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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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7장 · 총 81장

오래 산다는 것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天长地久。天地之所以能长且久者,以其不自生也,故能长生。是以圣人退其身而身先,外其身而身存。不以其无私与?故能成其私。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장생은 불로장생이 아니다

7장은 장생(長生), 곧 오래 사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불로장생의 그 장생은 아니다.

후대의 도교는 분명 이 장에서 양생술 체계 하나를 통째로 키워 냈다. 단약을 먹고, 곡기를 끊는 벽곡(辟穀)을 하고, 내단과 외단을 닦고, 온갖 수련법을 익혔다. 이 기술들은 모두 노자의 ‘장생’을 목숨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뜻으로 읽은 데서 나왔다.

도교 자신의 해석이 빗나갔는지는 따지지 않겠다. 다만 내가 보기에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더 정확한 이야기다.

한 주체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의 ‘자기’가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느냐의 문제다.

2. 사람은 왜 지치는가

구체적인 물음 하나부터 생각해 보자. 사람은 왜 지치는가?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다.
쉬지 않고 자기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누구인가’부터 확인해야 한다.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을 관리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프로다운 모습을, 친구들 앞에서는 편안한 모습을, 가족 앞에서는 믿음직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이게 나한테 득이 되나’, ‘이러다 위험해지지 않을까’를 쉴 새 없이 계산해야 한다.

이 유지 작업이 하나하나 모두 돌아가고 있다. 휴대폰에서 몰래 배터리를 잡아먹는 백그라운드 앱처럼.

유지하는 일 자체가 소모다.

그것도 아주 큰 소모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나는 나여야 한다’는 이 모든 심리 동작이 하루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일이다.

하늘과 땅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자기를 유지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애초에 자기를 유지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소모되지 않고, 소모되지 않으니 다하지도 않는다.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스스로 살려 하지 않음(不自生)’이 바로 이것이다.

3. 스스로 살려 하지 않는다

첫 구절이다.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다. (天長地久。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也,故能長生)

‘부자생(不自生)’ 세 글자가 이 장의 열쇠다.

가장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이것을 ‘하늘과 땅은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로 읽는 것이다. 그런 뜻이라면 ‘부자생’은 ‘하늘과 땅은 자라지 않는다’가 되고, 하늘과 땅은 아예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말이 되지 않는다.

‘부자생’의 참뜻은 이렇다.

‘자기’를 유지해야 할 구(構)로 세우지 않는다.

주체 의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어느 순간 자기의 경계를 알아차린다. 나, 내 정체성, 내 자리, 내 이미지. 그리고 그 경계를 지키기 시작한다. 이렇게 지키고 유지하는 동작이 곧 자생(自生), 스스로를 살리려 드는 일이다.

읽는 사람이 엉뚱한 층위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먼저 분명히 해 두자. 노자가 말하는 ‘자기’는 주체 의식 차원의 자기다. 사람이 마음속에서 자기를 지키려 드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 생물로서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포에는 당연히 막이 있어야 하고, 몸은 당연히 밥을 먹어야 한다. 노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그보다 한 층 위에서 ‘이 나를 지켜야 한다’고 되뇌는 심리 동작이다. 이 동작이 삶의 뒤편에 늘 켜져 있는 백그라운드 프로세스가 되면, 그때부터 그것이 사람을 갉아먹는다.

하늘과 땅에는 이 동작이 없다. 하늘과 땅은 자기를 경계 있는 ‘자기’로 세워 지키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소모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 산다.

노자에게 장생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산다는 뜻도 아니다. 그보다 더 정확한 이야기다.

자리는 늘 있고, 내용은 흘러 지나간다.

6장으로 돌아가 보자.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계곡의 물이 영원히 같은 물방울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계곡의 물은 늘 흐르고, 늘 새 물로 바뀐다. 오늘 흐른 물은 하류로 내려가고, 발원지에서는 또 새 물이 솟는다.

물이 흐르는 자리는 영원하고, 그 자리를 채운 내용은 쉬지 않고 흘러 지나간다.

하늘과 땅의 장생도 이와 같다. 하늘과 땅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늙은 거인이 아니다. 모든 생겨남과 사라짐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리다. 그 자리를 채운 것들, 곧 산과 강, 생물과 별은 늘 바뀐다. 하지만 자리 자체는 지킬 필요가 없다. 지켜야 할 ‘자기’가 아니라 흐름이 일어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4. 몸을 물리고, 몸을 밖에 두다

하늘과 땅 이야기를 마친 노자는 같은 일을 성인(聖人)에게로 옮겨 온다.

