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 — 역사의 종말이라는 환상
냉전 승리와 신경제의 자신감 아래에서 다음 시대의 여항이 자라고 있었다
이 글의 목차
1. 완결의 환상이 가장 강했던 순간
이어서 등장한 노련한 외교형 대통령은 소련의 해체와 단기간에 승리로 끝난 전쟁을 겪었다. 그 뒤를 이은 젊은 대통령은 냉전의 적수가 사라진 단극 체제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번영을 선언했다. 많은 사람이 역사의 종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 시대였다. 아버지 부시가 취임한 1989년부터 클린턴이 퇴임한 2001년 초까지, 이 12년은 이 제도 구조 안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힘겨루기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듯했던 시기다. 이 글이 따라가려는 것은 바로 그 마침표다. 어째서 끝내 찍을 수 없었는가.
먼저 이 시기를 구조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지부터 밝혀 두자. 연작 전체가 다루는 긴 시간 속에 놓고 보면, 이 시기를 제도가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승리의 곡선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 그 역사적 자리는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냉전은 분명 끝났고 소련 체제도 분명 해체되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의 조합은 당시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유일한 제도적 선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승리한 듯 보이던 순간, 새로운 긴장들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 후쿠야마는 이 분위기를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가 끝나는 지점,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보편화로 요약했다. 하지만 조금 뒤 헌팅턴에서 후대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자들은 거듭 지적했다. 민족, 종교, 문명, 주권, 그리고 성장의 과실이 배분되는 방식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냉전이 끝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 판단을 연작의 맥락에 되돌려 놓으면 그 무게가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 종말론은 이 연작 전체에서 완결의 환상이 가장 강력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례다. 후쿠야마가 포착한 것은 실제 역사적 순간에 존재했던 진짜 자신감이었다. 냉전의 적수가 쓰러졌고, 자유민주주의와 경쟁할 만한 더 높은 단계의 보편적 제도 형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연작은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 진짜 자신감을 역사의 종말이라는 차원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야말로 완결의 환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사람들이 종착점을 선언하던 바로 그때, 이 제도 구조 안에서는 새로운 잔여항이 이미 조용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아버지 부시와 냉전의 평화로운 마무리
아버지 부시는 집권하자마자 레이건 말기의 대소 정책을 그대로 이어 가지 않았다. 먼저 소련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재검토했다. 풍부한 외교 경험, 서두르지 않는 호흡, 신중함, 상대를 궁지로 몰지 않으려는 태도. 그의 방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오늘날의 연구는 1989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부시 행정부가 처음에는 독일 통일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데 상당히 조심스러웠다고 명시한다. 동독과 소련의 강경파를 자극해 개혁을 가로막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1989년 11월 9일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돌파한 뒤에도 부시는 일부러 승리를 과시하는 반응을 삼갔다. 뒤에 나온 공식 회고의 표현은 더욱 직설적이다. 부시 행정부는 워싱턴이 동유럽의 변화를 미국이 기획한 사업처럼 포장하는 것으로 비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런 자제는 소극성과 같지 않았다. 독일 통일에서 핵심은 미국이 통일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을 더 넓은 안보 구도 안에 자리 잡게 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 곧 나토에 잔류할 것인가였다. 최종적인 ‘2+4’ 합의는 독일의 나토 잔류를 허용하는 한편, 동부 지역의 주둔군과 소련군 철수에 관해서는 타협을 이루었다. 시간의 흐름은 세 지점으로 짚을 수 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으며,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사임한 데 이어 이튿날인 26일 소련이 공식 해체되었다. 오늘날의 연구가 부시에 관해 내리는 한 가지 평가는 기억해 둘 만하다. 미국은 동유럽의 독립과 민주화를 지지했다. 동시에 여러 결정적 고비에서 워싱턴의 정책은 사태를 주도하기보다 그 변화에 대응하는 성격을 띠었다.
연작의 맥락에서 보면 조율, 동맹, 절차, 자제를 중시한 아버지 부시의 방식은 앞선 여러 글에서 추적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반대편에서 비추는 주석과도 같다. 여기에는 그가 걸프전을 치를 방식도 예고되어 있었다. 유엔의 승인, 국제적 연합, 제한된 목표. 일방적으로, 아무런 한계 없이 벌이는 대통령의 전쟁과는 다른 길이었다.
