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읽기
Non Dubito

SAE 웃음론 · 04

서로 마주 보기 전에

더는 아무것도 없다고 여긴 사람이 아직 찾고 있는 자신을 본다. 아버지가 하던 평안이 복이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된다. 절망의 웃음과 뒤늦게 뜻을 알아들은 회심의 웃음은 모두 15DD에서, 의심하지 않는 태도로 일어나며 한쪽에서 하는 일이다. 마주 웃으며 서로를 인정해도 각자의 15DD 순간이지, 완전한 16DD를 인증하는 것은 아니다.

Han Qin ·

용어 안내: 이 연작은 이 사이트에 고정해 둔 13–16DD 정의를 따릅니다. 한 번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서로가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일은 두 주체가 각각 행하는 15DD의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16DD는 모든 일에서 완전한 양방향의 의심하지 않음이 이루어지는 경우만 가리키며, 유한한 개인이 마주하는 이상적 한계입니다. 연결된 논문이 개별 순간의 상호 인정을 16DD로 기록한 곳은 이 에세이판에서 이 구분에 맞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웃거나 울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인정했다고 판정하지도 않습니다.

두 번의 웃음

두 번의 웃음을 보자. 하나는 막다른 곳에서 온다.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고 마지막 길도 막혔다. 주저앉아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조금 뒤 문득 깨닫는다. 아직 생각하고 있다. 사방을 보고 있다. 어떤 일을 다른 방법으로 해 볼 수 없을까 마음속에서 다시 시도한다. 그 자신을 보고 웃는다.

다른 웃음은 아주 늦게 온다. 아버지는 평안한 것이 복이라고 했다. 어릴 때도 고개는 끄덕였다. 자신에게 잃기 두려운 것이 생긴 뒤,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말인지 알고 살짝 웃는다. 이것은 웃음론 넷째 논문이 만든 예시 장면이다.

앞의 웃음이 아래 네 조건에 맞으면 논문이 말하는 절망의 웃음이고, 뒤는 회심의 웃음이다. 여기서 회심은 상대가 있던 자리에 자신도 와서, 그 말뜻을 뒤늦게 이해한다는 뜻이다. 둘 다 15DD다. SAE 방법론 총론 §1.7은 15DD를 '나만 목적이 아니다'라는 의심하지 않음으로 정한다. 타자도 그 자체로 목적임을 인정하지만 한 방향이다. '나는 너를 인정한다. 네가 거꾸로 나를 가른 것은 아니다.' 개정 설명도, 타자가 목적임을 한 주체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그 주체가 직접 행하는 한 번의 가르기이지, 주체 사이에 수평적으로 성립한 규범은 아니라고 밝힌다.

정신분석 넷째 논문은 이 층을 심리구조로 펼쳐 Cert라고 부른다. 자기 목적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타자가 독립한 목적임을 한쪽에서 확인하는 것, 두 성분이다. '의심하지 않음은 확고한 신념이 아니다. 확고한 신념은 망상일 수 있다.' 의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문도 여항도 틀의 틈도 있지만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완성할 수 없어도 확실할 수 있다. 두 성분은 떨어지지 않는다. 타자의 독립성을 부정해야만 유지되는 의심하지 않음은, 그 태도가 아니라 틀을 억지로 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논문은 이를 망상적 확신, 완고함, 타인을 지배하는 사명감과 구별할 네 최소 기준도 둔다. 여항의 충격을 거듭 겪어도 철회하지 않되, 반응을 차단하거나 질문을 거절하지 않고 여항을 인정하며 유지한다. 타자의 방향이 내 방향에 봉사하지 않아도 된다. 방향은 확실하되 구체적 결과는 늘 불확실할 수 있다. 대가 앞에서 철회하지 않되 자기를 강제하지 않아, 대가가 있어도 버티기 위한 별도 힘이 들지 않는다. 아래 두 웃음도 네 기준에 대보아야 한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정의는 이렇다. '주체가 지금 더는 어떤 선택도 없다고 인정했을 때, 자기가 아직 찾고 있음을 뜻밖에 발견한다.' 실제 출구의 유무와는 큰 관계가 없다. 대상인 틀은 상황을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항도 없다는 파악이다. 출구의 목록을 상황 전부로 여긴 셈이다. 웃음이 발견한 여항은 아직 찾는 자기, 생각하고 시도하고 보는 사람이다.

