앞의 것이 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집행 차원에서 연방은 여전히 각 주에 크게 의존했다. 반면 뒤의 것은 끈질기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수도는 불탔지만 질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행정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과 헌정 질서가 질기게 버틴다는 말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이 글에서 정말 따라가려는 것은 두 번째다.

이 외부 생존 시험을 상징하는 중심 장면은 1814년 8월 24일에 벌어졌다. 영국군이 워싱턴에 진입해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관저, 다른 정부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전쟁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수도는 점령당했고 공공건물은 불길에 휩싸였다. 국가 문서와 의회 기록도 대량으로 긴급 반출되거나 훼손·소실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할 것은 미국이 어느 전투에서 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수도의 물리적 중추가 타 버렸는데도 이 구축체는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상원은 이후 한 여관에서 임시로 회의를 열었고, 의회도 결국 수도를 옮기는 대신 워싱턴에 남기로 했다. 이 공화국은 이미 정치적 권위를 특정 건물 하나와 떼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도는 수도에 서 있는 몇 채의 건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은 조금 더 짚을 만하다. 구축체가 성숙했는지를 가르는 근본적인 징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질서가 아직 자신을 하나의 중심과 동일시하고 있다면, 그 중심이 군주이든 수도이든 한 가문이든, 중심의 파괴와 함께 질서 전체가 무너지기 쉽다. 그 권위가 애초에 그 중심에 기대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숙한 구축체는 다르다. 어느 한 중심에 있던 권위를 이미 밖으로 분산시켜 놓았다. 절차 속으로, 제도 속으로,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기대 속으로 말이다. 그 권위는 특정 건물 안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규칙 안에 있다. 그러니 건물은 불태울 수 있어도 그 규칙까지 태울 수는 없다. 1814년 워싱턴의 화재는 이 구축체가 이미 그 단계에 도달했음을 처음으로 극단적인 방식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중추는 잿더미가 될 수 있어도 구축체 자체는 그대로 돌아갔다.

현대 연구가 널리 퍼진 이야기를 바로잡은 대목도 하나 넣어 둘 만하다. 익숙한 이야기는 돌리 매디슨이 워싱턴의 초상화를 직접 품에 안고 백악관을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믿을 만한 자료에 따르면, 그녀가 한 일은 그 그림을 반드시 가져가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당시 백악관에서 노예로 일했고 훗날 그 광경을 회고록에 남긴 폴 제닝스에 따르면, 실제로 그림을 벽에서 내린 사람은 문지기 장피에르 시우사(Jean-Pierre Sioussat)와 정원사 토머스 맥그로(Thomas McGraw)였다. 이후 그림을 맡아 가지고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돌리 매디슨이 끝까지 그림을 구하겠다고 고집하며 구출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신화 속 이야기처럼 혼자 그림을 안고 달아난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수정은 초기 공화국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하인과 노예, 실제로 손을 움직여 일을 해낸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지워졌는지를 일깨워 준다. 가장 깊은 잔여항은 이런 애국적 전설 안에서조차 지워진 존재였다.

1814년 가을, 미국은 볼티모어 방어전에서도 상징성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군은 9월 13일부터 14일까지 약 25시간 동안 한 요새에 포격을 퍼부었지만 볼티모어의 방어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동틀 무렵에도 요새 위에서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시를 썼고, 그 시는 훗날 미국 국가의 가사가 되었다.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는 미국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곧바로 사람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국가적 상징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깃발과 노래, 도시를 지켜 낸 경험은 이 전쟁에 대한 기억을 새로 빚어내는 재료가 되었다.

