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제퍼슨: 엄격 해석주의자의 역설
권력을 줄이겠다는 언어가 국가의 팽창을 멈추지는 못했다
이 글의 목차
앞선 글 끝에 남겨 둔 역설을 이제 정면으로 다룰 차례다. 토머스 제퍼슨은 아주 분명한 말을 내걸고 집권했다. 중앙정부를 줄이고, 씀씀이를 아끼고, 각 주에 권력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보기에 공화국을 중앙집권과 금융 과두지배로 몰아가고 있던 연방당의 국가기구를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차례의 임기 동안 그가 벌인 가장 굵직한 일들은 바로 그 국가기구를 물려받는 일이었다. 영토와 전쟁, 통상 위기에 대응하면서 그는 대통령 권한을 건국 이래 누구도 가 보지 않은 새로운 경계까지 밀어붙였다.
이 역설을 쓸 때 가장 쉽고도 얕은 두 가지 길은 피해야 한다. 하나는 제퍼슨을 원칙을 배반한 위선자로 그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해밀턴이 되어 버린 사람으로 그리는 길이다. 둘 다 개인의 차원에 머문다. 제퍼슨이라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 글이 정말 들여다보려는 것은 그보다 더 냉정하고 깊은 구조적 사실이다. 이렇게 구축된 체제는 권력자의 언행일치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는다. 체제에는 자체의 중력이 있다.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자기 논리 쪽으로 끌어당기고, 흔히 그 사람이 애초에 천명한 방향과 정반대의 자리까지 데려간다.
앞선 글에서 보았듯 매디슨 세대는 권력을 잡을 사람이 유덕하리라는 가정 없이 이 체제를 설계했다. 제퍼슨의 재임기는 그 사실을 한 겹 더 깊이 드러냈다. 이 체제는 권력자의 덕성에 기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원칙에 충실하리라는 데도 기대지 않는다. 중앙집권에 반대하며 집권한 사람도 중앙의 국가기구를 물려받도록 떠밀리고, 영토와 전쟁과 위기 속에서 그 기구를 키우게 된다. 그가 나약하거나 위선적이어서가 아니다. 재정, 채무, 조세, 행정, 영토라는 뼈대가 한번 세워지고 나면 체제 자체에 무게가 생기기 때문이다. 뒤에 오는 사람이 어떤 말을 내걸고 들어오든 그 무게를 비켜 가기는 어렵다.
1. 달래고, 물려받다
제퍼슨의 첫 취임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우리는 모두 공화당원이며, 우리는 모두 연방당원입니다”는 1800년 선거 뒤의 헌정 위기 속에 놓고 읽어야 한다. 그 선거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당 사이의 평화적 정권 이양을 낳았다. 그러나 과정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제퍼슨과 버가 같은 수의 표를 얻었고, 하원은 서른여섯 차례 투표를 치른 끝에야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 배경에서 그 문장이 먼저 하려던 일은 현대적 의미의 ‘충성스러운 야당’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파국 직전까지 몰고 갔던 격렬한 당파 싸움을 공화국의 공동 질서 안으로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이었다. 달래는 말로 연방당원들이 품은 체제 전복의 공포를 낮추려는 것이었다. 제퍼슨을 연구한 역사가 오너프는 이 문장이 현대적 의미의 정당 경쟁을 정당하다고 인정한 표현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제퍼슨은 공통의 원칙을 내세워 1790년대의 히스테리적인 당파 싸움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정당 간 평등을 인정했다기보다, 앞선 글에서 말한 것처럼 다툼을 질서 안으로 거두어들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취임사 자체도 흔히 인용되는 그 한 문장보다 복잡하다. 단합을 선언한 그 문장 외에 그만큼 중요한 주장들이 들어 있다. 첫째, 그는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를 주장했다. 둘째, 각 주의 모든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셋째, 바로 그 연설에서 연방정부가 헌법상 가진 활력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도 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제퍼슨은 단순히 주의 권리로 연방을 상쇄하려 한 것이 아니다. 같은 연설 안에서 주정부와 연방정부를 모두 공화국 질서에 없어서는 안 될 기둥으로 규정했다. 양쪽을 다 남겨 두려는 이 태도에는 훗날 그가 연방의 국가기구를 실제로 허물지는 않으리라는 조짐이 이미 담겨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집권한 제퍼슨은 연방당이 세운 기계를 뜯어내고 새로 만들지 않았다. 가장 정확히 말하면, 연방당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청산한 것이 아니라 골라서 줄였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 공직자의 수를 줄였고, 육군과 해군을 감축했으며, 1798년의 직접세 폐지를 추진하고 공화파가 몹시 싫어하던 소비세 부담을 없앴다. 하지만 일상 행정을 떠받치는 뼈대는 상당 부분 남겨 두어 문서 업무와 우편 체계 대부분이 계속 돌아가게 했다. 역사가 앨런 테일러의 설명은 명쾌하다. 제퍼슨은 미합중국은행을 유지하고, 국가채무를 인정해 상환하고, 육군과 해군을 축소하되 존속시킴으로써 온건한 연방당원들을 안심시켰다.