출구의 집합, 상황에 대한 파악, 찾는 사람을 나누자. 선택이 없다는 출구의 판단은 지금 맞거나 틀릴 수 있으며 효력은 따로 본다. 웃음은 출구가 아니라 파악에 들어가지 않은 찾는 사람을 본다. '아직'이 틀에 걸리는 뜻은 눈앞에 있고 쓰인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고, 그 파악을 앞에 두고 그에 따라 상황을 본다. 웃었다고 파악이 뒤집히지도, 찾는 사람이 지워지지도 않는다. 누구도 지지 않는다.

그래서 절망의 웃음은 공식의 극한 사례다. 모든 틀에는 여항이 있다는 말이 다른 데서는 일반 명제지만, 여기서는 이미 전부 담았다고 주장하는 한 파악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보인다.

출구를 찾았다는 뜻도 아니다. 웃은 뒤 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이후의 일이 앞의 웃음이 무엇이었는지 거꾸로 바꾸지는 않는다. 스스로 구하거나 상황과 화해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모두 뒤의 일이지 웃음의 내용은 아니다. 같은 상황에서 이제 아무것도 없음에 주의가 가면 울고, 그런데도 아직 찾음에 가면 웃는다. 번갈아 오거나 함께 와도 된다. 절망의 웃음은 그 울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

뜻밖이라는 말은 수사가 아니다. 보임의 표에서는 한 사람 안의 갑작스러운 웃음이다. 조금 전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 서서 아직 찾는 자신을 못 보았다. 지금 보며 간격이 한순간 닫힌다. 발견이 아니라 계속 찾겠다는 결정이라면 의지이지 웃음은 아니다.

뜻밖임에는 더 무게가 있다. 이를 악물어 의지로 찾는다면 계속 찾는 줄 알고 있으니, 그런데도 찾고 있었다는 발견이 없다. 찾음을 결정하는 대신 발견한다는 것은 의지로 떠받치지 않음을 시사한다. 방향 스스로 가고 누가 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문은 뜻밖의 발견을 악물어 유지하지 않는 방향의 표지로 둔다. 원래 네 번째 기준이 묻던, 방향을 어떻게 유지하는지에 대응한다.

다만 표지일 뿐, 의외라는 느낌만으로 인증하지 않는다. 이를 악무는지는 별도 표지로 알아야 하며 웃음의 유무에서 역산하지 못한다. 두 질문이 있다. 찾음은 발견되었나, 계속 의지가 감시하고 밀었나. 이전 언행에서 답해야 한다. 그 순간 찾는 사람을 보는 주의에 별도 힘이 필요한가. 이것은 보조 증거일 뿐이다. 악물어 하는 일을 힘들이지 않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의도 섞여, 한쪽은 악물고 한쪽은 볼 수 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동안의 찾음이 악물어 유지된 것이었다면, 웃었어도 논문이 정의한 절망의 웃음은 아니다. 그때 선 자리에 따라 따로 적는다.

헛수고하는 나, 내 방향

같은 막다른 곳에서 13DD도 자신을 웃을 수 있다. 길이 없다고 알면서도 찾는 나 좀 보라는 웃음이다. 길이 없다는 앎이 틀, 아직 찾음이 여항으로 구조는 같지만, 이것은 13DD의 자조다. 차이는 틀이 아니라 찾는 사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다. 자조는 우습고 헛수고하는 자기를, 절망의 웃음은 자기 방향을 본다. 틀과 여항이 같아도 층은 다르다. 층을 활성화하는 것은 대상인 틀이 아니라 그 순간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문은 네 조건으로 절망의 웃음을 정한다. 찾는 사람을 자기 방향으로 본다. 방향은 이를 악물어 유지되지 않으며 뜻밖의 발견을 표지로 삼되 따로 검증한다. 미래의 자신에게 열려 오늘의 방향을 실현하라 요구하지 않는다. 그 방향이 타자의 복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두 의심하지 않음의 특징이므로 이 정의에서 15DD다. 조건을 못 채우면 논문이 말하는 절망의 웃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 어느 층으로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웃음이 있다면 그 웃음의 자리를 따른다.

