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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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 · 미국 대통령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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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구가 작동하기 시작하다

헌법의 빈칸을 채운 것은 조문만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행동이었다

Han Qin (秦汉) · 2026

1787년 필라델피아가 만든 것은 완성된 정부가 아니라 설계도였다. 헌법은 권력을 세 갈래로 나누고 서로 견제하게 했지만, 대통령이 의회와 어떻게 일하고 장관들의 의견을 어떤 형식으로 모으며 외교 위기에 어디까지 먼저 대응할 수 있는지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1789년의 워싱턴은 이미 만들어진 직책을 맡은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으로 그 직책의 경계를 그려야 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워싱턴을 흠 없는 국부로 높이는 일이 아니다. 설계된 공화국을 실제로 돌아가는 공화국으로 바꾸는 동안, 개인의 명성과 헌법의 빈칸이 어떻게 관행이라는 구(構)로 굳었는지를 보는 일이다. 동시에 그 구가 정당 갈등과 노예제라는 여항(餘項)을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1. 밟아 본 적 없는 땅에서 만든 선례

1789년 4월 30일 워싱턴은 뉴욕의 페더럴 홀에서 선서하고 상·하원 앞에서 취임 연설을 했다. 헌법은 취임 연설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뒤이은 대통령들이 반복하는 관례가 되었다. 조문 밖의 행위가 되풀이될 때, 그것은 문서에 없는 헌법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워싱턴 자신도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받아들이는 심정을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람에 비유했고, 이듬해에는 자신이 “아무도 밟지 않은 땅”을 걷고 있어 거의 모든 행동이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썼다. 이 말은 겸양의 장식보다 새로운 권력에 사용 설명서가 없다는 정확한 자각에 가깝다.

내각도 첫날부터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의회가 재무부·국무부·전쟁부와 법무장관 자리를 만들었지만 헌법에는 ‘내각’이라는 집단 기관이 없다. 워싱턴은 초기에는 서면 의견과 개별 면담에 의존했고, 통상 첫 공식 전원 내각회의로 보는 모임은 1791년 말에야 열렸다. 행정의 핵심 장치조차 통치의 압력 속에서 점차 발명된 셈이다.

대통령을 무엇이라 부를지도 논쟁거리였다. 상원 일부는 군주제의 위엄을 연상시키는 긴 존칭을 원했지만, 결국 간결한 ‘미합중국 대통령’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사소해 보이는 호칭에는 직위를 한 인간의 신분으로 만들지, 공화국의 한시적 공직으로 만들지가 걸려 있었다.

2. 해밀턴의 재정국가와 헌법 해석

새 정부를 실제 능력의 시험대에 올린 사람은 재무장관 해밀턴이었다. 그는 독립전쟁이 남긴 연방과 주의 부채 약 7,700만 달러를 단순한 짐이 아니라 국가 신용의 토대로 바꾸려 했다. 연방이 주의 부채를 인수하고 현 보유자에게 계약대로 지급해야 국가가 앞으로 돈을 빌리고 행동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문제는 능력과 이해관계가 한 몸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부채를 많이 갚은 남부 주들은 다른 주의 부담까지 떠안는다고 반발했고, 원래 채권을 싸게 넘긴 사람 대신 투기적 매입자가 액면가를 받는 것이 공정한가라는 논쟁도 일었다. 수도를 포토맥 강변에 두는 대신 부채 인수를 통과시켰다는 ‘저녁 식탁 타협’의 기본 윤곽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구체적 밀실 거래의 모습은 제퍼슨의 후일 회고에 크게 의존한다.

1791년 제1합중국은행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열었다. 해밀턴은 필요적절조항에서 묵시적 권한을 읽었고, 제퍼슨과 매디슨은 열거되지 않은 법인 설립 권한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워싱턴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넓은 연방 권한의 선례가 생겼다. 갈등을 수용하는 헌정에는 국가 역량이 필요하지만, 그 역량은 누구의 이익을 제도 안에 심는가라는 새 여항도 만든다.

3. 정당을 싫어한 정부가 정당을 낳다

워싱턴은 정당 정신을 공화국의 위험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정부 안에서 벌어진 해밀턴과 제퍼슨의 충돌은 성격 다툼이 아니라 국가의 방향을 둘러싼 구조적 분쟁이었다. 강한 재정국가와 상업 공화국, 지방 자치와 농업 공화국, 영국과 프랑스 혁명을 보는 시선이 서로 다른 정치 노선으로 묶였다.

1790년대 초 신문, 의회 표결, 주 단위 조직을 통해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없앨 수 없었던 것은 정당이라는 간판보다 국가의 목적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경쟁적 대표제에서 그 대립이 오래가면 조직을 만든다. 워싱턴의 도덕적 경고가 막지 못한 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가 합의를 자동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착구주기율의 언어로 말하면, 정당 갈등은 첫 정부가 낳은 여항이었다. 미국의 구는 이를 병처럼 도려내는 대신 언론·선거·분권의 통로에 남겨 두었다. 그 선택이 늘 관용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갈등이 보이는 곳에서 규칙을 두고 싸우게 했다는 점은 뒤의 폐쇄적 충동과 비교할 기준이 된다.

