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 108 · 타자와 빈자리
부버, 나와 너
나-그것은 세계를 쓸 대상으로 정리하고 나-너는 온전한 타자와 만난다. 삶에는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남으면 메마른다.
일. 기다리는 아이
부버가 세 살이던 해, 어머니가 떠났다.
부모가 헤어진 뒤 어머니는 그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어른들의 관계가 아무리 복잡해도, 아이에게 그것은 우선 한 자리가 비어 버리는 일이다.
그는 당시 갈리치아에 속했던 렘베르크의 조부모 집으로 보내졌다. 할아버지 솔로몬 부버는 미드라시를 연구하는 유대인 학자였다. 할머니 아델레 역시 책과 언어를 대하는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 집은 그를 돌보았고, 책을 주었고, 두 문화 사이에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주었다.
하지만.
아이는 기다렸다.
노년에 쓴 자전적 단편에서 부버는 조부모 집의 발코니를 기억했다. 아직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어른들은 그 앞에서 부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도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계속 바랐을 뿐이었다.
그를 돌보던, 그보다 나이가 많은 소녀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버는 나중에 이것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일어나지 못한 만남을 가리키는 말을 만들었다. Vergegnung. 어긋나 버린 만남,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만남.
여러 해가 지난 뒤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그 말이 돌아왔다. 어머니가 눈앞에 있다고 해서 기다렸던 세월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사람은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방에 다시 들어서는 것만으로 놓쳐 버린 만남이 저절로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기억은 말끔하게 닫히지 않았다. 아이가 기다리던 자리에는 틈이 남았다.
부버는 평생 이 일을 생각했다.
두 사람이 정말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앞에 있어도 관계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예의 바른 한마디가 끝났는데, 어쩌면 어느 쪽도 상대의 말을 듣지 못했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이렇게 멀리 있을 수 있을까.
훗날 ‘나–너’, Ich–Du는 그의 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말의 짝이 되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아이 하나로 철학 전체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에게 만남은 책에서만 발견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지 않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질문이 있다.
이. 하시디즘
스무 살을 넘긴 부버는 하시디즘의 전통에 다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는 빈에서 태어나 렘베르크의 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유대교의 학문과 독일어 문화가 모두 그의 어린 시절에 들어와 있었다. 이후 빈, 라이프치히, 취리히,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철학을 읽었고 문학과 예술도 접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동유럽의 또 다른 유대교에 끌렸다.
하시디즘이었다.
이 유대교 종교운동은 18세기 동유럽에서 일어났으며, 일반적으로 바알 셈 토브에게서 그 시작을 찾는다. 부버가 특히 주목한 것은 그 안에 있는 한 가지 힘이었다. 성스러움은 서재나 먼 곳에만 있지 않다. 기도하고, 일하고, 먹고, 이야기하는 평범한 행동 속에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전통이 율법과 공부, 공동체 생활을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일상을 떠나 어느 성스러운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 자체를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시디즘에는 여러 늙은 랍비가 있었다. 랍비마다 자신의 작은 공동체, 이른바 ‘궁정’이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부버는 수십 년에 걸쳐 그 이야기들을 모았다.
많은 이야기가 이미 책과 문헌에 보존되어 있었다. 부버는 주로 그러한 자료를 수집하고 선택하고 다시 써서 독일어 독자에게 건넸다. 그는 자신의 해석이 없는 기록 장치가 아니었다. 이야기의 모양을 만드는 문학적 판단이 그 일에 들어 있었다.
『라비 나흐만 이야기』는 1906년에, 『바알 셈의 전설』은 1908년에 나왔다.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작업을 이어 가며 더 큰 하시디즘 이야기집으로 묶었다. 이 일은 그의 철학과 오랫동안 나란히 걸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기이한 일화를 보존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독자에게 삶의 자세를 보여 주고 싶었다.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 작은 행동으로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물론 그의 선택은 비판도 받았다. 특히 게르숌 숄렘은 부버가 자신의 철학으로 하시디즘을 지나치게 바꾸어 놓았다고 보았다. 이 이야기들은 전통으로 들어가는 길이지, 전통 전체를 논란 없이 담아낸 초상은 아니다.
