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안내: 원작 만화 전체를 다루며, 인물들의 과거와 주요 전투, 결말을 포함한다.
귀살대의 수장 우부야시키 카가야가 렌고쿠 쿄쥬로를 처음 만났을 때, 렌고쿠는 아직 소년이었다.
당시 아버지이자 전 염주인 신쥬로는 아내의 이른 죽음과 호흡법의 계승에 대한 절망으로 오래도록 술에 빠져 있었다. 의욕을 잃고 세상사에 등을 돌렸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동생은 어렸다. 아버지가 가르치기를 그만둔 뒤, 렌고쿠는 주로 집에 남아 있던 염주 지침서를 보며 혼자 검술을 익혔다.
우부야시키는 몸이 몹시 쇠약했다. 두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늘 병상에 누워 지냈다. 서른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귀살대는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대원들의 평균 수명은 매우 짧았고, 맞서야 할 적은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할 만큼 강했다.
이런 사람과 그 휘하의 주들은 어떤 관계일까?
임금과 신하도, 상관과 부하도, 장수와 병사도 아니다. 우부야시키는 모든 주를 ‘내 아이들’이라 부른다. 일본에서 가장 강한 검사들이 그의 앞에서는 정말로 아이처럼 변한다. 거친 이는 조용해지고, 자존심 강한 이는 고개를 숙인다.
그에게 권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들 곁에 서 있기 때문이다.
상식과 반대로 가는 지도자
우부야시키 카가야에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도자의 자산’이 거의 없다.
싸울 수 없다. 병이 깊어진 뒤에는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약하다. 정치적 권력도 없다. 귀살대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조직이 아니다. 돈으로 유혹할 수도 없다. 주들이 귀살대에 들어온 이유는 돈이 아니다. 심지어 승리조차 약속할 수 없다. 많은 주가 상현과 싸우다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막을 수 없다.
싸우지도 못하고, 돈을 내세우지도 못하고,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수장에게 왜 최강자들이 온 마음을 바칠까?
답은 작은 일 하나에 담겨 있다. 우부야시키는 죽은 귀살대원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주의 이름만이 아니다. 평범한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한다. 길이 얼마나 멀든, 몸 상태가 얼마나 나쁘든, 전사한 대원들의 무덤을 찾아가 참배한다.
기억력이 좋다거나 조직 운영에 능숙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행동이 전하는 뜻은 이것이다. 내게 너는 다른 사람으로 갈아 끼울 수 있는 전투 인력이 아니다. 너는 너라는 한 사람이다. 네 죽음은 통계 속 숫자가 아니라 내가 실제로 겪는 상실이다.
무잔의 체계와 정확히 대조된다. 부하가 죽으면 무잔은 ‘쓸모없군’ 하고 다른 놈으로 바꾼다. 대원이 죽으면 우부야시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무덤 앞에 가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무잔의 체계에서 개인은 교체할 수 있는 부품이다. 우부야시키의 체계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수 없다. 운영 방식이 다른 정도가 아니다. 체계를 떠받치는 논리 자체가 다르다. 한쪽은 사람을 도구로 보고, 다른 쪽은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
렌고쿠의 조건 없는 불꽃
렌고쿠 쿄쥬로는 이야기에서 정면 승부 끝에 처음으로 목숨을 잃는 주다. 무한열차 편에서 벌어지는 그의 죽음은 《귀멸의 칼날》이 ‘인기 만화’에서 ‘사회 현상’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렌고쿠의 이야기는 사실 단순하다. 유난히 복잡한 과거도, 세상에 완전히 짓밟힌 경험도, 마음속 어두운 구석도 없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어린 그에게 가르쳤다. 남들보다 강하게 태어났으니 약한 사람을 지킬 책임이 있다고. 강한 자의 사명은 약한 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고.
그는 평생 그 말을 기억했고, 남김없이 그대로 살았다. 의심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내적 갈등도 없었다.
무한열차 편에서 상현 3 아카자가 나타난다. 싸우던 아카자는 렌고쿠의 실력이 주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보고 흥분한다. 그리고 제안한다. 혈귀가 되라고. 그 재능이 아깝지 않으냐고. 인간의 몸은 너무 약하니, 영원히 강해지려면 혈귀가 되어야 한다고.
