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 | 繁體 | 日本語 | Français | Deutsch | Español | 한국어
← 대지 도덕경 해설
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20장 · 총 81장

아(我)와 오(吾)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唯与诃,其相去几何?美与恶,其相去何若?人之所畏,亦不可以不畏。恍呵其未央哉。众人熙熙,若享于太牢而春登台。我泊焉未佻,若婴儿之未孩。累呵似无所归。众人皆有余,我独遗,我愚人之心也,惷惷呵。俗人昭昭,我独昏呵。俗人察察,我独闵闵呵。惚呵其若海,恍呵其若无所止。众人皆有以,我独顽以鄙。吾欲独异于人,而贵食母。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처음이자 단 한 번

『도덕경』 전체에서 노자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것은 처음이자 단 한 번뿐이다. 20장이다.

그는 ‘뭇사람은 이런데 나는 저렇다’를 여섯 번 잇달아 쓴다.

뭇사람은 흥청거리는데, 나는 고요하다.
뭇사람은 주렁주렁 내걸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내걸지 않았다.
뭇사람은 약삭빠른데,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처럼 둔하다.
뭇사람은 환히 밝은데, 나는 어수룩해 보인다.
뭇사람은 꼼꼼히 따지는데, 나는 엉성해 보인다.
뭇사람은 일마다 폼을 잡는데, 나는 고집스럽고 투박해 보인다.

처음 읽을 때는 거의 누구나 이 장을 노자의 외로운 넋두리로 읽는다. 성인도 남이 몰라준다고 푸념할 때가 있구나, 하고.

그렇게 읽으면 장 전체가 빗나간다.

이것은 감상에 젖은 장이 아니다. 스스로 길을 고른 사람이 자기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서, 그런 선택이 어떤 모습인지를 독자에게 알려 주는 장이다.

장 전체의 열쇠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마지막 구절이 앞의 ‘나만 홀로……’를 모조리 뒤집는다.

나(吾)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하니,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吾欲獨異於人,而貴食母)

여기서 ‘아(我)’가 ‘오(吾)’로 바뀐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앞에서는 여섯 번 모두 ‘아’를 쓰다가, 마지막 한 번만 ‘오’를 쓴다. 이 한 글자의 전환이 장 전체의 열쇠다.

2. 맞선다는 것마저 거기서 거기다

이 장의 첫 세 구절이 장 전체의 바탕 음을 깐다.

예, 하는 대답과 꾸짖는 소리는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 또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렴풋하구나, 아직 끝이 없구나. (唯與訶,其相去幾何?美與惡,其相去何若?人之所畏,亦不可以不畏。恍呵其未央哉)

유(唯)는 대답하는 소리, ‘예’, ‘좋습니다’다. 가(訶)는 꾸짖는 소리다.

노자는 묻는다. 대답과 꾸짖음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겉으로는 맞서 있다. 하나는 긍정이고 하나는 부정이다. 그런데 찬찬히 보면 둘 다 바깥에서 온 자극을 따라 반응하는 것이다. 이 층에서 보면 대답과 꾸짖음은 거기서 거기다. 둘 다 바깥에 대한 반응 속을 맴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얼마나 다른가?’

여기에 글자 차이가 하나 있다. 백서(帛書)는 ‘아름다움과 추함(美與惡)’이고, 통행본은 이것을 ‘선과 악(善與惡)’으로 고쳤다.

한 글자 차이지만 장 전체의 방향이 달라진다.

백서대로 ‘아름다움’으로 읽으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미적 층에서 세워진 구(構)의 양쪽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구를 세우는 순간, ‘추함’이 동시에 그 반대편으로 세워진다. 둘은 한 번의 구 세우기가 낳은 양쪽이다.

통행본대로 ‘선’으로 읽으면 장 전체가 도덕의 층으로 끌려간다. 선과 악의 맞섬은 도덕 판단의 맞섬으로 읽힌다.

백서로 읽으면 이 구절은 2장의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아보는 순간, 추함은 이미 거기 있다’와 한 줄기다. 구의 양쪽은 함께 나고 뿌리가 같다. 한쪽을 세우면 다른 쪽이 동시에 선다. 겉으로는 맞서 있어도 사실은 같은 구의 틀을 나누어 쓰고 있다.

