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繁體|日本語|Français|Deutsch|Español|한국어
← 위대한 삶들

103 / 108 · 타자와 빈자리

지라르, 욕망은 다른 곳에서 온다

아이들이 빼앗으려는 나무 트럭에서 군중이 지목하는 한 사람까지. 욕망을 빚는 타인의 흔적과 같은 적의가 만드는 단결. 장치가 보인 다음 우리는 무엇을 할까?

1. 나무 트럭

방에 아이 둘이 있다.

바닥에는 장난감 열 개가 흩어져 있다. 작은아이는 아까부터 이 방에 있었다. 장난감을 하나씩 다 봤지만 딱히 갖고 놀고 싶은 것은 없다.

큰아이가 들어온다. 바닥을 한번 훑어보더니 몸을 숙여 작은 나무 트럭을 집는다. 그리고 놀기 시작한다.

작은아이가 벌떡 일어난다. 달려가 트럭을 빼앗으려 한다.

“그거 내 거야.”

조금 전까지는 쳐다보지도 않던 트럭이다. 나머지 아홉 개는 여전히 싫다. 그런데 다른 아이 손에 들어간 저 하나만큼은 꼭 가져야 한다.

아이를 돌봐 본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르네 지라르가 평생 한 일을 이해하는 데도 좋은 출발점이다.

아이는 단지 장난감을 원하는 게 아니다. 다른 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을 원한다. 트럭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그 물건의 가치를 바꾼 것은 다른 아이의 손이다.

지라르는 이것이 어린아이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른이 무엇을 원하게 되는 과정에도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다.

우리는 성능을 따져 보고 그 차를 사고 싶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능을 알아보기 시작한 계기는 동료가 그 차를 산 일이었을지 모른다. 휴가지의 경치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누군가 올린 사진이 먼저 그곳에 있는 내 모습을 꿈꾸게 했을 수도 있다. 사랑에도 다른 사람들의 찬사나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 준 이상형이 섞인다. 물론 사랑받는 사람에게는 자기 뜻이 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돌아가는 상이 아니다.

조금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지라르의 말은 영향을 받은 욕망이니 전부 가짜라는 뜻이 아니다. 혼자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마음 안에서 관계를 보자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그림에는 나와 대상만 있다. 봤다. 마음에 들었다. 갖고 싶다. 직선 하나다.

지라르의 그림에는 한 사람이 더 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보고 나도 원한다. 나, 대상, 본보기. 삼각형이 된다.

지라르는 이 삼각형을 인간 욕망의 중심에 놓는다. 설명력이 크고 논쟁도 많은 해석이다. 배고픔이나 갈증, 구체적인 소망 하나하나가 모두 모방이라고 증명됐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건드리는 질문은 이것이다. 오롯이 내 안에서 나왔다고 믿는 바람에 이미 다른 사람이 얼마나 들어와 있을까.

미국에서 문학을 가르치던 그는 세르반테스, 스탕달,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를 거듭 읽었다. 1961년 프랑스어로 나온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그 작품들에서 반복해서 발견한 관계를 한데 모은 책이다.

돈키호테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기사가 되고 싶어진 것이 아니다. 기사도 소설을 읽었고 아마디스를 본보기로 삼았다. 쥘리앵 소렐의 출세 욕망에는 나폴레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프루스트의 사교계는 남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기에 더 근사해진다. 도스토옙스키에게서는 사랑과 굴욕과 경쟁심이 얽힌다. 어느 순간 사랑하는 사람보다 경쟁자의 움직임이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소설가들은 이미 인물들의 삶으로 그 얽힘을 써 놓았다. 지라르는 거기에 이론의 이름을 붙였다.

모방 욕망.

첫 번째 돌이었다. 이후 폭력과 공동체에 관한 그의 작업도 이 돌을 딛고 자라난다.

