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 108 · 타자와 빈자리
셸링: 자기 안의 타자
자연과 카롤리네, 자유와 베를린 강의실. 자신을 전부 안다는 확신을 흔드는 한 철학자의 길.
1. 튀빙겐의 세 친구
1790년대 초,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튀빙겐.
신학교는 16세기부터 루터교 목사를 길러 왔다. 정해진 일과와 규율이 있었고, 많은 학생에게는 시골 교회나 신학 강단이라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방문을 닫고 새 책을 읽는 시간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대화가 있었다.
한 방을 쓰는 세 친구가 있었다.
헤겔은 슈투트가르트 관리의 아들이었다. 훗날의 회고에는 차분하고 집중력 있게 책을 읽는 모습이 남았다. 동갑내기 횔덜린은 이미 시를 향해 걷고 있었다.
셸링은 두 사람보다 다섯 살 어렸다. 열다섯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히브리어와 동양 언어를 연구하는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직 철학사 속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청년들이었다. 칸트를 읽고 칸트를 두고 다퉜다. 칸트가 그은 경계 너머로 갈 수 있을지 물었다.
그 무렵 지적 분위기의 야심을 또렷하게 전하는 종이 한 장이 있다. 후대에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래된 체계 기획』이라 불린 초고다. 대개 1796년에서 1797년 사이의 글로 본다. 남아 있는 필적은 헤겔의 것이지만, 그 생각을 누가 썼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헤겔, 셸링, 횔덜린을 각각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세 사람의 공동 서명은 없다. 그래도 그들이 바라보던 방향은 느껴진다.
칸트가 시작한 일을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칸트는 순수이성의 한계를 물었고, 도덕법칙을 논했으며, 목적의 왕국이라는 방향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알고 싶다는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주장과 쉽게 이어 붙이지 않았다. 이성이 원한다고 해서 그 바람이 곧 지식은 아니었다.
젊은 친구들은 더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자유, 신과 예술, 역사. 이 영역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철학을 만들 수 없을까. 모두를 담는 체계, 마침내 끝에 이르는 철학은 불가능할까.
독일 관념론의 한 출발점은 그런 조급하고 큰 꿈 속에 있다.
이십 년쯤 지나자 세 사람의 길은 멀리 갈라져 있었다.
헤겔은 예나에서 밤베르크, 뉘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베를린으로 갔다. 논리학과 자연철학, 정신철학으로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 1818년부터 베를린에서 가르쳤고 영향력은 독일 지식계로 퍼졌다. 1831년, 예순한 살에 죽었다.
횔덜린은 가장 중요한 시들 가운데 일부를 썼다. 그 뒤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1806년 서른여섯의 나이에 튀빙겐의 병원에 들어갔고, 이듬해 목수 에른스트 치머가 네카어강 옆 자기 집으로 그를 데려왔다.
1843년 죽을 때까지 남은 삼십육 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탑방에서 쓴 시 가운데는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것도 있다. 말은 간결해졌고, 날짜는 때로 당시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그 시들을 질병의 증거로만 읽을 수는 없다. 거기에도 계속 쓰는 사람이 있다.
셸링은 어땠을까.
가장 먼저 유명해진 사람은 그였다. 1798년, 스물셋에 예나의 교수가 되었다. 헤겔은 1801년에 왔고 두 사람은 협력했다. 교수와 조수의 관계가 아니었다. 셸링은 이십 대부터 자연철학 저작을 잇달아 내며 돌과 식물, 동물, 전기와 자기를 철학의 앞자리로 데려왔다. 칸트와 피히테 다음을 이을 큰 기대주였다.
나중에는 헤겔의 영향력이 그를 가리게 된다.
1807년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헤겔은 차이를 지워 버리는 절대자를 비웃었다.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과 같다는 것이다. 흔히 셸링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겨냥한 말로 읽힌다. 다만 셸링 자신은 절대자를 단순히 차이가 사라진 상태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상의 차이가 우정의 틈을 넓혔다. 이후에도 만난 기록은 있지만, 젊은 시절의 협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셸링은 1854년까지 살았다. 일흔아홉, 헤겔보다 이십삼 년 더 살았다. 그동안 아무도 그를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만년에 베를린으로 왔을 때는 엄청난 기대가 쏠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기 작업의 상당 부분은 강의와 원고로 남았다가 죽은 뒤 출판되었다.
