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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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21장 · 총 81장

어머니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孔德之容,唯道是从。道之物,唯恍唯惚。惚呵恍呵,中有象呵。望呵惚呵,中有物呵。幽呵冥呵,中有精呵。其精甚真,其中有信。自古及今,其名不去,以顺众父。吾何以知众父之然?以此。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어머니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20장은 노자의 이 한마디로 끝났다.

나(吾)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하니,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吾欲獨異於人,而貴食母)

오(吾)는 홀로 남과 다르기를 스스로 원하고,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어머니는 도(道)의 근원이다. 어머니에게서 먹는다는 것은 도의 근원에서 곧바로 양분을 빨아들인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어머니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 도의 근원에서 곧바로 빨아들이는 양분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21장은 곧바로 이 물음을 연다. 도의 근원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노자가 정면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다.

『도덕경』 전체를 통틀어 ‘도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를 정면으로 말하는 장은 몇 되지 않는다. 앞의 장들도 도가 돌아가는 모습을 말했고(4장의 깊은 근원, 6장의 현빈), 도의 자리에 이름을 붙였고(14장의 ‘상태 없는 상태’), 도의 근원을 짚었다(20장의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그러나 도 안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를 정면으로 연 장은 없었다.

21장이 그것을 연다.

2.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좇는다

21장은 첫머리부터 이렇게 말한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만을 좇는다. (孔德之容,唯道是從)

공(孔)은 크고 깊고 넓다는 뜻이다. 공덕(孔德)은 가장 깊은 덕이다. 앞의 장들에서 덕(德)을 개체의 여항(餘項)으로 세웠는데, 공덕은 그 덕의 가장 깊은 자리다. 공을 쌓는다고 할 때의 공덕(功德)과는 글자가 다르다. 용(容)은 모습, 자태다. 그러니 공덕지용(孔德之容)은 가장 깊은 덕이 지닌 모습이다.

오직 도만을 좇는다는 것은 도 말고는 아무것도 좇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름, 곧 구(構)도 좇지 않고, 뭇사람의 잣대도 좇지 않고, 이미 세워진 어떤 것도 좇지 않는다. 오직 도만 좇는다.

이 구절은 앞 장 끝의 ‘오는 홀로 남과 다르고자 하니,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에 곧바로 이어진다. 어머니에게서 먹는 사람이 곧 큰 덕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도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니, 그의 덕이 드러내는 모습도 오직 도만을 좇는다.

장 전체가 이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이 이러하다면, 도는 어떤 모습인가? 이어지는 대목이 그것을 정면으로 펼친다.

3. 혼돈의 네 가지 상태

노자는 이어서 네 가지 상태로 도의 근원 안을 그려 보인다.

도라는 것은 오직 어른거리고 오직 아스라하다.
아스라하구나, 어른거리는구나, 그 가운데 형상이 있구나.
멀리 바라보는구나, 아스라하구나, 그 가운데 사물이 있구나.
그윽하구나, 어둡구나, 그 가운데 정수가 있구나.
(道之物,唯恍唯惚。惚呵恍呵,中有象呵。望呵惚呵,中有物呵。幽呵冥呵,中有精呵)

아래에서는 형상·사물·정수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림으로 읽는다. 이 글의 독법이지 어원으로 증명된 우주의 층위는 아니다.

첫째 층: 황홀(恍惚)

도라는 것은 곧 황홀이다. 우리말에서 ‘황홀하다’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굳었지만, 여기서는 글자대로 읽어야 한다.

황홀(恍惚)에서는 무언가 보였지만 아직 붙잡아 정할 수 없는 경험을 읽는다. 여기서는 밝음과 어둠의 이미지로 그 경험을 따라간다. 글자의 부품을 나누어 증명하는 어원 풀이가 아니다.

둘을 합치면, 환하지만 아직 모양이 없고, 거기 있지만 붙잡히지 않는다. 혼돈(渾沌)의 가장 얕은 상태이고, 1장에서 세운 그 자리, 무(無)다.

이 상태를 두고 노자는 ‘그 가운데 무엇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층 안에는 따로 짚어 낼 구체적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황홀 자체가 이 상태의 전부다.

둘째 층: 홀황(惚恍)

글자 순서가 뒤집혔다. 황홀이 홀황이 되었다.

이 층에서는 형상, 곧 상(象)이 솟아난다. 모양이 움트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사물은 아니고, 모양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비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셋째 층: 망홀(望惚)

여기서는 望의 멀리 바라본다는 뜻에서 방향을 읽는다. 아직 잡히지 않지만 이미 그쪽을 보고 있다.