렌고쿠는 거절한다.
아카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더 강해질 수 있는데, 왜 반드시 죽을 몸에 남으려 하는가?
렌고쿠가 내놓는 대답의 뜻은 이렇다. 늙고 죽는 것이야말로 덧없는 생명의 아름다움이다. 늙고 죽기 때문에 삶은 그토록 사랑스럽고 존귀하다.
작품 전체에서 손꼽히게 중요한 대결이다. 검술의 대결이 아니라, 살아가는 두 방식의 대결이다. 아카자가 대표하는 것은 ‘잃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버리는’ 논리다. 죽지 않으려고 인간임을 버리고, 약해지지 않으려고 모든 관계를 포기한다. 렌고쿠는 그 정반대에 서 있다. 죽고, 늙고, 잃을 수 있기에 지금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면 ‘지킨다’는 말 자체가 무슨 뜻이 있겠는가.
렌고쿠는 끝내 그 싸움으로 죽었다. 아카자를 이기지는 못했다. 상현 3은 분명 그보다 강했다. 하지만 열차의 모든 승객을 살렸다. 탄지로와 젠이츠, 이노스케와 네즈코의 목숨도 지켰다.
죽기 전 탄지로에게 남긴 부탁은 단순했다. 동생에게, 자신이 믿는 길을 걸으라고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탄지로는 그의 주검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울었다. 젠이츠와 이노스케도 그의 죽음을 통곡했다.
렌고쿠의 죽음이 그토록 큰 충격을 주는 이유는 그가 가장 강한 주여서가 아니다. 가장 온전한 사람이어서다. 싸움으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강해져서 마음의 구멍을 메울 필요도, 외부의 성취로 자기 가치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을 위해 죽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부서진 사람들로 가득한 이 이야기에서, 그는 한 번도 부서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코쵸우 시노부의 미소 뒤에 숨은 독
렌고쿠가 ‘조건 없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충주 코쵸우 시노부는 ‘금이 간 채로 버티는 사람’이다.
그녀의 언니이자 전 화주인 코쵸우 카나에는 상현 2 도우마에게 죽었다. 언니는 살아 있을 때 언젠가는 인간과 혈귀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소망은 렌고쿠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긴 당부와 나란히 놓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다.
시노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노력은 했다. 정말로 언니처럼 다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언니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다정함은 분노에 잠겼다. 혈귀와 평화롭게 지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선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슬픔이 너무 깊어서였다.
그래서 아주 특이한 길을 택했다. 늘 미소를 띠고, 언니 같은 말투를 쓰고, 언제나 상냥하게 사람을 대했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 평온이 아니라 독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 독이었다. 오랜 시간 고농도의 등꽃 독을 몸속에 축적해, 스스로 살아 있는 독 폭탄이 되었다.
처음부터 도우마에게 먹히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 오래전부터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정해 두었다는 뜻이다. 그 뒤의 하루하루, 모든 훈련과 미소, 동료들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이미 죽기로 결심한 사람의 마지막 준비였다는 뜻이다.
렌고쿠와는 다르다. 렌고쿠가 죽음으로 나아간 것은 싸움 속에서 내린 본능적인 결단이었다. 죽을 계획을 세운 게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다 죽었다. 시노부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준비했다.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설계한 것이다.
문제가 없는 행동인가? 물론 아니다. 자신을 무기로 쓰는 것 자체가 자기를 도구로 만드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노부는 실제로 자신을 ‘수단’으로 바꾸었다. 도우마를 독살할 독 폭탄으로.
고토게 코요하루의 뛰어난 점은 이 행동을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 데 있다. 시노부는 차가운 복수 기계가 아니다. 나비저택에서 카나오와 칸자키 아오이 같은 어린 대원들을 길렀고,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언니의 방식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정말 다정하게 대했다. 그 다정함의 일부는 연기였을지라도.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여전히 진지하게 살아간다. 이 모순된 삶의 방식이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완전한 세상에서 건네는 진실한 응답임은 분명하다.
