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편: 이론을 되돌아보며 — 잔여항을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 선 구축체
완결을 약속하지 않는 제도는 실패를 없애는 대신 수정의 통로를 남긴다
이 글의 목차
1. 두 핵심 명제가 성문헌법 안에서 드러나는 모습
앞선 스물다섯 편은 워싱턴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순간에서 출발해, 법원의 판결로 매듭지어진 2000년의 선거까지 따라왔다. 마지막인 이 글은 그 뒤에 역사 한 토막을 더 보태는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는 글이다. 미국이라는 사례를 세 좌표 속에 다시 놓으려 한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 자체,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반쯤 모습을 드러낸 이면의 줄기, 그리고 서양 정치사상의 전통이다. 이미 들려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대신, 이 세 좌표에서 새로운 종합적 시각을 길어내려는 것이다.
먼저 이 연재를 떠받치는 두 핵심 명제가 미국의 사례에서 어떤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다시 짚어보자. 잔여항은 없앨 수 없고, 구축체는 닫힐 수 없다. 이 두 명제는 고도로 성문화되고 제도화된 정치체 안에서 유난히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글을 써 나갈수록 생각이 세 겹으로 깊어졌다. 우선 그 세 겹을 펼쳐놓아야 한다.
첫 번째는 논리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재귀적 심화다. 닫으려는 충동 자체도 없앨 수 없는 잔여항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구축체가 마주하는 잔여항은 두 종류이며, 둘 다 없앨 수 없다. 하나는 분쟁 그 자체다. 배제된 사람들, 이견, 불일치가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 분쟁을 없애고 싶다는 충동이다. 분쟁을 사라지게 할 수 없듯이, 분쟁을 사라지게 하고 싶다는 열망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축체는 닫힐 수 없다’는 말을 한 겹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구축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잔여항을 없애지 못해 닫힘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닫으려는 충동마저 없애지 못한다. 어느 쪽도 완전히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잔여항의 인정을 전제로 삼은 구축체 안에서조차 닫으려는 충동이 왜 거듭 솟아나는지도 이로써 설명된다. 애덤스의 선동법,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적색 공포, 매카시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이 그러했다.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구축체란 닫으려는 충동이 없는 구축체가 아니다. 그 충동을 거듭 제약해 끝내 승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구축체다. 그런 제약이 저절로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두 번째는 닫힐 수 없다는 원리를 한층 온전하게 설명해준다. 억압과 흡수, 어느 길로 가도 닫힘에 이를 수 없다. 이 연재는 억압으로 잔여항을 닫아버릴 수 없음을 거듭 보여주었다. 잔여항은 저항하며, 누를수록 더욱 솟구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 보니, 흡수 역시 잔여항을 닫아버리지 못했다. 흡수한다는 행위 자체가 경계를 긋는 행위이고, 경계를 긋는 한 그 바깥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뉴딜 초기의 기여형 노령보험이 노동자의 약 절반을 대상으로 삼았을 때, 적용 범위를 정한 그 선은 수많은 사람을 그 보험 바깥에 남겨두는 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바깥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흡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흡수가 아니라 모든 경계를 없애는 일이 될 테니까. 억압으로도 잔여항을 봉쇄할 수 없고, 흡수로도 봉쇄할 수 없다. 이 구축체가 강경한 수단으로 잔여항을 밀어내든, 온건한 수단으로 안에 받아들이든, 더는 바깥이 없는 종착점에는 이를 수 없다.
세 번째는 루이지애나 매입이라는 거래를 다루면서 얻은 생각이다. 잔여항은 본래 두 얼굴을 지닌다. 잔여항을 없앨 수 없는 까닭은, 이 구축체에 필요한 것과 이 구축체가 치르는 대가가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한쪽만 취하고 다른 쪽만 버릴 수가 없다. 정파 간 분쟁에는 자유와 이견의 표현이라는 면이 있고, 충돌과 무질서라는 대가가 있다. 대외 팽창에는 기회와 안전이라는 면이 있고, 노예제의 확산과 원주민을 집어삼키는 침탈이라는 면이 있다. 닫으려는 충동에는 질서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고, 이견을 억누르는 면이 있다. 잔여항의 이 두 면은 한 몸이기에, 뿌리 뽑을 수도 없고 단순한 옳고 그름으로 환원할 수도 없다.