논문은 숨기지 않는다. 배타성은 이 정의가 맡지 한 웃음 내부에서 도출하지 않는다고. 방향을 유지하는 데 남의 복종이 필요한 사람도, 뜻밖에 아직 찾는 자신을 보고 이를 악물지 않으며 미래에 열릴 수 있다. 그 순간만 보면 구분되지 않는다. 네 번째 조건이 막는 것은 그런 경우다. 문제는 자기 방향으로 본 방향 자체에 있다. 이 배제는 정의로만 가능하고 순간의 모양으로는 못 한다.

검토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자리에서도 찾는 사람을 이렇게 볼 수 있는지다. 13DD는 자기를 돌아보지만 자기 방향이 없어, 갇혀 헛수고하는 자기를 자조하거나 볼수록 불안해지기 쉽다. 14DD는 목적을 통해 자기를 파악한다. 길이 없다고 인정하면 목적이 작동하기 어려워, 방향을 지키려면 대개 의지로 버텨야 하니 둘째 조건을 못 넘는다. 목적이 굳을 수는 있어도 굳음이 자기강제 없음과 같지는 않다. 쓴웃음은 목적이 아직 작동해 가능하다. 15DD는 별도 힘 없이 방향을 유지하며 미래의 자신이 바꾸거나 멈출 수 있고, 타자의 복종도 요구하지 않는다. 주장을 좁힐 조건도 적는다. 두 반증 조건의 전건 모두 이 웃음 밖의 언행으로 판단하고, 웃었는지로 거슬러 정하지 않는다.

대상은 13DD 주체의 상황 파악인데 판단자는 15DD에 선다. 대상인 틀의 층으로 세면 13DD로 돌아가 구조와 어긋난다. 한 웃음은 웃는 사람을 따라간다는 이유다. 주체성을 취소하지도 않는다. 13DD 주체는 여전히 있고 길이 없다고 인정한다. 변하는 것은 보는 자리다. 그 인정에 갇혔던 데서, 갇혔으면서도 아직 찾는 사람을 보는 쪽으로 옮겨 간다.

논문은 예시로만 한 전설을 든다. 김성탄이 처형 직전에도 일상적인 음식 두 가지를 함께 씹으면 독특한 맛이 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판본마다 음식이 달라 무엇인지 고정하지 않고 구조만 취한다. 형장에서 선택은 없지만 아직 맛보고 발견하고 말하며 찾는다. 그 순간 여전히 세상을 맛보는 자신을 웃어 보고 네 조건에도 맞았다면 절망의 웃음이다. 대가는 목숨, 여항은 찾는 자신이다. 그러나 전설은 네 조건의 자리를 알려 주지 않는다. 구조만 읽을 수 있고, 처형 직전 재치 한마디로 15DD를 인증하지 못한다.

미래의 자신에게

15DD 정의에는 한쪽에서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타자가 있다. 곁에 아무도 없기 쉬운 절망의 웃음에서 그는 누구일까. 미래의 자신이라고 답하되, 웃음론의 확장된 독법임을 밝힌다. 방법론 §1.7은 내가 너를 인정한다는 타인의 예다. 웃음론이 미래의 자신까지 넓혔다. 회심의 웃음에는 실제 타인이 있어 정의에 직접 들어가고, 절망의 웃음은 이 확장을 거친다.

지금 보이는 것은 아직 찾는 나다. 이 보는 행위는 지금의 내가 미래의 자신에게 열리는 일이다. 미래의 나는 계속 찾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수 있다. 오늘의 방향을 실현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대신 결정하거나 오늘의 나와 맞추라 요구하지 않는다.

