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E 웃음론 · 들어가며
누구도 지지 않았다
영국인의 잔치에 온 인도인이 맥주 거품이 병 밖으로 솟는 모습을 본다. 칸트는 웃음을 기대가 무로 바뀌는 일이라 했다. 이 웃음론은 '틀에는 이런 여항이 있었구나'라는 판단을 본다. 웃는 순간 틀과 여항이 모두 눈앞에 있고, 누구도 지지 않는다.
맥주를 어떻게 안에 넣었을까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인의 잔치에 온 인도인이 맥주병을 따자 거품이 솟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란다. 무엇이 그리 신기하냐고 묻자, 나오는 건 놀랍지 않은데 어떻게 안에 넣었는지가 신기하다고 답한다. 칸트는 일부러 덧붙인다. 우리가 웃는 것은 무지한 그 사람보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고.
이 이야기는 §54의 부연에 나온다. 칸트는 웃음을 쾌적함의 편에 두고, 도박이나 음악과 함께 '놀이'로 묶는다. 정의는 이렇다. 웃음은 팽팽한 기대가 갑자기 무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격정이다. 그렇다고 판단력을 완전히 내쫓지는 않는다. 기대가 빗나간 마음은 다시 돌아가 시도하고, 두 관점 사이를 오간다. 다만 지성은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즐거움의 실제 원인은 그로 인해 생기는 몸의 움직임이라고 본다.
맥주병을 다시 보자. 빗나간 것은 우리의 기대다. 우리는 그가 거품에 놀랐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무가 아니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안에 넣기'였다. 이전의 해석도 사라지지 않는다. 거품은 여전히 솟고, 거품을 신기해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그의 대답 옆에 남는다. 또 하나 있다. 여항이 생긴 틀은 인도인의 틀이 아니라 우리의 틀이다. 누구를 향해 웃는지와 누구의 틀에 여항이 있는지는, 여기서 갈라진다.
『SAE 웃음론』의 총론 『판단력과 웃음』은 여기서 출발해 웃음을 판단력의 표현으로 본다. 웃음이 판단하는 것은 '틀에는 이런 여항이 있었구나'라는 관계다. 칸트와 갈리는 지점은 셋이다. 남는 것은 무인가 여항인가. 웃음은 몸을 거쳐 즐거움을 전하는 격정인가, 판단이 느껴지면서 피할 수 없이 오는 그 순간인가. 타인에게는 누구나 동의할 몫을 돌리는가, 아니면 질문받을 가능성을 여는가. 이 글은 세 갈림길을 걸어 보고, 네 각론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핀다.
틀과 여항
먼저 두 말을 설명하자. 틀이란 지금 작동하는 파악 방식이다. 논문은 기대, 정의, 문장을 읽는 방법, 예절, 자기 상황에 대한 이해를 예로 든다. 여항은 그 틀이 다 담지 못했으면서도 바로 눈앞에 있는 부분이다. 웃는 순간에는 그것이 보이고, 틀과 함께 눈앞에 있다는 점도 보인다.
그러니 웃음의 대상은 여항만도 틀만도 아닌, 둘 사이의 관계다. 선을 긋지 않으면 여항도 없다. 여항은 언제나 어떤 틀의 여항으로 보인다. 웃음이 보는 것은 바로 이 '의'다. 공식의 '이런 하나'도 의도된 말이다. '이런'은 가리켜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뜻이고, '하나'는 따로 집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틀에 여항이 몇 개나 있는지 알 필요는 없다. 이 하나가 드러나면 된다. 논문의 말로는 '필요한 것은 개별화이지 열거가 아니다.'
이 관점은 SAE, 곧 Self-as-an-End라는 틀에서 온다. SAE는 여항을 모든 분야를 조직하는 중심 개념으로 삼고, 모든 틀에는 여항이 있으며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고 본다. 웃음은 이 주장을 가장 일상적으로 보여 준다. 사람은 웃을 때 여항을 여항으로 보는 것이지, 틀의 실패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AE 미학 연작은 어떤 차원에서 충분히 펼쳐진 틀을 보았을 때, 주체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논했다. 웃음 역시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양상을 갖지만, 대상이 다르다. 아름다움의 인정은 틀의 충분한 펼쳐짐에 향할 수 있고, 웃음은 여항이라는 한 지점에 향한다. 그런 뜻에서 웃음론은 미학의 뒷면이다.