부버가 전한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사소프의 랍비 모셰 라이프에 관한 이야기에서, 랍비는 농민들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는 술을 마시던 두 농민의 대화를 우연히 듣는다. 한 사람이 묻는다. 자네는 나를 사랑하나.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한다. 그러자 질문이 더 이어진다. 그렇다면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어디가 아픈지 아는가. 친구는 대답하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사랑받는 사람이 실제로 놓인 자리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직 모르면 물을 수 있다. 들을 수 있다. ‘물론 너를 사랑하지’라는 말로 상대가 하려던 말을 대신 끝내서는 안 된다. 감정은 진실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 응답의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는 ‘너’를 구체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어려움을 겪는 사람으로 만든다.
부버 자신은 어느 하시디즘 궁정에도 속하지 않았다. 전통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지키면서, 그 안에서 현대의 삶으로 가져올 질문을 찾았다. 어떤 전통에 가까워지는 일이 그 전통에는 한 번도 균열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일 필요는 없다.
그는 이야기를 사유 속으로 데려왔고, 사유를 다시 이야기로 돌려보냈다. 개념은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이야기는 그 질문이 얼마나 작은 말 한마디 속에도 살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에게 두 일은 하나의 일이었다.
삼. 나와 너
1923년. 마흔다섯 살의 부버는 짧은 책 한 권을 냈다.
독일어 제목은 Ich und Du. 한국어로는 『나와 너』다.
이 작은 책은 20세기의 관계와 교육, 대화에 관한 논의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사람에게 먼저 완성된 ‘나’가 있고, 그다음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관계 안에서 ‘나’를 갖는다.
그리고 관계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식이 있다.
부버는 그것을 ‘근원어’, Grundworte라고 불렀다. 근원어는 낱말 하나가 아니라 말의 짝이다. ‘나–그것’, Ich–Es. 그리고 ‘나–너’, Ich–Du.
이 두 짝에 등장하는 ‘나’는 같은 ‘나’가 아니다.
‘나–그것’의 나는 관찰하고, 이용하고, 분류하고, 예측한다. 앞에 있는 것은 대상이다. 분석할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 내 개념 체계 속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존재다. 일상의 대부분은 이 관계에 속한다. 시계를 본다. 세 시를 가리킨다. 물을 마신다. 갈증을 풀어 준다. 자동차를 몬다. 빨리 달린다. 동료에게 인사한다. 그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이다. 이 모두가 ‘나–그것’이다.
‘나–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이다. 물체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사물을 구별하고 정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삶에서 큰 부분이 이 관계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아주 때로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
한 사람을 마주한다. 혹은 부버가 예로 든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한다. 평소에는 종을 알아보고 쓸모를 헤아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나무는 자료의 묶음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눈앞에 선다. 부버의 논의는 사람 사이의 만남을 넘어 자연과 예술로도 뻗어 간다. 그렇다고 나무가 사람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가진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 순간 나 역시 단지 관찰하는 자가 아니다. 단지 이용하는 자도 아니다. 마주 선 존재 앞에 나 자신으로 선다.
그 순간이 ‘나–너’다.
이러한 관계에서 나는 나의 온 존재로 응답한다.
이것은 존재하고 응답하는 방식에 관한 말이지, 사람이 될 자격을 심사하는 시험이 아니다. 이런 만남을 겪지 않은 사람, 아직 대답할 수 없는 아기, 병이 깊어 응답할 수 없는 사람도 그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조금도 덜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너’를 소유물처럼 보관할 수는 없다.
부버 철학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다.
만남을 준비할 수는 있다. 귀 기울여 듣고 시간을 내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추를 누르듯 그 만남이 일어나도록 보장할 수는 없다. 만남을 내가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반복하는 경험으로 만들면, ‘너’는 다시 내가 얻으려는 효과로 줄어들 수 있다.
