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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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8장 · 총 81장

물처럼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上善似水。水善利万物而有静,居众人之所恶,故几于道矣。居善地,心善渊,予善天,言善信,正善治,事善能,动善时。夫唯不争,故无尤。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물과 같다’는 비유가 아니다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도덕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광고에서도 보고, 서예 작품으로도 보고, 돌에 새겨진 것도 보았을 것이다. 대개 흐르는 물 사진과 서정적인 글 한 단락이 곁들여져 있다.

그런데 이 네 글자는 인용될 때마다 거의 언제나 시적인 비유로 읽힌다. 가장 높은 선은 물처럼 아름답다는 식으로.

노자는 문인이 아니고, 시적인 비유를 짓고 있지도 않다. 그가 ‘같다’는 뜻의 글자, 곧 사(似)나 약(若)이나 여(如)를 쓰는 곳에서는 언제나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두 가지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구조가 같다는 말이다. 이 장의 원문대로 쓰면 ‘상선사수(上善似水)’인데,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다. 가장 높은 선과 물이 움직이는 방식은 구조상 같은 일이라는 선언.

그러니 이 장을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물이 무엇을 하는지 보아야 한다. 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아니라, 물의 물리를 보아야 한다.

2. 물을 보라

노자의 시대에는 누구나 날마다 물을 보았다. 농부는 논에 물을 대며 보았고, 아낙은 빨래를 하며 보았고, 아이들은 놀면서 보았고, 뱃사공은 삿대를 저으며 보았다.

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하나가 물리적 사실이지 문학적 비유가 아니다.

첫째, 물은 낮은 곳으로 간다.

중력 아래에서 밖의 힘으로 끌어 올리지 않으면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평범한 개울의 장면이지, 물을 높은 곳으로 보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물에 겸손하려는 도덕적 의지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둘째, 물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어진다. 물에게는 ‘나는 이런 모양이다’라며 지켜야 할 구(構)가 없다. 어떤 경계를 만나든 그 경계를 따른다.

셋째, 물은 형체가 없는데도 돌을 뚫는다.

물 한 방울로는 아무것도 뚫지 못한다. 그러나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속담처럼, 물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지면 돌에 구멍이 난다. 물은 제 단단함으로 돌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끊이지 않음으로 이긴다.

넷째, 물에는 고요함이 있다.

물과 힘겨루기를 하면 물은 평소에는 비켜 준다. 속이 본래 고요해서 ‘다투고 말겠다’는 조바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 오래도록 아래로 흘러가는 것을 정말로 막으려 들면, 평생 버텨 내는 둑은 없다.

모두 농경 사회 사람들이 날마다 보던 일들이다. 노자는 무슨 오묘한 ‘물의 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냇가의 개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물을 봐라. 물은 이렇게 움직인다.

3. 다투지 않음이 아니라 고요함

8장 원문의 첫 구절이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고요함이 있다. (水善利萬物而有靜)

물은 모든 풀과 나무가 물을 마시게 하고, 모든 짐승의 목을 축여 주고, 땅에 생기가 돌게 한다. 물이 하는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물은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이 일을 한다’는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겠다는 마음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그저 제 물리를 따라 아래로 흐를 뿐이고, 물이 지나간 자리가 저절로 혜택을 입는다.

고요함이 있다. 물의 속은 고요하다.

여기서 글자 하나가 다르다는 데 주의하자. 백서(帛書)에는 ‘유정(有靜)’, 고요함이 있다고 되어 있고, 통행본에는 ‘부쟁(不爭)’, 다투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글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다투지 않는다’로 읽으면 물이 다툼에 끼지 않기로 스스로 고른 것이 된다. 원래는 다투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는 듯이. 이렇게 읽으면 물은 물리적 대상에서 의지를 가진 주체로 끌려 올라간다.

‘고요함이 있다’로 읽으면 물은 속이 본래 고요하다. 다투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물이 움직이는 방식은 의지로 억누른 결과가 아니라 물리적 성질 그 자체다.

한 글자 차이지만 깊이는 전혀 다르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할까? 물이 스스로를 억눌러 다투지 않는 것이라면,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의지로 떠받쳐야 하는 미덕이 된다. 다투지 않을 때마다 자제력을 끌어 써야 하니, 일종의 도덕 수양이다.