튀빙겐의 세 친구.
한 사람은 건물을 세웠고 뒷사람들은 그 안에 살며 고치고 허물었다. 한 사람은 시를 쓴 뒤 탑이 있는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한 사람은 둘보다 오래 살면서, 시대의 익숙한 자리에 점점 넣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이 글은 그 세 번째 사람을 따라간다.
2. 자연은 배경이 아니다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셸링은 생각의 배경으로 남겨 두기 쉬운 것을 정면에서 다루려 했다. 자연이었다.
칸트와 피히테에게는 알고 행동하는 주체가 중요했다. 나는 생각한다. 자아. 자기의식. 물론 칸트가 자연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판단력 비판』은 이미 유기체와 합목적성을 깊이 다루고 있었다.
그래도 셸링은 더 묻고 싶었다. 자연이 오직 내가 아는 대상으로만 체계에 들어온다면, 알 수 있는 이 나는 어디서 왔을까.
돌은 내가 보는 것만이 아니다. 식물은 식물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에 존재하기 시작하지 않는다. 동물에게도 동물학의 설명보다 먼저 있는 조직과 생활이 있다. 내 눈길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무엇인가 일어난다.
스물둘이던 1797년에 『자연철학의 이념』을, 1798년에 『세계 영혼에 관하여』를, 1799년에 『자연철학 체계의 첫 번째 초안』을 내놓았다.
그가 다시 잇고 싶은 것은 자연과 자유였다.
칸트에게 현상으로서의 자연은 인과법칙에 따라 이해된다. 자유는 이성적 존재의 자기 입법에 관한 문제다. 단순히 두 세계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을 이해하는 서로 다른 관점이기도 하다. 그래도 물음은 남는다. 자연에 속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가.
셸링은 그 사이에 길을 찾는다. 자연은 완성된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고, 의식도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장면으로 그 방향을 짚어 볼 수 있다. 돌과 결정에는 구조가 있다. 식물은 자라며 자신을 유지한다. 흩어진 물질 더미가 아니다. 동물은 느끼고 반응하고 기억한다. 인간에게 이르면 자연 안의 어떤 존재가 돌아서서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돌이 세월을 지나 인간이 된다는 과학적 진화표가 아니다. 식물이 수동적인 기계라는 뜻도 아니다. 자연의 생산력과 의식을 한 흐름에서 생각하려는 철학적 구상이다.
의식은 이제 자연 바깥에서 도착한 손님이 아니다. 자기가 이해하려는 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자기 뿌리는 스스로 비출 수 있는 곳보다 넓다.
후기 셸링의 말을 빌려 되돌아보면 명료한 인식에 앞서는 어둠을 떠올릴 수도 있다. 다만 초기 자연철학의 생산력과 1809년 논문에 나오는 근거는 그대로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 차이를 지켜도 전환은 크다. 자연은 주체 앞에 놓인 대상만이 아니라 주체 자신이 뿌리내린 과정이 된다.
셸링의 구상 중에는 지금 보면 낡은 것도 있다. 한편 아직 우리를 멈춰 세우는 질문도 있다. 자연은 인간이 쓸 재료에 불과한가. 생명은 전부 밖에서 설명할 수 있는가. 만들어진 결과를 설명하면 그것을 낳은 과정까지 다 설명한 것인가.
낭만주의와 일부 생태 사상,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이런 자리에서 셸링과 대화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에게서 한 줄로 내려왔다는 뜻은 아니다. 진화론에도 생태학에도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그는 일찍 질문을 뿌렸다. 자신은 다른 길로 갔지만 질문들은 다른 곳에서도 자랐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후기 사유로 이어지는 길이다. 의식이 자신보다 먼저 있던 세계에서 자란다면, 언젠가 자기 뿌리를 모두 눈앞에 늘어놓고 내려다볼 수 있을까.
이것은 먼저 결함을 찾아내는 말이 아니다. 질문이다. 또렷하게 의식하는 내가 나의 전부인가.
