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애덤스: 최초의 폐쇄 충동과 최초의 평화적 정권 이양
외부의 위기를 내부의 적으로 번역한 정부는 선거의 패배를 견딜 수 있었는가
이 글의 목차
지난 글의 끝에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복선이 하나 남아 있었다. 워싱턴의 손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이 제도적 구조는 당파 간의 갈등을 스스로 필연적으로 낳는 잔여항으로 인정했다. 없앨 수 없으니 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견 하나 없는 단일한 의지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잔여항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언제나 그것을 온건하게 대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존 애덤스의 4년은 이 구조가 처음으로 진정한 체제 차원의 압력을 받은 시기였다. 그리고 그 압력에 대한 첫 반응은, 마땅히 품어야 할 바로 그 잔여항을 밖으로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애덤스는 취임하자마자 몹시 난처한 자리에 놓였다. 워싱턴의 첫 후임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국부와 비교당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더 곤란한 것은 자신이 속한 연방당조차 실제로는 그를 중심으로 결집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의 실질적 영향력은 오랫동안 해밀턴이 쥐고 있었다. 오늘날의 연구가 묘사하는 그의 처지는 단도직입적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고립돼 있었고, 심지어 자기 내각조차 자주 반대편에 섰다. 1799년 가을이면 프랑스와의 두 번째 평화 협상을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통령과 내각의 깊은 균열이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1800년 대선에 이르러 해밀턴은 같은 당 소속 대통령을 공격하는 소책자까지 공개적으로 펴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애덤스가 오해받은 좋은 대통령이었는지를 판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더 구조적인 문제를 보려는 것이다. 이 구조의 첫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검증대에 오른 것은 어느 대통령의 인품이 아니었다.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싸움이 겹쳐 짓누를 때도 이 구조 자체가 계속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제도가 바깥의 실제 위협과 안쪽의 격렬한 당파 싸움을 처음으로 동시에 만났다. 두 압력이 겹치면 어느 집권 집단이든 손쉬운 출구를 찾고 싶어진다. 골칫거리의 근원, 곧 이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이 구조가 처음 내놓은 답안은 스스로를 닫으려는 충동이었다.
1. 실제로 닥친 위기
이 폐쇄 충동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우선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낸 집단적 과민반응이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실제 위기가 있었다.
대외 정세는 정말로 나빴다. 프랑스는 1794년의 제이 조약에 크게 반발했다. 미국이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고 본 프랑스는 1796년부터 미국 상선 나포를 확대했다. 총재정부는 유럽 전쟁이 안기는 재정 부담에 시달리는 한편 미국과 영국의 접근에 분노했고, 미국 선박에 대한 프랑스 측의 약탈을 방치했다. 나포된 미국 선박은 300척을 넘었다. 애덤스 앞에 놓인 것은 실재하는 외교 위기이자 해상 안보 위기였다.
이 위기에서 여론의 감정이 뒤집힌 계기는 XYZ 사건이었다. 1797년 애덤스는 핑크니, 마셜, 게리 세 사람을 프랑스에 보내 협상하게 했다. 관계를 회복하고 프랑스가 미국 선박을 괴롭히는 일을 멈추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사절단은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과 곧바로 정식으로 마주 앉지는 못했다. 대신 몇몇 중개인을 통해 조건을 전달받았다. 미국이 먼저 차관을 제공하고 프랑스 측 관계자들에게 사례금도 내야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애덤스가 1798년 관련 문서를 의회에 제출하면서 이 프랑스 중개인들의 이름을 가리고 X, Y, Z로 표시한 데서 사건의 이름이 나왔다.
정치적 파장은 엄청났다. 그전까지 미국 안에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정서가 여전히 상당히 강했다. 그러나 XYZ 문서가 공개되자 반프랑스 여론이 급속히 치솟았고, 애덤스의 대중적 지지도는 한때 재임 중 최고점에 도달했다. 1798년 4월 30일 그는 해군부를 설치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연방 차원에서 상설 해군을 운용할 행정 체계를 다시 세운 것이다. 뒤이어 벌어진 준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해상 충돌이었다. 주로 카리브해와 대서양 항로에서 전개됐으며, 정식 선전포고를 거친 전면전은 아니었다. 제도 차원에서 그 역할은 두 갈래였다. 한편으로는 젊은 연방정부가 해군을 조직하고, 해운을 지키며, 외교 협상을 이어갈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정치적 이견을 안보 위협으로 취급할 구실을 제공했다. 바로 이 두 번째 측면이 1798년의 여러 법률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맥락이다.