무엇이 새로운지도 분명히 하자. 웃음을 판단으로 보는 것은 칸트와 비교하면 새롭지만, 현대 심리학에 비하면 새롭지 않다. McGraw와 Warren의 무해한 위반 이론(benign violation theory)도 이미 평가 위에 웃음을 놓는다. 이 웃음론이 주력하는 것은 틀과 여항이 한 번의 웃음에 어떻게 함께 들어오는가다. 다른 이론과 자신을 구분하는 제목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이다.
'아직'의 세 뜻
공식에서 무게가 큰 말은 '아직'이다. 적어도 세 뜻이 있다. 아직 눈앞에 있다는 것은 틀을 떠올리고 이해하며 되짚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 쓰인다는 것은 누군가 그 틀대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아직 유효하다는 것은 원래 주장이 여전히 성립한다는 뜻이다. 쓰임과 유효함은 눈앞에 있음을 전제한다. 웃음론은 셋을 합친 범위를 취하고, 최소선은 눈앞에 있다는 데 둔다.
중의적인 말은 두 해석이 모두 성립할 수 있다. 틀도 유효하고 손상된 것은 없으니 가볍게 웃는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끝은 다르다. 아이가 말해 버리자 임금도 속으로는 맞다고 생각하지만, 행렬은 끝까지 더 의젓하게 걷고 시종도 없는 옷자락을 든다. 행렬은 계속되지만 옷을 입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틀은 쓰이되 유효하지 않다. 이 층의 웃음은 풍자다. 원문에는 누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다. 독자는 임금, 신하, 방금까지 함께 본 척했던 사람들을 여러 겹으로 웃는다.
세 번째는 눈앞에만 있는 경우다. 디오게네스는 털을 뽑은 닭을 강의실에 들고 와 이것이 플라톤의 인간이라고 했다. 깃털 없는 두 발이라는 정의는 떠올릴 수 있지만, 정의로서의 자격은 잃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뒤에 넓고 평평한 손톱이라는 조건이 덧붙었다. 청중의 웃음은 기록되지 않았다. 만약 웃은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정의와 닭이 함께 앞에 있었을 것이다. 정의를 고치는 일은 웃음 뒤의 일이며, 논문은 이를 흡수라고 부른다.
눈앞에 있다는 뜻을 정확히 하자. '지금 눈앞에 있다는 뜻이지, 틀의 존속을 뜻하지 않는다.' 쓰이는지, 유효한지는 이 웃음이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 기록할 뿐, 웃음의 조건은 아니다. '아직'은 언제나 틀에 걸리고 여항에 걸리지 않는다.
누구도 지지 않았다
최소선을 눈앞에 있다는 데 놓으면, 가장 선명한 주장이 나온다. 웃는 순간에는 틀과 여항이 모두 눈앞에 있고, 누구도 지워지거나 패배했다고 판정되지 않는다. 이후 틀을 유지할지 고칠지 버릴지는 이 웃음이 정하지 않는다. 유효성과 쓰임에 대한 별도의 판단은 웃기 전이나 후에, 혹은 웃음과 함께 사람이 내릴 수 있다. '웃음은 틀의 거취를 결정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불일치 이론은 불일치로 웃음을 설명하는 고전적 형태이고, 칸트도 이 계열에 있다. 그는 개념과 그 개념으로 생각한 현실 대상의 불일치를 갑자기 알아차려 웃으며, 직관적 인식이 사유에 승리하는 데서 즐거움이 온다고 했다. 웃음은 승패의 결과다. 직관이 이기고 개념이 진다. 웃음론이 달리 보는 것은 딱 이 지점이다. 웃음은 승패를 판정하지 않으며, 즐거움이 오더라도 따라오는 감정일 뿐 웃음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논문은 쇼펜하우어를 다룰 때도 선을 지킨다. 중의적인 말은 두 이론이 함께 검토할 예가 되지만, 곧바로 반례는 아니다. 그 자신도 말장난을 다루었고, 같은 대상을 한 면에서는 개념 아래 올바르게 넣으면서 다른 면에서는 불일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비교하려면 말, 개념, 대상을 하나씩 맞추고 각 설명이 무엇을 말하는지 봐야 한다. 그전에는 어느 쪽이 반증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칸트의 책에도 이렇게 읽을 만한 대목이 있다. §54는 천진함을 논하며, 타고난 진실함이 제2의 천성이 된 위장술을 뚫고 나오면 진지함과 존경이 놀이에 섞인다고 한다. 웃음론의 독법에서는 위장술이 틀이고 진실함이 여항이다. 들통난 위장과 튀어나온 진실함이 지금 함께 있다. 칸트는 빗나간 것이 가상이라고 하고, 웃음론은 틀과 여항이 함께 있다고 한다. 같은 사건의 다른 면을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울음, 두려움, 웃음
공식은 웃음이 무엇을 판단하는지 설명한다. 이제 울음과 두려움이 어떻게 다른지도 보자. 같은 틀과 같은 여항을 마주할 수 있지만 주의가 향하는 곳이 다르다. 울음과 두려움은 틀에, 웃음은 여항에 초점을 맞춘다. 울음은 틀을 잃어 이제 없다는 것이고, 두려움은 위협받아 곧 없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웃을 때도 틀은 눈앞에 있으나 주의는 이 여항에 끌려간다.