3. 걸프전과 신세계 질서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탈냉전 질서가 맞닥뜨린 첫 번째 중대한 시험이었다. 부시는 의회 연설에서 미국의 목표를 아주 분명하게 제시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무조건 철수해야 하고, 쿠웨이트의 합법 정부는 복귀해야 하며, 걸프 지역의 안정이 보장되어야 하고, 미국 시민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연설에서 그는 ‘신세계 질서’라는 표현도 내놓았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법의 지배가 대신하는 국제 환경을 구상한 것이다.
1990년 11월 29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678호는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철수하지 않을 경우, 쿠웨이트 정부와 협력하는 회원국들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최종적으로 참전한 연합군에는 여러 아랍 국가를 포함해 34개국이 참여했다. 지상전은 1991년 2월 24일 시작되었고, 불과 나흘 만에 쿠웨이트시티를 해방했다. 부시는 전쟁 목표의 한계를 명확히 그었다. “우리의 목표는 이라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쿠웨이트를 해방하는 것이다.” 휴전을 선언하면서도 그는 말했다. “쿠웨이트는 해방되었다. 이라크군은 패배했다. 우리의 군사적 목표는 달성되었다.”
연작 전체에 비추어 보면 이 전쟁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벌이는 한계 없는 전쟁과 거의 정반대에 놓인다.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전쟁 권한은 선전포고 없는 개입, 불분명한 목표, 끝없는 확전의 방향으로 부풀어 왔다. 걸프전은 드물게도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국제적 승인과 명확한 목표를 갖추고 스스로 한계를 지키는 제한전쟁이었다. 여기서 부시는 대통령의 전쟁 권한을 자발적으로 동맹, 목표, 기한이라는 틀 안에 넣었다. 이런 제약이 개인의 선택에만 달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1년 1월 의회도 법률로 무력 사용을 승인하면서 그 목적을 유엔 결의에 명시된 목표와 연결했다. 그러나 승인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느 지점에서 진격을 멈출지는 여전히 대통령의 판단과 다른 세력의 견제에 달려 있었다. 법적 틀과 개인의 자제가 맞물리는 일이 이후의 모든 전쟁에서도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았다.
4. 아버지 부시의 국내 정치적 곤경과 1992년
냉전의 마무리와 걸프전만 서술한다면 아버지 부시는 거의 성공한 대통령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한 차례 임기가 선거 패배로 끝난 이유는 국제적 성공이 국내 정치의 안정으로 저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세금 공약이었다. 1988년 대선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부시는 훗날 자신의 국내 정치적 유산을 거의 집어삼키다시피 한 말을 분명히 했다. “똑똑히 들으십시오.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1990년 11월 종합예산조정법에 서명했다. 당시의 경제 상황 역시 가볍게 넘길 수 없다. 1989년부터 1992년 사이 미국 가구의 실질 중위소득은 약 6% 줄었고, 빈곤 인구는 540만 명 늘었으며, 빈곤율은 12.8%에서 14.5%로 올랐다. 이 수치들은 걸프전 때의 높은 지지율로도 왜 재선을 지켜 내지 못했는지 설명해 준다. 외교의 눈부신 순간은 임금과 일자리, 가구소득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속적인 불안을 이겨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시의 국내 정치적 유산을 공약 파기로만 설명해도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1990년 미국장애인법은 민권 보호의 범위를 넓힌 입법으로서 충분히 다루어야 한다. 이 법은 공적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장애인을 차별로부터 보호했다. 이 연작에서 특별히 짚어야 하는 이유도 있다. 세금과 경기 침체의 그늘 아래서도, 냉전 승리의 떠들썩함 속에서도, 한때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평등한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깊은 흐름은 조용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공적 생활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아 온 장애인들은 1973년 재활법 제504조 등의 기존 보장에 더해, 적용 범위가 크게 넓어진 연방 차원의 차별 금지 보호를 얻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약속은 일단 글로 새겨지고 나면 그 적용 범위를 영원히 고정해 둘 수 없게 된다.