체계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이 질문은 가져올 수 있다. 내 안에는 아직 말로 잘 붙잡지 못한 것이 있다.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동기가 있다. 오늘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더 큰 내력이 있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자기 안의 타자라고 불러 보려 한다.
3. 카롤리네
개념을 잠시 내려놓자. 1803년 6월, 무르하르트. 두 사람이 결혼한다.
신랑은 스물여덟, 이미 이름난 철학자다. 신부는 카롤리네다. 서른아홉이며 그해 9월이면 마흔이 된다. 세 번째 결혼이었다.
그녀는 괴팅겐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다비트 미하엘리스는 동양 언어를 연구했다. 그녀도 읽고 쓰고 문학 작품을 판단했다. 첫 남편은 의사 요한 프란츠 빌헬름 뵈머였다. 남편은 일찍 죽었다. 그녀는 아이들과의 사별도 겪었다.
1793년 마인츠 주변의 혁명적 격변 속에서 투옥되었다. 풀려났을 때는 프랑스 장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생활의 어려움만이 아니었다. 정해진 틀을 벗어난 한 여성의 삶에 사회가 판결을 내리려 했다.
친구들이 도왔다. 그중에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결혼했다.
그의 셰익스피어 번역은 독일 문학의 중요한 일이 된다. 카롤리네도 토론하고 문장을 고치며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대화와 원고 사이에서 함께 만들어진 것이, 출판된 책에서는 하나의 이름 아래 놓인다.
누가 어느 문장을 최종적으로 썼는지 전부 복원하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함께 일했다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나의 집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모이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슐레겔 형제와 노발리스, 티크, 젊은 셸링. 그 주위에는 괴테와 실러, 피히테의 작업과 논쟁이 있었다.
언제나 사이좋은 천재들의 모임은 아니었다. 친밀함도 충돌도 있었다. 그 안에서 카롤리네는 벽 쪽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열두 살 가까이 어린 셸링을 만났다. 마음이 자라났고 슐레겔과의 결혼은 끝을 향했다. 1803년 이혼한 뒤 몇 달 만에 셸링과 결혼했다.
이미 두 사람 곁에는 하나의 부재가 있었다. 첫 결혼에서 태어난 딸 아우구스테는 카롤리네 삶의 중심이었다. 1800년, 열다섯 살에 이질로 죽었다. 새 삶을 시작한다고 해서 그 슬픔까지 뒤에 두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롤리네와 셸링은 뷔르츠부르크에서 살다가 뮌헨으로 옮겼다. 읽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쓰인 글을 생각하고 제안하고 이견을 냈다.
대화가 늘 표지에 서명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셸링의 특정 논증을 카롤리네의 발상이라고 확실히 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는 것과 상대가 없었다는 것은 다르다.
함께 생각할 사람이 있었다.
후대의 이야기는 그녀를 흔히 철학자의 아내로 기억한다. 사랑 이야기, 이른 죽음, 위대한 남자의 슬픔. 편지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정치와 연극, 친구와 풍경, 상실. 재치와 취향, 동의하는 힘과 맞서는 힘이 있다.
그녀가 모든 편지를 미래의 철학사를 위해 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한 호칭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사람이 그 안에 있다.
단순한 조수도, 영감을 주는 존재만도 아니다. 자기 판단을 지닌 대화 상대다. 이를 인정하려고 남편보다 더 뛰어났는지 승부를 벌일 필요는 없다.
여성의 생각을 남성의 전기에 넣어 보관하는 습관은 다정한 이름을 쓴다. 영감, 뮤즈, 아내. 그러는 동안 한 목소리가 배경이 된다.
1809년 9월, 셸링의 부모를 방문하던 카롤리네는 마울브론에서 죽었다. 마흔여섯 번째 생일이 막 지난 때였다. 기록에는 이질과 고열이 나온다. 셸링은 서른넷이었다.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이미 쓰였고 출판되어 있었다.
상실은 자유와 생명과 그 근거를 오래 묻던 사람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 질문에 어떤 논증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무게를 주었다.
이후 작업에는 죽음이 계속 머문다. 자연과 정신 세계에 관한 대화편 『클라라』, 몇 번이나 다시 시작했지만 확정된 형태에 이르지 못한 『세계시대』. 존재에 관한 질문은 책상 위에만 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을 깊게 만들기 위해 카롤리네가 죽은 것은 아니다.