시제를 지키자. 지금 보이는 것은 아직 찾는다는 현재뿐이다. 미래의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열어 둠이지 규정이 아니다. 예상과 요구도 나눈다. 미래의 나는 반드시 찾을 것이라는 것은 결과의 예상으로 지나치면 따로 검토한다. 거기에 반드시 그 결과를 실현하라 요구해야 다른 이를 규정한다. 시험 사례가 있다. 억지로 주의를 돌리지 않고 아직 찾음을 보았지만, 미래의 자신에게 오늘의 방향을 완성하라고 한다. 그러면 절망의 웃음은 아니다. 그래도 웃는다면 실현 못 할 운명의 자신을 보는 자조이거나 쓴웃음일 수 있어 따로 검토한다.

네 기준에 대보자. 여항의 충격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정 자체다. 출구가 있다고 꾸미지 않고 없음을 인정해도 방향을 거두지 않는다. 남의 복종도, 미래의 자신이 바꾸거나 멈추지 말고 오늘을 실현할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방향은 확실하되 결과는 불확실하다. 없다고 보면서도 보고 생각하고 시도하며, 꼭 찾겠다고 하지 않는다. 찾음 자체도 악물어 유지하지 않는다. 정신분석 넷째 글은 웃음이나 미래의 자신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도 명시한다. 그 기준을 빌려 웃음론의 주장을 검토할 뿐, 그 글을 대신 확장하지 않는다.

토대로 삼지 않고, 내려다보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닮은 발견이 있다. 모두 의심하다 의심하는 자기를 찾듯, 선택이 없다면서 찾는 자기를 본다. 닫힌 듯한 상황 속에서 아직 작동하는 것이 보인다. 다만 데카르트가 생각할 때 존재함을 확정하고 멈춘 것은 아니다. 무엇인지를 계속 물으며 그 지점으로 앎을 재건했다. 경계는 이후에도 질문하는지가 아니라 용도다. 그는 그 확실성을 토대로 사유하는 존재를 도출한다. 절망의 웃음은 토대를 세우거나 실체를 도출하거나 재건하지 않는다. 찾음이 있음을 볼 뿐이다. 찾음 자체도 틀이어서 여항이 있고, 미래의 나는 바꾸거나 멈출 수 있다.

앞 글은 프로이트의 교수대 유머에 설명 후보들을 남겼다. 여기서는 절망의 웃음과의 차이만 본다. 프로이트에서 초자아는 어른처럼 겁먹은 자아를 달래며, 세계를 아이 놀이로 만들어 위험을 줄이고 현실의 요구를 물리친다. 원글이 분명히 실제 위로라 한 점을 약화하지 않는다. 절망의 웃음은 처지를 줄이지 않는다. 없다는 파악은 여전하다. 초자아의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위로와도 다르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자신에게 열리는 것이며, 그는 위가 아니라 앞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아이러니가 진지함 뒤의 농담이라면 humour는 농담 뒤의 진지함이라고 한다. 주관적이고 진지하며 고상한 마음이 뜻하지 않게 평범한 외부 세계와 부딪치고, 벗어날 수도 없고 굴복하고 싶지도 않은 데서 온다. 절망의 웃음과 가깝지만 그는 마음과 세계의 지속적 충돌을, 웃음론은 여항이 없다는 틀에서 찾는 사람을 보는 갑작스러운 순간을 묘사한다. 같은 사람에게 번갈아 오거나 한 웃음의 두 설명일 수도 있다. 말이 다르다고 배타적이라 판정하지 않는다.

논문이 의존한 기억과 이차 소개에 따르면, 플레스너의 『웃음과 울음』은 행위나 말로 응답할 수 없는 경계에서 몸이 응답을 맡는 반응을 본다. 두 반응이 같은 종류의 경계 상황에 온다는 관찰은 공유한다. 차이는 미결의 질문으로 바꾼다. 몸이 맡는 것은 어떤 응답 능력이며, 판단을 배제하는가. 웃음론 쪽은 행위와 말의 실패, 몸의 통제 상실과 내적 판단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고 한다. 원서를 읽기 전에 승패를 매기지 않는다.