2. 이 바람은 어디까지 내 것일까

이 생각에는 불편한 함의가 있다. 내 욕망이 남들에게서 빚어진 것이라면, 나답게 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너 자신이 돼라.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이런 말들은 흔히 마음 깊은 곳에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본래의 욕망이 있다고 가정한다. 외부의 영향을 걷어 내면 그것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그 마음의 지도를 의심한다.

화가가 되고 싶어졌을 때, 그전에 읽은 낭만적인 화가의 전기는 없었을까. 어떤 생활을 동경하게 되기 전에 인스타그램 사진 한 장을 보지는 않았을까. 결혼할 사람에 대한 상상에는 소설과 영화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을까. 직업을 고를 때도 부모의 기대가 작용한다. 그 기대와 정반대로 살겠다는 다짐 역시, 때로는 부모에게서 방향을 얻는다.

영향을 받았다고 자기 판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판단이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시작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원한다” 밑을 파면 “그 사람도 원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했다”는 흔적이 자주 나온다. 내면을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샘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 앞에 누가 서 있었는지 볼 필요가 있다.

풀이 죽으라고 묻는 질문이 아니다. 조금 틈을 만들자는 질문이다.

무언가를 몹시 원할 때 잠깐 멈춰 본다. 나는 이 욕망을 어디에서 처음 만났을까. 어떤 사람, 이미지, 이야기였을까. 그 사람은 또 누구에게서 자기 본보기를 얻었을까.

묻는다고 욕망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트럭은 여전히 갖고 싶다. 하지만 “이게 바로 나니까 반드시 가져야 해”라는 목소리는 조금 덜 절대적이 될 수 있다.

그때 몇 가지 선택이 생긴다. 어디서 온 바람인지 알면서 계속 좇아도 된다. 내려놓아도 된다. 마음속에 그대로 두되 모든 결정을 맡기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욕망에도 지나온 길이 있다는 것이 보인다.

동료가 같은 승진 자리를 원한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바란다. 한 나라에서 같은 집단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때 질문을 하나 더 할 수 있다. 그 마음은 어떻게 빚어졌을까. 누가 그 자리를 꼭 차지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었을까. 누가 저 사람을 미워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을까. 어떤 이미지가 계속 돌아다닐까.

밖에서 남들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또 하나의 오만이다. 다만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모이는 일을 아무 설명도 필요 없는 자연현상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작은 자유가 거기에 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다. 원하는 것에 나를 통째로 맡기지 않을 만큼의 거리다.

그 거리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온다. 본보기였던 사람이 장애물이 될 때다.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다. 그런데 저 사람이 내 앞을 막는다. 어느새 나는 대상보다 그 사람을 더 열심히 좇고 있다.

3. 모두가 한 사람을 가리킬 때

모방은 욕망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좇으면 다른 사람은 더 세게 좇는다. 상대의 움직임이 내가 걸었다고 느끼는 판돈을 키운다.

실제로 한정된 것도 있다. 일자리 하나, 재산 하나, 명예 하나. 비교 때문에 반드시 가져야 할 것처럼 되는 자리도 있다.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녀라는 위치가 그렇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바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응답이다. 그 응답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나눠 갖는 자원이 아니다.

실제의 자원 부족도 모방이라는 말로 지울 수 없다. 분배 방식, 제도, 권력이 함께 작용한다. 하지만 모방은 이미 있는 갈등에, 원래의 대상을 밀어낼 만큼 뜨거운 경쟁심을 보탤 수 있다. 나중에는 상대를 이기는 것만 중요해진다.

둘은 적수가 된다. 무리 안에서 적의가 번진다. 어제까지 말로 풀 수 있던 차이가 오늘은 참을 수 없는 위협이 된다. 공동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수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 모방은 배움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닮은 바람이 모두 폭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지라르는 그리스 신화, 성서, 인류학 연구, 제사에 관한 기록, 유럽의 마녀사냥을 비롯한 박해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한 움직임을 따라갔다. 흩어진 공동체가 공동의 표적을 통해 다시 뭉친다는 것이다.

