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면 물러난다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持而盈之,不若其已。揣而锐之,不可长葆之。金玉盈室,莫之守也。贵富而骄,自遗咎也。功遂身退,天之道也。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관문을 떠나는 이야기에서
『사기』는 노자가 관문에 이르러 관문을 지키는 이의 부탁으로 상하 두 편, 오천여 자의 글을 쓰고 떠났다고 전한다. 어디서 끝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는 푸른 소가 나오지 않으며, 떠날 때의 속마음도 모두 적혀 있지 않다. 『사기』의 기록
소를 타고 관문을 나서는 모습은 후대의 전설이 전하는 선명한 장면이다. 여기서는 그 장면을 빌려 9장을 읽는다. 전설과 역사 기록과 상상한 동기를 이어 붙여 확정된 전기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그 장면을 물음으로 바꿔 보자. 남길 것을 남긴 뒤에도 그 자리를 계속 차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래에서 스승으로 남지 않고 권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 물러남의 이미지를 풀어 보는 일이지, 노자가 평생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단정이 아니다.
9장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일을 마치면 몸은 물러난다. 이것이 하늘의 도다. (功遂身退,天之道也)
일이 끝나면 물러난다. 하늘은 그렇게 움직인다.
노자는 오천 자를 쓰고 물러났다.
스승으로 남지 않았다.
학파를 세우지 않았다.
제자를 받지 않았다.
자기를 권위로 만들지 않았다.
가르치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숨어 살고 싶어서도 아니다. 9장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이다. 함육(涵育)하는 사람은 물러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책을 다 쓰고도 그 자리에 남았다면, 그는 방금 자기가 쓴 말을 곧바로 어긴 셈이 된다.
Paper 1, 곧 이 책의 첫 아홉 장이 이 장에서 매듭지어진다. 앞의 여덟 장은 도구를 모두 펼쳐 놓았다. 여항(餘項), 착구 순환(鑿構循環), 함육, 말 없는 가르침, 두 방향의 함육, 스스로 살려 하지 않음, 물과 같은 가장 높은 선.
9장은 이 도구들로 아주 구체적인 물음 하나에 답한다.
함육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은 무엇이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물러나야 하는가?
함육은 주입식 교육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식민화(殖民化)다. 그래서 노자가 여기 내놓은 것은 함육하는 사람을 위한 실무 지침서다.
2. 네 가지 함정
9장의 앞 네 구절은 모두 ‘이렇게 하지 말라’다.
쥐고서 가득 채우려 드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두드려 날카롭게 벼린 것은 오래 지킬 수 없다.
금과 옥이 방에 가득해도 지켜 낼 수 없다.
귀하고 부유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
(持而盈之,不若其已。揣而銳之,不可長葆之。金玉盈室,莫之守也。貴富而驕,自遺咎也)
네 구절이 네 가지 함정을 말한다. 함육하는 사람이 가장 빠지기 쉬운 네 개의 구덩이다. 추상적인 윤리 훈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작업상의 실수다.
앞의 두 함정, 쥐기(持)와 두드리기(揣)는 함육받는 사람에게 잘못 손을 대는 일이다. 함육받는 사람이 스스로 해내야 할 일을 함육하는 사람이 대신 해 주려 드는 것이다.
뒤의 두 함정, 지키기(守)와 교만(驕)은 함육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잘못 세운 구(構)다. ‘나는 함육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자기를 스스로에게 세우는 일이다.
이 네 함정에 함육이라는 일이 가장 자주 탈 나는 자세가 모두 들어 있다. 하나씩 보자.
3. 쥐고 채우면, 그는 차오르지 못한다
쥐고서 가득 채우려 드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持而盈之,不若其已)
지(持)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통제하는 것이고, 영(盈)은 그것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함육의 장면에 대 보자. 함육받는 사람이 아직 여물지 않은 것을 보면, 함육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어떤 자세를 취할까?
끌어다 놓고 거듭 속을 채운다.
지식을 채우고, 기술을 채우고, 가치관을 채우고, 경험을 채운다. 무엇이든 그 사람 안에 밀어 넣는다. 그가 가득 찰 때까지.
거의 모든 ‘교육자’의 기본자세다. 거의 모든 회사에서 사수가 부사수를 대하는 기본자세이기도 하다.
