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E 웃음론 · 03
황주, 혜주, 담주
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찾은 사람이 소리 내어 웃는다. 노년의 소식은 초상화에 평생의 공적을 묻고 세 유배지로 답한다. 14DD에서는 자기 목적이 웃음의 대상인 틀에 들어온다. 득의의 웃음과 쓴웃음이 짝을 이루고, 비교의 웃음은 조롱으로 흐를 수 있다. 웃음을 써서 하는 일은 따로 검토해야 한다.
두 웃음
합격자 명단을 보는 사람은 아직 긴장해 있다. 자기 이름과 합격이라는 말을 찾자 웃음이 터진다. 소식은 노년에 초상화에 이렇게 썼다. 마음은 재가 된 나무 같고, 몸은 매이지 않은 배 같네. 평생의 공적을 묻는다면, 황주 혜주 담주. 세 지명은 유배되었던 세 곳이다. 시에는 웃음이 없다. 거기서 웃음을 읽는 것은 세 번째 논문의 해석이다.
하나는 기쁘고 하나는 쓰지만 공통점이 있다. 웃음의 대상인 틀이 웃는 사람 자신의 목적이다. 14DD다. 정신분석 연작은 방향 있는 자아, self-with-purpose로 정하고, 프로이트 초자아의 Ego-Ideal, 곧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갈래에서 취한다. 처벌적 양심은 13DD의 병리나 14DD의 식민화 잔재로 달리 분류한다. 14DD로 잇는 다리는 유한성이다. 끝날 줄 알면서 행동하고, 행동에는 이유가 필요해 목적이 나온다. 그 여항은 나만 목적이 아니라 타자도 목적이라는 점이다.
13DD에서 웃음에 주인이 생겼다면, 14DD에서는 자기 목적이 대상인 틀로 들어온다. 두 방식이 있다. 힘쓰는 일이나 평생의 공적 자체가 틀이 되어 여항을 보이면 득의의 웃음과 쓴웃음이다.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높이는 목적이 들어오면 비교의 웃음과 조롱이다. 자주 혼동되는 별개 일도 있다. 알고도 말하지 않기, 공개적으로 지적하기, 풍자와 장난처럼 웃음 주변에서 하는 행위다. 행위에 목적이 있어도, 그 목적이 곧 대상인 틀에 들어간 나의 목적은 아니다.
그래서 논문은 사례마다 세 칸을 따로 쓴다. 이번에 판단한 틀과 여항의 관계, 웃는 사람이 지금 작동하는 층, 웃음을 둘러싼 행위다. 서로 대신 채우지 않는다. 먼저 판단으로서의 웃음과 웃음을 써서 하는 일은 다르다는 점을 세워야 한다. 앞은 틀에 이런 여항이 있다는 사건으로 거스를 수 없고, 뒤는 그 판단 주변의 행위로 상대를 키워 주거나 깎아내리는지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 해치는 데 쓰였다고 판단 자체를 없던 일로 할 필요가 없다. 조롱한 사람도 여항은 실제로 보았을 수 있다. 반대로 진짜 판단이었다고 행위를 변호할 필요도 없다. 결과로 웃도록 압박해 하지 않은 판단을 떠맡기는 것은 식민화이며, 식민화하는 것은 행위이지 판단이 아니다.
벌써 이루어졌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6장에서 갑작스러운 영광이 웃음이라는 얼굴을 만드는 격정이라고 했다. 원인은 돌발적인 자기 행동에 만족하거나, 타인의 결함과 비교해 자신을 갑자기 칭찬하는 것이다. 흔히 우월 이론으로 묶지만, 첫 원인에는 남의 결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논문은 둘을 득의의 웃음과 비교의 웃음으로 읽는다. 모두 14DD이며 목적이 들어오는 방식이 다르다.