유한한 ‘너’는 다시 ‘그것’의 세계로 들어간다. 만남 뒤에도 우리는 기억하고 분석하고 일정을 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남을 배신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가 일 초밖에 지속되지 못한다는 뜻도 아니다. 유한한 한 사람을 순수한 ‘너’로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너’를 그대로 붙들어 두는 일이 아니다. 그 관계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앞에 있는 사람을 ‘그것’만이 아니라 ‘너’로 새롭게 보는 일이다.
이것은 어렵다.
익숙함은 이미 안다고 믿게 만들기 쉽다. 배우자가 오늘 무슨 말을 할지. 아이가 왜 또 속상해하는지. 동료가 아마 무엇을 원하는지. 그러다가 저녁 식사 중에, 다투는 도중에, 잠들기 전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한다. 다시 들을 것인가. 이인칭 대명사를 쓰는지 삼인칭 대명사를 쓰는지만으로 관계를 판단할 수는 없다.
‘나–너’의 가능성은 그렇게 새로 응답하는 데 있다.
만남의 순간은 지나간다. 삶은 계속된다. 요리하고, 약속을 잡고, 일하고, 돌본다.
그 일들로 돌아간다고 해서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빛나는 일 초만을 위해 살면서, 관계를 지탱하는 길고 평범한 날들의 수고를 얕볼 필요도 없다.
사. 영원한 너
부버 사상의 가장 깊은 층은 마지막에 나타난다.
구체적인 ‘너’ 하나하나는 영원한 ‘너’, das ewige Du를 향해 열린 창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너’란 무엇인가.
부버에게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피하려고 만든 막연한 방향이 아니다. 그는 명시적으로 하나님을 뜻한다. 다만 하나님을 여러 대상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한 대상으로 놓을 수는 없다.
결정적인 것은 관계이지, 속성을 적은 목록이 아니다.
그 방향에는 결코 ‘그것’이 될 수 없는 ‘너’가 있다. 부버는 그 ‘너’를 영원한 ‘너’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고, 교리와 개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너’로 부르는 일과 같지는 않다. 한 사람에 관한 서류철이 그 사람과의 만남은 아니듯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저절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지는 않는다.
이 구별 때문에 영원한 ‘너’는 이론의 결론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 다가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도망친다는 뜻일 필요가 없다. 구체적인 생명에 응답하는 일이 그쪽으로 관계를 열 수 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주장하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자기 구원의 도구로 대할 수는 없다.
만남의 횟수를 쌓아 일정 점수를 채우면 하나님에게 한 칸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만남은 점수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부버가 하시디즘 이야기에서 읽어 낸 것이 이어진다. 일상은 거룩한 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빈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적 재해석이 하시디즘 신앙의 모든 내용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마지막 부분은 ‘사람들과 말을 잘 나누자’는 조언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기도와 계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룬다. 신을 믿지 않는 독자도 관계에 관한 그의 사상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그 종교적 지향이 없다고 가장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종교의 언어를 쓴다. 만남의 깊이를 찾는 일이 모든 교리와 신앙의 차이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 차이들을 서둘러 하나로 합치지 않아도 된다.
먼저 질문을 남겨 두자. 나는 ‘너’에게 응답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너’에 관한 생각을 지킬 뿐인가. 이 질문은 한 사람과 오래 동행할 수 있다.
오. 성서를 번역하다
1925년. 부버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출판인 람베르트 슈나이더가 시작한 기획에서, 그는 여덟 살 아래인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와 함께 일했다. 로젠츠바이크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을 앓고 있었다. 움직임과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나 아내의 도움과 의사소통 방법을 통해, 정밀한 문장 작업에 까다롭고 적극적인 공동 저자로 계속 참여했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히브리어 성서를 독일어로 옮기는 일.
새로운 독일어 번역을 만드는 일.
왜 새로운 번역이었을까.
