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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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애덤스 — 최초의 폐쇄 충동과 최초의 평화적 권력 이양

외부의 위기를 내부의 적으로 번역한 정부는 선거의 패배를 견딜 수 있었는가

Han Qin (秦汉) · 2026

워싱턴의 정부는 정당 갈등을 없애지 못했지만 그것을 선거와 언론 안에 남겨 두었다. 존 애덤스의 네 해는 그 원칙이 실제 위기 앞에서 얼마나 쉽게 뒤집힐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외국과의 충돌, 집권당 내부의 분열, 거친 선거가 겹치자 정부는 반대 의견을 보호해야 할 여항(餘項)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선동법 하나로만 기억해도 반쪽이다. 같은 대통령이 자기 당의 전쟁파와 충돌하며 프랑스와 평화를 택했고, 패배 뒤에는 적대 정당에 권력을 넘겼다. 폐쇄 충동과 자기제한이 한 임기에 공존했다는 사실이 이 글의 중심이다.

1. 실제 위기에서 시작된 공포

1794년 제이 조약 뒤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았고, 1796년부터 미국 상선을 대규모로 나포했다. 피해 선박은 300척을 넘었다. 애덤스가 마주한 해상 위기는 꾸며 낸 공포가 아니었다. 문제는 실제의 위기가 국내 반대파를 처벌할 이유로 번역되는 과정이었다.

1797년 미국 사절단은 파리에서 공식 협상 전에 대출과 금품을 요구받았다. 애덤스 정부가 문서를 공개하면서 프랑스 측 중개인을 X·Y·Z로 익명 처리해 ‘XYZ 사건’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반프랑스 여론이 폭발했고, 1798년 해군부 창설과 상설 해군의 재건은 큰 지지를 얻었다.

이어진 유사전쟁은 정식 선전포고 없는 해상 충돌이었다. 젊은 연방이 함대를 조직하고 상선을 지킬 능력이 있음을 보였지만, 안보 불안은 곧 정당 경쟁과 결합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비판자를 겹쳐 보는 순간, 국가 역량은 보호의 도구에서 폐쇄의 도구로 바뀔 수 있었다.

애덤스의 정치적 고립도 위기를 증폭했다. 내각의 여러 인사는 대통령보다 해밀턴의 영향 아래 있었고, 상비군 확대를 둘러싼 연방당 고위파의 구상은 전쟁을 당내 권력의 자원으로 만들었다. 대통령·내각·당 지도부가 서로 다른 전쟁과 평화의 시간을 살았다.

2. 외국인·선동법이 닫으려 한 것

1798년의 네 법은 서로 달랐다. 귀화에 필요한 거주 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린 법, 대통령에게 위험한 외국인을 추방할 권한을 준 법, 전쟁 시 적국 신민을 다룬 법이 있었고, 국내 정치비판을 직접 형사처벌한 선동법이 있었다. 하나의 이름 아래 묶되 법적 기능은 구분해야 한다.

선동법은 정부·의회·대통령을 모욕하거나 증오하게 할 의도로 ‘허위이고 악의적이며 중상적인’ 글을 쓰거나 출판한 사람을 처벌했다. 진실을 항변할 수 있고 배심이 법과 사실을 함께 판단한다는 장치도 있었지만, 정치적 풍자와 의견은 법정에서 ‘진실’로 입증하기 어렵다. 형식적 안전장치가 비판의 공간을 충분히 지키지 못한 이유다.

더 노골적인 단서는 보호 대상에 부통령이 빠졌다는 점이다. 당시 부통령은 야당 지도자 제퍼슨이었다. 집권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범죄가 될 수 있지만 야당 인물에 대한 공격은 같은 방식으로 보호받지 않았다. 국가안보법의 문법이 당파적 유불리와 결합한 순간이었다.

3. 법은 누구의 몸에 닿았는가

집행 규모는 연구에 따라 다르게 제시된다. 오래된 서술은 대체로 14~17건의 기소와 약 10명의 유죄를 말했지만, 웬들 버드의 기록 연구는 확인 가능한 기소를 51건, 피고를 33명으로 늘렸다. 숫자 하나를 확정하기보다 기존 집계가 압박의 범위를 상당히 축소했을 수 있다고 쓰는 편이 정직하다.

버몬트의 현직 하원의원 매슈 라이언은 애덤스의 통치 방식을 비판한 글로 유죄판결을 받아 넉 달의 수감과 1천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가 감옥에서 재선되었다는 사실은 제도의 긴장을 한 장면에 모은다. 정부는 한 사람을 가둘 수 있었지만, 유권자가 그를 다시 제도 안으로 보내는 통로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선동법은 존속 중 대법원의 위헌심사를 받지 못하고 1801년 만료되었다. 훗날 대법원은 이 법에 대한 공격이 ‘역사의 법정’에서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즉각적인 사법 교정은 없었지만, 실패의 기억이 이후 언론자유를 해석하는 부정적 선례가 되었다. 구(構)는 언제나 그때 옳게 판단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다시 하지 말자는 기억으로도 수정된다.