홉스는 이미 『리바이어던』 6장에서 웃음과 울음을 짝지었다. 웃음은 갑작스러운 영광이고, 울음은 갑작스러운 낙담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강렬한 희망이나 권세의 버팀목을 갑자기 빼앗을 때 온다. 빼앗기는 것은 바로 사람이 기대던 틀이다.
두려움의 예로는 수학자 에르미트가 1893년 스틸체스에게 쓴 편지가 있다. 어디서도 미분할 수 없는 연속함수라는 개탄스러운 재앙 앞에서, 두려움과 혐오를 느끼며 등을 돌린다고 했다. 바이어슈트라스는 이미 1872년 이런 함수를 제시했다. 여항은 보였고 기록까지 되었는데, 이십 년 뒤에도 주의는 위협받는 틀, 곧 해석학이 연속함수를 보던 통상적 이해에 있었다. 편지는 그가 웃었는지 아닌지는 말하지 않는다. 같은 여항은 나중에 프랙털 기하학에서 받아들여져 여항의 아름다움이 되며, 그때 주의는 여항 자체로 옮겨 간다.
이 구분은 흔한 경험을 설명한다. 같은 상황에서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 수 있다. 절망 속에서 이제 길이 없다는 인정에 주의가 머무르면 울고, 아직 찾는 자신에 향하면 웃는다. 상황보다 초점이 달라진 것이다. 주의가 하나일 필요도 없다. 울면서 웃거나 난처한 가운데 웃을 때, 여항에 향한 부분이 웃음이다. 웃음의 표적이 된 사람이 잘 웃지 않는 이유도 설명한다. 구경하는 사람은 여항을 보지만, 당사자는 자기 틀과 상처 입은 부분으로 주의를 돌리도록 몰릴 수 있어 난처하다. 다만 하나의 설명일 뿐, 실제로는 당사자의 판단을 봐야 하며 함께 웃는 사람도 있다.
여항이 웃는 사람에게 무엇을 치르게 하는지로 웃음의 종류를 나눌 수 있다. 대가 없는 큰 웃음, 대가 있는 쓴웃음, 대가가 아주 무거운 절망의 웃음이다. 하지만 대가로 웃음과 울음을 나누지는 못한다. 절망의 웃음은 대가가 지극히 무거워도 웃음이다. 쓴웃음이라는 말에도 두 층이 있다. 씁쓸함은 감정이고, 웃음은 피할 수 없이 느껴지는 그 순간이다.
보임과 보이지 않음
'아직도 있다'에는 그전에는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전제가 있다. 없다고 단언했어야 하는 건 아니고, 못 보았으면 된다. 그러니 판단하는 것은 여항 하나뿐 아니라 보임과 보이지 않음 사이의 간격이다. 이 간격은 사람과 순간별로 기록해야 한다. 한 사람 안에서는 조금 전의 내가 못 보다가 지금 보므로 갑자기 닫힌다. 말장난을 끝까지 듣고 웃는 경우다. 사람 사이에서는 나는 보고 상대는 못 보아 간격이 계속 열린다. 짓궂은 웃음과 사랑의 웃음은 상대의 갑작스러운 그 순간을 기다린다. 반대로 상대는 보고 나는 못 볼 때, 내가 못 보았다는 것을 웃는 것이 전염되는 웃음이다.