그러니 둘은 서로 그리 멀지 않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 또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뭇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노자는 홀로 남과 다르지만, 뭇사람이 사는 층이 없는 척하지는 않는다. 그 상태를 보기는 보되, 꼭 따라 하지는 않는다.

‘어렴풋하구나, 아직 끝이 없구나.’

아득하게 어렴풋하여 경계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이다.

구의 양쪽을 오가는 놀이, 뭇사람의 공감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세계. 이 모든 것이 어렴풋하고, 경계가 없고, 끝이 없이 한 겹 또 한 겹 이어진다.

이것이 이 장의 바탕 음이다. 노자는 인간 세상 전체의 구 세우기 놀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어렴풋하고 끝이 없구나.

그러고 나서 말한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나만 홀로’.

3. 뭇사람과 나, 네 묶음

이어서 네 묶음의 대비가 나온다. 묶음마다 ‘뭇사람은 X인데, 나는 Y다’의 구조다.

첫째 묶음

뭇사람은 흥청거려 마치 큰 잔치를 받는 듯, 봄날 누대에 오르는 듯하다.
나는 담담히 머물러 들뜨지 않으니,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 같다. 지쳐 보이는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듯하다.
(衆人熙熙,若享於太牢而春登臺。我泊焉未佻,若嬰兒之未孩。累呵似無所歸)

뭇사람은 희희(熙熙), 곧 왁자지껄 흥겹다. 태뢰(太牢), 곧 소와 양과 돼지를 모두 갖춘 나라의 큰 잔칫상을 받은 듯하고, 봄날 누대에 올라 구경하는 듯하다. 창발층(創發層)이 가장 배부르고 가장 떠들썩한 모습이다.

나는 담담히 머물러 들뜨지 않는다(泊焉未佻).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 같다.

갓난아이는 10장에서 세운 자리다. 바탕층의 그 ‘돌아갈 수 있는 자리’, 아직 창발층의 구로 꽉 차지 않은 자리다. 미해(未孩)의 해(孩)는 어린아이의 웃음이니, 미해는 창발층의 표정 반응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뭇사람은 창발층에서 떠들썩하고, 나는 창발층 아래의 자리에 있다.

‘지쳐 보이는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듯하다.’ 뭇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면 나는 지친 듯하고 돌아갈 곳도 없어 보인다.

이 구절은 제대로 보아 두어야 한다. 이것은 뭇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이다. 나 자신은 어떤가? 장의 마지막 구절이 밝혀 준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고, 그곳은 어머니의 자리다.

둘째 묶음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나만 홀로 빠뜨린 듯하다. (衆人皆有餘,我獨遺)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다. 저마다 주렁주렁 내걸었다. 손에도, 몸에도, 주머니에도, 마음에도 구가 가득 걸려 있다. 세운 간판, 쌓은 신분, 모아 둔 판단, 거둔 성취.

나만 홀로 빠뜨린 듯하다. 뭇사람의 눈으로 보면 내 손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

오늘로 옮기면 이렇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다. 누구의 링크드인에나 직함이 주렁주렁하고, 누구의 SNS 소개글에나 경력이 빼곡하고, 누구의 포트폴리오에나 이름난 회사 로고가 줄지어 있고, 누구의 옷장에나 브랜드가 가득하다.

나만 홀로 빠뜨린 듯하다. 프로필에는 ‘엔지니어’라고만 적었다. 소개글은 한 줄이다.

내게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들을 내걸지 않을 뿐이다. 내건 사람들이 나를 보면 무언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인다. 사실 모자란 것은 없다. 내걸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구나, 우둔하고 굼뜨구나. (我愚人之心也,惷惷呵)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처럼 미련하고 둔하다는 말이다.

이 대목은 백서의 입말로 된 자기 낮춤이다. 통행본은 이것을 沌沌兮, 곧 뒤섞여 아직 나뉘지 않은 모양으로 고쳐서, 입말의 자기 낮춤을 철학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惷惷은 살아 있는 사람의 입말이고, 沌沌은 철학자의 용어다.