그녀를 이야기 속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죽음을 걸작에 필요한 재료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셸링을 말할 때 떠올리는 인물이기 전에, 그녀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의 삶 속 타자. 사랑하고 의지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붙들어 둘 수도 없는 사람.
이제 그녀가 죽기 전에 쓰인 책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무엇을 묻고 있었을까.
4. 자유
사람은 왜 나쁜 짓을 할까.
간단해 보이는 질문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좋은 것을 부순다. 그 피해를 알면서도 같은 길을 간다. 왜 멈추지 않을까.
한 답은 무지를 중요하게 본다. 무엇이 좋은지 정말 안다면 왜 나쁜 쪽을 고를까. 소크라테스적 질문의 중요한 한 줄기다. 플라톤의 모든 윤리학이 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답은 죄와 은총을 말한다. 선을 알아도 사람은 등을 돌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어려움을 거듭 물으면서 인간의 책임을 놓지 않았다.
환경과 제도, 경제적 관계를 보는 답도 있다. 루소와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이론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선택을 형성하는 세계를 묻는다. 똑같은 답도 아니고 모두가 개인의 행동 여지를 지우는 것도 아니다.
셸링이 붙드는 질문은 이것이다. 행동을 설명하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했다는 사실까지 없애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람에게는 현실의 자유가 있다.
무지와 역사와 형편은 중요하다. 그런데도 내가 남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계속할 때가 있다. 좋은 행동을 칭찬할 때만 자유를 불러내고 나쁜 행동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 자유는 어디서 올까.
칸트는 자유를 이성적 자기 입법과 연결했지만 근본악에 관해서도 썼다. 악을 간단히 자유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다. 셸링은 한 걸음 더 묻는다. 선과 악의 실제 가능성은 살아 있는 존재의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가. 형식적인 정의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선만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선한 필연성과 닮아 버린다.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거절과 전도, 의도한 해악도 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셸링은 그 가능성을 존재의 내부 구조에서 찾는다.
존재의 근거와, 드러나서 이해할 수 있게 된 존재를 구별한다. 어둠과 빛의 이미지를 빌리면 조금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둠은 타고난 사악함이 아니다. 갈망과 생명의 충동, 명료한 설명에 전부 내어 줄 수 없는 뿌리를 가리킨다. 빛 역시 차가운 계산만은 아니다. 질서와 이해, 고립된 자아를 넘어서는 연결에 관한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자기의지, 그리고 더 넓은 질서와 이어지는 보편적 의지가 있다. 서로 싸우는 두 부품이 아니다.
인간에게서는 그 관계가 유지될 수도, 뒤집힐 수도 있다.
선을 위해 자기 생명력을 없애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빈껍데기가 될 필요는 없다. 감정이나 충동이 있다는 것,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악도 아니다.
악은 자기의지가 중심 자리를 빼앗을 때 생긴다. 함께 사는 세계가 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으로 바뀐다. 나의 특수성이 자기 자리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자리의 법이 되려 한다.
여기서 방향이 갈린다. 자기 고유성을 지키는 일과 그 고유성에 주변을 삼킬 권리를 주는 일은 다르다.
1809년의 논문은 악이 실제로 가능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길을 찾는다. 어두운 근거는 생명과 개별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사람 대신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나에 관해 무엇을 이해했다고 해서 좋은 행동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셸링은 근거와 드러남의 구별을 신에게까지 가져간다. 다만 인간이 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신에게 옮길 수는 없다.
여기서 가장 낯선 대목으로 들어간다.
5. 신 안의 어둠
신 안에도 어둠이 있다.
대담한 말이지만 아무런 전통 없이 갑자기 나온 말은 아니다. 셸링은 기독교 사상, 특히 야코프 뵈메 같은 신비사상 전통과 대화한다. 선한 신 안에 몰래 악마를 넣으려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완전성의 개념으로 살아 있는 존재를 다 말할 수 있을까.