그래서 성인은 제 몸을 물리는데 몸이 앞서고, 제 몸을 밖에 두는데 몸이 보존된다.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外其身而身存)

몸을 물리는데 몸이 앞선다. 스스로 한 걸음 물러났는데 오히려 앞에 서게 된다는 말이다.

백서(帛書)에는 ‘퇴(退)’, 통행본에는 ‘후(後)’로 되어 있다. 흥미로운 한 글자 차이다.

‘후’는 자리를 묘사하는 말이다. 나는 뒤에 있다.
‘퇴’는 의식적인 동작이다. 나는 앞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통행본의 ‘후’로 읽으면 처세술처럼 들린다. 겸손하면 득을 본다는 식이다. 글자만 따라가면 그렇게 읽히지만, 그러면 노자는 잇속에 밝은 책략가가 되어 버린다. 백서의 ‘퇴’는 다르게 읽힌다.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기로 스스로 고르는 것이다.

왜 스스로 물러나는가? 겸손이 미덕이어서가 아니다.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일등을 다투는 자리에 두는 순간, ‘자기’를 유지해야 할 구로 세운 셈이 된다. 일등 자리를 지키려면 빼앗고 지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하고, 결국 지쳐 쓰러지거나 밀려난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면 그 자리에는 ‘내가 차지하고 있다’는 긴장이 없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당신이 할 수 있어서 했다. 그러면 당신이 곧 그 일을 하는 자리다.

다퉈서 얻은 자리가 아니다. 구조상 당신이 거기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몸이 앞선다’는 상이 아니다. 자기를 유지하는 데 힘을 쓰지 않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다.

2장의 ‘오직 머물지 않기에, 떠나지 않는다(夫唯弗居,是以弗去)’와 똑같은 원리다.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니 오히려 자리를 잃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각도만 바꿔 다시 한 것이다.


몸을 밖에 두는데 몸이 보존된다. 자기를 바깥에 두었는데 오히려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이치는 같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를 움켜쥔 구로 세우지 않으면, 날마다 ‘이게 나한테 득이 되나’, ‘이러다 위험해지지 않을까’를 계산하지 않으면, 도리어 오래 산다.

왜 그럴까? 가장 많은 힘을 잡아먹는 것은 몸의 활동이 아니라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구 자체를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구를 유지하려면 늘 경계하고, 늘 계산하고, 늘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이런 심리 작동은 어떤 육체노동보다 힘이 든다.

이 구를 세우지 않으면 몸은 오히려 보존된다.

노자가 여기서 하는 말은 ‘힘 빼고 설렁설렁 살아야 건강하다’는 식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는 요즘 힐링 에세이와는 다르다. 그는 더 구조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이 가장 큰 에너지 소모다.

이 지킴을 내려놓으면 에너지는 모두 일이 돌아가는 데 쓰인다. 그리고 일이 돌아가는 것 자체가 자리를 만들어 낸다.

5. 두 가지 ‘내 것’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제 것을 챙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제 것을 이룰 수 있다. (不以其無私與?故能成其私)

사(私)는 제 것, 곧 나의 몫이다. 제 것을 챙기지 않으니 도리어 제 것을 이룬다는 말이다.

읽어 보면 책략가의 말처럼 들린다. 사심 없는 척하는 것은 수단이고, 진짜 잇속을 챙기는 것이 목적이라는 식이다. 이 장에서 가장 흔한 오독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사실 노자는 아주 정확한 구별을 하고 있다.

‘무사(無私)’의 사와 ‘성기사(成其私)’의 사는 같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는 가짜 내 것이고,
하나는 진짜 내 것이다.

가짜 내 것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잣대로 잰 내 것이다.

모두가 다투는 것들이다. 재산, 명성, 지위, 체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 이런 것들은 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이 같은 자로 재어 낸 똑같은 물건들이다. ‘내 것’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사회가 먼저 잣대 하나를 세워 놓은 뒤 내가 그 잣대를 따라 다퉈서 얻은 자리다.

사회라는 공공의 잣대로 걸러 낸 ‘내 것’은 진짜 내 것이 아니다. 가짜 내 것, 사회가 식민화(殖民化)해서 빚어낸 내 것이다.

진짜 내 것이란 무엇인가? 정말로 나에게만 속한, 나만의 여항(餘項)이다.

