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원문 판본 안내: 이 글의 바탕인 중국어 원문은 한 페이지에서 간체와 번체를 전환할 수 있다. 원문의 판본 안내에는 환자의 도착 순서, 511 킨더하임의 폭력적 성격, 쌍둥이의 기억, 루엔하임에서 이루어진 수술의 장소 등에 관한 사실과 표현을 수정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시리즈 전체의 내용을 밝힌다.
하이델베르크의 평범한 집 한 채.
법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스무 번째 생일을 맞는다. 부모가 있고, 케이크가 있고, 선물이 있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기록할 가치가 없을 만큼 평범한 날이다.
이름은 니나 폴트너. 법학과 학생이고, 성적이 좋으며, 친구도 있고, 농담도 할 줄 안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낄 만한 구석은 전혀 없다.
이날 이전까지 그녀의 삶에는 설명이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같은 날, 다른 한 사람도 스무 살이 된다.
이번 글은 이 두 사람 사이의 같음과 다름을 다룬다.
같은 것들
우선 같은 부분부터 모두 늘어놓자. 그 목록은 대개 생각하는 것보다 길다.
같은 부모. 같은 도피. 빨간 장미 저택과 낭독회, 그림책이 엮어낸 같은 세계. 아이들을 계획에 끌어들인 같은 어른들.
같은 밤. 어머니가 두 아이 가운데 하나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은 그 밤.
같은 총격. 같은 병원. 같은 수술대를 두고 한 아이는 그 위에 누워 있고, 한 아이는 문밖에 서 있다.
그 뒤에는 두 사람의 생활 조건이 한층 더 갈라진다.
이 목록은 너무 길어서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이 끼어들 자리조차 없어 보이게 한다.
우리는 보통 두 사람의 차이를 그들이 서로 다른 부분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잇는 것들은 한 사람의 출발점 거의 전부에 닿는다. 유전적 친연성, 부모, 출생지, 함께 보낸 어린 시절, 그 책, 그 방, 그날 밤. 그러나 같은 곳에서 왔다고 해서 똑같은 일들을 모두 직접 겪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것들
폴트너 부부가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부부는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어디서 왔는지, 빨간 장미 저택이 무엇인지, 511이 무엇인지,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 오빠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아이를 키웠다.
작품은 이 대목에서 매우 절제된 선택을 한다. 폴트너 부부에게는 특별한 점이 없다. 심리 전문가도, 성인군자도 아니며, 아이에게 치료가 필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꿰뚫어 보지도 않았다. 어느 양부모나 할 법한 일을 했다. 밥을 짓고,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생일을 챙기고,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 걱정했다.
그러니까 아이를 고쳐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는 드문 일이다. 앞선 글들에 등장한 어른들은 모두 아이를 대할 때 손에 설계도를 쥐고 있었다. 511에는 사양서가 있고, 보나파르타에게는 목적이 있으며, 페트로프에게는 ‘아이에게 사랑 주기’조차 다음번 실험이다.
폴트너 부부의 손에는 설계도가 없다. 아이를 무엇으로 키워야 할지 몰랐기에 그쪽으로 한 번도 힘을 가한 적이 없다.
그들이 잘한 일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줄도 모른 일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의 방법으로 복제할 수는 없다. 작품은 여기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를 추출할 수 없다. 폴트너 부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전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아이를 다루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를 다룬다는 것은 되돌아가는 일이다.
택하지 말아야 할 서술
여기에는 아주 손쉬운 서술법이 있다. 하지만 작품이 쓰지 않았으므로 이 연작도 쓰지 않겠다.
오빠는 실험실로 보내지고 여동생은 가정으로 보내졌기에 하나는 괴물이 되고 하나는 정상인이 되었다. 사랑이 그녀를 구했다. 그런 서술이다.
작품은 이 설명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작품 자신이 내놓는 재료 때문이다.
니나는 오랜 시간 무너져 있다.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뒤 그녀는 통째로 흩어진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한다. 실제로 행동에 옮겼고, 방아쇠도 당겼다. 여러 자리에서 그녀가 한 행동의 모양은 오빠가 하는 일에 매우 가깝다.
요한을 죽여야 하는지를 두고도 몇 번이고 오간다.
죽이겠다고 결심할 때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도 있다. 자신도 분명히 말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한 번은 구하러 가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작품은 이런 순간들을 시간순으로 놓는다. ‘점점 성숙해지는’ 순서로 배열하지 않는다. 뒤의 결정이 앞의 결정보다 어떤 정답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니다. 단지 더 나중일 뿐이다.
오빠와 니나에게 무슨 차이가 생겼는지 꼭 말해야 한다면, 작품이 내놓는 것은 하나다. 니나 곁에는 줄곧 구체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폴트너 부부. 대학 친구들. 나중에 길에서 만난 텐마와 디터, 그리고 온갖 다른 사람들.
