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 미학의 갈래 · 11 / 13 · 목적의 아름다움
인쇄 전에, 그는 그 단어를 원래대로 돌렸다
매끄러운 번역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는 왜 다시 전화했을까. 자기 방향은 다시는 고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책이 곧 인쇄에 들어간다. 오후에 편집자가 번역자에게 전화해 마지막 쪽의 한 단어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원래 단어는 조금 낯설다. 바꾸면 문장이 매끄럽고 뜻도 통한다. 두 가지 번역을 읽어 주자 그는 듣고 좋다고 했다.
전화를 놓고 끝났을 일이다. 내일 챙길 것을 정리하다가 잠시 뒤 다시 책상에 앉았다. 마지막 쪽이 펼쳐져 있다. 더 매끄러운 단어가 틀린 것은 아닌데 거기서 다시 멈춘다.
저녁에 전화를 다시 걸었다.
“그 단어,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까요?”
편집자가 이유를 묻자 몇 마디 하고 문단 전체를 다시 읽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후의 이유를 한마디로 모두 뒤집을 수는 없었다. 독자는 그 차이를 정말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 년 번역한 책이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직 그 페이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에 이기려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전화만 보면 양보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기 쉽다.
일하면서 본 적 있는 장면이다. 합의가 끝났는데 돌아가 생각할수록 분해서 다시 다투러 온다. 때로는 단어가 아니라 마지막에 누가 결정하느냐가 쟁점이다.
이 번역자도 그럴까. 고집했다고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증서를 줄 수는 없다.
그전까지의 과정도 보아야 한다. 지난 삼 년 동안 마지막 쪽을 여러 번 고쳤다. 편집자의 제안도, 친구가 지적한 오해도 있었고, 몇 달 뒤 다시 읽으며 전에 너무 많이 풀이해 버렸다고 알아본 것도 있었다. 문제를 실제로 보면 고쳤다. 애써 썼다고 영원히 지키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다시 읽고 나서야 바꾼 문장이 매끄럽지만 줄곧 읽어 온 그 멈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질문받을 수 있으며 원작도 확인해야 한다. 원작이 그 단어를 전혀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내 선택’이라는 말로 오역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볼 것은 단지 안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다. 고칠 수 있었고 계속 고쳤다. 지금의 고집도 그 수정들 속에서 자랐다.
앞으로는 누구도 자신을 바로잡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방향이 언제나 계획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주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올해 번역을 끝내고 내년에 내고 몇 부를 팔아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두 계획에 넣을 수 있고 실제 무게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항목도 마지막 쪽에 무슨 단어를 쓸지 직접 알려 주지는 않는다.
방향이 먼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서 나타날 때가 있다. 미래의 끝을 말하지 못해도 여기서 끝냈다고 할 수 없음을 안다. 누가 곁에서 재촉해서가 아니라, 그가 읽는 과정에서 대상 자체가 그대로 넘길 수 없는 대목을 남긴 것이다.
그 책을 다른 사람이 받으면 순조롭게 읽고 끝낼 수 있다. 같은 문장에 모든 사람이 두 번째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방향은 책에서 오고 그동안 책을 읽고 언어를 들은 방식에서도 온다. 그에게 이르러 이번 응답이 되었다.
멋대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책이 명령하는 것도 아니다. 종이는 그 대신 전화를 들지 않는다. 편집자가 반대할 수도 독자가 신경 안 쓸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그 번거로움을 맡을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자기 것이라는 말이 전부 직접 발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쓰는 언어는 배운 것이고 귀에는 선생님도 그동안 읽어 온 많은 이도 있다. 남이 남긴 것을 모두 벗겨야 자기 것이라면 마지막에는 말할 문장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다. 내력이 있는지가 아니라 오늘 다른 것을 들을 때도 자신이 직접 가려 보는지가 문제다.
아무도 잘했다고 하지 않은 뒤에도
이야기를 조금 더 뒤까지 생각해 보자.
책은 나왔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마지막 단어가 책 전체를 살렸다고 편지를 보낸 독자도 없다. 독자에 관한 편집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을 수 있다.
그날 저녁의 일은 그래서 우스워졌을까?
나중에 동의한 사람 수만으로 그 고집이 자기 것이었는지 정한다면 남의 끄덕임이 여전히 그 대신 결정한다. 몇 달 늦게 왔을 뿐이다.
실패가 더 고귀하다는 말도, 안 읽힐수록 버티라는 권유도 아니다. 시간과 생활, 남의 노동에는 실제 대가가 있다. 어떤 기획이든 다시 의논하거나 멈출 수 있다. 다만 작품의 결과와 자기 방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나누어 보아야 할 일이다.
고생도 증거는 아니다.
무언가 때문에 초조해하고 되풀이하며 멈출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하는 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거나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다. 놓지 못한다는 말에 곧바로 그 갇힘을 사명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한마디로 누구의 몸이나 마음 상태를 판단하지 않는다.
이 번역자를 통해 보려는 것은 다른 연결이다. 그 작은 차이를 보았고 자기 것으로 인정했으며 말할 뜻이 있다. 그러면서 나중에 놓친 것을 보게 되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를 입증하는 검사가 아니다. 옆 사람도 자신도 잘못 볼 수 있다. 돌아서지 않는 모든 것을 방향이 있다고 부르지 않으려고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온 단어
편집자가 결국 원래대로 바꾸어 주었다. 다음 날 파일이 넘어갔다.
이때 이겼다는 느낌이 없어도 된다. 그녀가 설득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을 수 있다. 그저 그 페이지를 읽고 지나갈 수 있게 되어 거듭 손을 뻗어 끌어당기지 않아도 되었다.
방향이 보이는 때는 망설이고 있을 때일 수도 있다. 전화는 곁에 있지만 걸지 말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하고 있는 일에 조용히 담겨 있다. 한 줄을 교정하고 도구를 정리하며, 매 단계마다 이것이 정말 내 것인지 캐묻지 않는다.
조용함이 망설임보다 꼭 얕은 것은 아니다. 자기 길을 간다고 증명하려고 평생 갈등할 필요도 없다.
다만 여기서 모두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편집자가 매끄러움을 중시한 것이 시장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여러 번 읽고 독자가 마지막 쪽을 단어 하나에 걸리지 않고 끝까지 읽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수도 있다. 한 번 양보했다고 그녀의 생각은 언제든 버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단어를 지킨 번역자는 그녀도 볼 수 있을까?
내가 놓을 수 없으니 너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내 길이니 영원히 비켜 줘야 한다고 말한다면, 방금 자기 것으로 인정한 방향은 돌아서서 남에게 내리는 요구가 된다.
자기 고집이 저절로 이 경계까지 그려 주지는 않는다.
다음 글에서 물을 일이다. 내가 왜 그렇게 쓸 수 없는지 알아도 네가 어떻게 써야 할지까지 대신 정할 수는 없다.
책은 탁자에 남는다. 마지막 쪽에 그 단어가 있다. 먼저 모두의 단어가 되어야만 그가 내놓은 이 페이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목적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원논문의 번역자와 편집자 장면을 넓혀 썼다. 인물과 대화, 출판 결과는 논의용으로 만들었으며 실제 번역서를 가리키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어느 단어가 더 옳은지 판정하지 않았다. 고집한다고 자동으로 자기 방향이 되는 것은 아니며 고통과 성공, 남의 칭찬도 증거가 아니다. 놓지 못한다는 말로 누구의 몸과 마음을 판단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이유로 오역이나 남에 대한 지배를 변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