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과 어머니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浴神不死,是谓玄牝。玄牝之门,是谓天地之根。绵绵呵其若存,用之不堇。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신비로 덧칠된 이천 년
6장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읽을 수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 몸 안에서 자라는 새 생명. 생성의 이미지이지, 어느 개울도 마르지 않는다거나 한 어머니가 계속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 이천 년 동안 이 장은 신비를 기리는 찬가로 읽혔다. 주석가들은 ‘곡신(谷神)’ 두 글자만 보면 깊고 오묘한 쪽으로 내달렸다. 골짜기 한가운데의 텅 빈 곳이라느니, 비어 있으면서 신령한 정신이라느니, 정신을 길러 죽지 않는 비법이라느니 하면서, 대가 바뀔 때마다 풀이는 더 아득해졌다.
하지만 노자가 가져다 쓴 것은 그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보던 것들이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 마을의 암소. 그는 무슨 신비한 수련법을 전하고 있지 않다. 아주 소박한 이야기 하나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일은 멈추지 않는다.
2. 욕(浴)과 곡(谷): 먼저 물을 보자
이 글에서 따르는 백서 정리본의 첫 글자는 욕(浴)이다. 통행본은 곡(谷)으로 쓴다. 두 글자를 먼저 나란히 놓아 보자.
다만 글자의 유래와 해석은 구별해야 한다. 浴은 물을 뜻하는 부수에 소리를 나타내는 谷을 붙인 글자이고, 『설문해자』는 몸을 씻는 뜻으로 풀이한다. 본뜻이 ‘물을 품은 골짜기’였다고 곧바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谷과 어떻게 통하는지는 이 문헌의 용자를 살펴야 하는 문제다.
골짜기 谷에서 곡식 穀의 뜻이 생겨났다는 식의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이체자와 통용, 후대의 간체자 문제만으로 옛 주석가가 이 구절을 곡식 이야기로 읽었다고 입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浴이라는 글자는 이 산문에 무엇을 보여 줄까?
골짜기 속에 숨은 신부터 찾기보다 물가로 눈을 돌리게 한다. 물은 공급받으며 흐르고, 눈앞을 지나간다. 방금 손으로 떠 올린 한 줌이 그 흐름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서는 계곡물의 이미지를 실마리로 삼는다. 부수 하나로 유일한 정답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谷으로 읽어도 골짜기와 물의 연결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장면을 따라 읽으면 물, 생명의 탄생, 면면한 이어짐, 써도 다하지 않음이 한 줄로 이어진다. 이미 나타난 것을, 무언가가 생겨나는 과정 전체로 착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물은 마를 수 있고 개별 생명은 끝난다. ‘죽지 않는다’는 말이 어느 강이나 어느 몸이 영원하다는 보증은 아니다. 여기서는 생성의 움직임이 이미 이루어진 한 가지 모습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는다.
이것이 이 글이 ‘浴神不死’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하나의 장면을 열기 위해 다른 해석을 전부 닫을 필요는 없다.
3. 현빈의 문, 하늘과 땅의 뿌리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현빈이라 한다. (浴神不死,是謂玄牝)
계곡에 물이 흐르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현빈이라 부른다.
현빈이란 무엇인가? 현(玄)은 1장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현은 착구 순환(鑿構循環) 그 자체다. 끌로 한 번 깎아 경계를 긋고, 그렇게 선 구(構)가 다시 다음 착(鑿)의 바탕이 되는 순환 말이다.
빈(牝)은 암컷이다. 그렇다고 훗날 문화에서 말하는 ‘음(陰)의 부드러운 아름다움’ 같은 추상적인 여성 원리를 떠올리면 안 된다. 노자의 시대에 빈이 뜻하던 가장 소박한 것은 이것이었다.
새끼를 낳는 어미의 몸.
그러니 현빈을 합쳐 읽으면 이렇게 된다.
순환으로 돌아가는, 생명을 낳는 장치.
신비로운 여성 원리가 아니다. 순환이 낳음이라는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물은 계곡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다.
노자는 여기서 이 두 일을 하나로 겹쳐 놓는다. 왜 그럴까? 둘은 같은 일이 서로 다른 규모에서 돌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일이란 여항(餘項), 곧 어떤 구에도 끝내 거둬지지 않는 나머지가 막을 수 없이 솟아나는 일이다.
하늘과 땅의 규모에서 여항은 물의 흐름으로 솟아난다.
생물의 규모에서 여항은 출산으로 솟아난다.
규모는 달라도 구조는 같다.