4. 외교 위기와 대통령의 선행 권한

1793년 유럽 전쟁이 재개되자 워싱턴은 의회가 별도 입법을 하기 전에 중립 포고를 발표했다. 중립 자체만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국가의 외교적 자세를 먼저 공표했다는 사실이다. 해밀턴은 일반적 행정권에서 외교의 주도권을 읽었고, 매디슨은 전쟁과 평화의 결정은 입법부에 속한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승자 없이 남았다. 이후 대통령들은 위기 때마다 선행 행동의 범위를 넓혔고 의회는 예산·입법·감독으로 되받았다. 초기의 한 포고가 완결된 답을 만들기보다 지속적인 쟁점의 자리를 만든 것이다. 구는 질문을 제거하지 않고 반복 가능한 다툼의 형식으로 바꾸었다.

1794년 체결된 제이 조약도 같은 양면을 보였다. 상원은 1795년 20 대 10으로 정확히 3분의 2 문턱을 넘겨 동의했고, 워싱턴은 전쟁을 피하고 젊은 국가가 힘을 기를 시간을 샀다고 판단했다. 반대자에게는 영국 상업 이익에 굴복한 조약이었다. 외교의 현실주의와 민주적 반발은 어느 한쪽을 지운다고 끝나지 않았다.

5. 위스키 반란과 집행하는 연방

1791년 증류주 소비세는 서부 펜실베이니아 농민에게 불균형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현금과 도로가 부족한 지역에서 위스키는 곡물을 운반 가능한 가치로 바꾸는 수단이었다. 조세 저항은 세무관에 대한 위협과 폭력으로 커졌고, 1794년 존 네빌의 집이 공격받은 뒤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워싱턴은 공고와 평화사절을 먼저 보낸 뒤 협상이 실패하자 여러 주의 민병대 약 1만 3천 명을 동원했다. 그는 군대와 함께 펜실베이니아 베드퍼드까지 갔지만 끝까지 전장 지휘를 한 것은 아니며, 이후 집행은 헨리 리 등에게 넘겼다. ‘대통령의 친정’이라는 영웅적 압축보다 연방 권위를 가시화한 정치 행위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저항은 큰 전투 없이 무너졌고 반역죄 유죄를 받은 두 사람도 사면되었다. 연방은 법을 만들 뿐 아니라 집행할 수 있음을 보였지만, 거친 체포와 지역의 기억은 불만을 남겼다. 능력의 성립과 원한의 발생이 같은 행동의 두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위스키 반란은 구가 여항을 줄이면서 동시에 만드는 장면이다.

6. 자유의 공화국이 품은 노예제

가장 깊은 모순은 권력 배분보다 공동체의 경계에 있었다. 자유를 내건 공화국의 첫 대통령은 노예 소유주였다. 1799년 그가 죽을 때 마운트 버넌에는 노예 상태의 사람이 317명 있었고, 유언으로 처분할 법적 권리가 그에게 있던 사람은 123명이었다. 나머지 다수는 아내 쪽 상속재산과 얽혀 있었다.

워싱턴의 유언은 그가 소유한 사람들을 아내 사후 해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농장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사적으로 노예제를 불편해하고 점진적 폐지를 바란다고 썼으나 대통령으로서 공개적 폐지 운동을 이끌지 않았다. 도덕적 불안과 정치적 침묵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거주 때 펜실베이니아의 점진적 폐지법 적용을 피하려 노예 상태의 가사 노동자들을 여섯 달 전에 순환시킨 일은 그 모순을 더 선명하게 한다. 오나 저지는 1796년 그 조건에서 탈출했다. 노예제는 뒤로 미룬 부수 문제가 아니라, 이후 미주리와 내전으로 되돌아올 창건기의 가장 큰 여항이었다.

이 사실은 개인의 ‘시대적 한계’라는 말로 끝낼 수 없다. 당시에도 자유 흑인, 노예제 폐지론자와 탈출한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말하고 행동했다. 워싱턴의 선택은 유일한 길이 아니라 재산·가족·정치연합을 우선한 구체적 결정이었다.

7. 물러남으로 완성한 첫 자기제한

1796년의 고별사는 의회 연설이 아니라 9월 19일 신문에 실린 공개서한이었다. 매디슨의 1792년 초안과 해밀턴의 상당한 문장 작업이 있었지만 최종 책임과 생각은 워싱턴에게 있었다. 그는 모든 동맹을 금지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상시적 동맹을 피하되 비상시의 일시적 동맹은 허용할 수 있다고 구분했다.

문서보다 더 강한 선례는 세 번째 임기를 요구할 법적 장벽이 없는데도 물러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직책이 특정한 사람의 소유가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개인의 카리스마가 제도에 신뢰를 빌려준 뒤, 제도가 개인 없이도 계속될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이다.

워싱턴 시대는 갈등을 해결하지 않았다. 정당, 외교 권한, 집행의 비용, 노예제가 모두 남았다. 그럼에도 권력을 나누고 다툼을 공개하며 지도자가 물러나는 관행은 작동을 시작했다.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불완전했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을 견딜 수 있었기에 다음 대통령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중국어 원문의 논증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