한 사람, 혹은 작은 집단이 위기의 원인이 된다.

저자가 전염병을 가져왔다. 저 여자가 수확을 망쳤다. 저들이 신을 화나게 했다. 나라가 기우는 것은 저 사람들 때문이다. 비난의 말은 달라져도 여러 분노가 도착하는 곳은 같아진다.

죽이고, 쫓아내고, 가두고, 불태운다.

지라르가 설명하는 장치에서는 그 뒤 잠시 평온이 돌아온 듯 느껴질 수 있다. 적어도 공동체는 그렇게 느낀다.

비난이 사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서로 싸우던 사람들이 함께 행동했기 때문이다. 모두 대 모두의 싸움이 모두 대 한 사람으로 모였다.

모방이 멈춘 것이 아니다. 이제 같은 적의를 모방한다. 누가 손가락질하니 나도 한다. 누가 때리니 나도 때린다. 그 일치 속에서 한편이 됐다는 느낌이 생긴다.

지라르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무리는 되찾은 평화를 희생자의 죽음 덕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 재앙의 근원이라고 하던 사람을 이번에는 평온의 근원으로 받아들인다. 두렵고도 고마운 존재. 그 이중적인 귀속이 그가 신성함을 설명하는 중요한 고리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종교의 기원에 관한 큰 가설을 세운다. 의례는 공동체를 세운 폭력을 통제된 형태로 되풀이한다. 끝없는 보복이 다시 터지지 않도록 정해진 희생을 바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라르의 이론이지 모든 종교의 기원이 같다는 고고학적 증명이 아니다. 동물 희생이 어디서나 인간 희생 다음 단계였다고 정할 수도 없다.

그는 이 장치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 부른다.

이번 흐름의 처음에 우리는 히파티아를 만났다. 군중의 확신과 그들이 보지 않으려 한 것을 읽었다. 지라르의 시선을 가지고 돌아가면 하나의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구체적인 사람이 ‘저 사람만 치우면 되는 장애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종교와 권력을 둘러싼 복잡한 갈등이 있었다. 주교 키릴로스와 총독 오레스테스의 다툼도 그중 하나였다. 총독과 교류하던 히파티아는 두 사람의 화해를 가로막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교사이고 수학자이며 자기 도시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던 한 여성. 그 모든 것이 한 역할에 눌린다. 저 여자만 없애면 문제가 풀린다.

이 겹침은 지목하는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그녀가 살해된 뒤 도시가 정말 평온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론의 이름 하나가 그 살인의 구체적인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다.

그녀의 공적 위치, 학식, 성별, 이교도라는 정체성은 공격에 이용될 수 있었다. 어느 것도 죄가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골라 가리키는 표지가 될 수 있었다.

희생양은 실제 원인일 필요가 없다. 원인이라고 지목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4. 왜 하필 그 사람인가

왜 히파티아였을까. 왜 사회의 분노는 이미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집단에 쏠릴까.

‘자의적’이라는 말은 오해를 부른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는 제비뽑기로 대상을 고른 사건이 아니다. 오랜 반유대주의, 인종 이데올로기, 국가 권력과 조직적 절멸에는 구체적인 역사가 있다. 희생양이라는 도식은 그 역사를 대신하지 못한다.

여기서 자의성은 떠넘긴 죄와 처벌 사이에 있다. 집단에 씌운 혐의가 집단 박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가해자들이 왜 그 대상을 골랐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피해자들에게 박해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차이가 표지가 된다. 피부나 얼굴, 체격. 이주민의 억양. 소수의 신앙.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사실. 혁명기의 귀족, 부유한 이들 사이의 가난한 사람이라는 지위. 지식을 미워하는 시대의 학식, 힘을 숭배하는 곳에서의 장애. 혼자 떨어져 사는 방식조차 의심거리가 될 수 있다.