여기서 미리 짚어둘 구조적 패턴이 있다. 이 연작의 뒷부분에서도 거듭 나타날 패턴이다. 이 구조의 폐쇄 충동은 대개 순전한 악의가 허공에서 갑자기 솟아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일정한 경로를 밟는다. 먼저 실제로 외부 위기가 발생하고, 거기서 실제 안보 불안이 생긴다. 그 불안이 국내 정치의 문제로 옮겨와 당파 싸움에 휘말린다. 마침내 싸움의 한쪽이 그 불안을 법률의 언어로 다시 써넣으면서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정적을 슬그머니 겹쳐놓는다. 그러면 외적에 대한 경계가 자연스럽게 국내의 이견을 처벌하는 일로 바뀐다. 1798년이 정확히 이 길을 갔다. XYZ 사건과 준전쟁이 실제 불안을 제공했고, 선동법은 그 불안을 형법으로 굳혔다. 이 경로를 똑똑히 보아야 하는 까닭이 있다. 폐쇄 충동을 일으키는 데는 악인이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위기 하나, 그리고 정적을 위험 요소로 다루고 싶다는 유혹 하나면 충분하다.
2. 이견을 제도 밖으로 몰아내다
1798년의 네 법률은 후대의 설명에서 흔히 하나의 거대한 탄압 법안으로 뭉뚱그려진다. 하지만 법적 구조는 서로 달랐다. 각각 떼어놓고 보아야 이번 폐쇄 충동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 드러난다.
첫 번째 법은 귀화에 필요한 거주 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렸다. 새 이민자가 유권자가 되는 문턱을 높인 것이다. 두 번째 법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외국인을 평시에도 추방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었다. 세 번째 법은 적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 선전포고가 있거나 침공의 위협이 닥치면 이들을 구금하고 추방할 수 있게 했다. 이 법에는 일몰 조항이 없었고, 이후에도 미국 법체계 안에 오랫동안 남았다. 제도의 핵심을 직접 건드린 것은 네 번째, 곧 선동법이었다. 국내의 정치적 비판을 연방 형법의 영역으로 곧장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 법의 조문 자체도 하나씩 들여다볼 만하다. 제1조가 주로 다루는 것은 신문이나 출판물이 아니었다. 불법적인 결사나 공모를 통해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거나, 연방법 집행을 방해하거나, 연방 공직자를 위협하거나, 소요와 불법 집회를 선동하는 행위를 처벌했다. 최고 5,000달러의 벌금과 5년의 징역을 부과할 수 있었다. 후세가 기억하는 핵심은 제2조였다. 연방정부나 상·하원, 또는 대통령을 겨냥해 허위이며 악의적이고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쓰거나 인쇄하거나 발표한 경우, 그 목적이 이들을 망신시키고 경멸받게 하거나, 국민의 증오를 불러일으키거나, 법률에 맞서도록 사람들을 부추기는 데 있었다면 최고 2,000달러의 벌금과 최장 2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제3조는 적어도 겉으로는 피고인이 내용의 진실성을 들어 항변할 여지를 주었고, 배심원이 법률과 사실 모두를 판단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했다. 제4조는 이 법이 1801년 3월 3일에 효력을 잃는다고 정했다. 다만 법이 유효하던 기간에 저지른 위반 행위는 실효 뒤에도 기소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폐쇄 충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세부 사항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법의 보호 대상에는 연방정부와 상·하원, 대통령이 들어 있었지만 유독 부통령은 빠져 있었다. 당시 부통령은 바로 제퍼슨이었다.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집권 세력의 대통령을 공격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만, 반대 세력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둘째, 조문은 진실성 항변과 배심원의 판단을 허용하는 듯했지만, 실제 사건에서 연방당계 판사들은 그 형식적 보장이 작동할 여지를 아주 좁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연방당 측의 핵심 논리는 수정헌법 제1조가 금지하는 것은 사전 검열뿐이며, 명예훼손을 이유로 사후에 형벌을 가하는 것까지 금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화파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표현과 출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맞섰다. 이것이 1798년 논쟁의 헌법적 핵심이었다.