득의의 웃음이 생기는 순간을 보자. 명단을 보며 긴장하는데 합격이다. 결승선을 지나는 선수의 몸은 아직 힘쓰는데 이미 이겼다. 같은 구조다. 틀은 아직 이루지 못해 힘쓰는 틀이다. 몸도 마음도 아직 아님에 있다. 여항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 아직 아님의 칸만 있고 이미의 칸은 없어, 바로 이 점을 담지 못했다. 이미에 주의가 가면 웃고, 아까 위험했음에 머무르면 뒤늦은 두려움이 된다.
이 웃음에는 아직 남은 간격이 필요하다. 긴장이 풀리기 전에 이루어져야 이 웃음이 생긴다. 성공이 서서히 와 미리 보았다면 틀이 먼저 풀리고, 그때는 만족이지 이 웃음이 아니다. 성공했다고 늘 웃지는 않는다. 득의의 즐거움은 목적 달성에서 오지만 따라오는 감정이고, 웃음은 거스를 수 없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만나도 같은 것은 아니다. 쓴웃음의 씁쓸함도 감정이다. 둘은 내 목적을 틀로 하는 14DD의 짝이다. 한쪽 여항은 이미 됨, 다른 쪽은 대가와 뜻밖에 이른 곳이며, 따라오는 감정이 기쁨과 씁쓸함으로 갈린다.
여기서 목적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갈래다. 일시적 의도가 갑자기 이루어져 웃는 것은 여기에 넣지 않는다. 흔히 둘째 글의 한 사람 안의 갑작스러움이다. 넷째 글의 마음이 통한 웃음과도 판단 내용을 나눠야 한다. 득의는 내가 해낸 일을, 마음이 통한 웃음은 옛 파악에 담기지 않았던 상대의 자리를 보며 그 자리를 상대의 것으로 남기는 일을 판단한다. 기쁨 자체로 층을 다시 배정하지 않는다.
나는 저렇게 어리석지 않아
홉스의 둘째 원인에서는 남의 결함과 비교해 자신을 칭찬한다. 대상인 틀과 결함인 여항은 남의 것이지만, 남으로 자신을 재고 그 순간 자기를 높이는 내 목적도 들어간다. 비교와 구경은 보임의 표에서 같은 칸, 나는 보고 상대는 못 보는 칸에 있으나 비교가 들어왔는지가 다르다. 각주구검을 읽고 그 사람이 갇힌 모습을 볼 뿐이면 구경이다. 나는 저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웃으면 비교다.
홉스가 이를 찬양한 것도 아니다. 같은 장에서 남의 결함을 많이 웃는 것은 비겁함의 표지이고, 큰 마음의 한 몫은 남이 조롱당하지 않도록 도우며 가장 유능한 사람과만 비교하는 것이라 했다. 조롱으로 넘어갈 때 기억할 대목이다.
조롱은 비교의 한 종류다. 상대 틀의 여항을 보면서 웃는 대상은 그 사람이고, 내 틀에는 여항이 없는 듯 자신을 면제하며, 끝은 흔히 상대의 곤혹이다. 판단과 행위가 함께 있다. 판단은 상대의 틀에 여항이 있다는 것이고, 행위는 그 판단을 공개적으로 그 사람에게 씌우면서 자신은 틀 바깥에 서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패한 상대에게 생각과 실제가 얼마나 어긋나는지 알리는 것으로 조롱을 설명했다. 흔한 끝, 상대의 좌절을 잘 짚는다.
타자도 목적이라는 14DD의 여항에 조롱은 응답하지 못한다. 상대는 나를 높이는 재료가 되고, 그의 틀은 나의 여흥, 곤혹은 나의 수확이 된다. 독립성을 부정해야만 목적을 유지한다면 구조상 14DD에 머무르며 강제 폐쇄로 향하기까지 한다. 대상이 틀에서 사람으로 미끄러지며 깎아내리기가 된다. 한 겹 더 있다. 조롱하는 사람은 자기 틀에는 여항이 없다고 여긴다. 바로 자기가 웃는 그 자세다. 그래서 자신도 다음 웃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세 가지를 살펴보자
조롱과 놀림은 모두 웃음으로 남의 틀의 여항을 가리키므로, 처음 의도만으로 나누지 못한다. 논문은 단일 기준 대신 세 검토를 둔다. 틀을 웃는가 사람을 웃는가. 놀림은 틀을, 조롱은 사람을 향한다. 자신을 면제하는가. 놀림은 나도 그랬다며 포함하곤 하고, 조롱은 자기에게 여항이 없다고 여긴다. 상대가 웃지 않거나 고쳐도 벌받지 않는가.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다. 동의하지 않을 길이 없다면, 속마음이 어떻든 여지는 남지 않았다.