갑작스러움을 버린 것은 아니다. 한 사람 안에서 같은 구조가 취하는 시간적 형태이고, 지속은 두 사람 사이의 형태다. 그래서 농담을 두 번 들으면 대개 덜 웃긴다. 여항을 보았고 간격이 닫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친구는 둘 다 아는 옛 농담에도 웃는다. 논문은 이를 이 주장의 핵심 압력 사례로 기록하고 두 후보를 둔다. 아직 못 본 외부인의 틀을 웃거나, 못 보았던 예전 자신에게 돌아가 간격을 다시 경험한다는 설명이다. 후자에는 관찰할 만한 예측 후보도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 순서와 쉼이 여전히 작용하고, 결말부터 말하면 웃지 않을 것이다. 이 예측 자체도 확인 전이며, 두 후보가 전부라고 정하지 않는다.
여럿이 들을 때 더 잘 웃는 현상에는, 누구를 웃는지가 여러 겹일 수 있다는 설명 후보가 있다. 하나의 여항이 농담 속 인물의 틀에도, 이야기에 끌려 들어간 나의 틀에도, 우리가 공유한 틀에도 속할 수 있다. 남이 웃으면 방금 다 함께 그 안에 있었다는 걸 안다. 세 번째 겹은 무리 안에서만 생긴다. 논문은 이를 경험적 뒷받침을 얻지 못한 기제 가설이라고 명시한다.
나는 보고 상대는 못 보는 칸에서도 두 웃음을 나눠야 한다. 배에 표시해 칼을 찾는 초나라 사람을 읽고 웃는 독자는, 자신과 그를 비교할 필요가 없다. 구경하는 웃음이다. 반면 나는 저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하며 웃으면 자기 목적이 대상인 틀에 들어온다. 비교의 웃음이며, 타인의 결함과 비교해 자신을 갑자기 칭찬한다는 홉스의 두 번째 원인이다. 인도인 이야기는 이 구분의 시금석이다. 칸트는 우리가 더 똑똑하다고 느껴 웃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순간
웃음과 판단을 두고 세 말이 공존한다. 웃음은 판단력의 표현이다. 웃음은 곧 판단이다. 판단이 내려지면 웃음은 거스를 수 없다. 웃음론은 판단과 마음속 웃음이 한 사건의 두 면이라고 본다. 구조로 보면 판단이고 느껴지는 면에서 보면 웃음이다. '마음속 웃음은 이 틀의 이 여항을 향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 순간이다. 감이지 정은 아니다.'
기쁨, 가벼워짐, 마음의 온기는 감정으로, 따라와도 오지 않아도 된다. 감정이 씁쓸해도 웃음은 웃음이다. 겉의 웃음은 사건의 표현이며 없어도 된다. 그러면 세 말이 제자리를 얻는다. 웃음이 판단이라는 것은 내적 웃음과 판단이 같은 사건이라는 뜻이다. 판단력의 표현이라는 말은 겉웃음을 가리킨다.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 이상 두 면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칸트와 두 번째로 갈린다. 그는 즐거움이 몸을 거쳐 온다고 하지만, 이쪽은 판단과 같은 사건인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웃음 자체라고 한다. 몸도 참여하며 그 움직임은 표현이다. 웃음 참기가 증언한다. 이미 웃음은 올라왔고, 힘을 들여 표정만 누를 수 있다. 마음속에서 웃음을 느끼는 것도 웃음이며, 참을 수 있는 것은 표정뿐이라는 것이다. 예의상 웃음은 반대편이다. 내적 판단은 없는데 웃음을 만들어 낸다. 이 웃음론은 안에서 웃은 경우만 다룬다.
'그러지 않을 수 없음은 강요가 아니다.' 강요된 웃음은 불이익 따위의 결과로 어떤 지점에서 웃게 하고, 내리지 않은 판단을 본인의 것으로 떠맡기는 일이며, 식민화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은 판단 자체에서 오고, 강요는 밖에서 붙인 결과에서 온다.
