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워싱턴,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체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다
헌법의 빈칸을 채운 것은 조문만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행동이었다
이 글의 목차
1787년 필라델피아는 미국에 틀을 마련해 주었지만, 작동 설명서까지 주지는 않았다. 헌법에는 입법·행정·사법의 세 부문을 어떻게 구성하고 서로 견제하게 할지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어떤 절차로 취임해야 하는지, 상·하원과 일상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장관들을 한자리에 불러 의논해도 되는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재정국가를 무에서 어떻게 세울 것인지, 갑작스러운 외교 위기 앞에서 대통령이 의회보다 먼저 국가의 입장을 발표해도 되는지도 마찬가지였다. 문서 속에서 이 문제들은 모두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훗날 미국 제도의 당연한 일부로 여겨진 많은 것들이 1789년부터 1797년까지의 이 8년 동안에는 아직 형태가 잡히지 않은 관행에 불과했다. 그것들이 제도로서 무게를 갖게 된 것은 워싱턴이 특정한 방식으로 빈칸을 채웠고, 그 방식이 후임자들이 따르는 선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임기를 이 시리즈의 출발점에 놓고 보려면, 그를 대체 불가능한 위인으로 그리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보아야 한다. 그의 역사적 의미는 설계도 속의 공화국을 실제로 돌아가는 공화국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전환에는 첫날부터 제도로 없앨 수 없고 다만 그 안에 품을 수밖에 없는 긴장이 따라붙었다.
먼저 미국에 구축된 이 체계를 그 이전의 수많은 체계와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징 하나를 짚어 두자. 이 기계를 설계한 매디슨 세대는 통치자의 덕성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권력을 쥔 사람은 실수하고, 이해관계와 격정에 이끌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를 넘으려 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래서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게 했으며, 연방과 주라는 이중 구조를 두었다. 갈등과 이견을 말끔히 없애려 하는 대신 제도 자체가 그것들을 품게 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체계는 처음 설계될 때부터 스스로를 닫아 완결하는 길을 포기했다. 그저 소극적으로 의견 차이를 내버려 둔 것도 아니다. 이견과 다툼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갈등을 자기 구조 안에 받아들여 합법적인 통로를 마련했다. 의견 차이가 전혀 없는 하나의 통일된 의지도, 모든 모순을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는 일도 추구하지 않았다. 모순이 오래 남아 있되 구조에 수용되고 그 안에서 계속 변화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그렇기에 이 체계가 만들어 내는 잔여항은 체계를 반드시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체계는 그것들을 계속 받아들였고, 잔여항도 그 안에서 줄곧 전개될 수 있었다. 이 시리즈가 중간에 끊기지 않고 2세기 뒤까지 이어질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잔여항을 끊임없이 수용하는 과정이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거듭 드러나겠지만, 바로 이것이 이 시리즈에서 앞서 살펴본, 닫힌 완결을 추구했던 수많은 체계와 미국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가르는 지점이다.
워싱턴은 바로 이 특징이 처음 시험대에 오르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자신이 이런 설계를 온전히 지지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는 당파를 싫어했고, 다툼을 넘어선 공화국의 단결을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작동시켜야 할 기계의 논리는 그의 개인적 소망과 꼭 들어맞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8년의 이야기는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체계가 닫힌 완결을 꿈꾸는 사람의 손에서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결국 어떻게 체계의 논리가 우세해졌는지를 보여 준다.
1. 선례: 틀을 채워 제도로 만들다
1789년 4월 30일, 워싱턴은 뉴욕의 페더럴 홀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선서를 마친 뒤에는 상원 회의장으로 들어가 상·하원 의원들 앞에서 첫 취임사를 발표했다. 이 일 자체가 하나의 선례였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취임 연설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워싱턴이 그렇게 한 뒤로 후임 대통령들이 계속 따르는 관례가 되었다. 헌법의 명문에서 나온 것이 아닌 행동이 그때부터 대통령직에 본래 딸린 요소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워싱턴은 자신이 선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또렷하게 의식했다. 취임을 얼마 앞두고 헨리 녹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대통령직을 받아들이는 심정을 처형을 앞둔 사형수의 마음에 빗댔다. 이듬해 초 다른 편지에는 훗날 거듭 인용될 말을 적었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땅을 걷고 있다(I walk on untrodden ground).” 자신이 내딛는 거의 모든 걸음이 후세 사람들에게 선례로 인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겸양을 위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묘사한 말이었다. 당시 대통령직에는 사용 설명서가 없었고, 그 설명서를 써야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첫 취임사에도 그가 이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드러난다. 서두에서 그는 자신이 권좌를 열망해서가 아니라 불안한 마음으로 공적인 부름에 응해 이 자리를 맡았다고 강조했다. 중간 대목에서는 새 정부의 성패를 시민의 덕성, 제도의 실천, 공공의 책임과 연결했다. 또한 “자유의 신성한 불꽃(sacred fire of liberty)”과 “공화정의 모범(republican model of government)”이라는 표현을 쓰며 공화국의 운명을 국민에게 걸었다. 이 연설은 새 정부의 첫인사이자 공화국이 하나의 실험임을 분명히 밝히는 말이었다. 성공과 실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실제로 운영해 나가는 과정에서 답해야 했다.