그중 누구도 니나를 구원하기 위해 등장하지 않았다. 나타난 이유는 제각각이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은 이야기 안에서 불안정하고,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며, 니나 자신이 거듭 돌아가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이다. 보호막이 아니다. 우연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누구의 기억인가
여기에는 다른 층위가 하나 더 있다. 작품은 나중에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그것으로 두 사람을 대신해 이해까지 완성해주지는 않는다.
빨간 장미 저택의 참극을 본 사람은 니나다. 요한은 그 자리에 없었다.
돌아온 니나는 자신이 본 일을 요한에게 이야기했다. 요한은 나중에 그 이야기를 자신의 체험으로 받아들였고, 니나는 한동안 자기 기억을 확실히 붙잡지 못했다. 두 아이의 기억은 분명 얽혀 있다. 하지만 그곳에 갔던 아이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분명히 밝혀진다.
끌려간 아이가 누구인지는 확인된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왜 그 아이를 내주었는지, 그때 두 아이를 제대로 구별했는지까지 똑같이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빠진 사실 하나만 찾으면 묶을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다. 작품은 사실을 되돌려주면서도 거리를 남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과 그 일이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는 것 사이에는 아직 길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체험을, 인간에 관한 자기 결론의 토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참극을 겪었는지 알아도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누가 상대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까지 저절로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니 마침내 그 경험이 누구의 것인지 구별하게 되더라도, 그것만으로 상대에게 ‘이제 네가 겪은 일을 전부 알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두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동시에 가장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요한은 자신의 경험을 확신하며, 거기서 인간에 관한 결론을 얻는다. 그의 행동은 그 확신에 기대고 있다. 작품은 그 토대의 일부가 사실은 여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였음을 그가 깨닫게 한다. 그 결론을 더는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에서 곧바로 나온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사실은 밝혀진다. 그렇다고 토대가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디터
한 사람을 더 말해야겠다. 이 작품에서 다른 방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그려지는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디터는 텐마가 길에서 만난 아이다. 양아버지에게 학대받고 있었다. 텐마는 아이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온다.
그리고 보기 드문 일을 한다. 아이에게 무엇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터를 조수로 키우지 않는다. 증인으로 키우지도 않는다. ‘누가 자신을 구해줬는지 잊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데리고 도망 다니며 먹이고 재운다. 무서워할 때 곁에 있어준다. 그리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오면 안전한 곳에 맡긴다.
그 뒤 디터가 무엇을 하는지는 디터 자신이 결정한다.
이 방식은 앞선 글들에 등장한 모든 방식과 다르다.
511에는 사양서가 있다. 보나파르타에게는 목적이 있다. 페트로프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조차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 제품을 얻기 위해서다. 아이에게 주는 것은 제각각이지만, 줄 때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모두 어떤 결과물에 대한 기대다.
텐마가 디터에게 주는 것에는 그런 기대가 없다. 아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른다. 알아낼 생각도 없다.
작품은 여기에 아무 주석도 붙이지 않는다. 누군가를 내세워 ‘봐, 이게 옳은 방식이야’라고 말하게 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 길에서 아이를 데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길을 가다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무 살이 된 날의 두 사람
처음으로 돌아가자.
하이델베르크의 그 집에서는 여자아이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는다. 부모가 있고, 케이크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또 한 사람이 스무 번째 생일을 맞는다. 그에게는 그림책에서 온 이름, 자신이 직접 겪었다고 여기는 여동생의 기억, 모든 것을 지워버릴 계획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같은 역사에 휘말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완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지는 않았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을 한 책 안에 두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밀어붙인다. 이름을 나란히 놓고, 기억을 뒤섞는다. 얼굴도 똑같다. 각자의 곁에 있는 사람들조차 잘못 알아볼 정도다.
그 결과 독자는 둘 중 하나를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취급할 수 없게 된다.
둘을 다른 곳으로 이끈 것은 무엇일까? 그 가정인가, 운인가, 그날 밤 어머니의 행동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작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답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매번 흘려보낸다.
한 번은 거의 답할 뻔했다. 이야기 후반에 누군가 니나에게 오빠가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완결된 설명이고, 듣기에도 무척 그럴듯하다.
그러고 나면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이 그 설명의 일부를 뒤엎는다.
작품은 계속 이렇게 한다. 설명을 하나 내놓고, 재료를 하나 보태 그 설명으로는 부족하게 만든 뒤, 또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마지막에 독자의 손에는 절반씩만 맞는 설명이 여럿 쥐어져 있다. 전부를 덮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지막 만남은 루엔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텐마가 요한 앞에 선다. 손에는 총이 있다. 작품 전체에 걸쳐 그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그가 내리는 결정은 1986년 그날 밤의 결정과 같다.
다음 글에서 계속한다.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 1994~2001년 쇼가쿠칸의 『빅 코믹 오리지널』에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은 전 18권이다. 이 연작은 원작 만화를 기준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