백서대로 읽자. 이 자기 낮춤은 정말로 자기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다. 노자는 뭇사람의 눈으로 자기를 그리고 있다. 뭇사람이 보기에 나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 같다. 창발층의 구를 내걸지 않으니 손은 비어 있고, 머리는 판단을 세우느라 바쁘지 않다. 뭇사람의 평가 기준으로 보면 그것이 곧 어리석음이고 미련함이다.

노자는 뭇사람의 눈에 비친 이 모습을 빠짐없이 적어 낸다. 열등감이 아니라 보여 주기다.

셋째 묶음

세상 사람들은 환히 밝은데, 나만 홀로 어둑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꼼꼼히 살피는데, 나만 홀로 흐리멍덩하구나.
(俗人昭昭,我獨昏呵。俗人察察,我獨閔閔呵)

소소(昭昭)는 또렷하고 환하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은 하나같이 또렷하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좇을 만하고 저건 그럴 가치가 없다.

찰찰(察察)은 꼼꼼하고 빈틈없이 따진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의 분별은 하나같이 촘촘하다. 이건 높고 저건 낮다, 이쪽은 우리 편이고 저쪽은 남이다.

나만 홀로 어둑하다. 나는 흐릿해 보인다.
나만 홀로 민민(閔閔)하다. 나는 흐리멍덩해 보인다(민은 둔하고 살피지 못한다는 뜻이다).

내 머리가 흐려서도, 내가 미련해서도 아니다. 나는 ‘또렷함’을 기본자세로 삼지 않고, ‘촘촘한 분별’을 기본 동작으로 삼지 않는다.

창발층의 또렷한 판단은 이미 세워진 구가 주는 또렷함이다. 나는 거기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오늘로 옮기면 이렇다.

세상 사람들은 환히 밝다. 단톡방에서도 SNS에서도 누구나 아주 또렷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이 일은 이렇고 저 일은 저렇고,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것을 칼같이 판정한다.

세상 사람들은 꼼꼼히 살핀다. 누구의 촌평이든 정곡을 찌르고, 판단마다 세밀하기 그지없고, 편을 설 때마다 입장이 분명하다.

나만 홀로 어둑하다. 어떤 일을 만나도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서둘러 편을 서지 않고, 서둘러 내가 가진 틀 속에 분류해 넣지 않는다.

나만 홀로 흐리멍덩하다. 한 사람을 볼 때 서둘러 딱지를 붙이지 않고, 서둘러 분석하지 않고, 서둘러 내가 가진 인물 분류표 속에 집어넣지 않는다.

어렴풋하구나, 바다 같고, 아득하구나, 멈출 곳이 없는 듯하다. (惚呵其若海,恍呵其若無所止)

이 두 구절은 첫머리의 ‘어렴풋하구나, 아직 끝이 없구나’에 호응한다.

이것은 내가 어떤 모습인지를 그리는 구절이 아니다. 지금 내가 내다보는 이 모든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리는 구절이다. 세상 사람들이 환히 밝히고 꼼꼼히 따지는 그 모든 것이 내가 보기에는 바다처럼 가없고, 멈출 데가 없는 것처럼 끝없다.

구의 모든 양쪽, 모든 또렷함과 꼼꼼함이 이 어렴풋하고 끝없는 가운데 있다.

넷째 묶음

뭇사람은 모두 내세울 것이 있는데, 나만 홀로 고집스럽고 투박하다. (衆人皆有以,我獨頑以鄙)

유이(有以)는 폼을 잡고 일한다는 말이다. ‘내가 X를 한다’, ‘나는 X 하는 사람이다’ 하는 신분 감각이다.

뭇사람은 일을 할 때 누구나 이런 폼을 잡는다. 이 일을 하는 것은 내가 X라는 신분임을 증명하려는 것이고, 내 Y라는 이미지를 지키려는 것이고, 내 Z라는 간판을 떠받치려는 것이다.

나만 홀로 고집스럽고(頑, 고집이 세고 어울리지 못함) 투박하다(鄙, 거칠고 세련되지 못함).