인사에서도 문서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드러났다. 헌법은 내각이라는 집단적 기구를 만들지 않았다. 1789년 여름과 가을에 의회는 전쟁부, 재무부, 외무부를 잇달아 설치했고, 외무부는 뒤이어 국무부로 개편되었다. 사법조직법으로는 법무장관직이 신설되었다. 그해 가을까지 워싱턴은 훗날 초대 내각의 핵심으로 꼽힐 주요 인사들을 정해 두었다. 재무장관 해밀턴, 국무장관 제퍼슨, 전쟁장관 녹스, 법무장관 랜돌프였다.
다만 이 대목에는 오늘날의 연구가 바로잡아 주는 부분이 있다. 내각은 워싱턴이 1789년에 취임하자마자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역사가 처빈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워싱턴은 임기 첫 2년여 동안 주로 서면 의견을 받거나 각료들을 따로 만나고 필요에 따라 의논하는 방식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정식 전체 내각회의로 통상 여겨지는 모임을 연 것은 1791년 말에 이르러서였다. 곧 내각은 헌법 문구에서 곧바로 탄생한 기구가 아니라, 워싱턴이 통치의 압박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 낸 행정부의 협의 방식이었다. 그가 재임 중 정식 내각회의를 몇 번 열었는지를 두고도 현대 문헌에는 97회와 99회라는 작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오히려 당시에는 어떤 모임을 정식 내각회의로 셀 것인지조차 아직 확정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제도의 가장 핵심적인 작동 방식마저 굳어지지 않은 상태, 그것이 이 체계가 출발할 무렵의 실제 모습이었다.
2. 재정국가: 체계를 실전에 투입하다
이 체계를 처음 실전으로 밀어 넣은 것은 해밀턴의 재정 구상이었다. 1790년 초 해밀턴은 의회에 공공신용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독립전쟁이 전국에 남긴 부채를 처리하는 일을 신생국의 신용을 세우는 토대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그가 산출한 부채 총액은 약 7,700만 달러로, 연방 부채와 각 주의 부채, 밀린 이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핵심 원칙은 계약에 명시된 액면가를 지켜 채무의 신뢰를 유지하고, 각 주의 빚을 연방이 떠안으며, 공공신용을 국가 역량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구상에는 정치적 폭발력이 큰 쟁점이 둘 있었다. 하나는 주 정부 부채의 인수였다. 연방이 각 주의 독립전쟁 부채를 넘겨받는 데 북부의 몇몇 주는 찬성했지만, 자기 빚을 이미 거의 갚은 남부의 일부 주는 크게 반발했다. 남의 빚까지 대신 갚아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대체 누구에게 돈을 갚을 것이냐는 문제였다. 최초 보유자와 나중에 헐값으로 사들인 투기꾼을 구별하지 않고, 현재 증권을 가진 사람에게 액면가 그대로 지급해야 하는가. 하원에서 매디슨은 원래 보유자에게 일정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둘을 구분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해밀턴은 계약의 연속성과 시장의 신용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현재 보유자의 권리를 건드리는 순간 신생국 전체의 신용 기반이 흔들린다고 본 것이다.
주 정부 부채 인수를 둘러싼 교착은 결국 1790년의 정치적 거래로 풀렸다. 전통적인 서술에서는 이를 ‘만찬의 타협’이라 부른다. 제퍼슨이 자기 집에 해밀턴과 매디슨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교환을 성사시켰다는 이야기다. 연방 수도의 최종 입지를 포토맥강 유역으로 정하는 대신 주 정부 부채 인수안을 통과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그해 7월 수도입지법이 통과되어 수도를 포토맥으로 옮기기로 했고, 8월에는 공채조달법(Funding Act)이 통과되어 연방 부채의 자금 조달과 주 정부 부채 인수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특정한 밀실 거래로서 이 만찬의 세부 경위는 주로 제퍼슨이 나중에 남긴 회고에 의존한다. 따라서 법률 문구처럼 세세한 내용까지 확정할 수는 없다. 둘째, 정치적 교환이 있었다는 큰 윤곽 자체는 대다수 연구에서 받아들인다. 기억해 둘 만한 사실은 수도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조차 미리 정해진 계획이 아니라 거래로 해결되었다는 점이다.