철거가 아니라 계승이었다는 사실을 특히 잘 보여 주는 것이 미합중국은행 문제다. 제퍼슨은 1791년 은행 설립에 가장 강하게 반대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헌법은 연방정부에 법인을 세울 권한을 주지 않았으며, 중앙은행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제1미합중국은행을 폐지하지 않았다. 은행은 그대로 존속했고, 20년짜리 설립 인가가 1811년에 만료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요점은 제퍼슨이 해밀턴으로 변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 냉정한 사실이 있다. 재정과 채무, 조세와 행정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틀이 한번 갖추어지면, 후임자는 그것에 반대하는 말을 내걸고 집권했더라도 부분적으로 가지를 칠 수 있을 뿐 통째로 허물기는 어렵다. 이 체제의 중력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 중력은 강제로 복종시키지 않는다. 그저 이미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을 만큼 무겁게.
2. 루이지애나 매입의 역설
은행 문제가 중력의 정적인 면을 보여 준다면, 루이지애나 매입은 그 동적인 면을 보여 준다. 이 사건은 이 글 전체에서 제도적 논의를 떠받치는 가장 핵심적인 소재다. 여기서 역설은 후세 사람이 억지로 붙인 것이 아니다. 제퍼슨 자신이 글 속에 직접 남겨 놓았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단단히 짚자. 1803년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약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현금 6,000만 프랑을 지급하고, 프랑스가 미국 시민들에게 진 채무 2,000만 프랑을 떠안는 조건이었다. 이 땅으로 미국 영토는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아주 엄밀하게 쓰자면 대략 두 배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조약은 1803년 4월 30일 파리에서 체결되었고, 상원은 10월 20일 찬성 24표, 반대 7표로 비준에 동의했다. 프랑스는 12월 20일 뉴올리언스에서 공식 인도를 마쳤다. 매입지는 오늘날 15개 주의 전부 또는 일부에 걸쳐 있다. 또 이 영토에서 13개 주가 생겨났다고 서술하는 경우도 흔하다.
매입을 둘러싼 외교적 배경도 분명하다. 나폴레옹은 본래 신대륙에 프랑스 제국을 재건하려 했다. 먼저 생도맹그에 대한 지배를 되찾은 뒤, 루이지애나를 카리브해 식민지 체계의 곡창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생도맹그에서 프랑스군은 황열병과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전까지 임박하자 나폴레옹은 계획을 포기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뉴올리언스만이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를 미국에 팔겠다고 나섰다. 미국에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강 하류는 원래부터 서부 농산물이 오가는 생명줄이었다. 프랑스에는 카리브해 제국의 전망이 사라진 순간, 그 땅이 전략의 중심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제퍼슨 자신이 느낀 헌법상의 불안이다. 이 대목은 그의 사적인 편지를 통해 써야 한다. 1803년 9월 7일 한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하나의 문서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면 안전하고 정확한 쪽을 택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해석을 통해 헌법을 백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조약 체결권에 한계가 없다고 이해한다면 우리에게는 헌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폭넓은 해석으로 권한이 이미 존재한다고 간주하기보다, 개헌을 통해 필요한 권한을 더하는 쪽을 선호했다.
그런데 불과 몇 주 전인 1803년 8월 12일, 브레킨리지 상원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미 그 한계를 넘을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돈을 제멋대로 써서 중요한 인접 토지를 사들이는 행위에 빗댔다. 심지어 “당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라고 인정하며, 나라가 나중에 추인해 주기를 바랐다. 필요와 자기 보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의무를 명시적으로 논한 것은 훗날인 1810년 9월 20일 존 B. 콜빈에게 보낸 편지였다. 1803년의 두 편지를 나란히 놓는 것이 가장 좋은 서술이다. 한 편지는 그가 여전히 헌법을 글로 쓰인 헌법으로 대하며 해석으로 백지로 바꾸기를 꺼렸음을 보여 준다. 다른 편지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기회 앞에서 국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 승인을 구했음을 보여 준다. 역설을 남긴 사람은 그 자신이다.