베케트의 『와트』에서 아르센은 세 웃음을 말한다. 나쁜 것을 웃는 쓴웃음은 윤리적이고, 참되지 않은 것을 웃는 공허한 웃음은 지적이다. 불행을 웃는 기쁨 없는 웃음은 정신의 웃음이며, 웃음 자체를 웃는 것으로 가장 높게 둔다. 기억과 이차 소개에 따른 전달로 원서 확인은 남아 있다. 기쁨 없음은 베케트의 뜻에 남기고 자체 분류명으로 빌리지 않는다. 그 웃음은 불행 자체를, 절망의 웃음은 불행 속에서도 찾는 자신을 웃는다. 겹겹이 물러서는 반성성은 이미 13DD에 있다. 절망의 웃음은 물러나지 않고 앞을 본다.

아, 그 말이었구나

아버지의 평안이 복이라는 말로 돌아가자. 회심의 웃음은 타인이 늘 말하던 것을 이해하고, 그가 이미 말했고 나는 들어도 몰랐던 자리에 이제 도착하는 것이다. 도착한 뒤에도 그 자리를 그의 것으로 남긴다. 먼저든 나중이든 여기까지 온 주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 웃음에 나타난다.

공식으로 나누면 틀은 말에 대한 옛 파악이다. 듣고 되풀이해도 몰랐다. 여항은 옛 파악이 못 담은 것으로, 내용만 아니라 그가 말할 때 서 있던 자리다. 한 사람 안에서는 전에는 모르다 지금 도착해 갑작스럽고, 사람 사이에서는 그가 오래 있었으므로 지속적이다. 아직은 옛 파악을 돌아볼 수 있다는 눈앞에 있음의 뜻이다. 원래 말의 성립과 옛 파악의 옳음은 각각 살피며, 앞의 것으로 뒤를 증명하지 않는다.

보임의 표에서는 칸을 건널 수 있다. 그는 이미 보이는 줄에 있었고 나는 못 보는 쪽에서 이제 건너온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친구의 농담을 오 초 늦게 이해하는 것도 같은 이동이다. 회심은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말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며, 이 웃음론에는 의심하지 않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

정신분석 넷째 글은 세 자세를 나눈다. 당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13DD의 공감, 당신을 위해 한다는 것은 14DD의 투자, 독립한 목적임을 확인하는 것은 15DD다. 말을 알고 그가 스스로 도착했음까지 알아도 인지적 이해일 수 있지, 그를 대하는 자세는 아직 아니다. 더 필요한 것은 이렇다. 도착한 사람들은 각자 제 삶으로 그곳에 왔고, 나를 위해 깐 길이 아니다. 그 자리를 그들의 것으로 남겨 내 성과로 편입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나도 왔다고 돌아봐 주길 요구하지 않는다. 타자도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가 이 웃음에 나타나는 곳이다.

아버지의 예에는 말 밑에 깔린 두려움이 여항으로 있다. 맞는지 틀린지 판정할 격언이 아니라 아버지 일생의 두려움이다. 잃을 것이 생겨 이 지점에 온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 그 두려움으로 나의 이해를 증명하거나 그의 일생을 대신 끝맺지 않는다. 여전히 그의 것이다. 여항은 구체적이지 진리에 미완이 있다는 일반 명제가 아니다. 말하거나 남에게 가리켜 보일 수 있다.

여기까지 온 자라면이라는 태도는 온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과 예전의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칸트와 구별하자. 그는 동의를 모든 이에게 돌리고(§8), 누구나 동의해야 한다고 한다(§19). 이 웃음은 여기에 온 주체를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예측도, 같은 말을 꼭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의문과 여항을 남기고 질문에 열린다.

이해만 있고 이 자세가 없는 도착의 웃음도 있다. 다만 회심의 웃음이라 부르지 않는다. 지배자가 상대의 일관된 거절을 비로소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한 말이 아니며 상대가 스스로 도달했고 누구라도 거기 오면 그렇게 보리라고까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쓸 만한 정보로 삼아 통제하고 자리를 그의 것으로 남기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명제 하나를 덜 이해함이 아니라 편입하지 않는 자세다. 웃었다면 도착의 웃음이다.