표지 자체가 박해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소문과 권력관계와 집단의 역사가 그것을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증거처럼 만든다.

그러면 ‘우리’가 선명해진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저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한다. 그들을 내쫓는 것이 우리를 다시 하나로 만드는 일처럼 된다.

무서운 것은 그 경계가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지금 공격받는 특징이 내게 없다고 영원히 안전한 것은 아니다. 상황이 바뀌면 내 학력, 억양, 성별, 오래전에 한 말이 결정적인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나 똑같은 위험을 겪는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와 권력은 위험을 불균등하게 나눈다. 다만 현재의 안전을 원리적으로 공격받지 않을 자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라르는 여러 문화에서 되풀이되는 위험을 본다. 특별히 사악한 몇몇 사람이 발명한 비법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일반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아도 이 말의 변화를 알아들을 수는 있다. ‘어려운 문제가 많다’가 ‘문제는 저 사람이다’로 바뀌는 때를.

그 변화를 멈추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그것을 보아야 한다.

5. 피해자 쪽에서 듣기

지라르의 종교 사상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움직임이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가 달라진다.

그는 많은 신화를 박해하는 쪽에 남은 이야기로 읽는다. 괴물이 공동체를 위협한다. 영웅이 괴물을 죽인다. 모두가 구원받는다. 우리는 위험을 알아보았고 필요한 일을 했다. 그런 이야기에서는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히브리 성서의 몇몇 이야기에서 그는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간다. 이야기는 집안의 골칫덩이를 없앤 형제들의 후련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기 가족에게 넘겨진 사람을 따라간다.

욥의 친구들은 고통을 죄로 설명하려 한다. 무슨 잘못을 했으니 저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욥은 항변한다. 고통받는다는 사실이 비난의 진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도 신에게 벌받은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글은 그가 다른 이들을 위해 짊어지는 것으로 시선을 옮긴다. 밖에서 구경하며 확신하던 설명이 흔들린다.

고대에 피해자의 목소리가 있었던 전통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래도 지라르에게는 결정적인 흐름이다. 비난받던 사람이 비난하는 쪽을 향해 질문을 되돌릴 수 있게 된다.

그가 읽는 수난 이야기에서 그 흐름은 더욱 또렷해진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이야기에는 종교 권위자들 가운데 고발하는 이들, 로마 총독, 선동된 군중이 등장한다. 처형은 로마 지배 아래 로마의 권력으로 집행되었다. 여기서 당시의 모든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후대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씌우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지라르가 강조하는 것은 복음서가 처형을 ‘군중이 옳았다는 증거’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무고함이 중심에 남는다. 목소리의 수, 지위, 공식 판결만으로 혐의가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복음서 이전에는 무고한 사람의 편을 든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두 가지 이야기 방식의 차이다. 함께 했으니 옳았다. 또는, 함께 했어도 모두가 무고한 한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다.

피해자 자리에서 보면 그 아름다워 보이던 단결의 모습이 달라진다. 정의라던 것이 공동의 폭력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일로 드러날 수 있다.

지라르는 이 전통에서 메커니즘을 알아볼 오래가는 자원을 찾는다. 재발을 막는 보증서는 아니다.

기독교 사회에서도 반유대 박해와 마녀사냥을 비롯한 폭력이 벌어졌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계속 억눌렸다. 복음서를 읽은 뒤 세기가 지날수록 박해가 저절로 줄어든 역사는 아니다.

그 간격이 중요하다. 피해자 쪽에서 쓰인 글을 읽는 것과 눈앞의 피해자 편에 서는 것은 다르다.

바로 여기서 지라르를 둘러싼 질문도 생긴다. 다른 전통을 너무 하나로 묶은 것은 아닐까. 기독교 역사에 너무 단순한 방향을 준 것은 아닐까. 반례들은 어떻게 다룰까. 종교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만으로 끝낼 수 없는 문제다.

