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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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10장 · 총 81장

몸과 넋을 하나로 품다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营魄抱一,能毋离乎?抟气致柔,能婴儿乎?修除玄览,能无疵乎?爱民治国,能毋以为乎?天门启阖,能为雌乎?明白四达,能毋以知乎?生之,畜之,生而弗有,长而弗宰也,是谓玄德。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우리가 하고 있을지 모를 두 가지 일

우리는 아마 모두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는 몸을 돌보는 일이다. 방법은 많다. 헬스장, 단백질 보충제, 스마트워치나 오우라 링으로 재는 심박과 수면과 HRV, 영양제, 간헐적 단식, 어쩌면 냉수 샤워까지.

다른 하나는 마음을 닦는 일이다. 이쪽도 방법이 많다. 명상 앱, 마음챙김 강좌, 심리 상담, 철학책 읽기. 환각제 마이크로도징까지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

두 일을 나란히 한다. 그런데 이 둘이 사실은 하나의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꼭 동시에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구조상 같은 일의 두 면이라는 말이다. 무협지에서 내공과 외공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

마음만 닦다 보면 진이 빠진다. 의식은 ‘맑아졌는데’ 몸은 지치고, 생활 리듬은 무너지고, 체력은 바닥이다. 마음 닦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 공중에 뜬 의식으로 끝나 버린다. 참선 모임이나 명상 커뮤니티, 마음공부 모임에서 아주 흔히 보는 일이다.

몸만 돌보다 보면 주체를 잃는다. 몸의 수치는 다 좋은데 사람은 ‘수치는 완벽하지만 텅 빈’ 상태가 된다. 그 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하드코어 바이오해커나 자기 정량화(퀀티파이드 셀프)에 몰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흔한 일이다.

노자는 10장을 열자마자 바로 이 이야기를 한다. 두 샛길이 왜 모두 안 되는지, 그리고 올바른 길은 무엇인지.

2. 영과 백

10장의 첫 구절이다.

영과 백을 하나로 품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營魄抱一,能毋離乎)

영(營)은 무엇인가? 혈기가 도는 층이다. 몸속의 피, 호흡, 체력, 먹고 마시는 것, 기력. 한 사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물리적 바탕이다.

백(魄)은 무엇인가? 정신이 자리 잡는 층이다. 의식, 품성, 생각, 알아차림, 주체의 자리에 선 자기. 영을 바탕으로 솟아난 의식의 주체이고, 우리말로 하면 넋에 가깝다.

영은 바탕이고, 백은 겉면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은 바탕층이고, 백은 창발층(創發層), 곧 바탕에서 솟아난 층이다.

이 책이 바탕층과 창발층이라는 짝을 구체적인 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가져온 대목이다. 1장이 이 짝을 세웠고, 2장은 여섯 쌍(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긺과 짧음……)으로 그것이 다른 규모에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여섯 쌍 가운데 어느 것도 곧바로 한 사람 안의 그 짝은 아니었다.

영과 백이 바로 그 짝이다.

몸은 바탕이고, 의식은 창발이다.

창발층을 받쳐 줄 바탕층이 없으면 공중에 뜬다. 마음만 닦고 몸은 돌보지 않을 때 진이 빠지는 까닭이다.
바탕층에 창발층이 없으면 껍데기일 뿐이다. 몸만 돌보고 마음은 닦지 않을 때 텅 비는 까닭이다.

포일(抱一)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는 하나를 품는다, 두 층을 하나로 감싸 한 덩어리로 유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두 층을 억지로 한데 묶는 것은 아니다. 두 층은 본래 끊김 없이 이어져 떨어진 적이 없는데, 그 실제를 따르는 것이다.

영과 백은 애초에 따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혈기가 돌고 의식이 솟아나는 것은 한 가지 일이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포일은 이 일이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는 것, 사람의 손으로 쪼개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다. 이 두 층이 갈라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3. 여섯 물음의 구조

이 물음이 이 장에 나오는 여섯 물음의 뼈대다.

노자는 이어서 ‘할 수 있는가’를 다섯 번 더 묻는다.

기를 모아 부드러움에 이르러, 갓난아이가 될 수 있는가?
현을 비추어 보는 눈을 닦아 내어, 티 하나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가 한다’에 기대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 암컷이 될 수 있는가?
환히 밝아 사방에 두루 통하면서, 앎을 앞세우지 않을 수 있는가?
(摶氣致柔,能嬰兒乎?修除玄覽,能無疵乎?愛民治國,能毋以爲乎?天門啓闔,能爲雌乎?明白四達,能毋以知乎?)

여섯 물음을 모두 합치면 하나의 구조가 된다.

첫째 물음은 두 층의 틀을 세운다. 둘째와 셋째 물음은 두 층을 저마다 조율한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물음은 두 층이 합쳐져 바깥의 세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조율한다.

하나씩 보자.

