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요란한 간판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故大道废,案有仁义;智慧出,案有大伪;六亲不和,案有孝慈;邦家昏乱,案有贞臣。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가장 요란한 간판은 가장 허름한 가게에 걸린다
이런 구조가 있다. 무언가를 목청 높여 내세운다면, 대개 그것을 이미 잃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직원을 소중히 여깁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줄줄이 퇴사하고 있다.
‘고객이 먼저입니다’를 외치는 플랫폼에서는 사용자가 빠져나가고 있다.
‘공정과 정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나라에서는 사회의 공정과 정의에 탈이 났다.
링크드인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열심히 설파하는 사람은 정작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있다.
친구들 앞에서 ‘우리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를 굳이 강조하는 부부는 어떤 위기를 지나고 있다.
가장 요란한 간판은 대개 가장 허름한 가게에 걸려 있다.
어떤 미덕을 가장 힘주어 내세우는 사람이 대개 그 미덕이 가장 모자란 사람이다.
노자는 18장에서 단 네 구절로 이 일의 구조를 밝혀 놓았다.
2. 네 구절
18장은 짧다. 네 구절이 네 가지 긴장을 드러낸다.
큰 도가 무너지니 인의가 있다.
지혜가 드러나니 큰 거짓이 있다.
육친이 화목하지 않으니 효도가 있고 자애가 있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곧은 신하가 있다.
여기서 내가 묻는 것은 이름이 높이 내걸릴 때 그 밑의 생활은 어떤가 하는 점이다. 덕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덕이 없다는 증명이 아니다. 공정을 요구하는 말이 공정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이름이 실제 행동을 대신하는지를 살핀다.
큰 도가 무너지니 인의가 있다.
이웃이 돕고 친구가 이야기를 듣고 어려울 때 손을 내민다. 그때마다 ‘인의’라는 간판을 걸지 않아도 관계는 살아 있다. 하지만 직원을 소진시키는 회사가 벽마다 ‘직원 존중’을 붙인다면 간판이 실제 생활을 가리고 있다.
업무량, 보수, 고충을 말할 통로는 달라졌는가? 좋은 구호만으로 상한 관계가 낫지는 않는다. 더 묻지 못하게 하는 간판이라면 회복을 대신하는 가림막이 된다.
지혜가 드러나니 큰 거짓이 있다.
여기서 겨누는 것은 지혜의 공연이다. 문제를 이해하기보다 ‘나는 통찰력이 있다’는 모습으로 권위를 얻으려 한다. 지식을 전하는 일 자체가 거짓은 아니다. 잘 설명하는 교사는 상대의 판단 능력을 키운다. 설명이 감탄과 복종을 요구하는 자리가 되면 방향이 바뀐다.
정말 많이 아는 사람도 그 앎으로 남의 질문을 막을 수 있다. 지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쓰는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육친이 화목하지 않으니 효도와 자애가 있다.
서로 돌보는 가족은 밥을 먹을 때마다 모범 가족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상처받은 사람은 말을 못 하고 밖에서는 ‘우리 집은 화목해’만 되풀이한다면 효와 자애가 침묵을 강요하는 이름이 될 수 있다.
효와 자애를 이야기하며 관계를 고칠 수도 있다. 다음 행동이 갈림길이다. 가족의 어려움을 듣는가, ‘부모에게 효도해야지’로 대화를 끝내는가? 전자는 돌봄을 생활로 돌려놓고 후자는 그 이름을 권력의 도구로 만든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곧은 신하가 있다.
혼란 속에서 충실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위기 때 참된 충신을 알아본다는 읽기도 가능하다. ‘곧은 신하’라는 말 자체를 잘못된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것도 충실함이다.
다만 윗사람은 어느 충실함을 포상하는가? 잘못을 지적하고 백성을 지키는 사람인가, 잘못 앞에서도 복종을 약속하는 사람인가? 후자에게 명예로운 이름을 주면 잘못을 바로잡기 어려워진다.
비판하는 것은 이렇게 권력에 동원된 간판이지 모든 충신의 용기가 아니다. 덕을 보자마자 냉소하라는 뜻도 아니다. 그 이름 아래 무엇이 가능해지고 무엇이 불가능해지는지 보자는 것이다.
3. 노자는 윗자리를 들이받는다
네 구절을 함께 읽으면 권력에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인의를 말하는 당신은 사람을 실제로 잘 대하는가? 지혜를 보이는 당신에게 여전히 질문할 수 있는가? 효와 자애를 말하는 집에서 상처받은 사람도 말할 수 있는가? 충성을 포상하는 당신 곁에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의 자리는 있는가?
덕 자체가 죄의 증거는 아니다. 그렇다고 간판이 대답을 대신하지도 못한다. 믿게 하고 싶은 이야기와 실제로 남에게 살게 하는 삶이 서로 다른지를 묻는 것이다.
많은 독자가 품고 있는 노자의 인상과는 다르다.
노자를 떠올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구름 위의 은자, 온화한 철학자, 세상 밖에 초연히 선 현자를 생각한다. 그런데 『도덕경』에는 이런 장이 적지 않다.
12장은 구(構)를 세우는 쪽이 백성의 감각의 자리를 채워 넣는 것을 비판했다.
17장은 다스리는 사람을 네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대부분이 둘째 등급 아래에 있었다.
18장은 미덕의 간판을 정면으로 까발린다.
노자는 한 번도 온화한 철학자였던 적이 없다. 어느 장에서든 자기가 본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강요하지 않는다. 할 말을 다 하고 나면, 어떻게 할지는 독자가 정한다.
함육하는 스승의 자세가 이것이다. 참을 말하되, 조종하지 않는다.
