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되 세우지 않는다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绝圣弃知,民利百倍。绝仁弃义,民复孝慈。绝巧弃利,盗贼无有。此三言也,以为文未足,故令之有所属:见素抱朴,少思寡欲,绝学无忧。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바로 앞 장에 이어서
18장에서 노자는 간판을 내거는 윗자리의 사람들을 들이받았다. 너희가 내세우는 미덕이야말로 너희가 망가졌다는 증거라고.
19장은 곧바로 그 뒤를 잇는다. 그렇다면 간판을 내걸지 않는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 노자는 이어서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림 속의 사람은 이렇다.
성(聖)을 가졌지만 ‘성’을 세우지 않는다.
앎을 가졌지만 ‘앎’을 세우지 않는다.
인의를 행하지만 ‘인의’를 세우지 않는다.
솜씨가 있지만 ‘솜씨’를 세우지 않는다.
이(利)를 알지만 ‘利’를 세우지 않는다.
그는 이 모두를 가졌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세우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본으로 내거는 간판으로 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19장은 15장이 그려 보인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의 모습을 잇는다. 간판을 세우지 않는 이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어서 그린다.
2. 절(絶)은 끊음이 아니라 빼어남이다
이 절은 絶의 ‘독보적이다’라는 뜻으로 이 글의 읽기를 펼친다. 다른 해석을 배제한 훈고의 결론은 아니다. 지키려는 것은 가진 것과 강요하는 것의 차이다. 지식이 있어도 그 안에 남을 가두지 않을 수 있다. 뒤의 ‘절학’도 배움을 거부하는 말이 아니라 정해진 답이 눈앞의 일을 대신 보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9장은 첫머리에 세 구절을 내놓는다.
절성기지(絶聖棄知)하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 배가 된다.
절인기의(絶仁棄義)하면 백성이 효와 자애로 돌아온다.
절교기리(絶巧棄利)하면 도둑이 없어진다.
(絶聖棄知,民利百倍。絶仁棄義,民復孝慈。絶巧棄利,盜賊無有)
역대로 이 세 구절을 가장 흔하게 읽어 온 방식은 ‘절(絶)’을 반대한다, 걷어 낸다로 보는 것이다. 절성은 성인을 반대하는 것이고, 기지는 지식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노자는 반지성주의자, 모든 미덕에 등을 돌린 허무주의자가 된다.
빗나간 읽기다.
여기서 ‘절’은 ‘반대한다’ 쪽의 뜻이 아니다. 한자의 ‘절’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이 있다. 홀로 빼어나서 견줄 데가 없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절기(絶技), 절창(絶唱), 절세가인(絶世佳人), 절경(絶景)이 모두 이 뜻이다.
이 뜻으로 읽으면 ‘절성’은 성을 반대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은 어떤가?
절세가인은 자기가 아름답다고 내세울 필요가 없다.
절기를 지닌 사람은 자기 솜씨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성이 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기에게 성이 있다고 내세울 필요가 없다.
절은 정도의 끝이다. 그 정도에 이르면 딱지는 저절로 떨어진다. 딱지를 세울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딱지를 세우면 도리어 격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노자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읽으려면 가짐과 세움이라는 두 동작을 떼어 놓아야 한다.
가짐이란 자기에게 정말로 그것이 있고, 자기가 정말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움이란 그것을 간판으로 들어 올려 ‘나에게 이것이 있다’, ‘이것이 가장 높다’, ‘너희는 이것을 따라야 한다’고 남에게 알리는 것이다.
성이 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여전히 성을 가졌지만 ‘성’을 간판으로 세우지 않는다.
어짊이 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여전히 인의를 행하지만 ‘인의’를 간판으로 세우지 않는다.
솜씨가 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여전히 솜씨가 있지만 ‘솜씨와 利’를 간판으로 세우지 않는다.
가지되 세우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절의 경지에 이르도록 가졌기에, 저절로 간판을 세울 필요가 없다.
노자는 책 전체에 걸쳐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을 그린다.
15장은 겉모습을 그렸다. 조심스럽구나,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다. 머뭇거리는구나, 사방 이웃을 어려워하는 듯하다. 깊어서 알아볼 수 없다.