기를 모아 부드러움에 이르러, 갓난아이가 될 수 있는가. 영의 층을 조율하는 물음이다. 혈기를 갓난아이의 그 자리, 부드럽고 막힘없고 쌓인 긴장이나 굳은 데가 없는 자리로 되돌릴 수 있는가? 바탕층의 수행이다. 갓난아이는 비유가 아니다. 바탕층이 되돌아갈 수 있는 자리다.

현을 비추어 보는 눈을 닦아 내어, 티 하나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의 층을 조율하는 물음이다. 현람(玄覽)은 착구 순환(鑿構循環) 자체를 비추어 보는 일이다. 그렇게 비추어 보면서 거기에 구(構)를 걸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비추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 겹이 걸린다. ‘잘 보고 있나’ 생각하면 또 한 겹, ‘무엇을 보았나’ 생각하면 또 한 겹이 걸린다. 한 겹 걸릴 때마다 그것이 하나의 티(疵)다. 닦아 낸다는 것은 한 겹 걸릴 때마다 한 겹씩 걷어 내는 것이다. 창발층의 수행이다.

두 층이 저마다 제자리를 찾았으면, 이제 두 층이 합쳐져 바깥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본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가 한다’에 기대지 않을 수 있는가. 다스림의 층이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하되,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자리를 걸어 두지 않는다. 3장에서 말한 무위(無爲)는 바깥에서 본 것이었다. 동작이 식민화하지 않는다는 것. 이 물음은 안에서 본다. 속에 자기를 걸어 두지 않는다는 것.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 암컷이 될 수 있는가. 감응의 층이다. 하늘의 문은 몸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열림과 닫힘이다. 눈을 뜨고 감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생각이 일어나고 가라앉는다. 이런 열림과 닫힘은 저절로 일어날 뿐 의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암컷이 된다(爲雌)는 것은 받아 안는 자리에 선다는 말이다. ‘내가 연다’, ‘내가 닫는다’며 주체 노릇을 하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환히 밝아 사방에 두루 통하면서, 앎을 앞세우지 않을 수 있는가. 앎의 층이다. 앎이 최고치에 이르러 환히 밝고 사방에 두루 통하더라도, 그 앎을 식민화의 동작에 쓰지 않는다. ‘내가 안다’를 남을 덮어씌우는 명분으로 삼지 않는다.

여섯 물음을 합치면 이렇다.

영과 백을 하나로 품는다 — 두 층의 틀을 세운다.
기를 모아 부드러움에 이른다 — 바탕층(몸)을 조율한다.
현을 비추어 보는 눈을 닦아 낸다 — 창발층(의식)을 조율한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되 ‘내가 한다’에 기대지 않는다 — 두 층이 합쳐져 다스림에서 움직인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 암컷이 된다 — 두 층이 합쳐져 감응에서 움직인다.
환히 밝아 사방에 통하되 앎을 앞세우지 않는다 — 두 층이 합쳐져 앎에서 움직인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자기 점검표다.

앞의 아홉 장은 한 장에 한 면씩 수행론을 풀어 놓았다. 노자는 이 장에서 처음으로 그것들을 구체적인 한 주체 위에 모은다.

여섯 물음을 모두 통과하면, 곧 한 사람 전체가 바탕에서 창발까지, 그리고 바깥의 세 방향까지 어느 구에도 갇혀 굳어 버리지 않으면, 노자는 그 상태에 이름을 붙인다.

4. 현덕

낳고 기르되, 낳고도 가지지 않고, 키우고도 주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 한다. (生之,畜之,生而弗有,長而弗宰也,是謂玄德)

여섯 물음을 통과한 주체도 계속 움직인다. 낳아야 할 것은 낳고, 길러야 할 것은 기른다. 수행을 다 통과했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낳고도 가지지 않는다. 한 층이든, 하나의 구든, 작품이든, 사업이든, 관계든, 무언가를 낳고도 그것을 ‘내 것’으로 세우지 않는다.

키우고도 주재하지 않는다. 자라난 것에는 그것 나름의 흐름이 있고, 그 방향을 당신이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여섯 물음을 통과한 주체는 이렇게 움직인다. 일은 계속하지만, 주체가 ‘내가 했다’, ‘이건 내 것이다’에 걸려 있지 않다.

이것을 이렇게 부른다.

현덕(玄德).

현은 착구 순환 그 자체다(1장에서 세웠다). 덕은 개체의 여항(餘項)이다(역시 1장에서 세웠다).

현과 덕을 합치면, 착구 순환이 꿰뚫고 지나간 개체의 여항이 된다. 착(鑿)이 한 번 또 한 번 떨어지며 순환이 도는 동안 어느 한 바퀴에도 갇혀 굳지 않고, 오히려 바퀴가 돌 때마다 새로운 자리로 솟아나는 상태다.