그러나 노자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의지로 떠받쳐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를 세워 놓고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소모되지 않는다. 속에 애초에 ‘다투고 말겠다’는 조바심이 없으니 억누를 필요도 없다.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고요함이 있다’의 참뜻이 이것이다. 일은 하되, 속에는 ‘내가 한다’는 조바심이 없다.

2장에서 말한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을 물리의 언어로 옮겨 놓은 셈이다.

4. 낮은 곳, 그리고 일곱 장면

다음 구절이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니,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居衆人之所惡,故幾於道矣)

사람들이 대개 싫어하는 곳은 어디인가? 낮은 곳이다.

누구나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더 높은 직급으로, 체면이 서는 쪽으로, 주목받는 쪽으로, 권력이 있는 쪽으로. 낮은 곳으로 간다는 것은 실패하고, 비천해지고, 무시당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물은 하필 낮은 곳에 있다. 스스로 원해서 낮은 곳을 고른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낮은 곳에 있지 않을 수 없다.

물이 도에 가까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도 역시 ‘낮은 곳’에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는 무엇인가? 보편적 여항(餘項)이다. 여항은 구를 세울 때마다 언제나 떨어져 나가는 부분이다. 구가 세워지는 높은 곳에는 결코 있지 않고, 늘 구가 닿지 못하거나 덮지 못하는 그 아래에 있다.

사람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구를 세울 때는 늘 위로 깎아 올린다. 주변보다 높은 자리를 찾아 그 위에 서려 한다. 하지만 도는 물처럼 그런 높은 자리에 있지 않다. 어떤 구도 닿지 못하는 그 아래에 있다.

그러니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는 스스로 낮아지는 미덕이 아니다. 도가 있는 구조적 자리 자체가 거기라는 말이다.

‘도에 가깝다(幾於道)’의 기(幾)는 가깝다는 뜻이다. 노자가 아주 정확한 글자를 골랐다는 데 주의하자. ‘물이 도다’가 아니라 ‘물은 도에 가깝다’이다. 물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물질이고 제 나름의 물리적 경계를 지닌다. 도는 보편적 여항이어서 어떤 구체적 물질도 넘어선다. 다만 물이 움직이는 방식과 도가 움직이는 방식은 구조가 같다. 그래서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사물이다.

물이 전체적으로 어디에 자리하는지 말한 다음, 노자는 일곱 구절로 물의 물리를 사람이 여러 장면에서 움직이는 방식에 옮겨 놓는다.

머물 때는 자리를 잘 고르고, 마음은 깊은 못처럼 잘 가라앉히고, 줄 때는 하늘을 잘 따르고, 말은 미덥게 잘 하고, 바로잡을 때는 잘 다스리고, 일은 잘 해내고, 움직일 때는 때를 잘 맞춘다. (居善地,心善淵,予善天,言善信,正善治,事善能,動善時)

이 일곱 구절은 사람이 물처럼 살아야 한다는 비유가 아니다. 물의 물리가 삶의 일곱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모습이다.

머물 때는 자리를 잘 고른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다는 말이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잘 머무는 사람은 남과 자리를 다투지 않고 제자리를 찾는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당신이 할 수 있어서 했다면, 당신이 곧 그 일을 하는 자리다.

마음은 깊은 못처럼 가라앉힌다. 깊은 물은 서두르지 않고, 뒤집히지 않고, 뽐내지 않는다. 마음을 잘 쓰는 사람은 속이 조급하지 않아 깊은 못과 같다.

줄 때는 하늘을 잘 따른다. 하늘이 비를 내리듯 준다는 말이다. 하늘은 비를 내릴 때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내릴 때가 되면 내릴 뿐, 이 땅이 받을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줄 때는 받는 쪽에 필요한 대로 주고, ‘내가 베풀어 준다’는 자세를 띠지 않는다. 이 구절에는 중대한 글자 차이가 있어서 다음 절에서 따로 다룬다.

말은 미덥게 한다. 물결처럼 참된 말이다. 수면에 물결이 이는 것은 무언가 떨어졌기 때문이지 꾸며서가 아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의 말은 참으로 솟아 나온 것이지 지어낸 것이 아니다.

바로잡을 때는 잘 다스린다. 물이 물길을 고르듯 다스린다는 말이다. 물은 땅의 생김새를 따라 흐른다. 좋은 다스림도 백성 자신의 리듬을 따른다. 3장에서 말한 두 방향의 함육(涵育)과 곧장 이어지는 대목이다.