17장은 다스리는 자세를 그렸다. 가장 높은 이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10장은 수행을 세웠다. 여섯 물음과 현덕(玄德)이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에게 성도 앎도 인의도 없다면, 앞의 이 장들은 대체 누구를 그린 것인가?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성스럽다. 구조가 돌아가는 것을 본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앎이 있다. 여항(餘項)을 잘 쓸 줄 안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인의를 행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에게서 참으로 돌아간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솜씨가 있다. 손을 움직여 일을 해낼 줄 안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利를 안다. 물건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본다.
그는 다 가졌다. 다만 간판을 들지 않을 뿐이다.
3. 세 방향의 가지되 세우지 않음
첫째 묶음: 절성기지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성이 절의 경지에 이르렀어도 성을 간판으로 세우지 않는다. 자기에게 앎이 있어도 그 앎을 백성의 기본 잣대로 깔지 않는다.
왜 세우지 않는가?
‘성’을 간판으로 세우는 순간, 아래 사람들은 떠받들거나, 흉내 내거나, 맞선다. 주의가 모조리 간판에 묶여 버린다.
‘앎’을 기본 잣대로 까는 순간, 백성은 그 앎을 가장 높은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제 앎을 키워 내지 못한다.
2026년의 실리콘밸리에서도, 판교에서도 어디서나 보이는 일이다.
간판을 세우는 쪽은 이렇다.
링크드인 프로필에 ‘전략가, 비저너리 리더, AI 혁신가’ 같은 유행어를 줄줄이 달아 둔다.
X에서 자기가 업계의 사고 리더이고, 회사를 몇 개 세웠고, 경제지 표지에 나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팟캐스트에 나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거듭 역설한다.
간판을 세우지 않는 쪽은 이렇다.
프로필에는 ‘엔지니어’라고만 적는다.
묵묵히 코드를 짜고, 제품을 만들고, 논문을 읽는다.
일을 마치면 조용히 글 하나 올리고,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 같은 정리는 붙이지 않는다.
팟캐스트에는 나가지 않는다.
간판을 세우는 사람에게 정말로 그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는 정말로 비전이 있고, AI를 정말로 알고, 제품을 정말로 잘 만들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그것을 간판으로 세우기로 골랐다.
간판이 서는 순간 그의 주변 사람들은 간판에 묶인다. 떠받들거나(“와,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 흉내 내거나(“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 맞선다(“별거 없던데”). 주의는 모두 그 사람에게 가고, 정작 해야 할 일에는 가지 않는다.
간판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 간판을 세우는 사람보다 모자라다는 법은 없다. 다만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제 공간이 있다. 그의 간판에 묶이지 않으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해 보고, 스스로 제 방향을 키워 낼 수 있다.
‘백성의 이로움이 백 배가 된다’는 우선 백성에게 큰 이익이 생긴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11장에서 이어 그 이익을 스스로 움직일 공간으로 펼쳐 읽는다. 한 사람의 기준대로 자라지 않아도 될 때 자기 판단을 키울 여지가 생긴다. 해석의 확장이지 利의 옛 뜻에서 이익을 배제하거나 백 배를 측정값으로 삼는 말은 아니다.
자기 간판으로 남의 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미리 써 주지 않은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함육이다.
둘째 묶음: 절인기의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어짊이 절의 경지에 이르렀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스스로 할 뿐 ‘인의’를 간판으로 세우지 않는다.
18장에서 말했다. ‘큰 도가 무너지니, 그래서 인의가 있다.’ 큰 도가 돌아갈 때는 아무도 인의를 말할 필요가 없다.
19장은 18장을 정면에서 이어받는다. 인의라는 간판을 세우지 않으면 백성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스스로 솟아난다.
‘백성이 효와 자애로 돌아온다(民復孝慈)’의 복(復)은 돌아간다는 뜻이다. ‘효와 자애’라는 간판을 새로 세운다는 말이 아니다(그러면 또 세우는 셈이다). 백성에게 본래 있던 가족 사이의 정, 자연스러운 보살핌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효와 자애’라는 간판이 짓누르지 않고 ‘인의’라는 간판이 비틀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효와 자애는 저절로 드러난다.