‘멀리 바라보는구나, 아스라하구나’는 향하는 쪽은 있지만, 향하는 그 대상은 아직 아스라함 속에 있다는 말이다.

이 층에서는 사물, 곧 물(物)이 솟아난다. 구체적인 사물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넷째 층: 유명(幽冥)

유명(幽冥)은 더 깊고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장면을 옮긴다. ‘산속의 두 점 불빛’을 글자의 기원으로 삼는 대신, 이 구절이 불러오는 깊음과 어둠을 읽는다.

둘을 합치면 가장 깊은 곳, 보이지 않는 곳이다.

이 층에서는 정수, 곧 정(精)이 솟아난다. 혼돈 속에서 가장 순수한 것은 가장 깊은 자리에서만 솟아난다.


네 층을 한데 놓고 보자.

황홀(恍惚) → 홀황(惚恍) → 망홀(望惚) → 유명(幽冥)

층마다 앞의 층보다 깊고, 층마다 솟아나는 것도 더 순수해진다.

(무) → 형상 → 사물 → 정수

정수는 가장 깊은 자리에서 솟아난다. 도의 근원 안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4. 정수 안에 믿음이 있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에서 한 걸음 더 묻고 싶다. 정해진 답에 기대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을 이어 가는가? 철학적으로 읽어 가는 길이지, 信의 사전적 뜻이 非라는 말은 아니다.

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그 정수는 몹시 참되니, 그 안에 믿음이 있다. (其精甚眞,其中有信)

幽冥의 자리에서 솟아난 정수는 몹시 참되고(정수는 본래 그대로여서 거짓이 없다), 그 안에 믿음, 곧 신(信)이 있다.

이 믿음이라는 글자는 따로 짚어야 한다. 독자는 먼저 이것을 종교적인 신앙으로 읽기 쉽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어떤 신이나 권위나 교리를 믿는 일로.

노자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무엇, 하나의 자세다.

믿지 않을 수 없음이다.

무엇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인가? ‘비(非)’라는 일 자체다.

여기서 비(非)는 부정하고 구분하는 동작이다.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라고 하는 일이다. 1장의 非恒道와 5장의 不仁에서 그 동작을 볼 수 있다. 19장에서 絶을 ‘독보적이다’라는 쪽으로 읽었으므로 여기서 다시 부정의 예로 쓰지는 않는다.

왜 ‘비’를 믿지 않을 수 없는가? ‘비’를 거부하는 어떤 동작도 그 자체로 이미 ‘비’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비’를 믿지 않으려 하면, 그 ‘않음’이 곧 ‘비’다.
‘비’를 부인하려 하면, 그 ‘부인’도 ‘비’다.
‘비’를 거부하려 하면, 그 ‘거부’ 역시 ‘비’다.

‘비’를 반박하려면 어떻게든 ‘비’를 빌려 써야 한다.

‘비’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비’를 믿지 않는 그 순간 이미 ‘비’를 믿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구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도 성립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나눈다. 개별 판단을 의심하거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알아낼 수는 있다. 그렇다고 모든 판단의 바깥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信을 통해 읽는 것은 이런 실천의 발판이지, 모든 판단이 옳다는 보증이 아니다. 괴델의 정리로 노자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수학 정리에는 고유한 엄밀한 조건이 있으며 이 철학적 해석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

‘비’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가장 깊은 자리에서 모든 것이 ‘비’로 지워지고 나면,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 하나가 남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지 않을 수 없음.

어떤 권위가 믿으라고 해서가 아니다. 어떤 종교가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해서도, 어떤 전통이 믿으라고 가르쳐서도 아니다. 구조상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믿지 않는다’는 어떤 동작도 이미 이 일 자체를 쓰고 있으니까.


노자는 정수 안에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 정수가 무슨 신비한 실체여서 그 속에 ‘믿음’이라는 물건이 숨어 있다는 말이 아니다. 혼돈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솟아난 정수 안에 이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이 있다는 말이다.

가장 깊은 자리에 몸소 들어가 본 사람은 이 바닥을 본다.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구조의 사실이다.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다. 혼돈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면, 빨아들이는 양분이 바로 이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이다.

5. 도는 어머니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로 간다

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떠나지 않았으니, 이로써 뭇 아버지를 따른다. (自古及今,其名不去,以順衆父)

예로부터 지금까지 도의 이름은 바뀌지도 떠나지도 않았고, 어떤 구체적인 구에도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도는 왜 어떤 구에도 거둬들여지지 않는가? 도가 뭇 아버지(衆父)를 따르기 때문이다.