4장은 도가 우물 같아서 쓸수록 솟는다고 했다. 사람이 만든 물건의 이미지다.
6장은 도가 계곡 같고 어머니의 몸 같다고 한다. 생명 그 자체의 이미지다.
이미지는 갈수록 근본으로 내려간다. 사람이 판 우물에서 자연의 계곡으로, 다시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몸으로. 한 걸음씩, 더는 좁힐 수 없는 곳까지 좁혀 들어간다.
다음 구절이다.
현빈의 문, 이를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玄牝之門,是謂天地之根)
문은 드나드는 곳이다. 그러니 현빈의 문은 솟아 나오는 입구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바로 그 찰나, 땅을 뚫고 곡식의 싹이 돋는 순간, 어머니의 몸에서 새 생명이 나오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 구절의 깊이는 글자 그대로 읽을 때 드러난다. 신은 하늘 위에 있고 뿌리는 높은 곳에 있다는 전통 종교의 그림을, 이 구절은 그대로 뒤집어 놓는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뿌리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뿌리는 솟아남이 일어나는 바로 그 지점마다 있다.
없는 데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모든 순간, 그것이 하늘과 땅의 뿌리다.
1장의 독법과 이어진다. 여기서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에 붙인 이름이지, 有가 무엇에 이름을 붙인다는 뜻이 아니다. 어머니는 높은 자리에 앉은 생산자가 아니라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게 하는 자리다. 뿌리도 우주 밑바닥의 실체가 아니라, 솟아남이 매번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구조다.
노자는 위를 올려다보며 하늘의 신을 찾지 않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주 밑바닥의 실체를 찾지도 않는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을 본다. 계곡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그 자리, 어머니의 몸에서 아이가 나오는 그 자리를.
하늘과 땅의 뿌리는 바로 거기 있다.
4. 요란하지 않게, 면면히
그다음 구절은 이렇다.
면면히 이어지는구나, 있는 듯하다. (綿綿呵其若存)
면면(綿綿)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되 아주 가늘게 이어진다는 뜻이다. 누에가 실을 뽑는 모습과 같다. 올 하나하나는 가늘지만 끊어지는 법이 없다. ‘있는 듯하다’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이다. 4장의 ‘맑고 깊구나,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湛呵,似或存)’를 말만 바꿔 다시 한 셈이다.
여항은 왜 이렇게 면면히 움직일까? 여항은 한 번도 요란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촘촘하게 끊임없이 거기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계곡의 물이 딱 그렇다. 계곡이 ‘힘을 주어 흐르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그저 어느 날 보면 물이 늘 흐르고 있었다는 것,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작지만 흐름은 면면히 끊이지 않는다.
생명이 자라는 과정에서도 느린 쌓임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다가 어느 날 새 모습이 드러난다. 모든 임신이 순조롭다거나 출산이 힘들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깊은 변화가 반드시 요란하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솟아남은 언제나 이렇게 면면하게 일어나지, 요란하게 터지지 않는다.
4장의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와 완전히 같은 이야기다.
작정하고 찾으려 들면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구가 아니어서 붙잡히지 않는다.
찾지 않으면 그것은 거기 있다. 모든 구의 공통 조건으로서 늘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가 조일수록 여항은 달아난다.
구가 느슨할수록 여항은 드러난다.
6장은 이 이야기를 물과 어머니의 이미지로 바꿔 한 번 더 들려준다.
물이 계속 공급되면 개울은 흐를 수 있다. 길을 막으면 물이 흐르거나 고이는 자리가 바뀐다. 모든 막음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흐름을 통제하는 일을 흐름 자체와 혼동하지 말자는 것이다.
일상적인 장면으로 바꿔 보자. 아이가 제힘으로 한 문장을 만들려는데 옆에서 자꾸 뒷말을 대신 해 준다. 아이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답이 그 자리를 채운다.
돕는 것과 대신 완성해 버리는 것은 다르다. 출산의 이미지로 의료 처치가 필요한지 판단할 수는 없다. 필요한 의료 지원은 오히려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면면히 이어지니 있는 듯하다. 촘촘하게, 끊임없이, 눈에 띄지 않게 거기 있다. 솟아남의 본디 얼굴이 이렇다.
5. 힘 안 드는 게 아니라, 마르지 않는 것
마지막 구절이다.