끝은 겹칠 수 있다. 한 번의 놀림에 상대가 난처해지고, 함께 웃고, 틀도 고칠 수 있다. 끝은 검토의 한 부분으로 함육인지 깎아내림인지 혼자 판결하지 않는다. 실제 행위에서 세 가지를 하나씩 살펴야 한다.
논문은 어려운 예로 시험한다. 『세설신어』 「언어」에서 열 살 공융이 아버지와 낙양에 갔을 때, 태중대부 진위는 어려서 총명해도 자라서까지 꼭 훌륭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공융은 어르신도 어릴 때는 몹시 총명하셨겠다고 답했다. 진위는 크게 당황했다.
주어부터 나누자. 기록된 것은 공융의 말과 진위의 당황이지 웃은 사람이 아니다. 공융은 말했고 독자가 웃는다. 아이에게 쓰던 규칙을 말한 사람 자신에게 돌리자, 그 자신이 규칙의 여항이었다. 틀인가 사람인가에는 규칙을 가리키되 사람에게 닿는 두 면이 있다. 자신을 면제했는지는 모른다. 고치거나 안 웃어도 벌받지 않는지도, 한쪽이 대부이고 다른 쪽이 열 살이라는 사실만으로 정하지 못한다. 이 대목은 누가 반박해 벌받는지도, 진위가 답하지 못하도록 억눌렸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세 검토로도 조롱이라 결정 못 한다. 곤혹으로 끝났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독자의 웃음은 별개다. 규칙을 말한 사람이 그 규칙의 여항이기도 했다고 판단한다. 되돌아온 관계만 보면 구경이고, 진위의 곤혹을 즐겨 자신을 높이면 내 목적이 들어가므로 다시 세 검토가 필요하다. 이 사례를 어려운 채로 남기는 쓸모는 여기 있다. 재치 있는 한마디도 그 결과만으로 성격을 정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황주, 혜주, 담주
쓴웃음의 틀은 자신의 목적,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계획과 일, 평생의 포부다. 여항은 그 대가와 뜻밖에 이른 곳이다. 여전히 목적 안에 서서 자기 것이라 인정하고, 적지 않은 대가도 앞에 있다. 여항을 보면 웃고, 목적의 상실을 보면 운다. 쓰다는 감정은 대가에서, 웃음은 초점에서 온다. 대가는 종류를 나누되 웃음과 울음을 나누지 않는다는 총론의 예가 쓴웃음이다.
소식에게 돌아가자. 평생의 공적은 사대부가 일생 힘쓰는 목적의 틀이다. 그런데 답은 세 유배지다. 틀이 다 담지 못한 것은 그 목적이 자신을 데려간 곳이었다. 논문이 고른 독법에서는 여전히 공적을 묻고 인정한다. 다만 물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내려놓은 틀을 되돌아볼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는다. 세 곳이라는 여항도 또렷하다. 시의 힘은 잃은 공적에 머무르지 않고 황주 혜주 담주를 공적 자체로 답한 데 있다. 대가는 몹시 무거워도 여전히 웃음이다.
쇼펜하우어도 굳게 믿던 기대가 폭로되었을 때 스스로 짓는 쓴웃음을 말한다. 가까우나 기대가 현실에 졌다는 승패가 남는다. 이쪽에서는 기대를 여전히 자기 것이라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낸 점과 함께 앞에 둔다. 웃음은 승패를 정하지 않는다.