내가 정말로 고집스럽고 투박한 것은 아니다. ‘내가 한다’는 폼 없이 일을 하니, 그것이 꽉 막히고 세련되지 못한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네 묶음을 합치면 뭇사람의 눈에 비친 나의 온전한 모습이 된다. 흥겹지 않고, 내건 것이 없고, 밝지 않고, 꼼꼼하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는다.

한마디로 ‘배불리 먹지 못했고, 내건 것이 없고, 밝지 않고, 꼼꼼하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4. 오(吾)는 아(我) 뒤에 숨은 누군가가 아니다

아래의 我와 吾 구분은 이 자화상을 읽는 실마리이지 옛 한문의 두 대명사가 언제나 이렇게 나뉜다는 규칙은 아니다. 이런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체의 자격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남의 눈에 보이는 나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말하는 자리로 한 사람이 옮겨 가는 움직임을 본다.

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주어가 바뀐다.

앞에서는 여섯 번 모두 ‘아’였다. 나는 담담히 머물러 들뜨지 않는다(我泊焉未佻). 나만 홀로 빠뜨린 듯하다(我獨遺).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다(我愚人之心也). 나만 홀로 어둑하다(我獨昏呵). 나만 홀로 흐리멍덩하다(我獨閔閔呵). 나만 홀로 고집스럽고 투박하다(我獨頑以鄙).

마지막 한 번은 ‘오’다. 오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한다(吾欲獨異於人).

이 한 글자의 전환이 장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층이다.

‘아’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 대명사다. 관계의 구조 속에 놓여 대비되는 한쪽이 된다. 장 앞부분의 ‘아’는 모두 이렇게 쓰였다. 뭇사람의 눈으로 그려지는 쪽이다.

‘오’는 세상 밖에 선 알아차림이 나서서 내는 목소리다. 관계의 구조 속에서 대비되는 한쪽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주체가 스스로 하는 말이다.

장 전체의 리듬은 이렇다.

먼저 여섯 번의 ‘아’로 뭇사람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떤 모습인지를 다 보여 준다. 어리석고, 굼뜨고, 어둑하고, 흐리멍덩하고, 고집스럽고 투박하다. 이 층을 다 지나고 나서 마지막에 ‘오’가 나선다.

‘오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한다.’

‘하고자 한다(欲)’는 글자를 눈여겨보자. 스스로 원한다는 뜻이다.

홀로 다름은 억지로 떠밀린 것도, 어쩔 수 없어서도, 마지못해서도 아니다. 오가 스스로 원한 것이다.

이 구절이 앞의 ‘자기 낮춤’을 모조리 뒤집는다. 열등감처럼 보이던 묘사들, 곧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惷惷, 어둑함, 흐리멍덩함, 고집스럽고 투박함이 ‘오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한다’를 만나는 순간 모두 뒤집힌다.

뭇사람처럼 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뭇사람처럼 되지 않기를 스스로 골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빠지기 쉬운 오독 하나를 막아 두어야 한다.

‘아’와 ‘오’의 구분을 보면 독자는 ‘가짜 나와 참된 나’, 혹은 ‘바깥의 나와 안쪽의 참된 나’라는 이분법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그렇게 읽으면 틀린다.

오는 아 뒤에 숨어 있는 감춰진 실체가 아니다. 더 깊은 자아도, 안쪽의 본질도, 참된 영혼도 아니다.

오는 ‘뭇사람의 기본값을 내 기본값으로 세우지 않는다’는 동작을 계속하고 있는 그 동작 자체다.

오는 실체가 아니라 동작이다.

바꿔 말하면, 아와 오는 두 개의 무엇(겉모습인 아와 참된 오)이 아니다.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동작을 할 때 차지하는 서로 다른 자리다. 이 사람이 뭇사람의 눈으로 그려질 때(눈에 비친 그 모습) 그를 ‘아’라 부른다. 이 사람이 뭇사람의 기본값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때(‘기본값을 따르지 않는’ 동작을 할 때) 그를 ‘오’라 부른다.