꽃을 들어 보이다

판단하는 것은 자기 수확이 아니며, 이 점이 14DD의 득의와 나뉜다. 아, 그가 이걸 말했고 스스로 여기 왔구나, 여기 온 사람은 이렇게 보겠구나 하는 판단이다. 감정은 감사, 미안함, 기쁨일 수 있고, 이미 죽은 이라면 서글픔일 수 있다. 와도 안 와도 되는 감정이지 증거는 아니다. 얻어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베케트에게 남겨 둔 기쁨 없음과도 다르다.

『무문관』 제6칙에서는 세존이 영산의 모임에서 꽃을 들어 보이자 모두 침묵하고 가섭만 미소 지었다고 한다. 세존은 정법안장을 마하가섭에게 전한다고 말한다. 논문은 이를 회심의 웃음의 정례로 읽는다. 꽃을 드는 것이 세존의 말하기다. 다만 이 독법에는 이 일화 혼자 주지 않는 설정이 있다. 가섭이 이전 설법들을 이미 들었다는 것이다. 틀은 그 설법의 옛 파악, 여항은 세존이 서서 말하던 자리이며, 꽃을 든 순간 그도 왔다. 모두 침묵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로 바꾸지는 않는다.

가섭의 미소는 그 자리에 도착함이며, 그곳을 세존의 것으로 남기고 여기 온 주체들이 그렇게 볼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웃음으로 읽힌다. 한 방향이다. 원문은 가섭만 웃었다고 하며 세존의 웃음이나 마주 웃음은 적지 않는다. 뒤의 전법을 가섭의 확인으로 읽어도 말과 전법이지 두 사람이 웃은 것이 아니다. 설령 이 일에서 서로 목적임을 인정했다고 읽어도 각자의 15DD 순간이다. 모든 일에 걸친 관계를 이 기록이 증명하지 않으므로 완전한 16DD를 인정하지 못한다.

선종에는 청원유신의 말도 있다. 참선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으나, 선지식을 만나 들어갈 곳을 얻자 산도 물도 아니었고, 이제 쉴 곳을 얻으니 전처럼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이다. 원문에 웃음도, 예전 선지식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없다. 아래는 논문의 독법이며 논증의 무게를 지우지 않는다. 웃음이 있다면 세 번째다. 예전처럼이라는 말은 삼십 년을 걸어 옛 말이 가리킨 곳에 옴이다. 산이 아니었구나 하는 반전이 아니라 산은 그대로이면서 그것에 다하지 않음을 안다. 쉬는 곳은 수확이 아니라 멈출 수 있는 자리다.

원문은 이어 대중에게 이 세 견해가 같은지 다른지 묻는다. 유신은 세 단계를 대중의 질문에 넘긴다. 질문받음에 열린다는 총론과 맞지만, 빌릴 뿐 증명으로 쓰지 않는다.

이 웃음은 소리가 안 나기도 한다. 내외의 표에서 안에서는 웃고 밖에서는 안 웃는 칸에는 참는 웃음만 아니라 드러내지 않는 회심도 있다. 누른 것이 아니라 애초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다. 도착한 사람의 자리를 그들의 것으로 남기며, 거기 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말을 했던 사람이 돌아서서 나를 확인해 줄 것도 바라지 않는다.