4. 반대는 주로 이동했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익명으로 켄터키·버지니아 결의의 초안을 써서 연방법에 맞섰다. 두 문서는 헌법을 주들의 합의로 보고 연방이 고의적이고 명백하며 위험하게 권한을 넘을 때 주가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방의 폐쇄가 반대를 없애기는커녕 연방과 주의 관계로 옮긴 셈이다.

다만 두 결의를 훗날의 단독 주 무효화나 분리독립론과 그대로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제퍼슨 초안의 강한 ‘무효화’ 표현은 1798년 켄터키가 채택한 최종문에서 빠졌고, 다른 14개 주 가운데 지지한 곳은 없었다. 즉각적인 연합 저항의 성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기적 영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후대의 주권론자들은 이 문서에서 언어를 가져왔다. 가장 신중한 결론은 두 결의가 후대 분리론의 단일한 뿌리는 아니지만, 연방 권한에 맞서는 여러 세력이 인용할 수 있는 어휘의 창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항은 사라지지 않고 형식을 바꾸었다.

5. 자기 당을 거슬러 연 평화의 출구

애덤스는 1799년 프랑스와의 두 번째 협상을 밀어붙였다. 유사전쟁이 이어지고 연방당 내부의 전쟁파가 강한 상황에서 새 사절단을 보내는 결정은 그를 내각과 당으로부터 더 고립시켰다. 해밀턴은 1800년 선거 때 같은 당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만큼 결별했다.

협상의 결과인 1800년 협약은 유사전쟁을 끝내고 1778년 미불동맹을 종료했다. 여기서 범위를 정확히 해야 한다. 1778년 동맹조약은 1800년까지 미국이 공식 비준한 유일한 동맹조약이었다. 이 표현은 이후 미국이 어떤 동맹도 맺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 시점까지의 헌정·외교 기록을 한정한다.

애덤스는 훗날 프랑스와 평화를 만든 일을 생애에서 가장 공적인 공로로 여겼다. 그러나 이 선택이 선동법의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비판을 범죄화한 대통령과 전쟁을 피하려 당내 지지를 잃은 대통령은 같은 사람이다. 구조 분석은 둘 중 편한 하나를 골라 도덕극으로 만드는 대신 그 긴장을 보존해야 한다.

6. 1800년 선거가 드러낸 규칙의 결함

1800년 선거는 정제된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니었다. 연방당은 제퍼슨을 무신론과 프랑스혁명의 공포에 연결했고, 공화당은 애덤스를 군주적 폭군으로 묘사했다. 적대가 극단에 이르렀는데도 권력 경쟁이 총이 아니라 표와 헌법 절차로 남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퍼슨과 에런 버가 각각 선거인단 73표로 동률이 되면서 결정은 하원으로 넘어갔다. 퇴임을 앞둔 연방당 우위 하원은 닷새 동안 35차례 결론을 내지 못했고, 1801년 2월 17일 제36차 투표에서야 제퍼슨을 뽑았다. 원래 제도는 정당이 대통령·부통령 후보를 한 묶음으로 내는 현실을 예상하지 못했다.

직접적 제도 수정이 수정헌법 제12조였다. 1804년부터 선거인은 대통령과 부통령에게 따로 투표하게 되었다. 해결 방식은 정당이 사라지기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에 규칙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것이 착구주기율에서 말하는 재구성이다. 현실이 기존 규칙을 뚫으면 구는 여항을 인정하는 쪽으로 자신을 고쳐야 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시간차가 있다. 1800년의 교착은 기존 조문 안에서 36차 표결까지 견딘 뒤에야 끝났고, 새 규칙은 그 위기가 지난 다음 만들어졌다. 자기교정은 위기를 미리 방지하는 완벽한 설계보다, 살아남은 실패를 다음 반복의 조건으로 바꾸는 느린 과정이었다.

7. 평화적 이양은 싸움의 종말이 아니었다

1801년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 정당이 반대 정당에 평화적으로 대통령직을 넘긴 해였다. 그 전에 형사법을 이용한 야당 탄압, 주 의회의 연방 비판, 여당 내부의 분열, 선거인단 교착이 모두 있었다. 좋은 감정이 아니라 나쁜 감정 속에서도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선례의 힘이다.

연방당이 순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퇴임 직전 1801년 사법법으로 순회법원 체계를 바꾸고 새 법관 자리를 만든 뒤 이른바 ‘한밤의 판사’를 임명했다. 선출된 두 부문에서 밀려난 세력이 사법부에 영향력을 남기려 한 규칙 안의 자리싸움이었다.

그 자리싸움은 다음 임기 마버리 대 매디슨으로 이어져 오히려 사법심사의 관행을 낳았다. 패배한 정당의 방어적 인사가 다른 분지의 장기 권한을 키운 셈이다. 정치 행위의 결과는 행위자의 목적대로 닫히지 않고 제도 안에서 예기치 않은 구를 만든다.

애덤스 시대의 교훈은 갈등이 사라져야 이양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외부 위기를 핑계로 내부 반대를 닫으려는 충동은 실제로 작동했고 사람을 감옥에 보냈다. 그러나 주·법정·신문·선거로 이동한 저항은 끝내 권력을 교체했다. 이 구는 천사를 만들지 못했지만 싸움을 권력 순환의 규칙 안에 남기는 데 처음 성공했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