오늘로 옮기면, ‘인의’의 간판을 세우는 쪽은 이렇다.
부모가 친척과 친구들 앞에서 ‘내가 애한테 얼마나 잘하는데’를 거듭 말한다.
회사가 ‘우리는 가족입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SNS에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사진을 거듭 올린다.
간판을 세우지 않는 쪽은 이렇다.
부모는 말은 별로 하지 않고 아이에게 정말로 좋은 일을 그냥 한다.
회사는 직원에게 정말로 좋은 일을 그냥 하고, 문화는 저절로 자라난다.
참된 가족 관계는 사진마다 화목하지는 않아도, 거기서 돌아가고 있다.
간판을 세우는 쪽이 꼭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간판이 서는 순간 그 안의 참된 관계가 거꾸로 간판에 의해 정의되기 시작한다. 무엇을 하든 먼저 ‘인의’라는 간판에 맞는지를 따지고, 무엇을 하든 먼저 SNS에 올렸을 때 보기 좋은지를 따진다.
간판이 거꾸로 그 안의 참을 식민화(殖民化)한다. 간판을 세우지 않으면 참된 관계는 스스로 돌아간다.
셋째 묶음: 절교기리
같은 利에서도 초점이 바뀐다. 앞에서는 백성이 얻는 이익을, 여기서는 경쟁 목표로 내건 이익을 본다. 사전 뜻을 억지로 둘로 나누기보다 이익이 어떻게 다툼의 대상이 되는지 묻는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솜씨가 절의 경지에 이르렀어도, 스스로 일을 해내고 스스로 물건을 볼 뿐, ‘솜씨’를 신분의 간판으로 세우지 않고 ‘물건’을 희소한 것으로 세우지 않는다.
오늘로 옮기면, 간판을 세우는 쪽은 이렇다.
마케팅팀이 한정 판매, 기간 한정 할인, 인플루언서 착용템으로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다.
어떤 기술을 높은 신분의 표지로 세운다. ‘X를 할 줄 알아야 진짜 엔지니어지.’
간판을 세우지 않는 쪽은 이렇다.
물건은 그냥 물건이고, 쓸 수 있으면 쓴다.
할 줄 알면 쓰고, 모르면 배운다. 기술을 신분으로 세우지 않는다.
간판이 서면 희소성이 만들어지고, 도둑질이 솟아난다.
세우지 않으면 희소성이 만들어지지 않고, 도둑질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3장의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이 되지 않는다(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와 같은 줄기다.
4. 새 간판이 되지 않도록
세 묶음의 ‘절’을 말하고 나서, 노자는 아주 중요한 다리 하나를 놓는다.
이 세 마디 말은 글로 삼기에 모자라다고 여겨, 그래서 딸려 둘 곳을 마련한다. (此三言也,以爲文未足,故令之有所屬)
백서는 ‘삼언(三言)’, 곧 세 마디 말이다. 노자는 자기가 세 마디 말을 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힌다.
통행본은 ‘삼자(三者)’, 곧 이 세 가지다.
한 글자 차이다.
‘삼언’으로 읽으면 노자는 ‘내가 방금 한 것은 세 마디 말이다’라고 스스로 의식하며 말하고, 말에서 행함으로 넘어가는 분명한 전환이 있다. ‘삼자’로 읽으면 ‘이 세 가지’라는 흐릿한 가리킴이 될 뿐이다.
이 글자 차이가 왜 중요한가?
이 대목이 노자가 자기 말이 새 간판으로 세워지지 않도록 스스로 막는 결정적인 다리이기 때문이다.
‘절성기지, 절인기의, 절교기리’를 말하자마자 노자는 곧바로 함정 하나를 알아챈다. 독자가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절성기지를 이루고 말겠다!”
“나는 절인기의를 이루고 말겠다!”
“나는 절교기리를 이루겠다!”
독자가 이렇게 읽는 순간 세 마디 말은 새 간판, 새 잣대, 새 목표로 세워진다.