3. 살아남은 경험을 단단한 외피로 굳히다

외부의 일격을 맞고 이 구축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더 단단한 외피를 덧대는 것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 외피를 덧댄 사람들이 바로 중앙집권에 반대하며 집권했던 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1812년 전쟁 이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정치적 전환 가운데 하나는 공화파가 여러 면에서 연방당식 국가주의의 도구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816년에 설립된 제2합중국은행의 목적 중 하나는 주 은행들이 남발하는 지폐를 정리하고 전국의 지급 체계와 재정 능력을 개선하는 데 있었다. 현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국에 뻗어 있는 지점망 덕분에 초보적이나마 실질적으로 화폐와 신용의 공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전국적 유동성의 중심이 수행하는 기능 가운데 일부는 이미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은행과 나란히 놓인 것은 보호관세와 국내 기반시설 정비였다. 클레이가 훗날 ‘미국식 체제’로 정리한 구상이다. 핵심은 보호관세, 강력한 전국 단위 은행, 그리고 연방이 지원하는 도로와 운하 건설이었다. 먼로도 1817년 취임사에서 도로와 운하를 연방을 더욱 단단히 묶어 주는 수단으로 보았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그 중력이 계속 작용한 것이다. 제퍼슨은 중앙집권 반대를 내걸고 집권했지만 국가 기구를 물려받아 더 키웠다. 이제는 그 정치적 후계자들의 차례였다. 한 차례 전쟁이 국가 역량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자, 이들은 한때 자신들이 반대했던 도구들을 스스로 받아들였다. 중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작은 정부를 깃발로 내건 사람들을 세대마다 똑같은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사법부에서는 매컬러 대 메릴랜드 사건과 기번스 대 오그던 사건이 이러한 국가주의적 전환을 법리적으로 떠받쳤다. 앞의 판결은 의회에 은행을 설립할 묵시적 권한이 있음을 인정하고, 주가 연방은행에 세금을 매길 권한은 부정했다. 뒤의 판결은 주가 법률을 통해 주와 주 사이의 통상을 규제하는 의회의 권한에 간섭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두 사건이 중요한 까닭은 법리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전후 국가주의를 하나의 정치적 주장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로 집행할 수 있는 헌법적 질서로 밀어 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막 덧댄 외피는 곧 1819년 공황을 맞았다. 1780년대 이래 처음 닥친 대규모 경기 침체였다. 제2합중국은행은 처음에는 대출을 지나치게 늘렸다가 곧바로 신용을 급격히 조였다. 국제 시장의 하강과 농산물 가격 하락에 이미 맞물려 있던 위기를 더 키운 것이다. 그 결과 주 은행들은 지폐의 정화 태환을 중단했고, 파산과 실업, 담보물을 되찾을 권리를 잃는 사례가 늘어났다. 오늘날의 좀 더 탄탄한 설명은 전후 세계 경기의 하강과 미국 국내 금융 구조의 결함이 겹쳤고, 제2은행의 급선회가 그 수축을 악화했다고 본다. 구축체는 자신의 역량을 보강하는 동시에 새로운 취약성도 만들어 낸다. 단단해진 외피 자체가 새로운 응력이 집중되는 지점이 된 것이다.

4. 바깥으로 뻗는 안전의 경계, 먼로 독트린

살아남은 경험을 단단한 외피로 굳힌 뒤, 이 구축체는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한다. 자신의 안전 경계를 바깥으로 뻗어 내는 것이다.

먼로 독트린은 본래 독립된 선언문 한 편이 아니었다. 먼로가 1823년 12월 2일에 발표한 제7차 연례 교서의 몇 문단이었다. 핵심적으로 붙들어야 할 문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메리카 대륙을 앞으로 어떤 유럽 열강도 새로 식민화할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럽 열강이 서반구 어느 곳에든 자신들의 체제를 확장하려 할 경우, 미국은 이를 자국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후대의 해석을 원문에 거꾸로 밀어 넣지 않으려면 그 한계를 정한 말들도 함께 적어야 한다. 먼로는 같은 교서에서 미국이 유럽의 기존 식민지에 간섭하지 않으며 유럽 내부의 일에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원래의 먼로 독트린은 아메리카 전역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다는 위임장이 아니었다. 스스로 한계를 두면서 영역을 구분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배경에는 적어도 세 가지 사정이 있었다. 첫째,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스페인이 유럽의 보수적 동맹 세력의 지원을 받아 아메리카 식민지 지배를 되살리려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널리 퍼져 있었다. 둘째, 태평양 북서부 연안에서 벌어지는 러시아의 활동이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1823년 영국 외무장관 캐닝이 다른 유럽 국가의 스페인령 아메리카 개입을 막기 위해 영미 공동선언을 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는 영국과 공동 명의로 발표하는 데 반대했다. 그런 선언은 미국 자신의 장래 팽창 능력을 제한할 수 있었고, 영국이 따로 제국적 속셈을 품고 있다는 의심도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의 제안은 미국의 일방 선언으로 바뀌었다.

이 선언의 실질에 관해서는 역사학계가 거의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1823년 미국은 그 원칙들을 혼자 실행할 만한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미국에는 그 주장을 무력으로 뒷받침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현실에서 무임승차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해군도 스페인의 식민 체제가 복구되는 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먼로 독트린은 원칙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영국 해군력이 받치고 있는 세력 균형에 기대어 내놓은 일방적 언사였다고 쓰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물론 중요한 선언이다. 다만 그 중요성은 당장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패권을 확립했다는 데 있지 않고, 미래를 향한 원칙의 언어를 선포했다는 데 먼저 있다.

훗날 이 선언이 팽창적으로 해석되었다는 사실은 원문과 후대의 쓰임새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힘이 커진 뒤에야 이 선언은 점점 더 실제로 집행될 수 있었다. 더 나중에는 유럽의 새로운 식민화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넘어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일방적으로 개입하는 근거로까지 뻗어 갔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세워 두면 된다. 이 구축체는 자신의 안전 경계를 바깥으로 뻗어 내기 시작했다. 다만 독자에게는 한 가지를 일러두는 편이 좋다. 후대의 먼로 독트린이 곧 1823년의 원문 자체는 아니다.

