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曲则全,枉则直。洼则盈,敝则新。少则得,多则惑。是以圣人执一,以为天下式。不自视故彰,不自见故明,不自伐故有功,弗矜故能长,夫唯不争,故莫能与之争。古之所谓曲则全者,几虚语哉,诚全归之。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굽으면 온전하다’는 빈말이 아니다
‘굽으면 온전하다(曲則全).’
『도덕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광고 문구에도, 서예 작품에도, 힐링 에세이의 좋은 글귀에도 이 말이 나온다. 그리고 대개는 ‘물러남을 나아감의 발판으로 삼으라’거나 ‘조금 굽히면 더 멀리 간다’는 식의 처세 지혜로 읽힌다.
노자는 22장 끝에서 이런 오독을 스스로 막아 두었다. 그는 몸소 되묻는다.
옛사람들이 이른바 ‘굽으면 온전하다’고 한 것이 거의 빈말이란 말인가? (古之所謂曲則全者,幾虛語哉)
옛사람들이 한 ‘굽으면 온전하다’ 같은 말이 거의 빈말이냐고 묻고는, 스스로 답한다. 빈말이 아니다. 참된 구조의 서술이다.
도덕의 잠언이 아니다.
처세의 지혜도 아니다.
물러남을 발판 삼아 나아가는 전술도 아니다.
구조의 사실이다.
장 전체에 나오는 여섯 쌍, ‘스스로(自)’로 이어지는 네 가지 ‘하지 않음’, 그리고 다투지 않음이 모두 구조의 서술이다.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독자를 타이르는 말이 아니다.
2. 여섯 쌍
22장은 첫머리부터 여섯 구절을 내놓는다.
굽으면 온전하고, 휘면 곧아진다.
움푹하면 채워지고, 해지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헷갈린다.
(曲則全,枉則直。洼則盈,敝則新。少則得,多則惑)
이 구절들은 차지하려 들지 않을 때 열리는 공간을 보여 준다. 양보할 때마다 좋은 결과가 온다는 보증은 아니다. 자세는 참여 방식을 바꾸지만 남의 선택이나 현실의 저항을 없애지는 못한다.
굽으면 온전하다. 곧장 가려 들지 않으니 오히려 전체가 온전하게 지켜진다.
굽은 길로 가야 온전함에 이른다는 전술적 조언이 아니다. 구조의 서술이다. 기어이 곧장 가려는 사람, 가장 짧은 길을 차지해 단번에 닿으려는 사람은 오히려 온전함이라는 자리에 이르지 못한다. 온전함은 한 방향 위의 종착점이 아니라 순환 전체가 끝까지 다 돌고 난 뒤에 이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곧은 길 하나를 움켜쥐면 다른 방향에서 솟아날 것들이 반드시 잘려 나가고, 온전함은 이지러진다.
오늘로 옮겨 보자. 한 개발자가 가장 빠른 배포를 노리고 가장 짧은 경로로 기능 하나를 출시한다. 그 바람에 아키텍처의 전체적인 짜임이 잘려 나가고, 엣지 케이스 처리가 잘려 나가고, 다음 이터레이션이 들어설 자리가 잘려 나간다. 온전함이라는 자리에는 끝내 닿지 못한다.
한 번 돌아가면, 오히려 온전함에 이른다.
휘면 곧아진다. 굽히고 나면 오히려 정말로 곧아진다.
원고를 고치는 사람을 떠올려 보자. 초고의 문장은 하나도 못 바꾼다고 버티면 글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 좋아하던 한 문장을 놓아주자 단락 전체가 비로소 선다. 여기서 굽힘은 원칙을 버림이 아니라 자세 때문에 일을 망치지 않는 것이다.
움푹하면 채워진다. 자리가 낮으면 오히려 가득 찬다.