독일어 세계에는 이미 루터 성서가 있었다. 유대인 번역자의 작업을 포함해 다른 번역본도 있었다. 루터는 사람들이 성서를 듣는 방식을 빚어 놓았다. 부버와 로젠츠바이크는 아직 번역된 적 없는 책을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익숙함의 내부에서, 듣는 귀를 다시 열려고 했다.
그 익숙함을 잠시 멈추게 하고 싶었다.
독일어 독자들이 히브리어의 낯섦을 느끼기를 바랐다.
하나의 어근이 멀리 떨어진 대목에서 되풀이되면 메아리가 생긴다. 문장을 어디서 끊느냐에 따라 호흡이 달라진다. 어떤 표현은 몸과 행동 가까이에 머물며 서둘러 추상적인 말이 되지 않는다. 매번 그 자리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매끈한 표현으로만 옮기면, 이러한 연결이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다.
두 사람은 특히 그 메아리와 리듬을 지키고자 했다. 루터가 히브리어에 무감각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번역이 독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이끌 수 있다는 뜻이다.
반복되는 핵심어, 신중하게 고른 독일어 조어, 호흡과 낭독에 맞춘 행 나누기. 번역은 구체적인 문장 속에서 일한다. 같은 단어가 돌아오는 것을 듣고서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 응답하고 있음을 들을 수도 있다.
그 안에는 번역의 철학이 있었다. 번역은 다른 언어를 내 언어로 바꾸는 일만이 아니다. 내 언어가 다른 언어에 의해 조금 달라지도록 허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로젠츠바이크는 192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동 작업은 이미 모세오경을 넘어 예언서까지 나아가 있었다. 부버는 계속했다. 1961년에 번역을 마쳤고, 완전한 개정판은 1962년에 나왔다. 그 사이 독일이 달라졌고 유럽이 달라졌다. 이 말들을 읽던 사람들이 추방당하고 살해당했다. 그 역시 독일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일을 이어 갔다.
계속 번역했다.
마흔이 넘어서 시작해 여든이 넘도록.
왜 여기서 번역에 관해 이렇게 오래 이야기할까.
번역 자체가 ‘타인에게 자리를 남기는 일’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에는 습관과 리듬이 있고,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번역자를 두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필요가 있다. 독자가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 동시에 원문이 독자가 이미 아는 것만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낯선 부분을 모두 매끈하게 다듬으면 잘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세계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다.
모든 문장을 어색하게 만든다고 충실함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 진열장 너머로 외국의 표본을 구경할 수 있다. 그때도 ‘너’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어려운 것은 독자가 들어갈 수 있는 언어로 쓰면서도, 원문이 독자를 바꾸는 힘을 남겨 두는 일이다.
부버가 다시 쓴 하시디즘 이야기에는 상당한 문학적 재구성이 들어 있다. 로젠츠바이크와의 성서 작업에서는 원문 단어들의 울림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결코 자국화하지 않는다’는 규칙 하나로 두 작업을 똑같이 만들 수는 없다. 둘 다 선택을 포함하며, 둘 다 검토와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나–너’가 언어의 작업으로 뻗어 갈 수 있는 한 방향이지, 모든 번역의 좋고 나쁨을 자동으로 판단하는 공식이 아니다.
하나의 언어는 다른 언어에게 ‘너’다. ‘그것’으로 대할 수도 있다. 정보를 추출하는 대상으로. 또는 ‘너’로 대할 수 있다. 그를 위해 내 언어가 조금 달라질 가치가 있는 존재로.
자리를 남기는 일은 때로 단어 하나를 너무 쉽게 바꾸어 버리지 않는 데 달려 있다.
육. 예루살렘
1938년. 부버는 예순 살이었다.
독일을 떠났다.
나치가 1933년에 집권한 뒤에도 그는 몇 년 동안 독일에 남아 유대인 성인교육에 힘썼다. 배제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배우고 이야기할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인 일이었다.