뒤이어 국립은행 논쟁이 벌어졌다. 1790년 말 해밀턴은 국립은행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2월 제1합중국은행 설립 법안이 통과되었고, 워싱턴은 2월 25일 서명하여 법으로 확정했다. 은행을 둘러싼 논쟁은 헌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처음으로 날카롭게 드러냈다. 해밀턴은 의회가 ‘필요하고 적절한 조항’에 근거해 묵시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열거된 권한을 좀 더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헌법 어디에도 연방에 회사 설립권을 준다는 명문은 없다는 것이다. 워싱턴은 결국 해밀턴의 해석을 받아들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 결정은 이후 연방 권한을 넓게 해석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해밀턴 구상의 장기적 영향을 두고 역사학계의 평가는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특히 경제사에서 두드러지는 해석은 공공신용과 국립은행, 증권시장이 맞물리는 그의 구상이 미국 근대 자본시장과 기업 자금 조달, 국가의 차입 능력에 금융적 토대를 놓았다고 본다. 관련 연구에서는 1790년부터 1792년 사이 전국에서 새로 인가된 회사의 수가 이례적으로 빠르게 늘었고 증권 거래도 급속히 활발해졌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비어드 계열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해석은 이 구상이 증권 보유자, 상인, 유산계층의 이해관계와 결합했다는 점을 더 강조한다. 국가를 건설하면서 특정 이익집단까지 새 제도 안에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에들링을 비롯한 비교적 최근의 연구는 개인이 엘리트를 편들었는지에서 국가 역량으로 질문의 초점을 되돌리려 한다. 중요한 것은 해밀턴이 유산계층에 편향되었느냐가 아니라, 공공신용을 이용해 재정 능력이 거의 없던 느슨한 연합을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 국가로 바꾸었느냐는 것이다. 이 평가들을 나란히 놓으면 재정국가의 수립이 역량의 토대를 놓는 일이자 이해관계를 배치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이 점은 이 체계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 닫힌 완결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갈등을 품기로 했다고 해서 힘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제로 통일을 이루는 체계보다 실질적인 국가 역량이 더 필요하다. 이견이 계속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행동하고, 빚을 갚고, 국제질서 속에서 믿을 만한 상대국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연합은 재정적으로 거의 마비되어 있었다. 논의는 할 수 있어도 실행하기는 어려웠고, 군인들의 밀린 급료와 대외 채무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워싱턴 재임기에 세워진 재정국가가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어떻든, 이 체계가 결정을 행동으로 옮길 물질적 토대를 갖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견을 수용하는 체계에 필요한 것은 더 적은 역량이 아니라 더 단단한 역량이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맞닥뜨리는 진짜 압력 앞에서 흩어져 버릴 것이다. 이 흐름은 앞으로도 거듭 나타난다. 체계 전체를 뒤흔들 만큼 큰 위기를 만날 때마다 대응은 흔히 축소가 아니라 행동 능력의 확장이었다. 링컨의 전시 재정에서 뉴딜의 행정국가를 거쳐 냉전기의 국가안보 체제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역량의 축적은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이 체계가 2세기 넘게 잔여항을 계속 품어 올 수 있었던 물질적 전제다. 그 흐름의 출발점이 바로 해밀턴의 이 몇 편의 보고서에 있다.
3. 인정받은 잔여항: 당파 간의 다툼
워싱턴은 정당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점은 1796년의 고별 서한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워싱턴 정부가 운영되는 과정 자체가 정당의 탄생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해밀턴이 가려던 길은 강력한 연방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공적인 신뢰와 채무 상환 능력을 갖추고, 상인과 채권자의 이해관계를 결집하며, 국제질서 속에서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국가였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그런 국가가 재정과 행정, 사회적 영향력을 소수의 손에 집중시켜 공화국을 지방자치와 독립 자영농에 뿌리를 둔 정치적 덕성에서 멀어지게 할까 봐 갈수록 우려했다. 그러므로 해밀턴 대 제퍼슨의 대립을 단순한 성격 충돌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 국가를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노선 투쟁으로 보아야 한다. 재정에서는 공공신용, 은행, 주 정부 부채 인수, 금융 엘리트를 바라보는 시각이 쟁점이었다. 헌법에서는 넓은 해석과 엄격한 해석이 맞섰다. 사회의 미래상에서는 상업·금융 공화국과 농업 공화국이라는 두 구상이 충돌했다. 외교에서는 점차 영국과 프랑스혁명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는 입장으로 나타났다. 1792년과 1793년 무렵이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는 신문, 의회의 표결, 주 단위의 조직, 전국적인 여론 속에서 상당히 안정된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결국 힘을 합쳐 반행정부파의 연결망을 구축했다. 훗날의 민주공화파다. 해밀턴은 재정과 신문을 매개로 한 연결망을 활용해 정부 지지 세력을 연방파로 결집했다.
