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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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문화 · 『귀멸의 칼날』
전체 5편 중 2편

저마다 다른 추락

한 남자가 도장 한가운데 서 있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다. 스승과 약혼녀를 죽인 자들을 거의 모두 맨손으로 때려죽인 참이다.

Aug 25, 2026 · Han Qin (秦汉)
스포일러 주의: 원작 만화 전 23권의 인물 배경, 주요 전투와 결말을 다룹니다.

스포일러 안내: 원작 만화 전체를 다루며, 인물들의 과거와 주요 전투, 결말을 포함한다.

한 남자가 도장 한가운데 서 있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다. 스승과 약혼녀를 죽인 자들을 거의 모두 맨손으로 때려죽인 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중병에 걸린 아버지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하려고 거듭 도둑질을 했다. 매를 맞았고, 팔에는 죄인을 표시하는 문신이 새겨졌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더는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에도에서 쫓겨났고, 싸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그를 도장 주인 케이조가 거두어 주었다.

케이조는 병약한 딸 코유키를 돌보게 하고, 소류 무술을 가르쳤다. 세 사람은 작은 가족이 되었다. 소년은 더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싸우지 않았다. 마침내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이후 케이조는 딸과의 혼인을 허락했고, 소년은 도장도 물려받기로 했다.

그가 아버지의 묘를 찾아 자리를 비운 사이, 이웃 검술 도장의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케이조와 코유키는 모두 죽었다. 소년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는 상대 도장으로 쳐들어가 그곳 사람들을 거의 다 죽였다. 키부츠지 무잔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에게는 인간으로 살아갈 이유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잔은 그의 몸에 자기 피를 주입했고, 그렇게 또 하나의 폐허를 자신의 체계 안으로 거두어들였다.

그의 이름은 하쿠지였다. 혈귀가 된 뒤에는 아카자라 불렸다. 십이귀월 상현 3이다.

괴물이 아니라 폐허

《귀멸의 칼날》의 혈귀는 태어날 때부터 혈귀였던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혈귀가 되기 전에는 인간이었다.

소년 만화에서 드문 설정은 아니다. 악역에게 비극적인 과거를 부여해 깊이를 더하는 작품은 많다. 하지만 고토게 코요하루가 하는 일은 ‘악역에게 슬픈 사연을 붙이는 것’보다 훨씬 깊다. 상현들의 추락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구조를 가리킨다. 본래 악해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인간’으로 지탱하던 관계가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 폐허에서 무잔의 체계는 그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틀이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이에게 혈귀가 되는 일은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추락에 가깝다. 발밑의 땅이 모두 사라졌는데, 심연을 여유롭게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달리 발을 디딜 곳이 없었을 뿐이다.

상현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락한다. 각각의 추락에는 서로 다른 관계의 붕괴가 있다.

지키려는 마음이 집착이 된 아카자

아카자의 이야기는 《귀멸의 칼날》에서 가장 완결된 비극의 궤적을 그린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다. 곁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 어린 시절 그는 아픈 아버지에게 약을 사 주려고 거듭 도둑질했고, 붙잡힐 때마다 팔에 죄인의 표식이 새겨졌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나 때문에 아들이 범죄자가 되게 할 수는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상실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상실이다.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의 보호를 받지 않으려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도장 주인 케이조가 그를 거두고 무술을 가르쳤다. 그는 스승의 병든 딸 코유키를 돌보았다. 마침내 지킬 사람이 생겼고, 실제로 그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독살 사건은 그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충분히 강했다. 다만 그 자리에 없었다. 힘이 부족해서 세계가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어서 무너졌다. 그러니 힘은 소용이 없었다.

이 경험은 한 사람을 파괴한다. 아무리 강해져도 소중한 사람을 백 퍼센트 지켜 낼 수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를 오직 ‘지키는 일’에 걸었던 사람에게, 그것은 네 존재에는 의미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무잔이 나타나 혈귀의 힘을 주었다. 끝없이 강해질 수 있는 힘이었다. 그 힘을 얻은 아카자는 혈귀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인간 시절의 기억을 잃었다. 코유키도, 스승도, 자신이 왜 강해지려 했는지도 잊었다.

남은 것은 ‘강해져야 한다’는 충동뿐이었다. 이유도 대상도 관계도 모두 떨어져 나간, 순수한 강함의 추구.

아카자는 상현 3으로 기나긴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끊임없이 강자를 찾고, 싸우고, 상대에게 더 강해지라고 요구했다. 정작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는 목적 없는 힘의 기계가 되었다. 한때 누군가를 지키던 사람이 오직 파괴만 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마지막 싸움에서 탄지로에게 패하고 소멸을 앞두어서야 기억이 돌아왔다. 코유키의 얼굴이 보였다.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한때 자신은 그저 누군가를 지켜 주고 싶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결국 아카자는 탄지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기억이 돌아온 순간, 그 오랜 세월 해 온 모든 일이 코유키와 스승에 대한 배신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 하쿠지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잔이 강요하는 재생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라졌다.