5. 거짓된 통합

외피를 단단히 하고 그 경계를 밖으로 뻗어 가는 사이, 이 구축체는 겉보기에 하나로 통합된 모습을 보였다. 후대는 여기에 듣기 좋은 이름을 붙였다. ‘호감의 시대’. 그런데 바로 그 이름에 가장 쉽게 속을 수 있다.

이 겉보기 통합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면 전쟁 말기에 열린 하트퍼드 회의부터 봐야 한다. 뉴잉글랜드는 처음부터 전쟁에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전쟁과 금수 조치에 상업적 이익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이기도 했다. 이곳의 반전 여론은 1814년 말부터 1815년 초에 걸친 한 회의로 모였다. 후대의 구호로는 연방당이 나라를 쪼개려 했던 회의라고 간단히 정리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결의는 연방 탈퇴를 공식 선언하지 않았다. 내놓은 것은 주의 권한을 강하게 내세운 대책과 개헌안이었다. 뉴잉글랜드의 각 주가 스스로 방위를 맡고, 자기 주에서 걷힌 세금 일부를 남겨 방위비로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개헌안에는 노예주에 대표권상의 이점을 주는 5분의 3 조항의 폐지, 새 주의 가입에 양원 각각 3분의 2 동의 의무화, 선전포고에도 양원 각각 3분의 2 동의 의무화, 같은 주에서 두 번 연속 대통령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규정 등이 담겼다.

그러나 정치적 결과로 보면 하트퍼드 회의는 연방당에 치명타가 되었다. 회의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헨트 조약과 뉴올리언스 대승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전국의 여론은 곧바로 뉴잉글랜드의 반전 태도를 편협하고 흥을 깨는 처사로, 나아가 거의 불충에 가까운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연방당은 그전부터 지역 정당으로 축소되며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하트퍼드 회의는 전국적 야당으로서 남아 있던 정당성마저 거의 소진시켰다. 1817년에 이르면 이미 많은 이들이 연방당은 사실상 죽었다고 여겼다. 이렇게 제1차 정당 체제가 막을 내렸다. 당파가 사라진 듯한 통합은 바로 이 야당의 붕괴에서 나왔다.

‘호감의 시대’라는 이름은 애초 동시대인들의 환호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곧 사람을 오도하는 꼬리표가 되었다. 현대의 통사는 대체로 이 표현을 양면에서 바로잡는다. 한편으로 전후에 강한 국민적 낙관론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며, 연방당의 붕괴로 전국적 당쟁이 한동안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호감의 시대는 실제로 찾아온 적이 없었다. 당쟁은 연방당과 공화파의 대립에서 공화파 내부의 파벌 싸움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사회의 균열은 계급, 성별, 인종, 지역을 따라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 연작의 틀로 돌아와 보면 의미심장하다. 연방당의 붕괴는 이 구축체가 마침내 당파 없는 하나의 의지를 실현한 것처럼 보였다. 다툼이라는 잔여항이 드디어 사라진 듯했다. 정말 그랬다면 성공적인 닫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글들에서 이미 말했듯, 당파 간 다툼은 이 구축체가 없앨 수 없는 잔여항이다. 정당 하나가 사라졌다고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도 그랬다. 다툼은 없어지지 않았고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다. 두 정당 사이에서 집권당 내부의 파벌들 사이로 옮겨 갔다. 더 위험한 변화는 지역을 따라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호감의 시대는 사실 거짓된 닫힘이었다. 겉으로 하나가 된 듯한 표면 아래에서 잔여항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응집하고 있었다.

6. 가장 깊은 잔여항이 처음으로 지리적 형상을 띠다

겉의 통합과 속의 균열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미주리 위기다. 이 글의 진짜 칼날은 여기에 있다. 가장 깊은 잔여항이 처음으로 오해의 여지가 거의 없는 모습으로 연방의 구조 자체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1819년 미주리가 연방 가입을 신청했을 때, 핵심은 그저 새 주 하나가 노예제를 허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영토의 확장이 상원 안에서 자유주와 노예주의 균형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문제였다. 당시 미주리 주민의 약 16퍼센트는 노예로 예속된 흑인이었다. 한 수정안은 미주리로 노예를 새로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고, 앞으로 그곳에서 노예로 태어날 사람들을 점진적으로 해방하려 했다. 하원에서는 북부가 다수를 이루어 찬성했고, 상원에서는 남부의 노예제 옹호 의원들이 부결을 이끌어 냈다. 표는 엄격하게 지역을 따라 갈렸다. 이 글에서 가장 밝게 비춰야 할 구조적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당파의 통합이 지역의 분열 앞에 뚜렷하게 자리를 내주었다.