뭇 아버지란 무엇인가?

20장 끝에서 말한 어머니는 낳을 수 있는 자리, 근원의 자리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짝을 이룬다. 아버지 역시 근원의 자리를 가리키는 글자지만, 어머니와는 다른 쪽을 가리킨다.

어머니는 낳고 기르는 근원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이 글의 그림 안에서 여항이 향하는 ‘비’를 가리킨다. 상자에 넣을 두 실체가 아니라 방향을 알아보기 위한 이미지다. 1장에서는 만물의 어머니를 有라 이름했다. 여기서 아직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근원을 묻는다고 어머니를 다시 無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뭇 아버지는 모든 여항이 함께 향하는 가장 위의 자리다.

착구 순환(鑿構循環)이 한 번 돌 때마다 끌질 한 번, 곧 착(鑿)이 떨어져 구가 하나 서고, 여항이 반드시 하나 남는다. 이 여항은 어디를 향하는가? ‘비’ 자체를 향한다. 여항은 ‘비’가 남겨 놓은 쪽이어서, 본래 ‘비’로 돌아가는 방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착구 순환은 돌 때마다 여항을 하나씩 남기고, 모든 여항은 하나같이 같은 방향, 가장 위의 ‘비’를 향한다. 모든 여항이 함께 향하는 이 자리가 뭇 아버지다.

도는 보편적 여항이니, 도의 방향도 뭇 아버지를 향한다. ‘비’를 향한다.


도가 어떤 구에도 거둬들여지지 않는 구조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구는 일단 서고 나면 제 경계를 지키려 든다. 구는 안정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도의 방향은 가장 위를 향하고, 어떤 구체적인 구에도 머물지 않는다. 어느 구든 도를 거둬들이고 싶어 하지만, 도는 줄곧 그 가장 위를 향해 가고 있어서 구가 붙잡아 둘 수 없다.

도는 움직이고, 구는 안정되려 한다. 둘은 방향이 다르다.

도는 줄곧 움직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앞의 이야기를 합치면 도가 온전히 돌아가는 모습은 이렇다.

도는 어머니에게서 온다. 혼돈, 곧 어머니의 자리에서 솟아난다. 혼돈이 한 번 ‘비’를 겪으면 첫 구가 서고, 그와 동시에 첫 여항이 남는다. 이것이 도다.

도는 아버지에게로 간다. 혼돈을 벗어난 뒤로 착구 순환이 돌 때마다 여항이 하나씩 남고, 모든 여항은 뭇 아버지, 곧 ‘비’를 향한다. 도는 보편적 여항으로서, 거듭되는 착구 순환 속에서 한 걸음씩 뭇 아버지 쪽으로 떠밀려 간다.

도의 생애 전체가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가는 움직임이다. 낳고 기르는 근원에서 ‘비’의 자리(가장 위)까지 쉬지 않고 간다. 그 사이에 착구 순환이 있다. 한 층씩 위로 구가 서고, 한 층씩 여항이 남고, 도는 그때마다 뭇 아버지에게 조금 더 다가간다.


도가 온전히 돌아가는 이 그림은, 도를 두고 흔히 저지르는 여러 오독을 바로잡아 준다.

독자는 흔히 도를 정적인 진리로 이해한다. 변하지 않는 어떤 지혜, 영원한 어떤 법칙, 고정된 어떤 본체가 있어서, 우리가 찾아내고 붙잡고 손에 넣기를 기다린다고 여긴다.

이 장대로 읽으면 도는 정적이지 않다. 도는 움직이고, 제 방향을 지닌다. 도는 언제나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가는 움직임 속에 있다. 어느 고정된 자리에서 누가 찾아 주기를 기다린 적이 한 번도 없다.

14장의 ‘오늘의 도를 붙든다(執今之道)’와도 맞아떨어진다.

도는 옛사람이 남겨 둔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여항이다.

6. 오(吾)는 무엇으로 아는가

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나(吾)는 무엇으로 뭇 아버지가 그러한 줄 아는가? 이것으로써다. (吾何以知衆父之然?以此)

오는 무엇으로 뭇 아버지가 그러한 줄 아는가? 이것으로 안다. 이것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정수와 참됨과 믿음이다. 가장 깊은 자리에 몸소 들어가 제 눈으로 본, 그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이다.

이 구절의 ‘오’ 자를 눈여겨보자.