오래된 질문도 다시 온다. 신이 선하다면 세계에는 왜 악이 있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답은 질문을 옮긴다. 그런 가능성을 가진 존재는 어디서 왔을까. 신을 악의 행위자로 만들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악을 단순한 겉모습으로 만들지도 않으면서 이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셸링은 신의 존재 근거와 드러난 존재, 정신과 사랑으로서의 신을 구별한다. 근거, 그룬트는 신이 해를 끼치려는 의지가 아니다. 뒤에 또 다른 신 하나를 놓는 것도 아니다.
신에게서 분리할 수 없이 이어진 원리들이 인간에게서는 어그러질 수 있다. 신은 이번에는 선을 고를까 악을 고를까 망설이는 더 큰 인간이 아니다.
악은 어둠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다. 관계가 뒤집히는 일이다. 개별 의지가 전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생명의 힘으로 공동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어둠 자체는 유죄가 아니다. 없애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개념은 어렵고 해석에도 이견이 있다. 그래도 한 질문은 가져갈 수 있다. 또렷하게 보이고 말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한 존재가 모두 설명되는가.
혼란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며 남을 해치는 핑계도 아니다. 정확한 설명만 얻으면 한 존재를 통째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한계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이 글은 셸링을 앞선 인물들 곁에 놓고 읽는다. 모두 같은 학설을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저자가 서로 비추어 읽는 방식이다.
칸트의 목적의 왕국은 완성품처럼 소유할 수 없는 방향을 연다. 레비나스는 쉽게 결산할 수 없는 책임 앞에 나를 세운다. 부버의 영원한 너는 손안의 물건 하나가 되지 않는다.
조식의 욕망은 소유할 수 없는 거리와 만난다. 지라르는 집단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게 만든 희생자를 드러낸다. 셸링은 개념으로 회수하기 전에 이미 있는 존재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같은 질문은 아니다. 그래도 함께 읽으면 이렇게 묻게 된다. 한 사람은 내가 그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 속에 전부 들어 있는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 속에라도 전부 들어 있는가.
내 앞에 오기 전부터 그 사람은 투명한 물건을 갖듯 자기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이면 다가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이유를 내놓아야만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고장 난 장치처럼 대할 필요는 없다.
그 움직임은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모든 동기를 알며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고집하면, 상대에게도 같은 투명함을 요구하기 쉽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라. 분류할 수 있게 해라. 내 설명 안으로 들어와라.
저항하는 부분은 치워야 할 골칫거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심리 법칙은 아니다. 다만 알아볼 수 있는 위험이다. 내 안의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 나도 갖지 못한 투명함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
모두 설명하기 전부터 상대에게 자리가 있어도 된다.
이 글이 셸링을 읽으며 타자라는 주제로 가져가려는 통로는 그런 것이다.
6. 베를린의 강의실
1841년. 셸링은 예순여섯이다.
후반생의 긴 시간을 바이에른, 뮌헨과 에를랑겐에서 지냈다. 1812년에는 카롤리네의 친구 루이제의 딸인 파울리네 고터와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다.
글을 쓰고 강의하며 원고는 쌓였다. 새 책이 적다고 생각까지 멎은 것은 아니다. 후기 작업에 공개할 수 있는 형태를 주는 일도 쉽지 않았다.
1831년 헤겔이 죽자 계승자들의 길이 갈라졌다. 체계를 보수적으로 이어 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청년 헤겔파는 종교와 국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밀고 나갔다. 슈트라우스, 포이어바흐, 바우어, 그리고 나중의 마르크스.
1840년 프로이센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그 급진적인 흐름을 경계했다. 맞설 철학적 권위를 찾았고 셸링을 베를린으로 불렀다.
그는 정치적 기대 속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오랫동안 붙들어 온 자기 질문도 가지고 왔다. 궁정이 바란 역할만으로 그의 생각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1841년 11월, 계시철학 강의가 시작되었다. 관심은 컸다. 훗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질 젊은이들도 찾아왔다.
키르케고르는 스물여덟으로 코펜하겐에서 왔다. 베를린에서 군 복무 중이던 엥겔스는 그 강의가 진행되는 시기에 스물한 살이 되었다. 바쿠닌은 스물일곱, 스위스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스물셋이었다.