여기서는 개념을 좀 더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정말 없앨 수 없는 잔여항은 당파라는 조직 자체가 아니다. 근본적인 의견 차이에서 생기는 정치적 갈등, 곧 당파 간의 다툼 그 자체다. 당파는 그 갈등이 조직되고 눈에 보이는 모습을 얻은 형태일 뿐이다. 워싱턴이 경고한 것도 당파의 정신, 곧 다툼 자체였지 조직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강조해야 할 구조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경쟁적인 대의제 아래에서 국가의 방향을 둘러싼 중대한 이견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다툼은 반드시 생기고, 조만간 당파로 조직된다. 이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과다. 워싱턴은 당파를 위험하게 여겼지만 다툼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 실패라기보다 제도가 깊은 이견을 저절로 해소해 합의로 바꾸어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이 체계의 핵심이 있고, 닫힌 완결을 추구하는 질서와의 차이가 있다. 스스로를 닫아 완결하려는 체계는 다툼을 반드시 도려내야 할 병소로 본다. 온갖 방법으로 이견을 억눌러 하나의 통일된 의지를 얻으려 한다. 미국의 체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의견 차이가 사라지리라 가정하지도, 초연한 지도자 한 사람이 이견을 억눌러 잠재워 주리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아예 다툼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권력 분립과 견제, 신문과 선거라는 공개적 통로를 주어 구조 안에서 겨루게 한다. 워싱턴이 바라던 당파 없는 공화국의 단결은 본질적으로 닫힌 완결을 향한 기대, 하나로 통일된 국가 의지에 대한 기대였다. 하지만 그가 작동시켜야 하는 체계는 설계부터 그런 통일된 의지에 의존하지도,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둘이 맞닥뜨렸을 때 결국 드러난 것은 체계의 논리였다. 다툼은 어김없이 생겼고 당파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제도는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그 다툼이 제도를 찢어 놓지는 않았다.
인정하느냐 억누르느냐의 차이는 깊고 오래가는 영향을 남긴다. 인정받은 잔여항은 공개된 통로 안에서 계속 전개될 수 있다. 변화하고 재편되고 형태를 바꾸면서도 언제나 제도의 시야 안에 남는다. 억눌린 잔여항은 지하로 숨어들어 쌓였다가 주기적으로 격렬하게, 때로는 폭력적으로 다시 터져 나온다. 이것이 미국의 이야기와 이 시리즈에서 앞서 다룬 이야기들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차이 중 하나다. 미국은 초대 정부 때부터 어수선해 보였다. 당파 싸움은 치열했고 신문들은 서로 헐뜯었다. 후대 사람들은 이 혼란을 제도의 결함으로 곧잘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면 이 혼란이야말로 체계가 잔여항을 인정한다는 증거다. 다툼이 그토록 공개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그것을 짓누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갈등을 설계 안에 받아들인 체계는 통일을 추구하는 질서만큼 가지런해 보일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자신이 만들어 낸 잔여항이 계속 전개될 수 있다. 다시 억눌렸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는 길을 가는 대신에 말이다.
워싱턴 본인은 얼마나 초당파적이었는가. 오늘날의 연구는 이 질문 앞에서 전통적인 교과서보다 훨씬 신중하다. 오래된, 좀 더 숭앙하는 시각의 서술은 그가 언제나 당파 위에 서 있었다고 강조하곤 했다. 반면 최근의 많은 연구는 주요 정책, 특히 은행과 재정, 프랑스를 둘러싼 위기, 훗날 제이 조약을 끝까지 지지한 일에서 그가 점점 더 해밀턴 편에 섰다고 지적한다. 어떤 학자는 이를 워싱턴과 당파의 역설이라고 요약한다. 당파 정치를 반대하면서도 정책에서는 연방파 강령의 가장 중요한 수호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당파적 정신 자체를 반대했지만 통치 과정에서 하나씩 선택을 내릴수록 해밀턴식 국가 건설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니 워싱턴의 한계를 개인적인 위장보다 제도적 현실에서 찾는 편이 낫다. 그는 당파를 초월하고 싶어 했지만 중대한 의견 대립이 생길 때마다 거듭 어느 한쪽을 택해야 했다. 다툼 위에 서려던 사람이 자신이 운영하는 체계 때문에 계속 다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잔여항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4. 외교 위기가 끌어낸 행정권의 문제
당파가 이 체계 내부에서 생겨난 잔여항이었다면, 외교 위기는 다른 방향에서 그만큼 오래갈 문제를 끌어냈다. 대외 문제에서 대통령은 대체 어느 정도까지 먼저 판단하고 행동할 권한을 갖는가.