겸손해야 얻는다는 도덕적 권유가 아니다. 구조의 서술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높은 곳은 저절로 비고, 낮은 곳은 저절로 찬다. 물의 물리이지 물의 미덕이 아니다.
물의 이미지를 대화로 옮겨 보자. 높은 자리를 급히 차지하지 않으면 내 목소리에 가렸던 말이 들릴 수 있다. 이해의 입구가 열리는 것이지 낮은 자리에 있기만 하면 기회나 이익이 저절로 온다는 약속은 아니다.
해지면 새로워진다. 낡아야 새로워질 수 있다.
해질 폐(敝)는 낡고 해졌다, 오래 써서 닳았다는 뜻이다. 해질수록 새롭다는 역설의 잠언이 아니다. 구조의 서술이다. 한 구조가 해져야, 곧 오래 쓰여 제 순환을 다 마쳐야, 새것이 솟아날 자리가 생긴다. 구조가 끝없이 저를 지키며 해지지 않으려 들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새것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다.
새것은 옛것과 맞서는 무엇이 아니다. 새것은 옛것이 자리를 내어 준 뒤에 솟아난다.
적으면 얻는다. 적어야 얻을 수 있다.
만족할 줄 알라는 훈계가 아니다. 구조의 서술이다. 자리가 꽉 차 있으면(많이 움켜쥐고 잔뜩 내걸면) 새것이 들어올 틈이 없으니 얻을 수 없다. 자리가 비어 있으면(적으면) 여항이 솟아날 틈이 있으니 얻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이 쌍은 11장의 ‘있음은 이(利)가 되고, 없음은 용(用)이 된다(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와 이어진다. 무(無)는 여항을 위해 비워 둔 자리다. 그 자리를 꽉 채우면 무엇이 돌아갈 틈이 사라진다.
많으면 헷갈린다. 많으면 어지러워진다.
여섯 쌍 가운데 뒤쪽이 나쁜 결과인 것은 이 쌍 하나뿐이다. 많으면, 곧 손에 구를 너무 많이 쥐고 간판을 너무 많이 내걸고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면, 스스로 어지러워진다.
오늘로 옮기면 이렇다. 프로젝트 다섯 개를 한꺼번에 돌리고, 마음속에 목표 열 개를 한꺼번에 세우고, 이 모임 저 모임에서 부캐 스무 개를 한꺼번에 관리한다. 헷갈린다. 어느 일이든 겉만 핥고, 어느 자리에도 제대로 서지 못한다.
이 쌍이 앞의 다섯 쌍을 거두어 묶는다. 차지하려 드는(많이 가지려 드는) 자세 자체가 스스로를 어지럽히는 근원이다.
이 구절들은 차지하려 들지 않을 때 열리는 공간을 보여 준다. 양보할 때마다 좋은 결과가 온다는 보증은 아니다. 자세는 참여 방식을 바꾸지만 남의 선택이나 현실의 저항을 없애지는 못한다.
3. 행동과 자기 과시
이어지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붙들어 천하의 본보기로 삼는다.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으므로 드러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밝고, 스스로 공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아예 뽐내지 않으므로 자랄 수 있다.
(是以聖人執一,以爲天下式。不自視故彰,不自見故明,不自伐故有功,弗矜故能長)
앞의 세 구절은 不自, 마지막은 弗을 쓴다. 이 변화 앞에서 잠깐 멈춰 읽을 만하다.
이 글은 보는 일, 판단하는 일, 기여하는 일과 자기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는 일을 구별한다. 식견과 성과가 곧 자기 과시는 아니다. 자기를 의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덧붙인 자세이며 내려놓을 수 있다.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다’로 눈을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공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공으로 남을 밀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8장과 함께 不自·不·弗·無를 네 가지 읽기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 어떤 행동을 기본값으로 삼지 않음, 어떤 자세를 거부함, 그리고 부재다. 다만 고정된 네 단계의 부정 강도나 고대 중국어 전체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문법은 아니다. 무엇을 어떤 문장에서 부정하는지 매번 살펴야 한다.