4. ‘안(案)’ 한 글자
이 글의 정리본문은 네 구절에 ‘안유(案有)’를 남기고 통행본은 ‘유(有)’로 적는다. 여기서는 案을 앞의 사정과 뒤에 나타나는 덕의 이름을 이어 주는 말로 읽는다.
그렇다고 그 글자가 없으면 인과나 조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옛 한문은 접속어 없이도 그런 관계를 나타낸다. 차이는 강조점이지 논리의 유무가 아니다.
12장부터 18장까지 몇 가지 표현이 이 읽기를 이끌었다.
- 12장 ‘성인지치’는 다스림이 생활에 무엇을 하는지 묻는다.
- 13장 汝는 천하를 맡기는 일을 눈앞의 사람에게 직접 묻는다.
- 14장 ‘집금’은 답을 과거에만 맡기지 않고 지금의 일로 들어간다.
- 15장 ‘폐이불성’은 완성된 모습을 종착점으로 삼지 않는다.
- 16장 ‘수정표’는 사물이 드러내는 실제 모습에 머문다.
- 17장 ‘하지유지’는 왕필본도 같다. 두 판본의 글자 차이는 아니지만 자리에 있으면서 지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 18장 ‘안유’는 덕의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게 한다.
이것은 일곱 번의 개작 역사가 아니라 읽기의 길이다. 누가 차이를 만들었는지, 선의였는지 악의였는지 모두 안다고 할 수 없다. 통행본에도 여러 읽기가 가능하다.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싶다. 멀리서 초탈만 말하는 노자가 아니라 가까이서 권력과 관계와 지금의 행동을 묻는 노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 날카로움을 생활로 가져오고 싶다.
5. 스스로 점검하기: 당신의 간판
이 장은 윗자리를 들이받는 장이지만, 뜻을 세운 독자에게는 스스로를 점검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함육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층을 보아야 한다.
어떤 이름을 내세워 자기를 떠받쳐야 하게 되었다면,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이 장으로 네 가지 점검을 해 볼 수 있다.
‘인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면.
어떤 관계, 어떤 일, 어떤 프로젝트에서 요즘 들어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하는데’, ‘나는 원칙이 얼마나 확고한데’, ‘나는 얼마나 공정한데’를 힘주어 말하고 있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이 관계, 이 일, 이 프로젝트의 큰 도가 이미 무너졌고, 나는 인의로 허물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혜를 내보이기 시작했다면.
요즘 들어 자기에게 통찰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을 잔뜩 쓰고, 유튜브나 팟캐스트에서 자기 인사이트를 거듭 내세우고, SNS에서 내가 얼마나 정확히 내다봤는지를 쉬지 않고 보여 주고 있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덮어야 할 잘못이 있어서 지혜를 내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효와 자애를 권장하기 시작했다면.
요즘 들어 가족 관계에서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를 거듭 강조하고, 인스타그램에 화목한 가족사진을 올리고, 밖에서 ‘나는 가족을 얼마나 챙기는데’를 말하고 있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 집안에 이미 탈이 났는데, 나는 이름으로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충성과 곧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면.
요즘 들어 어떤 조직, 어떤 리더, 어떤 브랜드, 어떤 믿음에 대한 충성을 거듭 표명하고 있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내가 충성하는 대상이 이미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나는 충성으로 그 잘못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약속일 수도, 가림막일 수도 있다. 그 말을 썼는지가 아니라 말한 뒤 사실과 질문을 더 잘 받아들이는지를 살핀다. 이름이 질문을 면제받는 증서가 될 때 현실을 가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을 보면 방향을 돌릴 기회가 남아 있다.
이 층이 독자에게 갖는 뜻은 ‘평생 간판을 내걸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간판을 내걸고 있는 자기를 그 순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알아보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6. Paper 2를 맺으며
18장은 이 연작에서 앞의 아홉 장을 맺는 장이다.
10장부터 18장까지, 노자는 독자를 데리고 한 구간을 걸어왔다.
10장은 주체를 하나로 모았다. 영과 백을 하나로 품고, 여섯 물음을 던지고, 현덕(玄德)을 말했다.
11장은 구를 세우는 일과 자리를 비워 두는 일이 한 동작임을 보였다.
12장은 다스리는 사람이 창발층을 식민화(殖民化)하지 않는다고 했다.
13장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일하되 알아차림이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14장은 도가 오늘 매 순간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15장은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의 일상 사진 일곱 장을 보여 주었다.
16장은 두 갈래 길을 펼쳐 보였다.
17장은 다스리는 사람의 네 등급으로 거울을 비추었다.
18장은 네 가지 미덕의 간판을 가려내는 진단의 자를 내놓았다.
아홉 장을 합치면 독자에게 건네지는 것은 바로 지금 쓸 수 있는 도구 한 벌이다.
일곱 장의 사진으로는 지금의 자세를 스스로 재어 볼 수 있다.
두 갈래 길로는 지금의 선택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다.
네 등급의 표로는 다스림의 관계를 진단할 수 있다.
네 개의 미덕 진단 자로는 간판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철학이 아니라 지금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아홉 장을 함께 놓고 노자를 지금 가까이 데려오고 싶다. 구체적으로 묻고 독자가 더 물을 여지를 남기는 사람으로서다. 판본마다 다른 표현은 읽기의 갈림길을 보여 주지만 생활을 직접 보는 눈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누가 글을 망가뜨렸는지 먼저 증명하지 않아도 질문은 쓸 수 있다. 나는 지금 어느 등급인가? 일이 달라지는 모습이 보이는가? 내건 이름이 원래 지키려던 사람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 연작을 다 읽고 나면 독자는 알게 될지 모른다. 노자는 답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물음 한 묶음을 건넨다.
순간마다 물음 한 묶음이 기다리고 있다.
순간마다 한 번씩 비춰 볼 수 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비춰 보는 것, 그것이 함육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