시나즈가와 형제의 가장 거친 다정함
풍주 시나즈가와 사네미는 아마 주들 가운데 가장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일 것이다. 거칠고, 다혈질이고, 온몸이 흉터투성이이며, 혈귀를 보면 죽이려 든다. 주합 회의에서 처음 네즈코를 만났을 때도 곧바로 칼로 찌르고, 혈귀에게 강한 유혹이 되는 자신의 희귀혈을 내밀어 이성을 잃게 만들려 한다. 혈귀는 결국 혈귀이며, 인간을 해치지 않는 혈귀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편집증적인 광인 같다. 하지만 이야기는 조금씩 그 이유를 보여 준다.
사네미의 어머니는 혈귀가 되어 어느 밤 자신의 아이들을 덮쳤다. 사네미는 동생 겐야와 다른 형제자매를 지키려고 제 손으로 어머니를 죽였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피투성이로 서 있었다. 겐야는 바닥에 널린 시체와 온몸이 피에 젖은 형을 보고 그만 ‘살인자’라고 외쳤다.
그 말은 사네미의 마음을 부쉈다. 하지만 그는 해명하지 않았다. 이후 동생을 멀리 밀어냈다. 귀살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만날 때마다 욕을 하며 쫓아냈다.
왜 그랬을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것이 그가 삶에서 배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죽었다. 형제자매도 거의 모두 죽었다. 동생을 지킬 길은 자신에게서, 귀살대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전장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그는 가장 깊은 다정함을 가장 거친 방식으로 표현했다.
겐야는 끝내 귀살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끝내 싸우다 죽었다. 마지막에 형에게 전한 말은 사과였다. 그때 형을 살인자라고 불러서 미안하다고.
사네미는 사라져 가는 동생의 몸을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나즈가와 형제와 규타로 남매를 나란히 보면 흥미로운 대조가 드러난다. 둘 다 상대를 지키려고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진심을 말하고, 잃는 순간에야 비로소 화해한다. 차이는 방식에 있다. 규타로는 동생을 곁에 꼭 묶어 두었고 둘이 함께 혈귀가 되었다. 사네미는 동생을 밀어내며 분노와 폭력으로 사랑을 감춘 채 혼자 짊어졌다.
한쪽은 관계를 너무 꽉 붙들고, 한쪽은 너무 멀리 밀어낸다. 방법은 둘이지만 두려움은 하나다. 잃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우부야시키의 마지막 수
무한성 결전을 앞두고 우부야시키는 결단을 내린다. 저택에서 무잔이 찾아오기를 기다린 뒤, 미리 묻어 둔 폭약을 터뜨린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목숨을 내놓아 무잔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아내 아마네는 계획을 알았고 동의했다. 어린 두 딸도 그 자리에 있었다.
폭발이 일어날 때 주들은 현장에 없었다. 사전에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우부야시키는 자신을 ‘지키러’ 오라고 어느 주에게도 요구하지 않았다. 계획을 알면 반드시 막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대신 죽겠다고 나설 터였다.
나는 이 마지막 결정이 주들을 보호한 선택이라고 읽는다. 목숨을 보호했다는 뜻이 아니다.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무잔이 하현들을 처형한 장면과 놓고 보면,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잔혹한 대비가 생긴다. 무잔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부하를 죽인다.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우부야시키는 부하들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희생한다. 대가를 떠맡는 것이다.
무잔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를 위해 햇빛을 가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부야시키의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주가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부야시키가 무잔보다 ‘사람 마음을 사는 법’을 잘 알아서 생긴 차이가 아니다. 마음을 사는 것은 기술이다. 우부야시키가 한 일은 기술이 아니었다. 곁에 있는 매일, 죽음을 앞둔 사람의 진심을 다해 주들에게 전했다. 나는 너희를 보고 있다. 너희가 무엇을 감당하는지 알고 있다. 너희를 죽지 않게 할 능력은 없지만, 너희의 죽음이 내 마음에 무게로 남는다는 사실만은 알게 해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자기 마음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도 기꺼이 무게를 짊어진다.
거래도, 전략도 아니다. 관계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다.
다음 글에서는 작품의 진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혈귀가 된 여동생을 등에 업고 길을 나선 소년. 그 장면이 왜 이 모든 체계의 논리를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철저하게 부정하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귀멸의 칼날》은 고토게 코요하루의 만화로, 전 23권으로 완결되었다. 애니메이션은 ufotable이 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