이 세 겹의 심화를 함께 놓으면, ‘구축체는 닫힐 수 없다’는 핵심 명제가 미국의 사례에서 가장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잔여항의 두 면은 한 몸이다. 따라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긍정해 거두어들일 수도, 철저히 부정해 제거할 수도 없다. 온전히 흡수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억압으로도 봉쇄할 수 없고 흡수로도 봉쇄할 수 없으며, 그것을 봉쇄하고 싶다는 닫힘의 충동마저 봉쇄할 수 없는 잔여항이다. 이 구축체가 닫히지 않는 것은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다루는 대상의 본성상, 닫힘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 잔여항의 인정을 전제로 삼은 구축체
이것이 미국의 사례가 전체 틀에 보태는 가장 독특한 기여이며, 이 글에서 가장 무게를 두어야 할 대목이다. 판단은 힘 있게 내리되 비교사의 경계도 지켜야 한다. 미국의 구축체는 우연히 닫힘을 추구하지 않았던 데 그치지 않는다. 근대 성문헌정의 역사에서, 갈등을 뿌리 뽑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교적 일찍, 그리고 대단히 명시적으로 제도 설계의 전제로 삼은 실험 중 하나다.
매디슨 세대가 한 일은 일종의 정치적 비관주의를 국가라는 기계 속에 새겨 넣는 것이었다. 그들은 통치자가 덕을 갖추었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선을 넘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래서 권력 분립과 견제·균형을 통해 이견과 야심을 제도 설계 안으로 받아들였다. 없애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 한 걸음의 의미는 지극히 깊다. 구축체가 닫힐 수 없다는 사실을 사후에야 드러나는 운명에서, 미리 인정하고 출발하는 설계의 기점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앞선 두 자매 연작에 등장한 구축체 대부분은 우선 닫힘을 추구했다가 잔여항의 반격을 받고서야 닫힐 수 없다는 쓰라린 맛을 보았다. 반면 미국의 구축체는 처음부터 닫힐 수 없음을 받아들였고, 그 인정을 중심에 놓고 자신을 세웠다.
이 차이는 미국의 이야기 전체를 읽는 방식을 바꾼다. 미국사를 완벽에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진보의 역사로 읽는다면, 오히려 그 건국의 토대를 잘못 이해하는 셈이다. 매디슨과 그의 동료들이 설계한 것은 언젠가 완벽해질 기계가 아니었다. 영원히 완벽해지지 않으면서도, 불완전한 채로 계속 돌아갈 수 있는 기계였다. 권력 분립과 견제·균형은 어떤 이상적 종착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다. 그칠 줄 모르는 갈등과 야심과 불일치를 거듭 받아들이고 거듭 균형을 잡되, 결코 없애지는 않는 장치다. 그러므로 이 구축체의 가장 깊은 지혜는 훌륭한 종착점을 설계했다는 데 있지 않다. 종착점이라는 생각 자체를 애초에 버렸다는 데 있다. 인간 본성에 깃든 분쟁은 없앨 수 없음을 인정했기에, 해야 할 일은 분쟁의 소멸이 아니었다. 가능한 한 공동체 전체를 찢어놓지 않을 틀 안에서, 분쟁이 계속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제도 설계의 방향이지, 미국이 내전을 겪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 차이는 세 층위로 짚을 수 있다. 첫째, 앞서 살펴본 많은 구축체는 닫힘을 추구하다 단절을 맞거나 잔여항에 뒤집혔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저 우연히, 수동적으로 닫히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의 구축체는 이견과 야심과 갈등이 계속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토대를 세울 때부터 능동적으로 인정했다. 둘째, 이 전제 덕분에 잔여항을 지속적인 공개 논쟁 속에서 받아들일 기회가 생겼다. 미국도 노예제 문제로 내전에 이르렀고, 헌정 질서는 전쟁과 재건을 거치며 다시 쓰였다. 이 흐름을 2000년까지 따라갈 수 있는 까닭은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충돌 뒤에 제도가 재건되었고, 그 뒤에도 제도를 향한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셋째, 잔여항을 인정한다고 해서 닫으려는 충동에 면역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전제는 인정이지만, 인정한 뒤에도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그 충동과 몇 번이고 씨름해야 한다.