이런 외형상의 보장을 한층 빈약하게 만드는 문제가 또 있다. 진실성을 입증하면 항변할 수 있다는 말은 공정하게 들린다. 그러나 정치적 비판에서 가장 흔한 것은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판단과 풍자다. 어느 대통령의 행태가 우스꽝스럽다거나 어느 정책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견이다. 법정에 가져가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피고인이 의견 한마디를 사실로 입증해 방어할 수 없다면, 진실성 항변은 있어도 없는 것이 된다.
이 법을 이 연작의 틀 안에 다시 놓으면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이 구조가 처음 보인 폐쇄 충동이었다. 지난 글에서 보았듯, 닫힌 질서를 추구하는 체제와 이 구조가 다른 점은 당파 간 갈등의 정당성을 아예 인정했다는 데 있었다. 권력 분립과 견제, 신문과 선거라는 공개된 통로를 그 갈등에 내주었다. 선동법이 하려던 일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연방 형법을 동원해 이 잔여항을 제도 안에서 몰아내고, 정치적 반대자를 품고 가야 할 상대가 아니라 처벌해야 할 적으로 새로 규정하려 했다. 이 구조가 스스로 낳은 잔여항을 수용하는 대신 제거하려 한 첫 시도였다.
3. 법은 어떻게 집행됐는가
선동법을 하나의 관념으로만 서술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폐쇄 충동이 정말로 현실이 됐는지는 그 충동이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닥쳤는지를 보아야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1798년부터 1801년 사이에 공화파 약 15명이 기소됐고, 그중 10명이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설처럼 통했던 이 설명은 최근의 문서 연구로 상당히 흔들렸다. 역사학자 웬들 버드는 기존 문헌을 검토하면서 널리 인용되던 기소 건수가 대략 14건에서 17건 사이였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이전 학계가 사건의 절반가량을 놓쳤다고 보았다. 이후 그는 확인 가능한 기소를 51건으로 늘렸고, 기소된 피고인 수도 종전의 17명에서 33명으로 수정했다. 따라서 대체 몇 명이 기소됐는지를 쓰려면 두 설명을 나란히 놓는 것이 가장 충실하다. 기존 설명에서는 흔히 기소 14~17건, 유죄 판결 약 10명이라고 했지만, 버드의 연구에서는 확인 가능한 기소가 51건, 피고인은 33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연구가 고친 것은 단순히 십몇이라는 숫자를 오십몇으로 바꾼 데 그치지 않는다. 1798년의 연방 탄압이 몇몇 상징적 사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징벌적으로 법이 집행된 시기였으며 후대의 기억이 그것을 몇 건으로 압축해놓았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건들을 보면 이 법이 어떻게 국가 안보에서 당파적 탄압으로 미끄러졌는지 알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매슈 라이언이다. 1798년 10월 5일 버몬트 연방순회법원 대배심은 현직 연방 하원의원이었던 그를 선동법 위반 세 가지 혐의로 기소했다. 라이언은 재판에서 법 자체가 위헌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고, 징역 4개월과 벌금 1,000달러를 선고받았다. 범죄가 된 것은 애덤스의 통치 방식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었다. 혁명이나 폭동이 아니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라이언이 감옥 안에서 재선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 사건은 단순한 사법적 문제를 넘어, 반대파가 여전히 제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정치적 문제가 됐다.
라이언의 옥중 재선은 이 구조의 논리를 아주 날카로운 지점까지 밀어붙였다. 집권당이 형법으로 가둔 반대파 의원을 유권자들이 다시 의회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탄압은 그 목소리를 제도에서 지워버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한층 눈에 거슬리는 모습으로 남게 했다. 유권자들이 투표용지로 그 재판에 부결표를 던진 셈이다. 잔여항을 인정하는 구조 안에서 폐쇄 충동이 맞닥뜨리는 난처함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 하나를 감옥에 넣을 수는 있어도, 그를 제도로 돌아오게 하는 통로까지 동시에 없앨 수는 없다. 그러려면 통로 자체를 폐쇄해야 한다. 그런데 그 통로를 폐쇄하는 것은 이 구조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의 헌법적 시각으로 보면, 선동법은 존속하는 동안 연방대법원의 공식적인 판단을 받은 적이 없는데도 이후 미국의 헌법적 기억 속에서 거의 위헌의 반면교사 같은 선례가 됐다. 한 세기 반 뒤,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기념비적인 판결에서 분명히 말했다. 이 법을 대법원이 심리한 적은 없지만, 그 유효성을 공격한 쪽은 이미 역사의 법정에서 승소했다고. 이 말은 이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 구조가 자기 잘못을 고치는 방식은 언제나 그 당시에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중에 가서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기억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데 기대는 경우가 많다.