그것은 연봉 액수에도, 직함에도, 팔로워 수에도 없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일을 처리하는 나만의 방식에 있다. 남이라면 다르게 했겠지만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나만의 각도에 있다. 남은 보지 못하는 그 각도를 나는 본다.
그것은 어떤 사람과 나 사이의 고유한 관계에 있다. 그 관계는 우리 둘에게만 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진짜 내 것이다.

구체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체적인 주체로서 이런 것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은 사회의 잣대가 재어 내는 자리에 있지 않고, 저마다 자기만의 자리에 있다. 사회의 잣대로는 잴 수 없다.

‘제 것을 챙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제 것을 이룰 수 있다.’ 노자의 이 말은 결국 이런 뜻이다.

가짜 내 것을 세우지 않기에, 진짜 내 것을 이룰 수 있다.

왜 그런가? 사회의 잣대가 매긴 ‘내 것’을 늘 지키고 있으면, 재산을 다투고 명성을 다투고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면, 내 힘은 모두 그 구들을 지키는 데 쓰인다. 나만의 고유한 것이 솟아날 틈이 없다. 사회가 정한 ‘내 것’의 구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나만의 진짜 여항이 자라날 수 있다.

사심 없는 척해서 진짜 잇속을 챙기는 계략이 아니다. 두 가지 ‘내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를 붙들고 있으면 다른 하나는 나오지 못한다.
하나를 내려놓아야 다른 하나가 드러난다.

‘제 것을 이룬다’는 말은 이런 구조로 움직인다.

6. 온 거리가 성인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너무 어렵지 않은가? ‘자기’를 세우지 말라, 경계를 지키지 말라, 모든 유지를 내려놓아라. 보통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하나? 그게 성인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평생 닿을 수 없는 신화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성인은 완전히 도달해야만 인정받는 종착점이 아니다.

노자는 한 번도 그런 뜻으로 말한 적이 없다.

후대는 성인을 닿을 수 없는 형상으로 지어 올렸다. 고고하고, 초연하고, 도를 얻었고, 늘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 그래서 보통 사람은 ‘성인은 이러저러하다’는 대목을 읽으면 먼저 ‘그건 그 사람들 이야기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노자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성인은 한 방향으로 마음을 쓰는 일이지, 완전히 도달한 실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일에서 ‘자기’를 내려놓는다. 남을 먼저 가게 하고, 남이 살아남게 하고, ‘내 것을 이루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게 둔다. 그러면 당신은 이 순간 이미 성인의 자리에 있다.

다음 순간 다시 ‘자기’를 세우면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다음 순간 다시 내려놓으면 또 그 자리에 있다.

자리는 한순간의 것이지,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 방향으로 걸어갈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귀양지 용장(龍場)에서 크게 깨달은 뒤 온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다 성인이라고 했다. 기준을 낮춘 말이 아니다. 성인의 구조를 꿰뚫어 본 말이다. 거리의 모든 사람이 사심 없는 장생을 완전히 해냈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 그 순간 마음이 그 방향을 향하고 있으면 언제든 성인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자리의 문은 늘 열려 있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들어왔다고 선언하는 순간 곧바로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나는 성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성인인 자기’를 다시 세우게 되고, 나는 성인이라는 이미지를 지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장 전체가 말하려는 것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순서는 구조적으로 뒤집을 수 없다. 먼저 자기를 내려놓고, 그런 다음 남이 돌아보며 그렇게 불러 줄 뿐이다.

거꾸로는 안 된다.

노자 자신이 그렇게 했다. 『도덕경』을 쓸 때 그는 위대한 철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오천 자 하고 멈추었을 뿐이다.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나설 때 그는 나라를 떠나는 한 노인이었지, 제 것을 이루고 있는 성인이 아니었다.

제 것을 이루는 일은 언제나 바깥에서만 보인다. 이천사백 년 뒤의 우리가 돌아보며 그 노인을 가리켜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아, 그는 자기를 지키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구나.

그 자신은 한 번도 자기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렇게 보았다면 이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7장이 읽는 사람에게 정말로 건네는 말은 이것이다.

문은 늘 열려 있다.

평생에 걸쳐 도달할 필요도, 완전히 해낼 필요도, 누구에게 인증받을 필요도 없다. 그 방향으로 마음이 있으면 이 순간 당신은 그 자리에 있다. 다음 순간 다시 자기를 세웠다면, 다시 내려놓으면 된다.

내려놓았다 다시 세우고, 세웠다 다시 내려놓고. 자리는 늘 거기 있고, 우리는 드나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