3. 실현되지 않은 보편주의의 두 세기
이제 이 연재의 중심 줄기를 하나의 뚜렷한 선으로 모을 수 있다. 미국은 건국하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독립선언서에 새겼지만, 노예와 원주민과 여성은 정치공동체 바깥에 남겨두었다. 이것이 이 구축체의 가장 깊은 잔여항이었다. 이후 두 세기의 역사는 상당 부분, 그렇게 배제된 사람들이 이 구축체 자신의 건국 원칙을 끊임없이 들이대며 안으로 들어갈 권리를 요구했고, 실제로 규칙을 다시 써낸 역사다.
이 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반숙명론적 성격이다. 글을 쓰면서 차츰 분명해진 세 판단을 따로 짚어둘 만하다. 첫째, 이 구축체는 스스로 내세운 원칙을 저절로 실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은 적어두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 원래 바깥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이 거듭 위험을 무릅쓰고, 한 번도 이행하지 않은 그 약속을 이 구축체가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몰아붙여야 한다. 둘째, 편입은 보장되지 않는다. 지켜낼 수도 있지만 다시 밀려날 수도 있다. 지켜낼 수 있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의존을 줄일, 지속성 있는 집행 장치가 마련되었느냐는 점이다. 다만 그 장치를 집행하고 유지하는 데도 정치적·사법적 뒷받침은 필요하다. 셋째, 편입 자체가 거꾸로 뒤집힐 수도 있다. 레이건은 항공관제사 파업 사태에서, 한때 노동자를 보호하려 내밀었던 연방정부의 손을 공개적으로 거두어들였다. 다만 관제사들은 연방 공무원에 대한 파업 금지 규정의 적용을 받았으므로, 와그너법이 주로 보호하는 민간 부문 노동자들과는 법적 틀이 달랐다. 이 일은 잔여항을 흡수하는 이 구축체의 움직임이 앞으로만 돌고 뒤로는 돌 수 없는 톱니장치였던 적이 없음을 일깨운다.
이 세 판단을 함께 놓고 보면, 실현되지 않은 보편주의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하면서도 없앨 수 없는 잔여항이 된다. 안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보장도 없고, 받아들여진 뒤에 다시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새롭게 배제된 사람들이 언제나 나타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다시 손에 들고 이 문을 두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4. 팽창, 견제, 그리고 반작용
중심 줄기가 배제된 사람들 쪽을 따라갔다면, 스물다섯 편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구조적 리듬은 권력 쪽을 따라간다. 그 리듬은 팽창하고, 견제에 부딪히고, 되밀리는 움직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애초에 견제를 받도록 설계된 행정권은 거듭 팽창했다. 잭슨이 거부권 행사를 일상화한 데서 시작해 링컨의 전시 권력,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수탁자 이론, 뉴딜의 거대한 행정국가, 냉전기에 반영구적인 것으로 굳어진 국가안보국가를 거쳐 닉슨의 제왕적 대통령제에 이르렀다. 팽창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이 구축체가 지닌 제도적 자기 교정이 작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이지, 매번 반드시 작동한다는 보장이 아니었다.
이 리듬에 관해서도 글을 써 나갈수록 분명해진 판단들을 모아둘 필요가 있다. 우선 이 구축체는 사실상 두 종류의 잔여항을 마주하며, 어느 쪽도 닫아버릴 수 없다. 하나는 바깥에 배제된 약자들이다. 보편주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서 남은 빚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권력이 지나치게 자라나면서 쌓인 위협이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아이젠하워가 고별연설에서 짚어낸 군산복합체다. 이 구축체가 스스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지만, 최초의 설계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권력의 덩어리였다.