4. 이견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폐쇄 충동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반격은 주 차원에서 나왔다. 다만 그 반격 자체도 오래 갈 문제의 씨앗을 묻었다.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의 초안은 비밀리에 작성됐다. 제퍼슨이 켄터키 결의의 초안을, 매디슨이 버지니아 결의의 초안을 썼으며, 각각 해당 주 의회에서 채택됐다. 앞서 나온 법률들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장의 목표는 해당 법률들이 위헌이라고 선언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택한 논증의 길은 헌법을 주들 사이의 계약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연방이 권한을 넘어서면 계약 당사자인 각 주에 이를 판단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두 결의의 문구는 같지 않았다. 버지니아 결의의 핵심어는 ‘개입’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연방정부가 고의적이고 명백하며 위험하게 권한을 넘어설 때, 계약 당사자인 각 주에는 그 폐해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켄터키 결의의 원래 초안은 한층 거셌다. 제퍼슨은 부여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할 때는 해당 법령을 무효화하는 것이 정당한 구제책이라고 명시했다. 또 이 구조의 정신을 잘 압축한 문장도 썼다. 권력자가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헌법의 사슬로 단단히 묶어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세부 사항이 있다. 1798년 켄터키가 최종 채택한 문안에서는 ‘무효화’라는 말이 삭제됐다.
당시 이 결의들을 중심으로 주들 사이에 연대가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나머지 14개 주 가운데 지지한 주는 하나도 없었다. 4개 주는 답하지 않았고, 10개 주는 명시적으로 반대했다. 단기적인 정치적 성과만 보면 연방 입법을 되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헌법을 말하는 언어의 긴 역사에서 보면, 주를 최종 해석자로 삼는다는 위험한 선택지를 미국 정치의 어휘 속에 써넣었다.
이 결의들의 장기적 영향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도 줄곧 의견이 갈렸다. 가장 신중한 이해는 두 흐름을 함께 보는 것이다. 한쪽은 이 문서들이 후대에 주의 권한을 옹호하는 이론, 연방법 무효화론, 나아가 일부 주의 분리론에 인용할 언어적 자원을 제공했다고 본다. 실제로 후대의 사람들은 1798년의 결의들을 거듭 끌어다 썼다. 다른 쪽은 매디슨과 제퍼슨이 1798년에 쓴 문서를 수십 년 뒤 한 주가 독자적으로 연방법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이론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둘을 잇는 계보를 지나치게 일직선으로 그리는 것이며, 실제로 두 주장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두 흐름을 함께 놓고 보면 가장 정확한 설명은 이렇다. 이 결의들이 후대의 주 권한론과 분리론을 낳은 단 하나의 원천은 아니었다. 다만 이후 여러 세력이 제각각 문법과 어휘를 꺼내 쓸 수 있는 창고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이 연작의 틀로 돌아가 보면 이 대목의 구조적 의미는 뚜렷하다. 폐쇄 충동은 이견을 제도 밖으로 몰아내려 했지만, 이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연방 차원에서 연방과 주 사이의 관계로 이동해 계속 존재했고, 계속 맞섰다. 이는 지난 글의 판단을 그대로 뒷받침한다. 존재를 인정받은 잔여항은 진화하고 모습을 바꿀 수 있지만, 언제나 제도의 시야 안에 남는다.
5. 애덤스가 택한 평화의 길
폐쇄 충동과 주 차원의 반격을 벗어나 애덤스의 재임기를 볼 때, 가장 진지하게 재평가할 대목은 그가 1799년에 추진한 두 번째 대프랑스 평화 협상이다.
1799년 2월 18일, 그는 상원에 자신은 평화를 지키거나 회복할 가망이 있는 기회라면 언제든 붙잡을 의지가 있고 준비도 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머리(Murray)를 프랑스 주재 전권공사로 지명했다. 일주일 뒤에는 사절단을 확대해 엘즈워스 연방대법원장과 대표 한 사람을 더 합류시켰다. 이 조치의 정치적 의미는 컸다. 준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국내의 주전론은 여전히 강했으며 연방당 지도부의 균열은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교라는 출구를 다시 열어놓은 것이다.