그가 떠난 것은 1938년 3월이었다. 그해 11월의 박해, 이른바 수정의 밤보다 앞선 때였다.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삶의 장소가 바뀌었다고 질문까지 저절로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히브리대학교가 그를 사회철학 교수로 초빙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히브리어를 접했다. 예순 살에 처음 배운 언어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청중을 앞에 두고 가르치는 일은 삶을 다시 자리 잡게 하는 일이었다. 1951년에 은퇴할 때까지 가르쳤다.
그 도시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있었다.
대학의 유다 마그네스는 중요한 지향을 그와 함께했다. 두 사람 앞에 있는 것은 추상적인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같은 땅에 사는 두 민족의 삶과 두려움, 정치적 요구였다.
1920년대부터 브리트 샬롬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이해를 위해 일해 왔다. 부버도 오랫동안 그 방향에 가까이 있었다.
브리트 샬롬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계약’이라는 뜻이다.
1925년에 만들어진 이 단체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지 않는 정치적 질서를 찾았다. 1942년에는 부버와 마그네스 등이 이후드 설립에 참여해, 두 민족의 협력과 평등을 위한 작업을 이어 갔다.
그 제안들은 주류가 되지 못했다. 땅과 안전, 민족자결과 실제 권력은 ‘대화하자’는 말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다. 부버는 바로 자기 철학을 가장 실현하기 어려운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이 소수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쓰고, 말하고, 조직하는 일에 참여했다. 자기편의 정치적 목적 아래 상대편의 삶이 완전히 묻히지 않도록 하려 했다. 그렇다고 그의 언어와 구상이 비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화가 정말로 상대의 말을 들었는가는 상대 역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1948년.
전쟁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을 선언했다.
그 이전의 부버는 유대인의 고향을 바라는 열망을 곧바로 배타적인 민족 주권국가로 실현하는 데 반대했고, 두 민족이 함께하는 정치적 구성을 지지했다. 이스라엘 수립 뒤에는 국가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서도 아랍인에 대한 지배와 배제 정책을 계속 비판했다. 고향을 지지하는 일, 특정한 국가 수립 방식에 반대하는 일, 이미 생긴 국가에 응답하는 일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한 민족은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줄여 버리면서 자신을 세워서는 안 된다. 그의 정치적 작업에서 읽을 수 있는 요구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이후드와 다른 공간을 통해 계속 발언했고, 아랍인이 처한 상황에 항의하며 요구를 제기했다. 단체는 작았다. 글, 회의, 공개 호소. 그 힘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에게 정치권력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말하고, 쓰고, 서명했다.
그의 작업은 정부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알았다. 그래도 계속했다.
왜였을까.
평생 ‘나–너’를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나–너’를 진지하게 말한다면 자기 민족 바깥에 있는 ‘너’를 예외로 둘 수 없다. 자기편에게는 ‘나–너’를 말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나–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만남의 철학이 아니라 자기 민족에게만 봉사하는 철학이 된다.
그의 사상은 그 자신도 시험했다.
정치적으로 타자인 사람에게도 ‘나–너’를 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만들 힘을 얻었을 때, 자기 민족을 향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을 장애물로만 다루는 제도는 자기 공동생활도 손상시킨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얼굴 없는 집단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 그 안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사람, 서로 다른 판단과 행동이 있다. 부버의 작업은 그런 구체적인 차이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끝까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965년 6월 13일,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든일곱 살이었다.
완성된 두 민족의 평화를 남긴 것은 아니었다.
실패해도 거두지 않은 요구를 남겼다. 우리 맞은편의 삶도 중요하게 헤아려져야 한다.
칠. 부버와 레비나스
부버와 레비나스를 나란히 놓으면 같은 철학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두 사람은 실제로 사상적 교류를 했다. 레비나스가 논평을 썼고, 부버가 답했으며, 편지도 오갔다. 그 글들만으로도 우리는 둘 사이의 이견을 들을 수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레비나스는 부버에게 깊이 배웠지만, 존경을 표현한 다음 질문을 멈추려 하지는 않았다.
사상가를 존중한다는 것은 때로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당신과 같은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두 철학은 같지 않았다.