노자는 분명히 간판을 세우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가르침 자체도 새 간판으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노자는 스스로 알아서 지금 이 자리의 수행으로 내려앉는다. ‘흰 바탕을 보고 통나무를 품고, 생각을 줄이고 바람을 적게 하고, 절학하면 근심이 없다.’ 무언가를 그려 보이는 ‘절’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자세로 내려오는 것이다.
노자의 이 자각은 중요하다.
그는 함육하는 스승이 하기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 방향을 분명하게 가리켜 독자에게 보여 주면서도, 자기가 가리킨 방향이 독자에게 반드시 도달해야 할 종착점으로 세워지지 않도록 먼저 막는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말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이 당신을 짓누르는 간판이 되게 두지는 않는다.
함육의 섬세함이 여기에 있다.
5. 지금 할 수 있는 세 가지 수행
뒤의 세 가지는 이르러야만 합격인 종착점이 아니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이 지금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자세다.
흰 바탕을 보고 통나무를 품는다(見素抱樸).
소(素)는 물들이지 않은 흰 명주실이고, 박(樸)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다.
흰 바탕을 본다는 것은 물들기 전의 본래 모습을 본다는 것이다.
통나무를 품는다는 것은 다듬기 전의 본래 그대로를 지킨다는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도, 원시 상태로 물러나자는 말도 아니다. 구(構)가 서기 전의 자리를 지킨다는 말이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의 지금 자세는 이렇다. 스스로 물들이지 않고, 스스로 다듬지 않고, 보는 것과 품는 것을 구가 서기 전의 본래 모습 그대로 둔다.
오늘로 옮기면 이렇다.
동료가 업무 보고를 할 때, 마음속에서 서둘러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이 사람은 X 유형이군’).
새로운 현상을 볼 때, 서둘러 이미 있는 개념의 틀 속으로 분류해 넣지 않는다.
자기 감정을 볼 때, 서둘러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이건 불안이야’).
물들지 않은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다.
생각을 줄이고 바람을 적게 한다(少思寡欲).
백서는 ‘소사(少思)’, 곧 생각 사(思)이고, 통행본은 이것을 ‘소사(少私)’, 곧 사사로울 사(私)로 고쳤다. 우리말로는 소리마저 같은 한 글자 차이다.
생각을 줄인다(少思)는 것은 생각의 구를 적게 세운다는 뜻이다.
사사로움을 줄인다(少私)는 것은 이기심을 줄인다는 뜻이다.
백서로 읽으면 생각을 줄이는 일은 구조의 조작이다. 생각의 구를 적게 세우는 것이다.
통행본으로 읽으면 사사로움을 줄이는 일은 도덕 규범이다. 이기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백서로 읽으면 앞의 세 구절, 절성기지와 절인기의와 절교기리가 모두 구조의 조작이고, 이 구절도 구조의 조작이며, 다음 구절 ‘절학무우’도 구조의 조작이다. 장 전체가 한 줄로 꿰인다.
통행본의 ‘사사로움을 줄인다’로 읽으면 한가운데에 느닷없이 도덕 규범의 층이 끼어들어 흐름이 끊긴다.
생각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이 솟아날 때 서둘러 구를 세우지 않고, 서둘러 판단을 내리지 않고, 서둘러 일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바람을 적게 한다는 것은 바람이 꿈틀거릴 때 그것을 보되, 그것을 따라 앞질러 구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두 가지 구조의 조작이다.
절학하면 근심이 없다(絶學無憂).
배움은 앞선 사람의 지식과 연습과 방법을 이어받게 한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이미 세워진 구조로 들어가는 일로도 읽는다. 이는 해석을 잇는 다리이지 爻가 ‘구’를 뜻한다거나 學의 본뜻이 구조의 전수라고 입증하는 어원 설명은 아니다.
절학은 배우기를 거부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세워진 구로 들어가기’를 기본값으로 삼는 일을 내려놓는다는 말이다.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지금 일을 만났을 때, ‘앞사람은 어떻게 했나’부터 묻지 않고, ‘체계에는 어떻게 정해져 있나’부터 묻지 않고, 이미 세워진 구부터 갖다 대지 않는다. 배워야 할 때는 배운다. 다만 배움을 기본으로 드나드는 입구로 삼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는가? 배움을 기본 입구로 삼는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 내릴 자기 판단이 이미 세워진 구에 묶여 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로 옮기면 이렇다.
