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 미학의 갈래 · 10 / 13 · 자아의 아름다움
“내가 잘못 보았다.”
이름을 잘못 부르자 판단이 판단한 사람에게 돌아온다. 세계가 다 틀린 것도 나 전체가 틀린 것도 아니다.
길을 걷는 사람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닮았다.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지 않아 조금 더 크게 한 번 더 불렀다.
그가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사람은 조금 웃고 걸어갔다. 여기서 끝나도 될 일이다. 큰 손해도 없고 사과를 무겁게 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그 1초에 앞사람이 누구냐는 문제 말고 무언가 잠깐 드러났다.
방금 확신하던 판단이 내가 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 아니다’에서 ‘내가 잘못 보았다’로
가까운 말이지만 같은 일은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답을 고친다. 앞사람은 그 이름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잘못 보았다는 말은 그 고침을 이쪽으로 돌려준다. 여기서 보고 알아보았으며 방금 아주 확신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맞을 때에는 잘 알아차리지 않는다. 친구를 한눈에 알아보면 세계가 스스로 이름을 내준 것 같다. 틀려서야 이름이 뒷모습에 붙어 있던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알아보았다는 것을 안다.
몸 안에 판단만 전담하는 신비한 것을 숨겨 둘 필요는 없다. 자아가 무엇이고 영원히 그대로인지 먼저 답할 필요도 없다. 눈앞의 순간만 보아도 차이는 분명하다. 답이 바뀐 것과 답을 낸 사람이 방금 내가 그렇게 보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같은 일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우선 이 얇은 한 층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다. 방금 왜 잘못 봤는지조차 다스리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잘못 보았다는 말 전체를 옆 사람이 대신 끝낼 수는 없다.
잘못에는 내력도, 판단한 사람도 있다
왜 하필 그 뒷모습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
친구는 전에 걸을 때 왼쪽 어깨를 살짝 내렸고 겨울에는 이런 겉옷을 좋아했다. 기억한 것은 십수 년 전 모습이며 최근 몇 년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멀리 있어 등만 보였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은 빈 곳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전에 만난 사람도 지금 서 있는 위치도 거기에 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 길에 있었다면 멈추지 않았을 수 있다. 그 친구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 서서 얼굴을 보았더라도 부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니 판단이 내 것임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조건을 내가 만들었다는 선언이 아니다. 빛이 좋지 않았고 기억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원인을 설명하면서도 마지막에 그 이름을 외친 것은 여기 있는 이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원인이 있다는 말이 나였다는 사실을 지우지는 않는다. 나였다는 말도 모든 원인을 한 사람의 죄로 삼키지 않는다.
더 무거운 일에서는 이 차이가 특히 중요하다. 잘못된 정보를 듣거나 누가 일부러 정보를 숨겼거나 압박 속에서 서둘러 결정해야 했다면 책임은 사실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 거리의 작은 실수로 모든 사람이 일어난 모든 일에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수 없다. 강요받아 내뱉은 ‘전부 내 잘못’이라는 말을 자아가 마침내 아름답게 드러난 순간으로 볼 수는 더더욱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판단이 어떻게 그 판단을 한 사람에게 돌아오는지다. 모든 비난을 감당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 모르는 사람도 나를 보고 있다
자기의 어색함 때문에 놓치기 쉬운 작은 변화가 하나 더 있다.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분명히 보았을 때 그 사람도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름을 잘못 부르고 다시 부르는 것을 듣고, 돌아서서 설명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느라 바빴다. 이제 그 역시 자기 입장에서 나를 보는 사람임을 안다. 길에 서서 내가 알아보기를 기다리는 그림만은 아니다. 그를 보는 동안 나도 그의 눈앞에 들어갔다.
그는 내 당황함을 보았을 수도 있고 그저 영문을 몰랐을 수도 있다. 미소 한 번으로 속마음을 모두 써 줄 수 없다. 그가 나를 바보로 생각했을 거라는 말조차 내가 내린 다른 판단이며 조금 전보다 더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돌아봄이 남을 읽어 낼 능력을 준 것은 아니다.
그저 놓쳤던 자리가 드러났다. 보는 사람도 보일 수 있으며 판단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불완전한 판단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늘 자기 모습을 추측하며 살 필요도 없다. 걸음마다 남이 만족했는지 점검하면 또 다른 분주함일 뿐, 자신을 더 분명히 보는 것이 아니다.
자신임을 알아보는 것과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더 가다가 불이 아직 안 켜진 가게 앞을 지난다. 유리에 급히 가는 사람이 비친다. 어깨가 조금 처졌고 손에는 봉지를 들었다. 먼저 모습을 보고 나서 자신인 줄 알아본다.
좋아 보이지도 나빠 보이지도 않을 수 있다. 다만 머릿속에서 익숙한 자기 모습과 조금 다르다.
우리는 자기를 특정한 나이나 잘했던 어느 순간의 모습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유리는 그 생각에 상관없이 오늘의 자세를 돌려준다. 세월은 내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지나갔다. 오늘 옷을 갈아입었다고 지나온 내력까지 함께 갈아 끼울 수도 없다.
그 모습을 알아보았다고 나는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는 판결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늘 여기 있다는 것과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다른 일이다. 내력을 인정해도 명령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당장 자신을 개조하기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가슴을 펴고 살을 빼고 자신 있어 보이게 행동하고 더 나은 모습이 되는 것은 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볼 때마다 먼저 성적표를 내밀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저 이 사람이라고 알아도 된다. 될 수도 있었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이 사람이다. 못 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도 전능하게 다 메워야만 자기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온전함은 흠이 없다는 것도 마침내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품행의 사람도 잘못을 알아보고 돌아보며 자신의 판단을 볼 수 있다. 존경할 사람도 언제나 자신을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이 대목을 보았다고 한 사람의 남은 삶 전체에 미리 합격을 줄 수 없다. 누군가를 전면적으로 칭찬해야 할 의무는 없다.
아직 끝내지 않은 말
돌아봄이 거리에서처럼 빨리 오지 않을 때도 있다.
두 사람이 다투다가 한 사람이 문득 말을 멈춘다. 원래 하던 말을 계속하고 싶은데 상대가 아까 든 예가 정말 자기 설명과 달랐다는 생각이 난다. 문장을 다시 찾으며 그 말을 계속 지킬지 덜 보았음을 인정할지 정하고 있다.
옆 사람은 그 멈춤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침묵의 이유는 많다. 고개를 숙였다고 이미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거기에 있을 때는 그 순간을 알아볼 때가 있다. 밖을 향하던 ‘네가 틀렸다’는 말이 조금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다음에도 잠시 답이 없을 수 있다. 아까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도 왜 그렇게 급했는지 바로 아는 것은 아니며, 이제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된 것도 아니다.
자아가 매번 분명한 모습으로 합쳐질 필요는 없다. 때로 그 모습이 풀려야 판단하는 이 사람이 무엇을 안고 있는지 물을 기회가 온다.
거리로 돌아오자 낯선 사람은 멀리 갔다. 나도 이 작은 일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 한마디에는 생략하기 쉬운 자리가 남아 있다.
세계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방금 잘못 보았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자아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사람을 잘못 알아보는 장면과 쇼윈도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장면을 넓혀 썼다. 인물과 대화, 다툼은 설명용이다. 여기서 자아는 판단이 그 판단을 한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최소한의 뜻이며, 잘못을 인정하는 일을 덕이나 수치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와 같게 보지 않는다. 자기 판단임을 인정해도 모든 인과적 책임을 혼자 진다는 말은 아니며 강요된 자백도 포함하지 않는다. 침묵과 미소를 해석할 때에도 잘못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