미주리 타협의 내용은 아주 정확하게 써야 한다. 미주리는 노예주로, 메인은 자유주로 가입해 상원의 균형을 유지한다. 동시에 루이지애나 매입지의 나머지 영역 가운데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미주리를 제외하고, 노예제를 영원히 금지한다. 이 선, 그리고 이 ‘영원히’라는 말이 타협의 핵심이다.

위기가 지닌 깊은 의미는 제퍼슨 자신의 편지를 통해 짚는 것이 가장 좋다. 그는 1820년 4월 22일 한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를 한밤중에 울린 화재 경종이라고 불렀다. 이어 자신은 곧바로 그것을 연방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로 받아들였다고 썼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다음 말이다. 지리적 경계선이 도덕적·정치적 원칙과 겹치고 격정에 불이 붙으면, 그 선은 이후 갈수록 깊이 새겨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 구절이 중요한 까닭은 단지 유명하기 때문이 아니다. 타협의 역설을 더없이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눌렀다. 하지만 누르는 방법은 노예제 문제를 한층 더 지리적 문제로 만들고, 경계선으로 고정하고, 제도 안에 새겨 넣는 것이었다. 해결이 아니라 시간을 늦춘 것이었다.

역사적 평가의 차이도 나란히 제시하는 편이 좋다. 좀 더 전통적인 견해는 이 타협이 1854년 폐지될 때까지 적어도 34년간 법적 틀을 유지했으며, 그런 만큼 폭발을 실제로 늦추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조를 더 중시하는 현대의 견해는 지리적 선 하나로 노예제를 둘러싼 균형을 맞추는 방식 자체가 지속 불가능했다고 지적한다. 영토가 새로 늘어날 때마다 어느 쪽에 주 하나가 더 생기느냐는 문제가 다시 정치의 한복판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평가는 모순되지 않는다. 타협은 성공적인 위기 관리인 동시에 장래 위기의 지리적 틀이었다. 눈앞의 위기 한 번을 누른 대가로, 이후의 위기 때마다 그대로 따라 벌어질 균열을 미리 마련해 놓았다. 그 균열은 갈수록 깊어질 터였다.

7. 맺음말

매디슨과 먼로의 16년을 이 연작 안에 다시 놓아 보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매디슨은 유약했고 먼로는 강경했다는 식의 인물 비교가 아니다. 서로 포개진 그 세 층이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구축체는 1812년 전쟁에서 수도와 건물이 공격에 뚫려도 자신까지 반드시 함께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권위를 어느 한 물리적 중추에 기대어 두지 않을 만큼 이미 성숙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은행, 관세, 도로, 판례, 먼로 독트린으로 더 단단한 국가적 외피를 서둘러 덧댔다. 그 일을 한 세력이 바로 한때 중앙집권에 반대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중력을 다시 보여 준다. 안전의 경계를 바깥으로 뻗어 낸 것도 처음이었다. 비록 당시에는 아직 힘이 따라가지 못하는 원칙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공 뒤에서 갈수록 또렷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팽창과 통합에 성공할수록, 가장 깊은 잔여항인 노예제는 오히려 더욱 선명한 지역적 형태를 띠며 표면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1809년부터 1825년까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사의 줄기다. 연방당이 사라지면서 이 구축체도 마침내 통합되고 안정된 호감의 시대로 들어섰으리라는, 빠지기 쉬운 착각을 깨뜨린다. 실제 모습은 정반대였다. 그 통합은 겉모습이었고 거짓된 닫힘이었다. 다툼이라는 잔여항은 없어지지 않았다. 더 위험한 얼굴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역을 가로지르던 당파 싸움이 지리적 선을 따라 결집하는 지역적 분열로 변했다. 미주리 타협에서 그 이북의 노예제를 영원히 금지한 위도선은 언뜻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흡수할 수 없는 잔여항에 공간상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것이 이후 거듭 터져 나올 때마다 따라갈 첫 홈을 새겼을 뿐이다.

제퍼슨이 그 편지에서 들은 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미주리 한 지역의 말다툼이 아니었다. 이 구축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끝내 흡수할 수 없는 것이 처음 울려 낸 메아리였다. 장차 구축체를 두 동강 낼 메아리였다.

이제 등장할 시대는 이런 팽창과 배제를 동시에 절정으로 밀어 올린다. 백인 남성의 선거권은 대폭 확대되는 반면, 원주민은 대규모로 동부에서 쫓겨나게 된다. 민주주의의 확대와 배제의 강화가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들의 손으로 함께 이루어진다. 대통령의 권한도 건국 이래 다시 한번 크게 팽창할 것이다. 잭슨의 시대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