지라르는 1959년 무렵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다. 그의 사상과 신앙은 깔끔하게 떼어 놓을 수 없다. 동시에 그는 독자가 글과 역사와 논증을 검토하기를 바랐다. 신자가 아니어도 진지하게 읽을 수 있고, 그의 종교사 해석을 확정된 사실로 여길 필요도 없다.

이 글은 독자를 두 진영으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피해자 쪽 이야기가 들리면 집단의 폭력은 예전만큼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될 수 있을까. 지라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중요한 이야기들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그의 논증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 동작에는 힘이 있다. 정의를 행한다고 확신하는 군중에게, 여기에는 하나의 장치가 돌아가고 있다고 가리키는 일이다.

그러면 눈앞의 사람은 더 이상 ‘우리 불행의 원인’만이 아니게 된다. 한 사람이다. 남이 씌운 역할로는 다 말할 수 없는 삶을 가진 사람이다.

지라르의 길은 뒷면에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어떻게 빼앗는지 보고, 빼앗기가 조금 더 어려워지게 한다.

6. 아렌트 옆에서

평범한 사람은 왜 폭력에 참여할까. 이십 세기의 두 중요한 생각이 그 질문을 향한다. 하나는 한나 아렌트의 것이고, 하나는 지라르의 것이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강제 이송을 조직하고 절멸 기구에 가담한 나치 관료였다. 아렌트는 그의 상투적인 말, 복종했다는 주장,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판단하지 못하는 태도를 살폈다. 거기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은 범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반유대 신념이 없었다는 증명도, 개인 책임의 면제도 아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자기 변명을 실제 행동의 정확한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아렌트는 안심하기 쉬운 그림을 깨뜨린다. 끔찍한 범죄에 반드시 연극 속 악마 같은 얼굴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멈추는 것도 가담을 가능하게 한다.

지라르는 박해를 둘러싼 이유들을 보게 한다. 참여자들은 쓸모 있는 일을 한다고, 하나가 되었다고, 사명을 수행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도 논거가 있다. 바로 그 논거가 피해를 옳은 일처럼 보이게 한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 충분히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렌트는 판단이 멈추는 곳을 묻고, 지라르는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무리가 뭉치는 곳을 묻는다. 강조점이 다르다. 같은 설명으로 바꿔 쓸 수 없다.

그래도 둘 다 쉬운 결론을 거부한다. 괴물들이 저지른 일이니 설명이 끝났다고 하는 결론이다.

대규모 폭력에는 명시적인 이데올로기, 의도적인 조직자, 평범해 보이는 참여자가 함께 있을 수 있다. 행정 절차는 피해를 처리할 업무로 바꾸고, 소속감은 충성할 일로 바꾼다. 그 과정을 설명한다고 의도와 선택과 책임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앞선 글에서도 여러 경우를 만났다. 히파티아를 죽인 사람들은 스스로 옳다고 믿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요구는 내 설명에 다 담기지 않는다. 조식 이야기에서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알면서도 계속 억누르는 사람이 있다. 보지 못하는 것, 이유 뒤에 숨기는 것, 보고도 계속하는 것. 이 차이는 남겨 두어야 한다.

아렌트와 지라르를 함께 읽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순간마다 모두 범죄라는 말도, 모든 범죄에 원인이 하나라는 말도 아니다. 습관과 집단의 확신이 내 대신 모든 판단을 끝내게 하지 말자는 뜻이다.

여기서는 두 사람의 작업을 나란히 읽는다. 아렌트가 세상을 떠난 1975년에는 지라르의 1961년 문학론과 1972년 『폭력과 성스러움』이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은 작업이 서로를 비출 수 있다.

아렌트에게서 받는 요구는 장치가 판단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도 계속 판단하라는 것이다. 지라르에게서는 시선이 모이고 분노가 모여, 정작 지목된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는 움직임에 대한 주의를 받는다.