마주 보고 웃다

같은 곳에서 두 사람이 웃어도 세 일이 다르다. 같은 일을 웃으면 각자 판단하고 각자의 층으로 센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경우에는 공통지식이 더해진다. 네가 안다는 걸 내가 알고, 너도 내가 안다는 걸 안다. 여전히 각자 센다. 더 나아가 상호 인정으로 읽을 만한 웃음도 있다. 이해함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를 목적 그대로 앞에 남긴다. 그러나 함께 웃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자세는 증명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순간 서로 그랬어도 두 15DD 순간이지 완전한 16DD는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과 인정하며 마주 웃는 것의 차이는 의심하지 않음이다. 서로 안다고 서로를 목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괴롭히는 두 아이가 피해자를 보며 눈짓하고 웃는다. 서로 알고 상대가 웃으리라 확신할 수도 있다. 그 확신을 피해자를 재료로 삼아야 유지한다면, 타자의 독립성을 부정해야 하는 의심하지 않음은 틀의 강제 폐쇄다. 그 눈짓은 중간 칸인 공통지식에 있고, 대개 각자의 14DD 조롱일 것이다.

예측과도 다르다. 늘 웃더라는 행동의 파악에서 타자도 목적임을 도출하지 못한다. 그의 안의 그 순간을 내가 대신 겪을 수도 없으며, 표정과 내 추측으로 본인 대신 받아들일 수도 없다. 보고를 듣고 이해를 고칠 수 있다. 밖에서 안 웃어도 안에서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본인이 속으로 안 웃었다면 내 독법을 지키려고 사실은 웃었다거나 못 본 것이라 우기지 말아야 한다. 경험은 그가 설명하도록 남긴다. 대신 경험을 쓰지 않는 것은 주체로 인정하는 한 방법이나, 그것만으로 목적 대우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웃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 예측에서 완전한 목적 관계로 뛰어넘을 수도 없다. 이 연결을 설명하는 일은 아직 웃음론에 남는다.

회심은 상대가 돌아보길 요구하지 않는다. 마주 웃음에 인정도 있다면 두 주체가 각자 이 순간 그 자세를 취한다. 만났는지의 차이지 15DD에서 16DD로 오른 것이 아니다. 『장자』 「대종사」에는 자사, 자여, 자려, 자래가 무를 머리, 삶을 등뼈, 죽음을 꽁무니로 삼아 생사존망을 한 몸으로 아는 이와 벗하자고 말한다. 넷은 마주 웃고 마음에 거스름이 없어 벗이 되었다. 논문에 따르면 먼저 각자 그 질문을 알고 시선에서 웃음이 만난다. 거스름 없음과 벗 됨은 만남이 우정이 되는 길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후 모든 일에서 서로를 목적이라 완전히 의심하지 않았다고 증명하지는 못한다. 고정 정의에서는 각자 15DD가 맞닿았다고 시험 삼아 읽을 뿐 완전한 16DD를 인증하지 않는다.

정신병원 지붕에서

『배트맨: 킬링 조크』의 끝도 여러 층으로 읽어 본다. 조커를 다시 잡은 배트맨은 죽이고 싶지 않고 돕고 싶다며 변화를 바란다. 조커는 늦었다고 거절하고 농담한다. 병원에서 달아나려는 둘이 지붕에 오르니 좁은 틈 너머 다른 지붕이 있다. 첫째는 뛰었고 둘째는 무섭다. 첫째는 손전등 빛을 비출 테니 밟고 오라고 한다. 둘째는 나를 바보로 아느냐, 중간에 불을 끄면 어떡하느냐고 한다. 배트맨과 조커가 함께 크게 웃는다. 대사의 인용이 아닌 이야기의 전달이며, 결말은 여러 독법이 있어 논문은 그 웃음만 취한다.

전제는 둘이다. 둘 다 줄거리의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 순간 서로가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농담은 둘 다 건너지 못하고 제 상황에 갇혔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농담에서 하나는 뛰었지만 말한 사람, 뛴 사람, 못 뛴 사람 모두 광인이다. 배트맨은 먼저 건넌 이로 한 걸음 앞서도 같은 병원 안에 있고, 건네는 것은 언제든 꺼질 빛이다.