일은 잘 해낸다. 물이 돌을 뚫듯 일한다. 물이 돌을 뚫는 것은 힘을 써서가 아니라 끊이지 않아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힘이 아니라 꾸준함에 기댄다.

움직일 때는 때를 잘 맞춘다. 밀물과 썰물처럼 때에 맞게 움직인다. 바닷물이 때맞춰 들고 나는 것은 물이 스스로 정한 일이 아니라 하늘과 땅 전체의 리듬 가운데 한 부분이다. 잘 움직이는 사람은 제멋대로 정하지 않고 때를 따른다.

일곱 구절을 합쳐 보면, 물의 물리가 일곱 규모에서 같은 구조로 펼쳐져 있다.

5. ‘어짊’이 아니라 ‘하늘’

일곱 구절 가운데 셋째 구절, ‘줄 때는 하늘을 잘 따른다’에 이 장의 또 하나의 중대한 글자 차이가 있다.

백서에는 ‘予善天’, 주는 일은 하늘을 잘 따른다고 되어 있다.
통행본에는 ‘與善仁’, 사람을 대할 때는 어짊을 잘 베푼다고 되어 있다.

글자가 두 개나 바뀌었다. 予는 與가 되었고, 天은 仁이 되었다. 통행본이 이렇게 글자를 고치자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予善天’에서 주는 일의 근거는 하늘을 따르는 것이다. 하늘이 비를 내리듯 대상을 가리지 않고, 받는 쪽에 필요한 대로 준다.
‘與善仁’에서 주는 일의 근거는 어짊이다. 유가의 덕목에 따라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予善天’의 하늘은 자연의 법칙이다. 하늘이 움직이는 대로 주는 일도 이루어진다. 베푸는 자의 자세가 끼어들지 않는다.
‘與善仁’의 인(仁)은 사람이 세운 잣대다. 어짊을 사람 대하는 기준으로 삼으니,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라는 판단의 틀이 하나 들어선다.

이렇게 글자를 고치면 곧바로 5장과 부딪친다.

5장에서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고, 성인(聖人)은 어질지 않다(天地不仁,聖人不仁)’고 했다. 노자는 어짊이라는 잣대를 분명히 내려놓았고, 노자에게 그것은 기본값으로 깔린 선택지가 아니다. 그런데 통행본의 ‘與善仁’은 인 자를 다시 끼워 넣는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 장이 어짊이라는 덕의 잣대로 끌려 돌아가는 셈이고, 5장의 입장과 긴장을 일으킨다.

이 글의 독법 안에서 두 문구가 일으키는 긴장은 살펴볼 수 있다. 다만 天과 仁의 차이만으로 특정 시대나 학파가 원문을 의도적으로 바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시기와 동기에는 별도의 문헌 증거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읽기에 미치는 효과를 비교하는 것이지 유가 전통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백서의 ‘予善天’은 다르게 읽힌다. 주는 일의 근거는 하늘을 따르는 데 있지, 어짊이라는 미덕에 있지 않다.

이 구별은 삶에서 아주 구체적이다.

‘與善仁’을 따르면 줄 때 마음속에 판단이 하나 선다. 이 사람은 내 도움을 받을 만한가? 이것이 어진 일에 맞는가? 주는 일에 조건이 붙고, 어짊이라는 잣대로 한 번 걸러진다.

‘予善天’을 따르면 줄 때 상대를 평가하지 않는다. 줄 때가 되면 주고, 상대에게 필요한 대로 주며, 가리지 않는다. 하늘이 땅뙈기를 가리지 않고 비를 내리듯이.

두 글자가 닿는 깊이는 이만큼 차이가 난다.

6. 다투지 않음은 다툼의 반대가 아니다

8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오직 다투지 않으니,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夫唯不爭,故無尤)

우(尤)는 원망과 허물이다. 다투지 않으니 허물이 없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처세술로 읽히기 아주 쉽다. 남과 다투지 않으면 미움을 사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건 저잣거리의 지혜지 노자가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더 근본적인 이야기다.

다투지 않음은 다툼의 반대가 아니다.

가장 빠지기 쉬운 오독은 다투지 않음을 ‘다툼에 끼지 않기로 고르는 것’으로 읽는 것이다. 나는 다툴 수도 있었지만 다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이다. 이렇게 읽으면 다투지 않음은 일종의 자제, 곧 의지로 떠받쳐야 하는 미덕이 되고, 노자가 줄곧 보여 온 구조를 곧바로 거스르게 된다.