또한 이 구축체의 견제·균형은 종이에 적힌 죽은 규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이다. 구조 속에 심어진 면역 반응처럼, 권력이 선을 넘으면 의회와 여론과 법원에서, 심지어 대통령이 속한 정당 안에서도 동시에 솟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이 힘은 선택적으로 작동한다. 팽창의 형태가 달라지면 방어력도 천양지차다. 행정부가 법원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강력하게 막아낼 수 있지만, 행정국가가 의회의 승인과 법률이 정한 제한 안에서 내부 재편을 통해 조정 역량을 더 집중시키는 일은 상대적으로 막기 어렵다. 이런 집중에 제약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견제 장치로 저지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이 구축체는 갈등을 푸는 중요한 방식도 보여주었다. 반드시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짓누르지 않아도, 서로 조정하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1937년의 헌정 위기는 결국 행정부가 법원을 장악해서 풀리지도 않았고, 법원이 뉴딜을 꼼짝 못 하게 가로막아서 풀리지도 않았다. 법원 자신의 법리가 바뀌어 이미 자라난 규제국가를 받아들임으로써 풀렸다. 팽창하는 권력은 필요한 합헌성을 얻었고, 견제하는 쪽은 반드시 지켜야 할 독립성을 보존했다. 한쪽의 완승 대신 상호 조정을 추구하는 이 해결 방식이야말로, 이 구축체가 몇몇 중대한 위기를 넘어 존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그것이 내전 같은 단절을 직시하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워터게이트에서 이루어진 교정은 이 구축체의 자기 교정 능력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드러냈다. 그 힘은 어느 한 영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나뉘어 있다는 데 있다. 제도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지 보장이 아니다. 우연히 존재했던 그 녹음테이프가 없었다면 결말도 같지 않았을 수 있다. 더구나 교정 자체가 정당성을 저절로 회복시켜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도의 오작동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교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구축체는 법치를 되찾으면서 신뢰를 잃었다. 끝으로, 이런 반작용은 실제로 일어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워터게이트 이후 행정권을 제한한 일련의 개혁은 분명 한동안 대통령의 권력을 밀어냈다. 그러나 지나치게 팽창한 행정권은 잠복해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5. 추상적인 ‘모든 사람’ 뒤에 있는 이들
이제 줄곧 전체를 관통했으면서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던 이면의 줄기를 다룰 수 있다.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명제다. 미국의 사례에서 그것은 보존되는 잔여항으로 거듭 솟아올랐다. 독립선언서가 약속한 권리에서, 건국의 이상을 다시 쓴 게티즈버그에서,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에서, 세네카폴스 선언과 수정헌법 제19조에서, 그리고 1960년대의 민권운동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면의 줄기가 보존되고 끝내 고갈되지 않는 까닭은, 결국 추상적인 ‘모든 사람’ 뒤에 구체적인 사람이 한 명 한 명 언제나 서 있기 때문이다. 경매대 위에서 가격이 매겨진 노예, 투표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흑인, 혈통만으로 수용소에 갇힌 일본계 시민이 거기 있다. 이 구축체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이 영원히 닫을 수 없는 잔여항인 것은, 그 추상적인 문구 뒤에 지워지기를 거부하고, 환원되기를 거부하고, 순전한 수단으로 취급되기를 거부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언제나 서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이 구축체가 영원히 닫힐 수 없는 궁극적인 이유다. 그 약속이 자신을 저버렸다고 느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일어나 이 구축체를 다시 한 번 열림의 다음 국면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여기서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 이면의 줄기가 이 절에서 가장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서, 그것을 전체 연재의 주제로 격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역사가 반드시 도달할 종착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요구를 제기하는 잔여항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현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거듭 억눌려 물러나며, 반드시 더 완벽한 곳으로 달려갈 열차였던 적도 없다. ‘인간은 목적이다’를 연재의 주제가 아니라 보존되는 잔여항으로 다루는 선택 자체가, 반숙명론을 가장 근본적인 자리까지 관철하는 일이다. 이 연재의 진정한 주제는 시종일관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 그 자체다.