참여하지 않으려면 거리가 필요하다. 내 욕망으로부터, 무리의 이유로부터, 모두가 동의할 때 느끼는 따뜻함으로부터.

그 거리는 값을 치르게 한다. 따라가면 소속될 수 있다. 멈추면 혼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이 사람들을 버리는 일은 아닐 수 있다. 방금 우리 집단이 밀어낸 사람의 자리를 혼자라도 비워 두는 일일 수 있다.

7. 다섯 번째 목소리

이 흐름에서 여러 목소리가 서로에게 응답했다.

칸트는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고 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요구 앞에 우리를 세운다. 부버는 ‘너’를 다시 듣게 한다. 조식을 읽으면 갈망과 이별, 소유할 수 없음의 경계를 만난다.

한 학설을 네 사람이 반복한 것이 아니다. 시인을 철학 학파의 구성원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다. 이 연재가 함께 놓은 네 목소리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라르는 반대쪽에서 다섯 번째 목소리를 보탠다. 무엇이 우리를 되풀이해서 남의 자리를 빼앗는 쪽으로 미는가. 압력은 어떻게 번지는가. 어디서 따라가기를 멈출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면 되지’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변에서 정반대 행동에 보상을 줄 때 혼자 내린 결정을 지키기 어렵다. 밀어오는 힘이 보여야 한다.

메커니즘의 이름만 아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아주 잘 이해하면서 참여할 수도 있다. 지식은 우리 대신 선택하지 않는다.

두 방향이 모두 필요하다. 하나는 갈 곳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멀어지게 하는 힘을 본다. 어느 쪽도 다음 걸음을 대신 내딛어 주지는 못한다.

지라르의 후기 작업도 이 어려움으로 돌아온다. 폭력의 장치를 밝혀도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정당화를 흔들 수는 있어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자동으로 주지는 못한다. 본 뒤에도 해야 할 일이 남는다.

지라르는 1981년 스탠퍼드에 왔고 1995년 은퇴했다. 이후에도 사유를 이어 가며 독자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학생 중 한 명이 피터 틸이다. 철학을 공부한 그는 나중에 페이팔을 공동 창업하고 페이스북에도 일찍 투자했다. 지라르가 자기 생각에 끼친 영향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생각이 사업으로 들어가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모방 경쟁에서 나오는 것은 서로 덜 해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남들이 다투기 어려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일까. 겹칠 수는 있어도 같은 목적은 아니다.

지라르는 경쟁적 모방이 폭력으로 바뀌는 과정을 묻는다. 틸의 기업론은 비슷한 회사들이 끝없이 경쟁하는 일을 비판하며, 정말 다른 것을 만들어 오래가는 우위를 얻으라고 권한다.

블레이크 매스터스와 함께 쓴 『제로 투 원』의 ‘창조적 독점’은 독자적인 기술과 새로운 가치를 강조한다. 이미 붐비는 곳에서 더 빨리 달리기만 하지 말고 다른 출발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혁신과 우위, 다른 사람들에게 남는 공간이 이때 하나의 논의에 들어온다. 모방이라는 진단만으로 그 답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어떤 독자는 지라르를 통해 꼭 이겨야만 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다른 독자는 시장의 동조를 알아보고 우위를 만든다. 두 번째 쓰임이 타인에게 해를 주는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살펴야 한다. 어떤 철학자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차이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라르는 틸, 로버트 해머턴켈리와 2007년 이미타티오를 공동 설립했고 활동은 2008년 시작됐다. 사상의 관계는 찬성과 반대를 가르는 선 하나보다 복잡하다.

그래도 이 사례를 넘어서는 가능성은 남는다. 장치를 꿰뚫은 사람은 그 장치를 더 능숙하게 다루게 될 수도 있다.