1793년 유럽에서 다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자 워싱턴은 4월 22일 중립선언을 발표했다. 이 문서의 핵심은 미국이 중립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있지 않았다. 교전국들을 “우호적이고 공평하게(friendly and impartial)” 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시민들이 사적인 행동으로 그 입장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는 데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연방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기소될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의회가 먼저 법을 만들어 입장을 밝히기도 전에 대통령이 국가의 외교적 태도를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이후 행정부의 외교 권한을 둘러싼 논쟁의 진짜 출발점이다.
뒤이어 벌어진 파시피쿠스와 헬비디우스의 논쟁은 이 문제를 이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해밀턴은 파시피쿠스라는 필명으로 중립선언을 옹호했다. 헌법이 일반적인 행정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으므로, 명시적으로 의회에 유보된 예외를 제외하면 대통령이 국가의 대외 의무와 입장을 먼저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매디슨은 헬비디우스라는 이름으로 반박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권한은 근본적으로 입법부에 속하므로, 대통령이 중립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대외적 법적 지위를 우회하여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사실상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대외적 주도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처음 온전한 형태로 공론장에 올려놓았다. 이 질문은 그 뒤 2세기가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링컨의 손에서, 루스벨트의 손에서, 냉전기의 국가안보 체제에서, 닉슨의 손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타날 것이다. 중립선언은 이 문제를 종결하지 않았다. 이제 막 열었을 뿐이다. 이것 역시 잔여항이다. 체계는 행정권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을 시작했지만, 그 논쟁에 단번에 영구적인 종지부를 찍지는 못했다. 그럴 수도 없었다.
주네 사건은 중립 정책을 추상적인 법리에서 거리의 정치로 끌어냈다. 1793년 미국에 도착한 프랑스 사절 주네는 찰스턴 등지에서 사략 허가장을 발급하며 미국인들에게 영국과 스페인에 맞서는 프랑스를 지원하라고 부추겼다. 연방정부의 경고를 받고도 사략 활동을 계속 추진했고, 심지어 정부를 건너뛰어 미국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결국 워싱턴 정부는 프랑스에 그의 소환을 요구했다. 이 사건에서 시험대에 오른 것은 미국이 친프랑스 국가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외국 사절이 미국 내부의 의견 차이를 곧바로 외교 정책으로 바꾸어, 헌정 절차를 우회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제이 조약은 이런 의견 대립을 한층 더 제도적 차원으로 옮겼다. 조약은 1794년 11월에 체결되었다. 워싱턴은 이듬해 6월 상원에 동의를 구했고, 상원은 3분의 2 문턱에 간신히 걸친 찬성 20표, 반대 10표로 조건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워싱턴은 그해 8월 비준했다. 조약은 1795년 10월 발효되었고, 1796년 2월 공식 공표되었다. 당시 기록들은 이 조약이 대중에게 몹시 인기가 없었다는 데 일치한다. 하지만 워싱턴은 조약을 통해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국가가 계속 기반을 다지고 회복하며 재무장할 시간을 얻었다고 보았다. 반대자들에게는 영국과 상업적 이해관계, 연방 행정권을 위한 양보였다. 지지자들에게는 약소국이 국제질서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택한 현실주의적 방책이었다.
이 세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선명한 구조적 흐름이 보인다. 1793년부터 1796년 사이의 외교 위기는 위기 상황에서 행정부가 먼저 움직이는 문제를 놓고 미국 대통령제에 일련의 선례를 써 넣었다. 그리고 그 선례들은 처음부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중립선언, 주네 사건, 제이 조약은 서로 떨어진 외교 뉴스 세 건이 아니다. 한 줄기로 이어진 제도의 역사다. 이 사건들이 함께 만들어 낸 것은 행정권에 대한 확정적인 결론이 아니라, 앞으로도 거듭 다툼이 벌어질 열린 영역이었다.
5. 연방정부는 자기 영토에서 법을 집행할 수 있는가
외교 위기가 대통령의 대외 권한을 시험했다면, 1794년 위스키 반란은 새 정부에 더 소박한 질문을 던졌다. 연방의 법을 연방의 영토 안에서 실제로 집행할 수 있는가.
1791년 주류 소비세가 통과되자 펜실베이니아 서부를 비롯한 변경 지역의 농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곳에서 위스키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곡물을 운반 가능한 가치로 바꾸는 수단이기도 했다. 현금은 드물고 운송은 어려웠으며 동부 시장과의 연결도 약했다. 이런 조건에서 주민들은 이 세금을 변경 사회에 불균형적으로 무거운 타격을 가하는 조치로 받아들였다. 납세 거부를 둘러싼 협박과 세무 관리에 대한 폭력은 빠르게 격화되었다.