써도 다하지 않는다. (用之不堇)
堇은 ‘다할 진(盡)’과 통한다. 써도 다하지 않는다,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통행본에는 ‘용지불근(用之不勤)’, 곧 써도 힘이 들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우리 한자음으로는 둘 다 ‘근’이지만 글자는 하나가 다르고, 그 한 글자가 가리키는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백서의 ‘不堇’은 다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자 그대로 끝이 없음을 강조한다. 여항은 솟아남의 기제여서 영원히 솟아나고 마르는 법이 없다.
통행본의 ‘不勤’은 힘이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자 그대로 수월함을 강조한다. 애쓰지 않고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독법 모두 말은 되지만, 글자가 닿는 깊이가 다르다.
통행본의 ‘勤’은 이 장을 쓰는 요령이라는 맥으로 끌고 간다. 마치 노자가 무언가를 수월하게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읽힌다. 백서의 ‘堇’은 이 장을 솟아남의 기제라는 맥에 붙박아 둔다. 노자는 영원히 마르지 않고 돌아가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장 전체의 맥은 솟아남이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 솟아남은 멈추지 않는다.
‘현빈의 문’ — 솟아 나오는 입구.
‘면면히 이어지니 있는 듯하다’ — 솟아나는 방식. 촘촘하고 끊임없다.
‘써도 다하지 않는다’ — 솟아나는 기제. 마르지 않는다.
네 구절이 한 줄로 꿰어진다.
통행본의 ‘勤’은 이 맥의 마지막 구절에서 방향을 틀어 버린다. 그러면 장 전체가 조금 흩어져 읽힌다. 앞의 세 구절은 솟아남을 말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힘 안 들이고 쓰는 법’을 말하니 리듬이 끊기는 것이다. 백서의 ‘堇’은 이 맥을 끝까지 이어 간다.
솟아남은 왜 마르지 않을까? 가득 채워 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은 쓸수록 준다. 물을 한 통 받아 두면 한 바가지 뜰 때마다 한 바가지만큼 줄어든다. 그러나 여항은 그릇이 아니다. 여항은 과정이다. 착구 순환이 돌아가는 한 여항은 계속 솟아난다.
계곡은 내일도 물을 흘려보낼 것이다. 다음 어머니는 또 다음 생명을 낳을 것이다.
다하지 않는 것은 쌓아 둔 양이 많아서가 아니다. 애초에 쌓아 둔 무엇이 아니라 영원히 솟아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6.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더
6장은 4장을 다시 한번 펼쳐 보이는 장이다.
4장은 우물이라는 인공물의 이미지로 여항이 막을 수 없이 솟아난다고 말했다.
6장은 계곡과 어머니라는 생명 자체의 이미지로 같은 일을 말한다.
왜 한 번 더 말할까? 이미지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물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우물물은 사람이 땅을 파서 얻은 물이다. 그러니 읽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물은 결국 사람이 만든 물건이니, 써도 차지 않는다는 것도 인공물의 특성일 뿐인지 모른다고.
노자는 이미지를 계곡과 어머니의 몸으로 옮긴다. 둘 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생명 그 자체가 돌아가는 이치다. 6장까지 읽고 나면 ‘어쩌면 인공물의 특성일 뿐’이라며 물러설 자리가 더는 없다.
여항이 막을 수 없이 솟아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본디 모습이고, 생명의 본디 모습이다. 인공의 바깥에 있는 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원래 그렇게 돌아갈 뿐이다.
사실 6장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는다. 4장의 명제를 다른 이미지에 담아 한 번 더 할 뿐이다.
왜 그렇게 할까? 추상적인 명제는 한 번 읽으면 미끄러지듯 지나가 버리기 쉽다. 그런데 이미지를 바꿔 주면 읽는 사람이 새로 보게 된다.
아, 같은 이야기구나.
아, 다른 줄 알았던 저것도 같은 이야기구나.
아, 결국 모든 게 이 한 가지 이야기였구나.
도를 우물로 써도 이 이야기다.
도를 계곡으로 써도 이 이야기다.
도를 어머니의 몸으로 써도 이 이야기다.
6장을 다 읽을 즈음이면 읽는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규모에서 벌어지는 같은 일을 본 셈이다.
뒤의 장들도 이렇게 이어진다. 점점 더 많은 이미지로 같은 일을 다시 말한다. 말할 때마다 읽는 사람은 한 번 더 보게 된다. 보는 사람은 그것이 같은 일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알게 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비유를 잔뜩 만나고 지나간다.
노자는 힘주어 강조하지도, 설명하지도, 논증하지도 않는다. 서로 다른 이미지로 같은 일을 거듭 펼쳐 놓을 뿐이다.
면면히 이어지니, 있는 듯하다.
써도 다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