부버는 상호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나는 너를 향해 열린다. 너는 내가 한쪽에서 들여다보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상호성이 모든 면에서의 대칭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교육과 치료에 관한 논의에서 부버도 양쪽이 서로 다른 자리에 있음을 인정한다.
레비나스는 책임의 비대칭성을 앞에 놓는다. 내가 너에게 응답하는 일이 네가 먼저 동등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요구는 두 사람이 협상한 뒤에야 효력이 생기는 약속이 아니다.
그는 만남을 교환으로 이해하면, 타인이 먼저 내게 던지는 물음을 잃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부버의 상호성 역시 ‘네가 준 만큼만 돌려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거래로 바꾸면 그의 ‘나–너’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일상의 질문 하나로 차이를 들을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여전히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레비나스는 ‘여전히 빚진 것’에 큰 무게를 싣는다. 부버는 상대가 단지 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일깨운다. 그도 내게 말하고, 나를 바꿀 수 있다.
한 번의 논쟁에서 누가 누구를 설득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부버는 관계의 양쪽을 모두 지키려 한다. 레비나스는 나의 자기충족이 다시 중심에 들어앉지 못하게 한다. 두 질문을 먼저 들은 뒤 그 충돌을 살펴야 한다. 부버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레비나스의 초판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설득해 버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어느 한 사람의 질문을 책상에서 치울 필요는 없다.
철학이 달랐다. 언어가 달랐다. 강조점이 달랐다. 둘 다 타인을 말했지만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부버는 만남의 순간에 있는 ‘너’를 말했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명령 속의 타인을 말했다.
타인에 관해 말하는 두 가지 방식.
두 사람을 읽으면 각자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을 함께 볼 수 있다.
상호적인 응답만 강조하면, 응답할 수 없는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다. 나의 무한한 책임만 강조하면, 책임지는 사람 자신도 삼켜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어느 어려움도 아름다운 한 문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두 사람을 함께 읽으면 이 두 어려움을 동시에 남겨 둘 수 있다.
그래서 앞의 글에서는 레비나스를, 이 글에서는 부버를 다룬다. 두 철학을 합쳐 마침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답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보이지 않던 부분을 다른 사람의 질문이 비출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타인을 이야기하는 이 악장은 타인에 관한 서로 다른 철학에도 자리를 남겨야 한다. 같은 곳에 있는 일이 같은 말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버의 타인은 만남 속의 ‘너’다. 레비나스의 타인은 응답을 명하는 얼굴이다.
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타인을 만날 것이다. 그다음 글에서는 다시 다른 타인을.
어느 하나도 인간의 관계를 다 말하지 못한다. 함께 읽은 뒤에도 다 말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에는 아직 답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다.
칸트의 목적의 왕국, 부버의 영원한 ‘너’, 레비나스의 무한은 각각 고유한 철학적·종교적 자리에 있다. 서로 바꾸어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연작의 다리는 ‘타인을 써서 소진시키지 않는 것’이라는 질문 주위에서 서로를 비추게 할 수 있다.
다른 언어들. 가까이 놓인 관심들. 사라지지 않은 거리.
팔. 다리 위에서
상상 속의 다리로 돌아가자. 부버가 노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여든이 넘은 모습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다. 회백색의 긴 수염이 턱 아래로 몇 인치 드리워져 있었다. 눈은 크고 온화했다. 어두운 색의 긴 옷을 입었다. 양복도 하시디즘의 복장도 아닌, 그만의 차림이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안정된 걸음이었다.
다리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히파티아가 거기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아스트롤라베를 들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빈손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서 있었다. 베르그송은 지팡이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나스도 한가운데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책장 사이에서 끝나지 않은 질문들도 함께 이곳으로 왔다.
“지난번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레비나스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이번에는 서로의 말을 조금 더 잘 들을 수 있겠지요.” 부버가 독일어로 답했다.
두 사람이 웃었다.