역사학의 해석도 적어도 세 갈래를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첫째는 매입을 현실적인 필요로 보는 해석이다. 좀처럼 오지 않을 기회인데 개헌할 시간은 없고, 한번 놓치면 영영 놓친다는 것이다. 둘째는 원칙의 불일치, 나아가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을 강조한다. 엄격한 헌법 해석을 주장하던 제퍼슨이 결정적인 순간,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팽창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구조적 설명에 더 가깝다. 오너프가 대표하는 이 해석은 개인의 위선 여부만 묻는 대신, 제퍼슨이 처음부터 공화국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연방의 사람이었다는 데 주목한다. 그가 말한 연방의 원칙, ‘자유의 제국’에 대한 상상, 영토와 연합에 대한 구상은 그가 애초부터 순수한 지방주의자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세 갈래를 합쳐 보면 가장 온전한 설명은 이렇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한 개인의 타협이면서, 동시에 대륙으로 팽창하는 미국 연방의 제도적 논리가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영토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이 논리에는 이 글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숨어 있다. 제퍼슨은 미국의 팽창을 ‘자유의 제국’으로 구상했다. 영토가 넓어지면 자유도 넓어지는 듯이 여겼다. 그러나 새로 사들인 광대한 땅은 자유를 마음대로 써 넣을 수 있는 백지가 아니었다. 그 땅이 이 체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곧바로 질문 하나가 따라왔다. 이 새로운 영토는 장차 노예주가 될 것인가, 자유주가 될 것인가. 서쪽으로 땅이 한 조각씩 늘어날 때마다 가장 깊은 잔여항, 곧 노예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의 진정한 무게는 나라를 두 배로 키웠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노예제의 확대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그토록 거대한 규모로 미래의 의제 위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다.
3. 팽창은 어떻게 견제에 부딪히는가
중력은 대통령 권한을 계속 키워 나갔다. 하지만 이 체제 안에서는 다른 힘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퍼슨 재임기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줄기는 행정부와 정치권력의 의지가 사법이라는 견제 장치에 번번이 부딪히는 과정이다. 부딪힐 때마다 대통령이 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견제 장치가 더 단단해졌다.
그 배경에는 앞선 글 끝에 등장한 ‘한밤의 판사들’이 있다. 연방당은 퇴임을 앞두고 1801년 사법법을 통과시켜 연방 판사 자리를 여럿 신설했다. 제퍼슨과 공화파 의회는 이듬해인 1802년에 그 법을 폐지했다. 애덤스가 임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판사들의 자리 자체를 없애 버린 셈이다. 다만 제퍼슨이 종신직 판사를 직접 해임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연방보안관 같은 주변의 관리들을 교체하고, 이어 의회가 법을 폐지하는 방식으로 반격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마버리 대 매디슨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이 충돌 속에서 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 제도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으로 사법심사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마셜 대법원장은 한편으로 매디슨에게 임명장을 교부하라고 실제로 강제하지 않음으로써 제퍼슨 행정부와 판결 집행을 둘러싸고 정면충돌하는 일을 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1789년 사법법의 직무집행명령 관련 조항을 위헌이라고 선언하며 사법심사의 원칙을 써 넣었다. 판결문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두 문장은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은 무효다”와 “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사법부의 권한이자 의무다”이다. 논리의 고리는 선명하다. 헌법은 일반 법률보다 상위에 있다. 일반 법률이 헌법과 충돌하면 법원은 사건을 심리하면서 어느 쪽을 적용할지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법원에는 위헌인 법률의 적용을 거부할 의무가 있다.
사법심사는 헌법 문언에 명확하게 적혀 있던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상에는 건국기의 헌법 논의와 그 이전의 사법 실무라는 배경이 있었다. 마셜은 없는 제도를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 판결에서 헌법의 논리를 분명히 제시하여 중요한 선례로 정착시켰다. 설계 단계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체제는 작동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원리를 구체적인 견제 장치로 키워 갔다. 이 대목은 체제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한 번 완성하면 그 뒤로는 돌리기만 하면 되는 기계가 아니다. 작동하는 동안 새로운 부품, 새로운 견제, 새로운 규칙을 계속 만들어 낸다. 가장 곱씹을 만한 사실은 이 견제를 확립한 마셜이 바로 연방당원이었고, 제퍼슨의 정적 애덤스가 퇴임 직전 임명한 대법원장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대통령을 법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이 핵심적인 견제는, 행정권의 확대가 진행되던 제퍼슨 재임기에 그의 반대편 손으로 세워졌다. 이 체제가 자라는 방향을 어느 한 권력자가 혼자 결정하는 법은 없다.