그러지 않을 수 없음은 판단을 따르지, 판단의 정오를 따르지 않는다. 헛소문을 믿어 남의 행동을 터무니없다며 웃었는데 뒤에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도 있다. 웃음은 일어났지만 판단은 틀렸다. 웃음으로 판단의 옳음을 증명할 수 없다. 증거는 원래 일인칭이다. 마음속으로 웃었는지, 무엇을 웃었는지 묻는다. 웃지 않았다는 이유로 못 보았다고 판정하지도 않는다.
놓친 조건을 차분히 지적하면서 웃지 않을 수 있다. 더 강한 압력 사례는 깨달음이다. 조건이 갑자기 보이고 간격도 닫혔지만 흔히 웃지 않는다. 논문은 웃지 않았으니 여항을 안 본 것이라 역산하지 않고, 간격이 닫힌 뒤 주의의 세 행선지를 구분한다. 옛 틀이 눈앞에 있고 여항이 이런 하나로 놓이면 웃음이다. 옛 틀의 무효함이나 위협으로 돌아가 내가 잘못 보았다고 느끼면 난처함, 두려움, 울음이다. 앞의 새 틀로 가서 조건을 새 해법에 곧바로 넣으면 흡수다. 깨달음과 차분한 오류 수정은 여기에 속한다.
세 방향은 섞일 수 있다. 먼저 아, 하고 뒤에 왜 그걸 몰랐지 하며 웃는 일이 흔하다. 앞은 새 해법이 통함을 보고, 뒤는 옛 틀의 여항을 본다. 이 구분을 무엇이든 빠져나갈 구멍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논문은 이후 언행에 관한 독립적인 표지를 몇 묶음 제시하고, 어떤 사례라면 반증할지도 명시한다.
웃는 사람을 따라간다
같은 농담에도 서로 다른 데서 웃는다. 다른 틀과 여항을 보고, 다른 층에 서기 때문이다. 논문은 한 번의 웃음의 층을 그 순간 웃는 사람이 서 있는 층으로 정하고, 웃음 대상인 틀의 층은 따로 적는다. 분석 단위는 농담 하나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한순간에 어떤 틀의 여항에 내리는 판단, 즉 한 번의 웃음이다. 한 이야기에는 인물, 화자, 독자의 여러 웃음이 들어갈 수 있다. 각주구검이나 동시효빈의 원문에는 웃는 사람이 기록되지 않았다. 웃는 쪽은 독자이니 층도 독자를 따른다.
SAE 정신분석 연작과의 대응에서 주체는 13DD다. 자기 부정을 다시 부정할 수 있는 반성적 부정의 자리다. 12DD에는 예측 능력이 있지만 주체성은 없다. 아기와, 아직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지 않는 동물의 웃음은 따라서 판단으로 인증하지 않고 웃음의 경향으로 기록한다. 틀과 여항의 일부 구조가 나타나고 주의도 여항에 가 있지만, 자신이 판단한다고 아는 주인이 아직 없다. 13DD부터 웃음은 판단이 되고 수정할 수도 있다. 수정 가능하다고 매번 수정하는 것도, 그 웃음이 벌써 정당한 것도 아니다.
범위는 12DD에서 시작하며 11DD는 여기에 합친다. 본줄기는 15DD까지다. 간지럼의 웃음은 둘로 나눈다. 손이 닿기도 전에 웃으면 남의 움직임을 예측한 12DD의 경향이다. 닿은 뒤의 웃음은 10DD의 감지적 웃음으로 하한 밖에 있다. 한 번 마주 웃는 순간 서로를 목적으로 인정해도 각자의 15DD의 순간이다. 완전한 16DD는 모든 일에서 양방향으로 의심하지 않음을 요구하므로, 유한한 개인이 이 순간만으로 도달을 선언할 수 없다. 이 이상적 한계를 남겨 두고 전개하지 않는다.
범위 안에도 판단이 아닌 웃음이 있다. 예의상 웃음, 강요된 웃음, 대화의 호응만을 위한 웃음, 웃음소리를 듣고 따라 웃되 자신이 못 본 것을 찾는 단서로 삼지 않은 웃음이다. Provine의 연구에서는 일상 대화의 웃음 대부분이 웃기지 않은 말 뒤에 왔다. 센 것은 겉의 웃음이지 안의 웃음이 아니다. 논문은 내적 웃음이 있었는지 추론하지 않고, 정의에 따라 호응만인 면을 제외한다.
못 알아들었어?