노자는 말한다.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차라리 멈추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함육받는 사람이 가득 차는 일은 당신이 쥐고 채운다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쥐고 거듭 부어 넣으면, 그가 채우는 것은 당신이 부어 넣은 것이다. 이건 식민화다. 그 사람 자신이 차오르는 일은 그 자신의 여항이 그 자리까지 움직여 갔을 때 저절로 일어날 뿐이다. 당신이 쥐고 밀어 넣을수록 그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길은 더 막힌다.
쥐는 손을 멈추고, 그가 스스로 차오르게 두라. ‘그만두느니만 못하다’의 참뜻이 이것이다.
그를 함육하기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쥐어서 채운다는 기본 방법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4. 두드려 벼린 날은 오래가지 않는다
두드려 날카롭게 벼린 것은 오래 지킬 수 없다. (揣而銳之,不可長葆之)
췌(揣)는 거듭 두드리고 가는 것이고, 예(銳)는 칼날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다.
함육의 장면에서, 함육하는 사람은 함육받는 사람이 날카로워지기를 바란다. 생각이 예리하고, 능력이 뛰어나고, 남다른 안목을 갖기를 바란다.
그럴 때 기본자세는 무엇인가? 두드려 날카롭게 벼린다. 거듭 다듬고, 훈련시키고, 지적하고, 고쳐 준다. 날이 설 때까지.
노자는 말한다. 오래 지킬 수 없다. 이렇게 벼린 날은 지켜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남이 줄곧 두드려서 세운 날은 그 사람의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벼리는 사람이 쥐여 준 날이다. 벼리던 사람 곁을 떠나는 순간 그 날은 곧바로 무뎌진다.
곁에 있을 때는 그렇게 예리하던 제자가, 당신을 떠나 자기 삶으로 돌아가자 무뎌진다. ‘두드려 벼린 것은 오래 지킬 수 없다’가 구체적으로 낳는 결과가 이것이다.
참된 날은 그 사람이 스스로 깎아 낸 날이다. 당신이 줄곧 벼려 줄수록 그는 당신의 벼림에 기대고, 스스로 깎아 내는 힘은 약해진다.
여기가 훈련과 함육이 갈리는 분수령이다.
훈련하는 사람은 두드려 벼리고, 그렇게 벼린 날은 지켜지지 않는다.
함육하는 사람은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함육받는 사람이 제 날을 스스로 벼리게 둔다.
쥐기와 두드리기는 같은 잘못의 두 판본이다. 함육받는 사람이 스스로 해내야 할 솟아남을 함육하는 사람이 대신 해 주려 드는 것.
노자는 두 구절을 잇달아 말해, 함육하는 사람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이 두 잘못을 막아선다.
5. 금옥이 방에 가득할 때: 지키기 시작하면 함육은 죽는다
금과 옥이 방에 가득해도 지켜 낼 수 없다. (金玉盈室,莫之守也)
함육을 한동안 하고 나면 함육하는 사람에게 함육의 성과가 쌓인다. 명망, 영향력, 제자, 지위, 인정받은 방법론. 이것들이 함육하는 사람의 ‘금과 옥’이다.
백서(帛書)에는 ‘금옥영실(金玉盈室)’로 되어 있다. 이 영 자는 첫 구절 ‘지이영지(持而盈之)’의 영과 같은 글자여서 앞뒤가 서로 호응한다. 노자는 장 안에서 짝을 맞춰 놓았다.
남은 차오르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 방은 가득 채운다.
통행본은 두 번째 영을 만(滿)으로 바꾸었고, 그러자 앞뒤 글자의 맥이 끊겼다. 백서는 이 글자를 그대로 두었기에 두 구절이 부딪치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기본자세는 무엇인가? 이 금과 옥을 지킨다. 자기 명성을 보호하고, 자기 방법론을 지키고, 남이 의심하거나 흔들거나 도전하지 못하게 막는다.
노자는 말한다. 지켜 낼 수 없다.
왜 지켜 내지 못하는가? 지키는 데 힘을 쓰기 시작한 순간, 당신은 이미 함육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함육은 함육받는 사람이 스스로 솟아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기의 금과 옥을 지키는 일은 그 자체로 ‘나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자기를 세우는 일이고, 그때부터 소모가 시작된다. 소모가 시작되면 함육의 힘이 떨어진다. 함육의 힘이 떨어지면 정말로 그 금과 옥을 지켜 내지 못하게 된다. 금과 옥은 애초에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함육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키기 시작하면 샘이 마른다.
함육을 참으로 잘하는 사람은 자기 함육의 성과를 지키지 않는다. 그 금과 옥을 다음에 올 솟아남에 내어 준다.