이후 제퍼슨 진영은 탄핵으로 연방당 판사들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사법부의 독립이 또 한 번 굳어졌다. 새뮤얼 체이스는 대법원에서도 당파성이 유난히 강한 연방당 판사였고, 공화파는 제퍼슨의 독려 아래 그를 탄핵했다. 하원은 18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하지만 1805년 3월 1일 상원 표결에서는 여덟 혐의 모두 유죄에 필요한 3분의 2에 이르지 못했다. 체이스에게 내려진 무죄 판단은 판사의 어떤 행위가 파면에 이를 ‘중대한 범죄와 비행’에 해당하는지를 가르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단순한 당파적 편향과 탄핵할 수 있는 범죄를 구분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를 놓고 보면 이 실패는 중요하다. 제퍼슨은 법을 폐지할 수 있었고 행정권을 넓힐 수도 있었지만, 사법부를 대통령의 부속물로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버 사건에서는 행정부와 사법부, 개인의 야심과 반역죄의 정의가 한데 얽혔다. 버는 1804년 해밀턴과 결투하여 그를 죽였고, 그 일로 전국 정치 무대에서 정상적인 경력을 이어 갈 길은 사실상 끝났다. 1807년에는 제퍼슨 행정부가 그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이 재판에서 헌법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셜이 반역 조항을 좁게 해석했다는 점이다. 반역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적에게 가담하는 행위에 한정되며, 공개 법정에서 본인이 자백하지 않는 한 같은 명백한 행위를 두 명의 증인이 입증해야 했다. 이에 따라 마셜은 구상, 조직, 선동을 법률상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와 구별했고,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하기가 극히 어려워졌다. 결국 배심원단은 이 공소장에 근거해서는 버의 범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이 사실들을 함께 놓으면 한 가지가 드러난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을 공개 석상에서 유죄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행정부의 의지도 헌법의 엄격한 정의와 증거 규칙을 따라야 한다.
4. 대외 행동의 선례와 원정
중력은 바깥쪽으로도 작용한다. 제퍼슨 재임기에 있었던 두 가지 대외 활동은 흔히 너무 가볍게 서술된다. 실은 둘 다 이 체제가 어떻게 바깥으로 힘을 뻗어 나가는지와 관련이 있다.
바르바리 전쟁은 단순히 해적을 물리친 정의로운 전쟁으로 서술되곤 한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더 중요한 의미는 대통령이 공식 선전포고에 앞서 해군력을 먼저 사용할 수 있다는 초기 선례를 남겼다는 데 있다. 1801년 트리폴리의 파샤는 미국이 공납을 밀렸다며 더 많은 공납을 요구하고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제퍼슨은 그 선전포고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해군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했다. 의회는 1802년 법을 통과시켜, 미국 상선과 선원을 보호하기 위해 대통령이 무장 함선을 갖추어 파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이 법은 선전포고문은 아니었지만 제퍼슨의 해군과 무력 사용 결정을 뒷받침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완전히 혼자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의 공식 선전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먼저 행동하고 뒤이어 의회가 제한적으로 권한을 부여하는 초기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이 연작 뒤에 나올 전쟁들에서 거듭 확대된다.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도 단순한 탐험담으로만 써서는 안 된다. 제퍼슨이 원정대에 맡긴 임무에는 적어도 세 층위가 있었다. 과학적 관찰과 분류, 교역로 탐색, 그리고 서부 원주민 민족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이 원정은 계몽주의 과학을 대표했을 뿐 아니라 이제 막 떠오르는 미국 제국도 대표했다. 이 글의 구성에서 보자면, 원정을 국가 차원의 지식 생산, 지도 제작, 외교적 접촉, 제국의 힘을 밖으로 뻗치는 일이 결합된 종합 사업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새로 산 땅을 한번 둘러보라고 사람을 보낸 정도의 일이 아니다. 제한된 정부를 말하던 대통령이 국가의 힘으로 대륙을 재고, 이름 붙이고,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 자체가 중력이 그를 영토의 논리 쪽으로 끌어당겼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5. 통상금지, 행정권의 과잉이 부른 반작용
행정권의 과도한 확대가 어떻게 역풍을 맞는지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것은 통상금지법이었다.