웃음도 아름다움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농담에 웃거나 웃지 않고, 웃어도 웃는 대목이 다르다. 판단력이 겹치므로 함께 웃는 일이 많지만, 각자 판단력을 간직하므로 웃음은 남이 배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웃음에도 타인을 향한 기대가 있다. 일상의 말로는 못 알아들었어, 하는 물음이다. 칸트는 §8에서 취미판단이 모두의 실제 동의를 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의를 각자에게 돌린다고 했다. 이쪽의 답은 다르다. 웃는 사람이 타인에게 갖는 기대는, 자신이 그에게 질문받을 가능성을 열어 두는 태도다. 당신의 판단을 들려주길 기대하되, 나와 겹치기를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 이때의 '못 알아들었어?'는 무엇을 보았느냐는 물음이다. 다만 조롱으로도 할 수 있으므로, 그 말만으로 이견에 열려 있다고 인증하지는 않는다.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웃지 않아도 못 보았다고 판정할 수 없다. 다른 것을 보았거나 틀에 주의를 두었거나 자기 판단이 있을 수 있다. 둘째, 결과로 웃도록 몰아 내리지 않은 판단을 본인에게 떠맡기면 식민화다. 여기서는 자기 목적으로 타자 자신의 법을 대체한다는 넓은 뜻을 쓴다. 한 번 더 보자고 초대하거나 오독인지 토론하는 것은 식민화가 아니다. 권력자의 농담에 맞춰 웃는 사람도, 하지 않은 판단을 인정하도록 강요받는 한 같은 식민화의 다른 면에 있다. 표정만 강요된 경우는 별도로 봐야 한다.
권력은 웃음을 금지하기도 강요하기도 한다. 풍자는 왜 금지될까. 횡격막의 떨림에 불과하다면 금지해서 무엇을 얻는가. 웃음론은 틀에 이런 여항이 있다는 판단이기 때문이며, 그 판단이 생기지 말라고 명령할 수 없다고 답한다. 동시에 금지된다는 사실만으로 웃음이 판단임을 독립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덧붙인다.
총론 뒤에는 네 각론이 네 층을 따라간다. 첫째는 12DD의 경향으로, 까꿍 놀이의 아기가 무엇을 웃는지 묻는다. 둘째는 13DD로, 이 판단은 내 것이라는 주인이 처음 나타난다. 셋째는 14DD로, 자기 목적이 웃는 대상의 틀에 들어와 득의와 쓴웃음, 조롱과 웃음을 써서 하는 일이 생긴다. 넷째는 15DD의 절망의 웃음과 마음이 통한 웃음이다. 마주 웃는 구체적인 만남까지 묻되, 거기서 완전한 16DD의 실현을 선언하지는 않는다.
맥주병으로 돌아가자. 대답 뒤에도 거품은 솟고, 이전의 해석도 남고, 그가 물은 일도 앞에 있다. 누구도 지지 않았다. 여항이 있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다. 웃는 사람은 바로 여항을 여항으로 보고 있다.
원논문과 읽기 안내
현재 중국어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이 자료란의 학술 원문은 Qin, Han(2026)의 『총론: 판단력과 웃음』입니다. 기존 영어판 역시 독립 집필했으며, 간체·번체 중국어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기술적 전문 번역은 아닙니다. 원이야기에 없는 웃음이나 내면을 덧붙이지 않고, 오래된 농담과 집단 웃음에 대한 후보 설명을 검증된 사실로 쓰지 않습니다. 웃음이 실제로 생긴 일과 판단의 정당성을 나누며, 한번의 상호 인정은 각자의 15DD 순간으로 다룹니다. 완전한 16DD나 원논문의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이 판본에 관하여
학술 원문: Qin, Han(2026), 『총론: 판단력과 웃음』(SAE 웃음론·총론). self-as-an-end.net · DOI: 10.5281/zenodo.23286244.
용어 안내: 이 연작은 이 사이트의 고정된 13–16DD 정의를 따릅니다. 한 번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서로가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두 주체 각자의 15DD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16DD는 모든 일에서 완전한 양방향의 의심하지 않음만 가리키며, 유한한 개인이 마주하는 이상적 한계입니다. 연결된 논문이 개별 순간의 상호 인정을 16DD로 적은 곳은 이 에세이판에서 이에 맞추어 조정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웃거나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상호 인정이 일어났다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