지키는 그 순간, 함육은 죽는다.
6. 귀하고 부유하여 교만하면: 지금의 자기에 못 박힌다
귀하고 부유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 (貴富而驕,自遺咎也)
백서의 글자 순서는 귀(貴)가 앞이고 부(富)가 뒤다. 통행본은 ‘부귀(富貴)’로 뒤집어 부를 앞에 두었다.
이 순서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 함육하는 사람이 쌓는 성과 가운데 지위와 존귀함의 유혹이 사실 재물의 유혹보다 크다. 함육하는 사람은 장사꾼보다 훨씬 쉽게 구를 세우는데, 그 구는 ‘나는 돈을 벌었다’가 아니라 ‘나는 존경받는 스승’이다.
요즘의 실리콘밸리 사상가형 리더, 스타가 된 창업자, 독립 컨설턴트, 온갖 멘토와 인플루언서를 떠올려 보라. 그들이 세우는 것은 거의 모두 ‘귀’의 구다. 나는 영향력 있는 사람, 존경받는 사람, 인용되는 사람. ‘부’의 구가 아니다.
귀의 유혹은 부의 유혹보다 훨씬 크다.
백서의 ‘귀부’는 글자 순서로 이 층을 드러내고, 통행본의 ‘부귀’는 오히려 그것을 묻어 버린다.
귀하고 부유한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교만이 문제다. 교만이란 함육하는 사람이 함육에서 성과를 거둔 뒤, ‘나는 함육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자기 경계를 세워 지키는 것이다.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自遺咎)’는 제 손으로 제게 화를 남긴다는 말이다. 여기서 스스로(自)라는 글자에 주의하자. 남이 가져다준 화가 아니다. ‘나는 함육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구를 당신 스스로 거기 세워 두었기에, 허물이 거기서 나온다.
허물은 두 방향에서 온다.
밖으로는, 교만이 적의를 불러들인다. 우월함을 과시하려고 세운 구는 어느 것이든 주변에 맞섬을 일으킨다. 당신은 본래 남을 함육하고 있었지만, 교만의 구를 세우는 순간 함육하는 자리에서 맞서는 자리로 떨어진다. 함육받던 사람들이 당신을 경계하고, 당신과 다투고, 당신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안으로는 더 심각하다. 교만의 본질은 지금의 자기에 못을 박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귀하고 부유하다. 나는 이미 성공했다. 나는 이미 옳다.
못을 박는 순간 더는 자라지 않는다. 당신 자신의 솟아남을 당신이 얼려 버린 것이다. 계속 깎고, 계속 솟아나고, 계속 새로운 자기가 될 수 있었는데, 지나간 자기의 자리를 지키느라 거기 멈춰 선다. 당신이 잃는 것은 앞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당신 자신의 모습이다.
7장 ‘스스로 살려 하지 않음(不自生)’을 함육하는 사람에게 비춘 반례가 바로 이것이다. 함육하는 사람이 ‘나는 함육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자기 경계를 스스로 살려 세우면, 곧바로 소모가 시작되고, 이어 정체하고, 이어 탈이 난다.
7. 공수신퇴
앞의 네 구절은 모두 ‘이렇게 하지 말라’였다. 마지막 구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알려 준다.
일을 마치면 몸은 물러난다. 이것이 하늘의 도다. (功遂身退,天之道也)
백서에는 ‘공수신퇴(功遂身退)’, 통행본에는 ‘공성신퇴(功成身退)’로 되어 있다. 한 글자 차이다.
수(遂)는 ‘완수’의 수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담담한 서술이다.
성(成)은 ‘성공’의 성이다. 무언가를 이뤄 냈다는 성취감이 묻어 있다.
백서의 ‘수’ 자는 물러나는 동기를 다르게 만든다.
성취를 얻은 뒤 자랑스럽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일이 끝났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걸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물러남에는 두 가지 동력이 함께 작용해 함육하는 사람을 떠민다.
첫째 동력: 당신 자신의 여항이 아직 솟아나야 하고, 드러나야 한다.
여항은 솟아나게 되어 있다. 이 책의 핵심이 그것이다. 어디로 솟아나는가? 새로운 자리로. 당신이 ‘그들의 스승’이라는 옛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으면, 당신 자신의 여항은 새로운 곳으로 솟아날 틈이 없다.
물러나는 것은 자기의 여항이 계속 솟아나게 하기 위해서다. 솟아나야 할 다음 자리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다.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제 솟아남을 제 손으로 막는 일이다.
