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시와 클린턴 — 역사의 종말이라는 환상
냉전 승리와 신경제의 자신감 아래에서 다음 시대의 여항이 자라고 있었다
1. 승리를 과시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승리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아버지 부시는 즉시 미국의 승리를 선언하지 않았다. 소련과 동독의 강경파를 자극하지 않고 고르바초프에게 후퇴할 공간을 주려 했다. 외교 경험에서 나온 이 절제는 소극성이 아니었다. 독일 통일, 북대서양조약기구 잔류와 소련군 철수를 하나의 협상 구조에 묶기 위한 정치적 조건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는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사건이 아니다. 소련 경제의 침체, 민족공화국의 움직임, 고르바초프의 개혁, 동유럽 시민의 저항과 서방의 압력이 겹쳤다. 레이건이 경쟁의 환경에 영향을 주었고 부시는 붕괴의 후과를 관리했다. ‘냉전에서 이겼다’는 문장은 행위자가 많은 역사를 한 국가의 전리품으로 좁힌다.
상대의 패배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지 않은 선택은 핵무장 제국의 해체를 비교적 평화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유럽 안보와 러시아의 위치, 핵무기 관리라는 질문은 남았다. 하나의 대결이 끝났다고 질서 전체의 여항(餘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승리의 서사가 강할수록 미해결 문제는 낡은 시대의 잔재로 잘못 취급되기 쉽다.
2. 파나마와 걸프전, 서로 다른 힘의 틀
1989년 부시는 노리에가 체포, 미국인 보호와 운하조약 등을 이유로 파나마 침공을 명령했다. 독재자이자 마약거래자인 노리에가는 과거 미국 정보기관과 협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작전은 목표를 달성했지만 민간인 희생 규모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전술적 성공이 주권 침해와 이전의 묵인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훨씬 넓은 국제틀로 대응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678호가 철수 시한 뒤 ‘필요한 모든 수단’을 승인했고, 미국 의회도 근소한 차이로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아랍국을 포함한 다국적연합은 비용과 정당성을 나눴다. 1991년 지상전은 나흘 만에 쿠웨이트를 해방했다.
바그다드로 진격하지 않은 결정은 쿠웨이트 해방이라는 위임과 목표를 지켰다. 사담 후세인이 살아남아 반란을 진압하고 제재가 민간인에게 고통을 준 것은 그 제한의 대가였다. 당시 가능한 군사능력을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실패라 할 수 없다. 제한전은 목표를 이루고 더 큰 점령의 여항을 피하려는 자기구속이지만, 모든 후과를 해결하는 종결은 아니다.
3. 외교의 고점과 국내의 패배 사이
걸프전 뒤 부시의 높은 지지는 경기침체와 가계불안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1988년 ‘새 세금은 없다’고 약속했지만 1990년 적자감축 협상에서 증세를 받아들였다. 보수진영의 신뢰를 잃은 결정이 중요했지만 1992년 패배를 한 문장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소득, 일자리, 페로의 출마와 세대교체의 열망도 함께 작용했다.
국내 유산을 배신한 세금 약속으로만 기억하면 1990년 미국장애인법이 사라진다. 이 법은 고용과 공공시설, 교통과 통신에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고 접근성의 책임을 사회에 물었다. 장애를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환경과 제도가 만든 장벽으로 본 큰 민권확장이었다. 평등의 ‘모두’는 한 번도 고정된 명단이 아니었다.
1992년 클린턴은 43퍼센트의 득표로 당선됐고 무소속 페로는 약 19퍼센트를 얻고도 선거인단을 얻지 못했다. 제도권과 재정운영에 대한 불만이 이미 큰 독립표로 나타났다. 냉전 승리의 외교적 광휘와 국내 공동체의 체감은 어긋났다. 세계질서를 성공적으로 관리한 대통령도 생활세계의 불안을 대표하지 못하면 교체될 수 있었다.
4. ‘신민주당’이 받아들인 레이건 이후
클린턴은 뉴딜 자유주의를 그대로 복원한 사람이 아니라 ‘신민주당’의 후보였다. 그는 기회와 책임, 공동체, 투자와 재정규율을 함께 말했다. 세 차례 대선 패배 뒤 민주당의 전국연합을 다시 만들기 위해 복지·범죄·관료제에 대한 보수의 비판 일부를 받아들였다. 레이건이 바꾼 정치언어 안에서 반대당이 자신을 재정의한 것이다.
초기 건강보험 개혁은 보편적 보장을 목표로 했지만 복잡한 설계, 닫힌 작성과정의 인상, 보험업계의 조직적 반대와 민주당 내부의 이견으로 무너졌다. 좋은 진단과 전문가의 계획만으로 이해관계의 손실 공포를 이길 수 없었다. 1994년 공화당은 40년 만에 양원을 장악했고 ‘미국과의 계약’이 의제를 바꿨다.
이후 클린턴은 공화당 의회와 삼각형 전략을 구사했다. 정부폐쇄를 거친 예산협상, 성장과 세수 증가, 지출억제가 결합해 말기에는 재정흑자가 나타났다. 중도를 차지하는 유연성은 재선과 정책 일부를 지켰지만 누구의 비용으로 타협했는지 흐릴 수 있었다. 구(構)는 당의 이름보다 연합과 정책의 실제 배열로 움직인다.