그 이름들에는 아직 우리가 아는 역사의 무게가 붙지 않았다. 그들의 길이 이 강단을 지나간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을 묻는 사유의 선구자가 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사회비판을 발전시킨다. 바쿠닌은 아나키즘의 중심 인물이 되고, 부르크하르트는 문화사에 중요한 길을 낸다.
나중에 서로 맞설 미래들이 같은 노철학자의 말을 들었다.
그는 무엇을 말했을까.
소극철학과 적극철학을 구별했다. 나쁜 철학과 좋은 철학, 비관적인 철학과 낙관적인 철학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성은 무엇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개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힐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을 정확히 배열한다고 실제 세계가 생기지는 않는다.
헤겔을 비판하며 셸링이 힘주어 말한 것은 그 간격이었다. 생각한 가능성에서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로 자동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논리만으로 어떤 것을 낳아 여기 놓을 수는 없다.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 라이프니츠가 이미 유명하게 표현한 질문이다. 셸링 자신도 베를린 이전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묻고 있었다. 뒤에는 키르케고르와 하이데거 등이 다른 방식으로 그 어려움을 만난다. 강의실은 그런 길들이 교차하는 곳이 되었다.
반응은 곧 달라졌다.
키르케고르는 처음 크게 기대했다. 개별 삶을 개념의 운동 속에 넣는 철학에서 다른 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다 실망했다. 셸링이 자기가 연 길을 충분히 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는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 경험이 이후 작업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엥겔스는 셸링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헤겔의 유산을 되돌리려는 반동적인 개입으로 보았다. 훗날 마르크스와 가는 길은 반대쪽이었다. 들었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쿠닌은 자기 반항을 이어 갔다. 부르크하르트는 구체적인 인간의 창조에 눈을 돌렸다. 강의는 그들의 지적 경험의 일부였지만, 나중 사상의 모든 것을 낳은 단 하나의 원인은 아니었다.
셸링은 몇 년 더 가르쳤다. 관심은 줄었고 헤겔을 대신하지 못했다. 1846년에는 공개 강의를 사실상 멈췄다. 베를린에 머물며 계속 일하다가 1854년 스위스 바트라가츠 체류 중 죽었다.
기묘한 갈림길이 남았다. 한 학파와 싸우라고 불려 온 철학자가 자기로서는 지배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는 훗날의 그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들었다.
동의를 한 번도 바라지 않는 이상적인 교사였다는 뜻은 아니다. 논적도 있었고 체계의 포부도 있었다. 다만 청중은 한 줄로 늘어선 순종적인 제자들이 되지 않았다.
말은 강의실을 나간다. 다른 사람의 질문 속에서 방향을 바꾼다.
가르치는 일의 귀함에는 교사가 소유할 수 없는 그 이후도 들어 있다.
7. 자기 안의 타자
이 악장에서 우리는 여러 타자를 만났다.
히파티아는 폭력에 의해 파괴된 한 사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방대한 작업 뒤에 쓰기를 멈춘 사람이다. 베르그송은 물리적 측정이 다 담지 못하는 경험의 시간을 바라본다.
레비나스는 책임을 묻고, 부버는 만남을 이야기한다. 조식은 욕망과 거리를 쓴다. 지라르는 누군가를 모두의 표적으로 만드는 장치를 보여 준다.
우리는 주로 밖에서 오는 상대를 보았다. 셸링과 함께 시선이 안으로 돌아간다.
내 안에도 붙잡히지 않는 것이 있다. 머릿속에 비밀스러운 딴사람이 산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나를 설명하는 말이 끝내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이 글은 학설 소개를 한 걸음 넘어선다. 그 부분을 인정하는 것은 연습할 수 있는 능력일지 모른다. 남을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존엄을 얻기 위한 입학시험은 아니다.
윤리적 책임, 관계, 거리의 존중, 배제의 폭로를 이야기해 왔다. 이제 그것을 해 보려는 주체를 본다.
나는 이미 나를 설명하는 일을 끝냈다고 생각할까.
동기는 전부 안다. 행동마다 이유를 댈 수 있다. 다음 반응도 예상한다. 자기 이야기에 빈틈이 없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 확신을 남에게도 돌리면 어떻게 될까. 상대도 예측 가능해야 하고 분류 안에 들어와야 하며 정해 둔 줄거리를 따라야 한다. 넘치는 것은 위협처럼 보인다.