1794년 여름, 네빌 사건을 계기로 사태는 정점에 이르렀다. 성난 군중이 세무 관리 존 네빌의 집을 포위하고 불태웠고, 수천 명의 저항 세력이 브래독 평원에 모였다. 1792년 민병대법에 따르면 통상적인 사법 절차로는 더 이상 법을 집행할 수 없다고 판사가 확인할 경우 대통령이 민병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워싱턴은 먼저 포고문을 내고 평화 사절을 보냈다. 협상이 실패하자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버지니아, 뉴저지의 민병대를 동원했다. 공식 자료와 대중을 위한 역사 자료에서 이 병력은 대체로 1만 3,000명에 가까웠다고 설명된다.
여기서 중요한 세부 사실이 하나 있다. 워싱턴은 실제로 직접 군대와 함께 서쪽으로 갔지만, 전 여정에 걸쳐 전장 지휘를 맡은 것은 아니다. 마운트버넌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일부 병력을 직접 이끌고 펜실베이니아의 베드퍼드까지 간 뒤, 이후의 진군과 소탕 작전은 헨리 리 등에게 맡겼다. 따라서 대통령이 끝까지 친정하여 반란을 평정했다고 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대통령의 자격으로 직접 동원에 나서고 군대와 동행함으로써 연방 권력의 결의를 보여 주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결국 무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저항은 무너졌다. 군대가 펜실베이니아 서부에 들어간 뒤에도 진정한 의미의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약 150명이 체포되었으나 대다수는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고,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그들마저 뒤에 워싱턴에게 사면받았다. 이 결과가 중요한 까닭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느냐에 있지 않다. 연방정부는 법을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온 나라에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늘날의 연구는 이 진압이 완벽한 법치의 교과서였던 것은 아니라고 일깨운다. 체포와 호송 과정의 거친 처우, 절차상의 문제는 지역의 기억에 뚜렷한 그늘을 남겼다. 체계는 법을 집행할 능력을 입증하면서 그 집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불만도 남겼다. 역량을 확립하는 일과 대가를 낳는 일은 흔히 같은 사건의 두 얼굴이다.
6. 가장 깊은 잔여항: 노예제
당파와 행정권, 법 집행의 문제들 너머에서 워싱턴의 임기는 그 어느 것보다 깊은 잔여항과 이어져 있었다. 이것은 권력을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공화국이 누구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다. 바로 노예제다.
새로 태어난 공화국은 자유를 건국의 언어로 삼으면서도 자기 영토 안에 사는 상당수의 사람을 그 언어 밖으로 밀어냈다. 워싱턴 자신이야말로 이 모순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가 사망한 1799년 마운트버넌에는 노예로 붙잡혀 살던 사람이 모두 317명 있었다. 그 가운데 법적으로 워싱턴 개인의 소유여서 그가 유언으로 해방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은 123명뿐이었다. 나머지 다수는 아내가 상속을 통해 관리하게 된 혼인 재산에 딸린 노예들이었다. 마운트버넌과 관련 연구들은 워싱턴이 자기 소유의 노예들을 원칙적으로 아내가 죽은 뒤 해방하되, 윌리엄 리는 즉시 해방하도록 유언한 것이 중요하고도 드문 결정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 결정이 적용되는 사람은 농장에 살던 전체 노예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범위를 넓히면 그가 평생 소유하거나 관리했던 노예가 모두 약 670명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더 복잡한 것은 워싱턴이 사적으로는 실제로 노예제에 대한 불편함과 점진적 폐지의 희망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사적 서신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그는 1780년대와 1790년대에 더 이상 노예주로 살고 싶지 않으며 노예를 사고팔거나 가족을 갈라놓고 싶지 않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입법을 통한 점진적 폐지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사적인 발언에서 어떤 형태로든 노예제 폐지 방안이 채택되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살아 있는 누구보다 자신이 진실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다만 입법 권한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통령으로서 공개적으로 노예제 반대의 깃발을 들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서 재임하던 동안에는 노예 신분의 하인들을 남몰래 순환 이동시키기도 했다. 6개월 거주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펜실베이니아의 점진적 노예제 폐지법 조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노예였던 오나 저지가 1796년 탈출한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학이 다루는 질문은 그가 노예제를 반대했느냐 아니냐는 단순한 판정이 아니다. 사적으로는 노예제를 점점 더 불편하게 여긴 사람이 왜 공적인 차원과 제도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노예제 질서를 깊이 떠받쳤는가 하는 구조적 질문이다. 