그 직접적인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해상 봉쇄, 선박 나포와 수색, 선원 강제징집이었다. 특히 1807년 체서피크호와 레퍼드호 사건 뒤 미국 안의 분노는 한때 크게 치솟았다. 제퍼슨이 택한 것은 당장 전쟁을 벌이는 길이 아니라, 나라의 상업적 힘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하는 길이었다. 그는 먼저 영국 함정의 미국 항구 입항을 금지하고 각 주지사에게 민병대 준비를 명령했다. 이어 1807년 12월 전면적인 통상금지를 추진했다. 미국 농산물과 해운을 잃으면 영국과 프랑스가 양보하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1808년 봄에는 이미 미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회계연도 기준 연간 수출액은 1807년의 약 1억 800만 달러에서 1808년 약 2,200만 달러로 폭락했다. 경제사가 더글러스 어윈의 추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거의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한 이 무역금지로 생긴 경제적 후생 손실은 1807년 미국 국민총생산의 약 5퍼센트에 이르렀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을 피하려던 이 정책이 국내에서는 연방권력을 고도로 강제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였다는 사실이다. 통상금지법 통과 뒤 의회는 보충법, 추가법, 집행법을 잇달아 만들었다. 연안 무역선과 어선, 포경선에 보증금을 내도록 했고, 육로와 해로를 통한 상품 수출을 금지했다. 항구 관리들은 위법이 의심되면 화물을 압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통령은 법 집행을 돕기 위해 육군과 해군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검소함과 제한된 정부를 말하며 집권한 대통령이 자신의 중립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더 큰 행정 재량과 일상에 더 깊숙이 들어오는 규제로 나아간 것이다. 이 글에서 중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부를 키우기를 누구보다 꺼리던 사람조차 자기 정책의 논리에 떠밀려 항구와 어선까지 스며드는 통제 기계를 세웠다.
통상금지에 대한 평가는 적어도 두 방향으로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첫째는 원칙에 따른 비군사적 중립 실험이었다는 평가다. 군사 충돌 대신 상업적 압력을 이용해 중립과 주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효과를 보면 전형적인 행정권의 과잉 행사였다는 평가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대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영국은 빠르게 남미 시장으로 돌아섰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쪽은 미국 자신이었으며, 뉴잉글랜드에서는 대규모 위법 행위와 저항, 연방당의 반발이 일어났다.
그런 반작용 자체가 이 체제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낸다. 통상금지는 끝없이 유지되지 않았다. 제퍼슨이 퇴임하기 직전에 폐지되었고, 항구까지 스며들었던 강제 기구도 상설화되지 않았다. 앞선 글에서 말한 이치가 다시 확인된다. 행정권의 지나친 확대는 반발을 일으키며, 이 체제는 그 과잉을 다시 거두어들인다.
6. 가장 깊은 잔여항, 쓰였으나 실현되지 않은 평등
중력과 견제라는 두 줄기 바깥에서, 제퍼슨 한 사람의 어깨에는 이 연작에서 가장 깊은 잔여항도 놓여 있었다. 그 짐은 누구의 것보다도 무거웠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문장을 주도적으로 작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평생 600명이 넘는 사람을 노예로 부렸다. 그들 대부분은 매입을 통해 그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가 상속받은 사람들이거나, 노예로 묶인 가정에서 태어나 그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었다. 유언에 따른 해방과 비공식적인 석방 또는 떠나도록 허용한 경우까지 합쳐도, 그가 해방한 사람은 고작 열 명이었고 거의 모두 한 가족에 속했다. 미국 대통령 전체를 놓고 보아도 그는 가장 많은 사람을 노예로 소유한 축에 든다. 이 두 사실을 나란히 놓아 보자. 원칙은 글로 쓰였고, 사람은 노예로 묶였다. 이 연작의 중심을 흐르는 문제가 이보다 날카롭게 구체화된 장면도 드물다.