6. 세 연작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제 미국의 사례를 세 연작을 가로지르는 좌표 위에 다시 놓을 수 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가장 깊이 대응하는 것은, ‘인간은 목적이다’가 보존되는 잔여항으로 존재한다는 구조적 동형성이다. 중국에서는 백가쟁명이 일으킨 비가역적 상전이에서 시작되었고, 미국에서는 건국의 보편주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배제된 이들의 끊임없는 요구 속에 깃들었다. 그것을 담는 구조는 다르지만, 보존된다는 성질은 같다.
유라시아와 미국 사이에는 특히 중요한 대응 관계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에 관한 것이다. 헌정의 형식은 남겨두면서 실질적 권력은 확장하는 수법이다. 미국의 전시 행정권 팽창, 링컨, 뉴딜, 냉전의 국가안보국가는 겉모습이 그와 닮았다. 그러나 핵심적인 차이를 반드시 짚어야 한다. 미국의 이런 팽창은 흔히 사후에 의회의 승인을 구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규모가 줄어든 경우도 있었다. 또 워터게이트나 법원 개편의 실패에서 보듯, 여러 차례 견제의 반작용을 받았다. 그러나 그 견제가 언제나 제때, 충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화정의 형식을 실제로 뒤엎어버린 옥타비아누스의 기술과는 겉모양이 비슷할 뿐 실질은 다르다. 두 번째는 닫힘의 추구와 ‘인간은 목적이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전도의 관계다. 애덤스의 선동법, 윌슨의 전시 탄압과 적색 공포, 매카시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처럼 미국에서 닫으려는 충동이 고개를 든 순간들은, 그 전도가 닫힘을 추구하지 않는 구축체 내부에 국지적으로, 잠시 나타난 경우였다. 여기서 논의한 사례들은 나중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반격을 받거나 부정되었다. 그러나 교정은 흔히 늦게 왔으며, 이미 생긴 피해를 지울 수는 없었다.
7. 미국의 사례는 이론에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이론의 틀로 미국을 분석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문제다. 미국의 사례는 거꾸로 전체 철학적 틀, 곧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에 ‘인간은 목적이다’를 더한 틀에 실질적인 통찰을 돌려준다.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서 본 재귀적 심화다. 닫으려는 충동 자체도 없앨 수 없는 잔여항이라는 사실이 ‘구축체는 닫힐 수 없다’는 명제를 더욱 철저한 자리까지 밀고 간다. 둘째는 그보다 더 큰 층위의 기여다. 미국의 사례는 닫힐 수 없다는 사실을 한계나 예정된 실패에서 설계의 전제로 뒤집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구축체는 자신의 닫힐 수 없음과 싸우는 대신, 그것을 토대를 놓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이로써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 안에 앞선 두 연작이 충분히 펼쳐 보이지 못한 새로운 양상이 열린다. 닫힘을 추구하는 구축체에서는 실패 뒤에 잔여항이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반면 잔여항의 인정을 전제로 삼은 구축체는 잔여항이 지속적으로, 공개적으로 전개될 통로를 열 수 있다. 한꺼번에 폭발할 때까지 쌓이지 않더라도, 잔여항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내전이나 격렬한 단절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충돌 속에서 조정하고 재건할 가능성도 제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사례는, 주로 닫힘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서술하던 이 법칙을, 닫힐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까지 함께 서술할 수 있는 법칙으로 확장한다. 셋째는 루이지애나 매입의 사례에서 나온다. 그것은 잔여항의 양면성과 구축체가 닫힐 수 없다는 사실 사이의 관계를 꿰뚫어 보여준다. 구축체가 잔여항을 흡수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을 명확하게 긍정할 수도 명확하게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축체가 닫힐 수 없는 가장 깊은 원리다. 닫힌다는 것은 모든 잔여항을 온전히 흡수하거나 철저하게 제거한다는 뜻인데, 잔여항의 양면적 본성은 양쪽 모두를 불가능하게 한다.