그 대가도 컸다. 두 번째 평화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을 둘러싸고 1799년 가을에는 내각과의 갈등이 격화돼 있었다. 1800년 재선에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고집스러운 독자 노선이었다. 그것이 그를 자기 당 안에서 갈수록 고립시켰다. 이 점에서 애덤스를 당파 싸움에 반대한 인물로 그리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당파 싸움 자체를 부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싸움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자기 당의 지지를 잃게 될 방향을 택한 사람이었다. 단순한 평화의 영웅으로 그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정확하다.
협상의 결과는 1800년 협약이었다. 이 협약은 준전쟁을 끝내고 1778년의 미·프 동맹을 폐지했다. 덧붙이자면, 그때까지 미국이 정식으로 비준한 동맹 조약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 유일한 동맹이 여기서 끝났다.
애덤스 자신은 나중에 이 결정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여러 해 뒤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사절을 보낸 일들이 자기 생애에서 가장 사심 없고 가장 공로가 큰 행동이었다고 썼다. 그리고 후세에 자주 인용될 말을 남겼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으니 자기 묘비에 ‘여기 존 애덤스 잠들다. 그는 1800년 프랑스와 평화를 이룰 책임을 떠맡았다’라고만 새겨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선동법 하나로만 애덤스를 기억하는 서술을 바로잡는 데 썩 알맞은 말이다. 그러나 바로잡는 것과 면죄부를 주는 것은 다르다. 그가 바로 그 법에 서명했다는 사실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한다. 같은 사람이 이견을 범죄로 만드는 법에 서명했고, 또 당내 압력을 무릅쓰고 나라를 전면전의 벼랑 끝에서 끌어냈다. 둘 다 사실이다. 구조 분석이 할 일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둘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6. 1800년 대선과 1801년의 평화적 정권 이양
1800년 대선이 중요한 까닭은 단지 격렬하고 추잡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적대하는 정당들 사이에서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처음으로 현실의 시험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당대인들은 이 선거전을 극단적으로 당파적이며 철저히 비열한 싸움이라고 묘사했다. 해밀턴은 선거 도중 공개적으로 등을 돌려 같은 당의 애덤스를 공격했다. 연방당 인사들은 제퍼슨을 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계속 몰아붙이며 프랑스 혁명과 불신앙을 공격 소재로 삼았다. 그러므로 1800년은 이 구조가 차분하게 이견을 처리한 순간이 아니었다. 정반대로, 이견을 공개적으로 선동해 극한까지 끌어올렸는데도 구조가 무너지지 않은 순간이었다.
개표 결과 제퍼슨과 버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각각 73표를 얻었다. 당시 헌법 규칙에 따라 결정권은 하원으로 넘어갔다. 임기 종료를 앞둔 그 하원은 연방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러 날에 걸쳐 35차례 투표하고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1801년 2월 17일, 36차 투표에서 제퍼슨이 선출됐다. 이 교착은 최초의 선거 제도가 정당 등장 이후의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한 정당의 한 조로 묶어 내세우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위기가 낳은 직접적인 제도적 결과가 수정헌법 제12조였다. 이후 선거인들은 대통령과 부통령에게 각각 따로 투표해야 했다. 대통령 후보 중 과반을 얻은 사람이 없으면 하원이 최다 득표자 세 명 가운데 대통령을 선출하게 됐다. 이 변경은 1804년에 발효됐다. 이 구조에서 그 의미는 근본적이다. 1800년의 위기를 해결한 방법은 이제부터 정당을 없애자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규칙을 고쳐 정당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도가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낳은 잔여항 앞에서 이 구조는 잔여항을 제거하는 대신 자기 규칙을 바꾸어 그것을 받아들였다. 정당이 없는 척하지 않았다. 정당이 이미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위해 규칙을 다시 썼다.
바로 이 모든 일이 앞서 있었기에 1801년의 평화적 정권 이양은 결정적인 상징성을 지닌다. 미국에서 한 정당이 자신과 적대하는 다른 정당에 평화롭게 권력을 넘긴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의 대서양 세계에 놓고 보면 이런 교체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배경이다. 이미 연방 형법으로 이견을 억압했고, 주 의회들은 연방의 월권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으며, 정당 내부는 공개적으로 갈라졌고, 선거는 헌법적 교착에 빠졌다. 그런데도 끝내 정권을 넘겼다. 그 사실 자체가 폐쇄를 추구하지 않는 이 구조의 힘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렇다고 평화적 이양이 패배한 쪽의 조용한 퇴장을 뜻하지는 않았다. 퇴임 직전의 마지막 시기에 연방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1801년 사법부법을 통과시켰다. 연방대법원 정원을 6명에서 5명으로 줄이되 다음 결원이 생길 때부터 적용하게 했고, 순회법원 체계를 재편하면서 순회법원 판사직 16개를 새로 만들었다. 하급 연방법원의 관할도 헌법이 허용하는 한도에 가깝게 넓혔다. 공화파는 이 막차 인사를 ‘한밤중의 판사들’이라고 비꼬았다. 선거로 구성되는 두 권력 부문을 잃은 연방당이 자기 세력을 사법부에 박아넣으려 한 마지막 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801년의 이양은 평화로웠지만 순결하지는 않았다. 평화와 자리 선점이 함께한 이양이었다.