오는 어딘가에 있으면서 독자가 찾아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오는 기본값을 따르지 않기로 지금 스스로 고르는 바로 그 순간에 솟아난다. 이 동작이 없으면 오도 없고, 이 동작이 있으면 오가 거기 있다.

13장의 ‘오무신(吾無身)’과 ‘아유신(我有身)’과 한 줄기다.

13장: 아(관계의 층에 있는 신분)에게는 신(身)이 있지만, 오(알아차림의 자리)는 신분에 걸려 있지 않다.
20장: 아(그려지는 대상)는 뭇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이고, 오(알아차림의 주체)는 그 모습을 스스로 고른다.

두 장 모두 한 구체적인 주체 안에서 ‘아’와 ‘오’가 하는 서로 다른 동작을 말한다.

두 개의 자기가 아니다. 한 자기의 두 가지 동작의 자리다.

5.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오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한다’ 바로 뒤에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而貴食母)’가 이어진다.

이 장에서, 그리고 이 자화상 전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먹는다(食)는 양분을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어머니(母)는 도의 근원, 만물을 낳을 수 있으면서 자신은 아직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도 생겨나지 않은 자리다.

1장은 ‘유(有)’를 만물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고, 6장은 ‘현빈의 문’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같은 실마리를 따른다. 어머니는 완성된 한 물건이 아니라 사물이 자랄 수 있는 근원이다. 有가 어머니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자는 아니며, 이미 형태를 얻은 모든 것에 가치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뭇사람은 어디서 양분을 빨아들이는가? 장 앞부분이 이미 말했다.

큰 잔치(태뢰를 받음)
떠들썩함(봄날 누대에 오름)
주렁주렁 내건 것(모두 남음이 있음)
또렷이 보는 것(환히 밝고 꼼꼼히 살핌)
폼을 잡고 하는 일(모두 내세울 것이 있음)

모두 창발층에서 이미 생겨난 구체적인 구다.

뭇사람은 창발층의 이미 세워진 구에서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미 세워진 신분, 이미 세워진 판단, 이미 세워진 자세, 이미 세워진 가치에서 빨아들이며 배부름과 즐거움과 인정받는 느낌을 찾는다.

오는 거기서 빨아들이지 않는다.

오는 어머니의 자리에서, 도의 근원에서 곧바로 빨아들인다. 그 자리는 어떤 세워진 구보다도, 어떤 갈라짐보다도, 어떤 구체적인 형태보다도 앞선다.

오늘로 옮겨 보자.

창발층의 양분은 이런 데서 온다.

SNS의 ‘좋아요’, 팔로워 숫자, 인용되는 일, 주목받는 일, 칭찬받는 일, 기억되는 일, 바깥의 인정, 일에서 오는 성취감, 관계에서 오는 기댐, 재산에서 오는 안정감.

하나같이 이미 세워진 구가 주는 양분이다.

어머니에게서 곧바로 먹는 양분은 이런 데서 온다.

세상 그 자체를 곧바로 본다(이미 세워진 구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일 그 자체를 곧바로 한다(어떤 신분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조각, 아이 하나, 친구 하나를 곧바로 본다(그들을 분류하려 하지 않고).
지금 자기의 상태를 곧바로 겪는다(딱지를 붙이려 하지 않고).

이런 양분은 창발층에서 찾지 않고, 자기를 증명해 줄 바깥의 반응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귀히 여긴다(貴)’는 글자에 힘을 주어 읽어야 한다.

귀히 여긴다는 것은 ‘여기서 빨아들이기로 고른다’ 정도의 가벼운 말이 아니다. 이 양분이 창발층의 양분보다 귀하다는 것을 정말로 본다는 말이다.

뭇사람은 큰 잔치를 받고, 봄날 누대에 오르고, 남음이 있는 것을 귀히 여긴다. 먹기에 맛있고, 떠들썩하고, 푸짐하니까.

오는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도의 근원에서 빨아들이는 양분은 근원과 곧바로 통해서, 어떤 세워진 구에도 비틀리거나 묽어지거나 먹혀 버리지 않으니까.

가치 판단이 한 번 뒤집힌다.