사람을 풀어 주려는 통찰에도 자신의 쓰임을 지배할 마법은 없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모든 쓰임이 똑같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곳으로 책임을 돌려놓자는 뜻이다.

틸은 계속 선택한다. 그 결과는 검토하고 비판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을 인정한다고 권력까지 비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한 행동을 판단하는 것과 한 사람을 영원히 정의해 버리는 것은 다르다.

구체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그 통찰로 누구의 공간이 넓어지고, 누구에게 어떤 대가가 남는가. 마음속을 짐작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일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지라르는 2015년 아흔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무언가를 보이게 했다. 그 뒤 독자 하나하나가 무엇을 할지까지 정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단지 수단이 아니다. 타자는 내 설명 안에 다 담기지 않는다. ‘너’는 마음대로 쓰는 ‘그것’이 아니다. 갈망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는 없다. 여기에 지라르의 경고가 더해진다. 타자를 지우는 장치를 알아보고, 참여하지 않기로 선택하라.

다섯 목소리이지 하나의 교리가 아니다. 이 연재의 읽기 안에서 같은 방향을 서로 비춘다.

그쪽에서 온화한 바람이 분다.

8. 다리 위에서

이제 이 연재가 상상하는 장면이다. 지라르가 평범한 양복을 입고 걸어온다.

마른 체구에 안경을 썼다. 팔십 대로 보인다. 표정에는 절제가 있지만 차갑지는 않다. 천천히 걷는다.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자기가 쓴 책이다. 내보이려 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리 한가운데에 닿는다.

히파티아가 있다. 손에는 아스트롤라베. 건너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지팡이를 짚은 베르그송. 레비나스. 부버. 두루마리을 든 조식.

이름을 부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모인 이들이다. 방정식을 쓰는 사람, 옥수수를 관찰하는 사람, 시를 짓는 사람, 별 지도를 읽는 사람. 소설가, 도면을 그리는 사람, 쪼그려 앉아 메모하는 사람. 멀리 바라보는 사람. 옆 사람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

지라르는 몇몇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구간에 서 있던 아렌트가 답한다. 둘은 곧바로 다가가 긴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상상 속의 짧은 인사에, 다른 두 질문이 다른 채로 서로를 알아볼 시간이 있다.

레비나스도 보인다. 같은 세기의 프랑스 사상계를 살아간 두 사람이다. 작은 미소를 보내고, 미소가 돌아온다.

지라르는 설 자리를 찾는다.

먼 끝에는 칸트가 서 있다. 오늘 밤은 얼굴의 윤곽이 이전보다 조금 더 뚜렷해 보인다.

다리 밖으로 다른 길이 이어진다. 그 위의 하늘은 어둡다. 번개가 친다.

그 길을 사람들이 걷는다.

가장 멀리 간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교수 가운을 입은 하이데거는 더 앞으로 갔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지라르는 잠시 그 길을 본다.

비난과 마녀사냥, 숙청, 홀로코스트, 서로 다른 시대의 집단 폭력이 떠오른다. 한 가지 장치가 그 모든 역사를 다 말해 주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는 어떤 끔찍한 전환을 오래 뒤쫓았다. 사람들이 함께 다른 한 사람을 없애야 할 것으로 바꾸는 전환이다.

그 길의 날씨를 안다. 폭풍이다. 사람들이 그 비를 정의롭다고 여기고 그 걸음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오래 들여다봤다.

저 길의 사람들도 한때는 다리 앞에 있었다.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 선택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다리로 향한 사람. 보지 못한 사람. 보고도 등을 돌린 사람.

다리는 지리적 장소도, 인간으로서 더 높은 등급도 아니다. 지금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공존의 방식, 이 연재가 상상하는 상태다. 거기서 멀어지는 사람도 사람이며,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아직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자기 책이 그 길을 없애지는 못했다. 지라르는 안다.

몇몇 사람이 그 길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됐다. 그것도 안다.

둘 다 사실이다.