이 전제 아래 세 층을 시험하지만 모두 두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조는 둘 다 있다. 둘은 자기들이며 하나는 한 걸음 더 갔고 하나는 안 가려 하며 각자 헛수고를 웃는다. 절망의 웃음은 배트맨에게만 시험적으로 읽는다. 조커가 바뀌지 않으리라 여기면서도 변화를 바라는 것은, 더는 없다고 하면서도 아직 찾는 모습이다. 불쑥 웃음을 아직 찾는 자신을 발견한 것으로 읽는다. 미래의 자신을 정하지 않았다는 조건은 줄거리가 주지 않아 해석으로 둔다. 조커에게 주는 것도 명령 아닌 희망이다. 조커는 변하고 싶지 않아 미래를 닫으며, 방향이 남을 재료로 해야 유지되어 네 번째도 못 넘는다.

세 번째 층은 두 사람 사이에 있지만 추가 독법을 전제한다. 그 순간 서로를 목적으로 인정했다면 각자의 15DD 순간이다. 농담은 빛을 끌까 의심하는 이야기이고, 공동 웃음은 다른 만남을 시험해 보게 해도 인정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조커의 방향은 남을 재료로 해야 유지되어 절망의 웃음을 막는다. 배트맨이라는 구체적 타자에게 잠시 취한 태도는 그 전제에서 따로 판단할 일이지, 방향 전체의 면죄부가 아니다. 증명이 아닌 예시다. 한 웃음 안에 여러 몫이 있어 각 층으로 세고, 자조와 절망의 웃음도 공존한다. 네 번째 조건이 막는 것은 타인을 부정해야만 유지되는 방향이다. 다른 웃음과 상호 인정이 만날 수 있어도 16DD 인증이 더해지지는 않는다.

12DD의 경향에서 13DD의 주인, 14DD의 목적을 거쳐 15DD의 의심하지 않음까지 왔다. 13DD부터는 틀에 이런 여항이 있다는 판단이고 누구도 지지 않는다. 12DD는 경향의 재료만 갖는다. 마주 웃음은 각자 판단하는 주체들이 상대를 제 판단에 넣지 않고 한 일에서 어떻게 인정할지 묻는다. 두 15DD의 순간 안에서 가능하다. 모든 일을 관통하는 완전한 양방향의 16DD는 만남 하나로 선언하지 않는다. 웃음론 자신의 큰 여항으로 남긴다.

처음의 두 웃음으로 돌아가자. 아무것도 없다던 사람은 아직 찾는 자기를 본다. 인정은 뒤집히지 않고 찾는 사람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 말을 이해한 이는 아버지가 오래 있던 곳에 와, 그곳을 여전히 아버지의 것으로 남긴다. 둘 다 한 사람의 웃음이며 누구도 상대의 돌아봄을 요구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만남에서 연결될 수 있어도, 도착했다고 선언할 등급이 하나 더 생기지는 않는다.

원논문과 읽기 안내

현재 중국어 에세이에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이 자료란의 원논문은 Qin, Han(2026)의 『절망의 웃음과 회심의 웃음』입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했고 간체·번체 중국어는 전문이며, 기술적 전문 번역은 아닙니다. 네 조건은 웃음의 겉모양에서 인증하지 않고, 미래의 자신을 타자로 보는 것은 이 논문의 확장으로 밝힙니다. 김성탄 전설의 판본 한계, 베케트·플레스너를 다룬 기억과 이차 자료, 선종 일화에 더한 독법과 작품 해석의 전제를 남깁니다. 한 번의 상호 인정은 각자의 15DD 순간이지 모든 일에 걸친 16DD가 아닙니다. 연결된 학술 원논문을 개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판본에 관하여

학술 원문: Qin, Han(2026), 『절망의 웃음과 회심의 웃음』(SAE 웃음론·4). self-as-an-end.net · DOI: 10.5281/zenodo.23287669.

용어 안내: 이 연작은 이 사이트의 고정된 13–16DD 정의를 따릅니다. 한 번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서로가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두 주체 각자의 15DD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16DD는 모든 일에서 완전한 양방향의 의심하지 않음만 가리키며, 유한한 개인이 마주하는 이상적 한계입니다. 연결된 논문이 개별 순간의 상호 인정을 16DD로 적은 곳은 이 에세이판에서 이에 맞추어 조정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웃거나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상호 인정이 일어났다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