1992년 대선은 세기의 전환기를 예감하게 하는 정치적 재편의 모습을 드러냈다. 클린턴은 43%의 득표율로 선거인단 370명을 확보했고, 부시는 37.4%에 선거인단 168명을 얻었다. 반면 페로는 일반 유권자 투표의 18.9%를 얻고도 선거인단은 단 한 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페로의 존재가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해 준다. 1992년이 되자 재정 운용과 기성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가 무소속 후보에게 전체 표의 거의 5분의 1을 안길 만큼 많아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 자체가 새로 형성되고 있던 잔여항이 이른 시기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한 장면이었다.
5. 클린턴과 신민주당 노선
클린턴을 전통적인 뉴딜 자유주의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인물로 그려서는 안 된다. 민주당지도자회의라는 맥락에서 등장한 ‘신민주당원’으로 자리매김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이 회의의 의장을 맡으면서 1992년 대선에 내세울 정책 의제를 다듬었다. 이 노선은 자유주의의 현대화로 규정되었고 기회, 책임, 공동체를 강조했다. 이를 압축한 말은 이러했다. “보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 심지어 온전히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
연작의 흐름에서 보면 클린턴이 이렇게 노선을 다시 쓴 일은 앞선 글에서 다룬 국가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의 연장이었다. 레이건이 정말로 끝낸 것은 특정한 재정 규모가 아니라 루스벨트 이래 차츰 형성되어 온 정치적 상식이었다. 그는 복지국가의 확장을 당연시하는 서사를 정치의 중심선에서 밀어냈다. 클린턴의 신민주당 노선이 지닌 가장 깊은 의미는 레이건이 뒤집어 놓은 옛 상식을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레이건이 재편한 정치 언어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책임을 강조했고, 재정 규율을 강조했으며, 무한히 팽창하는 연방국가를 경계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앞선 글의 판단을 그대로 입증한다. 레이건이 바꿔 놓은 정치 담론은 대단히 오래갔다. 그의 정적들조차 집권한 뒤에는 그가 정해 놓은 담론의 틀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해야 할 정도로 오래갔다.
6. 복지의 축소와 형사사법의 팽창
클린턴 시대에 이 연작의 주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연방국가가 영역에 따라 한쪽에서는 줄어들고 다른 쪽에서는 커지는 불균등한 움직임이다. 집권 초기 가장 큰 좌절은 의료 개혁이었다. 1993년 개혁안의 핵심은 전 국민 보장이었다. 그러나 보험업계와 의료단체, 공화당의 조직적 반대에 더해 비공개 입안 절차를 둘러싼 논란, 법안의 복잡성, 민주당 내부의 의구심까지 겹치면서 결국 1994년 통과에 실패했다. 1994년 중간선거는 그 저항을 제도적 권력으로 굳혔다. 공화당은 이 선거에서 하원과 상원의 다수당 지위를 동시에 되찾아 40년 만에 처음으로 양원을 장악했다. 깅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을 내걸고 매우 공세적인 의제를 제시했다.