답을 개인의 위선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구조의 힘도 함께 보아야 한다. 당시 남부에서 노예제는 도덕적 선택에 그치지 않았다. 플랜테이션 경제를 지탱하는 노동의 토대이자 워싱턴 개인 재산의 일부였고, 새 연합을 묶어 두는 타협의 일부였다. 개인의 불편함으로는 이렇게 깊이 박힌 구조를 흔들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깊은 이 잔여항은 건국의 순간에 체계 안으로 받아들여졌고, 뒤로 미루어졌지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주리를 둘러싼 논쟁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남북전쟁의 포화 속에서는 이 체계를 거의 찢어 놓을 것이며, 반세기 이상이 지난 뒤 체계 스스로 가장 근본적인 규칙을 다시 쓰도록 강제할 것이다. 건국자들은 공화국의 언어에 자유를 새겨 넣으면서 이 잔여항도 함께 후대에 남겼다.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체계는 여기서 가장 무거운 얼굴을 드러낸다. 건국자들 자신조차 불편해한 모순을 품은 채, 뒷사람들이 그것을 마주할 힘을 가질 때까지 오랫동안 존속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작별과 퇴임: 체계가 처음 스스로 한계를 긋다
1796년의 고별 서한은 우선 어떤 형식의 글이었는지부터 정확히 짚어야 한다. 의회를 상대로 한 퇴임 연설이 아니라 대중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그해 9월 19일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에 실렸다. 작성도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워싱턴은 이미 1792년에 재선에 도전하지 않는 방안을 생각했고, 당시 매디슨이 그를 위해 초기 원고를 써 주었다. 1796년에 실제로 물러나기로 결정했을 때는 해밀턴이 대대적인 수정과 집필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워싱턴 자신도 줄곧 수정에 참여했고 최종 원고를 확정했다. 단순히 해밀턴이 대필했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거칠다. 사상은 워싱턴의 것이었고 글을 빚어내는 작업에는 해밀턴의 기여가 대단히 컸으며, 매디슨이 1792년에 쓴 초고 역시 중요한 전사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당파에 관해 고별 서한에서 특히 정확하게 옮겨야 할 표현이 몇 가지 있다. 워싱턴이 경고한 것은 “당파의 정신(the spirit of party)”이었으며, “지역에 따른 구분(geographical discriminations)”도 특별히 언급했다. 그렇다고 그가 후대의 온갖 형태의 당파 싸움을 미리 내다보았다거나 모든 정치적 집단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가 당파 간 경쟁을 공화정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험으로 여겼음은 분명하다. 특히 그 대립이 외부 세력에 개입할 틈을 줄 때는 더욱 그랬다.
외교에 관한 대목에서 가장 흔한 오독 중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워싱턴의 입장을 ‘얽어매는 동맹’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한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원문에는 그 말이 없다. 그가 실제로 쓴 말은 “영구적인 동맹(permanent alliances)”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비상시에는 “특별한 긴급 상황을 위한 일시적 동맹(temporary alliances for extraordinary emergencies)”에 의지할 수 있다는 말도 분명히 덧붙였다. 그가 반대한 것은 정치·군사 관계를 장기간 고정하여 묶어 두는 일이었다. 모든 일시적 협력에 반대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스스로 문을 닫아걸자는 말도 아니었다. 이 대목을 미국은 영원히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쓰는 것은 명백한 과도한 단순화다.
하지만 고별 서한이 제도사에서 갖는 진정한 무게는 그 내용에만 있지 않다. 그 글과 함께 이루어진 행동, 곧 워싱턴이 스스로 세 번째 임기에 도전하지 않은 데에도 있다. 법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계속 남아 달라는 사람이 많았다. 바로 그렇기에 이 결정은 뚜렷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대체 불가능한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이 물러나더라도 계속 존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체계가 처음으로 스스로 한계를 그은 순간이자, 앞으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결정적인 증거다. 앞선 몇 절에서 보았듯 체계는 잔여항을 하나씩 만들어 냈다. 당파, 행정권의 경계, 법 집행의 대가, 그리고 가장 깊은 곳의 노예제였다. 체계는 그것들을 없애지 못했고, 그 안에 받아들였다. 이제 작별의 순간에 마지막 질문에 답해야 했다. 개인의 위신을 제도의 정당성으로 바꿔 놓은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이 체계는 버텨 설 수 있는가. 워싱턴은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행동으로 답했다. 체계가 특정한 인물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영구적인 중심도, 하나로 통일된 의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 나라에 입증했다. 품어 들인 갈등과 교체되는 권력 위에서도 계속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단결을 꿈꾸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퇴장으로, 오랫동안 이견을 품을 준비가 된 체계를 확인해 주었다.