극단에 가면 배제가 질서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내면의 불투명함이 범죄의 원인인 것도, 성찰이 면역인 것도 아니다. 행동과 제도와 책임은 구체적인 현실에 맞게 판단해야 한다. 한 가지 심리 진단으로 모든 사람을 결정할 수 없다.
지금 보는 것은 수단의 왕국이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내부 논리다.
사람을 도구로 만드는 일은 언제나 악을 행하겠다는 얼굴로 오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안다. 이유는 충분하다. 너를 위해서도 생각했다. 정당화가 빈틈없어질수록 정해진 역할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은 제도적 안전장치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런 몇 마디로 대화를 닫아 버리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리 위 사람들도 자기를 완전히 이해한 완성품이 아니다. 함께 놓고 보는 것은 저마다의 작업이 끝나지 않은 자리다.
히파티아가 남기는 것은 가르친 일이지 전지의 증명서가 아니다. 아퀴나스는 책과 쓰는 손을 멈춘 순간을 남긴다. 베르그송은 모두가 자기 방식으로 시간을 이해하도록 만들 수 없다.
레비나스에게 책임을 다 갚았다는 영수증은 없다. 부버는 만남을 손안에 영원히 보관하지 못한다. 조식은 바라던 사람이 되지 못한다. 지라르도 자기가 밝힌 장치가 여전히 작동하는 세계에서 산다.
같은 실패는 아니다. 다만 각각의 한계는 그 사람의 작업이 남에 대한 마지막 판결이 되는 것을 막는다.
삶들은 서로를 비출 수 있다. 같은 내면을 가졌다고 선언할 필요는 없다.
칸트는 사람을 단순한 수단으로 줄이지 말라고 요구한다. 레비나스는 마음대로 취소할 수 없는 책임을 가져온다. 부버는 관계에 만남의 가능성을 돌려준다. 조식은 욕망이 상대를 소유물로 만들지 않는 거리를 남긴다. 지라르는 배제를 보여 준다. 셸링은 완전히 투명하다고 믿는 자아를 흔든다.
여섯 언어, 서로 다른 사상. 우리는 한 방향으로 나란히 읽어 간다.
남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이미 내 것이라고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 방향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8. 다리 한가운데
셸링이 어두운 옷을 입고 걸어온다. 흰 머리를 뒤로 넘겼고 눈은 깊이 들어갔지만 맑다. 다리 위에서는 죽을 때의 일흔아홉보다 조금 젊다. 베를린에서 강의하던 예순 몇 살의 모습이다.
서두르지 않지만 걸음은 단단하다.
손에 얇고 수수한 책을 들었다. 1809년의 자유에 관한 논문이다. 이 장면에서 그가 가져온 책은 그것이다.
다리 한가운데 이른다.
히파티아가 천체 관측기인 아스트롤라베를 들고 있다. 아퀴나스가 있다. 베르그송은 지팡이를 짚었다. 레비나스와 부버. 조식은 두루마리를 쥐었다. 지라르도 있다.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세대가 쌓였다. 방정식을 적는 사람, 옥수수를 들여다보는 사람,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 별자리를 읽고 설계도를 그리는 사람. 쪼그리고 앉아 메모하는 사람,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 옆 사람과 낮게 이야기하는 사람.
셸링이 고개로 인사한다.
몇 사람은 알아본다. 생전에 만나고 나중에 갈라선 피히테, 초기 낭만주의 시인들. 20세기 사람들은 낯설다. 부버와 레비나스는 그가 살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서 있는 모습에서 그들이 한 일의 결이 조금 전해진다.
바로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 한 자리를 찾아 선다.
멀리 다리 끝에 칸트가 있다. 오늘 밤은 옷의 주름이 전보다 또렷하다.
다리 밖의 다른 길은 어두운 하늘 아래 놓였다. 번개. 걷는 사람들. 가장 멀리 간 이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교수의 옷을 입은 하이데거는 조금 더 앞서 갔다.
셸링은 그 길을 한동안 본다.