1996년 개인책임·근로기회조정법은 연방 복지의 틀을 다시 썼다.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 기한을 정하지 않고 제공하던 연방 지원을 끝내고, 현금 급여를 근로 요건과 수급 기한이 붙는 ‘빈곤가정 임시지원’으로 바꾸었다. 연방 재원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기간은 전국적으로 원칙상 60개월이었다. 지지자들은 이를 기존 복지 체제의 종식, 노동 참여의 강화, 주정부가 정책을 실험할 여지의 확대로 보았다. 반면 비판자들은 복지 수급자가 줄었다고 빈곤이 구조적으로 완화된 것은 아니며, 새 규정은 가장 취약한 가정에 매우 징벌적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1994년 범죄법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 범죄법에는 경찰관 10만 명 증원과 교도소 건설 자금 97억 달러가 담겼다. 이후의 비판은 특히 재정적 유인책이 어떻게 더 엄한 형량, 수감 확대, 지방 법 집행의 팽창을 하나로 묶었는가에 집중되었다. 오늘날의 연구는 이 법을 대규모 수감을 제도적으로 밀어붙인 과정과 명시적으로 연결한다.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놓는 것이 이 절의 핵심이다. 같은 시기에 연방국가는 복지 영역에서 몸집을 줄이면서 형사사법 영역에서는 한층 더 강하게 팽창했다. 더욱 경계해야 할 점은 그렇게 급격히 커진 형벌국가가 바로 인종적 잔여항의 새롭고 징벌적인 형태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제22편에서 보았듯 1960년대의 민권 입법은 흑인을 법적으로 평등한 시민의 범주 안에 넣었다. 그러나 그 편입은 동시에 법이 미치지 못하는 실질적 불평등을 곧바로 선명하게 드러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이미 해결되었다고 여겼던 인종 문제가 대규모 수감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솟아올랐다. 교도소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차지하는 불균형하게 높은 비중은 법적 평등과 실질적 불평등 사이에서 한 번도 메워진 적 없는 균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새로운 증거가 되었다. 포섭이 새로운 배제를 낳는다는 사실은 여기서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7. 세계화, 신경제, 그리고 국내의 잔여항
1990년대를 세계화의 절정으로 그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무역과 기술이 거의 동시에 전진했다는 점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1994년 1월 1일 발효되어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하고 투자, 서비스, 지식재산권, 분쟁 해결의 제도를 통합해 나갔다. 클린턴이 더 넓은 범위에서 무역 자유화를 추진한 일에는 세계무역기구와 중국에 대한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부여도 포함된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2000년 4월 실업률은 3.9%까지 떨어졌다. 1970년 1월 이후 처음으로 4% 아래로 내려간 것이었다. 가구 중위소득도 당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런 낙관은 처음부터 고르게 퍼져 있지 않았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가장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쪽도 쉽게 지울 수 없는 두 무리의 사실을 나란히 놓아야 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 세계무역기구, 인터넷 혁명이 실제로 무역과 투자, 공급망의 통합을 촉진하고 생산성을 높이며 소비자 후생을 넓혔다는 것이 한쪽의 사실이다. 2000년에 통과된 중국과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법률은 그 이후 통합이 더 진전될 길을 열었다. 그 효과를 이미 1990년대의 번영을 낳은 원인이었던 것처럼 거슬러 올려 설명해서는 안 된다. 다른 쪽의 사실은 바로 그 과정이 미국 안에서 특정 집단과 지역에 고도로 집중되고 저절로 회복되기 어려운 손실을 낳았다는 것이다. 특히 제조업에 의존하는 지역사회, 지역 발전의 단절, 노동조합 정치와 사회보장 체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그 손실이 드러났다. 제조업 고용을 장기적으로 살펴본 오늘날의 연구는 고용이 1979년 정점을 찍은 뒤 대체로 감소해 왔다고 지적한다. 소득 분배 연구 역시 1979년 이래 미국의 소득 불평등이 전반적으로 계속 커졌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1990년대 후반의 번영을 모두가 같은 속도로 나아간 상승세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고소득층의 소득이 더 빠르게 늘었고,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몫도 더 컸다.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는 새로운 다자간 협상을 출범시키려는 자리였다. 하지만 대규모 거리 시위와 회의 운영의 혼란에 심하게 흔들렸고, 결국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애틀 시위는 형성 중이던 잔여항이 큰 소리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의 미국은 세계적 규칙의 확장을 이끄는 주역인 동시에 그 규칙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가장 먼저 표면화한 곳 중 하나이기도 했다.
8. 탄핵과 2000년의 미결 상태
클린턴의 대외 정책은 개입과 자제가 함께 존재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소말리아에서는 1993년 10월 모가디슈 전투 도중 블랙호크 헬리콥터 두 대가 격추되고 미군 18명이 전사했다. 클린턴은 나흘 뒤 전투 병력의 철수를 발표했다. 반면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 그리고 뒤이은 코소보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나토의 공습과 제재가 결국 밀로셰비치에게 국제 평화유지 병력의 주둔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옆에 놓아야 할 사례가 르완다다. 미국은 개입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다. 이는 이후 미국 외교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성찰의 대상이 되는 일 중 하나가 되었다. 테러의 위협도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 거의 동시에 가해진 공격은 아직 시대의 중심 서사가 되지는 않은 그 위협이 남긴 불길한 복선들이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이어진 클린턴 탄핵은 1990년대 정치적 양극화가 가장 집약적으로 폭발한 사건이었다. 하원은 1998년 12월 19일 두 가지 탄핵 조항을 최종적으로 가결했다. 하나는 대배심 앞에서의 위증, 다른 하나는 사법방해였다. 그러나 1999년 2월 상원의 심판에서는 두 혐의 모두 유죄 결정에 필요한 3분의 2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제도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공식적인 책임 추궁인 동시에 매우 강력한 당파적 신호이기도 했다.