특별히 슬프지도, 마음이 놓이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의 넘어가는 순간을 보이게 하려 했다. 그다음 길을 남 대신 걸을 수는 없다.

돌아선다. 히파티아의 아스트롤라베가 달빛을 받는다.

멀리서 그의 독자들이 삶을 이어 간다. 책을 읽고 무리를 따라가지 않을 거리를 얻은 사람도 있다. 더 능숙하게 움직이는 법을 익힌 사람도 있다. 모든 여정을 곧장 다리와 길로 그릴 수는 없다. 아직 망설일 수도, 또 다른 통로를 찾을 수도 있다.

각자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살아 있을 때도 몰랐다. 지금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앞날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선택 중인 독자들이 있다.

그는 감시하지 않는다. 상관없어서가 아니다. 보이게 하는 일의 가치를 믿는 것과 모든 시선을 지배하는 것은 다르다.

건너가서 무엇을 하라고 문장을 내려 주지 않는다. 쓰인 책은 다른 손으로 넘어간다.

다리 가운데의 사람들에게로 몸을 돌린다.

히파티아가 책을 본다. 그녀는 그리스어를, 그는 프랑스어를 쓴다. 그래도 도구는 말보다 먼저 알아볼 때가 있다. 아스트롤라베와 책은 다른 세기의 것이지만, 누군가 본 것을 다른 이에게 전한다는 점에서는 가깝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가온다. 상상 속의 대화에서 그는 라틴어로 분별에 관해 말한다. 모두가 같은 것을 볼 때 자기 눈을 지키는 일에 관해. 지라르는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조식은 조금 떨어져 있다. 프랑스어와 옛 중국어 사이에서는 쉽게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서로 알아보는 무엇이 있다. 의심과 제약 속에서 살았던 사람, 집단적 비난의 힘을 생각했던 사람. 다른 삶이 다른 쪽에서 한 압력에 닿는다.

다리 한가운데 많은 사람. 달빛은 온화하다.

먼 끝의 사람은 히파티아, 토마스, 베르그송, 레비나스, 부버, 조식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지라르를 본다.

잠깐 눈이 마주친다.

지라르는 머리를 숙이지도, 치켜들지도 않는다. 손에 든 책을 조금 들어 올릴 뿐이다.

과시가 아니다. 확인하는 듯하다.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을 압니다. 내가 건넬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다리 끝에서 아주 작은 끄덕임이 돌아온다.

지라르는 책을 내린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한평생 하나의 장치를 드러냈다. 장치는 아직 돌아간다. 그래도 돌아갈 때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끝이 없는 일이었다.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했다.

읽기 안내와 출처

모방 욕망, 희생 제의의 기원, 복음의 박해 폭로는 지라르의 이론과 독해이며 입증된 보편 역사 자체가 아니다. 히파티아 혐의는 소크라테스의 『교회사』 7권 15장을 참조했으며 살인 뒤 도시가 안정됐다고 추론하지 않는다.

연대는 스탠퍼드 추도 자료를 따른다. 아렌트와의 비교는 아이히만의 이데올로기나 개인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틸의 기업론은 매스터스와 쓴 책에 근거한다. 이미타티오 자체 기록은 2007년 설립과 2008년 활동 시작을 구분한다. 개인의 속뜻 대신 실제 쓰임을 살핀다.

다리와 길, 날씨, 시대를 넘는 만남은 전기 기록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이다. 비교가 같은 학설을 뜻하지는 않는다. 삶을 열어 둔다고 구체적인 행동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Stanford — René Girard obituary and chronology · Imitatio — mimetic theory keywords · René Girard — interview · Socrates Scholasticus — Ecclesiastical History VII.15 · USHMM — Eichmann Trial · Peter Thiel and Blake Masters — Zero to One, publisher · Imitatio — Advisory Board and founding · Imitatio — launch in 2008 · 法政大学出版局 — 欲望の現象学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