둘째 동력: 함육의 관계가 닫힌 고리가 되지 않게 막는다.
이것이 더 깊은 층이다. 함육하는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고, 함육받는 사람이 늘 그를 기준으로 삼으면, 함육의 관계는 서서히 닫힌 체계가 된다.
닫힌 체계에서는 안쪽에 긴장이 쌓이기 시작한다.
함육받는 사람은 자라다 어느 순간, 자기가 줄곧 스승의 그늘 아래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홀로 서야 할 자리를 스승이 차지하고 있어서, 걸어 나오고 싶어도 나올 데가 없다.
함육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자기가 줄곧 ‘그들의 스승’이라는 신분에 묶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의 다음 솟아남이 나올 틈이 없다.
양쪽이 다 막혀 있으니 긴장은 계속 쌓인다. 이 긴장은 언제까지나 조용히 쌓여 있지 않는다. 어느 순간 터진다.
물러날 때는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여항이 새로운 자리로 솟아나게 한다.
함육받는 사람에게는, 당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고도 제자리에서 홀로 서게 한다.
두 일은 하나의 동작이다.
물러남은 남을 위해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읽으면 도덕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자기만을 위해 물러나는 것도 아니다. 함육의 관계가 닫힌 고리로 굳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동작이기도 하다.
물러남은 함육의 체계 전체를 열린 상태로 두기 위한 구조적 필연이다.
8. 스승과 제자는 왜 등을 돌리는가
아주 흔한 현실의 현상으로 돌아가 보자. 스승과 제자가 갈라서는 이야기는 역사에서 거듭 되풀이되었다.
공자와 몇몇 제자 사이에 있었던 몇 차례 충돌. 소크라테스에게서 멀어져 간 플라톤의 방향. 끝내 플라톤과 갈라선 아리스토텔레스. 수많은 학파에서 스승과 제자의 계보는 결국 서로 등을 돌리는 것으로 끝났다.
개인의 인품 문제가 아니다. 함육하는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는 필연이 그렇게 드러날 뿐이다.
함육의 관계가 어느 지점까지 쌓여 닫힌 체계의 긴장이 꼭대기에 이르면, 터지는 길을 거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함육받는 사람이 함육하는 사람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이 체계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함육하는 사람이 더 일찍, 더 빨리, 더 단호하게 물러났다면, 일을 마친 그 순간 스스로 내려왔다면, 이 갈라섬의 충돌이 정면으로 벌어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제자의 방향이 스승과 멀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건 거의 필연이고, 또 그래야 한다.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 착각과 솟아남은 본래 모두 한 몸의 두 면이다. 다만 함육하는 사람이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더 일찍 ‘렛잇고(Let it go)’를 할 수 있다면, 모두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함육받는 사람은 당신에게 맞서는 것으로 자기가 자랐음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미 물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는 제자리에서 저절로 일어선다. 함육의 관계도 결별로 끝낼 필요가 없다. 자연스러운 교대로 넘겨주면 된다.
노자가 오천 자를 쓰고 곧바로 떠난 것은 이 일을 몸소 보여 준 것이다. 그는 공자 문하 같은 사승(師承)의 체계를 남기지 않았고, 자기를 권위로 만들지 않았다. 푸른 소를 타고 떠났다.
이 책이 스스로 돌아가게 두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논쟁하고, 발전시키고, 떠나가게 두었다.
이천사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은 여전히 읽히고, 논의되고, 번역된다. ‘노자 학파’는 없다. 한 권의 책이 세대에서 세대로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일을 마치면 물러난다’를 가장 큰 규모에서 보여 준 사례가 이것이다.
일을 마쳤으면 내려온다.
하늘이 그렇게 움직인다. 절기마다 제 할 일을 마치면 물러나고, 눌러앉아 버티는 절기는 하나도 없다.
노자도 그랬다.
9장은 이 책 첫 아홉 장의 마지막 장이다.
앞의 여덟 장에서 마련한 도구, 곧 여항, 착구 순환, 함육의 세 면, 두 방향의 함육, 스스로 살려 하지 않음, 물과 같은 가장 높은 선을 모두 모아 한 권의 실무 지침서로 묶는다.
함육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여기 네 가지 함정과 하나의 원칙이 있다.
노자는 자기가 먼저 했다.
다 쓰고, 떠났다.
학파를 세우지 않았다. 권위를 남기지 않았다. 스승 자리에 앉지 않았다.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나섰고,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