부정어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후대가 노자의 정밀함을 지웠다고 할 수도 없다. 행동과 자기 자리 차지를 가르기 위해 글자 차이를 읽는 것이지 다른 판본의 해석 가능성을 닫으려는 것이 아니다.
4. 부쟁(不爭)은 무쟁(無爭)이 아니다
장이 끝나 갈 무렵의 구절이다.
오직 다투지 않으니, 그러므로 누구도 그와 다툴 수 없다. (夫唯不爭,故莫能與之爭)
여기서 부쟁은 퇴장도 무조건 양보도 아니다. 회의에서 결정에 이의를 받으면 근거를 설명하고, 빠뜨린 점을 인정하고, 필요한 선을 지킬 수 있다. 다만 ‘내가 이겨야 한다’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
그러면 높낮이를 겨루던 자리가 함께 사안을 보는 자리로 바뀔 가능성이 열린다. 상대가 공격을 멈춘다는 보증도, 정당한 반론을 없애는 방법도 아니다. 실제 잘못을 지적받을 수도, 억지가 계속될 수도 있다. 고칠 것은 고치고 지킬 사람은 지켜야 한다.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는 말을 경쟁의 중심에 자기를 세우지 않는 것으로 읽지, 다치지 않는 약속으로 읽지 않는다. ‘무쟁’은 이 절에서 퇴장과 대비하는 표현이지 부정어 하나에서 나오는 보편 문법이 아니다.
5. 독자에게: 차지하려 들지 않는 일곱 가지
장 전체를 합치면, 독자에게 건네는 것은 차지하려 들지 않는 자세를 스스로 점검하는 그림 한 장이다.
차지하려 들지 않는 일곱 가지는 이렇다.
곧장 가려 들지 않는다. 가장 짧은 길을 움켜쥐지 않고, 순환 전체가 끝까지 돌게 둔다.
단번에 온전하려 들지 않는다. 한 걸음에 다 이루려 하지 않고, 온전함이 저절로 솟아나게 둔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남이 부러워할 자리를 노리지 않고, 여항이 흘러들게 둔다.
많이 쥐려 들지 않는다. 손을 가득 채우지 않고, 자리를 비워 둔다.
보이려 들지 않는다. 자기를 보여지는 대상으로 세우지 않는다.
옳으려 들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옳은 것으로 세우지 않는다.
공을 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자기 공을 공으로 세우지 않는다.
여기에 아예 하지 않는 한 가지가 더해진다.
弗矜. 아예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크게 보이려 하지 않고, 잘난 체하지 않는다.
모두 합치면 차지하려 들지 않는 자세의 온전한 모습이 된다.
외우라고 있는 장이 아니다. 살면서 언제든 꺼내 맞춰 보라고 있는 장이다.
다음에 가장 짧은 길로 곧장 가려 들 때는 ‘굽으면 온전하다’를 떠올려 보라.
다음에 남의 눈에 띄려 들 때는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으므로 드러난다’를 떠올려 보라.
다음에 옳은 쪽을 차지하려 들 때는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밝다’를 떠올려 보라.
다음에 누군가를 반박하고 싶어질 때는 ‘부쟁은 무쟁이 아니다’를 떠올려 보라.
매번 차지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차지하려 드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다만 스스로 차지하려 들고 있음을 알아보라는 것이다. 알아보는 것만으로 한 번의 조율이 된다.
알아본 뒤에 무엇을 할지는 당신이 정할 일이다. 그러나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다.
노자는 장 끝에서 ‘참으로 온전함이 그에게 돌아간다(誠全歸之)’고 말한다.
‘참으로 온전함이 돌아온다’를 하나의 방향으로 읽고 싶다. 자기로 가득 채우지 않아야 놓친 부분이 돌아올 자리가 생긴다. 반드시 이길 결과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지금의 다툼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