여기서는 이 세 가지의 적용 범위를 구분해야 한다. 셋째, 곧 잔여항의 두 면이 한 몸이라 온전히 흡수할 수 없고 따라서 구축체는 닫힐 수 없다는 명제는 보편적이다. 어떤 구축체에도 성립한다. 잔여항이 잔여항으로서 지닌 본성을 말하고 있으며, 어떤 구축체든 자신이 흡수할 수 없는 잔여항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첫째는 다르다. 닫으려는 충동 자체가 잔여항이라는 명제는 미국처럼 닫힘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구축체에만 성립한다. 무엇이 잔여항인지 여부는 구축체의 조직 원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잔여항의 인정을 전제로 삼은 구축체에서는 닫으려는 충동이 그 원리에 거슬러 솟아나므로 잔여항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닫힘의 추구를 목적으로 삼은 제정의 구축체에서는 그 충동이야말로 조직 원리 자체다. 잔여항이 아니라 구축체의 일부인 것이다. 닫으려는 충동이라는 똑같은 것이 미국에서는 잔여항이지만, 제정의 구축체에서는 핵심이다. 그리고 이 상대성 자체가 다시 하나의 보편적 기여가 된다. 무엇이 잔여항인지는 결코 절대적으로 정해지지 않으며, 구축체의 조직 원리와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8. 주기는 여전히 돌고 있다
글의 끝에서는 반드시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미국도, 대통령도, ‘인간은 목적이다’도 마지막 귀착점은 아니다. 더 큰 그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축체는 끊임없이 닫히려 하고, 잔여항은 끊임없이 솟아난다는 그림이다.
결국 이 연재가 한 일은 미국이라는 하나의 사례를 통해, 이 더 큰 법칙에 가능한 한 정직한 증언 하나를 보탠 것뿐이다. 이 법칙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사례 하나로 법칙을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고도로 성문화되어 있고 잔여항의 인정을 건국의 토대에 새겨 넣은 이런 구축체 안에서, 그 법칙이 얼마나 독특하고 선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미국의 사례가 주는 가장 깊은 깨달음은 어쩌면 세기 전환기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환상에 응축되어 있을지 모른다. 냉전에서 승리했고, 거대한 경쟁 체제가 해체되었다. 많은 사람이 인류 제도의 미래를 둘러싼 최종 경쟁은 이미 결판났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마치 이 구축체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 구축체 안에서 마지막으로, 또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닫힘의 환상이었다. 사람들이 종착점을 선언하던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잔여항은 이미 이 구축체 내부에서 조용히 모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로 매듭지어진 2000년 선거는 여기에 더없이 정확한 주석을 남겼다. 가장 깊은 불일치 속에서도 이 구축체는 합의를 만들어 닫힌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기 절차에 의지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답 하나를 가까스로 내놓았을 뿐이다. 절차는 마쳤지만 잔여항은 없애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 구축체의 가장 깊은 힘이 있다. 닫힘을 추구하는 구축체는 궁극적인 답 하나, 잠가버린 질서 하나로 모든 잔여항과 논쟁을 없애려 한다. 그러나 이 구축체의 권력 분립과 견제·균형 설계에는 그런 망념에 맞서는 원칙이 있다. 현실의 미국은 여러 차례 그 원칙에서 벗어났다. 이런 개방성은 거듭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성립한 사실로 여길 수는 없다. 더는 갚지 못한 빚도, 위협도, 논쟁도 없는 종착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종착점 자체가 죽은 듯 굳어버린 상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진 것은 권력 분립과 견제·균형, 선거와 공개 토론으로 세운 뼈대, 그리고 그 뼈대 위에서 논쟁을 거듭 받아들이고 반격을 받아내며 잔여항을 소화하는 질긴 힘뿐이다. 소중히 여길 것은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거듭 쟁취해 왔으며 잃을 수도 있는 개방성이다. 배제된 이들이 계속 문을 두드리게 하고, 지나치게 팽창한 권력을 되돌릴 기회를 주며, 세대마다 여전히 고칠 수 있는 이 뼈대 위에서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새로 논쟁하게 하는 개방성이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 구축체가 열려 있는 한, 그 자신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멈추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는 여전히 돌고 있다.
중국어 원고의 논증과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독립 재구성한 글입니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