곧바로 다가서서 긴 대화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각자 선 자리에서 상대도 거기 있음을 알았다. 차이가 먼저 사라져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리 저 먼 끝에는 칸트가 서 있었다. 그날 밤의 칸트는 전보다 조금 더 선명했다. 옷의 색깔이 보였다. 여전히 이쪽으로 오지는 않았다.
다리 바깥의 그 길 위로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번개가 쳤다.
아직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먼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의 교수 가운을 입은 남자, 하이데거는 지난번보다 더 멀리 가 있었다. 계속 걷고 있었다. 더 이상 다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버는 그 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세월을 생각했다. 강의와 글과 회의. 거듭거듭 들리게 하려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에게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집이 집으로 헤아려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또한 현실이 바라는 대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고 살아야 했다.
막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길 위로 폭풍우가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패해도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길은 각자 마음대로 선택해도 그만인 사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 위에서 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떨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응답을 멈출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히파티아의 손에 들린 아스트롤라베가 바람 속에서 달빛을 반사했다. 달빛은 부드러웠다.
히파티아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아닌 독일어였다. 히파티아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말투에서 다정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미소 지었다.
건너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작은 목소리로 라틴어 한마디를 했다. 베르그송이 알아듣고 부버에게 프랑스어로 옮겨 주었다. 부버도 웃었다.
히파티아, 토마스 아퀴나스, 베르그송, 레비나스, 부버. 다섯 이름이었다. 그러나 다리 한가운데에는 다섯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넓게 펼쳐진 사람들의 모습. 방정식을 쓰는 사람, 옥수수를 살피는 사람, 시를 쓰는 사람, 별 지도를 읽는 사람, 소설을 쓰는 사람, 설계도를 그리는 사람.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메모하는 사람도 있었고, 앉아서 멍하니 먼 곳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곁 사람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언어가 달랐다. 시대가 달랐다. 구체적으로 한 일이 달랐다. 그러나 모두 같은 성격의 일을 했다. 자신의 시대에서 타인에게 자리를 남겼다.
다리 바깥, 폭풍우 치는 길 위에서 하이데거는 점점 멀어졌다. 다리의 먼 끝, 칸트가 있는 곳에서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다리 한가운데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달빛이 온화했다.
다리의 가장 먼 끝에서 늘 먼 곳을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히파티아를 보았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았고, 베르그송을 보았고, 레비나스를 보았다.
이번에는 부버를 보았다.
부버가 고개를 들었다. 늘 먼 곳을 보던 그 사람과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부버가 웃었다. 감사의 웃음은 아니었다.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라는 웃음이었다.
그 사람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부버는 다리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여든일곱 살에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나와 너』를 썼고, 하시디즘 이야기를 전했고, 성서를 번역했고, 자신의 도시에서 다른 민족을 위해 자리를 남겼다.
그의 일은 유한했다. 그가 만남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너’를 앞에 남겨 두었고, 마지막 말을 독차지하지 않았다.
읽기 안내와 출처
어린 시절은 『만남』의 어머니 회상 등을 따른다. 발코니의 Vergegnung은 어긋난 만남이다. 하시디즘 이야기는 부버의 선택과 재서술을 거쳤으며 모셰 레이브 이야기에서 대화하는 이들은 두 농민이다.
성서 공동 번역은 1925년 시작, 1961년 완성, 개정 전집은 1962년까지 출간됐다. 이주는 1938년 봄, 이후드 결성은 1942년이다. 레비나스와의 비교는 서면 논의를 따르며 확인되지 않은 1958년 회담을 설정하지 않는다.
다리와 갈림길, 날씨, 시대를 넘는 만남과 대화는 전기 기록이 아닌 문학적 상상이다. 인물 비교는 저자의 읽기다. 가까운 질문이 같은 학설을 뜻하지 않으며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행위에 대한 판단을 취소하지는 않는다.
Martin Buber-Gesellschaft — chronology ·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 Martin Buber · Buber — Meetings, publisher preview · Research on Buber’s childhood recollection and Vergegnung · Buber — I and Thou · Martin Buber — scholarship and bibliography · Deutsche Biographie — Buber and Ihud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