2000년 대선은 제도가 계속 작동하되 논란 속에서 작동한다는 모습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2000년 12월 12일 연방대법원은 ‘부시 대 고어’ 사건에서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를 끝냈다. 일곱 대법관은 카운티마다 수작업 재검표 기준이 다른 점 등 당시 집계 방식에 평등보호와 관련한 헌법적 문제가 있다고 보았지만, 합헌적인 절차를 새로 마련할 수 있는지를 두고 갈렸다. 다섯 대법관의 다수의견은 플로리다주법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주의회가 연방법의 ‘세이프 하버’ 시한을 지키려 했으며 그때까지 합헌적인 재검표를 마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5 대 4로 결정된 것은 이번 재검표의 종료였지, 연방법이 시한 뒤의 개표를 일률적으로 금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목해야 한다. 승부가 극도로 팽팽하고 논란도 극심했던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제도 구조는 하나의 합의를 이루어 완결되지 않았다. 모두를 납득시키지도, 그 논란을 지우지도 못했다. 법원, 주정부의 절차, 전국적인 정치 심리가 맞물린 끝에 간신히 집행 가능한 결말 하나를 내놓았을 뿐이다. 절차는 마쳤지만 잔여항은 없애지 못했다. 이 연작 전체를 거의 완벽하게 압축한 장면이다. 이 제도 구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애초부터 모든 논쟁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완결된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절차에 기대어,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잠정적인 답을 힘겹게 내놓는 일이었다.
9. 맺음말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의 이 12년을 연작 전체에 되돌려 놓을 때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판단이다. 역사의 종말은 이 제도 구조에서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완결의 환상이었다.
이 시대의 자신감은 진짜였다. 냉전은 평화롭게 끝났고, 거대한 경쟁 체제 하나가 해체되었다. 단기간에 승리를 거둔 전쟁은 베트남의 그림자를 씻어 냈다. 무역 규칙은 세계 곳곳으로 뻗어 갔고, 인터넷 혁명은 경제를 다시 빚고 있었다. 실업률은 30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소득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모든 일의 표면에는 역사가 이미 나아갈 방향을 선택했다는 강렬한 감각이 분명히 감돌았다. 후쿠야마가 포착한 것은 바로 그 진짜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이 연작의 논지 전체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그 자신감을 종말의 주장으로 밀어붙일 때 생겨나는 환상이다. 사람들이 종착점을 선언하던 바로 그 순간, 제도 구조 내부에서는 새로운 잔여항이 이미 조용히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지는 줄어들고 형벌국가는 커지고 있었다. 해결되었다고 여겼던 인종 문제는 대규모 수감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세계화는 번영을 만들었지만 그 번영은 극도로 불균등하게 배분되었다. 탈산업화로 내몰린 지역사회, 서로 단절된 지역들, 심해지는 불평등 속에서 깊은 원망이 쌓이고 있었고, 시애틀 거리의 시위는 이미 그것을 소리 높여 예고했다. 정치는 양극화되었고, 탄핵은 당파적 무기로 쓰였으며, 대통령 선거 하나를 끝내는 일마저 결국 법원에 기대어 가까스로 매듭지어야 했다.
이 두 무리의 사실, 한쪽의 승리와 번영, 다른 쪽의 축소와 팽창, 불균형과 논란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둘 다 동시에 성립한다. 바로 그 동시성이 이 제도 구조가 종착점에 이르지 않았음을 가장 강력하게 입증한다. 이 구조는 스스로의 성공에 가장 도취된 절정에서 다시 한번 완결을 거부했을 뿐이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은 여전히 계속된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