세상이 귀히 여기는 것을 오는 세우지도 않고 거기서 빨아들이지도 않는다.
세상이 하찮게 보는 것을 오는 귀히 여긴다.

억지로 꾸민 청개구리 짓이 아니다. 노자는 어느 쪽이 참으로 귀한지를 정말로 보았다.

창발층의 간판과 떠들썩함은 먹기에 맛있고 보기에 푸짐하지만, 먹는 것은 이미 세워진 구다. 이미 세워진 구에 비틀리고 묽어지다가 끝내 그 구에 먹혀 버린다.

도의 근원에서 빨아들이는 양분은 맛이 없다(뭇사람의 눈에 이 사람은 배불리 먹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근원과 곧바로 통하고, 어떤 구체적인 구에도 비틀리지 않고, 어떤 구에도 먹혀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참된 귀함이다.


‘귀’ 자에 힘이 실리면 장 전체가 뒤집힌다.

앞의 모든 ‘자기 낮춤’은 더는 낮춤이 아니라, 이 양분이 어디서 오는지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도의 근원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는 사람은 뭇사람의 눈에 정말로 흥겹지 않고, 내건 것이 없고, 밝지 않고, 꼼꼼하지 않고, 폼을 잡지 않는다. 그의 양분이 그런 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고, 굼뜨고, 어둑하고, 흐리멍덩하고, 고집스럽고 투박해 보인다.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낳는 결과다.

6. 모습은 목적이 아니다

이 장을 다 읽었다.

읽고 나서 ‘아, 성인도 나처럼 외로웠구나’ 싶었다면 이 장을 감상의 장으로 읽은 것이다.

읽고 나서 ‘나도 노자처럼 조용하고, 간판을 내걸지 않고,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지’ 싶었다면 모습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모습은 목적이 아니다.

노자의 모습은 그의 양분이 오는 곳이 바뀐 뒤 저절로 드러난 모습이지, 그가 일부러 지어낸 모습이 아니다.

모습만 배우고(담담히 머물러 들뜨지 않음, 惷惷, 어둑하고 흐리멍덩함, 고집스럽고 투박함) 양분은 여전히 창발층에서 찾는다면, 알맹이 없이 모습만 흉내 내는 셈이고, 더 지치기만 한다.

왜 더 지치는가?

알맹이가 받쳐 주지 않는데 모습만 지어내려면 힘이 들기 때문이다. 조용히 있을 때마다, 간판을 내걸지 않을 때마다, 어수룩하게 굴 때마다 스스로 누르고 애써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누르는 일은 양분이 오는 곳이 바뀐 뒤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의지력이 자기 본능과 맞서 싸우는 데서 나온다.

의지력은 닳는다. 언젠가 바닥난다.

그래서 양분이 오는 곳은 바꾸지 않고 모습만 배우는 사람은 끝내 더 지친다.


20장이 독자에게 정말로 건네는 것은 ‘이 모습을 배우라’가 아니라 다른 물음이다.

당신의 양분은 어디서 오는가?

창발층의 이미 세워진 구(좋아요, 인정, 간판, 바깥의 반응, 관계 속의 기댐)에서 오는가, 아니면 세상 그 자체, 일 그 자체, 지금의 경험 그 자체에서 곧바로 빨아들이는가?

앞쪽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니 바꿀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양분의 대가는 똑똑히 보아야 한다. 이미 세워진 구에 비틀리고, 바깥의 공급이 끊기면 불안해지고, 끝내 구에 먹혀 버린다.

뒤쪽으로 옮겨 가고 싶다면, 모습을 바꿀 일이 아니라 양분을 빨아들이는 자리를 바꿀 일이다.

모습은 저절로 따라 바뀌고, 스스로 누를 필요도 없다.

노자의 ‘홀로 남과 다름’은 결과이지 입구가 아니다. 입구는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김’이다.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이 일을 귀하게, 창발층의 어떤 떠들썩함보다도 귀하게 본다는 것이다.

이 일의 귀함을 보면 양분을 빨아들이는 자리는 저절로 바뀐다. 양분의 자리가 바뀌면 모습은 저절로 드러난다.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