소멸의 마지막 순간, 저승에서 아버지와 스승, 코유키를 만났다. 코유키가 그를 안아 주었다. 오랜 세월 길을 잃었던 하쿠지는 마침내 혼자 계속 나아가기를 멈추고, 그녀와 함께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규타로와 다키를 가둔 유일한 관계

상현 6은 남매다. 규타로와 다키. 이들의 이야기는 《귀멸의 칼날》에서 손꼽히게 가슴 아픈 대목이다.

규타로는 유곽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못생기고 더럽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혐오를 받았다. 친어머니조차 여러 번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런 환경에서 그가 가진 것은 여동생 우메 하나뿐이었다.

우메는 오빠와 달리 아주 아름다웠다. 규타로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졌다’고 느낀 것도 동생 덕분이었다. 나에게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이 있구나. 그는 모든 감정과 자기 가치를 동생에게 걸었다. 우메는 이 세상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나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던 어느 날, 우메는 무사의 눈을 찔렀다는 이유로 산 채로 불태워져 죽어 가게 되었다. 규타로는 까맣게 탄 동생을 안고 눈밭을 걸었다. 한 혈귀가 그들을 발견해 혈귀로 만들 때까지.

혈귀가 된 뒤에도 남매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더 절대적으로 묶어 놓는 결속이 되었다. 우메의 혈귀 이름인 다키가 싸움에서 밀리면, 규타로가 그녀의 몸속에서 나온다. 둘은 생사를 공유한다. 동시에 목을 베어야만 죽일 수 있다.

이 설정은 단순한 전투 규칙이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히 비추는 은유다. 이제 그들은 독립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규타로의 정체성은 온통 ‘동생의 오빠’이고, 다키의 정체성은 온통 ‘오빠의 동생’이다. 인간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은 마지막 남은 관계 하나를 악착같이 움켜쥔다. 너무 세게 붙든 나머지, 그 관계 자체가 감옥이 될 때까지.

목이 잘리고 사라져 가는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은 말을 나눈다. 다키는 죽기 싫다며 운다. 규타로는 자신이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다른 오빠를 만났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키의 대답은 단호하다. 다른 오빠는 싫다고. 다음 생에도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날 거라고.

그리고 지옥의 입구에서 규타로는 다키를 업고 한 걸음씩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어릴 적, 유곽의 더러운 골목을 오빠가 동생을 업고 걷던 모습 그대로다.

이 관계에 문제가 없는가. 있다. 규타로는 동생을 자기 존재의 의미로 삼았고, 다키는 오빠의 보호 아래서 혼자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달리 아무것도 내준 적 없는 세상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환을 붙잡는 자세가 틀렸다고 나무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들은 가진 것이라곤 서로밖에 없는 상태로, 온통 적의뿐인 환경에서 살아남았다. 그 사실 자체에 어떤 존엄이 있다.

천재에게 무너진 형 코쿠시보

상현 1 코쿠시보, 인간 시절 이름으로는 츠기쿠니 미치카츠. 그의 이야기는 어쩌면 작품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무서운 비극이다.

그는 츠기쿠니 요리이치의 형이다. 전국시대의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장남 미치카츠에게는 큰 기대가 쏠렸다. 반면 동생 요리이치는 어려서부터 쓸모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다. 말이 없고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아 비좁은 방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치카츠는 동생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요리이치가 별생각 없이 한 번 휘두른 검은 형이 수년을 수련해 쌓아 올린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조금 앞서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차원이 달랐다.

그 순간 미치카츠의 세계가 무너졌다. ‘나는 가문의 희망이다’, ‘내가 가장 뛰어나다’라는 자기 인식 전부가 하룻밤 사이에 거짓말이 되었다. 그 거짓을 드러낸 사람은 남도 아니었다. 친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얕보던 아이였다.

이후 요리이치는 집을 떠나 해의 호흡을 만들었고, 귀살대 역사상 가장 강한 검사가 되었다. 미치카츠도 귀살대에 들어가 달의 호흡을 쓰는 최정상급 검사가 되었다. 하지만 ‘정상급’과 ‘최강’은 다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동생과의 거리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벌어졌다.

이 경험이 파괴적인 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지면 ‘운이 좋았겠지’, ‘다음에는 내가 이길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쌍둥이 동생이라면? 유전자도 성장 환경도 공유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댈 핑계가 없다. 노력의 차이도, 기회의 차이도 아닌, 너와 나 자체의 차이로 느껴진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부정이다. 너는 안 된다. 덜 노력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이 충분히 뛰어나지 않아서.

마침내 미치카츠는 혈귀가 되어 코쿠시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유는 하나였다. 혈귀의 몸에는 인간 육체의 한계가 없으니 끝없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 그는 수백 년을 수련해 상현 1이 되었고, 무잔 바로 아래의 최강 혈귀로 올라섰다.

하지만 끝에 이르러 귀살대에게 패하고 몸이 무너지려는 순간, 그는 자신이 어떤 얼굴이 되었는지 마주한다. 무잔처럼 흉측해진 얼굴이다. 그때 문득 처음 품었던 소원이 떠오른다. 나는 그저 동생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동생 같은 사람이 되려고, 동생과 가장 닮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미치카츠가 추구한 것은 힘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힘은 ‘힘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리이치가 강한 이유는 그의 검에 집착도 자아도,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충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반대로 미치카츠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거기에는 ‘동생을 넘어서겠다’는 집착이 실렸다. 그 집착 자체가 동생의 경지에 끝내 다다르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다.