절망의 웃음도 대가는 무겁지만 층이 다르다. 쓴웃음은 14DD로 목적이 작동하며 그 안에 서서 대가를 여항으로 본다. 넷째 글의 정의에서 절망의 웃음은 15DD다. 선택이 없다고 인정해 여항도 다 끝났다는 파악 속에서, 아직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 소식의 시를 그쪽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목적의 틀이라는 면을 취하고 다른 면은 넷째 글에 남긴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보고 상대는 못 보는 칸에는 짓궂은 웃음, 놀림, 조롱, 사랑의 웃음이 있다. 판단은 상대 틀에 이런 여항이 있는데 아직 못 보았다는 같은 형태다. 차이는 간격을 어떻게 다루는 행위인가에 있으며, 논문은 가리키는 방식으로 나눈다.
짓궂은 웃음은 가리킬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 상대가 알아차리기를 기다려 갑작스럽지 않고 지속된다. 중국에서 아판티로도 익숙한 나스레딘의 이야기다. 이웃에게 냄비를 빌렸다가 작은 냄비까지 돌려주며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이웃은 기뻐한다. 다시 빌린 뒤에는 돌려주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냄비가 죽느냐고 항의하자 낳는 것은 믿었는데 왜 죽는 것은 못 믿느냐고 한다. 처음부터 이득이면 무엇이든 믿는 틀과 여항을 보았지만 말하지 않고 기다리다 끝에 직접 밝힌다. 이웃이 난처했는지 함께 웃었는지는 이야기에 없다.
짓궂음은 웃음이 아니라 알고도 말하지 않는 데 있다. 말하지 않는 행위의 목적이 방향을 정한다. 상대가 막히는 모습을 보려면 조롱으로 흐르고, 상대가 스스로 틀을 열어 보기를 기다리면, 그 길을 막지 않고 자신이 찾아내게 하는 교육론의 함육에 가까워진다. 교사가 답을 숨기는 것과 장난치는 사람이 장치를 숨기는 것은 판단이 완전히 같아도 행위는 다를 수 있다.
세 칸을 나누면 층도 갈린다. 나는 보고 상대는 못 본다는 판단에는 무지를 다른 주체의 상태로 표상해야 하므로 빨라도 13DD다. 나이가 아닌 구조가 근거다. 그전 숨바꼭질의 웃음은 그 구조의 경향이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 행위에는 목적이 있어 이 글에서 논하지만, 행위의 목적이 웃음의 판단의 층을 대신 정하지 않는다.
웃음으로 가리켜도, 다 말할 수는 없다
놀림은 웃음 자체로 가리킨다. 디오게네스는 털 뽑은 닭을 플라톤의 강의실로 가져와 이것이 그의 인간이라 했다. 웃음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논문은 닭으로 깃털 없는 두 발이라는 정의의 여항을 가리킨 것으로 읽는다. 라에르티오스는 뒤에 넓고 평평한 손톱이 더해졌다고 전한다. 수동태여서 누가 더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끝은 고친 틀로 여항을 넣는 흡수다. 불인과 소식의 팔풍에도 안 흔들린다더니 방귀 한마디에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도 놀림의 예지만, 부끄럽고 화났다는 판본과 크게 웃었다는 판본이 있다. 먼저 판본을 정해 세 검토를 해야 하며 한 결과로 결정하지 않는다.
놀림은 깨닫게 하고 함육이 될 수도 있다. 답을 주지 않고 한 번 가리키며 보는 걸음은 상대에게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성일 뿐이다. 웃지 않고 고쳐도 벌받지 않는지 봐야 한다.
사랑의 웃음도 짓궂은 웃음과 구조가 같다. 사랑하는 것은 알아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알려진 것은 사랑이고 여항은 그토록이라는 정도에 있다. 가리키는 방식이 다르다. 짓궂은 웃음은 말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사랑의 웃음은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한다.