5. 복지는 줄고 형사국가는 커졌다
1996년 복지개혁은 AFDC를 TANF로 바꾸고 근로요건과 기간 제한, 주정부 재량을 확대했다. 지지자는 의존을 줄이고 취업을 늘렸다고 보았고 비판자는 경기호황 때 수급자 감소를 빈곤 해결로 오인했다고 지적했다. 블록교부금은 위기 때 필요가 커져도 자동으로 늘지 않았다. 안전망의 문턱을 책임의 언어로 다시 그었다.
1994년 범죄법은 경찰, 교도소, 예방프로그램과 연방형량을 크게 확대했다. 높은 폭력범죄에 실제로 시달린 공동체도 강한 대응을 요구했으며, 이 법 하나가 대규모 수감을 만든 것은 아니다. 주 법률과 이전 추세가 더 큰 몫을 가졌다. 그래도 연방자금은 더 긴 형량과 교정시설 확장을 전국적 상식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두 법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국가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모습이 보인다. 현금지원에서는 조건과 시간을 좁히면서 경찰과 교도소에는 능력을 더했다. 민권법이 법적 시민권을 열었지만 형사체계의 부담은 흑인 공동체에 불균형하게 집중됐다. 포용이 남긴 실질적 불평등의 여항이 ‘범죄와 질서’라는 새 분류 안에서 징벌적으로 나타났다.
6. 세계화와 신경제가 가린 지리
북미자유무역협정, 세계무역기구와 중국의 영구적 정상무역관계는 생산과 투자의 지리를 바꾸었다. 소비자는 더 싼 상품을 얻고 수출산업과 공급망은 성장했다. 인터넷, 정보기술과 생산성 향상은 낮은 실업과 강한 경제를 만들었다. 1990년대 후반의 자신감은 통계와 생활의 실제 근거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익과 손실은 같은 장소에 떨어지지 않았다. 제조업 지역은 자동화와 수입경쟁, 노조 약화가 겹치며 일자리와 세수, 공동체의 전망을 잃었다. 모든 공장폐쇄를 무역협정 하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전체 후생이 늘었다는 이유로 지역의 상실을 조정비용이라 부르는 것도 부족하다. 평균의 성장은 지도 위의 균열을 보이지 않게 한다.
시애틀의 1999년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를 둘러싼 시위는 이 새로운 여항이 일찍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다. 노동, 환경, 개발과 민주적 통제에 관한 서로 다른 불만이 세계규칙의 투명성을 물었다. 자본은 국경을 빠르게 넘었지만 노동자는 가족과 집, 지방제도에 묶여 있었다. 이동성의 비대칭은 뒤의 정치적 분노를 축적했다.
7. 개입과 자제 사이에서 일관된 정답은 없었다
소말리아에서 인도지원 임무는 무장세력 체포로 확대됐고 1993년 모가디슈 전투에서 미군 18명이 숨졌다. 클린턴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 경험은 1994년 르완다 학살 때 미국과 국제사회가 개입을 피하는 배경이 됐다. 한 사건에서 배운 과잉의 교훈이 다른 사건에서는 필요한 행동의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보스니아에서는 수년의 전쟁과 인종청소 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과 외교가 데이턴 협정을 만들었다. 코소보에서는 유엔 안보리의 명시적 승인 없이 나토가 세르비아를 폭격했다. 인도주의적 필요와 국제법 절차가 같은 길을 주지 않았다. 개입은 사람을 구하면서 주권을 훼손할 수 있고, 비개입은 원칙을 지키며 희생자를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군사력의 사용에 깨끗한 공식은 없다. 행동과 부작위 각각의 구체적 대안을 비교해야 한다. 단극질서는 미국 대통령의 선택지를 크게 넓혔지만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무오류의 자유가 아니라 더 무거운 설명 책임을 뜻했다. 힘의 우위가 바로 그 힘을 어디에서 멈출지 정해 주지는 않는다.
8. 탄핵과 2000년, 절차가 남긴 미결
화이트워터 수사는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관계 및 선서 아래의 부인으로 옮겨 갔다. 하원은 위증과 사법방해 탄핵조항을 통과시켰고 상원은 유죄정족수에 이르지 못했다. 권력관계 속의 성적 부적절성, 거짓말, 형사범죄와 대통령 파면은 같은 범주가 아니었지만 당파적 논쟁은 서로를 쉽게 합쳤다.
탄핵절차가 작동했다는 사실과 당파적 무기로 사용됐다는 평가는 동시에 가능하다. 무죄결론은 행동이 존중받을 만하다는 판결이 아니라 파면에 필요한 표가 없다는 헌법적 결과였다. 워터게이트의 기억은 최고권력자를 심판할 통로를 남겼고, 그 통로의 존재는 사용의 지혜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2000년 대선은 플로리다 재검표와 부시 대 고어 판결로 끝났다. 대법원은 서로 다른 계표기준의 평등보호 문제를 지적하며 재검표를 중단했고 고어는 승복했다. 평화적 이양은 중요하지만 절차가 모두를 납득시켰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하던 시대는 구가 실행 가능한 결론을 줄 수는 있어도 여항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장면으로 닫혔다.
그 때문에 1990년대는 단순한 막간이 아니다. 번영과 세계적 우위가 실제였던 바로 그 시기에 지역격차, 징벌국가, 무역의 손실과 당파적 절차 사용이 다음 시대의 재료로 쌓였다. 위기가 없어서 여항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성공의 평균치가 아직 그것을 정치의 중심에서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