노자가 말하는 다투지 않음의 참뜻은 다툼을 기본 선택지로 깔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툰다, 다투지 않는다’라는 잣대 전체가 물이 움직이는 방식 안에 없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은 지형을 이기는 것도 아니고 경쟁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물은 애초에 ‘다툴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지의 틀 안에 있지 않다. 물에게 다툼은 고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선택지의 틀이 없으니 고를 것도 없다.

5장의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와 똑같은 수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는 어짊에 반대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짊이라는 잣대가 하늘과 땅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는 다툼에 반대한다는 말이 아니라, 다툼이라는 잣대가 물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막아야 할 오독이 하나 더 있다.

다툼을 기본값으로 깔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다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흔한 오독은 다투지 않음을 ‘절대 다투지 않음’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물음이 나온다. 노자는 다투지 말라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다퉈야 할 일은 어떻게 하나?

이렇게 읽으면 다투지 않음이 다시 새로운 강제 기본값이 되고, ‘절대 다투지 않는다’가 또 하나의 잣대로 선다. 이것 역시 노자를 거스른다. 노자가 방금 다툼이라는 기본값을 내려놓았는데, 읽는 사람은 곧바로 ‘절대 다투지 않는다’는 기본값을 다시 세운다.

참된 다투지 않음은 이렇다. 다툼은 기본 선택지에 없지만, 다퉈야 할 때는 여전히 다툴 수 있다.

물은 다툼을 기본값으로 깔지 않는다. 그런데도 강물은 협곡에 이르면 거세게 몰아치고, 홍수는 둑 앞에서 둑을 무너뜨리며, 낙숫물은 돌을 뚫어야 할 때 끝까지 떨어진다.

물은 힘을 써야 하는 곳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다만 힘으로 맞서는 일을 일상의 기본값으로 삼지 않을 뿐이다.

뒤에서 노자가 직접 하는 몇 가지 말과도 맞물린다.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쓴다(兵者不祥之器……不得已而用之)’. 무력을 기본값으로 쓰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쓴다.
67장, ‘자애롭기에 용감할 수 있다(慈故能勇)’. 용맹을 기본값으로 쓰지 않지만,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자애로운 사람은 누구보다 용감하다.

다투지 않음은 기본자세이지, 영구 금지령이 아니다.

다툼을 기본값으로 깔지 않는다고 해서 다툴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툼을 첫 번째 선택지로 두지 않을 뿐이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 속에서부터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그때 다투지 않는 것은 그 어쩔 수 없음을 저버리는 일이다. 그럴 때 물을 닮은 사람은 한다. 게다가 할 때는 평소 다툼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평소에 쓸데없는 다툼에 쓰지 않은 힘을 모두 이번 한 번을 위해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자는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툼을 기본값의 자리에서 내려놓는 법을 가르친다. 다툴 필요 없는 자리에서 새어 나가던 힘을 아껴, 정말로 다툴 수밖에 없는 그 한 번을 위해 남겨 두라는 것이다.

7. 가장 높은 선은 방향이다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기 쉽다.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니, 너무 높은 기준 같다. 나는 물처럼은 못 하겠다.

이것은 다시 가장 높은 선을 넘어야 할 종착점의 문턱으로 읽은 것이다. 노자는 한 번도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7장의 ‘온 거리가 성인이다’와 같은 구조다.

가장 높은 선은 한 방향으로 마음을 쓰는 일이지, 완전히 도달한 실체가 아니다.

실은 내 것이 아닌 자리를 두고 다투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그 순간 ‘머물 때는 자리를 잘 고른다’ 안에 있다.
말을 지어내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그 순간 ‘말은 미덥게 한다’ 안에 있다.
줄 때 상대를 가리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그 순간 ‘줄 때는 하늘을 잘 따른다’ 안에 있다.

일곱 가지를 다 해내야 비로소 쳐주는 것이 아니다.

순간마다, 장면마다 한 번씩 기회가 있다. 이 순간 이 한 가지를 해내면, 당신은 그 순간 가장 높은 선의 자리에 있다.

앞 순간에는 있었다가, 다음 순간에는 없고, 그다음 순간에 또 있다. 자리는 한순간의 것이고, 문은 늘 열려 있다.

노자가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고 한 것은 당신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자리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의 방향은 바로 저기에 있다.

당신은 언제든 그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그 한 걸음을 내디디면, 당신은 그 순간 가장 높은 선의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