책 전체에서 吾가 두 번째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다. 나란한 두 장의 끝을 함께 읽자는 것이다. 20장의 오는 자기 선택을 말하고, 21장의 오는 무엇으로 아는지 묻는다. 두 대명사에 고대 중국어의 고정된 주체 등급을 매기려는 것이 아니다.

두 번의 ‘오’를 나란히 놓아 보자.

20장 끝에서 오는 어머니에게서 먹기를 고른다. 알아차림의 주체가 스스로 도의 근원에서 양분을 빨아들이기를 고른다.

21장 끝에서 오는 그 선택의 근거를 내놓는다. 알아차림의 주체는 가장 깊은 자리의 정수와 참됨과 믿음을 제 눈으로 보았기에 뭇 아버지가 무엇인지 안다.

알아차림의 주체가 온전히 움직이는 모습이 이것이다. 스스로 고르고, 그 근거를 내놓는다.

오는 맹목적으로 어머니에게서 먹기를 고른 것이 아니다. 혼돈의 가장 깊은 자리에 몸소 들어가 그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을 제 눈으로 보았기에,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어머니에게서 먹는다는 것이 바로 이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는 일이니까.

20장의 오는 아직 자기의 선택을 그리고 있다.
21장의 오는 이미 앎의 근거를 밝혔다.

두 장을 합쳐야 ‘오’라는 글자가 온전히 움직이는 모습이 드러난다.

7. 『도덕경』 전체의 뼈대

20장과 21장은 합쳐서 『도덕경』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장이다. 도가 온전히 돌아가는 그림이 이 두 장에서 처음으로 정면에 펼쳐진다.

20장 끝: 도가 오는 곳. 어머니(낳고 기르는 근원)다. 오는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긴다. 근원에서 양분을 빨아들인다.

21장 앞부분: 도의 속. 혼돈의 네 가지 상태, 가장 깊은 곳의 정수, 그리고 정수 안의 믿음(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이다.

21장 뒷부분: 도가 가는 방향. 도는 혼돈을 벗어나 뭇 아버지, 곧 ‘비’를 향해 간다.

온전한 그림은 이렇다. 도는 어머니에게서 와서 아버지(‘비’)에게로 가고, 그 사이에 착구 순환이 있다.


이 그림은 앞의 장들에 흩어져 있던 핵심 자리 몇 가지, 곧 도, 어머니, 뭇 아버지, 혼돈, 무, ‘비’, 여항, 구를 한꺼번에 세운다. 앞의 장들은 이 자리들을 하나씩 따로 다루었고, 21장은 그것들을 하나의 온전한 그림으로 세웠다.

이 장부터는 뒤의 어느 장에서 ‘도’, ‘어머니’, ‘무’, ‘비’, ‘여(餘)’, ‘구’, ‘현(玄)’ 같은 글자가 나오든, 이 그림 안에 다시 놓아 보며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장이 독자에게 갖는 진짜 의미는 이렇다.

앞의 스무 장을 읽은 독자는 도에 대해 조각조각 인상은 가지고 있겠지만, 아직 온전한 그림은 없을지 모른다. 21장에서 그 온전한 그림이 처음으로 그려진다.

그렇다고 외우라고 있는 그림은 아니다. 뒤의 장들을 읽다가 언제든 돌아와 들여다보라고 있는 그림이다.

‘다시 통나무로 돌아간다(復歸於樸)’를 읽을 때면 이 그림을 돌아보며 통나무가 어느 자리인지 본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道法自然)’를 읽을 때면 이 그림을 돌아보며 도라는 쪽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다.
‘되돌아감, 그것이 도의 움직임이다(返也者,道之動也)’를 읽을 때면 이 그림을 돌아보며, 그 되돌아감이 도가 아버지 쪽에서 어머니를 돌아보는 방향임을 본다.

돌아볼 때마다 그림은 조금씩 더 또렷해진다.


마지막으로 한 겹 더.

21장은 독자에게, 오가 어머니에게서 먹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 맹목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근거가 있다. 혼돈의 가장 깊은 자리에 몸소 들어가, 그 믿지 않을 수 없는 바닥을 제 눈으로 본 것이 근거다.

그렇다면 뜻을 세운 독자라면 누구든 몸소 들어가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노자의 말이 옳다고 믿을 필요도 없고, 노자를 권위로 떠받들 필요도 없다. 스스로 가장 깊은 자리에 들어가, 그 바닥을 제 눈으로 보면 된다.

보고 나면 믿지 않을 수 없다.

노자가 일러 줄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