개체의 여항이 착구 순환 안에서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다시 말하면,

현덕은 한 개인이 주체로서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추상적인 미덕 개념이 아니다. 여섯 물음을 통과한 뒤 이 구체적인 주체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의 여항은 바퀴가 돌 때마다 새 자리로 솟아나고, 어느 한 곳도 구에 갇혀 굳지 않는다.

5. 한 구절이 더 있으면 어떻게 읽힐까

이 글의 백서 정리본은 여기서 ‘낳고도 가지지 않고, 키우고도 주재하지 않는다(生而弗有,長而弗宰)’고 한다. 널리 읽히는 통행본에는 그 사이에 ‘하고도 기대지 않는다(爲而不恃)’가 들어간다. 나란히 놓으면 한 구절이 더 있다.

비슷한 구절은 통행본 2장에도 나온다. 하지만 문구가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주석가가 옮겨 왔다고 입증할 수는 없고, 그 속마음은 더더욱 알 수 없다. 문헌의 전승 관계에는 다른 증거가 필요하다.

여기서 살필 것은 두 문구가 독자의 눈길을 어디로 이끄는지이지, 옛 편집자의 마음속이 아니다.

세 구절을 붙이면 남을 돌볼 때의 세 가지 당부로 읽기 쉽다.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무언가 해 주어도 공을 차지하지 않으며, 자라도록 도와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당부는 소중하다. 다만 10장의 앞선 여섯 물음은 그 한 방향보다 범위가 넓다.

몸과 의식에서 시작해 부드러움과 관조를 거쳐 다스림, 감각, 앎으로 간다. 마지막을 남을 어떻게 함육할 것인가로만 맺으면 나머지 층위는 옆으로 밀릴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현덕이 여섯 물음 전체를 받아 내도록 읽는다. 함육은 현덕이 남을 향해 드러나는 모습이지 그 전부는 아니다.

좋은 구절 하나가 더 있으면 무조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익숙한 틀이 이 장의 끝을 미리 정해 버리지 않는지 묻는 것이다.

같은 좋은 말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보이는 범위를 바꾼다. 물론 세 구절을 모두 남기고도 여섯 물음의 넓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 길을 닫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 해석이 말하는 ‘패치’는 그런 가능성이다. 그럴듯한 덧붙임이 낯설고 넓은 것을 우리가 이미 할 줄 아는 말 안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이것은 독서 효과에 대한 판단이지 입증된 개정사가 아니다. 모든 주석가의 동기가 같았다는 주장도 아니다. 이미 아는 이야기로 만들기 전에 이 장을 조금 더 들어 보자는 것이다.

6. 현덕은 함육보다 넓다

현덕은 함육보다 넓다.

함육은 무엇인가? 남을 향한 방향의 수행이다. 함육받는 사람이 스스로 자라나게 하고, 자리를 내어 주고, 식민화하지 않는다.

현덕은 무엇인가? 여섯 물음을 통과한 전체다. 바탕층, 창발층, 다스림, 감응, 앎. 이 다섯 면이 합쳐져 어디서도 구에 갇혀 굳지 않는 상태다.

함육은 현덕이 넷째 물음, 곧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되 ‘내가 한다’에 기대지 않는 그 한 면에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현덕을 지닌 사람은 함육하는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함육하는 사람이기만 할 필요는 없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일을 하고, 느끼고, 알고. 그 모든 동작에서 ‘나’를 동작 위에 걸어 두지만 않는다면.

이것이 한 개인이 주체로서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10장을 읽고 나서 앞의 아홉 장을 돌아보면, 그 한 장 한 장이 현덕의 한 면씩을 풀어 놓은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2장은 함육을 말했다. 현덕의 남을 향한 방향이다.
3장은 다스림을 말했다. 현덕을 나라 다스리는 데 쓴 모습이다.
5장은 기본값을 내려놓기를 말했다. 현덕이 말의 뜻을 다루는 수행이다.
7장은 스스로 살려 하지 않음을 말했다. 현덕이 자기에게 구를 세우지 않는 일이다.
8장은 물을 말했다. 현덕을 물리에 빗댄 것이다.

아홉 장에 걸쳐 나누어 풀어 놓은 수행이 10장에 와서 하나의 온전한 주체의 품성으로 합쳐진다.

이어지는 Paper 2의 여덟 장, 곧 11장부터 18장까지는 모두 이 주체의 품성에서 바깥으로 펼쳐진다.

11장은 비움과 있음을 말한다. 12장은 배를 위함을, 13장은 몸을 귀하게 여김을, 14장은 도를 붙듦을 말한다. 15장은 여섯 물음을 통과한 주체의 초상을 그린다. 16장은 두 갈래 길을, 17장은 함육하는 사람의 네 등급을 말한다. 18장은 이 주체가 언제 무너지는지를 말한다.

10장은 이 책의 등뼈에서 한 마디를 이룬다.

모든 수행을 구체적인 한 사람 위에 모은다.

‘할 수 있는가’를 여섯 번 묻는다.

이 사람이 그 물음을 모두 통과하면, 그것을 현덕이라 부른다.