그림책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에서 작은 토끼는 크기를 거듭 보여 주고, 큰 토끼는 매번 말해 주면서 더 멀리 간다. 원작에도 웃음이 있다. 작은 토끼는 웃으며 말하고 큰 토끼도 웃으며 답하며, 끝에는 미소 짓고 속삭인다. 논문에서는 매번 작은 토끼의 척도에 여항이 생기고 그토록을 말로 다 못한 것으로 읽는다. 원작에 웃음이 있어도 층을 인증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웃음의 층은 어떤 사랑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정신분석은 상대를 위해 자기 목적을 기울이는 일을 14DD의 '투자(投注)'로, 상대가 독립한 목적임을 확인하는 일을 15DD로 나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번 웃음의 작용을 봐야 한다. 다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검토를 면하지도 않는다. 언젠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거라는 말도 이견을 금할 이유로 쓰일 수 있다.
한 주의 시작이 좋군
프로이트는 『유머』에서 월요일 교수대로 끌려가며 한 주의 시작이 좋군, 하는 죄수의 말을 든다. 유머는 썼어야 할 감정을 아낀다고 설명한다. 초자아가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겁먹은 자아를 달랜다. 위험해 보이는 세계도 아이의 놀이일 뿐이니 농담거리로 삼으면 된다는 듯이. 그렇게 현실의 요구를 물리친다.
이 초자아는 어느 갈래일까. SAE 정신분석은 Ego-Ideal을 14DD로, 처벌적 양심을 다른 갈래로 재분류한다. 여기서 다정하게 달래는 초자아가 후대 문헌의 온화한 초자아인지, 논문은 정하지 않는다. 달래지만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정하지 않는다. 아직 대응하지 않은 것으로 두고, 이름만으로 웃음의 층을 정하지 않는다.
세 칸으로 적자. 판단된 관계에서는 한 주의 시작이라는 말에 주간의 계획과 기대가 틀로 쓰이고, 여항은 그 한 주가 없다는 것이다. 틀의 문법 안에 여항을 말해 둘이 함께 앞에 있다. 웃는 사람의 층은 미정이고, 행위는 농담 한마디다. 프로이트와는 두 차이가 있다. 그쪽에서는 위험을 줄이고 현실의 요구를 물리쳐 칸트의 무로 바뀜에 가깝다. 이쪽은 틀과 여항이 다 있고 위험도 여전하다. 또 그쪽에서는 초자아가 위에서 자아를 내려다보며 달랜다.
그래서 교수대의 유머에는 설명 후보를 남긴다. 그 순간 자기 목적 안에서 주간 계획을 자기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 여항을 말하는 웃음은 14DD의 쓴웃음과 가깝다. 아직도 한 주라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자신을 불쑥 발견하고, 더 없다는 파악 속에서 찾으며 넷째 글의 조건까지 맞으면 절망의 웃음으로 향한다. 헛수고하는 자신을 보았다면 13DD의 자조와 가깝다. 원문만으로 정할 정보가 없어, 후보를 남겨 두는 것이다.
14DD에서는 자기 목적이 대상의 틀에 들어온다. 판단의 진위와 근거, 웃음을 쓰는 행위의 결과는 따로 검토한다. 이름과 용도에서도 웃는 사람의 층을 도출하지 않는다. 소식의 세 지명은 또렷이 남고, 평생의 공적을 묻는 말도 남는다. 15DD에서는 웃음이 의심하지 않는 태도에 선다. 다음 글의 일이다.
원논문과 읽기 안내
현재 중국어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썼습니다. 원논문은 Qin, Han(2026)의 『목적이 웃음의 대상인 틀에 들어올 때』이며 이 자료란에 논문과 DOI를 연결합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했고 간체·번체 중국어는 전문이며, 기술적 전문 번역은 아닙니다. 소식의 시나 공융의 말에 원기록에 없는 웃음을 보태지 않고, 불인 이야기의 판본 차이도 남깁니다. 교수대의 웃음은 정보가 부족해 여러 후보로 두며, 초자아의 미결 대응을 이름만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웃음의 판단, 그 순간의 작용, 웃음으로 하는 행위와 결과를 서로의 증거로 바꾸지 않습니다.
이 판본에 관하여
학술 원문: Qin, Han(2026), 『목적이 웃음의 대상인 틀에 들어올 때』(SAE 웃음론·3). self-as-an-end.net · DOI: 10.5281/zenodo.23287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