제퍼슨이 노예제에 관해 남긴 글에는 강한 내적 긴장이 있다. 좋은 대목만 골라 인용해서는 안 된다. 1780년대의 『버지니아에 관한 기록』에서 그는 한편으로 “신이 정의롭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조국을 위해 몸서리친다”고 썼고, 노예제가 주인과 그 자녀들의 덕성을 어떻게 썩게 하는지 매섭게 서술했다. 그러나 바로 그 책의 다른 한편에서는 체계적인 인종 서열론을 폈다. 흑인은 신체적·정신적 자질에서 백인보다 못하다고 여겼으며, 해방 뒤에는 백인과 피가 섞이지 않도록 먼 곳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대목은 반드시 함께 놓아야 한다. 그는 노예제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그 인종 질서에 깊이 박혀 있었다. 말년의 한 편지에서는 그 유명한 비유를 썼다. 우리는 늑대의 귀를 붙잡은 처지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도, 안전하게 놓아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진단은 깊지만 빠져나올 힘은 없는 이 상태는 그 자체로 구조적 설명을 요구한다. 도덕적 심판만으로는 부족하다. 제퍼슨의 불안은 진짜였다. 그러나 그 불안으로도 자신을 노예제에 묶어 놓은 구조를 흔들지는 못했다. 당시 남부에서 노예제는 개인의 양심에 따라 고르거나 버릴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플랜테이션 경제를 지탱하는 노동의 토대였고, 제퍼슨 자신의 재산과 생활방식의 근간이었으며, 남부 각 주를 이 새로운 연합 안에 붙들어 두는 타협의 일부였다. 한 사람의 양심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그토록 깊게 박힌 구조 전체를 혼자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1808년 국제 노예무역 금지는 이 모순의 흐름을 다루면서 본문에 반드시 넣어야 할 고비다. 헌법 제1조 제9절에 따라 의회가 노예 수입을 금지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점은 1808년이었다. 제퍼슨은 1806년 연례교서에서 의회를 재촉했다. 헌법이 허용하는 때가 오면 미국 시민이 아프리카인들에게 자행되는 인권 침해에 더는 가담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의회는 1807년 3월 2일 노예수입금지법을 통과시켰고, 법은 18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 법이 합법적인 대서양 횡단 노예 수입을 끝냈다는 것이다. 국내의 노예제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으며, 주 사이의 노예 거래는 더더욱 끝내지 않았다. 실제로 의미 있는 고비였지만, 결말과는 한참 멀었다.
제퍼슨은 이 나라를 세우는 언어 속에 만인의 평등을 써 넣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잔여항을, 자신도 풀 힘이 없었던 그 단단한 매듭과 함께 언덕 위 저택의 그늘에 남겨 두었다.
7. 맺음말
제퍼슨의 두 임기를 이 연작의 틀 안에 다시 놓아 보면, 가장 힘 있는 서술은 그를 진실한 이상주의자나 위선자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존재한 몇 묶음의 사실을 끝까지 나란히 보여 주는 것이다.
첫째, 그는 말로는 제한된 정부를 고수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재임기야말로 중앙집권에 반대하며 집권한 사람도 중앙의 국가기구를 물려받고 영토와 전쟁, 통상 위기 속에서 그것을 키우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것이 이 체제의 중력이다. 권력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에 기대지 않는다. 자체의 무게와 방향을 가지고,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을 자기 논리 쪽으로 끌어당긴다. 둘째, 그는 노예제가 공화국을 파괴할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자신은 노예제의 이윤과 인종 서열 질서에서 한 번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가장 깊은 잔여항은 그의 손에서 진단되었으되 해결되지 않았다. 셋째, 그는 당파 싸움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렇다고 후대의 의미에서 정당들이 대등하게 경쟁하는 일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가 더 원한 것은 자신이 정의한 공화국 공동체 안으로 반대파를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넷째, 마셜과의 대결에서 대통령은 법원을 정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단단한 사법심사와 사법부 독립이 자라나게 했다.
네 묶음의 사실은 합쳐져 하나의 결론을 가리킨다. 이 체제는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질서로 닫히지도 않고, 말로 약속한, 권한이 제한된 작은 정부로 닫히지도 않는다. 자체의 중력을 따라 계속 팽창하다가도 지나칠 때마다 내부의 견제에 붙들려 되돌아온다. 그리고 가장 깊은 잔여항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넘겨진다. 결국 제퍼슨의 역설은 한 개인의 역설이 아니다. 이 체제가 자신의 중력과 한계, 끝내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한꺼번에 드러낸 사건이다. 그것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을 통해서.
다음에 이 체제가 마주할 것은 더 이상 내부의 중력과 견제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외부에서 밀어닥치는 생존 시험이 기다린다. 한 차례 전쟁이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외부의 충격을 맞고도 이 체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다음 글의 매디슨과 먼로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그동안 가장 깊은 잔여항도 잠잠히 있지 않을 것이다. 미주리에서 그것은 처음으로, 앞으로 이 체제를 어떻게 찢어 놓을지 그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