코쿠시보의 비극은 ‘재능이 부족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 문제가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오직 ‘비교’로 규정되고, 상대를 넘어서야만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시작점부터 독에 물든다. 그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잃을 관계조차 없던 혈귀 도우마

상현 2 도우마는 상현들 가운데 가장 특이하다. 가장 강해서가 아니라, 가장 텅 비어 있어서다.

도우마는 어려서부터 ‘신의 아이’로 떠받들어졌다. 아름다운 외모와 무지갯빛 눈을 보고 신도들은 신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었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수많은 사람이 그의 앞에서 울고, 기도하고,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청했다.

문제는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없었다. 신도들이 우는 모습을 봐도 연민이나 혐오가 생기지 않았다. 오직 의아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괴로워할까? 죽으면 끝인데, 슬퍼해서 무슨 소용일까?

아버지는 교단의 교주였다.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 남편을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피로 뒤덮인 바닥을 본 어린 도우마가 느낀 것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피를 치우기 번거롭겠네. 방이 너무 지저분해졌네.

도우마가 다른 상현과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아카자와 규타로, 코쿠시보에게는 한때 진짜 관계가 있었고, 이후 그것을 잃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추락한 것이다. 도우마는 처음부터 ‘없음’이었다. 누군가와 진실한 감정으로 이어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혈귀가 되어 상현 2에 오른 뒤에도 그는 만물이 공허하다고 가르치는 교단을 유지했다. 여전히 신도들을 ‘구원’했고, 그 방법은 잡아먹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에서는 그것조차 자비였다. 그렇게 괴로우면 내가 먹어 주겠다. 그러면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테고, 내 일부가 되어 영원히 ‘신’과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도우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충주 코쵸우 시노부다. 도우마에게 언니를 잃은 그녀는 오랜 시간 몸속에 등꽃 독을 축적했다. 스스로 그에게 먹히고, 자기 몸을 독의 운반체로 삼아 그를 약화시켰다. 카나오와 이노스케가 싸움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독 덕분이었다.

도우마가 사라지려는 순간,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시노부를 향해 어떤 감정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도우마도 확신하지 못한다. 호감일까? 호기심일까? 아니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인 것일까? 저승에서 시노부를 마주한 그는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가슴 두근거림이냐고 묻는다.

시노부는 뒤늦게 찾아온 그 ‘설렘’을 받아 주지 않는다. 그저 그를 지옥으로 보낸다.

도우마는 이 작품이 그린 ‘관계 없음’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다. 아카자는 관계를 잃어서 고통스러웠다. 규타로는 관계가 감옥이 되어서 뒤틀렸다. 코쿠시보는 질투가 관계를 오염시켜 무너졌다. 그래도 그들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았다. 도우마는 한 번도 알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인간 세상에 태어난 적조차 없는 사람이다. 몸은 여기 있었지만, 그를 이루어야 할 무언가는 처음부터 없었다.

같은 입구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문

상현들의 삶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무잔의 체계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 세상과 자신을 잇던 마지막 선이 그때 끊어진 것이다.

아카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었다. 규타로와 다키는 애초에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코쿠시보는 끝내 메울 수 없는 격차에 짓눌렸다. 도우마에게는 처음부터 그 선이 연결된 적이 없었다.

무잔의 체계가 그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멋진 무언가를 약속해서가 아니다. 삶의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을 ‘원한다’고 말해 주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을 죽인 무술가, 사회가 버린 남매, 질투에 먹힌 무사, 감정을 느껴 본 적 없는 교주. 인간 세상에는 더 이상 그들의 자리가 없었다.

이것이 무잔의 체계가 작동하는 진짜 방식이다. 설득할 필요조차 없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한 사람이 세상에 짓밟힐 때까지. 모든 관계와 연결을 잃을 때까지. 폐허 한가운데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리고 다가가 말한다. “와라. 내가 힘을 주겠다.”

세상은 사람을 부수고, 무잔은 그 조각을 주워 담는다.

이 논리가 섬뜩한 것은 현실에서도 통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소모하며 유지되는 체계라면, 극단주의 조직이든 사이비 종교든 겉보기에는 합법적인 어떤 기관이든,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들이 찾는 것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외로운 사람, 절망한 사람, 세상과의 연결을 잃은 사람이다.

혈귀가 관계의 붕괴에서 태어난다면, 그에 맞서는 힘인 귀살대의 주들은 어떤 관계 위에 서 있을까? 서른도 살지 못하는 병약한 청년이 어떻게 가장 강한 전사들을 기꺼이 자신을 위해 죽음으로 향하게 하는가?

다음 글에서는 우부야시키와 주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귀멸의 칼날》은 고토게 코요하루의 만화로, 전 23권으로 완결되었다. 애니메이션은 ufotable이 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