한밤중의 판사들 사건은 그 자체로 이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선거로 구성되는 두 권력 부문을 잃은 연방당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고, 권력 이양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법 하나를 통과시키고 일련의 임명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선거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직접적으로 받는 사법부에 자기 영향력을 밀어넣었다. 자리 선점이되 규칙 안에서 벌인 자리 선점이었다. 이 구조가 사람을 천사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당파 싸움의 각 진영은 여전히 온갖 방법을 짜내 자기 자리와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이 구조는 그렇게 자신을 밀어넣으려는 충동마저 입법과 임명이라는 합법적 형식으로 끌어들였다. 거리로 내몰지 않았다. 평화적 이양의 진정한 뜻은 애초에 싸움이 멈췄다는 데 있지 않다. 싸움을 규칙이라는 우리 안에 가뒀다는 데 있다.
7. 맺음말
이 연작의 틀로 돌아가 보면, 애덤스의 4년은 폐쇄 충동의 온전한 본보기를 남겼다. 동시에 이 구조가 처음 치른 체제 차원의 스트레스 테스트에 대해서도 하나의 완결된 답안을 제공했다.
이 글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애덤스 시대에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억누르려는 연방 차원의 폐쇄 충동이 처음 나타났지만, 이 제도는 이견을 눌러 없애서 안정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갈등이 계속 존재하게 두고 그것을 법률, 주 의회, 선거와 정권 교체로 이끌어감으로써 첫 번째 체제적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했다. 바로 그래서 선동법과 1800~1801년의 선거 및 정권 이양은 한 글 안에 나란히 놓아야 한다. 따로 떼어 다룰 수 없다. 앞의 것은 이 구조가 스스로를 닫으려던 충동이고, 뒤의 것은 그 충동을 구조 자신이 어떻게 다시 흡수했는지 보여주는 과정이다.
흡수는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선동법은 자체 일몰 조항에 따라 1801년 3월 3일 자동으로 효력을 잃었다. 이 폐쇄 충동에는 처음부터 기한이 있었다. 주들의 항의는 이견을 연방과 주의 관계로 옮겨놓았다. 선거와 정권 이양은 격렬한 당파 싸움을 규칙 안으로 끌어들였다. 후세에 차츰 형성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기억은 훨씬 긴 시간에 걸쳐 이번 탄압을 잘못으로 규정했다. 이 구조가 자신을 바로잡은 것은 당시에 단 한 번의 최종 판정을 내려서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이어진 이 일련의 흡수 덕분이었다.
‘1800년 혁명’이라는 말은 두 층위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신중하다. 정권을 맡는 정당이 바뀌었고, 선거 규칙이 개혁됐으며, 이후 야당도 집권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보면 분명 혁명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헌정 질서의 연속성에서 보면 체제 내부의 교정에 더 가깝다. 헌법을 뒤엎지도 않았고 연방 기구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정권 이양과 헌법 개정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기존 체제 안에 받아들였다. 두 층위를 함께 보아야 과장하지도, 가볍게 보지도 않을 수 있다.
이번 스트레스 테스트는 통과했다. 그러나 통과한 방식 속에는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두 가닥의 실마리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주를 최종 해석자로 삼는 언어였다. 이번에는 실제 월권에 저항하는 데 쓰였지만, 더 먼 훗날 다른 세력들이 꺼내 쓸 위험한 어휘 창고가 되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행정권과 사법권의 관계였다. 한밤중의 판사들이 이 문제를 무대 앞으로 끌어냈다. 다음에 등장할 제퍼슨은 헌법의 엄격한 해석과 연방 권력의 제한을 내걸고 집권한다. 그러나 정적들이 세운 국가 기구를 해체하는 대신 물려받았고, 취임하자마자 그 한밤중의 판사들이 남겨놓은 난제와 마주해야 했다. 엄격한 해석자의 역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