그는 20세기를 살지 않았다. 그 길은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이야기가 그린 길이다. 자신이 베를린으로 온 일도 왕실이 한 철학을 다른 철학에 맞서 쓰려던 계획 속에 있었다. 생각의 한계를 논한다고 정치적 이용 바깥에 영원히 서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잠시 바라본다.
그가 남긴 질문이 있다. 세계와 자신을 다 설명했다고 믿는 사람을 무엇이 멈춰 세울 수 있을까. 자기 목소리가 아닌 소리를 듣게 할 수 있을까.
질문이 면죄부는 아니다.
돌아선다. 히파티아의 아스트롤라베가 바람에 움직이며 달빛을 반사한다. 빛은 부드럽다.
그가 살짝 웃자 그녀도 웃는다. 그녀가 가르친 그리스 철학과 그가 젊어서 물었던 자연과 정신과 전체. 거기에는 서로 알아볼 자리가 있다. 같은 생각은 아니다.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아퀴나스가 반대편에서 온다. 오백 년이 넘는 거리가 있다. 라틴어 스콜라철학과 독일 관념론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존재와 자유와 필연은 두 사람을 각자의 길에서 멈춰 세웠다. 아퀴나스가 끄덕이고 셸링도 답한다.
부버가 다가온다. 그는 『나와 너』를 썼다. 셸링은 서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물었다. 두 질문이 나란히 선다. 누구도 서둘러 상대의 작업을 자기 책 안에 넣으려 하지 않는다.
부버가 희미하게 웃는다.
조식이 조금 떨어져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약 천육백 년, 그리고 서로 모르는 언어가 사이에 있다. 욕망과 거리를 쓴 시인과 존재가 개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물은 철학자. 이 상상의 다리에서는 같은 달빛 아래 서로를 볼 수 있다.
다리 한가운데 사람이 많다. 달빛은 부드럽다.
늘 멀리 보던 끝의 사람이 히파티아와 아퀴나스, 베르그송과 레비나스, 부버와 조식과 지라르를 보았다.
이번에는 셸링을 본다.
잠깐 눈이 마주친다. 셸링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감사 인사는 아니다. 당신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서로를 그렇게 인정하는 몸짓이다.
멀리 선 사람도 가볍게 끄덕인다.
셸링이 책을 잠깐 들어 올린다.
지위를 자랑하지 않는다. 이것을 썼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그 뜻의 동작이다.
작은 끄덕임이 돌아온다. 셸링은 책을 내리고 사람들 곁에 남는다.
후대의 독자들도 그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틸리히의 초기 연구, 하이데거의 1936년 강의, 뒤이은 야스퍼스의 저작.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읽는 일은 계속되었다.
모든 것이 옳았다고 늦게 판결이 난 것은 아니다. 어떤 질문들은 그 시대가 지난 뒤에도 무게를 잃지 않았다.
다리의 이야기 안에서는 그 이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작업의 무게가 뒤늦은 박수만으로 정해지지는 않는다.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더욱 그렇다. 언젠가 누군가 이해해 주어야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일은 혼자 끝낼 수 없는 곳을 향했다.
끝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도 했다.
읽기 안내와 출처
체계 기획은 1796–1797년경 문서로, 필적은 헤겔의 것이지만 사상적 저자는 논쟁 중이다. 자유 논문은 카롤리네가 1809년 9월 죽기 전에 출판되었다. 이후의 애도는 『클라라』와 『세계시대』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편지와 연대 자료는 아래 출처를 참조했다.
어두운 근거는 악 자체가 아니다. 타자 인정과의 연결은 저자의 비교 독해이며, 성찰을 도덕적 자격이나 인격의 시험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질문이 같은 학설을 뜻하지 않는다.
다리와 길, 날씨, 시대를 넘는 만남은 문학적 상상이지 전기 기록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행동과 정치적 책임에 대한 판단을 취소하지는 않는다.
Caroline Schelling: correspondence and chronology · Schelling: Freiheitsschrift (1809), original text and preface · Church archives: marriage and death registers · Deutsche Biographie: Caroline Schelling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chelling · Notre Dame: critical edition of the Philosophy of Revelation · Caroline’s grave and Schelling’s letters from 1809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