새로운 문제를 만났을 때, 구글에서 ‘업계 베스트 프랙티스’부터 검색하지 않는다. 먼저 스스로 생각한다.
제품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경쟁사는 어떻게 했나’부터 보지 않는다. 먼저 사용자를 스스로 본다.
코드를 짤 때, ‘표준 디자인 패턴’부터 찾지 않는다. 먼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한다.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배움을 기본 입구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심이 없다’는 한 가지 짐을 놓는 것이다. 정해진 답을 지키는 일이 내 책임의 전부가 아니면 그것이 무너질까 하는 불안도 줄어든다. 삶에서 고통이 사라진다는 약속도, 어려운 문제 앞에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도 아니다.
8장에서 보았던 ‘X하지 않으니 X가 없다(不 X → 無 X)’ 꼴의 한 사례다. 자세가 결과를 저절로 불러온다.
6. 절학무우는 이 장의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글자 차이 하나를 짚어 두어야 한다.
백서는 ‘절학무우(絶學無憂)’를 19장 끝에 두어, 세 가지 수행의 셋째로 삼는다.
통행본은 ‘절학무우’를 20장 첫 구절로 잘라 옮겨, 홀로 떨어져 있게 만들었다.
백서로 읽으면 19장은 ‘세 번 깨뜨리고 세 번 거두는’ 완결된 그림이다.
세 번 깨뜨림: 절성기지, 절인기의, 절교기리. 세 방향에서 가지되 세우지 않음을 보여 준다.
세 번 거둠: 견소포박(見素抱樸), 소사과욕(少思寡欲), 절학무우. 지금 할 수 있는 세 가지 수행이다.
네 개의 ‘절’ 자(앞의 세 번 깨뜨림과 넷째인 절학)가 글자 쓰임의 완결된 계보를 이룬다.
‘배우지 않음 → 근심 없음’은 군더더기 없는 ‘不 X → 無 X’ 꼴이다.
가르침의 구조가 완결되어, 말에서 행함으로 넘어가 마지막에는 지금 할 수 있는 수행으로 내려앉는다.
통행본으로 읽으면 19장은 ‘사사로움을 줄이고 바람을 적게 한다’에서 끊겨 수행으로 거두는 마무리가 없다. 20장 첫 구절 ‘절학무우’는 홀로 떨어져, ‘유지여아(唯之與阿)’로 시작하는 20장 본문과 이어지지 않는다.
두 판본의 차이는, 한 장의 완결된 그림이 두 쪽으로 잘렸다는 데 있다.
백서로 읽으면 19장은 한 장의 완결된 그림이다. 가지되 세우지 않음, 그리고 지금의 세 가지 수행.
7. 그림은 목표가 아니다
이 장을 다 읽고 ‘나는 절성기지를 이루고 말겠다! 흰 바탕을 보고 통나무를 품고 말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 노자가 그 다리 구절에서 일부러 막아 둔 바로 그 함정에 빠진 것이다.
‘절성기지’나 ‘견소포박’을 이루어야 할 목표로 세우면, 그것이 곧 새 간판이 된다.
그림은 목표가 아니다.
그림은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보여 주는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이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이렇게 움직이게 된다. 그림에 맞추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보고 ‘맞아, 내가 이렇지’ 싶다면 그림은 제 몫을 한 것이다.
그림을 보고 ‘나는 여기서 한참 멀구나’ 싶다면 그것도 제 몫을 한 것이다. 방향을 보았으니까.
다 보고 나서 아무 느낌이 없다면 그것도 제 몫을 한 것이다. 모든 그림을 모든 사람이 당장 알아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여기 있다. 뜻을 세운 사람은 저마다 제 길을 간다.
어느 순간 서둘러 간판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 순간 당신은 그림 속에 있다.
어느 순간 이미 있는 구부터 배우러 달려가지 않는다면, 그 순간 당신은 그림 속에 있다.
어느 순간 감정을 물들지 않은 모습 그대로 둔다면, 그 순간 당신은 그림 속에 있다.
그림에 이르러야 셈에 드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하나하나가 모두 제자리에 이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