이 선례는 오랜 세월 불문율로 이어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0년과 1944년에 세 번째, 네 번째 임기로 재선된 뒤에야 의회가 수정헌법 제22조를 발의했고, 1951년 각 주의 비준을 거쳐 두 차례 임기라는 제한이 헌법 문구에 정식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워싱턴은 물러남으로써 대통령직에 최초의 자기 한계를 설정했고, 1951년의 개헌은 이미 한 세기 반 동안 존재하던 불문헌법을 명문으로 옮겨 놓았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이 일 자체도 이 체계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 준다. 가장 중요한 규칙들 중 상당수는 처음부터 문서에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먼저 실천 속에서 세워지고 오랫동안 지켜지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성문 규칙으로 추인되었다.
8. 맺음말: 잔여항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면, 워싱턴의 8년은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체계가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그 의미는 작동 과정에서 선례를 통해 조금씩 채워졌다. 취임사에서 내각회의까지, 재정 구상에서 법 집행까지, 훗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많은 제도는 당시만 해도 아직 굳어지지 않은 선택이었다. 체계가 움직이자마자 없앨 수 없는 잔여항, 곧 정치적 다툼 자체가 생겨났다. 당파들은 재정·헌법·사회·외교라는 축을 따라 빠르게 형성되어 그 다툼을 조직했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지속적인 이견에 맞닥뜨린 경쟁적 대의제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체계는 그 다툼을 억누르지 않았다. 정당성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겨룰 통로를 마련했다. 외교 위기 속에서는 행정권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을 열었고, 그 논쟁은 이후 2세기가 넘도록 닫히지 않는다. 위스키 반란에서는 법을 집행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한편, 집행을 당한 이들에게 새로운 불만을 남겼다. 가장 깊은 곳에서는 건국자들조차 불편해한 노예제라는 모순을 품고 후대에 미루었다. 마지막으로 워싱턴의 자발적인 퇴임을 통해 처음으로 스스로 한계를 그으며, 그 어떤 대체 불가능한 인물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체계임을 증명했다.
여기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체계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람 사이의 긴장이다. 워싱턴은 당파 없는 통일을 바랐다. 그것은 닫힌 완결을 향한 기대였다. 하지만 그가 작동시켜야 할 체계는 설계 때부터 그 완결을 포기했다. 모순이 오래 남아 있되 구조 안으로 수용되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가지가 맞닥뜨리자 결국 드러난 것은 체계의 논리였다. 다툼은 어김없이 생겨났고 당파도 어김없이 나타나 제도 안에 정당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행정권의 경계는 열린 채로 남았고 노예제라는 잔여항은 미래로 넘겨졌다. 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권력은 평소대로 작동했다.
이 체계의 많은 것이 당시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에 개인의 선택이 유난히 큰 효과를 냈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은 워싱턴을 다루는 역사 서술에서 가장 유명한 주제 중 하나다. 이를 강조하는 전통은 줄곧 강력했다. 제도가 가장 취약하던 시기에 미국에는 마침 전국적인 명망이 누구보다 높으면서도 그 개인적 위신을 제도적 정당성으로 바꾸려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것이 공화국의 생존을 가르는 거의 결정적인 조건이었다는 해석이다. 일리 있는 판단이며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는 워싱턴을 구조 안에 다시 놓으려는 쪽에도 더 마음을 기울인다. 개인의 창조물로 여겨 온 것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의회의 부처 신설, 외교 위기, 행정에 필요한 정보, 초기 국가 역량의 공백이 함께 밀어붙여 생겨난 것이었다고 일깨운다. 더 나은 서술은 위인결정론과 구조결정론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이 아니다. 워싱턴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그 중요성은 혼자서 역사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직 굳어지지 않은 자리에 마침 서 있었기에 그의 선택 하나하나가 후대의 선례로 굳어지기 쉬웠다는 데서 나온다. 그를 대체 불가능한 위인으로 그리는 것도, 아무 무게 없는 상징으로 그리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구조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그의 선택이 그토록 중요해졌다는 말이 실상에 더 가깝다. 위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구조의 미확정성이 개인의 선택이 증폭될 여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은 시리즈 전체에 해당한다. 체계와 개인은 서로를 배제하는 두 설명이 아니다. 구조가 미정일수록 개인의 선택이 미치는 효과는 더 크게 증폭된다.
이 체계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근본적인 잔여항 가운데 어느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다만 하나씩 그 안에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당파 간 다툼은 바로 다음 대선에서 다시 솟구칠 것이다. 그리고 법으로 이견을 억누르려는 순간, 이 체계가 처음 스스로를 닫으려는 충동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애덤스의 이야기다. 가장 깊은 잔여항인 노예제는 더 먼 곳에서 이 체계를 기다릴 것이다. 체계가 가장 거센 압력 아래 놓여, 건국 때부터 함께 남겨 둔 그 문제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